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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 열한 살의 한잘라: 팔레스타인의 양심 나지 알 알리 카툰집
나지 알 알리 그림|조 사코 서문|강주헌 옮김|시대의창

'열한 살의 한잘라'라는 팔레스타인 만화가의 카툰집이 나왔습니다. 1936년 태어나 1948년 나크바 때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난 나지 알 알리는 레바논, 쿠웨이트, 영국을 오가며 팔레스타인에 관련된 카툰을 그려왔습니다.

주인공(?) '한잘라'는 그의 모든 카툰에 등장하는 뒤돌아서있는 허름한 차림의 소년의 이름입니다. 한잘라는 아마도 알리의 분신이겠죠. 비슷한 나이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의 마음은 성장을 멈춘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학살, 미국의 사기와 협잡, 중동 지배자들의 위선을 놓치지 않고 직시합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슬림의 편협한 시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중동의 지배자들처럼 위선적인 타협을 선호하지도 않습니다. 열한 살 한잘라의 눈에는 레바논 기독교인의 아픔도 함께 담기곤 합니다. 그와 민족의 고통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고통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그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의 잔인함과 욕심을 비난하는 데 촛점을 맞추면서도 중동 지배자들의 비열한 태도에 대한 비판을 놓치 않습니다. 1987년 그를 암살한 범인의 배후로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의 여러 나라들도 꼽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만화 '팔레스타인'으로 잘 알려진 조 사코가 서문을 썼습니다. 각 장과 카툰마다 간략한 해설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카툰이 그리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원혜진이 연재하고 있는 만화 '아! 팔레스타인'(링크)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_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글|폴리테이아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은 최장집 교수가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으고 보충해 낸 책입니다. 잘 안알려져 있지만 최장집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은 '노동'문제였습니다. 민주주의에 관한 그의 학문적 여정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셈이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방문했을 때 그는 30년 전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방문했던 영등포 공단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현대차 노조 사무실 앞에는 회사 관계자인지, 경찰인지 모를 인물들이 진을 치고 노조 사무실 방문자들을 상시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30년 전 '빨갱이' 색출을 위해 공단 입구에서 감시의 눈길을 돌리지 않던 군사독재 정권의 모습과 겹칩니다. 지난 30여년간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에게 민주주의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최장집 교수의 관심과 주장의 핵심을 짚어줍니다. 책 제목에서 직설적으로 말하 듯 노동이 배제된 민주주의는 더 많은 상처를 안겨줄 뿐이라는 겁니다. 그 자체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도 고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는 복지를 시혜가 아닌 사회적 권리로서 바라볼 것을 주장합니다. 즉 혜택을 받는 이들을 무기력한 상태로 놓아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그 권리를 요구하고 설계하고 시행할 민주적 권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새로운 이론에만 눈을 희번덕 거리며 몰려다니는 요즘 세태와 달리 하나의 주제를 뚝심있게 탐구하는 노학자의 자세가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출판사에서 있었던 저자와의 대화에 나온 최장집 교수는 칠순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생동감 넘치는 눈빛과 지치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 3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이 책은 본격적인 이론을 펼치진 않습니다. 현대차 노동자, 건설노동자, 이주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소규모 봉제공장 노동자 등을 만나며 떠오른 화두를 제시한 책일 뿐이죠. 따라서 그가 말하는 '노동'은 아직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정의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에서도 드러나듯 영세 자영업 '사장님'도, 농민도 '노동'이라는 범주로 얘기됩니다. 하지만 이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많은 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176쪽이지만 판형이 작고 글자가 커 쉬엄쉬엄 읽어도 두 시간이면 다 읽을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진 화두를 고민하기에 두 시간은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Posted by 때때로

