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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5일 작성, 일부 수정

자크 비데와 제라르 뒤메닐이 쓴 새 책이 나왔다. 제목은 '대안마르크스주의'. 이 책의 서론에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이야기가 앞 부분에 나온다.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제공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스승을 찾고 있던 러시아의 [근대] 초기 혁명가들에게 "어떤 경우라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응답한 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 17쪽.

그래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독자들은 마치 이 이야기가 플레하노프와 자술리치 같은 러시아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해, 혹은 더 직접적으로 레닌과 그의 동료들에 대해 한 얘기인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와 관련해선 우선 프랑스 노동당 건설을 위해 쥘 게드와 마르크스가 함께 작성한 강령의 해설에서 이 이야기의 배경을 발견할 수 있다.

Accusing Guesde and Lafargue of "revolutionary phrase-mongering" and of denying the value of reformist struggles, Marx made his famous remark that, if their politics represented Marxism,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what is certain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개혁을 위한 투쟁의 가치를 폄하하며 '혁명적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게드(프랑스 노동계급 지도자)와 라파르그(마르크스의 사위)를 비난하며 마르크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발언을 내놓는다. 만약 저들의 정치를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면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확실한 것은 내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1880년 프랑스 노동당 강령에 대한 편집자의 해설(링크)

이는 노동당 건설을 위한 강령을 의논하기 위해 게드와 라파르그를 만난 이후를 설명한 글이다. 마르크스의 이 언급은 엥겔스가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Marx and Engels, Werke, Vol.35 p.388)에 인용돼 있다.

Nor have you any other source, i.e. other than Malon at second hand, for your reiterated assertion that in France 'Marxism' suffers from a marked lack of esteem. Now what is known as 'Marxism' in France is, indeed, an altogether peculiar product — so much so that Marx once said to Lafargue: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If anything is certain, it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존중받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는 당신의 반복된 주장은 말롱(제1 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한 염색 노동자)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근거도 제시할 수 없다. 현재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라고 알려진 것은, 정말로 완전히 기이한 결과물이다. 언젠가 마르크스가 라파르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정도로 말이다.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무언가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1882년 11월 2일 엥겔스가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링크)

엥겔스는 이 말을 1890년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반복한다.

Just as Marx used to say, commenting on the French "Marxists" of the late [18]70s: "All I know is that I am not a Marxist."
마르크스는 1870년대 후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해 언급할 때면 꼭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아는 전부는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1890년 8월 5일 엥겔스가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링크)

이 언급들 모두 매우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른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이 사정에는 그의 사위 라파르그가 끼어있다. 실제로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는 1889년 라파르그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We have never called you anything but 'the so-called Marxists' and I would not know how else to describe you. Should you have some other, equally succinct name, let us know and we shall duly and gladly apply it to you.
우리는 너를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 외에 어떤 것으로도 부르지 않았었고 그것 외에 어떻게 너를 묘사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간결한 이름 같은 다른 어떤 것을 네가 가졌다면 우리에게 알려주렴. 우리는 당연히도 기꺼이 너를 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 1889년 5월 11일 엥겔스가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링크)

그런데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구체적 맥락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물론 정확한 인용 표기도 없이 마구 사용되고 있다. 그것도 매우 눈에 잘 띄는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말이다. 최근 뒤메닐 글을 읽으며 자꾸 실망하는 데, 이번 글도 '서론'에서부터 실망스러운 것 투성이다. 그 앞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 말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저 문구를 그저 '일반적 상황'에 대입해 썼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터이다. 명백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를 대상으로 한 말을 '러시아의 근대 초기 혁명가'들에게 했다는 건 터무니없는 왜곡일 뿐이다.

'저명한 저자'라고 해서 의심 없이 읽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 글에도 심각한 오역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Posted by 때때로


프랑스의 자유ㆍ평등ㆍ박애 폭격

프랑스는 1월 11일 말리 내전에 전격적으로 개입했다. 공중 폭격을 실시했고 현재 군인 2150명이 배치돼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는 아프리카 동맹국들과 함께 말리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내전 개입이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말리 정부의 요청에 대한 선의의 답변이란 것이다. 그는 "우리가 철군했을 때 말리가 안전할 것과 합법적인 정부와 선거과정 그리고 그 영토 안에 더 이상 테러리스트의 위협이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 군사개입의 목표라고 밝혔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미국의 지원도 항공기를 이용한 프랑스군 부대와 장비의 수송에 그치고 있다. 독일은 입발린 말과 달리 프랑스군의 수송 지원 요청도 거부했다. '국제사회, 말리 내전 개입 속도낸다'는 기사가 잇따르지만 대개는 말리 주변국들이 파병하면 그에 대한 재정을 지원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프랑스가 개입한 지 열흘이 지나면서 전세가 역전되는 듯도 싶지만 아직은 백중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이슬람 반군이 프랑스ㆍ말리 군에 밀려 주요 거점도시에서 퇴각해 키달 인근 산악지역에 집결해 게릴라전에 대비하는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리비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말리 북부도 이 분쟁에 편입되는 분위기다.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1 근본주의의 확산? 말리 정부의 요청?

