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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좀 지난 일이지만 8월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둘러싼 작은 논쟁이 있었다. 지난해 경향신문에 연재되면서 나를 포함한 몇몇에게 비판을 받았던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그 중심이다. 사실 논쟁이라고 하기도 부끄럽다. 강신준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기존 단어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사용하며 시종일관 말돌리기와 도덕적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이건 예견된 일이다. 내 비판에서도 촛점은 강신준 교수의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지식에 대한 왜곡과 날조였다. 정치적 이념 혹은 학문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강신준 교수는 논쟁에 정당하게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마르크스의 적자로 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부활한 사민당은 점차 우경화 하다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그 핵심인 계급투쟁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영국 노동당이 국유화 강령을 포기한 것보다 30여 년 앞선 것이다.

더 심한 왜곡은, 아니 왜곡이라기보다 뻔뻔한 사기라고 해야 마땅한 데, 마르크스를 개혁의 기수로 내세우고자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 이런 경향은 꽤 오래전부터, 사실상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존 당시부터 있어왔다. 엥겔스가 '반뒤링'을 쓴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뒤링이 마르크스주의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없으니 그 시작은 베른슈타인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강신준 교수에 비해선 매우 솔직하다. 그의 후예들도 대부분 강 교수보다는 정직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혁주의적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왜곡하기보다는 마르크스를 '수정'하는 것을 택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것도 한 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훨씬 정직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정도의 정직함을 지니지 못한 강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변혁'과 '개혁'을 제멋대로 사용하며 마르크스를 자본주의 개혁 정치의 선구자로 그리고자 시도한다.

애초에 학문적 논쟁이 될 수준도 못됐을 뿐더러 저열한 사기 공작에 불과한 강신준 교수의 시도에 일일이 대응하는 게 문제였을 수 있다. 게다가 기초적인 역사적 지식에서 잘못된 부분도 너무나 많아 비판 이전에 교정하는 데만도 너무 많은 수고가 들었다. 초기에 열정적으로 비판을 준비하다가 그만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 지나가 잊혀진 논쟁을 내가 다시 끄집어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잠언 26장 4~5절은 우리에게 여전한 딜레마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지 마라. 너도 그와 비슷해진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지혜로운줄 안다.

아래는 미디어오늘에 연재된 김성구-강신준 교수 논쟁의 링크다.

김성구 1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강신준 1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김성구 2 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강신준 2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김성구 3 쟁점은 수정주의·교조주의가 아니라 ‘자본’ 곡해 여부다
강신준 3 김성구 교수와의 논쟁을 끝내면서
김성구 4 자본론 논쟁의 결말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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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엉망진창 2013.11.15 0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정주의자도 못되는, 무슨 변종 우파 이데올로그 같은 인물이 <자본>의 한국어 번역자라니.... 기이하고, 기이하고, 기이한 나랍니다, 한국은.

 

왼쪽부터 계몽주의 개혁가 요한 스트루엔시, 덴마크 절대왕정의 군주 크리스티앙 7세, 영국에서 온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


경향신문은 '레 미제라블'의 흥행돌풍을 다룬 특집 기사에서 '비슷한 영화'로 로얄 어페어'를 소개한다.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로얄 어페어'를 추천한다. 정치는 그 시대 민중의 수준이라는 결론이 쉽게 와닿는다." - 경향신문 1월 14일자 8면(링크)

경향신문의 이런 주장은 박근혜가 당선됐으니 경상도 사람들은 민영화에 피해를 입어도 싸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 정책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가난한 사람들이 왜 그녀에게 투표했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멍청해서"라는 답변이 달린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 '로얄 어페어'는 당대의 '멍청한' 대중을 탓하는 영화일까? 이 영화의 이야기를 찬찬히 재구성해 보자(이 글에는 영화 '로얄 어페어'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 스트루엔시는 계몽사상에 심취한 의사다. 볼테르와 루소의 책을 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익명으로 직접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왕의 주치의가 되는 것을 꺼려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계몽사상가일지라도 호사스런 가발과 복장으로 차려입은 주치의 후보들 사이에서 약간은 위축되기도 한다.

그가 진료를 담당하게 된 크리스티앙 7세는 미친 왕이다. 영화를 다 보고난 지금에는 정말 '미친 왕'이었는지 의문이다.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있는 이 왕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가면이었다. 의회와 내각은 그에게 서명만을 강요한다. 그는 법령을 읽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제안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왕이 저 귀족들과 교감을 시도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오직 연극을 통해서만 세계를 본다.

스트루엔시가 크리스티앙 7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왕은 오직 연극의 세계에만 속해 있었다. 이 계몽사상가는 당황했지만 그 왕과 함께 기꺼이 연극의 세계에 들어간다. 크리스티앙 7세는 기꺼이 자신의 세계에 동참해준 이 의사의 동료가 된다.

동료가 된 왕과 의사는 내각을 자신들의 연극-세계로 다시 만든다. 어차피 귀족과 성직자의 가면에 불과했던 왕이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의 가면이 되는 것을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이들 동료는 고문을 없애고 언론ㆍ출판에 대한 검열을 중단한다. 천연두 예방접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귀족ㆍ성직자는 내각과 의회에서 쫓겨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이란 걸 고려하면 볼테르가 크리스티앙 7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북방의 빛'이라고 찬양한 것이 십분 이해된다.

이 빛나던 개혁의 시절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왕비 캐롤라인도 그들의 즐거운 동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국 왕실 출신의 왕비는 미친 왕의 완전한 동료가 되지 못한다. 그녀는 오직 스트루엔시를 통해서만 이들의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이 둘의 관계를 눈치챈 크리스티앙 7세의 질투가 왕비를 탐한 스트루엔시에 대한 것인지 자신의 동료인 스트루엔시를 차지한 왕비에 대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둘의 관계가 이 개혁의 동료들을 위기로 몰아넣어지만 왕과 의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아니다. 스트루엔시가 스스로 왕의 위치에 올랐을 때, 모든 법령에 대해 왕을 대신해 서명하려 했을 때 이 동료는 결정적으로 불화를 맞는다.

