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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5일 작성, 일부 수정

자크 비데와 제라르 뒤메닐이 쓴 새 책이 나왔다. 제목은 '대안마르크스주의'. 이 책의 서론에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이야기가 앞 부분에 나온다.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제공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스승을 찾고 있던 러시아의 [근대] 초기 혁명가들에게 "어떤 경우라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응답한 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 17쪽.

그래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독자들은 마치 이 이야기가 플레하노프와 자술리치 같은 러시아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해, 혹은 더 직접적으로 레닌과 그의 동료들에 대해 한 얘기인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와 관련해선 우선 프랑스 노동당 건설을 위해 쥘 게드와 마르크스가 함께 작성한 강령의 해설에서 이 이야기의 배경을 발견할 수 있다.

Accusing Guesde and Lafargue of "revolutionary phrase-mongering" and of denying the value of reformist struggles, Marx made his famous remark that, if their politics represented Marxism,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what is certain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개혁을 위한 투쟁의 가치를 폄하하며 '혁명적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게드(프랑스 노동계급 지도자)와 라파르그(마르크스의 사위)를 비난하며 마르크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발언을 내놓는다. 만약 저들의 정치를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면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확실한 것은 내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1880년 프랑스 노동당 강령에 대한 편집자의 해설(링크)

이는 노동당 건설을 위한 강령을 의논하기 위해 게드와 라파르그를 만난 이후를 설명한 글이다. 마르크스의 이 언급은 엥겔스가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Marx and Engels, Werke, Vol.35 p.388)에 인용돼 있다.

Nor have you any other source, i.e. other than Malon at second hand, for your reiterated assertion that in France 'Marxism' suffers from a marked lack of esteem. Now what is known as 'Marxism' in France is, indeed, an altogether peculiar product — so much so that Marx once said to Lafargue: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If anything is certain, it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존중받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는 당신의 반복된 주장은 말롱(제1 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한 염색 노동자)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근거도 제시할 수 없다. 현재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라고 알려진 것은, 정말로 완전히 기이한 결과물이다. 언젠가 마르크스가 라파르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정도로 말이다.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무언가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1882년 11월 2일 엥겔스가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링크)

엥겔스는 이 말을 1890년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반복한다.

Just as Marx used to say, commenting on the French "Marxists" of the late [18]70s: "All I know is that I am not a Marxist."
마르크스는 1870년대 후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해 언급할 때면 꼭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아는 전부는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1890년 8월 5일 엥겔스가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링크)

이 언급들 모두 매우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른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이 사정에는 그의 사위 라파르그가 끼어있다. 실제로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는 1889년 라파르그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We have never called you anything but 'the so-called Marxists' and I would not know how else to describe you. Should you have some other, equally succinct name, let us know and we shall duly and gladly apply it to you.
우리는 너를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 외에 어떤 것으로도 부르지 않았었고 그것 외에 어떻게 너를 묘사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간결한 이름 같은 다른 어떤 것을 네가 가졌다면 우리에게 알려주렴. 우리는 당연히도 기꺼이 너를 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 1889년 5월 11일 엥겔스가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링크)

그런데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구체적 맥락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물론 정확한 인용 표기도 없이 마구 사용되고 있다. 그것도 매우 눈에 잘 띄는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말이다. 최근 뒤메닐 글을 읽으며 자꾸 실망하는 데, 이번 글도 '서론'에서부터 실망스러운 것 투성이다. 그 앞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 말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저 문구를 그저 '일반적 상황'에 대입해 썼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터이다. 명백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를 대상으로 한 말을 '러시아의 근대 초기 혁명가'들에게 했다는 건 터무니없는 왜곡일 뿐이다.

'저명한 저자'라고 해서 의심 없이 읽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 글에도 심각한 오역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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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17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제국주의론' 하면 보통 레닌을 떠올린다. 하지만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의 성취는 레닌에 못지 않다. 이정로(본명 백태웅)가 옮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는 당시의 검열 때문에 원작자의 이름이 표기되지 못하고 본문에서도 몇몇 문장을 삭제하고 어떤 표현은 순화시켜 옮겼다. 레닌이 쓴 서문이 빠진 것은 당연하다. 이를 대신해 서문으로 실린 엥겔스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3장조차도 여기저기 '완화'된 표현으로 인쇄돼야만 했다. 우선은 여기 레닌이 쓴 서문을 옮긴다. 이곳저곳 눈쌀 찌푸리게 할 의역과 오역이 많으니 원문을 꼭 참조하길 바란다. 대괄호[]는 옮긴이가 덧붙인 것이고 소괄호()는 원문에 있는 것이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레닌의 서문[1]
원문: N.I. Bukharin: Imperialism and World Economy - Introduction(링크)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 글에서 다룬 주제가 중요하고 시의적절하다는 것에는 다른 어떤 특별한 설명도 불필요하다. 제국주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최근 자본주의의 변화한 형태를 고찰함에 있어서 경제학 영역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경제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 생활의 어떤 본령에 관심을 가진 모두는 이 문제와 연관된 여러 사실들, 가장 최근 구할 수 있는 자료 중에서 필자에 의해 세밀하게 선별된 사실들을 숙지해야만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주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근거로 경제적이고 정치적 측면 모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근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분석 없이 최근 10년 간 경제적이고 외교적인 상황의 이해에 접근하기란 불가능하며 그러한 이해 없이 전쟁에 관한 올바른 판단의 형성을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일 뿐이다. 근대 과학의 요건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외교 '문서'들 또는 일상의 정치적 사건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한 나라의 지배계급에게 유익하고 편리할 뿐인 그와 같은 고립된 사실들로 구성된 방법의 '과학적' 가치와 전쟁에 관한 이러한 일련의 분석들에는 오직 비웃어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예를 들면 이제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플레하노프는 현대에 최고조로 발달한 원숙하고 과숙한 자본주의와 연관된 경제체제로서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특징과 경향을 분석하는 대신 푸리시케비치와 밀류코프의 비위에 맞춘 사소한 사실들에 눈높이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제국주의의 과학적 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러시아 제국주의자 두 명의 당면한 경쟁자, 적수, 반대자를 향해 내뱉어지는 욕설 수준으로 축소됐다. 그들의 계급적 기반이 외국 경쟁자ㆍ반대자들과 전적으로 같음에도 말이다. 잊혀진 단어, 포기된 원칙, 혼란에 빠진 세계에 대한 개념, 버려진 해법과 엄숙한 약속,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 놀랍지 않다.