프랑스 군사 개입의 첫 이유는 그들 스스로 밝혔듯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확산일 것이다. 말리 국민의 90%는 무슬림이다. 하지만 딱히 근본주의적이진 않았다. 2012년까지 세 번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모두 세속주의적 세력이었다.

북부 투아레그족의 분리독립 요구라는 불씨에 근본주의 이슬람이라는 기름을 부은 것은 서방세계다. 서구의 경제ㆍ군사적 지원은 주로 소수민족 탄압에 활용됐다. "특히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목으로 말리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대하면서 투아레그족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됐다."
[중앙일보] 궁지에 몰린 투아레그족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손을 잡았다. 투아레그족 출신이 주도하는 '안사르 에디네', 비 말리 출신의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 마그레브 알카에도 분리된 '서아프리카 지하드 통일운동(MUJAO)'이 그것이다. 이들과 세속주의적 투아레그족은 2012년 1월 '아자와드민족해방운동(MNLA)'를 조직했다. 운동은 곧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에게 주도권을 뺐겼다. 여기에 리비아 등 북부아프리카가 혼란한 틈을 타 무장한 채 되돌아온 망명 투아레그족이 결합했다.

주요 언론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확산으로 말리 북부의 인권침해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인권을 지키기 위한 개입'이라는 오래된 수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근본주의 이슬람의 샤리아 율법을 따르는 가혹한 처벌 사례가 이어진다. 분명 인권침해가 상당수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침해는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만 자행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지난해 7월 3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12년] 3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충성하는 군인들이 반대자를 대상으로 즉결 처형, 고문, 성적 학대를 자행하고 있는 사례들을 공개하며 말리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경향신문]

북부 근본주의 이슬람의 인권침해가 문제라면 남부의 쿠데타 정부에 대한 개입도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말리 정부의 요청이라며 북부 반군만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말리 정부의 합법적 정통성 또한 의문이다.

2012년 3월 사노고 대위의 쿠데타는 말리 군부의 부패와 가혹행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우연하게 일어났다. 신발과 무기도 지원받지 못한 채 북부에서 반군세력과 싸우던 수십 명의 부대가 전멸당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말리 정부는 지난 10년간 미국으로부터 10억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음에도 반군과의 싸움에서 군인들은 제대로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쿠데타 세력은 지금도 말리 정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2월에는 쿠데타군에 체포된 지 하루 만에 풀려난 총리가 곧바로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북부 반군세력에게 합법적 정통성이 없다면 군사개입을 요청한 말리 임시정부 또한 합법적 정통성은 없다.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2 차이나프리카의 견제

프랑스 정부가 인권과 질서의 양날개를 단 천사가 아니라면 군사개입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군사개입은 무엇보다 '프랑사프리크(프랑스+아프리카)'라고 불릴정도로 오랜 관계를 맺어온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알제리ㆍ세네갈ㆍ말리 모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말리는 1958년 세네갈과 함께 연방으로 독립한다. 1960년 세네갈이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지금의 말리공화국을 세웠다. 독립한 후에도 프랑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2006년까지 프랑스는 말리의 주요 수입국이었다. 프랑스 아프리카투자자협의회는 49개 나라 1000여 곳에 지사를 두고 있다. 아프리카 8개 나라와 방위협정을 체결하고 있고 특수부대를 세네갈 가봉,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 주둔시키고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 일대를 식민지배한 과거 프랑스 정권들은 '프랑사프리크'라 부르는 각국 정권과의 은밀한 후원 또는 결탁 관계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패권을 유지해왔다. 유럽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아프리카에 군사기지를 보유하며 지역 '경찰' 국가 역할을 자임한 나라는 프랑스뿐이다."[경향신문]

