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

« 2019/12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2016. 12. 19. 00:52

촛불시위의 첫걸음 쟁점2016. 12. 19. 00:52

아래 글은 10월 20일 올린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을 다시 고쳐쓴 글이다. 페이스북에 처음 올린 글로부터 따지면 세 번째 글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충하는 데 중점을 뒀다. 논점도 살짝 달라졌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바꾼 부분이 이 달라진 논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대중적 운동의 첫걸음에 좌파들이 불만을 갖는 일은 흔하다.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좌파의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경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패배적 평가가 대표적이다. 좌파의 다수는 기존 체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한계를 지적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전인권의 '애국가' 공연과 시위대의 집회 후 청소, 경찰버스에 붙인 스티커의 제거 행동에 대한 평가에서 극대화됐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도 내 실망감을 정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실망감은 내가 공부해온 '역사'에 반추해봤을 때 정당한 게 아니었다. 그 실망감은 내가 그토록 멀리해온 '국개론'(대중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 만을 갖는다며, 현재 상황을 대중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중이 운동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의식을 깨우친다는 것, 무엇보다 좌파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빼놓은 평론가적 태도였을 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전망'이 아니다. 나를 비롯해 좌파 일부가 놓치고 있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글일 뿐이다.

아래 글은 '사회주의자'에 기고한 글
(링크)의 원문이다.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글솜씨 때문에 내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사족을 또 달게 된다. '사회주의자'에 실린 글의 제목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회에서 고른 것이다.


11월 19일 '박근혜 정권 퇴진 4차 범국민 행동'에서 행진에 나선 사람들. [사진 自由魂]

촛불시위의 첫걸음

10월 24일이었다.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의 태블릿PC 속 국정 개입 증거를 폭로했다. 언론 보도를 접한 대중이 분노를 표시하기도 전 박근혜는 서둘러 1차 대국민 담화를 연다. 녹화 방송에 기자의 질문도 받지 않은 무성의한 담화였다. 아마 대중보다 지배계급이 더 빨리 이 보도의 위력을, 혹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가 이뤄졌을 때의 파급력을 깨달았을 것이다. 폭로로 가득했던 한 주가 지나고 29일 토요일 첫 대중적 촛불집회가 열린다. 3만~5만명으로 추산되는 참가자들은 분노로 가득했고 이들은 경찰과의 몸싸움도 꺼리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충돌은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이후 주말마다(당연히 평일에도 촛불은 계속 밝혀졌다) 계속된 촛불집회는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시위의 양상은 더 '평화'적이 됐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시위의 평화적 성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혹은 '명예혁명'이라며 촛불집회를 한껏 추켜세웠다.

좌파 일부에서 불만이 튀어나온 것은 이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한 촛불집회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 촛불에 불씨를 지핀 건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이었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만 한다. 시작은 언론재벌의 종합편성채널 JTBC의 보도였다. 같은 그룹의 중앙SUNDAY는 첫 촛불집회 다음날 (10월 30일자) 1면에서 '노력하면 성공하는 나라, 그 믿음이 깨졌다'는 제목으로 시위를 보도했다. 훌륭한 선동이다. 기껏 3만~5만명 나온 시위를 보도하며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하나로 잇는 분노의 동아줄을 잡아당겼다(작은 숫자는 아니다. '기껏'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 언론의 보도 태도를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토요일이 지난 첫 월요일 (10월 31일자) 사설에서 '심상찮은 시위'라며 정부와 정치권에 조속한 해결책을 내세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태도는 1905년 1월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킨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경찰의 첩자였던 가퐁 신부는 대중의 불만을 '평화'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워 페테르부르크 동궁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이끈다. 그러나 이 행진이 궁전을 수비하던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하자 가퐁은 "이제 우리에게 차르는 없습니다"고 선언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담화(11월 4일) 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다음날 더 많은 대중이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들자 조선일보는 점잖게 이렇게 말한다. "朴 대통령 국회 추천 총리에 內治 일임 선언하길."(11월 7일자 사설)

지배계급의 한 세력이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바로 그러했다.

"귀족 계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부르주아지에게 호소하는 방법도 주저하지 않았다. 법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족 계급에게 지지의 손을 뻗쳤으며, 또한 법원 서기와 고등 법원이나 귀족 가문의 출입 상인은 시위를 하라는 선동을 받았다. 베아른이나 도피네에서는 정기 소작인과 절반 소작인들까지도 동원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군대에도 귀족 계급의 선전이 침투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귀족 계급의 혁명적 선례를 잊지 않을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 54쪽, 을유문화사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특권계급은 자신을 기본권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1788년 프랑스 고등법원은 '왕국의 기본법 선언'을 공포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이 일부 포함됐지만 "당연하게도 조세의 평등과 특권의 폐지에 관한 언급이 없는 이 선언은 어떠한 혁명적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2쪽, 두레) 그럼에도 그들의 투쟁은 인민을 교육시켰고 훈련시켰다. 그 교육이 비록 지배계급 일부의 견해에 관한 것일지라도 이는 혁명을 향한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기본적으로 1788년 봄에 있어서 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바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의 결합이었다.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특권계급은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6쪽, 두레

특권계급의 교육 결과는 훌륭했다. 결국 1년여 후 프랑스 인민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에 나서 앙시앵 레짐을 끝장낼 혁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 ('독일 이데올록', 마르크스ㆍ엥겔스, 김대웅 옮김, 92쪽, 두레) 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실천 초기의 대중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체제에 대한 저항 자체도 바로 그 체제가 제공하고 가르친 표현ㆍ사상에 기반해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촛불집회 초기 문재인이 '명예로운 퇴진'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민주주의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대중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 ②항을 행동지침 삼아 왜곡된 '민주공화국'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게 된다.

조선일보의 가이드라인이 대중에게 통할까

안타깝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심지어 수십만 명의 저항이 이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대중이 배워온 이 표현과 사상이 실제 세계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1905년 1월 차르를 찬양하던 러시아 인민의 평화적 행진은 결국 피의 일요일 이후 파업과 시위로 가득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지배계급의 반란에서 시작한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 절대주의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되며 결국 그 권위를 잃었다. 끝내 그는 국가원수임에도 가족과 함께 도주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인민에게 입증해보인 후 1793년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렸다.

조선일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폭로 직후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희망을 내비쳤다. '내치를 넘기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대안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촛불집회의 급진화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두 번째 주말 촛불집회 후 조선일보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대신 협력"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일주일 전 집회 때 연행자는 물론 밤 늦게까지 충돌도 있었음은 모른 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태도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같은 야당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거리로 나온 대중이 '박근혜 퇴진' '하야' '탄핵'을 외쳤던 것과 달리 '질서있는 퇴진' 운운하며 '탄핵'에 주저했다.