특히 니콜라이 부하린 작업의 과학적 의의는 분명히 가장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단계로서 제국주의와 전체적으로 연관된 근본 사실을 조사했다는 데 있다. 유럽의 선진국들에서 봉건제를 극복했을 때, 여전히 점령되지 않은 막대한 지역과 아직 최종적으로 자본주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지 않은 나라들로 ‘평화롭게’ 퍼져나가며 비교적 평온하고 조화롭게 발달하는 위치에 있었을 때는 비교적 '평화로운 자본주의' 시대였다. 물론 그 시대에조차, 대략 1871년부터 1914년까지 '평화로운' 자본주의는 군대와 전체 계급이 이해하는 진정한 평화와는 매우 먼 삶의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선진국 거의 대부분의 대중에게, 식민지와 후진국 인민 수억 명에게 이 시대는 '평화'가 아닌 압제와 고문과 공포의, 끝이 없어 보이기에 더 두렵게 보인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는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돌연한 변화와 재앙, 갈등으로 가득찬 비교적 더 충동적인 시대, 그렇지만 힘든 노동에 종사하는 대중에게 더 이상 끝없는 두려움으로만 나타나지 않는, 그러한 공포를 완전히 종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와 일반화 된 상품생산[사회]의 뿌리 깊고 근본적인 경향의 직접적인 발전, 성장, 지속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란 걸 염두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상품교환의 성장, 대량생산의 성장은 전 세계의 나라들에서 관찰되는 근본적인 경향이다. 발달하는 교환의 어떤 단계에서, 성장하는 대량생산의 어떤 단계에서, 다시 말해 대략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될 즈음 도달한 단계에서 상품교환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막대한 규모의 대량생산 증가를 동반하고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하기 시작한 경제관계의 세계화와 자본의 세계화. 나라 안과 국가 간 교역에서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아닌 기업가들의 독점적 동맹, 즉 트러스트가 만연한 형식이 됐다. 특히 유동적이고 신축적인, 특히 국내외적으로 뒤얽힌, 특히 개성이라곤 전혀 없고 직접적인 생산과정과 분리된, 특히 집중되기 쉬운 권력인 금융자본, 이미 집중의 길로 매우 큰 걸음을 성큼 걸어와 문자 그대로 전 세계의 운명을 손에 움켜쥔 억만장자와 백만장자 수백 명의 권력인 금융자본이 세계의 전형적인 지배자가 됐다.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추론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던) 카우츠키가 내렸던 결론, 현재는 자본의 거물들이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로 단결할 시기, 즉 국민적 한계를 지닌 금융자본의 경쟁과 투쟁이 세계적으로 단결한 금융자본으로 대체될 때를 그리 멀리 남겨두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론은 지난 세기의 90년대 '스트루베주의자'들과 '경제주의자'들이 도달한 것과 유사한 결론으로서 추상적이고 단순하며 부정확한 것일 뿐이다. 후자, 자본주의의 혁신적 본질과 불가피성,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로부터 유래한 이들은 어떤 때는 (자본을 숭배하고 자본과 평화조약을 맺고 자본과 싸우는 대신 자본을 찬양하고) 옹호하며, 어떤 때는 비정치적이 되고(즉 정치 또는 정치의 중요성을 거부하고 일반적인 정치적 격변을 부인하는 등 이러한 것들은 '경제주의자'들이 특히 자주 범하는 실수다), 어떤 때는 다름 아닌 '파업'을 설교하기까지 한다(그들에게 '총파업'은 신격화 한 파업운동이다. 그것은 다른 형태의 운동이 잊히거나 무시당할 위치로까지 고양된다. 그것은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목숨을 건 도약이다). 어느 정도 속물적인 자유경쟁의 '낙원'과 비교되는 자본주의의 의심할 여지없는 혁신성과, 세계의 선진국에서 '평화적' 자본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의 피할 수 없는 최종적 승리 또한 수없이 다양한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실수와 불운으로 이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징후가 있다.

특히 카우츠키에 관해 말하자면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절연한 그는 정치를 거부하거나 체념한 것도, 무수하고 다양한 정치적 갈등과 격변, 특히 제국주의 시대 성격의 변화를 대충 건너뛴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의 옹호자가 된 것도 아니다. '평화로운 자본주의'를 꿈꿨을 뿐이다. '평화로운' 자본주의는 평화적이지 않은, 군사적이고 파멸적인 제국주의로 대체됐다. 카우츠키는 이것이 지나간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미 1909년 발표한 특별한 책
[2]에서 결론처럼 이끌어내며 동의한 것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제국주의에서 '평화로운' 자본주의로 되돌아간다는 꿈이 불가능하다면, 본질적으로 프티부르주아인 이들이 '평화로운' 초제국주의에 대한 순진무구한 기대를 꿈꾸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초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불편하고 가장 불안정하며 가장 혐오스러운, 그렇기에 프티부르주아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전쟁이나 정치적 격변과 같은 갈등을 없애 민족적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경으로 나뉜) 제국주의의 국제적 단결을 쟁취할 수 있다면, 모든 종류의 갈등과 재앙으로 가득찬 그 맨얼굴을 백일하에 드러낸 이미 도래한 현 제국주의 시대를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 비교적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갈등이 덜하며 재앙이 없는 초제국주의의 순진한 꿈으로 돌아가 보자. 현재 유럽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제기되는 '까다로운' 목표도 한쪽으로 제쳐둬 보자. 아마 이제 곧 지나가버릴 이 시대를 헛되이 보내기보다 그 뒤를 이어 곧 도래할 '과격한 목표' 따윈 필요하지 않은 비교적 '평화로운' 초제국주의 시대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직접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그와 같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초제국주의) 단계는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우리는 아직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이다.(신시대ㆍNeue Zeit, 144쪽, 1915년 4월 30일)[3]

현존하는 제국주의를 회피하려거나 '초제국주의' 시대라는 몽상에 빠져드는 이러한 경향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요소가 조금도 없다. 이러한 이론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지금 자본주의의 현 단계를 고려하면 이 이론은 실현 가능성의 측면에서 그 이론의 창안자 자신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모순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프티부르주아적이고 매우 반동적인 경향을 제안한다. 카우츠키는 다가오는 불안과 파국의 시대, 1909년 목전의 전쟁에 관해 글을 쓰면서 예견했고 분명히 인정해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할 것 같이 보였던 때가 있다. 그 시대가 도래한 것이 절대적으로 명백해진 지금 카우츠키는 다시 다가올, 하지만 언제 도래할 지 알수 없는 초제국주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할 것을 단지 약속할 뿐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조건, 지금 이 순간에서가 아니라 언젠가 다른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하겠다는 몇몇 약속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내일을 위한 미래의 외상 마르크스주의를 얻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약속으로서 연기됐다. 우리는 오늘날 모순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현재의 프티부르주아 기회주의적 이론-이론만 그런 것은 아니다-을 얻었다. 그것은 모국과 동맹국들을 제외한 어떤 나라, 즉 적국에 한해서라면 모든 국제주의적 표현에 공감하며, 그들 동맹국들과의 협정이 유지되는 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맹 가입자격이 있는 나라가 복속시킨 나라가 아닌 곳에서만 '민족자결권'에 동의하는 우리 시대의 열정적인, 더 이상 열정적일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국제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만연한 수출을 위한 국제주의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시대 만연한 수천 가지 위선 중 하나다.

그렇다면 추상적으로 제국주의의 뒤를 이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다시 말해 초제국주의 단계의 '가능성'도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니다. 추상적으로 그와 같은 단계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연한 미래의 목표를 핑계로 과격한 오늘날의 목표를 거부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이론적으로 그것은 자신을 현재의 실제 삶에서 전개되는 사태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자신을 꿈을 핑계로 그것으로부터 분리시켰음을 의미한다. 모든 기업과 국가를 예외 없이 집어 삼킨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가 도래하고, 개별 나라의 금융자본이 '초제국주의' 세계 연맹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앞에 언급한 압력ㆍ속도ㆍ모순ㆍ갈등ㆍ격변-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것들에서 또한-하에서 전개될 것이고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르러 그 반대물로 전화할 것이다.

1915년 12월

각주
1_ 이 서문은 원래 레닌의 익명인 'V. Ilyin' 서명으로 작성됐다[marxists.org 편집자].
2_ 카우츠키의 팜플렛 '권력으로 가는 길(Der Weg zur Macht)'.
3_ 이 구절은 카우츠키의 논문 '다시 사고하기 위한 두 단계(Zwei Schritte zum Umlernen, 신시대ㆍNeue Zeit 5호, 1915년)에서 가져온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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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몬드문어 2014.03.04 2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상 마르크스주의', '유연한 미래의 목표를 핑계로 과격한 오늘날의 목표를 거부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일 뿐이다.'와 같은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듭니다. 저는 레닌의 글들을 읽어본 게 거의 없어서 주관적 감상일 뿐이지만, 이 글 속의 단어들은 낡어보이는데 글이 주는 내용은 새로운 것 같아 오묘(?)합니다.
    (그런데 두번째 문단에서 '삶의 조건들을'이 두 번 연속으로 나오는데, 오타인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 때때로 2014.03.05 14: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간이 100년도 못산다고 100년이 역사적으로 긴 시간은 아니죠. 물론 자본주의가 가져온 혁명은 우리의 어린 시절과 현재를 매우 달라 보이도록 만들었지만, 그러한 자본주의적 혁명의 원리 자체는 100년 전과 얼마나 달라졌을 까 따져보면 글쎄라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지적해주신 해당부분은 제가 보기에도 오타인 데, 혹시 모르니 퇴근하면 원문을 보고 정정하지요.


