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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에서 생산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은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동일한 노동과정의 한 단계로 취급될 수 있음을 살펴봤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보존되어 생산물로 이전한다. 면화는 방적노동에 의해 소멸되어 면사의 형성요소가 된다.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의 원래의 형태는 소멸되지만, 그것은 오직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위해 소멸될 뿐이다"(265쪽).

"노동자가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즉, 그것을 생산물의 가치성분으로 생산물로 이전하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일반(勞動一般)을 첨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첨가되는 노동의 특수한 유용성(有用性), 그것의 특수한 생산적 형태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265쪽)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수단에 가치를 첨가하는 것은 오직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으로서만 그렇게 한다.

"노동의 단순한 양적(量的)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質)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노동의 이중성(二重性)으로부터 생기는 이러한 이중의 효과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명백히 나타난다."(266쪽)

생산조건의 변화로 방적노동이 동일한 시간에 여섯 배의 면화를 면사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자. 동일한 시간의 노동에 생산물로 이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여섯 배가 된다. 그러나 여섯 배의 생산수단에 첨가된 노동량은 이전과 같다. 즉 1파운드의 면화는 이전의 1/6의 노동만이 첨가된다. 생산성이 변하지 않고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있다.

생산적 노동은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와 가치를 소멸시키고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는 한에서만 새로운 노동을 첨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첨가하는 노동은 반드시 특정의 유용한 형태이어야 하며, 생산물들을 새로운 생산물의 생산수단으로 사용해 그들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유용한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273쪽).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중의 노동력[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경기가 좋은 동안에는 자본가는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노동의 이 무상(無償)의 선물을 보지 못하지만, 노동과정의 강제적인 중단, 즉 공황(恐慌)은 자본가로 하여금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273~274쪽)

정리하면 생산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은 생산수단의 사용가치다. 가치는 소비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再現)"된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다른 요소, 활동하는 노동력의 경우는 다르다. 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으로서 생산수단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는동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앞의 7장의 예에서 방적공이 6시간의 노동을 하고 일을 마친다고 하자. 그는 12원의 생산수단에 3원의 가치를 덧붙인다. 이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전된 가치(12원)를 넘는 가치다.

"이 가치는 이 생산과정 내부에서 발생한 유일한 본원적 가치(本源的 價値)이며, 생산물의 가치 중 이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된 유일한 부분이다."(275쪽)

물론 우리의 자본가는 자신이 노동력 구매를 위해 지출한 화폐(3원)를 들먹일 것이다. 지출된 화폐에서 보자면 3원이라는 새로운 가치는 재생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재생산된 것이고, 생산수단의 가치처럼 외관상으로만 재생산된 것【가치가 이전된 것】은 아니다. 한 가치의 다른 가치에 의한 대체는 이 경우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276쪽)

당연히 우리의 자본가는 6시간을 넘겨 노동과정을 지속시킨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再生産)할 뿐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超過價値)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差異)이다"(276쪽).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한다. 그는 생산수단과 노동력 구입에 들어간 자본 중 생산수단에 투입된 것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른다. 이는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시장에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조건 등의 변화로 끊임없이 변동한다).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은 그 가치를 보전하고 이전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력 구입에 들어간 자본을 가변자본이라고 부른다. 노동력은 그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그 이상의 초과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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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갓페 2015.04.20 1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제1절 노동과정 【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으스대며 앞서 걸어가고 노동자는 풀이 죽어 뒤따라간다. 그들은 공장ㆍ농장ㆍ광산ㆍ공사장ㆍ상가ㆍ사무실로 들어간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소비하기 위해서 구매했다. "노동력(勞動力)의 사용이 바로 노동(勞動)이다"(235쪽).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우선 사용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은 사회형태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7장 1절에서 사용가치 생산의 일반적 성질, 즉 노동과정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검토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다. 인간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사용해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자신도 변화시킨다. 자연과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는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노동이 동물과 다른 것은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236쪽)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目的)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organs)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236쪽)

