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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때때로 2009. 11. 23. 16:57

<2007년 11월 12일 DVDPrime '책 이야기' 게시판 작성>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1. 한때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말이었죠. 조금더 자란 어느 시기에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독재'의 반대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한 소수 직업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한 쟁투의 대상으로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1987년 우리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 정부를 수립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기본 권리인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누리고, 건강하고 기쁘게 일하고 자녀를 교육하고 문학적 혜택을 힘껏 누릴 수 있는 생존권이 보장된 사회를 만듭시다. … 함께 누릴 빛나는 새 세상이 목전에 임박하였습니다."
- 민주헌법쟁추국민운동본부(국본)의 성명서 中

해방 후 미 군정에 의해 민주주의가 이식된 한국은 다른 여러나라들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매우 쉽게 '보통선거'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칙을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로 채택할 수 있었죠. 그러나 한국의 민중은 분단과 냉전, 한국전쟁의 기간에 공식 정치 영역에서 좌익은 배제되고 축출돼 보수 여당과 보수 야당이라는 매우 협애한 정당체제의 선택지밖에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조차도 불법ㆍ부정 선거로 퇴색됐고 박정희의 군부 쿠데타 이후 기본적인 자유권은 억압당하기에 이르렀죠.

군부 정권 시기의 급속한 산업화는 여러 조건이 필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노동기본권에 대한 초억압적 조처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재벌에 대한 혜택과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각종 권리에 대한 부정이 80년대까지 한국 사회를 특징지어 왔습니다. 민중들은 교육을 통한 개인적 계급 상승을 통해서만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적 권리와 생존권적 권리의 요구가 함께 집단화되어 표출된 사건으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습니다. 물론 김영삼ㆍ김대중ㆍ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당시 민주화 세력의 집권은 한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약화시켰고 사회 전반에서의 민주주의적 의식의 성숙과 인권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확산은 한국 사회를 많은 부분 '민주화'시켜 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정한 정치체제 속에서 항상 어떻게 하면 '차악'을 선택할 것인가만 고민하는데 개인 정치 행위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사회적으로 하층 노동계급의 기본적 권리는 쉽게 유린당하기 일수며 집회와 결사의 자유 또한 완전하다고 볼 수 없을 뿐더러 최근 후퇴하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명박과 같은 보수 정치인이 개인적 흠결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고 있고 퇴물 정치인인 이회창이 정계복귀를 하자마자 지지율 2위를 기록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기업들의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은 확대되고 있지만 서민들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정치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2. 이 모든 문제들을 우리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요? 현재의 정치개혁론의 주류적 방향에서 보자면 주된 해결 방안으로 '원내정당화' '정책정당화' '법치 민주주의' 등이 떠오르고 있고 그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 이러한 주류적 접근법에 반대하는 세 사람의 책이 있습니다.


어떤 민주주의인가 최장집ㆍ박찬표ㆍ박상훈|후마니타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서 선거와 투표를 통한 다수결의 원칙이 항상 옳은 결과만을 가져오진 않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이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출발점은 바로 여기죠. "여기에서 인민 다수의 결정이 공동체의 전체 이익을 위해 합리적 결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근본적 문제"(어떤 민주주의인가, 65p)입니다.

플라톤이 비판한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는 노예와 여성을 배제한 성인 남성 시민들만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현대사회보다 단일한 사회적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민주주의 정치체제였죠. 그러했음에도 사회적 갈등과 균열은 다수에 의한 결정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으로 귀결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곤 했죠. 현대사회는 고대 아테네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구와 다양한 사회적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사회적 균열과 갈등의 구조도 더욱 고도화 됐고 때론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내세우는 것은 대체적으로 전체주의나 파시즘적 흐름을 만들곤 합니다.

따라서 선거ㆍ투표에 의해 정기적으로 부정될 수 있는 합법적인 다수의 독점적 지배체제로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사회는 전혀 동질적이지 않으며, 갈등이나 균열이 언제나 곳곳에 존재한다. 민주 정치란 이런 갈등적 이슈들을 민주주의 제도의 틀 안에서 해결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어떤 민주주의인가, 12p

우리는 신문의 국제면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최소 몇 10만에서 100만 명 이상 참가한 파업 소식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국가들에서 정권이 무너졌거나 쿠데타 혹은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기대하진 않죠. 그러나 2차대전 이후(또는 구 소련의 해체 이후)의 신생 국가들에선 겨우 몇 천명에서 몇 만명이 파업과 시위를 벌였음에도 정권이 무너지고 쿠데타가 일어나고 내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계급ㆍ계층ㆍ인종 등에 의한 사회적 균열은 어느 국가에나 똑같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균열에 대처하는 정치체제의 문제인 것이죠. 집단적 갈등이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못할 때 더 큰 갈등과 충돌, 사회 전체의 붕괴를 가져오곤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더이상 선택의 문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사회 전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 있죠.