국가와 혁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문성원ㆍ안규남 옮김|아고라 프락시스 총서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이 시작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궁전에서 쫓겨났다. 황제가 물러난 겨울궁전에는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공장과 군대에는 소비에트가 세워졌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고 집행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한 권력 기관이다. 이 소비에트는 1905년 혁명 때 처음 등장했었다.

세계 여성의 날인 2월 23일
(신력으로 3월 8일) 시작된 혁명은 구권력을 무너트렸지만 아직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건 쉽지 않았다. 겨울궁전의 임시정부는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도 임시정부를 넘어서진 못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교착된 전선처럼 러시아 내부에서도 지리한 고착상태가 들어서는 듯 싶었다. 노동자와 병사의 가장 급진적인 부위에서 당장의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불만이 위험스럽게 쌓여갔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하는 소비에트는 머뭇거렸다.

카데츠와 멘셰비키ㆍ사회혁명당의 연립 임시정부는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전선에서 군사 규율을 강화하고, 페트로그라드의 혁명적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6월 18일엔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2월 혁명의 반란이 시작됐던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지구에서 설익은 반란이 계획된다. 레닌과 볼셰비키 중앙위는 이들의 행동을 만류하지만 7월 3일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직 때는 아니었다. 노동자ㆍ농민ㆍ병사의 다수는 아직 볼셰비키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연립정부, 즉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연립정부는 즉각 반격했다. 7월 5일 정부는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사무실을 습격했다. 6일에는 레닌 체포령을 내렸다. 이어 트로츠키와 주요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도 이어졌다. 경찰과 우익 깡패 집단 흑백인조가 활개쳤다. 레닌은 몸을 피해야만 했다. 국경을 넘어 핀란드를 향했다.

국가, 전진하는 혁명의 피할 수 없는 벽

7월 사태 후 핀란드로 피신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국가와 혁명'을 쓰는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이제 막 수립된 부르주아 국가와 대결하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봉건 권력에 맞선 혁명에서 부르주아는 노동계급 대중의 무장을 용인하곤 한다(여러 혁명을 겪은 후인 1836년 스페인 혁명 당시 부르주아는 이러한 무장조차 허락하길 꺼려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로서는 노동자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첫 번째 계율이었다. 따라서 노동자가 쟁취한 모든 혁명 이후에는 노동자의 패배로 끝나는 새로운 투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레닌 재인용ㆍ126쪽,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에 대한 엥겔스의 1891년 서문)

1848년 2월 혁명은 파리 노동계급의 협력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을 승리로 이끈 파리의 노동계급은 '사회공화국'의 전망에 들떠있었다. 그러나 오를레앙 왕조를 몰아낸 파리 부르주아지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조롱하고 모독했다. 분노한 노동계급은 6월 봉기했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무장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잔혹하게 진압당한다.

레닌이 떠올린 것은 이러한 역사였을 것이다. 이미 레닌은 7월 사태를 겪으며 부르주아지의 음험한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7월의 공격으로 자신감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더 나아가려 했다. 연립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 장군과 손을 잡고 볼셰비키와 노동자ㆍ병사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코르닐로프는 더 과감했다. 8월 25일 자신의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향해 진격시켰다. 26일에는 지금까지 협력자였던 케렌스키에게 물러나라고 협박했다.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코르닐로프의 이름은 혁명을 압살하는 데 성공한 장군으로 1936년 스페인의 프랑코, 1961년 한국의 박정희,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앞에 놓였을 것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인 상비군과 경찰ㆍ감옥과 같은 억압 기구를 국가의 핵심으로 꼽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부딪혔을 때, 서유럽과 러시아의 속물들은 …… 공공생활이 복잡해지고 기능이 분화된다는 등의 사실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한 지적은 얼핏 보기에는 '과학적'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사회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계급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은폐하여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있다."(21쪽)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혁명적 노동자ㆍ병사와 궁전의 부르주아지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였다. 엥겔스가 국가의 존재를 "사회가 해결 불가능한 자기모순에 봉착했고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화해 불가능한 대립물들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레닌 재인용ㆍ15쪽,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고 설명한 것은 레닌에게 너무나도 자명해 보였다. 겨울궁전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ㆍ병사와의 대립을 견딜 수 없기에 자신의 힘을 소비에트와 혁명적 노동자ㆍ병사의 무력화에 집중해야 했다. 국가는 "계급 간의 충돌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장 힘이 있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의 것이기 때문이다(레닌 재인용ㆍ25쪽, 앞의 책). 혁명이라는 역동적 시기 국가는 "계급지배의 기관이자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자신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17쪽).

스페인ㆍ한국ㆍ칠레의 경험은 이러한 국가의 본질이 여전히 다르지 않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최근 이집트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평화적인 시기에는 군대ㆍ경찰과 같은 억압 기관이 국가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기의 시기면 군대는 어김 없이 자신의 존재를 만방에 과시하며 역사의 주재자로 등장한다. 최근 미국 연방정부의 폐쇄는 '평화적인 시기'임에도 이러한 국가의 본질을 얼핏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부예산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미국 정부는 10월 1일 폐쇄됐다. 그러나 "국방, 경찰, 소방, 우편, 항공 등 '핵심 서비스' 업무는 정상 운영됐다". 국립위생연구소가 심각한 암 환자 200명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노동통계청은 실업률 발표를 연기했으며, 식품의약국은 수입 식품과 의약품에 대한 안전검사를 중단했다. 부당노동행위를 감시하는 전국노동관계위원회도 활동이 마비됐다. 노동계급 대중을 위한 필수적 공공서비스가 중단된 이 와중에도 미국 군대의 세계적 활동은 계속됐다. 테러리스트를 잡는다는 핑계의 10월 5일 리비아와 소말리아에서 군사 작전은 정부 폐쇄에도 아무런 차질 없이 진행됐다. 군대를 운영하는 데 종사하는 민간 군무원도 복귀했다.

국가는 화해 불가능한 계급대립의 산물이자 지배계급의 계급지배 기관이기 때문에 혁명에 성공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먼저 할일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것이다.

"나의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 장을 본다면, 당신은 내가 프랑스 혁명의 우선적 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 예전처럼 관료ㆍ군사기구를 한편의 수중에서 다른 편의 수중으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 이것이 대륙에서의 모든 현실적 인민혁명의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레닌 재인용ㆍ65쪽, 마르크스가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 저작선집 4권 425쪽)

그러나 혁명의 시기 부르주아지는 내각의 일부를 노동계급 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 한다. 1848년 혁명 후 프랑스에서 그랬고 레닌이 이 책을 쓰고 있던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그랬다. 사회혁명당의 케렌스키가 수상이 됐고 멘셰비키 7명이 내각에 들어갔다. 1936년 스페인 인민정부 내각에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국가에 대한 근본적 반대파인 아나키스트까지 포함돼 있었다. 1970년 칠레에선 심지어 사회주의자가 대통령이 된다.