그러나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5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12월 3일엔 전국 곳곳의 거리에서 232만 명의 인파가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 변화의 다가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거의 언제나 '폭력집회' 주도 세력 취급받던 농민의 트랙터 행진은 환영받았고, 이를 막아선 경찰은 비난받았다. 농민의 트랙터 행렬은 경찰의 방해에도 끝내 12월 9일 국회의사당 앞 탄핵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호 속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집회의 연설도 다양해지고 급진화하고 있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한 연사는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을 계속해온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의 눈물은 광장에 모인 100만명의 분노로 승화하고 있다. 한 학생은 "제 어머니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고,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가난합니다"며 불공정한 사회를 비판했다. 다른 학생은 "저는 공부를 못하지만 정유라 같은 이들이 너무 쉽게 학력을 따는 데는 열받는다"고 분노를 토했다. 많은 학생들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며 함께 행진하기도 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만이 이 투쟁의 배경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투쟁엔 이미 많은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고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움직일 준비가 돼있다.

집회 문화도 꼭 '애국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헌재 심판이 남아있긴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됐다. 평화로운 외양과 달리 대중의 굳은 의지가 정치권에게 탄핵을 강요했고 새누리당을 해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중앙일보가 "국민이 탄핵했다"며 "정치가 응답하라"
(12월 10일자 1면) 고 쓴 것은 이제 촛불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앙SUNDAY가 "촛불은 구체제 끝내라는 명령이다" (12월 11일자 1면) 고 말한게 내심은 아닐지언정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작가 샤토브리앙(1768~1848)은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그것을 성취하였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13쪽, 을유문화사) 고 평가했다. 2016년 겨울을 달군 촛불집회가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했던 것일지라도 그 끝은 오직 대중에 의해서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12월 10일에도 다시 100만여 명의 인파가 광화문광장에 모여 박근혜의 '즉각 퇴진'과 '구속' '처벌'을 외쳤다.

대중은 40여일의 행동을 통해 작지 않은 성과를 얻어냈다. 이는 스스로의 힘을 깨닫는 훌륭한 산교육이다. 게다가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헌법에 기반한 행동이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어냈지만 대중은 아직 만족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더 이상 이정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Posted by 때때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6. 11. 20. 23:53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 쟁점2016. 11. 20. 23:53


11월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밝혀진 촛불의 하나. 시민들은 스스럼 없이 노동조합이 준비한 촛불시위 용품을 자신의 의사표현에 사용했다.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이 준비한 촛불을 든 시민. 
[사진 自由魂]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 가퐁 신부가 차르의 초상을 앞세우고 차르를 찬양하며 행진했던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로부터 12년 후에야 러시아에서 혁명으로 차르를 쫓아냈음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1788년 루이16세는 명사회 소집과 연이어 삼부회 소집을 허용하면서 그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반란을 일으켜온 특권계급의 공격 아래 '절대왕정'의 권위는 이미 그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1792년 그가 기요틴 아래 목이 잘리기까지는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와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됐다. 결정적으로는 그 스스로 국가원수의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힌 루이16세와 가족의 '도주'라는 사건이 있어야만 했다.

어쩌면 부르주아 시민사회에서 우리는 더 복잡한 길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문재인이 '명예'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았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희망은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경찰버스에 붙은 스티커를 제거해줌으로써 시위대의 선함을 강조하려는 참여자와 함께, 거리낌 없이 경찰버스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시민도 있었다. 11월 19일 세종로 정부청사 앞 경찰버스에 어떤 시민들은 스티커를 붙이고 또 다른 시민들은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곤 했다.
[사진 自由魂]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세계에 균열이 가지 않는 이상 이데올로기는 허상이 아닌 현실로 굳건히 작동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1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도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2008년과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연사들은 세월호 사건에서 정부의 무능과 기만ㆍ배신을 비난했고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덧붙이는 말]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05ㆍ1917년 러시아 혁명뿐 아니라 한국의 1919년 3ㆍ1운동 때도, 1945~1948년 해방정국, 1960년 4ㆍ19혁명, 1987년 6월항쟁 때 모두 반란에 나선 인민의 움직임은 혁명적 지식인의 예측을 쉽게 벗어나곤 했다. 이 지식인들의 계획에 비추자면 인민은 때론 게으르고, 때론 너무 순하며, 때론 너무 성급하다. 1919년 봄의 평화적인 만세 운동은 일제 통치기구에 대한 전면적인 물리적 공격으로 이어졌고, 1945년 여름 해방의 기쁨은 봉건지주와 미국 점령군에 대한 무장투쟁으로, 다시 1960년 학생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 또한 노동조합의 건설과 정부기구에 대한 습격으로 이어지곤 했다. 1987년의 뜨겁던 여름은 창원ㆍ울산 등 전국에서 노동자투쟁의 뜨거운 가을로 바통을 넘겨줬다. 그러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최선"이라 함은, 대중을 좌파의 뜻대로 움직이게 될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이 품은 힘을 급격히 발산하게 될 그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현재의 투쟁에서 배워야 한다. 대중의 관념과 행동양식을 어떻게 급진적 변화의 힘에 맞닿게 할지 바로 지금 대중에게서 훈련받아야 한다.


10월 29일 첫 촛불시위는 3주 후의 시위에 비하면 많은 수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대통령의 첫 번째 사과로 갈피를 못잡던 경찰은 손쉽게 이순신장군상 앞 저지선을 뚫리고 세종대왕상 앞까지 밀렸다. 좌파는 길을 열어가고 있고 마침 더 큰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사진 自由魂]

Posted by 때때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란? 세계 곳곳의 반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고전적인 바리케이트와 무장한 시위대-경찰의 충돌이다. 사진은 6월 26일 칠레 산티아고의 시위 모습. [사진 europeans against the political system 페이스북]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의 반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2011년 튀니지ㆍ이집트 혁명부터 올해 터키ㆍ브라질 반란까지 모두 '중산층 혁명'이라고 주장한다[월스트리트저널 6월 28일ㆍ링크]. 후쿠야마의 기고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후 우리 언론에서도 '중산층 혁명'에 대한 기사가 잇따랐다. 특히 경향신문은 7월 3일자 1면과 8면 두 개 면을 사용해 가장 크게 '중산층의 반란'을 다뤘다. 이 글에서는 후쿠야마의 월스트리트 기고를 중심으로 '중산층 혁명'에 대해 따져보고자 한다.

- - - - - - - - - - - - -

경향신문 7월 3일자 지면에는 '지구촌 휩쓰는 중산층의 반란'이란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물결을 분석하고 있다. 이번 시위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군부독재에 맞서는 정치세력도, 세계화의 그늘 속에 좌절한 젊은이들도 아닌 '글로벌 중산층'"이라는 게 요지다[경향신문 7월 3일자 1ㆍ8면ㆍ링크].