말리 등 아프리카 국가들과 프랑스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2000년대부터다. 특히 사르코지의 반이민 정책이 결정적이었다. 사르코지는 2007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역사에 제대로 들어선 적이 없다"는 발언을 해 아프리카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 틈을 중국이 비집고 들어왔다. 지난해 중국과 아프리카 간 무역규모는 20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 수입의 18%가 중국이다. 말리의 경우 무역의 25%가 중국과 이뤄지고 있다. '프랑사프리크'라는 말보다 '차이나프리카(차이나+아프리카)'라는 말이 더 익숙하게 됐을 정도다.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약화된 영향력을 말리 내전을 계기로 다시 확대하고자 한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최근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잇따라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을 주장했던 나라가 프랑스다. 이어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 축출에도 큰 역할을 했다. 국민일보는 이를 들어 프랑스는 "말리 군사개입이 잘못된 선택으로 끝날 경우 신(新) 식민주의를 시도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까지 보도했다.
[국민일보]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3 방대한 천연자원에 대한 탐욕

프랑스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이 지역에 방대한 천연자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프랑스에 우호적인 정부를 확보하는 것이 이 지역의 천연자원 수급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말리는 세네갈-기니-가나-부르키나파소-니제르-카메룬을 잇는 '금광벨트'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우라늄도 큰 이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말리의 우라늄은 모두 일본과 독점 계약돼 있다. 하지만 바로 옆 나라인 니제르는 프랑스의 주요 우라늄 수입국이다. 국영 원자력기업 아레바(Areva)는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조달해 왔다. 아프리카 지역에 강하게 남아있는 식민주의의 영향 때문에 말리의 혼란은 니제르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프리카의 국경은 민족적ㆍ문화적 경계와 상관 없이 식민지 모국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어졌다. 말리 북부 반란의 주역인 투아레그족의 경우 말리는 물론 알제리ㆍ니제르 영토 내에까지 분포한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투아레그족의 반란이 주변국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프랑스의 원자력 의존률이 75%에 달하는 상황에서 말리 내전은 심각한 위기를 촉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리 정부는 쿠데타 직전까지도 자국 영토에 매장된 천연자원을 밝히며 서방 국가의 주요 기업들에게 개발권을 분배하고 있었다.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WSWS)가 프랑스의 군사 개입을 '2013년과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쟁탈전'이란 제목으로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프랑스군의 말리 귀환은 알카에다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 전투가 아니라 우라늄, 금광 그리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유정과 이웃나라를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조치며 올랑드 대통령이 얼마전 '미래의 대륙'이라고 불렀던 이 대륙에 대한 프랑스의 권한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 르완다ㆍ리비아에서 최근 프랑스의 잔인성이 드러난 것처럼 파리는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정책을 결코 완전히 단념하지 않았다."[참세상]


프랑스 좌파의 오래된 한계

식민주의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좌파에게 리트머스와 같은 것이었다. 알제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말리가 다시 한 번 그 역할을 맡게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랑스 좌파의 식민주의에 대한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었던 장 뤽 멜랑숑이 속한 좌파전선(Left Front)은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민주공화좌파당(GDR)의 프랑수와 어센시는 16일 "좌파전선, 공산주의자와 공화주의자 대표자의 입장은 분명하다"며 "광신자의 야만 행위로 말리 민중을 포기하는 것은 도덕적인 실수일 것이다. 국제적 군사조치는 테러리스트 국가 설치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밝혔다. 좌파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공산당(PCF)은 올랑드의 군사 개입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12일 성명에서 "PCF는 그들 국가 남부를 향하는 지하드 그룹의 무장 공격에 대한 말리의 우려를 공감한다. 여기서 말리 대통령이 요청한 도움에 대한 대답은 유엔 깃발 아래, 미국과 아프리카연합 후원의 뼈대 하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참세상]

다행스럽게도 반자본주의신당(NPA)과 좌파당(Gauche)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3일에는 반대 시위를 열었고 16일에는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내전ㆍ전쟁이라는 상황, 근본주의의 성장이라는 위협에서 우리는 흔히 군사적 개입이라는 '쉬워 보이는 방법'에 못마땅하지만 지지를 보내곤 한다. 만약 군사적 개입이 말리와 북서부 아프리카 인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부득이하지만 지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에서 그랬듯이 서방의 군사적 개입은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이들의 개입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성장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 지역의 오래된 식민주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식민지 모국의 군사적 귀환은 오래전 식민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위에서 살폈듯이 프랑스의 이번 군사 개입을 '인도주의'적이라고 볼 근거도 희박하다. 정치ㆍ경제적 욕심이 군사 개입이라는 불장난으로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방 국가의 아프리카와 아랍 지역에서의 군사적 모험을 중단시키는 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른 평화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 주요 참고 기사
[중앙일보] 모범 민주국가였던 말리, 전쟁 수렁 왜
[경향신문] '말리 군사개입' 올랑드의 리더십 시험대에
[경향신문] 암울한 말리… 쿠데타군ㆍ반군 모두 인권유린 심각
[뉴시스] 20년 민주국가 망친 말리 쿠데타 주역 사노고
[참세상] 말리 반군 공습, "프랑스의 아프가니스탄 되나"
[국민일보] 中ㆍ美에 밀린 佛, 말리 개입으로 '阿영향력' 되찾기
[참세상] 말리 사상자 증가… 전쟁 반대 목소리 확대
[프레시안-월러스틴 논평] 아프리카 말리, 제2의 아프간 되나