프로이센의 왕. 덴마크의 왕을 대신한 또 한 명의 왕이 섰을 때 더 이상 개혁은 지탱될 수 없었다. 봉건영지에 묶여있는 농민과 도시의 날품팔이ㆍ직인들은 스스로를 개혁의 주역으로 내세울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성직자와 귀족에게서만 자신의 정치적 표현을 찾을 수 있었다. 개혁군주의 가면은 처음부터 가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난 군중이 왕실에 몰려와 왕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크리스티앙 7세는 그 앞에 설 수 없었다. 거기에는 오직 또다른 왕, 프로이센의 왕이 있었을 뿐이다.

실각한 스트루엔시가 단두대에 오르기 전 인민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편이오"라고 외친 게 공허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인민을 위한 개혁은 오직 인민 스스로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 영화 '로얄 어페어'는 그 인민의 얼굴을 왕의 가면으로 보여준다.

스트루엔시가 왕을 대신하려 했을 때, 그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 인민을 대신하려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끊임없이 상승의 길을 걸었다. 성난 인민들은 오랫동안 쌓여왔던 분노를 자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발전 수준은 그들의 요구를 성취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산악당은 자신들의 가장 든든한 동료였던 상퀼로트, 그리고 그들의 조직이었던 에베르파와 코르들리에 클럽을 억압하고 숙청해야만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모든 인민을 대신해 조국의 혁명을 방어하려 했을 때 더 이상 그를 지켜줄 인민은 남아있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소개ㆍ링크).

'로얄 어페어'의 개혁가 스트루엔시가 크리스티앙 7세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가 왕을 대신하려 하면서부터 진짜 왕은 그를 보호해줄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흔하디 흔한 왕실 치정극으로 보이는 이 '로얄 어페어'는 혁명가와 계급의 관계에 (또는 일반적으로 정치인과 대중의 관계) 대한 훌륭한 우화를 제시한다. "정치는 그 시대 민중의 수준이라는 결론이 쉽게 와닿는다"는 경향신문의 지적은 이 영화에 대한 너무 쉬운 이야기일 뿐이다. '로얄 어페어'가 제시하는 정치는 그보다 더 급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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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르가니 2013.11.27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미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신준 교수는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오늘 '자본'을 읽다' 9월 22일자 연재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강의를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환가치와 가치를 구별하는 데 애를 먹는 것을 자주 봅니다."(강신준 9월 22일)

지금까지 강 교수가 연재한 글 중 바로 위 문장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애를 먹는' 사람에는 강 교수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교환가치와 가치만이 아니죠.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 전체를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를 갖기로 하고 오늘은 자본론 1장에 집중해 강 교수의 연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자본론의 모든 인용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판으로 대체했습니다. 강신준 교수로부터의 인용은 모두 연보라색 굵은 글자로 표시했습니다.


1. 상품의 이중성 … 사용가치ㆍ가치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1권 77쪽)

마르크스는 상품의 이중적 측면을 위와 같은 말로 정의합니다. 1장 1절의 제목도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입니다.

설명은 사용가치부터 시작합니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합니다. 여기서 유용성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연적 필연성에 한정하면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으로서 상품은 최소한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용가치로서 상품은 그것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질적ㆍ양적으로 구별됩니다.

상품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됩니다. 일정한 비율로 말이죠. 여기서 상품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 또는 관계가 교환가치입니다. 상품이 교환가치라는 것은 서로 다른 상품들 속에 공통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로 다른 상품이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품의 자연적 속성은 공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상품의 유용성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용가치와 연관된 것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교환에 있어서 사용가치는 서로 다른 것이기만 하다면 문제가 안됩니다. 결국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거기에 남는 유일한 것은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 뿐입니다.

"이들 노동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생산물들은 유령 같은 형상[즉, 동질적인 인간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형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노동생산물들은 인간노동력이 그 지출형태와는 관계없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노동이 그들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로서 가치, 상품가치이다."(1권 47쪽)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품은 우선 유용한 물건으로서 사용가치입니다. 이 상품은 서로 일정한 비율로 교환됩니다. 즉 교환가치입니다. 이 교환가치는 상품이 공통된 무엇인가를 지니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 못합니다. 그 공통된 것은 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이고, 이것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 강의'에서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이를 도식화 합니다.


하비 53쪽

강신준 교수는 이와 달리 교환가치를 사용가치의 '발전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의 설명과 완전히 다른 것이죠. 상품이 교환가치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용가치여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유용하지 않은 물건(또는 서비스)을 교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용가치가 발전해 교환가치가 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교환을 위해서도 상품의 사용가치적 측면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가 '두 요소'라는 제목으로 상품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한 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죠. 이 설명이 불분명하다면 아래의 데이비드 하비의 설명을 읽어보시죠. 재밌게도 이 책은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것입니다.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여기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면 사용가치가……? 그러나 맑스의 분석은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그것도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바꿔 말해 우리는 다른 개념을 말하지 않고는 이들 개념 가운데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이 개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 있고 어떤 하나의 전체(totality) 속에 내재하는 관계들인 것이다."(하비, 55쪽; 오역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하비는 강 교수와 같은 설명을 '인과론'적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마르크스가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를 설명하는 자본론 1권 1장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인과론'적인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변증법에 대해선 차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래의 그림을 앞의 하비의 도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강신준 9월 15일

따라서 강 교수의 아래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교환가치를 비교해주는 양적 단위는 바로 가치이고 그것은 인간의 노동입니다"(강신준9월 15일)

