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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에 해당되는 글 3

  1. 2016.11.28 카스트로, 1926.8.13-2016.11.25
  2. 2013.12.20 전략은 불필요한가 (3)
  3. 2013.01.14 '로얄 어페어'의 재구성: 개혁의 가면 놀이 (2)
2016.11.28 00:25

카스트로, 1926.8.13-2016.11.25 쟁점2016.11.28 00:25


1955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피델 카스트로(오른쪽)는 멕시코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혁명 동지 체 게바라를 만나고 1956년 돌아와 3년여의 분투 끝에 1959년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전복에 성공한다.

'역사의 심판'.

언제부터인가 흔한 말이 돼버렸다. 내 기억 속 처음은 1993년 김영삼이었다. 그는 그해 5월 13일 5ㆍ18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이런 뜻의 말을 했다. 스스로 5 ㆍ18 광주민주화운동의 후계자임을 내세운 담화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며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으로 마무리된다.

"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 놓고 많은 고뇌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러나 진상 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 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진상 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진실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전 대통령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 담화

그러나 때때로 '역사의 심판'은 미래의 과제를 수행하는 현재의 혁명가들에겐 단단한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11월 25일(현지시간) 90년의 삶을 마친 피델 카스트로가 그 중 한 명이다.

1953년 몬카다 병영을 습격해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던 카스트로는 미숙함 때문에 오히려 사로잡혀 재판을 받는다. 어떤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채 진행된 재판에서 그가 유일하게 보장받은 단 하나의 권리는 최후진술이었다. 물론 그조차 그가 그토록 믿었던 민중의 참관은 군인들에 의해 차단된 채 가능했다. 그는 1952년 쿠데타를 일으킨 바티스타야 말로 법정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며 자신을 법이 아닌 역사의 이름으로 변호한다.

"이 법정에는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70명이 살해된 사건,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학살이었던 사건 말입니다. 학살 사건에 연루됐던 사람들이 석방된 뒤 무장을 하고 다니고 있어 우리 시민들은 계속 위협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만약 비겁함이나 우유부단함, 법원의 방해로 그들에게 엄중한 법의 심판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애석하게도 여러분의 명예는 실추될 것이며 여러분이 내린 판결은 유례없는 오명을 쓰게 될 것입니다. … 저는 동료들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1953년 피델 카스트로 최후진술,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398쪽.

독재정권의 법원은 그에게 15년형을 결정한다. 2년 만에 여론의 지지에 힘입어 특별사면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그는 혁명 동지 체 게바라를 만난다. 1956년 다시 쿠바로 돌아온 그는 결국 3년여 만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한다.

카스트로 스스로 인정한 바이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언급했을지라도 미국의 무력 봉쇄 앞에 살아남기 위한 방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걸 폄훼할 수 없는 건 그가 최후진술에서 "쿠바의 정치는 아메리카 대륙의 민주적 민중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게 될 것"이라며 "쿠바는 독재정치의 치욕스러운 사슬의 고리가 아니라 자유의 보류여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를 지키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옌데와 칠레 인민에게, 만델라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민에게 연대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정치가 갖는 한계를 잊지 말아야 겠지만 인민에 대한 그의 태도에선 배워야 할 교훈도 분명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투쟁에 앞서 실직했으면서도 일자리를 찾아 조국을 등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60만 쿠바 민중을 생각합니다. … 농민들은 비참한 오두막에서 살며 1년 중 4개월 동안만 일할 수 있고 나머지 기간은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다. … 산업노동자와 날품팔이들은 노후연금을 횡령당하고 재산을 착취당하고 있으며 그들의 거처는 지옥 같은 기숙사이고, 봉급은 사장의 손에서 고리대금업자의 손으로 넘어가고, 미래는 임금삭감과 파면이며, 생활은 끊임없는 노동뿐이고 유일한 휴식처는 바로 무덤입니다. … 교사와 교수들은 후세대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있으며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이지만 매우 형편없는 취급을 받고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영세 상인들은 경제위기 때문에 파산했고 … 의사ㆍ기술자ㆍ변호사ㆍ수의사ㆍ교육자ㆍ기자ㆍ예술가와 같은 젊은이들은 곧 자신들의 탄식과 도움을 구하는 소리를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사방이 막힌 막다른 골목에 자신들이 서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민중입니다. 온갖 불행을 겪은 나머지 분노에 가득 차 투쟁에 뛰어들 수 있는 민중에게 우리는 "당신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겠다"가 아니라 "당신들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유와 행복을 당신들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온힘을 다해 투쟁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953년 피델 카스트로 최후진술,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386~387쪽.