Posted by 때때로

반자본주의 신당(NPA)의 활동가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프랑수와 사바도가 함께 쓴 '생존권 혁명'이 푸른숲에서 나왔다.

반자본주의 신당은 제4인터내셔널 계열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 주도로 만든 정당. 그 이름이 말해주 듯 최근 10여 년 간의 급진화와 반자본주의 운동 성장에 기반해 있다. 1974년생인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2002년과 2007년 대통령 선거에 나와 돌풍을 일으켰다. 집배원으로 일하고 있어 '붉은 집배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책은 브장스노와 사바도가 97개의 단어로 급진 좌파의 세계관을 설명한다. 이 단어 목록에는 '영구 혁명론' '트로츠키주의'와 같은 자신의 사상적 뿌리를 나타내는 단어도 포함돼 있다. 무작위 대중을 위한 급진 사상 안내서는 아닌 듯 싶다. 300쪽이 좀 넘는 책에 많은 주제를 담았기에 충분한 설명이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저자들은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은 우리가 실현하려는 사회 계획을 드러내기보다 기존의 사회적 논리와는 다른, 새로운 논리의 주요 골자를 소개하고자 한다"고 소개한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당 정치인 앙리 베베르가 쓴 '좌파 아빠가 들려주는 좌파 이야기', 좌파전선의 장 뤽 멜랑숑이 쓴 '인간이 먼저다'와 함께 프랑스 좌파의 주요 정파의 주장을 살펴볼 책이 모두 나온 셈이다. 베베르의 '좌파 이야기'의 경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 타 정파와의 차이가 충분히 보여지진 않는다. 멜랑숑의 '인간이 먼저다'는 대통령 선거를 위한 공약집으로 쓰였다. 좌파전선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비전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한 사회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전혀 다른 원리로 운영되는 사회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프랑스 좌파 세력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을 가장 명확히 주장한 것은 브장스노와 사바도의 '생존권 혁명'. 브장스노와 사바도는 들어가는 말에서 마오주의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빼놓지 않고 있다. 표지는 브장스노와 사바도의 '생존권 혁명'이 가장 예쁜 것 같다.

Posted by 때때로


2010년 10월 14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프랑스 고등학생.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물결이 스페인을 뒤덮고 있습니다. 노동조합과 젊은이들은 광장에 캠프를 만들어 반란을 이어가고 있죠. 아랍의 불꽃이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붙은 듯 합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에서도 거대한 반란의 물결이 일었었죠.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노동조합과 청년들의 반란으로 프랑스는 거의 한 달간 마비됐었습니다. 같은달 34쪽의 얇은 책이 나왔습니다. 프랑스에서만 200만부가 팔린 이책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연이어 번역 출간되면서 올해의 반란을 예고한 듯 합니다.

93세의 노(老)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그 책입니다.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임희근 옮김|돌베개


그는 젊은날 활동했던 레지스탕스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레지스탕스는 단지 나치 독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서만 활동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새로운 '자유 프랑스'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하려 노력했죠. 그렇기에 그들은 금권이 아닌 노동하는 시민 일반에게 이로운 경제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마땅이 받아야 할 자유롭고 차별없는 교육, 국가ㆍ금권ㆍ외세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언론의 중요함을 새로운 국가의 원칙에 포함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복지제도를 만들고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구연한 '프랑스'를 만들어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내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친 세월, 그리고 프랑스의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70년 전에 구축한 개혁안을 여기서 돌이켜보고자 한다."
-9쪽

그러한 '자유 프랑스'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노 투사는 분노하라고, 자신들의 이상을 이어받아달라고 호소합니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理想)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정치계ㆍ경제계ㆍ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 15쪽