노동과정에서 인간의 의지ㆍ정신은 자연과 자기 자신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타인 혹은 스스로에 의한 규제와 통제를 요구한다. "노동의 내용과 수행방식이" 노동자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236쪽)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노동 일반은 인간 생존의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예찬 받아야 할 어떤 이상적 상태는 아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을 '육체노동'으로만 한정짓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신체의 활용은 '머리', 즉 정신 또는 관념의 사용도 포함된다. '합목적적 의지'는 타인에 의해서 주어지든, 자기 자신에 의해 강제되든 인간 노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노동과정에는 노동 그 자체(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와 노동대상, 노동수단이 요소로 필요하다. 노동대상은 인간의 노동이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다. 노동수단은 노동대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와 노동대상을 연결해주는(중개하는) '전도체(conductor)'다. 노동과정 수행에 필요한 다른 모든 개체적 조건들도 노동수단에 포함된다. 벌목꾼에게 숲의 나무는 노동대상이다. 나무를 베기 위한 톱과 도끼는 노동수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재는 목수에게 노동대상이다. 목수는 망치와 대패 등의 노동수단을 이용해 노동대상인 목재를 책상과 의자로 만든다. 목수가 책상과 의자를 만드는 작업장(땅과 기둥ㆍ천장 등)도 노동수단이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인간을 '도구(道具)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遺物)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238쪽)

선사시대를 석기시대ㆍ청동기시대ㆍ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여기서 '석기ㆍ청동기ㆍ철기'는 그 시기 인간이 사용한 주요 도구(노동수단)다. '자연과학적 연구'로 취급되긴 하지만 인간의 물질적 생산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측면에서 올바르다.

지금까지를 요약하면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變化)를 일으킨다"(239쪽).

노동과정의 결과물인 생산물 입장에서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노동은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 생산물은 또 다른 노동과정에 투입돼 생산수단으로 되기도 한다. 따라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結果)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條件)이기도 하다"(240쪽). 생산의 결과인 사용가치가 다음 과정의 생산에 어떠한 역할을 할지는 가변적이다. 면화는 그 자체로 솜옷과 이불에 사용된다. 때론 실을 뽑아내기 위한 원료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치가 변하는 데 따라 그 사용가치의 규정도 변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 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242쪽). 결함이 없는 생산물에는 과거의 노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소비'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생산적 소비(productive consu mption)'라고 부른다. 개인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는 소비자 자신을 만들어 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 자신과 구별되는 생산물을 만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勞動過程)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밀죽의 맛을 보고 누가 그 밀을 경작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노동과정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 하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다. 즉, 노예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밑에서인지 또는 자본가의 주의깊은 눈초리 밑에서인지, 또는 킨킨나투스【Cincinnatus: 고대 로마의 장군, 은퇴 한 뒤 농사를 지었다.】가 자기의 작은 토지의 경작으로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돌로 야수를 쳐죽이는 미개인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244쪽)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특수하고 역사적인 사회형태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한 자본가의 공장에서도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동일하다(마르크스는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산방식 그 자체가 변화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의 생산방식에서의 혁신에 대한 찬사(?)로 유명하다).

마르크스는 다음 절(가치증식과정)로 넘어가기 전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 노동과정의 특징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所有)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所有物)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245쪽).


제2절 가치증식과정(valorization process)

노동과정의 결과물 그 자체를 위해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교환가치를 지닌 사용가치, 즉 판매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의 총액은 그 자신이 생산을 위해 투하한 화폐의 총액(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는 데 든 총액)보다 커야 한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價値)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려고 한다."(247쪽)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노동과정은 상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價値形成過程)의 통일이어야 한다"(247쪽). 이번 절에서는 바로 이 가치형성과정을 고찰한다.

마르크스는 면사의 생산과정을 예로 들어 가치형성과정을 살핀다. 10파운드의 면사 생산에 10파운드의 면화와 1개의 방추가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면화 10파운드의 가격은 10원, 방추 1개의 가격은 2원이라고 하면 면사 10파운드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은 12원이다. 12원의 금량을 생산하는 데 2노동일(24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생산수단 12원에는 2노동일의 사회적 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것이다.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가 된다. "여러가지 특수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는] 노동과정들은 동일한 하나의 노동과정의 순차적인 각각의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249쪽).