최근 저항에 대한 경향신문의 '중산층의 반란'이라는 규정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중산층 혁명(The Middle-Class Revolution)'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격차(the gap)'를 이번 시위의 공통점으로 꼽고 있다. 후쿠야마에 의하면 세계적인 자본주의 성장은 거대한 규모로 중산층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됐지만 정치가 이 증대된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직면한 실패가 최근 시위들이 공유하고 있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처럼 터키와 브라질에서도 정치적 저항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평균 이상의 교육 수준과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기술 친화적인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위를 조직하고 연대를 건설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반란과 혁명에 대한 틀에 잡힌 관념이 많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배운, 억압받는 이들이 들고 일어난 시위는 마치 옛 이야기처럼만 여겨진다. '중산층 혁명'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시위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중산층의 성장? 세계는 평평해졌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선 세계적으로 봤을 때 '중산층'의 성장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쿠야마 스스로도 중산층의 증가 현상이 중국ㆍ인도에 집중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지난 2000년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를 강태한 경제위기와 2000년대 초 미국의 IT버블 붕괴를 거친 후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네 개 나라가 매력적인 투자처로 새롭게 제시됐다. 브릭스(BRICs)는 이 네 나라의 이름에서 비롯한 단어로 세계적 금융자본인 골드만삭스가 2003년 처음 사용했다. 즉 애초 브릭스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금융자본의 반응이었다. 세계경제의 성장과 중산층의 부흥은 결코 전 세계적으로 고르게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후쿠야마가 주목하고 있는 터키와 브라질에서 지니계수(세계은행, 100 기준)는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과 룰라의 노동자당(PT)이 집권한 2003년 각 43.42와 58.78에서 2010년 터키 40.03, 2009년 브라질 54.69으로 줄어들었다. 2010년 멕시코의 지니계수가 47.16임을 감안하면 브라질의 불평등이 여전히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터키는 2008년 38.95까지 떨어졌던 지니계수가 2010년 다시 증가한 것이다. 후쿠야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불평등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중국은 1981년 이후 꾸준히 지니계수가 상승해 2009년에는 42.06에 다다른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지난해 12월 또다른 보도에 의하면 중국가정금융조사연구센터(쓰촨성 청두 시난차이징대와 인민은행 금융연구소가 함께 설립한 연구소)의 조사결과 2010년 중국 지니계수는 0.61에 달해 '폭동을 부를 수준'이다[동아일보 2012년 12월 11일자 21면ㆍ링크].

터키와 브라질에서 빈곤층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브라질의 빈곤층(국가 빈곤선 기준 빈곤층 인원수, 국제 빈곤선 기준 이하 인구 포함) 인구는 2004년 33.7%에서 2009년 21.4%로, 터키는 2004년 25.6%에서 2009년 18.1%로 줄었다. 그러나 실업률은 정체 수준이며, 터키의 경우 장기실업률은 2003년 23.4%에서 2011년 26.5%로 오히려 증가했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후쿠야마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도 "평균 이상의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서울경제는 무르시를 실각시킨 이집트 제2혁명의 원인을 "치솟는 청년 실업률ㆍ경제난"이라고 지적한다. 민간연구소들의 조사에 의하면 30세 이하의 청년 실업률은 60%에 달한다는 것이다. 튀니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랍의 봄의 도환선이었던 튀니지 혁명은 한 대졸 노점상의 분신으로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과일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경찰의 단속으로 노점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가 분신하면서 높은 실업률과 물가에 고통받던 튀니지 인민들이 반란에 나선 것이다[프레시안 2011년 1월 16일ㆍ링크].

경향신문이 '중산층의 반란'이라고 부른 최근의 보스니아 시위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스스로 지적하듯이 "보스니아는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이 유럽연합 평균의 29% 수준에 머무는 유럽 내 가장 가난한 국가"이고 "실업률이 44.6%에 달하면서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경향신문 7월 3일자 8면ㆍ링크]. 부패한 정치인의 공직 임명에 반발해 시작된 불가리아 반란도 다르지 않다. 이 반란이 시작되기 세 달 전 불가리아 인민은 전기요금의 급등에 반발해 거리로 나섰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분노한 시민을 달래기 위해 조기총선을 실시했지만 사태의 수습은 아직 멀어 보인다.

결국 이 모든 반란의 배경에는 고전적인 테마가 자리잡고 있다. 즉 극심해진 빈부격차, 열악해지는 삶의 질이 그 공통된 배경인 것이다. '중산층의 성장'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좀 더 평등해진 세계의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경제성장은 몇몇 나라의 소수에게만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가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경향신문은 이 중산층을 부르킹스 연구소의 기준을 빌어와 10~100달러의 소득수준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09년 '글로벌 중산층'은 18억명에 이른다. 이 추세는 계속 이어져 2030년에는 세계인구 80억명의 절반을 넘는 48억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이 적절한지 따지기 이전에 앞에서 살펴본 세계경제의 현실은 경제적 기준의 중산층 성장이라는 주장이 현실과 다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였을까. 후쿠야마는 중산층을 경제적 기준 만으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는 중산층을 "교육과 직업, 자산의 소유에 의해 정의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가 '중산층'의 정치적 태도를 예측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세금을 많이 내는 중산층은 정치에 더 민감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술 친화적인 이들은 다른 나라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더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수준이다. 더 높은 교육수준은 진보와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이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혁명들까지 끌고 온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중국 혁명 모두 불만을 품은 중산층이 주도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행동 방침이 소작농과 노동자, 빈민층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848년 '인민의 봄'은 사실상 유럽 대륙 전체에서 분출한 혁명이 직접적으로 앞선 수십여 년 동안의 유럽 중산층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혁명가들을 보자.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ㆍ생쥐스트, 1848년 혁명의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루이 블랑, 1871년 (비록 결정적 순간에 감옥에 갖혀있었지만) 파리 코뮌의 블랑키, 1917년의 레닌 …. 이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대표적 혁명가들은 몰락한 귀족 또는 교육 받은 지식인 출신이다. 심지어 엥겔스는 자본가다.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는 또 어떤가.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의사다. 우리는 이러한 목록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들 혁명의 대표자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배후에 더 거대한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1789년부터 1794년 사이 상퀼로트의 행동이 없었다면 로베스피에르의 위명 또는 악명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상퀴로트의 핵심 지도자들을 숙청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혁명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대중을 발견할 수 없었고 바로 그 때 그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 반동이 닥쳐왔다. 마르크스에게 '붉은 박사'라는 악명을 안겨줬지만 1848년 혁명은 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게 아니며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1871년 블랑키 없이 코뮌을 80일간 운영했다. 1917년 레닌에게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가 없었다면 볼셰비키의 10월 봉기는 실패했을 것이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동맹, 혁명의 필요조건

물론 후쿠야마가 '개인'으로서 혁명을 주도하는 중산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과거의 혁명을 얘기할 때 '개인'으로서 혁명가의 출신성분을 따지지만 현재의 혁명을 얘기할 때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혁명에서 이 중산층 '집단'의 다른 계급 또는 계층과의 동맹은 매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시위와 봉기, 때때로 혁명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이 주도하지만 마지막에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것에는 드물 게만 성공한다. 그것은 중산층이 발전된 국가에서 사회의 소수 이상을 대표하지 못하고 그들 내부가 스스로 분열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의 다른 부분과 동맹을 맺지 못하는 한 그들의 운동은 지속적인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후쿠야마는 동맹을 맺는 것 자체가 중요한 듯 말하지만 사회를 뒤흔드는 중요한 투쟁은 거의 언제나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행동하며 벌어진다. 다시 한 번 그 목록을 늘어놓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 1848년 혁명, 1817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혁명 모두가 그랬다. 보통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데서 오는 계급의 미발전(또는 충분히 분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혁명은 하나의 계급 또는 계층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노동계급은 소수였으며 레닌과 볼셰비키는 농민의 협력을 얻기 위해 여러 타협을 해야만 했다.