물론 분노의 대상, 분노의 이유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입니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죠. 너무나 많은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세심한 눈으로 우리 주변을 둘러볼 때 우리는 분노의 이유를 많은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불법체류자와 이주민에 대한 '불관용'에 분노하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민에 대한 압제에 분노합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 22쪽

분노는 우리가 이 세계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 15쪽

그러나 우리는 이 '분노'가 폭력이라는 '절망'에 짓눌리는 걸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폭력이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압제자의 압도적 폭력 앞에서 '폭력'에 경도되는 인민의 '격분'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폭력의 필요성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할 때 우리는 희망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에셀의 글을 읽으며 더더욱 프랑스인들이 부러워졌습니다. 그들에겐 무엇보다도 전거로 세울 '경험'과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드골에 대해 찬반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가 함께했던 레지스탕스 운동은 해방 이후 '자유 프랑스'의 원칙을 세우고 실행했습니다. 에셀은 그 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에겐 그러한 전거가 없습니다. 헌법에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적어놓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선언일 뿐 임시정부가 세운 어떠한 원칙도 대한민국 건국에는 적용되지 못했죠.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간신히 세운 원칙 마저도 하위법과 임시조치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온 게 한국 현대사죠.

다행히 한국 사회는 끊임없는 반란의 현대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중적 거리시위의 시대는 지났다라는 선언이라도 있을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대한 대중 시위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한국에서 적절한지는 의문입니다. 우선 위에서 말했 듯 우리는 프랑스와 같은 과거의 기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굳이 '분노하라'고 일깨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대중운동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히려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대중운동을 뚝배기 같이 서서히, 하지만 오랫동안 온기를 보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한국에선 더 필요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지금 다시 대학생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학생들, 깨어나다"는 경향신문 8일자의 1면 제목은 조금 과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6월 10일 집중 시위 이후 기말고사를 지나봐야 현재 운동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이후 무상교육, 반값 등록금 쟁점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 모든 쟁점들에 어떠한 공통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더이상 이 사회가 우리가 버티고 살아갈 만한 곳이 아니라는 선언이죠. 이는 무엇보다 치명적으로 높은 자살률이 보여줍니다. 어제는 지나가는 뉴스로 한 노인이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사건을 들었습니다. 이 노인은 치매에 걸린 자신의 남편으로 인해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더이상 두고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더군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의 정인을 스스로 죽여야만 하는 사회는 더이상 우리가 살아갈 만한 사회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할 이유'를 찾는 게 아닙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듯, 죽음의 행렬을 지금 당장 멈추게 할 새로운 상상력ㆍ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책이 그리 적절해보이진 않지만, 그러한 계기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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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이후



1492년 콜롬버스가 도착한 땅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일한 사탕수수 농장은 18세기 프랑스 교역에서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한 곳이었죠. 식민지의 부는 인간이 아닌 노예에게는 그 어떤 혜택도 주지 않았습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됩니다.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모든 인간의 평등을 외치며 노예의 해방을 인정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노예들이 그 반란에 동참합니다. 1791년의 일이죠. 투생 루베르튀르와 동료들은 13년 간 이어진 저항으로 1804년 결국 해방과 독립을 얻어냅니다.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해방 혁명의 역사는 이후 200년 간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1804년 해방을 얻는 조건으로 지급하기로 한 1억5000만 프랑의 배상금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이 배상금은 140여년이 지난 1947년에야 겨우 다 갚았죠.

독립 이후에도 미국의 개입과 끊임없는 군부 쿠데타, 독재로 고통받아왔던 아이티는 1986년 반란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합니다.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으로 1990년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뽑히죠. 포르토프랭스의 신부였던 아리스티드는 민주화 이전부터 독재에 저항하고 가난을 극복하는 행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통령궁에 입성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난한 이들을 초청해 함께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부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일까요. 그는 당선 7개월 만에 군부 쿠데타로 쫓겨나게 됩니다.

1994년 미국과 유엔의 개입으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1년 정도 남은 임기 동안 가난 극복과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두 과제에 몰두합니다.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군부 쿠데타 기간 가해자들에 대한 심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제 금융기구는 시장 개방과 민영화를 강요하고 있었죠. 그가 2000년 재선에 도전한 이유가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무려 92%의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번 임기도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던 프랑스와 미국은 아이티에 대해서 만은 일치된 의견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다시 아이티에서 쫓겨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쫓겨난 건 아마도 제3의 길을 주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앤서니 기든스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길은 가난과 굴종 사이의 아주 좁은 길을 말합니다. 그는 라팡미 셀라비에 오는 여러 아이들에 빚대 그  길을 설명합니다. 콜라와 술 중에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주스가 좋아요"라고 답하는 아이. "기브 미 워터"라는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에게 자신은 초콜릿을 원한다며 "기브 미 초콜릿"이라고 말하는 아이.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굴종을 강요하곤 합니다. 고분고분하길 원하죠. 우리의 뜻에 따르길 바랍니다. 그것이 가난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아이티의 사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아리스티드가 '존엄한 가난'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도움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난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은 바로 가난한 이들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도움'이 아닌 '연대'가 필요한 거죠.