이를 위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우선 면화와 방추가 실제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 둘째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이후 면사의 생산에도) 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선 안 된다. 금으로 만든 방추를 사용한다고 해서 면사가 더 많은 가치를 얻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살피는 것은 "방적공의 노동이 면화에 첨가하는 가치부분"이다.

노동과정으로서 면사의 생산을 살필 경우 방적공의 노동은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특수한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다. 그러나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한 그 노동은 대포를 만드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면화재배ㆍ방추제조ㆍ방적이 면사의 가치라는 하나의 총가치(總價値)의 단순히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부분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250쪽), 즉 동일한 노동과정의 각각의 단계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자의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량의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변화시킨다. 즉 면화에 일정량의 노동이 첨가된다. 여기서도 다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일정한 [경험적으로 확정된] 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따름이다."(251쪽)

이제 면사 10파운드에 들어있는 총가치를 검토하자. 우선 면사 10파운드 생산에는 면화 10파운드와 방추 1개가 필요하다. 이는 12원이고 모두 2노동일이 대상화돼 있다. 방적 노동자는 1시간에 1과2/3파운드의 면화를 1과2/3파운드의 면사로 변화시킨다고 가정하자. 10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6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방적 노동자의 하루 노동력 가치는 3원이다. 따라서 면사 10파운드에는 모두 2와1/2노동일의 노동이 응고되어 있고, 그 가격은 15원이다. 면사 10파운드를 생산하는 데 투하한 가치 15원은 여전히 15원이다. 이래서는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생산에 나설 이유가 없다.

"투하된 가치는 증식(增殖)되지 않았고,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資本)으로 전환되지 않았다."(252~253쪽)



그러나 노동력 재생산에 6시간(3원, 1/2노동일)이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의 자본가가 노동자를 6시간만 일을 시킬 이유는 없다.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즉,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즉, 하루의 노동]은 그에게 속한다. 노동력은 하루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하루동안 유지하는 데는 1/2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257쪽)

이제 자본가는 노동력을 12시간동안 사용하려 한다. 작업장에 들어간 노동자는 12시간의 노동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발견한다. 노동자는 20파운드의 면화(20원, 3과1/3노동일), 2개의 방추(4원, 2/3노동일)을 발견한다. 24원의 생산수단과 3원의 노동력이 생산에 투입된다. 3원의 노동력은 추가된 6시간동안 3원의 가치(6시간, 1/2노동일)를 더한다. 이제 생산물의 총가치는 30원이 된다. "그리하여 27원은 30원으로 되었으며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낳았다.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258쪽).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칙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방추·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원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원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원이나 더 많이 유통으로부터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 과정은 유통영역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258쪽)

가치증식과정은 가치창조과정이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로 보상되는 점을 넘어 계속되는 과정이다.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나 가치형성과정은 오직 양적 측면에서만 다뤄진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繼續時間)뿐이다"(259쪽).

가치형성과정의 고찰에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259쪽). 즉 사회의 주어진 생산조건 하에서 평균적인 조건하에서 노동력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뮬 자동 방적기가 지배적인 생산수단인 사회에서 물레로 방적을 해서는 안 된다. 물레를 이용해 면사를 생산할 때 더 들어가는 초과시간은 가치를 형성하지 못한다.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 것인가 아닌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다"(260쪽). 하지만 현실에서 자본가들은 화폐를 아끼기 위해 정상보다 뒤쳐진 생산수단을 투입하면서도 노동력에게는 정상 이상의 활동을 요구하기도 한다(이는 한편 이윤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생산수단을 아껴야 하는 내적 동인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한편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260쪽). 자본가는 시장에서 평균적인 능률 이상의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노력한다(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고급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사회적 평균보다 낮은 가치를 지닌 노동력-이주노동자-을 구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생산과정에서 능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잠시라도 노동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일정한 기간 구매했으므로,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260쪽). 낭비된 원료와 생산수단도 생산물의 가치에 들어가지 않기에 자본가는 원료와 노동수단의 절약을 위해 노력한다.