투표권에 대한 작은 논란을 목격했습니다. 이건 약간의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긴 합니다. 진보신당 지지자들에게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참 고역스러운 일입니다. 차라리 '사표' 논란이 나았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후보도 내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보신당 지지자가 이번 선거에서 '선택'은 그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작은 논란에서 우려가 되는 것은 투표를 독려하는 이들이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고통'을 몰라줘서가 아닙니다. '투표'를 '권리'로서가 아니라 '의무'로서 도덕률로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니다. 이와 관련해 제가 자주 가는 게시판에 틈틈이 쓴 글을 여기에 옮깁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율의 저하는 민주적 정치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투표로 상징되는 정치적 참여가 위축될 수록 사회의 공적 문제에 대한 개인들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죠.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미국 흑인사회입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흑인들은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안철수의 편지가 화제죠. 하지만 그는 사례를 잘못 들었습니다. 흑인 투표권 확보를 위한 60년대 프리 라이더(한국의 희망버스) 운동이 더욱 적절한 사례입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 민주주의 정치에서 투표율 저하의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해온 이는 최장집 교수일 겁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이 투표율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제기한적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회적 균열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는 협애한 선거 대안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강조합니다. 즉, 이념적ㆍ실천적 차이가 미미한 보수 중심의 정당 체제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죠. 이러한 정당 체제는 기본적으로 노동에 대한 배제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투표권의 문제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게 늘기 시작했습니다. 투표는 자신의 정치적 존엄을 지키고 사회의 공적 사안에서 개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권리지 의무가 아닙니다. 게다가 투표권은 정치적 참여의 일종입니다. 참여는 개인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뜻합니다. 능동적 활동이 아닌 의무로서, 수동화된 활동의 투표권은 그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투표권 자체는 '민주주의'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독재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이 여전히 25.7%의 지지를 받고 있는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김규항으로부터 비롯하고 진보신당의 지지자 다수가 투표를 포기하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더구나 자신들이 원하는 진정한 선거 대안을 만들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이다 실패를 한 진보신당 지지자들에게 현재의 투표는 그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의 한 표를 사소히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박원순에게 흔쾌히 한 표를 던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 박원순에게 표를 던지고 왔습니다. 위에서 잠깐 적었 듯이 투표는 정치 참여의 여러 방편 중 하나일 뿐 그것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하진 않겠지만 곽노현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선거와 투표가 우리의 궁극적 대안일 수 없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늘 프레시안에 좋은 글이 있더군요.

이 운동[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은 태동하기까지 3년이 지연됐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2001년 정부가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기 전부터 있었던 경제적 불만과 디폴트 위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반면 미국 경제는 3년 전에 붕괴됐고, 당시에도 몇몇 분노한 이들이 있었지만 실제 반응은 미뤄졌거나 다른 방식으로 유인되었습니다. 당시 분노는 사실 우리를 위해 상황을 시정할 수 있는 대선 후보에 집중하는 강력한 풀뿌리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름다운 운동이었고, 희망에 가득 찬 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은 자신들의 후보를 백악관으로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떠나버렸습니다.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 운동은 기업과 싸워 기후변화 정책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운동은 한 명의 선출 공직자가 1000만 명의 시민, 또는 시민 사회 자체와 동등하다는 듯이 스스로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그 운동은 나이와 인종을 초월했었습니다. 저는 이 운동이 정치가와 선거에 대한 환멸을 느낀 다음 망가져 버린 제도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을 점령하는 것에 대한 편지', 레베카 솔니트, 프레시안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을 방문한 지젝은 지금껏 기다려오던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노 요코는 존 레논의 노래를 빌어 운동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영웅이라고 주장했죠. 소수의 공직자ㆍ정치인을 우리의 대표자로 뽑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언제나 더 큰 변화는 거리에서, 공장에서, 집에서 시작되고 끝났습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이 시작되기 전, 부자들을 위한 공화당의 패악질과 그에 무능력한 민주당에 대한 분노가 확산되기 전 오바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선거와 투표라는 민주주의의 '정상적' 절차는 오직 그 체계가 만들어진 이후 위기에 처하기 직전까지만 기능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상적 상황에서조차 99% 인민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한 명의 뛰어난 정치인이 아니라 99%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전, 이 한표의 권한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히, 그때 그때마다 가장 덜 나쁘거나, 그나마 가장 괜찮은 후보에게 던지면 된다고 봅니다.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의 후보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에게 표를 던지겠죠.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건 또 아니지 않습니까? 3년 전 오바마의 선거 열풍을 바라본 미국 좌파의 심정이 얼추 이럴 듯 싶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다시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 '투표 안할 자유'를 비웃는 이들은 자신의 비웃음이 민주주의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고민해봐야 할 겁니다. 많은 이들이 흔히 놓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발성을 유도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옹호했던 이들은 시민 개개인이 공적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게끔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옹호자는 계몽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도덕률로서 투표를 강조하는 것, 특히 '닥치고' 투표하라는 것은 이에 전적으로 반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이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는 개인의 수동성을 확대한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좀먹는 짓꺼리입니다.

