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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굴종 사이에서 … 가난한 휴머니즘

때때로 2011. 4. 14. 09:45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이후



1492년 콜롬버스가 도착한 땅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일한 사탕수수 농장은 18세기 프랑스 교역에서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한 곳이었죠. 식민지의 부는 인간이 아닌 노예에게는 그 어떤 혜택도 주지 않았습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됩니다.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모든 인간의 평등을 외치며 노예의 해방을 인정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노예들이 그 반란에 동참합니다. 1791년의 일이죠. 투생 루베르튀르와 동료들은 13년 간 이어진 저항으로 1804년 결국 해방과 독립을 얻어냅니다.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해방 혁명의 역사는 이후 200년 간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1804년 해방을 얻는 조건으로 지급하기로 한 1억5000만 프랑의 배상금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이 배상금은 140여년이 지난 1947년에야 겨우 다 갚았죠.

독립 이후에도 미국의 개입과 끊임없는 군부 쿠데타, 독재로 고통받아왔던 아이티는 1986년 반란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합니다.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으로 1990년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뽑히죠. 포르토프랭스의 신부였던 아리스티드는 민주화 이전부터 독재에 저항하고 가난을 극복하는 행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통령궁에 입성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난한 이들을 초청해 함께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부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일까요. 그는 당선 7개월 만에 군부 쿠데타로 쫓겨나게 됩니다.

1994년 미국과 유엔의 개입으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1년 정도 남은 임기 동안 가난 극복과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두 과제에 몰두합니다.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군부 쿠데타 기간 가해자들에 대한 심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제 금융기구는 시장 개방과 민영화를 강요하고 있었죠. 그가 2000년 재선에 도전한 이유가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무려 92%의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번 임기도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던 프랑스와 미국은 아이티에 대해서 만은 일치된 의견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다시 아이티에서 쫓겨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쫓겨난 건 아마도 제3의 길을 주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앤서니 기든스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길은 가난과 굴종 사이의 아주 좁은 길을 말합니다. 그는 라팡미 셀라비에 오는 여러 아이들에 빚대 그  길을 설명합니다. 콜라와 술 중에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주스가 좋아요"라고 답하는 아이. "기브 미 워터"라는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에게 자신은 초콜릿을 원한다며 "기브 미 초콜릿"이라고 말하는 아이.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굴종을 강요하곤 합니다. 고분고분하길 원하죠. 우리의 뜻에 따르길 바랍니다. 그것이 가난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아이티의 사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아리스티드가 '존엄한 가난'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도움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난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은 바로 가난한 이들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도움'이 아닌 '연대'가 필요한 거죠.

이 책은 아리스티드와 함께 가난과 굴종 사이 가늘게 난 '제3의 길'을 찾아 떠날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 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아이티와 아리스티드 대통령 이야기(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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