현재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터키에서 젊은 활동가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파업과 쿠르드족의 연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칠레에서는 무상교육과 공교육 강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에 교사ㆍ부두ㆍ광산ㆍ의료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연대에 나섰다
[참세상 2013년 6월 27일ㆍ링크].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은 오클랜드 항만 노동자와의 연대, 시카고 교사 파업, 월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거대한 투쟁들이 자동적으로 노동자 반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집트의 두 번째 혁명에는 무르시 정권에 반대하는 거의 모든 세력이 함께 참여했다.

계급 화해의 정치, 모호한 미래

이미 동맹은 현실에서 이뤄져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동맹이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중요한 동맹의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1849년 2월의 쁘띠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이 바로 그것이다. 1848년 파리 노동자의 6월 봉기가 무참히 진압된 뒤 쁘띠부르주아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위협받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보장해 주는 제반 민주주의적 보장책들이 반혁명으로 인해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쁘띠부르주아는 노동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접근했다". 6월 봉기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노동자는 이들의 제안에 동의해 공동강령을 마련하고 연합선거위원회를 발족해 공동후보를 추천했다.

"플로레타리아의 사회적 요구로부터 혁명적 요소가 사라지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대신하게 되었다. 쁘띠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주장에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형태가 없어지고 사회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 사회-민주주의의 독특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된다. 곧, 민주공화주의 제도가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 극단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양자 사이의 적개심을 무디게 하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 53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동맹의 결과 1849년 5월 28일 입법국민의회가 열렸을 때 마르크스가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한 산악당은 750석 중 200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 중 하나와는 맞먹을 수 있는 수였다. 특히 파리에서 선출된 의원의 다수가 산악당이라는 점에서 이 동맹은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월 13일 산악당은 2주 만에 질서당(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의 연합)에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후퇴한다. 그 지도자인 르드뤼롤랭은 영국으로 망명해 1870년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주파[산악당]는 과도적 계급, 즉 그 안에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동시에 서로 뭉뚱그러져 있는 쁘띠부르주아지의 대표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계급 적대 일반을 초월했다고 상상한다. 민주파들은 자신들이 특권계급과는 대립하고 있으나, 나머지 국민과 함께 인민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며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민의 이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법에 근거하여 투쟁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조차 그들은 여타 계급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원을 그다지 심각하게 평가할 필요조차도 없다. 단지 신호만 보내주면 인민은 자신들의 고갈될 줄 모르는 힘으로 압제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 58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1848년 6월 봉기의 패배로부터 쁘띠부르주아에 대한 의심이 가시지 않은 노동자에게 사회-민주주의의 모호한 정치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계급타협 정치의 종언

적대적인 계급의 이해관계를 화해키려는 모호한 정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브라질에서의 반란은 이러한 정치의 종말을 보여준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의 지도자인 페드로 스테딜레는 "신자유주의 15년, 그에 이어 계급타협 정부의 지난 10년은 정치를 자본의 인질로 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룰라 시절에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의 당근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세계경제위기로 지우마 호세프에겐 룰라와 같은 좋은 조건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참세상 2013년 7월 2일ㆍ링크, 레디앙 2013년 6월 27일ㆍ링크]. 그럼에도 후쿠야마는 "많은 것은 리더십에 달렸다"며 반란을 적절한 개혁에 대한 타협으로 이끌 수 있길 바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산층 중) 기업가적 소수는 정치인들에게 부패의 책임을 지우고 수혜자 중심의 정치를 가능케 하도록 원칙을 바꾸는, 브라질의 정치 체제 전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중산층 동맹의 기초를 지원할 수 있다. 이것은 광범위한 중산층이 동원돼 19세기적 정실주의를 끝장내고 공적 서비스를 개혁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성공적으로 이끈 미국의 진보 시대(1890~1920년)에 일어난 일이다. …… 호세프 대통령에게 봉기는 좀 더 야심찬 체제 개혁을 시작할 계기다."

실제로 그녀는 시위대에 대해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녀와 달리 브라질 경찰은 터키의 경찰, 이집트의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잔인한 폭력으로 시위대를 대하고 있다. 시위대 또한 정부의 유화적 태도에도 결코 물러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후쿠야마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진보 시대가 1차 세계대전과 세계적 혁명의 물결 속에 막을 내렸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터키와 이집트, 그 밖에 많은 나라의 반란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배자들이 실제로 양보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 정치인들은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의 압력하에 긴축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대중의 계속된 반란과 위협에도 말이다. 올해 초 대중의 저항에 직면해 조기총선을 치뤘던 불가리아에서는 제1당이 정부 구성 권리를 포기했다. 이집트에서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뿌리 내린 지난 수 십년의 활동을 기반으로 무슬림형제단이 1차 혁명의 성과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돼 그들도 대안이 아님이 입증됐다. 무슬림형제단은 국제통화기금의 식료품과 공공요금 보조금 삭감 압력에 굴복했다. 실업은 해결되지 못하고 더 심각해졌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억압당했다.

반란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들에서 권위주의의 강화, 경찰의 잔인한 시위대 탄압이 분노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양보할 게 없는, 타협할 여지가 없는 정부는 주먹에 의지하기 쉽다. 계급타협 정치는 좌파가 아니라 우파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먼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기회

그럼에도 계급타협 정치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반란에서 계급 간 대결이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진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중간계급의 지위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 전체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양대 계급의 대결로 몰아간다는 사정 자체가 갈등을 복잡하게 한다.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중간계급이 소부르주아적 습속을 버리긴 어려우며 프롤레타리아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현실 때문에 부르주아적 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중산층,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중간계급이 (이 둘이 완전히 일치하진 않더라도) 혁명의 대열에 끝까지 참여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무르시를 쫓아낸 2차 혁명에서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은 군부의 폭력에 기대고 있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반란의 배경이었던 국제통화기금의 긴축 압력에 맞서지 않고 있다.