※카스트로의 최후진술은 일부 수정했습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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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0 12:33

전략은 불필요한가 쟁점2013.12.20 12:33

푸코가 1979년 5월 '르몽드'에 기고한 '봉기는 무용한가'를 읽었다. 1979년 이란혁명에 대한 이 글은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러나 전략에 대한 폄훼 혹은 오해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에 대한 느낌을 아래 적는다.

서정연씨가 옮겼다. 글을 읽으려면 여기: 푸코 '봉기는 무용한가'


1979년 샤에 맞서 무장한 군인 앞에 목숨을 걸고 나선 이란의 인민.

이란 혁명이 결국 호메이니와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으로 끝나자 이에 대한 비난이 좌와 우 모두에서 빗발쳤다. 최근 이집트 혁명과 아랍의 봄에 대해 여러 지식인과 언론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봉기[반란]는 무용하다. 언제나 그건 매한가지니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어느 누구도 지시를 내리진 않는다. …… 인민들은 봉기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들이 아닌 아무나의) 주체성은 봉기에 의해서만 역사에 도입되며 역사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실 봉기와 반란은 푸코가 거리를 두는 전략가들의 '전략'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반란의 우연한 계기들은 언제나 예측 불가다. 푸코가 봉기ㆍ반란과 구분하는 혁명도 다르지 않다. 일반적 특징들 몇몇을 꼽을 순 있겠지만 정확한 순간, 계기를 짚어내기는 어렵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일으킨 파장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우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략은 불필요한 것인가. 푸코는 자신의 이론적 도덕이 '전략가'의 것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나의 이론적 도덕은 이들[전략가]의 것과는 정 반대다. 그것은 '반전략적'이다. 즉 하나의 특이성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에 [이를] 존중하는 것, 권력이 보편적인 것을 침해할 경우에 [이에 대해] 비타협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도덕은 전략가들에게 필요한 것임에 틀림 없다. 반란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 비타협적이 되는 것. 그러나 여기에는 석연찮은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봉기와 반란을 순전히 우발적인 현상으로, 즉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자연현상으로만 바라보는 데서 오는 한계가 아닐까. 그렇기에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군대에 맞선 남녀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가 거리에 나서게 된 계기가 순전히 우발적인 것 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료 형제, 혹은 가족으로부터 이어받은 어떤 의식적 경험들이 존재한다. 새롭게 촉발된 운동이 흔히 과거의 성공한(것처럼 여겨지는) 봉기의 형태를 모방하곤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 뿐만은 아니다. 봉기와 반란이 촉발되는 구체적인 순간과 계기를 특정할 순 없지만, 이러한 계기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적지 않은 의식적 반대파의 노력이 있어왔다. 인쇄술의 발달과 계몽주의의 확산은 프랑스 혁명의 전제였다. 러시아 혁명은 경찰과 황제까지도 무시하지 못할정도로 성장하던 노동자 운동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1987년 6월 항쟁 앞서 수많은 불온 서적들이 대학가에 넘쳐났고 야학ㆍ서클ㆍ학회와 같은 학습ㆍ조직활동이 확산됐다.