가치가 강 교수의 설명처럼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그것의 질적 측면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강 교수의 생각은 사실 주류 경제학에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죠. 애시당초 그것이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환되는 비율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강 교수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교환가치'를 매우 강조하죠. 주류 경제학에서 이러한 상품들 사이의 교환비율(교환가치)의 강조는 그들의 선배,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세웠던 노동가치론을 버리고 한계효용 혁명으로 나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강 교수가 어딘가 인터뷰에서 칭찬했던 책인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폴 스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양적 가치이론은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상대적인 비율을 규율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과만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주류의 이론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주류의 이론에서는 그것이 교환가치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에게 교환가치란 가치를 배후에 숨기고 있는 '현상적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단지 교환가치의 결정에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양적 가치의 문제란 무엇인가? 위에서 서술한 분석이 한 가지 답변을 해준다. 상품이 가치라는 사실은 상품은 물질화된 추상적 노동이라는 의미이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품은 사회의 총 부창출활동 가운데 일부를 흡수한다는 의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노동은 시간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교환가치와 구분되는 양적 범주로서의 가치가 어떤 의미인지가 분명해진다."(스위지 58쪽)


2. 노동의 이중성 …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

상품의 이중성은 노동의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사용가치로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유용노동이 필요합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목재를 만들고, 목재를 재단하고, 재단된 목재를 짜맞춰야 하는 것 같은 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이 꼭 육체노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가치로서 상품을 만드는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 과정이 사장된 말 그대로의 인간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루카치의 "자본주의의 본질을 반영하는 추상"이라는 주장을 인용한 폴 스위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의 그 어떤 사회형태에서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이동성보다 훨씬 더 높은 이동성을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며 마르크스의 추상노동 개념의 현실성을 설명합니다
(스위지 55쪽).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방향이 변함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부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의 형태로 또는 직포의 형태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노동형태의 이와 같은 변화가 마찰 없이 일어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1권 55쪽)

기업이 창의적 노동에 대한 무수한 찬양을 늘어놓으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노동과정의 표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이러한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죠. 추상적 인간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과 구분되는 현실성을 지니며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노동의 이중성을 구성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이 중 어느 하나의 측면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용가치를 만든 노동은 시장의 교환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으로 바뀝니다. … 배추라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에는 항상 농민의 힘든 노동이 들어갑니다. … 내가 생산한 배추의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다른 농민들이 생산한 배추와 비교되는 것은 물론 배추를 구매할 소비자의 사정도 고려되어야만 비로소 결정됩니다. 요컨대 나 혼자만의 사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우리가 마르크스를 잊은 채 읽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강 교수가 좋아하는 '개미와 베짱이' 비유로 들어가면서 완전한 파탄을 드러냅니다.

"개미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일 뿐,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은 아닌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굳이 이중성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동시에 갖는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개미(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구체적 유용노동일 뿐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추상적 인간노동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노동자가 교환가치, 정확하게는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베짱이)는 어떻게 잉여가치를 획득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여기에선 강 교수의 연재가 기대되기도 하네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아래의 마르크스 설명과 비교하면 강 교수의 설명이 얼마나 마르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권 58쪽)


3.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강신준 교수는 이 부분에서 자본론 1권 1장 3절 부분을 거의 통째로 건너뜁니다. 물론 여전한 헛소리로 분량을 채우고 있긴 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가치형태를 설명하는 것은 화폐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이어지는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기원'절과 함께 일반적 가치형태, 즉 화폐형태가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은폐하는 지 그 기원을 폭로해줍니다. 가치의 현상형태인 교환가치가 취하는 여러 형태를 사려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면의 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 절의 핵심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바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규제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화폐형태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또한 화폐형태의 등장은 가치가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킬 중심원리로서 응결되기 시작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항상 기억해두어야 할 점이기도 하지만 가치는 물적 존재가 아니면서도 객관적 대상이다."(하비 76쪽)

강 교수는 여기서 뜬금없이 화폐가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발전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강신준 9월 29일)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건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르크스나 그의 해설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인 것이죠. 하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 화폐형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고 대신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런식의 왜곡은 프루동과 크메르 루즈를 언급하며 화폐형태를 "역사의 필연적인 자연법칙"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프루동과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면 강신준 교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우선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프루동은 처음에 정의ㆍ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1권 109쪽 각주2)

프루동에 대한 비판만 놓고 보면 강 교수의 주장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정의로부터 비롯한 이상을 따르는 운동은 참혹한 결말을 맞곤 했죠. 하지만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약간 다르게 들립니다. "상품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며 노동화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힌 마르크스는 오웬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이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같다는 점"이라며 그 이유로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고 밝힙니다(1권 121쪽 각주1).

마르크스는 상품생산을 전제로 한, 즉 자본주의의 핵심적 원리를 그대로 둔채 그 현상형태인 화폐형태만 고치자는 주장에는 가차없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근본적인 변혁을 전제로 한 주장에는 호의적인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보면 강 교수의 입장이 마르크스와 같다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강 교수는 프루동에서 더 나가 화폐형태 자체가 "필연적인 자연법칙"이라며 자본주의의 성숙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고 있죠. 이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 몽상일 뿐이며 이러한 몽상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법칙을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주장으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4. 결론을 대신하며 … 중요하지만 빼먹은 것들

아직 연재가 계속되고 있으니 강신준 교수에 대한 비판의 결론을 여기서 내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본론 1권 1장을 마치고 7회차까지 연재를 보면 강 교수의 자본론 해설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강 교수의 오해는 계속해서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른 분량 중 가장 거슬렸던 것은 15일자 연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얘기처럼 내 이익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현실 자본가들의 노력은 경쟁을 빚고 경쟁의 결과가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거든요.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치가 빚어내는 변증법의 요술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가치량을 결정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1권 49쪽)이 이런식으로 왜곡되는 걸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간단히만 지적하자면 우선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경쟁의 강제법칙으로부터 연역해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마르크스가 1권에서 '경쟁'을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 즉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강 교수의 '사회적 평균'은 마치 보다 평등한 사회의 형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전체에 걸쳐서 자본가의 잉여가치 획득과 더 가난해지는 노동자의 현실이 자본주의적 법칙의 현실적 결과임을 설명하는 것과 반대되는 주장이죠. 또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형성하는 '경쟁' 운운하는 데, 마르크스는 경쟁의 강제법칙을 자본가가 개인이 아닌 자본의 인격화한 범주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핵심 원리로 설명합니다. 즉 '자본가들의 노력'이 '경쟁을 빚'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법칙이 자본가의 자본으로서의 노력을 강제하는 것이고 이는 노동자들에게 더 비참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강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결과조차도 자신의 희망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9월 22일자 연재에서 "모든 사용가치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집니다"는 단언도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동은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사용가치[즉,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1권 54쪽)