위기가 이러한 권력의 '재분배'를 통해 해결되진 않는다. 그러나 "관료기구의 자리가 여러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 정당들에 많이 '재분배'되면 될수록, 피억압계급들과 그들의 정점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전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그들의 화해 불가능한 적개심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가장 민주적인 정당들조차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바로 그 억압장치인 국가기구를 강화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53~54쪽). 자유주의 좌파 또는 사회주의자였던 이들이 권력을 잡은 후 강화되거나 여전히 유지되는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은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공통되게 경험했던 바다. 브라질 정부는 올해 6월 대중교통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반란과 10월의 교사 노동자 파업을 강력한 경찰력으로 잔인하게 공격했다. 이 정부의 수장인 브라질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는 사회주의 게릴라 출신이다. 정치권력의 일부를 분배받거나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것이 혁명의 과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혁명은 국가권력을 향해 '자신의 모든 파괴력을 집중'시키고, 국가기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고 절멸시킬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된다."(54쪽)

부르주아 독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핀란드로 피해있던 레닌에게 과제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와의 대결 만은 아니었다. 아나키스트들에겐 국가기구의 파괴가 끝일테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점차적으로 모든 자본을 부르주아지로부터 탈취하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생산량을 있는 대로 급속히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는 과제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했었다(레닌 재인용ㆍ42~43쪽, '공산당 선언' 이론과실천판 39쪽).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은 아직 국가 일반을 없애지 못한다.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사멸할 테지만 이제 막 혁명을 시작한 러시아에서는 "착취자의 저항을 억누리기 위해서도, 그리고 사회주의적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 농민ㆍ프티부르주아ㆍ반(半)프롤레타리아 등을 지도하기 위해서도, 국가권력ㆍ집중화된 권력조직ㆍ폭력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레닌의 생각이었다
(46쪽).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특수한 폭력조직으로서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 역할의 완성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다"(47쪽).

한국의 어떤 자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레닌과 볼셰비키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강신준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볼셰비키는 ……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연히 독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낸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ㆍ링크).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완전한 왜곡이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848년과 1871년 혁명을 경험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술로부터의 빼곡한 인용으로 가득하다. 레닌이 인용한 마르크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나를 두고 말하자면, 나의 공적은 근대사회에서 계급의 존재나 그들 상호간의 투쟁을 발견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나보다 훨씬 전에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서술하였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을 경제적으로 해부하였습니다, 나의 새로운 점은 ①계급의 존재는 다만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 ②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간다는 것, ③이러한 독재 자체는 모든 계급을 지양하고 무계급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일 뿐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레닌 재인용ㆍ58쪽, 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저작선집 2권 497쪽)

파괴된 부르주아 국가를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완전하고 철저하게 수행"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줬듯이 "다수의 인민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72쪽). 파리 코뮌은 이러한 완전한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몇 가지 조치도 보여준다. 코뮌은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위원들로 구성된다. 이 위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보수도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조정된다. 각종 특권은 폐지된다. 법관들도 표면상의 독립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이 코뮌은 부르주아 의회와 달리 직접적인 실행기구이고 위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을 여는 것이다. 혁명의 발전은 이러한 조치들에 덧붙여 구체적 상황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로의 대체는 단지 행정부에 대한 것 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입법ㆍ행정과 함께 사법도 노동계급의 직접적 통제 하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교육과 종교 등도 예외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코뮌은 옛 정부의 권력의 물질적 도구였던 상비군과 경찰을 일단 제거하고 나서, 곧바로 정신적 억압도구인 성직자 권력을 분쇄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1789년 혁명 이후 종교는 혁명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유럽에서 종교는 인민을 교육하는 기관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의 교육은 언제나 가장 보수적인 색채를 띄었었다. 즉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핵심이었다
(71~72쪽).

민주주의의 한계 극복하기

국가의 폭력적 전복,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행. 민주주의가 아직 확립되지 않고 국가가 여전히 폭력에 의한 지배에 머무르던 제정 러시아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까. 민주적 제도의 진전은 사회의 부정의를 교정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확대할 것이라는 게 보통의 기대다.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민주적 절차와 방법이 아직 덜 발전했고 대중이 민주주의에 익숙치 않아서 그렇다고 말해지기 일쑤다.

그러나 레닌에 의하면 "'부'의 전능함이 민주공화국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부의 "전능함이 정치적 메커니즘의 개별적 결함이나 자본주의의 열악한 정치적 외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로서는 가능한 최선의 정치적 외피다. 따라서 자본은 이 최선의 외피를 획득한 뒤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인물이나 제도나 정당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자기의 권력에는 하등의 동요도 없을 만큼 견고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권력을 확립한다."(27쪽)

이는 "고대 공화정들에 있었던 자유"가 "노예 소유자들을 위한 자유"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보통선거가 확립된 한국의 2012년 4월 총선의 투표율은 54.2%에 불과했다. 12월 18대 대선의 투표율은 17대보다 12.8%나 급증했음에도 75.8%에 불과했다. 그것은 레닌에 따르면 "현대의 임금노예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조건으로 인해 궁핍과 빈곤에 몹시 짓눌려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신경쓸 여지도 없고' '정치에 신경 쓸 여지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일이 통상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는 주민의 다수가 공적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146쪽). 게다가 미국에는 아직 스스로 등록한 사람 만이 투표할 수 있고, 최근까지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이 포함된 조직적인 투표 등록 방해가 존재했다.

여기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수호자 미국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동지역 최대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엔 민주주의라는 건 눈꼽만치도 없다. 1970년 칠레에서 사회주의자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에 뽑히자 자본가들은 온갖 사보타쥬를 자행했으며 민주 국가 미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미국은 올해 7월 이집트 군부가 쿠데타를 자행했음에도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는 자본가들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매우 예민한 눈으로, 특히 피억압계급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다음과 같은 레닌의 지적은 우리에게 여전히 매우 소중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극소수를 위한 민주주의,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기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어디서나, 즉 선거권의 '사소한', 아니 사소하다고 이야기되는 세부 조항들에서만이 아니라 대의기관들을 구성하는 기술상의 문제에서, 단체조직권에 대한 실제적 방해에서, 일간지들의 순전히 자본주의적인 구성에서, 그 밖에 우리의 눈길이 미치는 도처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제한들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러한 제한, 예외, 배제, 방해들은 특히 가난을 직접 체험해본적이 전혀 없고 피억압계급들의 실생활을 가까이 접해본적도 없는 자들의 눈에는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들은 빈민을 정치로부터, 민주주의에의 적극적 참여로부터 제외하고 배제하는 것이다."(147~148쪽)

국가 없는 삶의 시작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대체는 국가 일반의 사멸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진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진실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나서는 최초의 행위-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는 동시에 국가가 국가로서 독자적으로 행하는 마지막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한 영역 한 한 영역에서 차츰 불필요해지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스스로 조락한다. 인간에 대한 통치 대신에 사물에 대한 관리와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등장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사멸한다."(레닌 재인용ㆍ31~32쪽, 엥겔스 '반 듀링론')

부자가 아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민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확장시킬 것이다. 그러나 억압자와 자본가들에 대한 제한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완전한 민주주의라고만 말하지는 않는다. "억압이 있고 폭력이 있는 곳에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과도적이고 하지만 필수적인 과정이다. "인민의 착취자ㆍ억압자에 대한 폭력적 억압, 즉 그들을 민주주의로부터 배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민주주의가 겪게 되는 변화"인 것이다(149쪽).

"자본가들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되고 자본가들이 소멸하고 더 이상 어떠한 계급도 없는(즉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서 사회성원들 사이에 전혀 차별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에 가서야 비로소, 그때에야 비로소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자유에 관해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참으로 완전하고 참으로 아무런 제외도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적 노예제로부터, 자본주의적 착취의 무수한 참상ㆍ야만성불합리추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옛날부터 알려져왔고 수천 년에 걸쳐 모든 교훈서에서 반복된 사회적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들을 폭력 없이, 강제 없이, 복종 없이, 국가라고 하는 특별한 강제기관 없이 준수하는 데 점차 습관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사멸하기 시작한다."(149~150쪽).