이 책은 아리스티드와 함께 가난과 굴종 사이 가늘게 난 '제3의 길'을 찾아 떠날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 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아이티와 아리스티드 대통령 이야기(링크)

Posted by 때때로
2010.10.24 20:14

역시 프랑스 쟁점2010.10.24 20:14

프랑스의 연금개혁에 반대한 투쟁이 정부와 현 경제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투쟁의 격렬함만으로 따지자면 이미 68혁명에 가까운 듯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 조직과 구호, 투쟁의 목표 등을 따졌을 때 전환점을 돌진 못했죠. 하지만 최근 프랑스의 시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구호가 '계급투쟁'이란 데서 드러나듯 한달 넘게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의 연금개혁 반대 투쟁은 서서히 더 큰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듯 싶습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0337


이것은 목수정씨의 리포트입니다. 경향신문에 실린 것보다 조금 길고 자세합니다. 비교적 최근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죠. '고등학생'의 참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설레발이 조금 걸리긴 합니다만,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그러한 고등학생의 투쟁에 학부모들이 적극 동의하며 연대하고 있다는 거죠.


http://www.boston.com/bigpicture/2010/10/france_on_strike.html


이것은 보스톤닷컴의 빅픽쳐 코너에 실린 프랑스 투쟁 사진들입니다. 격렬한 전투를 보여주기도 하고, 파업으로 멈춰선 도로, 바다에 대기 중인 유조선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건 고등학생들. 68혁명을 대표하는 사진 중 하나, 다른 학생들의 목마를 타고 구호를 외치던 여학생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이게 바로 프랑스다"라고 외치는 듯, 마찬가지로 68혁명 당시 넘어뜨린 자동차 바리케이트 뒤에서 키스하던 학생들을 연상케 하는 사진이죠.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 같은 사르코지. 그리고 이제 시위대도 애시당초 투쟁의 계기가 됐던 '연금개혁'을 넘어서 '계급투쟁'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 투쟁의 승리를 빕니다.

Posted by 때때로
2010.05.13 16:23

아이티와 아리스티드 대통령 이야기 2010.05.13 16:23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이두부 옮김|이후


최근 몇년간 가장 인상에 남는 책이 '가난한 휴머니즘'입니다. 읽은 후 저자인 아리스티드에 대해 궁금해졌지만 '한글'로 된 정보를 찾긴 매우 어려웠습니다. 얼마전 아이티에 대지진이 온 후 언론에 잠시 아리스티드가 언급되긴 했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망명 중인 그는 재앙이 덥친 조국으로 복귀할 뜻을 비쳤지만 미국은 '개인' 자격으로만 허락한다고 말했고, 프랑스는 강력하게 반대했죠. 물론 언론에선 '망명'이라고 쓰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미 해병대에게 '납치'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번 대통령이 됐지만 두 번 모두 미국이 후원한 것이 유력한 쿠데타를 통해 쫓겨났죠.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죠. 말 그대로 진흙 쿠키가 주식으로 이용될 정도입니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노예들이 세운 유일한 나라입니다. 노예반란의 유일한 성공 사례죠('블랙 자코뱅'이라는 책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반란의 성공은 200여년 간의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죠.

최근 읽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8장에 이 아이티와 아리스티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더군요. 무척 반가왔습니다. 지젝이 쓴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라는 장이죠. 꽤 긴 '전제'를 해 출판사에게 약간 미안하긴 하지만 아이티의 간략한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해 옮겨옵니다. 얇고 값도 싸니 부담 없이 한 권 구입해서 읽어보시길 부탁드려요.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8장「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슬라보예 지젝|난장|177~180pp. 186~187pp.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의 조건이자 동력이 아닌 장애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후]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이런 한계를 어디서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국제적 압력을 겪어낸 정치해방운동의 이름이 라발라스(크리올어로는 '홍수')[1]라는 역설적인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라발라스는 빗장이 걸린 공동체를 흘러넘치는 징발당한 자의 범람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티드 정권의 전복에 관한 피터 홀워드의 책 제목(『댐으로 홍수 막아내기』)이 상당히 적절한 이유이다. 이 책은 9ㆍ11 이후 곳곳에서 댐과 벽이 세워지는 전지구적 경향 속에 2004년의 아이티 사태를 새겨 넣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세계화'의 진실, 즉 세계화를 유지하는 내적 분할의 전선을 직면하도록 만든다.