봉기와 반란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은 혁명적 전략가의 필수적 도덕이다. 인민으로부터 배우며 그 내부에서 전략을 세우는 게 전략가가 해야 할 임무다. 봉기와 반란이 자신이 예측 또는 계획한 데서 벗어났다며 기권하는 것은 결코 전략가적인 태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 반란을 그저 존중만 하는 게 꼭 비타협적 이론가의 태도도 아니다. 왜냐면 "넘어설 수 없는 법"에 "제한 없는 권리로 맞"서는 것은 언제나 인민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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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때때로 2013.12.20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 어쩌면 자기 변명의 목적 하에 자신의 도덕을 위축되게 진술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슬람 혁명으로 끝난 이란 혁명에 대한 좌우파 양쪽의 비난을 견디긴 쉽지 않았을 듯.

    지금도 그렇듯 무슬림과 이슬람주의에 대한 유럽 좌파들의 제국주의적 편견은 꽤나 큰 약점이다. 이를테면 프랑스 좌파는 교육의 세속성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슬람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 금지에 찬성했다. 영국에서는 좌파들 일부에서 전쟁반대 투쟁에 이슬람주의자들과 함께하는 데 불만을 터트리곤 했다.

    그랬으니 호메이니의 승리로 끝난 이란 혁명을 두고 (한때 지지했다고) 푸코를 오죽이나 공격했을까. 그러니 그는 혁명과 봉기를 구분하고 역사로 사로잡힌 봉기, 혁명의 결과가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은 봉기를 존중하고 지지한 것뿐이라고 말하려던 게 아닐까. 당시 논쟁의 맥락을 살펴서 푸코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었을 듯싶다. 어쨌든 당시 논쟁 맥락을 찾아볼 여력은 없으니 추측일 뿐이다.

  2. 지나가다 2013.12.30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측하신 부분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푸코의 경우 당시에는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이란 혁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욕을 먹고 있지요. 특히 당시에 푸코가 이란 혁명을 보고 와 작성한 르포 기사들은, 프랑스 좌우파는 물론 이슬람 국가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이들에게까지, 이슬람을 낭만화한다거나 전체주의-가부장적 체제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 르포 기사들을 보면 푸코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희망적인 면을 본다거나, 이란 혁명을 이슬람에 기반한 "정치적 영성"의 봉기로 보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부분들이 특히 문제가 되었죠.)

    푸코의 저 글은 그의 전체적인 정치적 입장과도 연결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일중의 자기 방어로 읽혀야 할 겁니다. 실제로 푸코는 이 글 이후 자기 할 말은 다했다는 듯이 수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이란 혁명에 대해 단 한번도 공식적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왼쪽부터 계몽주의 개혁가 요한 스트루엔시, 덴마크 절대왕정의 군주 크리스티앙 7세, 영국에서 온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


경향신문은 '레 미제라블'의 흥행돌풍을 다룬 특집 기사에서 '비슷한 영화'로 로얄 어페어'를 소개한다.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로얄 어페어'를 추천한다. 정치는 그 시대 민중의 수준이라는 결론이 쉽게 와닿는다." - 경향신문 1월 14일자 8면(링크)

경향신문의 이런 주장은 박근혜가 당선됐으니 경상도 사람들은 민영화에 피해를 입어도 싸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 정책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가난한 사람들이 왜 그녀에게 투표했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멍청해서"라는 답변이 달린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 '로얄 어페어'는 당대의 '멍청한' 대중을 탓하는 영화일까? 이 영화의 이야기를 찬찬히 재구성해 보자(이 글에는 영화 '로얄 어페어'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 스트루엔시는 계몽사상에 심취한 의사다. 볼테르와 루소의 책을 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익명으로 직접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왕의 주치의가 되는 것을 꺼려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계몽사상가일지라도 호사스런 가발과 복장으로 차려입은 주치의 후보들 사이에서 약간은 위축되기도 한다.

그가 진료를 담당하게 된 크리스티앙 7세는 미친 왕이다. 영화를 다 보고난 지금에는 정말 '미친 왕'이었는지 의문이다.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있는 이 왕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가면이었다. 의회와 내각은 그에게 서명만을 강요한다. 그는 법령을 읽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제안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왕이 저 귀족들과 교감을 시도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오직 연극을 통해서만 세계를 본다.