이 설명은 이후 자연과의 신진대사라는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죠. 강 교수의 단언은 마르크스가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후예들이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이론과 실천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번 주에도 어김 없이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연재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힘 닿는대로 비판적 검토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는 강 교수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만들어나가기 위함입니다. 격동을 앞둔 지금 마르크스의 유산을 제대로 살피는 일은 더 중요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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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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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etas 2012.10.08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동안 강 사마의 글을 안 읽었었는데, 요새 쓰는 글이 계속 저런 식인가 보군요. 명색이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학자인데 (정말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를 혼동하는 대목에서는 (부정적 의미에서)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강 사마께서는 아무래도 난독증이 심하신 모양입니다.

    • 때때로 2012.10.08 14: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문제가 이해의 부족인지 의도적인 왜곡인지 여전히 헷갈립니다. 최근 발표한 다른 책과 예전에 썼던 '자본의 이해'가 다시 읽고 싶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지만, 이런 것 때문에 그 책들까지 보기엔 시간이 너무 없네요.

  2. EM 2012.10.16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때로 님께서 임자를 만나셨군요. ㅎㅎ
    잉여 님, 잠시 링크해주신 홈피에 들어가보니, 부산에 계신 모양이군요.
    아쉽습니다. 수도권이시라면 저희 자본 읽기모임에 초대하는 건데.. ㅎㅎ
    암튼 계속해서 생각 공유해주세요. 저같은 객도 구경하는 재미가 좋습니다 ^_^

    • 때때로 2012.10.17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러 사람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그러다 제 얕은 밑천이 모두 드러나느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고 합니다. 그래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니 다행이에요^^

    • 때때로 2012.11.22 1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잉여// EM님이 주도하는 모임은 말 그대로 함께 읽고 있습니다. 올해 3월쯤 시작해 지금까지 매주 하고 있는데 한번 할 때 2~3시간 정도 읽습니다. EM님 처럼 다른 참가자들을 지도하고 관련된 지식들을 전해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좋지요.

    •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부산에서도 자본읽기 모임을 하고싶고, 주도해서 자본을 읽고싶어 하는사람들을 모우고싶은데,,어떤방법으로 해야할지 잘몰라서요..
      혹시 노하우나 어떤식으로 모임을 하고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3.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 읽다 말았는데, 님이 문장의 이해를 잘 못하신 듯 한데여~
    이 부분에 대한 거요.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
    강교수님의 이부분의 대한 설명은 님이 이해한것처럼 사용가치가 발전해서 교환가치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품의 사실상 가치는 사용가치이고, 사용가치가 100원이라면 그 출발점인 100원에서 시장에서 수요공급원리에 의해 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님이 이해하고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며, 상품의 이중성에 대한 설명도 수업시간에 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집에가서 책을 봐야할듯^^

    • 때때로 2012.10.12 1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이 설명하신 것과 같은 강 교수의 사용가치 설명이 틀렸다는 겁니다. 사용가치가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에 조정돼 교환가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사용가치는 사용가치일 뿐 교환가치로 변하지 않습니다.

  4.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배우기에 사용가치는 그 상품안에 가변자본 + 불변자본과 그리고 노동력투입(가본자본)으로 인한 잉여가치가 포함된 게 사용가치이고, 교환가치는 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는 상품이 시장에 나왔을때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가격이 조정되게 되는데 그것이 교환가치로 알고있습니다. 이것이 상품의 이중성으로 기억이 되는데, 상품속에 가치가 사용가치(구체적노동)와 교환가치(추상노동) 둘로 나뉘는것. 아 기억이 났네요.
    아무튼 님이 쓴 글을 읽어보니 강교수님의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에 대한 이해와 님의 이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용가치에 잉여가치가 포함돼 있다니요. 이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를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군요. 자본론 읽기 전에 정치경제학 입문용 책 몇권이라도 읽어어보시길 권합니다.

  5.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

    제가 판단했을때 강교수님이 저렇게 쓴 이유는, 보통의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곡선을 그리면서 '가격' 이라는 것이 교환가치만을 말하고있지않습니까? 사실상 교환가치의 본질이자 상품이 처음 가지고 있는 가치의 본질은 생산가치인데, 주류경제학은 그것을 간과하고 있고 이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이 사실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측면에서 책정된 것이아니라 사용가치를 기반으로 하고있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함축적으로 쓴 글로 판단됩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격 또는 교환가치는 '사용가치'를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수요와 공급으로 인한 변동을 무시했을 때 교환가치는 상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추상적 인간노동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두꺼운 자본론(또는 자본) 읽으려 애쓰지 마시고 얇은 입문서들을 먼저 읽어보세요.

  6.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체적으로 님의 글은, 강교수의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해석 하는 경향이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잉여님이 쓰신 리플로 봐서는 제가 왜곡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강신준 교수가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으 전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드네요.

      교환가치와 가치 자체는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그가 개량주의자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방식(사용가치가 시장에서 수요공급의 조정을 거쳐 교환가치가 된다는 식의, 또는 사용가치에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잉여가치가 포함돼 있다는 식의)의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 그야 말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입니다.

  7.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입문서는 읽어봤어요 ^^;

    • 때때로 2012.10.12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약간 무례했던 제 발언을 먼저 사과드리며 추가로 약간 설명드리겠습니다.