노동계급도 분열돼 있다. 민족적ㆍ인종적ㆍ종교적ㆍ성적 차이에 기반한 전통적인 분열의 위세는 여전히 강력하다. 단결에 대한 열망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계급 간 타협에 대한 미련도 그렇다. 이번 반란들도 분열된 노동계급의 현실 때문에 단일한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인민' 또는 '민중'의 반란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는 없다. 패배든 승리든 반란은 현실의 역사에 흔적을 남길 것이고 그 흔적은 어느 계급이 혁명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최근의 반란으로 사회 전체가 흔들리며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진출하고 있다. 때로는 반란에 적대적인 세력까지도 집단적 행동으로 역사의 키를 쥐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산층의 혁명'은 지나치게 협소한 규정이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동맹은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고 갈등할 것이다. 중산층 중심의 계급타협 동맹은 우파와 지배계급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따라서 동맹에서 어떤 정치에 의한, 어느 계급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여러 투쟁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계급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학생 반란에는 교사와 광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스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노동계급은 2011년 아랍의 봄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허약해 보이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몇몇 짧은 장들을 예외로 한다면, 1848년에서 1849년까지의 혁명 연보는 중요한 부분마다 "혁명의 패배!"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패배 때문에 사라진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의 잔재, 다시 말해 아직 날카로운 계급 대립으로까지는 고양되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것은 2월 혁명 이전의 혁명적 당파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ㆍ환상ㆍ관념ㆍ계획들이었는데 혁명적 당파들은 2월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패배를 통해서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적 진보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진보의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들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결속력 있고도 막강한 반혁명이라는 하나의 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인데, 이 적과의 싸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혁명적 당파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으로 성숙해 갔다.
-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프랑스 혁명사 3부작' 39쪽, 임지현 외 옮김, 소나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당파는 패배를 통해서만 과거의 습속과 환상,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현대의 우리도 이어진 투쟁의 굴곡 속에 몇몇, 때로는 심각한 패배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열었고, 그들이 멈췄던 곳으로부터 보다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왼쪽부터 계몽주의 개혁가 요한 스트루엔시, 덴마크 절대왕정의 군주 크리스티앙 7세, 영국에서 온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


경향신문은 '레 미제라블'의 흥행돌풍을 다룬 특집 기사에서 '비슷한 영화'로 로얄 어페어'를 소개한다.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로얄 어페어'를 추천한다. 정치는 그 시대 민중의 수준이라는 결론이 쉽게 와닿는다." - 경향신문 1월 14일자 8면(링크)

경향신문의 이런 주장은 박근혜가 당선됐으니 경상도 사람들은 민영화에 피해를 입어도 싸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 정책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가난한 사람들이 왜 그녀에게 투표했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멍청해서"라는 답변이 달린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 '로얄 어페어'는 당대의 '멍청한' 대중을 탓하는 영화일까? 이 영화의 이야기를 찬찬히 재구성해 보자(이 글에는 영화 '로얄 어페어'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 스트루엔시는 계몽사상에 심취한 의사다. 볼테르와 루소의 책을 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익명으로 직접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왕의 주치의가 되는 것을 꺼려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계몽사상가일지라도 호사스런 가발과 복장으로 차려입은 주치의 후보들 사이에서 약간은 위축되기도 한다.

그가 진료를 담당하게 된 크리스티앙 7세는 미친 왕이다. 영화를 다 보고난 지금에는 정말 '미친 왕'이었는지 의문이다.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있는 이 왕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가면이었다. 의회와 내각은 그에게 서명만을 강요한다. 그는 법령을 읽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제안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왕이 저 귀족들과 교감을 시도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오직 연극을 통해서만 세계를 본다.

스트루엔시가 크리스티앙 7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왕은 오직 연극의 세계에만 속해 있었다. 이 계몽사상가는 당황했지만 그 왕과 함께 기꺼이 연극의 세계에 들어간다. 크리스티앙 7세는 기꺼이 자신의 세계에 동참해준 이 의사의 동료가 된다.

동료가 된 왕과 의사는 내각을 자신들의 연극-세계로 다시 만든다. 어차피 귀족과 성직자의 가면에 불과했던 왕이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의 가면이 되는 것을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이들 동료는 고문을 없애고 언론ㆍ출판에 대한 검열을 중단한다. 천연두 예방접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귀족ㆍ성직자는 내각과 의회에서 쫓겨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이란 걸 고려하면 볼테르가 크리스티앙 7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북방의 빛'이라고 찬양한 것이 십분 이해된다.

이 빛나던 개혁의 시절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왕비 캐롤라인도 그들의 즐거운 동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국 왕실 출신의 왕비는 미친 왕의 완전한 동료가 되지 못한다. 그녀는 오직 스트루엔시를 통해서만 이들의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이 둘의 관계를 눈치챈 크리스티앙 7세의 질투가 왕비를 탐한 스트루엔시에 대한 것인지 자신의 동료인 스트루엔시를 차지한 왕비에 대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둘의 관계가 이 개혁의 동료들을 위기로 몰아넣어지만 왕과 의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아니다. 스트루엔시가 스스로 왕의 위치에 올랐을 때, 모든 법령에 대해 왕을 대신해 서명하려 했을 때 이 동료는 결정적으로 불화를 맞는다.

프로이센의 왕. 덴마크의 왕을 대신한 또 한 명의 왕이 섰을 때 더 이상 개혁은 지탱될 수 없었다. 봉건영지에 묶여있는 농민과 도시의 날품팔이ㆍ직인들은 스스로를 개혁의 주역으로 내세울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성직자와 귀족에게서만 자신의 정치적 표현을 찾을 수 있었다. 개혁군주의 가면은 처음부터 가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난 군중이 왕실에 몰려와 왕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크리스티앙 7세는 그 앞에 설 수 없었다. 거기에는 오직 또다른 왕, 프로이센의 왕이 있었을 뿐이다.

실각한 스트루엔시가 단두대에 오르기 전 인민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편이오"라고 외친 게 공허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인민을 위한 개혁은 오직 인민 스스로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 영화 '로얄 어페어'는 그 인민의 얼굴을 왕의 가면으로 보여준다.

스트루엔시가 왕을 대신하려 했을 때, 그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 인민을 대신하려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끊임없이 상승의 길을 걸었다. 성난 인민들은 오랫동안 쌓여왔던 분노를 자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발전 수준은 그들의 요구를 성취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산악당은 자신들의 가장 든든한 동료였던 상퀼로트, 그리고 그들의 조직이었던 에베르파와 코르들리에 클럽을 억압하고 숙청해야만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모든 인민을 대신해 조국의 혁명을 방어하려 했을 때 더 이상 그를 지켜줄 인민은 남아있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소개ㆍ링크).

'로얄 어페어'의 개혁가 스트루엔시가 크리스티앙 7세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가 왕을 대신하려 하면서부터 진짜 왕은 그를 보호해줄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흔하디 흔한 왕실 치정극으로 보이는 이 '로얄 어페어'는 혁명가와 계급의 관계에 (또는 일반적으로 정치인과 대중의 관계) 대한 훌륭한 우화를 제시한다. "정치는 그 시대 민중의 수준이라는 결론이 쉽게 와닿는다"는 경향신문의 지적은 이 영화에 대한 너무 쉬운 이야기일 뿐이다. '로얄 어페어'가 제시하는 정치는 그보다 더 급진적이다.

Posted by 때때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모르가니 2013.11.27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미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5월 5일)은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입니다. 어쩌다보니 오늘 한 독서모임에서 류동민 교수가 쓴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를 읽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마르크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제가 아는 한에서 간단하게 끄적거려 봅니다.


1882년 병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알제리에서 머리카락을 모두 자른 마르크스는 1882년 4월 28일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내 예언자의 턱수염과 왕관처럼 머리를 덮었던 영광을 없애버렸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의 트리어 지방에서 태어납니다. 마르크스는 개종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힌 바는 없습니다.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에 따르면 자신의 유대인 혈통에 저주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합니다.