즉 사회주의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 인민 다수가 "투표와 선거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 사무에도 자주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누구나 다 '국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될 때 국가 일반은 사멸의 길로 접어든다(197~200쪽).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가장 큰 고비에 이르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의 과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트는 이전의 국가기구를 인수해 이용할 수 없다.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파괴돼야 한다. 즉 혁명 러시아의 임시정부와 군대ㆍ경찰, 부르주아적 두마와 제헌의회는 제거돼야 한다. 부르주아 국가를 무너트린 자리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들어선다. 소비에트는 이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인민의 공적 생활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곳의 대표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고 보수는 노동계급의 평균 임금으로 제한돼야 한다.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하지만 아직 억압자에 대한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는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억압자를 억압함으로써 스스로의 사멸을 향한 길을 닦는다.

잊혀진 꿈의 귀환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실제로 이렇게 흐르진 못했다. 참혹했던 내전은 혁명적 노동계급을 산산조각 내놓았다. 독일혁명의 패배로 인한 고립은 모든 과거의 오물을 부활시켰다. 옛 억압자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관료의 독재로 대체됐고 국가는 사멸하지 않고 강화됐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붕괴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모든 국가의 사멸이라는 희망을 백일몽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쓰던 100여 년 전과 다른 운명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경제를 구하기 위해 각 나라의 주권, 인민의 민주적 권리가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다. 그리스 선거에서 급진좌파연합이 부상하자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부르주아 언론은 그리스 인민들을 협박하는 짓도 개의치 않았다.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유럽연합헌법을 국민투표에서 부결시킨 아일랜드 국민들을 겁박했다. 프랑스에서도 헌법이 부결됐지만 유럽의 지배자들은 방법을 바꿔 국민투표 없이도 유럽연합의 원칙을 각 나라에 강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유럽에서 국가는 혁명가들의 행동이 아닌 지배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약화되고 곳곳에서 무시당하는 국가가 국민에 대해서 만은 그 강력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경찰의 잔인한 폭력은 유럽과 중동, 남미의 저항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 차원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국가적 차원의 폭력기구에 의지해 계급지배를 유지하고 있다.

고전적 국가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핵심 역할로써 억압기구의 활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미국에선 공화당의 부시가 애국자법을 만든 데 이어 민주당의 오바마가 국방수권법을 만들어 인민의 민주주의적 기본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오큐파이 운동은 연방정부가 조직한 계획에 따라 전국의 경찰에 의해 일제히 폭력적으로 해산됐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경제를 지닌 중국은 민주주의하고 거리가 먼 나라다. 천안문 광장을 점령한 것은 인민 대중이 아닌 공안이다. 계급지배의 도구인 국가의 혁명적 전복을 꿈꾸었던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는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우리 생활 곳곳에서 고전적 국가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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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월 5일)은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입니다. 어쩌다보니 오늘 한 독서모임에서 류동민 교수가 쓴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를 읽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마르크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제가 아는 한에서 간단하게 끄적거려 봅니다.


1882년 병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알제리에서 머리카락을 모두 자른 마르크스는 1882년 4월 28일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내 예언자의 턱수염과 왕관처럼 머리를 덮었던 영광을 없애버렸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의 트리어 지방에서 태어납니다. 마르크스는 개종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힌 바는 없습니다.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에 따르면 자신의 유대인 혈통에 저주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합니다.

당시 독일은 영방국가들로 이뤄져, 아직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전국적인 통일된 정치체제가 만들어지지 않았었죠. 영방국가 체제에서 산업의 발전은 여전히 제약받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이 프랑스와 영국에서와 같은 발전을 빗겨갈 수는 없었습니다. 더디지만 산업은 성장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또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헤겔의 영향을 받은 이들 중 일부는 교회와 권위주의적 국가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헤겔 좌파, 흔히 '청년헤겔파'라고 부르죠. 헤겔과 동시대의 지성 다수가 그러했 듯이 헤겔도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에 강하게 열광했죠. 노년의 헤겔이 프로이센과 구체제를 옹호하는 철학자로 몰렸던 것과 달리 그의 철학은 혁명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담고 있었습니다. 청년헤겔파는 헤겔을 급진적으로 해석하며 좌파로서 교회와 구체제를 비판했죠.

고향을 떠나 본에서 법학을 전공하게 된 마르크스는 곧 자신의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고 베를린으로 학교를 옮깁니다. 마르크스 또한 청년헤겔파와 교류합니다. 이미 대학에서 급진주의가 힘을 잃어가던 시기, 마르크스는 학교에 자리 잡지 못하고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첫 정치 생활을 시작합니다. 라인신문은 자유주의적 좌파로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국가의 검열을 피한 마르크스의 신랄한 비판 덕이죠. 이 시기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인간의 물질적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평생의 친구인 엥겔스를 만난 것도 라인신문 시절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시기 아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죠. 그가 공산주의자로 변하는 것은 탄압 때문에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파리로 간 이후입니다.

파리에서 그는 당대의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합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엥겔스겠죠. 파리에서 다양한 공산주의ㆍ사회주의 흐름을 검토한 그는 이 시기 헤겔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자가 됩니다. 물론 그는 이후에도 자신이 헤겔의 제자임을 결코 숨기지 않았고, 그의 여러 저작들에는 헤겔적 방법이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파리에서도 결코 혁명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독불연보'를 통해 독일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합니다. 이 독불연보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이 실리죠. 마르크스는 파리에서도 추방돼 브뤼셀로 자리를 옮깁니다.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는 독일 노동자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의뢰로 '공산당 선언'을 씁니다. 이 선언은 1848년 2월에 처음 출간됩니다. 선언 출간 후 곧 1848년 혁명의 서막이 프랑스에서 열립니다. 브뤼셀에서도 쫓겨난 마르크스는 다시 파리로 갑니다. 프랑스 혁명의 불꽃이 독일로 옮겨붙자 마르크스는 다시 쾰른으로 돌아가 '신라인신문'을 창간합니다. 당시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거부했던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이번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후에는 부르주아지와 노동자의 동맹을 주장하지 않죠.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태도는 정치에 대한 그의 기본적 입장을 보여줍니다. 때론 불가피한 동맹을 통해서라도 정치적 개입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으로 타 계급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신랄한 어조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 계급의 정당과 별개의 정당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후 제1인터내셔널에서도 그러한 동맹과 협력을 결코 피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과감히 관계를 청산하는 것 또한 그의 정치개입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독일에서의 혁명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다 결국 패배로 끝납니다. 마르크스의 신라인신문 또한 폐간되죠. 신라인신문 마지막 호는 붉은색 잉크로 인쇄됐다고 합니다. 혁명의 물결이 지나간 후 그는 다시 여러 국가들에서 쫓겨나 당시 가장 자유주의적인 국가인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런던에 머물죠.

런던에서의 첫 10년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은 그의 아이들 목숨을 앗아갔죠. 상황 때문에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대영 박물관에서 그의 필생의 역작인 '자본론' 저술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본론은 20여년이 지난 1867년에야 발간됩니다. 마르크스는 생계를 위해 뉴욕 트리뷴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거나 관심 없는 주제에 관한 의뢰는 엥겔스에게 맡기기도 했죠. 물론 기사는 '마르크스' 이름으로 나갔고, 고료도 마르크스에게 돌아갔죠. 마르크스를 따라 영국에 자리잡은 엥겔스는 멘체스터에 방직공장을 운영합니다. 당시엔 아직 수입이 많지 않아 그도 마르크스의 빈곤한 상황의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진 못했습니다. 그저 기꺼이 마르크스를 대신해 뉴욕 트리뷴 기사를 써주긴 했습니다.