      사과라는 상품으로 설명하자면 사과는 신맛에 약간의 단맛이 포함된 식물성 섬유질의 먹는 것입니다. 사과가 사용가치라는 것안 바로 이러한 물리적 소재적 특성 때문입니다.

      사과는 의자와 교환될 수 있습니다. 사과와 의자가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겠죠. 사용가치는 이 '공통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상품의 물리적 소재적 특성이 같다면 교환될 이유가 없죠. 교환된다는 것은 이미 상품의 물리적 소재적 특성이 다르다는 것으 전제하는 것입니다. 즉 사용가치는 교환가치가 나태나는 상품의 어떤 공통된 속성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환가치가 나타내는 상품의 공통된 속성이란 것은 결국 그것이 추상적 인간노동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사과든 의자든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졌죠(물론 그 과정에는 자연의 기여도 있습니다). 구체적 유용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들기 때문에 교환가치의 공통된 속성일 수 없습니다. 사과를 키우는 노동과 의자를 만드는 노동은 다르죠.

      결국 사과와 의자는 어떠한 구체적인 과정의 노동을 거쳤다는 게 아닌 오직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 공통적인 것입니다. 추상적 인간노동의 지출이 응고된 것, 그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마르크스의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에 대한 설명입니다. 1장에서도 몇 페이지 안 되는 부분이니 다시 차분하게 읽어보시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8.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위에 말한 사용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나봅니다. 제가 오해를 하고있었군요~
    제가 이해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드리니 교수님께서 답변을 해주셨는데,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상품가치와 교환가치가 아니더군요........ 제가 배우고있는사람이라 이해가 부족했나봅니다.

    답변을 요약하자면, 사용가치는 그냥 효용만 갖는 것이어서 양적 표현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런 사용가치 두개가 서로 만나면 양으로 비교하게 되고 그때 비교되는 양이 교환가치이며, 상품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상품이 가지고 있는 교환가치의 구성요소가 불변자본+가변자본+ 잉여가치이다.이런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이 시장에 나와서 거래될 때 시장의 수요공급 요인에 의해 원래의 가치대로 판매되지 못하고 변동하게 되는데 이 변동되는 것이 시장가격이다.

    제가 시장가격을 교환가치로 교환가치를 사용가치로 오해하고있었네요^^;;

    • 때때로 2012.10.13 0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강신준 교수의 답변을 제가 직접 듣지 않아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잉여님이 쓰신 부분 만 보면 잘못 설명된 부분이 또 있군요.

      "사용가치는 … 양적 표현을 가지고 있지 않고" => 중요한 건 아닙니다만 사용가치도 양적 표현을 가집니다. 물리적 소재가 양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포만감을 주는 '사과'라는 상품 자체로 (그 어떤 교환도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한) 한 개, 두 개 또는 1kg, 2kg이라는 양을 가집니다. 교환가치라는 것은 이것과는 별개의 상품 사이 관계의 양적 표현인 것이죠.

      "상품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 가치의 현상형태가 교환가치인 겁니다.

      "교환가치의 구성요소가 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이다." => 가치로서 상품은 추상적 잉여노동의 응고물입니다. 위와 같은 내용은 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라는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며 지금의 논의에서 추가적인 과정을 거쳐야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설명하자면 그것은 상품이 오직 단 한 명의 노동자에 의해 단 한 번에 완성되는 것 만은 아니라는 사정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선 먼저 톱과 망치, 못, 목재, 작업장과 같은 것이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이 것들 또한 현재의 생산과정 이전의 생산물인 것이죠. 그것 또한 추상적 인간노동의 지출로 이뤄진 것이었지만 현재의 생산과정에서는 죽은 노동으로 투입되어 새로운 생산물로 그 가치가 이전됩니다. 이 과정이 노동인 것이죠. 결국 불변자본이란 것은 현재의 생산에 필요한 상품(과거 생산의 결과물)을 구입하기 위해 투하한 자본이고 가변자본은 마찬가지로 노동력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투하된 자본입니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가치증식과정인 노동과정에서 추가적으로 만들어진 가치입니다. 교환가치가 표현하는 본질은 가치일 뿐입니다. 노동 생산물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교환가치로 나타나는 것은 맡지만 그 교환가치를 "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로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9.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다른참가자들을 지도하고 지식을 전해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 부산에서도 자본읽기 모임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공부가 될 것 같아서.....ㅎㅎ...

    • 때때로 2012.11.23 1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능하면 지도해주는 분이 있는 게 좋기는 하지만, 딱히 그럴 만한 분이 없어도 여럿이 함께 모여 읽는 것도 좋더군요. Socialandmaterial.net에 가면 heesang님이 연재하는 '자본론 읽기' 게시물도 도움이 될 겁니다. 부산에서도 꼭 읽기 모임 해보세요.



강신준 동아대 교수가 경향신문에 '자본(자본론)' 해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본'을 읽다'는 제목으로 8월 25일 시작했습니다. 연재 기사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실립니다. 9월 1일에는 두 번째 연재로 '혁명에 사로잡힌 물음 - '자본'의 출생과 변증법'이란 기사가 23면에 실렸습니다.

●[경향신문] 9월 1일 23면|'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링크)

최근 마르크스의 생애, 그의 사상, 자본론(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출판도 늘고 있습니다. 신문에까지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실린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신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지만 책보다는 읽는 사람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까지 읽고 나니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더 커집니다. 마르크스 스스로 말년에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고 한 만큼 마르크스주의는 논란에서 자유로운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강신준 교수의 두 번째 연재기사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중을 위한 신문에서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학문적 방법을 사상한 게 문제가 아닌 것이죠. 문제는 일반적인 사실의 왜곡에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명색이 '자본 강독'이라고 시작한 연재라면 자신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글)을 구분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가 모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경향신문 연재기사를 보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할 분들에겐 상당히 큰 오해를 심어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전공자도 아니지만 간단히 제가 아는 한도에서 9월 1일 두 번째 연재기사에서 문제가 될 듯한 부분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글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주저 말고 지적해주세요. 아래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강신준 교수의 글입니다.