아이티는 처음부터, 즉 노예제에 맞서 1804년의 독립을 이끌어낸 혁명투쟁 자체에서부터 예외였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선언은 보편적인 일관성을 지녔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이 선언은 당시의 사회질서와 경제논리에 직접 맞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유지됐다." 이런 이유로 "근대사 전체를 통틀어 지배적인 전지구적 사물의 질서에 대해 이보다 더 위협적인 함의를 지닌 단일 사건은 없다."[2]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Event이었을지 모른다. 식민지의 반란자들은 최초로 식민지배 이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극히 근대적인 원칙을 위해 봉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티의 노예반란을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코뱅 당원들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아이티의 흑인 대표는 국민의회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그리고 예측할 수 있듯이 테르키도르의 반동 이후 상황은 변했고, 나폴레옹은 즉시 아이티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런 이유에서 일찍이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3]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성급한' 독립의 대가(말 그대로 대가)는 참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뤄졌다. 2004년 독립 2백주년을 축하하면서 라발라스의 대통령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이렇게 강탈한 배상금을 반환하라고 프랑스에게 요구했지만 그의 권리주장을 (레지 드브레가 그 일원이기도 한) 프랑스의 위원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흑인들에게 노예제에 대해 배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는 동안,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지불해야만 했던 엄청난 금액을 환불해달라는 아이티의 요구를 묵살했다. 처음에는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 획득한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강탈당한 아이티의 요구를 말이다.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우리 대부분에게 즐거운 어린시절의 기억(진흙 쿠키 만들기)이 시테솔레이유 같은 아이티 빈민가에서는 절망적인 현실이다. 최근의 AP보도에 따르면 식량가격이 치솟자 공복감을 달래는 아이티인들의 전통적인 처방이 새롭게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노란 흙을 말려서 만든 과자이다. 진흙은 오랫동안 임산부와 아이들의 제산제制酸劑이자 칼슘 공급원으로 귀하게 여겨졌고, 진짜 식량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지금은 5달러어치의 흙이 있으면 진흙 쿠키 1백 개를 만들 수 있다. 상인들이 아이티의 중앙 고원에서 시장으로 흙을 운반해오면, 여성들은 그 흙을 사다가 진흙 쿠키를 만들어 불타는 태양 아래서 말린다. 완성된 쿠키는 들통에 담겨져 시장이나 거리에서 팔려나간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리스티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미국과 프랑스의 공조가 2003년의 이라크 침공을 둘러싸고 양국간에 벌어진 공공연한 의견 대립 직후 이뤄졌고, 간헐적인 갈등보다 우선하는 양국의 기본적인 동맹관계를 매우 적절하게 재확인시켜준 사건으로 칭송받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안토니오 네그리의 영웅인 브라질의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도 2004년에 벌어진 아리스티드 정권의 전복을 묵인했다. 그 와중에 신성하지 않은 동맹이 결성되어 라발라스의 정권은 인권을 무시하는 중우정치이며,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적 독재자라고 격하했다. 불법적인 용병 암살부대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민주전선', 인도주의적인 NGO, 그리고 정작 자신들은 미국의 돈을 받으면서 아리스티드가 IMF에 '항복'했다고 비난하는 '급진 좌파' 단체 등이 모두 이 동맹의 일원이다. 아리스티드는 급진 좌파와 자유주의 우파의 이런 중첩을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다. "어디에서든 어떻게 해서든 힘 있는 백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데서 약간의 은밀한 만족감, 아마도 무의식적인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4] 요컨대 지배이데올로기는 종종 좌파의 '자아-이상' 안에 남아 있기도 하다.