3. 민주주의는 하나의 모습만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초기 명사들에 의한 과두독점적 지배체제도 민주주의(엘리트 민주주의)이고 대다수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한 흑인들이 선거과정 자체에서 배제되는 미국식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단호히 이러한 민주주의를 배격합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주장합니다.

"시민사회와 시장에서 강자의 위치에 있는 특수 이익들은 기본적으로 갈등을 사적인 영역의 일로 만들고자 한다. 사적 영역에서 그들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는 갈등을 사회화하는 힘이며, 그 중심 메커니즘은 정당이다. 갈등의 사회화란, 사회적 자원이나 가치의 분배ㆍ재분배와 관련된 갈등적 이슈를 그 사회의 공적인 의제로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적 이해관계를 표출ㆍ집약ㆍ대표하는 정당의 기능, 그것이 곧 갈등의 사회화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균열과 갈등을 동원하는 정당의 기능이 약화될 때 그 결과는 민주주의의 보수화가 될 것이다. 이는 이 책이 지향하는 정당 개혁의 방향과 정반대의 것이 아닐 수 없다."
- 어떤 민주주의인가, 263p

그동안 우리에게 정당은 부패한 정치의 핵심고리이고 퇴행적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정치 모리배들의 집단으로만 비춰왔습니다. 당연히 정치개혁의 방향으로 정당의 '정책 전문가 집단화' '원내 정당화' 등이 추진돼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러한 해결책이 대증요법이며 문제의 원인을 잘못 바라보고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화와 퇴행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김영삼ㆍ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 모두 집권 후 정당을 우회해 직접 대중과 관계를 맺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집권 후반기 여당으로부터의 탈당 혹은 '당정분리'의 강조). 대중과 가까이 가려는 모습 자체를 부정할 순 없죠. 정당을 우회하려 할 때 대통령은 위임받은 통치권자에서 시혜자로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사회적 균열에 기초한 국민의 일부분으로서의 정당의 정책 집행보다는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려는 모습으로서 나타나고 이는 때때로 이들 민주화 세력 출신 대통령이 권위주의를 약화시켜 왔다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전 권위주의 시기 대통령의 모습을 띄게 만들곤 합니다. 즉 위임받은 5년간은 "국민이 노무현식으로 해 보라고 뽑아준 것 아니냐"는 식의 태도를 갖게 만듭니다. 이는 민주주의가 2500여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핵심 덕목으로서 '자체 수정 능력'을 무시하는 처사일 뿐입니다. 애초에 총선에 두번 이상 연속성을 지닌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한 차례 밖에 할 수 없는 대통령을 국민이 '심판'할 수 있는 '회고적 투표'는 불가능하고 이는 민주주의에서 '책임'의 문제를 실종케 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40여일 남은 상황에서 이회창이 무소속으로 대통령 출마해 지지율 2위를 기록하고 있고 정동영과 이인제가 통합신당과 민주당의 당대당 통합을 합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올해 초의 개헌 논란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헌에 반대하는 말은 많았음에도 개헌의 핵심 내용이 대통령ㆍ국회의원 임기의 일치를 통해 대통령 권력의 강화에 있다는 점을 비판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국회의원들의 개망나니 행태에 대해 욕은 많이 하지만 정작 국회의원이 뭔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헌법에서 3권 분립을 통한 수평적 견제와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대통령 권력이 압도적으로 강한게 현실입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론은 그렇지 않아도 강한 대통령 권력을 더욱 강화하자는 것이었지요. (대통령 권력의 강화가 꼭 권위주의의 강화를 뜻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선 선택 가능한 대안 중 하나겠지요.)

문제는 의회권력의 약화와 정당의 탈 정치화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해관계가 공식 정치에서 반영될 가능성을 낮추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이 아주 투철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철학 시험으로 대통령을 뽑는게 낫겠지요.

가뜩이나 정치에서 정당이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정책 전문가 집단화는 정당의 사회적 대표의 기능이 약화되며 일부 엘리트 집단에 정치적 결정을 의지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정치 개혁'이 가져온 중간 계층 엘리트들의 정치 참여는 그 모델로 삼은 미국에서도 나타나듯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공식 정치에 반영되는 비율을 더욱 낮추고 있죠. 이는 노무현 정부가 삼성경제연구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론에서 동북아 중심 국가론, 신성장 동력 개발론, 혁신 주도형 경제론, 산업 클러스터론 등의 개념도 모두 이들(삼성경제연구소와 재벌기업 연구소들)의 보고서를 통해 발전되었다. …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긴밀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정부 조직의 혁신을 기한다는 이유로 공무원들을 삼성인력개발연구원에서 연수를 받게 한 일이다. 맨 처음은 2004년 9월 국무총리실 과장급 이상 105명 … 같은 해 12월에는 통일부 과장급 이상 간부 99명, 이듬해 1월에는 기획예산처 4급 이상 70명 … 2월에는 외교통상부 혁신기회고간 15명 … 4월에는 공정거래위원회 과장급 이상 간부 60여 명, 금융감독위원회 국실장급 간부 50여 명, 기획예산처 서기관 이하 직원 250명 … 5월에는 재경부 부총리를 비롯한 3급 이상 국장급 간부와 주무과장 …"
- 어떤 민주주의인가, 316p