당시 독일은 영방국가들로 이뤄져, 아직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전국적인 통일된 정치체제가 만들어지지 않았었죠. 영방국가 체제에서 산업의 발전은 여전히 제약받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이 프랑스와 영국에서와 같은 발전을 빗겨갈 수는 없었습니다. 더디지만 산업은 성장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또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헤겔의 영향을 받은 이들 중 일부는 교회와 권위주의적 국가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헤겔 좌파, 흔히 '청년헤겔파'라고 부르죠. 헤겔과 동시대의 지성 다수가 그러했 듯이 헤겔도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에 강하게 열광했죠. 노년의 헤겔이 프로이센과 구체제를 옹호하는 철학자로 몰렸던 것과 달리 그의 철학은 혁명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담고 있었습니다. 청년헤겔파는 헤겔을 급진적으로 해석하며 좌파로서 교회와 구체제를 비판했죠.

고향을 떠나 본에서 법학을 전공하게 된 마르크스는 곧 자신의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고 베를린으로 학교를 옮깁니다. 마르크스 또한 청년헤겔파와 교류합니다. 이미 대학에서 급진주의가 힘을 잃어가던 시기, 마르크스는 학교에 자리 잡지 못하고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첫 정치 생활을 시작합니다. 라인신문은 자유주의적 좌파로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국가의 검열을 피한 마르크스의 신랄한 비판 덕이죠. 이 시기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인간의 물질적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평생의 친구인 엥겔스를 만난 것도 라인신문 시절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시기 아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죠. 그가 공산주의자로 변하는 것은 탄압 때문에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파리로 간 이후입니다.

파리에서 그는 당대의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합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엥겔스겠죠. 파리에서 다양한 공산주의ㆍ사회주의 흐름을 검토한 그는 이 시기 헤겔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자가 됩니다. 물론 그는 이후에도 자신이 헤겔의 제자임을 결코 숨기지 않았고, 그의 여러 저작들에는 헤겔적 방법이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파리에서도 결코 혁명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독불연보'를 통해 독일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합니다. 이 독불연보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이 실리죠. 마르크스는 파리에서도 추방돼 브뤼셀로 자리를 옮깁니다.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는 독일 노동자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의뢰로 '공산당 선언'을 씁니다. 이 선언은 1848년 2월에 처음 출간됩니다. 선언 출간 후 곧 1848년 혁명의 서막이 프랑스에서 열립니다. 브뤼셀에서도 쫓겨난 마르크스는 다시 파리로 갑니다. 프랑스 혁명의 불꽃이 독일로 옮겨붙자 마르크스는 다시 쾰른으로 돌아가 '신라인신문'을 창간합니다. 당시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거부했던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이번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후에는 부르주아지와 노동자의 동맹을 주장하지 않죠.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태도는 정치에 대한 그의 기본적 입장을 보여줍니다. 때론 불가피한 동맹을 통해서라도 정치적 개입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으로 타 계급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신랄한 어조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 계급의 정당과 별개의 정당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후 제1인터내셔널에서도 그러한 동맹과 협력을 결코 피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과감히 관계를 청산하는 것 또한 그의 정치개입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독일에서의 혁명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다 결국 패배로 끝납니다. 마르크스의 신라인신문 또한 폐간되죠. 신라인신문 마지막 호는 붉은색 잉크로 인쇄됐다고 합니다. 혁명의 물결이 지나간 후 그는 다시 여러 국가들에서 쫓겨나 당시 가장 자유주의적인 국가인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런던에 머물죠.

런던에서의 첫 10년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은 그의 아이들 목숨을 앗아갔죠. 상황 때문에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대영 박물관에서 그의 필생의 역작인 '자본론' 저술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본론은 20여년이 지난 1867년에야 발간됩니다. 마르크스는 생계를 위해 뉴욕 트리뷴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거나 관심 없는 주제에 관한 의뢰는 엥겔스에게 맡기기도 했죠. 물론 기사는 '마르크스' 이름으로 나갔고, 고료도 마르크스에게 돌아갔죠. 마르크스를 따라 영국에 자리잡은 엥겔스는 멘체스터에 방직공장을 운영합니다. 당시엔 아직 수입이 많지 않아 그도 마르크스의 빈곤한 상황의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진 못했습니다. 그저 기꺼이 마르크스를 대신해 뉴욕 트리뷴 기사를 써주긴 했습니다.

1857년의 공황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합니다. 1864년 런던에서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 출범합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이나 제3인터내셔널처럼 단일한 정치를 지닌 정치집단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와 남부 유럽의 아나키즘적 경향, 영국의 노동조합주의, 독일의 라쌀레주의가 혼재한 상황이었죠. 그러함에도 마르크스는 대단한 카리스마와 술수로 제1인터내셔널을 최대한 자신의 의도와 전략대로 운영합니다. 바쿠닌과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을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1870년까지는 잠재적이었습니다.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발발은 인터내셔널에게 결정적 상황을 맞게 합니다. 프로이센의 점령 하에서 우유부단한 부르주아지의 대응(나폴레옹 황제는 이미 프로이센 황제의 포로가 된 상황)에 분노한 파리의 상퀼로트는 봉기합니다. 1871년 파리코뮌이 바로 그것입니다. 파리코뮌의 성립 전까지 마르크스는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반대하며,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을 최대한 자제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코뮌이 만들어지고 잔인하게 탄압받자 그는 가장 앞에서 파리코뮌을 방어합니다. 당대사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지는 '프랑스 내전'은 바로 이 과정에서 쓰여집니다. 이 책은 1848년 혁명을 다룬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함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불립니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으로 불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파리코뮌으로부터 그 구체적 상을 얻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평균적 임금을 받는 언제나 소환 가능한 대표, 입법과 행정의 통일 등은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으로 자리잡습니다.

파리코뮌의 진압 후 인터내셔널은 그 배후로 지목됩니다. 물론 사실과는 다르죠. 파리코뮌에는 공산주의자들 뿐 아니라 자코뱅주의자, 프루동주의자, 블랑키주의자들 그야말로 다양한 경향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어쨌든 파리코뮌 이후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의 해산해야 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바쿠닌과의 갈등도 더 이상 참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 총평의회를 미국으로 옮김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실현합니다. 공식적 해산은 더 이후지만 1872년 미국으로의 이전으로 실질적인 해산이 됐다고 봐야죠.

인터내셔널 해산으로 마르크스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은 마무리됩니다. 물론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이 성장하면서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충고와 의견교환은 계속됩니다. 1875년 라쌀레의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민당을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고타에서 만들어진 강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강력한 비판을 받죠. 그 서한은 '고타 강령 비판'이라고 불리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유명한 정식,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가 나옵니다.

말년의 마르크스는 런던 망명 초기보다 생활이 한결 나아졌지만 그 시절의 가난은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에 비해 짧게 산 것은 아니지만 그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았죠. 결국 1883년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지금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혀있습니다.