……

이제 아이티로 돌아오자. 라발라스의 투쟁은 원칙주의적인 영웅주의, 그리고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투쟁은 국가권력의 틈새로 물러나 거기서 '저항'하지 않고 영웅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탈근대적 좌파(룰라의 브라질 통치를 칭송했던 네그리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었나?)의 모든 경향이 자신들에게 맞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 집권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필수적인 구조조정'을 법제화하기 위해 미국과 IMF가 부과한 조치들에 제약당하면서도 아리스티드는 몇 가지 정확하고 실용적인 조치를 취하는 정책(학교와 병원의 건설, 사회기반시설 확충, 최저임금 인상 등)을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중들의 폭력과 결합시킴으로써 군부 패거리들에 맞섰다. 아리스티드는 간혹 '페르 르브뢴(대중이 행사하는 일종의 자기방어로서, 불타는 타이어를 목에 걸어둬 경찰의 암살자나 정보원을 죽이는 행위이다. 얄궂게도 이것은 포르토프랭스의 타이어 판매업자 이름이었는데 나중에는 대중의 모든 폭력행사 형태를 뜻하게 됐다)'을 묵과하기도 했다.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안으로 인해 아리스티드는 센데로루미노소[5]나 폴포트와 동급 취급을 당했다. 1991년 8월 4일 연설에서 아리스티드는 열광하는 군중에게 "언제, 그리고 어디서 폭력을 사용할지"를 기억하라고 조언했다. 그 즉시 자유주의자들은 라발라스의 대중적인 자경단(키메라Chimeres)과 악명 높은 뒤발리에 독재정권의 암살조직(통통마쿠트tonton macoutes)을 비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늘 좌파와 우파를 '근본주의자'라고 동급 취급하는 전략을 선호한다. 그렇게 하면 사이먼 크리츨리처럼 알카에다가 레닌주의 정당의 새로운 화신이라도 되는 양 말할 수밖에 없다.[6] 아리스티드는 이 자경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이름(키메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자경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 심각한 위험상태에서, 그리고 만성적인 실업상태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조적인 불의, 체계적인 사호폭력의 희생자들이죠. …… 그들이 언제나 동일한 이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이득을 얻은 사람들에게 맞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7]

[1] Lavalas. 1991년 당시 아이티의 대통령이었던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 1953~ )와 그의 지지자들이 사회민주주의에 근거해 "평등을 동반한 성장"을 목표로 결성한 정치운동. 이 운동의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라발라스정치단체(Organisation Politique Lavalas, OPL)는 1994년 아리스티드가 미국 주도의 군부 쿠데타로 사임한 뒤 그 성격이 친서방적으로 변질됐고, 명칭을 투쟁하는인민들의조직(Organisation du peuple en lutte)으로 바꿨다. 1994년 망명지에서 아이티로 돌아온 아리스티드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OPL의 활동가 일부를 규합해 1996년 판미라발라스(Fanmi Lavalas, FL)라는 새로운 정치단체를 결성했다. FL의 활동에 근거해 2000년 아리스티드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2004년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다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FL는 일체의 선거에서 배제되는 조처를 당했다.

[2] Peter Hallward, Damming the Flood: Haiti, Aristide, and the Politics of Containment, London: Verso, 2008. p.11.

[3] 이 구절은 1805년 아이티에 대한 군사적ㆍ경제적 봉쇄를 부탁하기 위해 탈레랑(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이 제임스 메디슨(당시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봉쇄 이유로 제시된 말이다.

[4] Hallward, Damming the Flood, p.338.

[5] Sendero Luminnoso. 1969년 페루의 고원 지대인 아야쿠초에 위치한 후아망가대학교의 철학 교수 구즈만(Abimael Guzman, 1934~ )의 마오쩌둥주의에 동조한 일군의 공산당원들(붉은 깃발 Bandera Roja)이 페루 공산당을 탈당해 만든 단체. '빛나는 길'이라는 단체명은 페루 공산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리아테기(Jose Carlos Mariategui, 1894~1930)의 격언, "맑스-레닌주의는 혁명으로 향하는 빛나는 길이다"에서 따왔다. 1980년 3월 17일 무장투쟁 노선을 선언한 뒤로 이들은 현재까지 반정부 활동을 펼치고 있다.

[6] 크리츨리는 알카에다 같은 집단이 표명한 전위주의를 '신(新)레닌주의'라고 불렀는데(Simon Critchley, Infinitely Demanding: Ethics of Commitment, Politics of Resistance, London: Verso, 2005, p.146), 지젝이 그런 표현(또한 크리츨리의 논의 전반)을 비판한 뒤 둘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Simon Critchley, "Crypto-Schmittianism", State of Nature, vol.1, no.2, Winter 2006). 지젝-크리츨리의 논쟁을 정리한 글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Robert Young, "The Violent State", Naked Punch, no.12, Supplement, October 16, 2009.

[7] Hallward, Damming the Flood,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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