생각난김에... '닥치고 정치'라니. 말이 됩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무엇보다 말과 글의, 설득의 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말들이, 더 많은 글들이 우리의 공적 생활에 대해 다뤄야 합니다. 그럼에도 '닥치고 정치'라니? 애시당초 김어준을 싫어하기에 이 책을 읽을 생각은 없습니다. 게다가 저런 제목 센스를 용인하는 김어준에게서 민주주의에 대해 배울 것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Posted by 때때로

<2007년 11월 12일 DVDPrime '책 이야기' 게시판 작성>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1. 한때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말이었죠. 조금더 자란 어느 시기에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독재'의 반대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한 소수 직업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한 쟁투의 대상으로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1987년 우리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 정부를 수립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기본 권리인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누리고, 건강하고 기쁘게 일하고 자녀를 교육하고 문학적 혜택을 힘껏 누릴 수 있는 생존권이 보장된 사회를 만듭시다. … 함께 누릴 빛나는 새 세상이 목전에 임박하였습니다."
- 민주헌법쟁추국민운동본부(국본)의 성명서 中

해방 후 미 군정에 의해 민주주의가 이식된 한국은 다른 여러나라들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매우 쉽게 '보통선거'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칙을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로 채택할 수 있었죠. 그러나 한국의 민중은 분단과 냉전, 한국전쟁의 기간에 공식 정치 영역에서 좌익은 배제되고 축출돼 보수 여당과 보수 야당이라는 매우 협애한 정당체제의 선택지밖에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조차도 불법ㆍ부정 선거로 퇴색됐고 박정희의 군부 쿠데타 이후 기본적인 자유권은 억압당하기에 이르렀죠.

군부 정권 시기의 급속한 산업화는 여러 조건이 필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노동기본권에 대한 초억압적 조처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재벌에 대한 혜택과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각종 권리에 대한 부정이 80년대까지 한국 사회를 특징지어 왔습니다. 민중들은 교육을 통한 개인적 계급 상승을 통해서만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적 권리와 생존권적 권리의 요구가 함께 집단화되어 표출된 사건으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습니다. 물론 김영삼ㆍ김대중ㆍ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당시 민주화 세력의 집권은 한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약화시켰고 사회 전반에서의 민주주의적 의식의 성숙과 인권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확산은 한국 사회를 많은 부분 '민주화'시켜 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정한 정치체제 속에서 항상 어떻게 하면 '차악'을 선택할 것인가만 고민하는데 개인 정치 행위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사회적으로 하층 노동계급의 기본적 권리는 쉽게 유린당하기 일수며 집회와 결사의 자유 또한 완전하다고 볼 수 없을 뿐더러 최근 후퇴하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명박과 같은 보수 정치인이 개인적 흠결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고 있고 퇴물 정치인인 이회창이 정계복귀를 하자마자 지지율 2위를 기록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기업들의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은 확대되고 있지만 서민들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정치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2. 이 모든 문제들을 우리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요? 현재의 정치개혁론의 주류적 방향에서 보자면 주된 해결 방안으로 '원내정당화' '정책정당화' '법치 민주주의' 등이 떠오르고 있고 그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 이러한 주류적 접근법에 반대하는 세 사람의 책이 있습니다.


어떤 민주주의인가 최장집ㆍ박찬표ㆍ박상훈|후마니타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서 선거와 투표를 통한 다수결의 원칙이 항상 옳은 결과만을 가져오진 않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이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출발점은 바로 여기죠. "여기에서 인민 다수의 결정이 공동체의 전체 이익을 위해 합리적 결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근본적 문제"(어떤 민주주의인가, 65p)입니다.

플라톤이 비판한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는 노예와 여성을 배제한 성인 남성 시민들만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현대사회보다 단일한 사회적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민주주의 정치체제였죠. 그러했음에도 사회적 갈등과 균열은 다수에 의한 결정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으로 귀결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곤 했죠. 현대사회는 고대 아테네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구와 다양한 사회적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사회적 균열과 갈등의 구조도 더욱 고도화 됐고 때론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내세우는 것은 대체적으로 전체주의나 파시즘적 흐름을 만들곤 합니다.

따라서 선거ㆍ투표에 의해 정기적으로 부정될 수 있는 합법적인 다수의 독점적 지배체제로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사회는 전혀 동질적이지 않으며, 갈등이나 균열이 언제나 곳곳에 존재한다. 민주 정치란 이런 갈등적 이슈들을 민주주의 제도의 틀 안에서 해결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어떤 민주주의인가, 12p

우리는 신문의 국제면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최소 몇 10만에서 100만 명 이상 참가한 파업 소식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국가들에서 정권이 무너졌거나 쿠데타 혹은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기대하진 않죠. 그러나 2차대전 이후(또는 구 소련의 해체 이후)의 신생 국가들에선 겨우 몇 천명에서 몇 만명이 파업과 시위를 벌였음에도 정권이 무너지고 쿠데타가 일어나고 내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계급ㆍ계층ㆍ인종 등에 의한 사회적 균열은 어느 국가에나 똑같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균열에 대처하는 정치체제의 문제인 것이죠. 집단적 갈등이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못할 때 더 큰 갈등과 충돌, 사회 전체의 붕괴를 가져오곤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더이상 선택의 문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사회 전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 있죠.