1857년의 공황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합니다. 1864년 런던에서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 출범합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이나 제3인터내셔널처럼 단일한 정치를 지닌 정치집단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와 남부 유럽의 아나키즘적 경향, 영국의 노동조합주의, 독일의 라쌀레주의가 혼재한 상황이었죠. 그러함에도 마르크스는 대단한 카리스마와 술수로 제1인터내셔널을 최대한 자신의 의도와 전략대로 운영합니다. 바쿠닌과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을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1870년까지는 잠재적이었습니다.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발발은 인터내셔널에게 결정적 상황을 맞게 합니다. 프로이센의 점령 하에서 우유부단한 부르주아지의 대응(나폴레옹 황제는 이미 프로이센 황제의 포로가 된 상황)에 분노한 파리의 상퀼로트는 봉기합니다. 1871년 파리코뮌이 바로 그것입니다. 파리코뮌의 성립 전까지 마르크스는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반대하며,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을 최대한 자제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코뮌이 만들어지고 잔인하게 탄압받자 그는 가장 앞에서 파리코뮌을 방어합니다. 당대사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지는 '프랑스 내전'은 바로 이 과정에서 쓰여집니다. 이 책은 1848년 혁명을 다룬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함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불립니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으로 불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파리코뮌으로부터 그 구체적 상을 얻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평균적 임금을 받는 언제나 소환 가능한 대표, 입법과 행정의 통일 등은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으로 자리잡습니다.

파리코뮌의 진압 후 인터내셔널은 그 배후로 지목됩니다. 물론 사실과는 다르죠. 파리코뮌에는 공산주의자들 뿐 아니라 자코뱅주의자, 프루동주의자, 블랑키주의자들 그야말로 다양한 경향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어쨌든 파리코뮌 이후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의 해산해야 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바쿠닌과의 갈등도 더 이상 참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 총평의회를 미국으로 옮김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실현합니다. 공식적 해산은 더 이후지만 1872년 미국으로의 이전으로 실질적인 해산이 됐다고 봐야죠.

인터내셔널 해산으로 마르크스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은 마무리됩니다. 물론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이 성장하면서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충고와 의견교환은 계속됩니다. 1875년 라쌀레의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민당을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고타에서 만들어진 강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강력한 비판을 받죠. 그 서한은 '고타 강령 비판'이라고 불리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유명한 정식,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가 나옵니다.

말년의 마르크스는 런던 망명 초기보다 생활이 한결 나아졌지만 그 시절의 가난은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에 비해 짧게 산 것은 아니지만 그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았죠. 결국 1883년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지금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혀있습니다.

200년 전에 태어난, 150여년 전 사람의 글과 지혜를 우리가 참조할 필요가 있는가?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우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공자는 그보다 더 오래전 사람이지만 그들의 지혜는 인류의 유산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특히 현대 사회과학의 방법에 그가 미친 영향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이사야 벌린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둘째로 그가 자본론을 쓰던 시절, 영국과 몇몇 국가에서나 그 발전의 초기 상태를 보여주던 자본주의는 지금에 와서 지구 전체를 뒤덮으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분석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기파괴적 방식에 의해 지구와 인류의 생활이 지배받고 있습니다. 체제를 옹호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조차 위기가 반복될 때면 마르크스의 귀환을 목소리 높여 외치곤 합니다.

당연히 그의 글이 현대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담고 있진 않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접근법은 그의 어떤 글에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진 않습니다. 소련 공식철학자들의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체계와 달리, 마르크스의 방법은 어떤 상황의 변수만 주어지면 이를 대입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방정식이 아닙니다. 그가 '자본론'의 기본적 개념들을 1840년대 이미 갖고 있었지만 '자본론'으로 묶어내기 위해 무려 20년 가까이 영국 대영박물관의 열람실에서 현실의 증거들을 찾은 데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도 파리코뮌이라는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죠. 타협하지 않는 냉철한 지성은 현실에 대한 치밀한 탐구로부터 비롯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잠시 진정되는 듯 싶었습니다. 국가 부문으로 전가된 부채는 체제 전체를 더 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 첫 희생자는 남부 유럽입니다. 위기가 언제나 혁명적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체제에 대한 의문은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자살이라는 개인적 절망의 형태일지라도 말이죠. 이러한 개인적 절망은 집단적 저항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마르크스의 지혜는 집단적 저항을 만들기 위한 유용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마르크스를 만나고 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만날 수 있는 비교적 짧고 이해하기 쉬운 몇몇 추천도서를 아래 붙입니다.

마르크스주의 개관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다니엘 벤사이드 지음|양영란 옮김|에코리브르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정성진, 정진상 옮김|책갈피

마르크스의 생애
마르크스 평전|프랜시스 윈 지음|정영목 옮김|푸른숲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이사야 벌린 지음|안규남 옮김|미다스북스

주요 저서 1 : 마르크스주의의 요체
공산당 선언|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공상에서 과학으로|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나상민 옮김|새날

주요 저서 2 :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임금 노동과 자본|칼 마르크스 지음|김태호 옮김|박종철출판사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칼 마르크스 지음|김호균 옮김|중원문화

주요 저서 3 : 마르크스의 역사·정치 이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칼 마르크스 지음|최형익 옮김|비르투
프랑스 내전|칼 마르크스 지음|안효상 옮김|박종철출판사

주요 저서 4 : 마르크스의 철학
헤겔 법철학 비판|칼 마르크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다큐멘터리 '칼 맑스'(2010년 12월 ZDF 방영, 찬별님 자막ㆍ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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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갈매나무 2012.05.05 2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잘 읽구 가요!
    그나저나 오늘 같은 날 독서모임이라니. 뜻깊습니다ㅋ

  2. EM 2012.05.06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멋지세요!
    기왕이면 이것도 추가요. http://blog.jinbo.net/cheiskra/51
    아쉬운 점도 많지만, 영상의 전달력이란 대단하기 때문에.. ㅎㅎ

  3. 찬별 2012.05.06 17: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 감사합니다. EM님의 소리 없는 지원이 있었군요. ^^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4. k.o.s.a.j.a 2012.05.07 1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저기서(라고 해봐야.. dju**,socialand*** 이지만;; ) 쥔장님의 글을 애독하고 있지만, 보면서 느끼는 것은.
    1.직장인이 확실하다.
    2.도대체 언제 이많은 책을 다 읽는거야!!!(혼잣말이라 높임말이 아님;;)

    대단하세요.~
    글들 몰래 몰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EM 2012.05.08 1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시네요 ㅎㅎㅎ
      쥔장님 화이팅, 꼬사자님 화이팅!! :)

  5. k.o.s.a.j.a 2012.05.07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히. 자본론에 관한 글들 바쁜시간중에 어렵겠지만 계속해서 화이팅요!~~
    ' 아니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이야!!' 를 외치며 구글링>한국어웹 검색 을 주구장창 누르는 저같은 사람에겐 쥔장님같은 분의 정리가 너무 소중해요...