1_ "오늘날 사회변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혁명이란 용어는 원래 프랑스혁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근대 혁명의 효시가 프랑스혁명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완전히 틀린 설명입니다. 혁명(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혁명이 급진적, 혹은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이 단어가 '사회구조의 근본적이고 돌연한 변화'를 뜻하는 정치적 의미로 쓰인 것은 1688년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윌리엄 3세가 즉위한 사건을 '명예혁명(The Glorius Revolution)'으로 부르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대해선 위키피디아 'revolution' 항목을 참조하시면 됩니다(링크).


2_ "1848년 혁명도 바로 이 [1789년] 프랑스혁명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의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혁명의 다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인민의 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호명하고 싶어하는 혁명가, 변혁가의 꿈은 과거와 현재 모두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의 점령자들은 자신을 99%라고 표현하며 결코 소수가 아닌 다수임을 강조했죠. 원래 '다수파'라는 뜻을 지닌 볼셰비키, 하지만 레닌의 볼셰비키는 그 분열 초기에는 멘셰비키보다 소수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시이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도 어찌보면 현재의 '우리는 99%다'라는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이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후에 스스로 "모든 것이다"고 답하죠. 그러므로 "제3신분은 국민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고 "제3신분이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국민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사', 알베르 소불, 두레, 29쪽).

마르크스주의자 또한 과거의 혁명들을 '노동자 혁명'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강할 것입니다. 열망은 현실과 다르죠.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를 따르는 혁명가들은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그는 나폴레옹의 조카가 일으킨 쿠데타를 다루는 책(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그들 앞에 전개되어 있는 원대한 전망에 대한 상상에 젖어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 몰두해 있었던 반면, 사회의 구세력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회합을 개최했으며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쁘띠부르주아에게서 예상치 않던 지지를 발견했다."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 21쪽.

마르크스는 분명하게도 1848년 혁명 당시 농민이 다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당시 프랑스에서 소수였고 그나마 파리에만 의미 있는 수를 형성하고 있었죠. 그렇기에 파리의 노동자들은 6월 봉기 때 "모든 계급과 정파"의 적으로 공격 대상이 됩니다. 결국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위대한 세계사적 투쟁이라는 영예를 안고 쓰러"집니다(앞의 책 23쪽). 1848년 혁명의 다수가 노동자였다는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설명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른 저자의 설명도 강신준 교수의 주장과는 다릅니다. 노명식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과 비교하며 이렇게 씁니다.

"[1830년] 7월혁명의 결정적 승자는 부르주아지였으나 2월혁명의 승자는 노동자계급과 중소 부르주아지의 연합이었다.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848년에는 부르주아지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책과함께, 343쪽.

분명히 1789년보다, 1830년보다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졌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함은 프랑스 전역의 혁명에서 파리가 지닌 역할과 비견할 만한 것이죠(서로 연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1848년 혁명 당시 노동자가 '다수'였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혁명 패배의 교훈과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3_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은 극히 제한된 형태로만 있었고 경제의 대부분은 자급자족하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것만을 소비했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경제구조에서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생산을 열심히 한 사람은 소비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고 설명할 수는 없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이전 생산양식의 귀족과 노예 소유주를 위한 생산, 즉 착취를 (자본주의적 착취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강신준 교수가 깜빡하고 잊은 듯합니다.


4_ "[1848년 혁명의 패배를 지켜본 다음] 1849년 마르크스는 독일 정부의 압력에 의해 다시 유럽대륙에서 추방당해 마지막 망명지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영국으로 가는 뱃전에서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는 그 엄청난 혁명의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혁명이 왜 실패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곧바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틀어박혀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67년 드디어 '자본[자본론]' 제1권을 출판했습니다."

이 문구만 읽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계기,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마치 1848년 혁명 때문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그 기초적 모습을 드러낸 '공산당 선언'이 1848년 2월 혁명 전야에 나왔다는 사실과 배치됩니다.

이뿐 아니죠. 마르크스는 1843년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미 경제적 탐구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악명 자자한 문장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8쪽.

마르크스가 현실의 경제적 삶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비슷한 시기 '라인신문'에서 일하면서입니다. 마르크스는 훗날 "'라이니셰 차이퉁[라인신문]' 편집장으로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야 할 때 나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미지의 영역[물질적 이해관계: 경제]에 처음 도전해본 것은 개인 소유 삼림에서 나무를 훔치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법을 길게 비판하게 되었을 때였다. … [이 문제를 다루면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계급, 개인 소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푸른숲, 69쪽.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쫓겨난 마르크스는 당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울한 학문, 경제학에 대한 탐구에 몰두합니다. 당시의 공부 결과는 현재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1844년 쓰여서 '1844년 수고', 또는 파리에서 작성됐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립니다.


5_ "한나라당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가 '잃어버린 10년'인데요. 이 말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10년 동안 이루어진 정치적 성과를 모두 없애고 10년 전의 상태로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사물의 운동법칙[변증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은 성숙해지면서 2가 되는데 이 2는 기존의 1에 1을 더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2=1+1). 만일 기존의 1을 없애버리면 새롭게 추가하는 1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보다 나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고 도로아미타불의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강신준 교수는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1+1=2'라는 공식을 내세웁니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설명이긴 합니다. 보통은 정-반-합의 과정을 설명하죠. 강신준 교수의 설명만 보면 사물의 운동은 발전만 있고 퇴보는 없는 듯합니다. 게다가 기존의 사물은 새로운 사물 내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새롭기는 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설명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사물의 변증법적 운동이 발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을 인용하며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하지만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합니다
(최형익 옮김, 비르투, 10쪽). 마르크스의 설명이 강신준 교수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고전정치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바로 그 한계 때문에 그들의 후예들이 과학적 입장에서 더 후퇴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사물의 운동법칙은 1+1=2처럼 단순히 계단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대립과 통일이라는 기존 설명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명이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왔지만,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그보다 더 큰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6_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강신준 교수의 '변증법' 해설의 더 큰 문제는 마르크스가 마치 자본주의를 '존속'시킨 채 그것의 개혁을 위한 방법을 발견한 사람처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재기사가 '강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최소한 마르크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구분할 수 있게끔 써줬어야 합니다.