200년 전에 태어난, 150여년 전 사람의 글과 지혜를 우리가 참조할 필요가 있는가?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우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공자는 그보다 더 오래전 사람이지만 그들의 지혜는 인류의 유산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특히 현대 사회과학의 방법에 그가 미친 영향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이사야 벌린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둘째로 그가 자본론을 쓰던 시절, 영국과 몇몇 국가에서나 그 발전의 초기 상태를 보여주던 자본주의는 지금에 와서 지구 전체를 뒤덮으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분석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기파괴적 방식에 의해 지구와 인류의 생활이 지배받고 있습니다. 체제를 옹호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조차 위기가 반복될 때면 마르크스의 귀환을 목소리 높여 외치곤 합니다.

당연히 그의 글이 현대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담고 있진 않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접근법은 그의 어떤 글에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진 않습니다. 소련 공식철학자들의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체계와 달리, 마르크스의 방법은 어떤 상황의 변수만 주어지면 이를 대입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방정식이 아닙니다. 그가 '자본론'의 기본적 개념들을 1840년대 이미 갖고 있었지만 '자본론'으로 묶어내기 위해 무려 20년 가까이 영국 대영박물관의 열람실에서 현실의 증거들을 찾은 데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도 파리코뮌이라는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죠. 타협하지 않는 냉철한 지성은 현실에 대한 치밀한 탐구로부터 비롯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잠시 진정되는 듯 싶었습니다. 국가 부문으로 전가된 부채는 체제 전체를 더 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 첫 희생자는 남부 유럽입니다. 위기가 언제나 혁명적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체제에 대한 의문은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자살이라는 개인적 절망의 형태일지라도 말이죠. 이러한 개인적 절망은 집단적 저항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마르크스의 지혜는 집단적 저항을 만들기 위한 유용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마르크스를 만나고 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만날 수 있는 비교적 짧고 이해하기 쉬운 몇몇 추천도서를 아래 붙입니다.

마르크스주의 개관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다니엘 벤사이드 지음|양영란 옮김|에코리브르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정성진, 정진상 옮김|책갈피

마르크스의 생애
마르크스 평전|프랜시스 윈 지음|정영목 옮김|푸른숲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이사야 벌린 지음|안규남 옮김|미다스북스

주요 저서 1 : 마르크스주의의 요체
공산당 선언|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공상에서 과학으로|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나상민 옮김|새날

주요 저서 2 :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임금 노동과 자본|칼 마르크스 지음|김태호 옮김|박종철출판사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칼 마르크스 지음|김호균 옮김|중원문화

주요 저서 3 : 마르크스의 역사·정치 이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칼 마르크스 지음|최형익 옮김|비르투
프랑스 내전|칼 마르크스 지음|안효상 옮김|박종철출판사

주요 저서 4 : 마르크스의 철학
헤겔 법철학 비판|칼 마르크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다큐멘터리 '칼 맑스'(2010년 12월 ZDF 방영, 찬별님 자막ㆍ링크)

Posted by 때때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갈매나무 2012.05.05 2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잘 읽구 가요!
    그나저나 오늘 같은 날 독서모임이라니. 뜻깊습니다ㅋ

  2. EM 2012.05.06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멋지세요!
    기왕이면 이것도 추가요. http://blog.jinbo.net/cheiskra/51
    아쉬운 점도 많지만, 영상의 전달력이란 대단하기 때문에.. ㅎㅎ

  3. 찬별 2012.05.06 17: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 감사합니다. EM님의 소리 없는 지원이 있었군요. ^^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4. k.o.s.a.j.a 2012.05.07 1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저기서(라고 해봐야.. dju**,socialand*** 이지만;; ) 쥔장님의 글을 애독하고 있지만, 보면서 느끼는 것은.
    1.직장인이 확실하다.
    2.도대체 언제 이많은 책을 다 읽는거야!!!(혼잣말이라 높임말이 아님;;)

    대단하세요.~
    글들 몰래 몰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EM 2012.05.08 1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시네요 ㅎㅎㅎ
      쥔장님 화이팅, 꼬사자님 화이팅!! :)

  5. k.o.s.a.j.a 2012.05.07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히. 자본론에 관한 글들 바쁜시간중에 어렵겠지만 계속해서 화이팅요!~~
    ' 아니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이야!!' 를 외치며 구글링>한국어웹 검색 을 주구장창 누르는 저같은 사람에겐 쥔장님같은 분의 정리가 너무 소중해요...

  6. 와짱이다 2015.08.19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ㅠㅜㅜㅠㅜㅠㅜㅠㅜ글 감사해요 덕분에 도움 마니 되ㅆ너요

<2007년 10월 20일 작성>

프랑스. 프랑스를 말할 때 제 머릿 속에 가장 처음 떠오르는 것은 '혁명'입니다. 1789년, 1848년, 1871년의 파리코뮌은 이미 고전적 사례들이죠.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1968년 혁명, 1995년의 총파업, 재작년의 유럽헌법 반대 투쟁과 작년의 CPE 반대 투쟁까지. 바로 어제(2007년 10월 19일)는 사르코지의 우파 개혁에 맞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시작되었죠. 프랑스인들의 혈관엔 마치 혁명과 투쟁의 열기가 적혈구 대신 가득차 있는 듯 싶습니다.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프랑스의 혁명가들이 제기한 이상은 무수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사로잡았습니다. 평등과 우애에 기초한 자유로운 사회. 1789년으로부터 10여년의 혁명은 '쿨'한 현실주의자들에게 웃음거리 취급받을 '말'들이 그 행동의 진실성으로 사람을 감동시켰던 시대이죠.

그 시대, '기요틴의 독재자'로 불리며 비극적 삶을 살다간 혁명가가 있습니다. 오늘 얘기할 로베스피에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장 마생 지음|양희영 옮김|교양인

프랑스 혁명은 1791년 헌법의 서문으로 작성된 '인권선언'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인권선언의 탄생은 현대 민주주의 이념의 출발이라고 여겨지죠. 하지만 인권선언에도 불구하고 보통선거는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노력이 없었다면 인류 최초의 보편적 권리에 기반한 민주적 제도의 탄생은 그 시기를 훨씬 뒤로 했어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시민은 그가 누구이든, 모든 등급에서 대표자가 되기를 바랄 권리가 있습니다. 능동시민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려는 여러분의 논의는 결코 여러분이 선언한 인권선언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권 선언 앞에서는 모든 특권, 모든 차별, 모든 예외가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권리와 수입이 비례한다면, 10만 리브르의 랑트를 받는 사람은 그에 따라 10만 배나 중요한 시민이라는 것입니까?
-1789년 10월 22일 보통선거 폐지법안에 반대한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사실 1789년 혁명 직후 제헌의회에서 그는 간혹 번뜩이는 능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또 다른 혁명의 거인들에 비해 그리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혁명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외국군대들이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침략을 시도하던 시기부터입니다. 1792년 "조국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선언 이후 반혁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그의 진정한 역할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1789년 이전과 이후의 수많은 혁명에서 우리는 항상 무수한 반혁명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혁명의 성공 여부는 반혁명을 진압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죠. 혁명은 느리게 흐르던 역사를 수백배 빠른 속도로 움직이게 만듭니다. 정신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상황 변화는 어제의 급진파를 오늘의 보수파로 변화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바치던 무수한 혁명가들이 혁명의 생존을 위해-자신의 생존이 아닌- 반혁명 세력과 화해하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1917년 혁명에서 멘셰비키의 역할이 정확히 그러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혁명 초기 로베스피에르의 절친한 동료였던 파리시장 페티옹은 혁명의 와류에 휩쓸려 지롱드파로 후퇴합니다. 마라와 함께 코르들리에 클럽을 창설했던 당통은 지롱드파와의 화해를 바라다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여러 혁명가들 중 눈에 띄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일관되게 혁명의 급진파로서 자리잡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공포정치의 독재자로 비난받으며 처형당하는 순간까지도 혁명의 급진파로서의 위치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민중이여, 공화국에서 정의가 절대적인 권력으로 지배하지 않는다면, 이 단어가 평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자유는 헛된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두려움의 대상이며 아부의 대상이며 경멸의 대상인 당신들, 주권자로 인정받으면서 여전히 노예로 대접받는 민중이여! 정의가 지배하지 않는 곳이면 그 어디든 민중은 운명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사슬을 또 다른 사슬로 바꾸었을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
그리하여 악당들은 우리에게 민중을 배신하는 법을 강요하고, 따르지 않으면 우리를 독재자라고 부릅니다! 이 법에 동의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독재자로 낙인 찍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민중을 보호합시다. 그들은 범죄의 길을 통해 그리고 우리는 덕의 길을 통해 단두대로 달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1794년 7월 26일(테르미도르 8일) 국민공회에서의 마지막 연설