3. 민주주의는 하나의 모습만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초기 명사들에 의한 과두독점적 지배체제도 민주주의(엘리트 민주주의)이고 대다수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한 흑인들이 선거과정 자체에서 배제되는 미국식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단호히 이러한 민주주의를 배격합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주장합니다.

"시민사회와 시장에서 강자의 위치에 있는 특수 이익들은 기본적으로 갈등을 사적인 영역의 일로 만들고자 한다. 사적 영역에서 그들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는 갈등을 사회화하는 힘이며, 그 중심 메커니즘은 정당이다. 갈등의 사회화란, 사회적 자원이나 가치의 분배ㆍ재분배와 관련된 갈등적 이슈를 그 사회의 공적인 의제로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적 이해관계를 표출ㆍ집약ㆍ대표하는 정당의 기능, 그것이 곧 갈등의 사회화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균열과 갈등을 동원하는 정당의 기능이 약화될 때 그 결과는 민주주의의 보수화가 될 것이다. 이는 이 책이 지향하는 정당 개혁의 방향과 정반대의 것이 아닐 수 없다."
- 어떤 민주주의인가, 263p

그동안 우리에게 정당은 부패한 정치의 핵심고리이고 퇴행적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정치 모리배들의 집단으로만 비춰왔습니다. 당연히 정치개혁의 방향으로 정당의 '정책 전문가 집단화' '원내 정당화' 등이 추진돼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러한 해결책이 대증요법이며 문제의 원인을 잘못 바라보고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화와 퇴행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김영삼ㆍ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 모두 집권 후 정당을 우회해 직접 대중과 관계를 맺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집권 후반기 여당으로부터의 탈당 혹은 '당정분리'의 강조). 대중과 가까이 가려는 모습 자체를 부정할 순 없죠. 정당을 우회하려 할 때 대통령은 위임받은 통치권자에서 시혜자로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사회적 균열에 기초한 국민의 일부분으로서의 정당의 정책 집행보다는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려는 모습으로서 나타나고 이는 때때로 이들 민주화 세력 출신 대통령이 권위주의를 약화시켜 왔다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전 권위주의 시기 대통령의 모습을 띄게 만들곤 합니다. 즉 위임받은 5년간은 "국민이 노무현식으로 해 보라고 뽑아준 것 아니냐"는 식의 태도를 갖게 만듭니다. 이는 민주주의가 2500여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핵심 덕목으로서 '자체 수정 능력'을 무시하는 처사일 뿐입니다. 애초에 총선에 두번 이상 연속성을 지닌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한 차례 밖에 할 수 없는 대통령을 국민이 '심판'할 수 있는 '회고적 투표'는 불가능하고 이는 민주주의에서 '책임'의 문제를 실종케 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40여일 남은 상황에서 이회창이 무소속으로 대통령 출마해 지지율 2위를 기록하고 있고 정동영과 이인제가 통합신당과 민주당의 당대당 통합을 합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올해 초의 개헌 논란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헌에 반대하는 말은 많았음에도 개헌의 핵심 내용이 대통령ㆍ국회의원 임기의 일치를 통해 대통령 권력의 강화에 있다는 점을 비판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국회의원들의 개망나니 행태에 대해 욕은 많이 하지만 정작 국회의원이 뭔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헌법에서 3권 분립을 통한 수평적 견제와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대통령 권력이 압도적으로 강한게 현실입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론은 그렇지 않아도 강한 대통령 권력을 더욱 강화하자는 것이었지요. (대통령 권력의 강화가 꼭 권위주의의 강화를 뜻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선 선택 가능한 대안 중 하나겠지요.)

문제는 의회권력의 약화와 정당의 탈 정치화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해관계가 공식 정치에서 반영될 가능성을 낮추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이 아주 투철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철학 시험으로 대통령을 뽑는게 낫겠지요.