  6. 와짱이다 2015.08.19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ㅠㅜㅜㅠㅜㅠㅜㅠㅜ글 감사해요 덕분에 도움 마니 되ㅆ너요

2009.05.31 18:19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엥겔스/기타2009.05.31 18:19

독일 이데올로기Ⅰ

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박재희 옮김|청년사


[1845년 봄] 우리는 독일 철학의 이데올로기적 견해에 대립하는 우리의 견해를 공동으로 완성하고 우리의 과거 철학적 의식을 사실상 청산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심은 헤겔 이후의 철학을 비판하는 형태로 실행되었다. 두꺼운 8절판 책 2권에 달하는 수고는 여건의 변화로 출판이 불가능해졌다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을 때에는 이미 베스트팔렌에 있는 출판사에 도착했었다. 우리는 자기이해라는 우리의 주목적을 달성한 이상 기꺼이 이 수고를 쥐들이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8쪽(도서출판 靑史)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말한 저작 '독일 이데올로기'는 1932년에 모스크바에서 처음 완간됐다. 마르크스 본인이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라고 부르고 후대에 와서 '사적유물론'이라 칭해진 마르크스 철학의 기초는 이 책에서 처음 완전한 형태로 전개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선 박종철출판사의 '칼 맑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권에 '독일 이데올로기' 1권 1편의 일부분이 발췌돼 실렸으며 청년사와 두레에서 각각 출판됐다. 두레판은 MEW를 번역 대본으로 삼았으며 1권 2편까지와 2권 1편, MEW 3권 서문이 실렸다. 위에서 표지를 소개한 청년사 판은 Progress 출판사에서 나온 영역본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했으며 1권 2편까지 번역돼 실렸다.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

이제까지 항상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인간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잘못된 관념들을 형성해 왔다. 사람들은 신이나 정상적 인간 따위의 관념들에 따라 자신들 간의 관계를 합치시켜 왔다. 그들 두뇌의 산물들은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버려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들 창조자들은 그들의 창조물 앞에 무릎을 꿇어 왔다. 이제 그들을 망상과 관념과 도그마와 환상적인 존재들 즉, 그들을 옭아 맨 멍에들로부터 해방시키도록 하자. 이들 개념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말하자면 첫째, 어떻게 하면 이들 환상을 인간의 본질에 어울리는 생각으로 바꿀 수 있는가를, 다음으로 어떻게 하면 그것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세번쨰로 어떻게 하면 인간의 머리 속에서 그 환상들을 없앨 수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자. 그러면 현존하는 현실은 무너지리라.

그러한 어린애 장난같은 유치한 환상들이야말로 최근의 청년 헤겔파 철학의 핵심인 바, 이 철학은 독일 사회에 공포와 두려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뒤흔드는 듯한 위험과 범죄성 냉혹함에 대한 숭고한 의식과 함꼐 우리의 '철학 영웅들'에 의해서 선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1권의 저술 목적은, 스스로 이리떼라고 생각하고 있고 남들도 그렇게 여기고 있는 이들 양떼들의 가면을 벗겨버리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음매음매 우는 소리는 기껏해야 독일 중산 계급의 관념들을 철학 형태로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즉 이들 철학 비평가들의 자만심은 기껏해야 독일의 처참한 현실 조건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에 있다. 또한 우리의 목적은, 꿈속을 헤매이며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나 호소하는, 현실의 환상에 대한 저 철학적 투쟁이라는 것을 조롱하고 모욕하려는 것이다.

옛날 어떤 한 용감한 친구는 사람이 물에 빠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무게라는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런 생각이 밋니이나 종교 관념에 불과하다고 공언함으로써 그런 생각을 그들의 머리 속에서 없애 버리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물에 대해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무게라는 관념 즉 그 해로운 결과에 대해 모든 통계 자료들이 그에게 새롭고 다양한 그 증거들을 보여 주는 바의 그 관념에 대해 평생을 바쳐 투쟁하였다. 이런 부류의 용감한 친구들이 바로 독일의 새로운 혁명적 철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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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左)와 엥겔스. www.marxists.org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시작은 '공산당 선언'이죠.

레이건과 대처가 대서양의 양안에서 동시에 시도한 신자유주의적 반동은 90년대 그들의 공식 정치에서의 반대자들-미국 민주당의 클린턴과 영국 신노동당의 블레어-에 의해 완성됐죠. "대안은 없다"는 대처의 유명한 말처럼 대다수에게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외의 대안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구제는 밑빠진 독에 물 붙기 처럼 불가능한 목표로 치부됐죠. 대중을 위한 공공 자원의 이용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됐다고 선언됐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자유주의 찬가는 바로 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서민 주택금융 제도로부터 비롯된 위기로 돌연 끝나고 말았습니다. 비정규직은 그 이름과 달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노동의 형태가 됐죠. 임금의 상승은 물가의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워킹푸어'. 직업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직업이 있음에도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사회죠. 한난라당은 여기에 최저임금 제도를 약화시키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정길 대통령실장은 실업이 내년 2월엔 체제를 위협하는 위기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피력하기도 했죠.

우리가 보았듯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는 억압하는 계급과 억압당하는 계급의 대립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어떤 계급을 억압할 수 있으려면 억압당하는 계급에게 적어도 노예적인 존재라도 이어갈 수 있는 조건들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 이와 반대로 현대의 노동자는 공업의 진보와 함께 떠오르기는커녕 자기 계급의 조건 아래로 점점더 깊이 가라앉고 있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며, 빈곤은 주민 수(數)와 부(副)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개된다. …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노예에게 노예상태에서의 생존조차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노예들이 자신들을 부양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노예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처지에 노예들을 빠뜨리기 때문에 사회를 지배할 능력이 없다.
-『공산당 선언』pp.25~26, 마르크스ㆍ엥겔스, 강유원 번역, 이론과실천

새로운 위기는 과거의 유령을 다시 불러오고 있습니다. 마르크스. 일본에서는 공산당원의 수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자본'의 판매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지난 여름의 촛불 시위는 결과는 미치지 못했지만 20년 전 87년 6월 항쟁의 기억을 되살려줬죠.

다시 마르크스를 꺼내 드는 일은, 단지 그를 추억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그를 '예언자'로 보기 때문도 아닙니다. 자본주의적 자유-거래와 소유, 상업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며 자본주의적 자유의 승리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로의 몰락에 대한 통찰은 마르크스 이전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에게도 있던 것이죠.

곡물 교역의 자유는 우리 공화국의 생존과 양립할 수 없다. 우리 공화국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소수의 자본가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누가 곡물 교역을 담당하는가? 소수의 자본가들이다. 왜 그들은 교역을 하는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소비자에게 비싼 값에 곡물을 되팔아서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무제한적인 자유로 곡물가를 지배하는 이 자본가와 지주 계급이 노동자의 일당을 결정하는 데서도 지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때마다 열 명의 노동자가 줄을 서 있고, 부자가 결정권을 갖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적게 요구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그는 노동자의 값을 결정하고, 노동자는 그의 법에 따른다. 노동자는 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필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당은 16~18수인 반면, 밀은 스티에(setier, 1스티에는 약 75킬로그램)당 36리브르(1리브르는 20수)이다……. 따라서 일당은 생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1792년 11월 19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가 구종을 대신해 읽은 청원서

마르크스를 다시 불러오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사회의 혁명적 개조에 있어서의 대중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신뢰에 기반해 작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대중이 스스로의 열망과 의지를 표현할 기회로 주어진 선거에 갈수록 적은 수의 사람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미국, 한국과 같은 보수 양당제 사회에서 대중은 자신의 선택권을 잃고 투표를 포기하거나 기껏해야 차악에 투표합니다. 더 나쁜 경우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농민들이, 실업자들이 부자들의 정당에 투표하는 것입니다. 민주화 20년, 진보정당 1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여전히 보수적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혁명적 변화가 '사회'적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것은 단지 몇몇 법률적 제도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사회'의 변화는 그 '사회'의 구성원, 대중의 변화를 요청합니다.