19세기 후반 보통선거의 도입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민주적인 길의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합니다. 당시 아직 봉건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이던 러시아를 살피면서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 공산주의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존속'과 '개혁'을 주장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듭니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태도를 유지했죠.

"[1875년 라쌀레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회주의노동당(1890년 할레 대회에서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의 강령에 대해] 마르크스는 즉각 베를린에 있는 리프크네히트에게 격렬한 비난이 담긴 서한을 급송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엥겔스에게도 리프크네히트에게 그 정도로 강력한 서한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렀다. … 마르크스가 보기에 고타 강령에는 너무나 많은 타협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었다. 고타 강령은 사회주의와 그 최대의 적인 국가가 영원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타 강령은 특히 그러했다. 또한 고타 강령의 밑바탕에는 프루동 주의자들과 생시몽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여러 모순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든가 상속법의 폐지 같은 사소한 목적들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사회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안규남 옮김, 미다스북스, 383쪽.

게다가 강신준 교수 스스로 인용했듯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든 영원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운동 상태에 있으며 유동적이고, 따라서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파악됩니다. 강신준 교수가 인용한 부분을 좀 더 길게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ㆍ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ㆍ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19쪽.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개인의 바람에 따라 왜곡해서 살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한 때 속하기도 했던 청년헤겔파에 대한 비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들은 헤겔과 달리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바랐지만 사물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의 문제로만 파악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에서 청년헤겔파를 '무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에 비유해 조롱하기도 했죠(박재희 옮김, 청년사, 34쪽).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며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김수행 옮김, 19쪽).

아나키즘과 마르크스 이전에 유행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생시몽과 푸리에 등) 비판이라는 맥락도 살펴야 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적 상태에 대한 탐구가 아닌 이상적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변혁의 과학을 대치하려 했습니다(물론 그들의 '이상'은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현재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혁명적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변화할 지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연구로부터 끄집어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도 이러한 사정을 모를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랑스 혁명을 얘기하며 실컷 '혁명' 운운하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강신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잘못된 제목으로 나타납니다.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이라니요. 강신준 교수는 그나마 '개혁'이란 단어로 기사의 후반부에 대치시켰지만 경향신문의 편집기자는 그 차이를 이해 못하고 '혁명'이란 단어를 제목에 써버립니다. 하긴 이윤에 목매는 자본가들은 생산방식에 혁명적 방법을 도입해가며 자본주의 사회를 발전시켜왔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다만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꿈꿨던 마르크스의 생각은 아니죠. 제목 아래 크게 자리잡은 마르크스의 얼굴이 안쓰러울 뿐입니다.


p.s. 강신준 교수는 '개혁'이란 단어를 쓰기 전 '자본론'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인용하며 '혁명'이 마치 길고 긴 개혁의 과정인 것처럼 설명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죠.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21쪽.

그런데 이 문구는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자본론'을 시리즈로 분책해서 내자는 제안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책(자본론)이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읽어야만 한다는 충고죠. 강신준 교수의 해석은 과도한 것입니다. 맥락에서 떼어내 문구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문과 실천 모두에서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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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enai 2012.09.02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잉여노동이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에게서 강탈되는 그 형태"가 "경제적 사회구성체들의 차이"를 가름한다고 자본론 1권 제9장에서도 나오죠. '착취'라는 게 바로 자본주의가 취하는 강탈의 형태라고 했지요 아마...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니 내가 아는 노예제와 봉건제는 어디로 갔는가...;;

    저같이 뭘 몰라서 헤매는 초보는 머릿속 혼란만 가중될 것 같아서 이제부턴 저 연재물 안 읽으렵니다. 때때로님이 이렇게 설명해주신 거나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역사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안 하니까 아마 안 될 거야...)

    • 때때로 2012.09.02 1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착취를 자본주의에서 취하는 강탈의 형태로 이해하는 게 맞겠네요.

      읽다 보니 너무하더라고요. 아무리 경향신문 독자가 없어도, 최소한 몇 만명은 읽을 텐데 상황이 너무 안타깝게 돌아갑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 매우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는 한에서는 교정을 해놔야 할 것 같아요.

    • 잉여 2012.10.01 2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산과 소비의 일치라는게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신이 생산한 것이 눈에 보여서 생산한 것만큼 소비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교환이라는 매게가 등장함으로써 생산을 어느정도 했는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 생산을 증대시키려는 행위들 때문에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용..

    • 때때로 2012.10.02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잉여//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신이 생산한 것이 눈에 보여서 생산한 것만큼 소비가 가능했지만"이라는 전제가 틀렸죠.

      아마 봉건제에서 수탈이 부역일, 영주 몫의 농지 등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생산한 것 만큼 소비가 가능하진 않았죠. 말 그대로 '수탈'에 의해 자신의 것을 빼앗겼으니까요.

      게다가 노예제에서 노예는 아예 노예주의 생산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들 눈에 자신이 생산한 것들이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노예주의 것일 뿐 자신의 것이 아니었죠.

      이러한 사정을 도외시하고 생산과 소비의 일치 운운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로서 그 소양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2. okcom 2012.09.04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신준 교수가 여기저기의 환대에 취해 자폭을 하는 걸까요. 특히 6번은 많이 위험해 보이네요. 한편으론 앞으로도 흥미진진할 것 같으니 계속 정리해 주십쇼 ^^;;

  3. 윤희형 2012.09.11 0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맙습니다. 그냥 기사가 전부라 생각고 넘어갔다면 큰일날뻔했네요.
    가장 큰 문제는 저자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과 이론을 혼용해서 막써버린다는게 아닌가 싶네요.