가뜩이나 정치에서 정당이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정책 전문가 집단화는 정당의 사회적 대표의 기능이 약화되며 일부 엘리트 집단에 정치적 결정을 의지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정치 개혁'이 가져온 중간 계층 엘리트들의 정치 참여는 그 모델로 삼은 미국에서도 나타나듯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공식 정치에 반영되는 비율을 더욱 낮추고 있죠. 이는 노무현 정부가 삼성경제연구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론에서 동북아 중심 국가론, 신성장 동력 개발론, 혁신 주도형 경제론, 산업 클러스터론 등의 개념도 모두 이들(삼성경제연구소와 재벌기업 연구소들)의 보고서를 통해 발전되었다. …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긴밀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정부 조직의 혁신을 기한다는 이유로 공무원들을 삼성인력개발연구원에서 연수를 받게 한 일이다. 맨 처음은 2004년 9월 국무총리실 과장급 이상 105명 … 같은 해 12월에는 통일부 과장급 이상 간부 99명, 이듬해 1월에는 기획예산처 4급 이상 70명 … 2월에는 외교통상부 혁신기회고간 15명 … 4월에는 공정거래위원회 과장급 이상 간부 60여 명, 금융감독위원회 국실장급 간부 50여 명, 기획예산처 서기관 이하 직원 250명 … 5월에는 재경부 부총리를 비롯한 3급 이상 국장급 간부와 주무과장 …"
- 어떤 민주주의인가, 316p

이 책은 10월 29일에 나왔습니다만 이 글을 읽는 순간 지금의 삼성 비자금 논란이 딱 생각 나더군요. 현재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여러 분석과 진단, 그에따른 대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최근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노학자 최장집 교수가 대표 저자로 참여한 이 책은 그 여러 대안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입니다. 민주주의의 진전과 사회적 약자의 삶이 진전되길 바라는 분이라면 이 책을 통해 실천적 고민에 실질적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짧은 글로 제가 소개한 내용보다 더 많은 내용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당장에 읽기 어렵다면 책의 첫 부분 최장집 교수의 인터뷰편만 봐도 많은 영감을 받을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구절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치가 갖는 위대함이란 법이나 경제처럼 제도나 체계에 의해 지배되기보다, 혹은 추상적인 이론에 의해 계도되기보다, 그것을 초월하여 불확정적인 사회적 힘을 조직할 수 있는 실천적 능력에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제2의 민주화 운동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앞서 개척할 선도적 지도부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어떤 민주주의인가, 322-323pp



※ 마치려고 했는데 책 소개를 자세히 못했네요.

- 이 책의 문제의식은 민주화 이후 민주화 세력이 10년 이상 집권했음에도 민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환멸이 커져가고 있고 정치적 영역에서도 민주주의의 진전이 답보되고 있거나 퇴행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최장집 교수님이 최근 이어온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 먼저 이 사회는 여러 집단적 갈등과 균열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갈등의 조절 모델을 정당 민주주의에서 찾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 경로 자체가 대중정당의 발전과 함께 해왔고 대중정당은 사회적 강자가 아닌 약자, 노동자 계급에 의해 발전해 왔습니다.

-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선 유일한 강점인 '수'(부자보단 가난한 사람이 더 많기 마련이죠.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는 노동자 계급이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요)를 이용해 정치과정에 집단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과정의 연결고리가 정당입니다.

- 한국 사회에서 정당은 그 시작부터 매우 협애한 이념적 기초로 대중에게 사회경제적이념에서 차이가 있는 선택지로서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권위주의 시기 보수 야당조차도 경쟁적 정당체제에 포함되지 못한 상황에서 87년 민주화는 경쟁적 정당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협애한 보수적 이념체계 내의 정당체제는 변화시키지 못했죠.

- 이는 정당의 사회적 기반을 매우 약화시켜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정당과 대중운동과의 연계는 매우 약해 한국 정치는 보수적 정치와 급진적 운동이라는 두 계기의 이중고리를 형성하게 됐죠. 이러한 상황은 보수 정당 내에서의 이념적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고(사회경제적 기반이 다른 이념적 갈등이 아닌) 이는 파당끼리의 다툼에 대한 대중적 환멸을 불러 공식 정치와 대중 운동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지게 됐고 당연히 공식 정치에서 하위 계층의 이해가 의제화 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왔죠. 더불어 보수적 정당들끼리의 쟁투는 대중들의 선택에서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즉 지역주의는 결과지 원인이 아니라는 얘기죠).

- 이러한 현실 정치의 문제를 정책 정당화, 정치의 사법화, 국민 경선제, 원내 정당화(중앙당 축소와 지구당 폐지) 등의 방법으로 해결코자 하는게 현재의 정치개혁 방향인데, 이러한 방법은 그 모델이라고 할 미국에서조차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하위 계급 또는 계층의 참여를 축소 시켰고 공식 정치에서 사회적 강자들과 이익 집단 중심의 정책과 실천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편 이러한 정책 전문가 집단으로서 원내 정당화의 주된 근거로 드는 탈물질적 사회로의 이행으로 인한 사회적 균열이 다양화되고 계급ㆍ계층간의 간격이 줄고 이동이 늘었다는 주장은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결과를 봐도 결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 따라서 여전히 계급ㆍ계층에 기반한 대중 정당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대안으로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에서 중요한 두 축(위임과 책임) 중 하나인 책임의 문제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함입니다.