기습의 시대, 자각하지 못한 대중들의 선봉에서 자각한 소수가 수행하는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다. 사회 조직의 완전한 개조가 문제인 곳에서는, 대중 스스로 함께 거기 있어야 하며,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그들이 신명을 바쳐 발을 들여놓는지를 그들 스스로 이미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최근 오십 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게 하는 데에는 장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단행본 서설』 p.442, 엥겔스(콜린 레인즈ㆍ레오 파니치 「'공산주의당 선언'의 유산」 『선언 150년 이후』 p.40에서 재인용)

마르크스의 분석과 통찰은 당시보다 현재에 더 들어맞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시 그도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을 순 없죠.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뛰어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부분은 이미 낡았거나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현재에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뛰어난 '예언'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방법론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회를 역사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사회가 고정된 것이 아닌 변화한다는 인식일 것입니다. 또한 이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그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만들어져 간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만 한다. 새로운 대중적 노동자 계급 정당들이 직면하게 된 복잡한 문제-이에는 노동자 계급 자체 내의 이해 관계의 분할, 전문직 중간 계급의 등장, 그리고 그밖의 많은 문제들이 포함된다-는 맑스가 이룬 발전만으로는 거의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와 대결하면서 대중 정당(금세기의 역사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쳐왔던 공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맑스와 엥겔스에 특유한 정치적 실천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에 기반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자신들의 정치적 저작과 연설 팜플렛, 강연, 기사, 연설문, 보고서, 편지들에 결합시킴으로써,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투쟁 경험에서 교훈들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당대의 역사를 활동가들에게 이해시키고자 노력했으며, 보다 훌륭하게는 '자기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고자'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점차로 맑스의 사상을 텍스트나 습득물로서 다루길 즐겼는데,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경우엔 이를 도그마(유사-신학적인 재해석에 꾸준히 종속된)로 추종하기 시작했으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경우엔 (반복된 수정 후에) 이를 거부했다. 그 정치적 영향력이 주변적이었던 (주목할 만한 활동가와 지식인들을 발굴했던 그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선 안되겠지만) 수많은 군소 혁명집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당 선언'의 유산」 『선언 150년 이후』 p.42, 콜린 레인즈ㆍ레오 파니치, 카피레프트 번역, 이후

다시 시작하는 마르크스 읽기. 이 독서의 끝이 무엇일지는 저도 자신하지 못합니다. 20대 초반의 자신감에 기반한 사회주의적 열정은 더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읽기가 굳어버린 제 머리에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을 만들어주길 기대합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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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는 1968 혁명 40주년이 되는 해죠. 올 초에 한참을 법석 떨며 관련 책들을 정리한 적이 있었습니다. 깜빡 잊고 있었던 건 올해가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지 160년이 되는 해라는 겁니다. 꼭 선언 160년을 기념해서는 아니겠지만 강유원씨가 번역한 공산당 선언이 이론과실천에서 나왔네요.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2006년 '경제학ㆍ철학 수고', 올 초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 이어 3번째로 강유원씨가 번역해 내놓는 마르크스 초기 저작이죠. 이대로 쭈욱 가능한 많이 마르크스의 글을 강유원씨의 번역으로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강유원씨가 번역한 공산당 선언에는 1937년에 트로츠키가 쓴 아프리칸스어판 서문과 1998년 홉스봄이 쓴 Moder Edition 서문도 포함돼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의 경우 2006년에 '강유원의 고전 강의'라는 타이틀을 달고 해설서를 낸 적도 있죠.

강유원의 고전 강의 : 공산당 선언
강유원 지음|정훈이 그림|뿌리와이파리

이 책은 동국대에서 있었던 강의를 기초로 쓰여진 책이지만 이걸 기회로 다른 고전들에 대한 강유원씨의 안내서도 볼 수 있길 바랬었습니다만 이걸로 끝이더군요. 물론 '서구 정치사상 고전 읽기'라는 책이 하나 더 나오긴 했었죠.


2. 올해는 또 조세희 선생님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이 출간된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제 인사동에서 조세희 선생님과 기자들의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경향신문 기사 바로가기 '아직도 이루지 못한 '난장이의 꿈''(클릭 하세요)
사진=경향신문

많이들 아시겠지만 조세희 선생님은 노동자들의 집회에 자주 참석합니다. 다른 명사들처럼 목에 힘주고 단상에 서거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거나 하진 않죠. 약간은 구부정한 목에 카메라를 매달고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데 여념이 없으시죠.

집회에서 처음 봤을 땐 '뭐하는 노친네길래 집회에 와서 사진을 찍나'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제가 처음 사진을 찍던 당시엔 사진기자들을 제외하고 아마츄어가 집회장에서 사진을 찍는 경우는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더 눈에 띄기도 했죠. 나중에서야 그 분이 조세희 선생님인 걸 알았답니다. 지금도 종종 집회에서 뵐 수 있었는데 최근엔 뵙기 힘들더군요. 엇그제 대학로의 노동자대회에도 안나오신 것 같더라고요. 기사에 의하면 몸이 아프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연세도 있으시니까 거리에 나와 사진 촬영하기엔 부담되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저 바라는 건 몸조리 잘 하셔서 기사에 언급된 '하얀 저고리'를 빨리 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찍은 그 수많은 사진들을 정리해 전시회를 갖거나 책을 내주시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어쨌든 이 책은 출간된지 30년이 넘어, 200쇄를 돌파했고 현재까지 105만부 넘게 팔렸다고 합니다. 더이상 이 책이 팔리지 않을 세상이 오는게 조세희 선생님이 가장 바라는 게 아닐까도 싶네요. 몰랐던 건 알라딘에 검색해보니 '200쇄 특별판'도 나왔었던 것 같더라고요. 이거 어디서 구할 수 없을까 지금 고민 중입니다.


3. 조금있으면 주제 사라마구 원작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개봉하죠.

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

원작을 못봐서 영화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여자친구가 이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 오늘 정보를 찾다보니 감독이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더군요.

시티 오브 갓 City of God 2002

'시티 오브 갓'의 감독이죠. 이 영화가 제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빈민가 어린이들의 사악함을 지독하게도 잘 잡아냈죠. 그가 이번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선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기대가 됩니다. 그 전에 소설부터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4. 전 출퇴근을 버스로 합니다. 1시간 정도 되는 시간에 운 좋게 자리에 앉을 수 있으면 책을 보죠. 월요일부터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의 '가난한 휴머니즘'을 읽었습니다.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이두부 옮김|이후

책은 오래전에 사놨었죠. 얇은 책이긴 한데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쓴 책이라고 해서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쓴 책을 불신하는 편견 때문이죠. 다음 달 독서모임의 책을 제가 정할 순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책을 할까 하고 이것 저것 고민하다가 김규항씨의 블로그에서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봤어요.

김규항씨 블로그 글 바로가기(클릭 하세요)

얇고 부담없는 책이라 김규항씨를 믿고 책을 폈습니다. 오늘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정거정을 지나칠 뻔 했어요. 아침부터 버스 안에서 눈물을 흘릴 뻔 하기도 했습니다. 전 가난이 싫습니다. 가난은 사람을 비열하게 만들기 때문에 더 싫습니다. 위에 소개한 '시티 오브 갓'도 폭력적이고 비열한 빈곤층 아이들에 대한 영화죠. 빈곤은 아프리카에서 내전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그동안의 제 생각을 반성하게 됐어요. 가난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지만 그 비참함으로부터의 탈출할 수 있는 힘도 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죠. 지배자들이 흔히 얘기하는 것 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게으르지만도, 비굴하지만도 않습니다. 잊고 있던 희망을 다시 되찾게 해준 책입니다.

라팡미 셀라비[각주:1]를 방문한 한 변호사가 어느 아이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저는 지금도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이티의 모든 어린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크리올 어로 한 그 대답을 변호사가 알아듣게 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옮겼습니다. "이 소년은 아이티의 모든 어린이들이 배불리 먹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 아이는 크리올 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통역의 잘못을 지적하며 끼어들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배불리 먹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는 말에는 지금 내가 일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면 제가 말한 뜻과는 다르게 받아들이실 수도 있잖아요. 저는 지금도 일하고 있는 중이고, 결국 아이티의 모든 어린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을 당신이 알아들으셨으면 좋겠어요."
가난한 휴머니즘 142~143pp.

  1. 라팡미 셀라비(Lafanmi Selavi) :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센터로 아리스티드가 1986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만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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