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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는 정치 참여를 위한 하나의 권리일 뿐

때때로 2011. 10. 26. 20:07

투표권에 대한 작은 논란을 목격했습니다. 이건 약간의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긴 합니다. 진보신당 지지자들에게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참 고역스러운 일입니다. 차라리 '사표' 논란이 나았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후보도 내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보신당 지지자가 이번 선거에서 '선택'은 그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작은 논란에서 우려가 되는 것은 투표를 독려하는 이들이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고통'을 몰라줘서가 아닙니다. '투표'를 '권리'로서가 아니라 '의무'로서 도덕률로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니다. 이와 관련해 제가 자주 가는 게시판에 틈틈이 쓴 글을 여기에 옮깁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율의 저하는 민주적 정치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투표로 상징되는 정치적 참여가 위축될 수록 사회의 공적 문제에 대한 개인들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죠.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미국 흑인사회입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흑인들은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안철수의 편지가 화제죠. 하지만 그는 사례를 잘못 들었습니다. 흑인 투표권 확보를 위한 60년대 프리 라이더(한국의 희망버스) 운동이 더욱 적절한 사례입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 민주주의 정치에서 투표율 저하의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해온 이는 최장집 교수일 겁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이 투표율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제기한적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회적 균열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는 협애한 선거 대안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강조합니다. 즉, 이념적ㆍ실천적 차이가 미미한 보수 중심의 정당 체제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죠. 이러한 정당 체제는 기본적으로 노동에 대한 배제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투표권의 문제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게 늘기 시작했습니다. 투표는 자신의 정치적 존엄을 지키고 사회의 공적 사안에서 개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권리지 의무가 아닙니다. 게다가 투표권은 정치적 참여의 일종입니다. 참여는 개인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뜻합니다. 능동적 활동이 아닌 의무로서, 수동화된 활동의 투표권은 그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투표권 자체는 '민주주의'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독재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이 여전히 25.7%의 지지를 받고 있는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김규항으로부터 비롯하고 진보신당의 지지자 다수가 투표를 포기하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더구나 자신들이 원하는 진정한 선거 대안을 만들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이다 실패를 한 진보신당 지지자들에게 현재의 투표는 그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의 한 표를 사소히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박원순에게 흔쾌히 한 표를 던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 박원순에게 표를 던지고 왔습니다. 위에서 잠깐 적었 듯이 투표는 정치 참여의 여러 방편 중 하나일 뿐 그것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하진 않겠지만 곽노현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선거와 투표가 우리의 궁극적 대안일 수 없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늘 프레시안에 좋은 글이 있더군요.

이 운동[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은 태동하기까지 3년이 지연됐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2001년 정부가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기 전부터 있었던 경제적 불만과 디폴트 위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반면 미국 경제는 3년 전에 붕괴됐고, 당시에도 몇몇 분노한 이들이 있었지만 실제 반응은 미뤄졌거나 다른 방식으로 유인되었습니다. 당시 분노는 사실 우리를 위해 상황을 시정할 수 있는 대선 후보에 집중하는 강력한 풀뿌리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름다운 운동이었고, 희망에 가득 찬 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은 자신들의 후보를 백악관으로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떠나버렸습니다.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 운동은 기업과 싸워 기후변화 정책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운동은 한 명의 선출 공직자가 1000만 명의 시민, 또는 시민 사회 자체와 동등하다는 듯이 스스로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그 운동은 나이와 인종을 초월했었습니다. 저는 이 운동이 정치가와 선거에 대한 환멸을 느낀 다음 망가져 버린 제도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을 점령하는 것에 대한 편지', 레베카 솔니트, 프레시안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을 방문한 지젝은 지금껏 기다려오던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노 요코는 존 레논의 노래를 빌어 운동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영웅이라고 주장했죠. 소수의 공직자ㆍ정치인을 우리의 대표자로 뽑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언제나 더 큰 변화는 거리에서, 공장에서, 집에서 시작되고 끝났습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이 시작되기 전, 부자들을 위한 공화당의 패악질과 그에 무능력한 민주당에 대한 분노가 확산되기 전 오바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선거와 투표라는 민주주의의 '정상적' 절차는 오직 그 체계가 만들어진 이후 위기에 처하기 직전까지만 기능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상적 상황에서조차 99% 인민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한 명의 뛰어난 정치인이 아니라 99%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전, 이 한표의 권한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히, 그때 그때마다 가장 덜 나쁘거나, 그나마 가장 괜찮은 후보에게 던지면 된다고 봅니다.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의 후보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에게 표를 던지겠죠.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건 또 아니지 않습니까? 3년 전 오바마의 선거 열풍을 바라본 미국 좌파의 심정이 얼추 이럴 듯 싶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다시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 '투표 안할 자유'를 비웃는 이들은 자신의 비웃음이 민주주의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고민해봐야 할 겁니다. 많은 이들이 흔히 놓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발성을 유도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옹호했던 이들은 시민 개개인이 공적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게끔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옹호자는 계몽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도덕률로서 투표를 강조하는 것, 특히 '닥치고' 투표하라는 것은 이에 전적으로 반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이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는 개인의 수동성을 확대한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좀먹는 짓꺼리입니다.

생각난김에... '닥치고 정치'라니. 말이 됩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무엇보다 말과 글의, 설득의 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말들이, 더 많은 글들이 우리의 공적 생활에 대해 다뤄야 합니다. 그럼에도 '닥치고 정치'라니? 애시당초 김어준을 싫어하기에 이 책을 읽을 생각은 없습니다. 게다가 저런 제목 센스를 용인하는 김어준에게서 민주주의에 대해 배울 것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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