- 대표 저자인 최장집을 비롯한 저자들은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은 보여주지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의 '계급문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얘기하는 대중 정당도 능동적 대중으로서 활동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대중 정당이라기보단 수동화된 당원이 당내ㆍ외 정치 과정에서 선거ㆍ투표를 통해 참여하는 정당일 뿐입니다.

- 여기서 문제는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 역사의 초기를 보면 매우 급진적인 대중적 동원을 통해 능동적 당원을 충원하고 사회적 지지기반을 구성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장집과 저자들은 대중 운동과 정당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적은 부분만 할애하고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제 생각엔 기존 좌익 운동 내에서의 비정치적 경향(이 책에서 지적하는)도 문제지만 동원 형태의 운동에 대한 경시도 마찬가지로 문제로 보입니다. 문제는 대중적 동원을 가능케 하는 운동의 힘을 어떻게 조직된 정당을 구성, 일상적 시기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겠죠 .

Posted by 때때로

생각의나무에서 의욕적으로 펴내고 있는 問라이브러리의 세 번째 책은 최장집 교수의 '한국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입니다. 은퇴를 전후해서도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며 한국 민주주의에 있어 협애한 이념적 기반의 정당체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최 교수는 올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촛불시위를 경험하면서 한층 더 깊어지 통찰력을 이 책에서 보여줍니다. 급하게 준비된 느낌이 역력한 이 책은 문장과 논지의 전개에 있어서 최 교수의 이전 책들보다 덜 다듬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87년 6월 항쟁과 비견될만한 촛불시위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지를 짧지만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10월 11일, 6월과 7월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사람이지만 수천 명의 무장한 전투경찰의 위협과 보수 언론들의 데마고기를 고려한다면 매우 의미있는 수의 사람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을 다시 밝혔습니다. 촛불 시즌2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최장집|생각의나무|問라이브러리 003


민중과 시민-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두 개의 다른 방법

그러나 이러한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화된 정치환경에서 민주화라는 하나의 단일목표를 통한 최대연대는 자동적으로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그 행동원리는 급진적으로 달라진다. 여기서는 평화적 선거를 통한 다수표 획득을 위한 경쟁이 기본원리가 된다. 어떻게 최대다수연합을 유지할 것인가? 이제 문제는 민주화투쟁을 주도했던 민중동맹이 민주화된 이후에는 그 단일성과 일체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민주화최대동맹은 ㅁ니주화된 이후까지 단일동맹을 유지한다는 암묵적 연대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는 완전히 열려있는 문제이다. 최대동맹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사회경제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 계층적 이익에 따라, 북한문제를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문화적 가치에 따라, 출신지역과 지방의 배경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에 따라, 수많은 요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실제 대중들의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계층적 지위와 역할에 따른 이해관계의 차이라는 요인이 작용한 결과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갈등이라고 말하며, 민주주의는 간단히 정의해서 갈등과 그 타협에 기초한 정치체제이다. 갈등을 어떻게 조직하고, 어떤 정당과 정당체제를 통해 이를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이들이 어떻게 선거경쟁의 대립 내지 경쟁축을 형성하는가 하는 문제가 민주주의 정치의 성격과 그 방향을 결정짓는 데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26~27pp.

[운동권의 반정당적 태도의] 두 번째 요인은 민주화가 혁명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의 권력구조와 정당을 제도화하는 데 있어 대체로 구체제의 내용을 승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정당과 정당체제뿐만 아니라 주요 정치인들까지 구권위주의체제와 뚜렷한 연속성을 보였으며, 차이는 이들이 참여하는 게임의 규칙이 민주적으로 변했다는 점에 국한되었다. 기존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정치공간을 선점하였기에 변화를 주도한 중심세력의 제도권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이는 새로운 정치적 가치와 개혁목표를 가진 운동권세대들이 주도적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극히 제한적이고 개별적이고 부분적이었으며, 그들이 대면했던 정치체제, 정당체제, 선거제도는 구체제로부터 지속된 것이기에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부분이 많았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정치제도와 정치질서는 개혁의 중심대상으로 부상했고, 그 개혁의 가치와 기준에는 이들 새로이 유입된 운동권적인 요소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내용은 그들의 도덕주의적 정치관을 토대로 정치에 있어 투명성, 효율성, 그리고 전문성의 가치를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38~39pp.