    • 때때로 2012.09.11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설서를 쓰면서 저자의 생각과 원저자의 생각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테죠. 그럼에도 좀 심한 것 같더라고요. 참세상에 박찬식씨가 기고한 글도 함께 읽어보세요.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7517

  4. 윤희형 2012.09.12 2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이 심한거 같더군요 ㅎ 씨네21이었나? 거기서 선생님 글에 박찬식님 글 링크되있는거 보고 이미 읽어 봤었습니다.
    경향신문에 9월들어 진중권 교수의 현대미술읽기랑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 상당히 기대했는데,
    기대에 못미치네요.
    앞으로도 경향신문에 강신준 교수의 연재가 계속 될텐데, 가감없이 촌철살인 리뷰 부탁드립니다 ㅎ

    • 때때로 2012.09.1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어떤 곳인지 알겠네요. 저도 보통의 노동자라서 연재 때마다 좇아가긴 힘들 것 같네요.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본문 들어가면 제 지식이 일천해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5. 잉여 2012.10.01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제가 예전에 강의를 들었을 때 자본주의의 개혁은 자본주의 모순이 공황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공황을 규제하기 위한 각종 정책들은 점차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으로 이행하게 한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공황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에 따른 규제와 처방들이 자본주의를 다른 양식으로 바꾸게 한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 때때로 2012.10.02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규제와 처방'으로 자본주의가 다른 생산양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사민주의 정치의 핵심이긴 하죠.

      여기서 강 교수의 문제는 여러가지인데, 우선 그 경제결정론적 서술이 문제가 되고, 다음은 변증법에 대한 몰이해가 문제가 됩니다.

      전자의 문제에서 '충분한 성숙'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따르지 않는 것은 그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후자에서는 보통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라면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합리적 핵심-놀라운 생산력, 불충분 하지만 자유와 개인 개념의 발달,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발견, 민주주의적 의식과 실천의 발전 등, 하지만 자본주의에선 결코 그 이상을 달성할 수 없는 것들-을 보존하고 더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 교수는 '그대로' '존속'한다고 말하고 있죠. 이는 좋게 봐줘도 학자로서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에 대한 숙고를 도외시 한 게으른 표현일 뿐입니다.

  6. 잉여 2012.10.02 18: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수행 교수의 책에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의 혁명과 투쟁보다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에서 존재하며 그것이 결국 자본주의를 바뀌게 한다라라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강교수의 의견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맑스의 자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으나, 강신준교수님의 제자로 수업을 듣고 맑스에 대한 시각이 바뀐 저로써는 님의 비판이 그저 안타깝게만 생각됩니다. 물론 다양한 해석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야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죵

    • 때때로 2012.10.03 0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한 것과 후대의 마르크스의 해석은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은 베른슈타인은 적어도 자신의 주장을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끌어냈죠.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글은 이러한 양심적 태도조차 버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의 혁명과 투쟁보다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에서 존재하며 그것이 자본주의를 바뀌게 한다"는 님의 주장만 놓고 보자면 마르크스가 때론 그런 식으로 서술한 부분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저작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 무엇보다 '계급투쟁'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본론의 핵심 중 하나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을 계급투쟁의 역학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마르크스가 영국에서의 공장법 제정과 자본의 시초축적 과정, 공장제의 도입 과정을 그토록 길게 서술한 것은 단지 '예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그의 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간의 현실적 행동, 실천에서 동떨어진 관념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p.s. 단지 혁명 또는 개혁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후 진행된 그의 경향신문 연재분을 보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환가치, 사용가치, 가치에 대한 오해는 지금껏 본 그 어떤 경제학 교과서보다 더 심각한 오류를 보여줍니다.

  7. 연풍청년 2013.02.20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가 들으려 들어왔다가 좋은 말글장(blog)을 보게 된거 같네요.. 경향신문은 그냥 찌라시입니다. 헌법을 부정한 무력 반란을 시민혁명으로 포장해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도 한 언론.
    제가 작년에 진보당 창준위에서 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 했던 적이 있었는데.. 대놓고 짜깁기 해서 소설을 썼습니다. 다른 언론들은 그 경향신문의 기사를 인용해서 보도를 솓아냈고 저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정말 그때만 생각하면..

  8. 브루스 2013.03.27 1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판을 잘 읽었습니다. 우선 저는 자본을 읽다를 매우 유용하게 읽고 있는 사람중에 한 사람입니다. 옅은 맑스주의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근데 일반인에게 이런 대중매체를 통해 맑스에 대해 알리는 작업이 매우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귀하의 비판적인 블로그 글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베른슈타인에 대해서는 소련 붕괴 후 새로운 조명이 있어왔고 당시 그가 수정주의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된 건 독일의 사민당의 이론 중심의 흐름을 깨고자 수정주의에 대한 입장을 표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돌아봐야 함에도 이론의 옳고 그름에 너무 치중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지적 말이죠. 몇몇의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술적인 부분보다는 경구나 해석의 잘못에 너무 치중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그 해석이 행동의 바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맑스주의를 알게 한다는 것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와 같은 맑스주의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각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맑스주의자들만의 울타리에서 멤도는 이런 비판이라면 그것이 과연 사회를 변혁하는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일부 맑스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베네수엘라를 추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베네수엘라에 가서 살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대중에게 새로운 깨달음의 불씨를 주는 것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때때로 2013.03.28 0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르크스주의를 떠나 고전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신의 주장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의 뜻과 주장', '현재의 의의'을 밝히는 건 지난하고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죠. 그럼에도 우선해야 할 것은 '자신의 해석'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상의 뿌리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배제하고 해석의 다양함만 주장한다면 고전은 그 의미를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제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가 아닙니다. 강신준 교수가 매우 기초적인 사실들조차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잘못된 사실에 기반한 마르크스의 설명이 마르크스주의의 성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여담으로 말씀하신 베네수엘라 얘기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