급진적 부르주아지로서 혁명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나가고자 한 그는 본능적으로 그가 기대어야 할 사회계급이 상퀼로트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1792년 8월과 1793년 5월에 그는 상퀼로트에게 호소함으로서 공화국을 방어해왔죠. 그러나 상퀼로트가 사회적으로 단일한 계급일 수 없던 사회적 발전상태는 그에게 비극을 안겨줍니다.

상퀼로트에는 가난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상퀼로트에는 소상인과 함께 때로는 대상인, 은행가까지 포함되어 있었죠. 파리의 각 구에 건설되어 있던 코뮌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그 정치적 성향에 복잡한 모순을 앉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가 가능했던 데는 이러한 상황이 결정적이었죠. 국민공회 내 우파와 극좌파가 손을 잡고 로베스피에르파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혁명이 가난한 이들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은 가난한 이들의 불만을 초기부터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이해하고는 있었죠.

곡물 교역의 자유는 우리 공화국의 생존과 양립할 수 없다. 우리 공화국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소수의 자본가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누가 곡물 교역을 담당하는가? 소수의 자본가들이다. 왜 그들은 교역을 하는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소비자에게 비싼 값에 곡물을 되팔아서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무제한적인 자유로 곡물가를 지배하는 이 자본가와 지주 계급이 노동자의 일당을 결정하는 데서도 지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때마다 열 명의 노동자가 줄을 서 있고, 부자가 결정권을 갖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적게 요구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그는 노동자의 값을 결정하고, 노동자는 그의 법에 따른다. 노동자는 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필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당은 16~18수인 반면, 밀은 스티에(setier, 1스티에는 약 75킬로그램)당 36리브르(1리브르는 20수)이다……. 따라서 일당은 생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1792년 11월 19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가 구종을 대신해 읽은 청원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직 몇십년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에 반해 부르주아지들은 이미 자신들의 계급을 형성하고 정치적 훈련을 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경제적 정책에 있어서 끊임없이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최고가격제가 시행되었지만 식량에 대한 최고가격제는 기만적으로 시행되는 반면 임금에 대한 최고가격제-임금도 '가격'에 포함시켰죠-는 철저히 시행돼 가난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배가시켰죠.

혁명을 성공시킨 두 계급-하나는 이미 성숙한 부르주아지와 다른 하나는 아직 맹아로서만 존재하던 프롤레타리아-의 분열은 자신들이 탄생시킨 혁명을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덕성'과 '최고존재'에 대한 순종을 '애국파 시민'들에게 호소함으로서 그 분열을 치유하고자 했고 그 방법이 불가능해지자 프레리알 22일의 법-혁명재판소에서 변호와 심문을 중단시킨 공포정치의 개막을 가능케 한 법-을 국민공회서 통과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포정치에 대한 책임 모두를 그에게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지롱드파 73인의 의원들을 처형에서 구해줬고 당통의 처형을 결정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저했습니다.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를 주도했던 세력의 일부분은 지나치게 가혹한 공포정치 때문에 로베스피에르에게 비판받고 소환됐던 의원들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가 프레리알 22일의 법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혁명은 언제나 그 논리에 있어서 좌우 양극단의 대결을 요구합니다. 혁명에서 더 큰 비극은 좌우 양극단의 화해를 요구할 때 발생하곤 합니다. 과거 사회를 대표하는 세력과 앞으로의 전진을 요구하는 세력이 화해하는 것은 평범한 시기엔 가능하지만 그 갈등을 최고조로 올려놓는 혁명의 시기엔 불가능한 일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항상 급진파의 역할을 자처했지만 그의 현실주의적 사고와 행동은 당시 막 싹트고 있던 '공산주의'적 사상과 행동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은 물질적 조건의 미성숙으로 인해 쉽게 정치적 조급증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혁명에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가난한 상퀼로트들의 지도자들-에베르파와 코르들리에 클럽-을 자기 손으로 숙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로베스피에르에게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에서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지난 두 번의 봉기 때완 달리 가난한 상퀼로트들에게서 도움받지 못하도록 만들었죠.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발걸음은 몇 세대 뒤 사회주의자들의 상상력에 풍부한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자코뱅의 적자는 100여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에서 태어나죠.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인 로베스피에르의 생생한 목소리를 충실하게 전달해줍니다. 우파의 공격에 맞서 자코뱅-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로베스피에르를 방어합니다. 한 인물의 전기로만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기는 힘듭다. 그러나 한 인물의 전기로 프랑스 혁명을 접해보겠다면 그 가장 훌륭한 선택은 바로 이 책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두군데 오타가 있긴 하지만 번역자와 편집자의 충실한 작업은 이 먼 나라의 옛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곳곳에 인물 설명, 각 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간단한 연표, 부록의 연표, 혁명기 주요 정파의 흐름도, 프랑스 혁명력 등은 책을 읽기 전에는 물론이고 읽은 후에도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특히 서울대 최갑수 교수의 서문은 여전히 우리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줍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이 책의 앞부분에 표시되어 있지만 저작권자를 찾지 못해 저작권 계약을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계약을 맺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로베스피에르가 1792년 4월 27일 자코뱅 클럽에서 한 연설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아! 우리는 승리를 거둔 행복한 조국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협받고, 분열되고, 억압당하는 조국이라면! 우리는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구하든지 아니면 조국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내게 자유에 열광하는 영혼을 주고, 독재자의 지배 아래 태어나게 한 하늘, 당파들과 범죄가 지배하는 시기까지 나의 생명을 연장시킨 하늘은 내 나라를 행복과 자유로 인도해야 할 길을 나의 피로써 그리라고 내게 명령하는 듯합니다. 나는 이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Posted by 때때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