스트루엔시가 크리스티앙 7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왕은 오직 연극의 세계에만 속해 있었다. 이 계몽사상가는 당황했지만 그 왕과 함께 기꺼이 연극의 세계에 들어간다. 크리스티앙 7세는 기꺼이 자신의 세계에 동참해준 이 의사의 동료가 된다.

동료가 된 왕과 의사는 내각을 자신들의 연극-세계로 다시 만든다. 어차피 귀족과 성직자의 가면에 불과했던 왕이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의 가면이 되는 것을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이들 동료는 고문을 없애고 언론ㆍ출판에 대한 검열을 중단한다. 천연두 예방접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귀족ㆍ성직자는 내각과 의회에서 쫓겨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이란 걸 고려하면 볼테르가 크리스티앙 7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북방의 빛'이라고 찬양한 것이 십분 이해된다.

이 빛나던 개혁의 시절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왕비 캐롤라인도 그들의 즐거운 동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국 왕실 출신의 왕비는 미친 왕의 완전한 동료가 되지 못한다. 그녀는 오직 스트루엔시를 통해서만 이들의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이 둘의 관계를 눈치챈 크리스티앙 7세의 질투가 왕비를 탐한 스트루엔시에 대한 것인지 자신의 동료인 스트루엔시를 차지한 왕비에 대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둘의 관계가 이 개혁의 동료들을 위기로 몰아넣어지만 왕과 의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아니다. 스트루엔시가 스스로 왕의 위치에 올랐을 때, 모든 법령에 대해 왕을 대신해 서명하려 했을 때 이 동료는 결정적으로 불화를 맞는다.

프로이센의 왕. 덴마크의 왕을 대신한 또 한 명의 왕이 섰을 때 더 이상 개혁은 지탱될 수 없었다. 봉건영지에 묶여있는 농민과 도시의 날품팔이ㆍ직인들은 스스로를 개혁의 주역으로 내세울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성직자와 귀족에게서만 자신의 정치적 표현을 찾을 수 있었다. 개혁군주의 가면은 처음부터 가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난 군중이 왕실에 몰려와 왕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크리스티앙 7세는 그 앞에 설 수 없었다. 거기에는 오직 또다른 왕, 프로이센의 왕이 있었을 뿐이다.

실각한 스트루엔시가 단두대에 오르기 전 인민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편이오"라고 외친 게 공허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인민을 위한 개혁은 오직 인민 스스로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 영화 '로얄 어페어'는 그 인민의 얼굴을 왕의 가면으로 보여준다.

스트루엔시가 왕을 대신하려 했을 때, 그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 인민을 대신하려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끊임없이 상승의 길을 걸었다. 성난 인민들은 오랫동안 쌓여왔던 분노를 자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발전 수준은 그들의 요구를 성취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산악당은 자신들의 가장 든든한 동료였던 상퀼로트, 그리고 그들의 조직이었던 에베르파와 코르들리에 클럽을 억압하고 숙청해야만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모든 인민을 대신해 조국의 혁명을 방어하려 했을 때 더 이상 그를 지켜줄 인민은 남아있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소개ㆍ링크).

'로얄 어페어'의 개혁가 스트루엔시가 크리스티앙 7세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가 왕을 대신하려 하면서부터 진짜 왕은 그를 보호해줄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흔하디 흔한 왕실 치정극으로 보이는 이 '로얄 어페어'는 혁명가와 계급의 관계에 (또는 일반적으로 정치인과 대중의 관계) 대한 훌륭한 우화를 제시한다. "정치는 그 시대 민중의 수준이라는 결론이 쉽게 와닿는다"는 경향신문의 지적은 이 영화에 대한 너무 쉬운 이야기일 뿐이다. '로얄 어페어'가 제시하는 정치는 그보다 더 급진적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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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르가니 2013.11.27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미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