이 책은 10월 29일에 나왔습니다만 이 글을 읽는 순간 지금의 삼성 비자금 논란이 딱 생각 나더군요. 현재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여러 분석과 진단, 그에따른 대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최근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노학자 최장집 교수가 대표 저자로 참여한 이 책은 그 여러 대안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입니다. 민주주의의 진전과 사회적 약자의 삶이 진전되길 바라는 분이라면 이 책을 통해 실천적 고민에 실질적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짧은 글로 제가 소개한 내용보다 더 많은 내용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당장에 읽기 어렵다면 책의 첫 부분 최장집 교수의 인터뷰편만 봐도 많은 영감을 받을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구절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치가 갖는 위대함이란 법이나 경제처럼 제도나 체계에 의해 지배되기보다, 혹은 추상적인 이론에 의해 계도되기보다, 그것을 초월하여 불확정적인 사회적 힘을 조직할 수 있는 실천적 능력에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제2의 민주화 운동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앞서 개척할 선도적 지도부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어떤 민주주의인가, 322-323pp



※ 마치려고 했는데 책 소개를 자세히 못했네요.

- 이 책의 문제의식은 민주화 이후 민주화 세력이 10년 이상 집권했음에도 민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환멸이 커져가고 있고 정치적 영역에서도 민주주의의 진전이 답보되고 있거나 퇴행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최장집 교수님이 최근 이어온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 먼저 이 사회는 여러 집단적 갈등과 균열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갈등의 조절 모델을 정당 민주주의에서 찾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 경로 자체가 대중정당의 발전과 함께 해왔고 대중정당은 사회적 강자가 아닌 약자, 노동자 계급에 의해 발전해 왔습니다.

-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선 유일한 강점인 '수'(부자보단 가난한 사람이 더 많기 마련이죠.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는 노동자 계급이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요)를 이용해 정치과정에 집단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과정의 연결고리가 정당입니다.

- 한국 사회에서 정당은 그 시작부터 매우 협애한 이념적 기초로 대중에게 사회경제적이념에서 차이가 있는 선택지로서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권위주의 시기 보수 야당조차도 경쟁적 정당체제에 포함되지 못한 상황에서 87년 민주화는 경쟁적 정당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협애한 보수적 이념체계 내의 정당체제는 변화시키지 못했죠.

- 이는 정당의 사회적 기반을 매우 약화시켜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정당과 대중운동과의 연계는 매우 약해 한국 정치는 보수적 정치와 급진적 운동이라는 두 계기의 이중고리를 형성하게 됐죠. 이러한 상황은 보수 정당 내에서의 이념적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고(사회경제적 기반이 다른 이념적 갈등이 아닌) 이는 파당끼리의 다툼에 대한 대중적 환멸을 불러 공식 정치와 대중 운동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지게 됐고 당연히 공식 정치에서 하위 계층의 이해가 의제화 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왔죠. 더불어 보수적 정당들끼리의 쟁투는 대중들의 선택에서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즉 지역주의는 결과지 원인이 아니라는 얘기죠).

- 이러한 현실 정치의 문제를 정책 정당화, 정치의 사법화, 국민 경선제, 원내 정당화(중앙당 축소와 지구당 폐지) 등의 방법으로 해결코자 하는게 현재의 정치개혁 방향인데, 이러한 방법은 그 모델이라고 할 미국에서조차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하위 계급 또는 계층의 참여를 축소 시켰고 공식 정치에서 사회적 강자들과 이익 집단 중심의 정책과 실천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편 이러한 정책 전문가 집단으로서 원내 정당화의 주된 근거로 드는 탈물질적 사회로의 이행으로 인한 사회적 균열이 다양화되고 계급ㆍ계층간의 간격이 줄고 이동이 늘었다는 주장은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결과를 봐도 결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 따라서 여전히 계급ㆍ계층에 기반한 대중 정당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대안으로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에서 중요한 두 축(위임과 책임) 중 하나인 책임의 문제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함입니다.

- 대표 저자인 최장집을 비롯한 저자들은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은 보여주지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의 '계급문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얘기하는 대중 정당도 능동적 대중으로서 활동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대중 정당이라기보단 수동화된 당원이 당내ㆍ외 정치 과정에서 선거ㆍ투표를 통해 참여하는 정당일 뿐입니다.

- 여기서 문제는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 역사의 초기를 보면 매우 급진적인 대중적 동원을 통해 능동적 당원을 충원하고 사회적 지지기반을 구성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장집과 저자들은 대중 운동과 정당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적은 부분만 할애하고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제 생각엔 기존 좌익 운동 내에서의 비정치적 경향(이 책에서 지적하는)도 문제지만 동원 형태의 운동에 대한 경시도 마찬가지로 문제로 보입니다. 문제는 대중적 동원을 가능케 하는 운동의 힘을 어떻게 조직된 정당을 구성, 일상적 시기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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