한국의 노동ㆍ복지 개념은 여전히 전자(물질적 급부)의 경우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근본가치로서의 시민권 개념이 아니라, 한국의 조선조로부터 권위주의 시기에 이르는, 그리고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또는 영국의 14~17세기 초 구빈법의 정신이 되는 빈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구제의 가치관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양극화를 말하고 사회복지를 말하고 약자에 대한 보호를 말할 때, 말하는 자는 언제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를 온정을 베푸는 자혜로운 엘리트로 생각한다. 민주적 시민이 문제를 보는 방식은, 보편적 가치를 향유해야 할 사람들 스스로가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관점에 바탕을 둔다.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이들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시민적 민주주의관이 저절로 획득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이 필요하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은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하고 이를 학습하는 교육과 실천의 기회를 넓히는 일이며 이를 위한 제도개혁이라고 하겠다.
54~55pp.


정치적 민주화-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에서 민주화는 해방 이후 오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구축해놓은 기존 질서의 조건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민주주의 제도와 규칙을 민주화 이전의 구체제에 부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제도권 밖에 위치했던 민주화운동 세력과 그들의 대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정치에 참여함은 물론 그 요구들이 민주주의체제 내로 일정하게 수용되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구체제에서 성장한 기득이익 세력과 이에 비판적인 민주화운동 세력을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제도적 틀 속에 함께 위치시키는 것으로, 두 세력들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제도화된 정치의 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혁명의 형태가 아닌 그 어떤 민주화도 이러한 경로를 피할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의 내용적 발전이든 진보든 이 틀 안에서 경쟁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여러 갈등과 균열이 정치적으로 대표되고, 조직될 수 있는, 즉 이들 다양한 갈등과 이익을 정치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정당/정당체제의 제도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주주의제도 가운데서 정당을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심적인 집단적 행위자라 말하는 이유는, 정당이야말로 정치의 틀 안에서 사회의 주요 갈등과 균열을 대변하고 조직하는 가장 중요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60~61pp.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특히 국제금융위기의 효과와 더불어 가속화되는 상황과 민주화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동안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사회화 및 교육되고, 경제정책 뿐만 아니라 문화교육정책을 비롯한 주요 영역에서의 정책의 기조로 수용되고 추진됐다.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의 긍정적, 부정적 효과를 포함하여 이를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수준에서 민주주의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 문제에 관련하여 정치학자 필립 쉬미터-테리 칼의 말을 들어본다. 신자유주의의 이념형적 극대화는 자율적 시장을 중심으로 한 사익의 극대화라 하겠고, 그 다른 반대의 극에는 사적 재산권과 시장의 기능이 국가의 개입에 의해 극도로 축소된 공적 영역 중심의 사회주의적 체제가 있는 것으로 상정해볼 수 있다. 그러할 때 사익의 극대화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한 극단의 조건에서는, 공익을 실현할 수 있는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 최소화되고 시장자유화의 실현이 극대화된다. 다른 한편의 극에서는 공익이 극대화되는 어떤 조건, 여기에서는 국가의 역할과 아울러 공적 영역이 극대화되고, 사적 시장영역의 최소화와 더불어 재산권을 포함하는 사적 이익의 추구도 어려워진다. 전자를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이 완벽하게 실현된 상황, 그러므로 집합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정당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해체하는 상황이라 할 때, 후자는 사회주의적 상황으로서 개인적 선호를 만족시키고 정당치 못한 정부행위를 제한할 기초를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초점은, 그 어느 쪽이든 양극에 가까이 갈수록 민주주의의 존립기반이 약화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이 양극의 중간지점 어딘가에서 적절한 기반을 가질 때만이 존립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주화 이후 한국의 상황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해게모니에 있어서나 정부정책의 이념적 기반에 있어서나 신자유주의적 극을 향하여 내달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가치는 약화되고, 그 사회적 기반이 크게 위축된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75~76pp.


이명박 정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나?

[대선 투표 결과를 국민들의 우경화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 이러한 해석이 간과하는 것은 투표자의 관점에서 선택의 구조가 되는 정당체제와 경쟁을 구성하는 후보들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특정의 구조를 상정한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난 결과에 불과하거나 투표의 집합적 결과만을 두고 편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투표자들은 자신들의 선호에 맞게 자유롭게 정당과 후보를 선택지에 포함시켜 투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틀(Format)을 형성하는 주어진 정당들과 그 후보들 사이에서만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유권자는 주어진 것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같은 상대적 선택마저도 어려운 경웅 그들은 선택을 거부하고 기권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기권에는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에서 비롯된 소극적인 것도 있겠지만, 주어진 선택의 구조로서의 정당체제를 거부하는 적극적 기권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비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유례없이 낮은 투표율[2007년 대선에서 63%, 37%가 기권]은 후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100p.

그렇다면 한국에서 투표율이 왜 그토록 낮은가의 해답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한국의 정당체제가 전체적으로 보수화함으로써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당대안들이 모두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수화한 것은 투표자들의 이념정향이 아니라, 경쟁의 틀이고 선택의 구조인 정당체제인 것이다.
101p.

민족문제는 한국정치에서 과도하게 정치화되어 이데올로기의 정치, 또는 정치의 이데올로기화를 불러왔다면, 그와는 다르게 노동문제는 과도한 정치화는커녕 거의 정치화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문제에서 탈정치화가 발생하게 된 것은, 민족문제가 불러온 정치의 이데올리기화가 노동문제 영역으로까지 확산된 효과 때문이다. … 냉전이념은 권위주의 시기 현실정치의 변화를 요구하고 이를 시도한 비판세력들을 제압하는 데 사용된 한국 보수파들의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자 자원이었다. 한국의 보수파들이 냉전반공주의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로 유지하면서, 그에 의존하려는 정향 내지 태도는 민주화 이후 상황에서도 권위주의 시기의 그것과 별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 그러나 민족문제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정치가 순전히 보수파들만의 책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 이후 진보파들 역시 보수파의 냉전반공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도덕적인 자원으로서 급진적 민족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105~107pp.

[국가적 차원의 중대한 프로젝트의 추진 과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방식을 띤다. 제일 먼저 문제의 시작으로서 하나의 권력이 수립된다. 그리고 최고결정자는 무엇이 국가이익이며 전체사회를 위한 공익인가를 정의한다. 다음으로 최고결정자는 그를 둘러싼 극소수의 테크노크라트와 함꼐 이를 정책화, 프로그램화하는 결정을 내린다. 여기에서 공익의 내용은 경제발전, 경제성장과 이를 성취하는 속도를 핵심요소로 포함한다. 그 정책의 내용과 결정의 동기는 실제로 국가이익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통치자의 권력확대나 사적인 개인이익의 추구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결정은 어느 날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정부정책의 이름으로 사회에 공표되며, 국가 내지 정부의 모든 기구들은 '국익'의 실현을 위해 동원되고, 그것은 또한 과격하고 급속하게 추진되다. 이를 뒷받침하는 데 있어 그 정책의 정당성을 공중의 여론으로 만드는 주류언론들의 역할 또한 지대하다. 이 과정에서 반대여론이 세력화되고 운동으로 표출될 때, 그것은 국익에 반하는 '정치논리' 또는 사회전체 이익에 반하여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로 비판되며, 자주 이데올로기적 언사를 통해 규탄된다. 이러한 과정은 분명 권위주의하에서 실천되는 전형적인 정책결정 방식이다. 그러나 이 결정방식은 지난 정부의 한미 FTA 협상정책이나 현 정부의 쇠고기수입협상에서 나타난 특징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그것은 권위주의에서는 권력이 어떤 초법적 힘의 사용에 의해 수립되는 반면, 민주주의에서는 선거에 의해 통치자가 선출된다는 것 뿐이다.
114~115pp.


촛불집회가 제기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우리는 민주화 이후 깊숙이 변화된 사회를 한편으로 하고, 보수적 리더십이 갖는 민주주의에 대한 협애한 이해와 구시대적 통치방식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사이에는 위태로울 만큼 커다란 간극을 보게 된다.
139p.

[강력한 대통령이 허약한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도하는 구조적 특성] 그것은 정당-의회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집행부에 아무런 견제력을 갖지 못하고, 정책결정의 이니셔티브를 포함하여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즉 국가기구 내지는 정부구조 내에서 이른바 삼권분립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정부 밖에 존재하며 사회경제적 균열과 갈등으로부터 발생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익과 가치, 요구와 의사들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이익집단을 포함하는 자율적 결사체들의 발전수준 역시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142p.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점에서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143p.

오늘의 촛불집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 평화적 제도로서의 종이돌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촛불집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147p.

이번 촛불집회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되는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요한 전환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들은 그것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그 이념적 호칭과는 별개로, 시민들의 실생활문제와 직결되고 그에 기초한 대안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갖지 못했다. 참여의 기반을 확대한다는 것은 그동안 참여로부터 소외된 사회세력의 대표성을 넓히고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의 폭의 변화는 정책의 내용과 결과를 바꾸는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참여의 폭을 넓히고 이를 통해 제도의 변화를 가져왓어야 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앞선 6월항쟁이 남긴 유산은 그렇게 성공적인 것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고해야 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여의 폭을 확대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21년 전 6월 항쟁이 남긴 긍정적 유산의 목록에 더해질 것이다.
148~149pp.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