마르크스는 1장에서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다(261쪽). 이 차이는 생산과정의 두 측면으로 나타난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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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우선 화폐 그 자체로는 가치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구매수단과 지불수단으로서 화폐는 상품의 가격을 실현할 뿐이다. 화폐를 유통에서 빼내어 쌓아놓는 것(퇴장)이 가치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도 자명하다.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을 다시 살펴보자. 구매한 상품을 다시 판매하는 과정(C-M)에서도 가치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상품을 현물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치변화는 구매(M-C)한 상품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 상품의 가치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구매 또한 오직 그 가치대로 지불되는 등가물끼리의 교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消費)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그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노동의 대상화, 따라서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勞動力: labour-power)이다."(218~219쪽)

화폐소유자가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것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노예와 농노는 노예주와 봉건영주의 의지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 또한 노동력 소유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오직 한정된 시간 동안만 판매해야 한다. 자신의 전 생애를 모두 판매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한 노예 혹은 농노와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노예적 강제 노동을 오직 일탈로서만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개별 자본가의 이해와 달리 보통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는 노예적 강제 노동을 강력히 단속하려 한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두 번째 조건은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 자신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는 방법 이외에 자신의 생활수단과 상품을 생산할 수단(생산수단)을 지니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 유지 혹은 시장에 내놓을 상품의 생산을 위한 수단을 지닌 노동자는 그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free)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自由人: free individual)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物件)을 가지고 있지 않다(free of)는 의미다."(221쪽)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를 만나게 되는 사연은 뒤의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에서 다룰 것이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221쪽).

분명히 어느 정도 발전한 사회적 분업을 기초로 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勞動者)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222쪽). 따라서 이 조건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새로운 세계사를 형성한다.

우리의 관심을 다시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돌려보자. 이 상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지니고 그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223쪽). 노동력은 노동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상품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은 결국 노동자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로 계산된다.

노동자가 정상적인 건강상태를 유지해 다음날 다시 노동과정에 투입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은 육체의 물리적인 한계에 의해서만 규정되진 않는다.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이 어떤 조건 하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및 도덕적 【정신적】 요소(historical and moral element)가 포함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의 일정한 나라에는 노동자들의 필요생활수단의 평균적 범위는 주어져 있다."(224쪽)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에는 또한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재생산하기 위한 생활수단들도 포함된다. 즉 출산과 육아를 위한 생활수단이 포함됨으로써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노동력 판매자를 세대를 넘어 영원히 만날 수 있게 된다. 한편 작업의 숙련을 위한 교육 비용도 노동력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에 포함된다.

실제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최저생계비(빈곤선)를 결정하는 데는 육체적 지속을 위한 상품들의 가격과 함께 출산과 육아ㆍ교육, 문명의 발전 정도가 반영된다. 한국의 경우 과거에 포함돼 있지 않던 통신비가 최근에는 필수적 항목으로 포함된다. 나라에 따라서는 적당한 문화생활(영화, 공연, 스포츠)을 위한 비용을 포함하기도 한다.

역사적 도덕적 조건과 함께 상품가치 변동은 노동력의 가치를 변화시킨다. 임금수준을 결정하기 위한 갈등에서 물가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미국 노동자의 임금 1970년대 중반 이후 오르지 않았음에도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중국산의 싸구려 상품 덕이다. 대형 마트의 저가 상품은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노동력 상품은 구매와 동시에 사용가치가 실현되지 않는다. 노동력의 사용가치, 즉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걸쳐서 실현된다. 보통은 노동계약 후 일정한 기간 노동력을 발휘한 다음에 후불로 임금을 지불받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의 구매와 판매에 대해 살펴봤다. 노동력 사용가치의 실현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노동력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유통의 밖에서 이뤄진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바로 그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및 노동력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분야를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230쪽)

우리가 이 비밀을 파헤치기 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상품교환과 유통분야의 모습은 천부인권이 지켜지는 참다운 낙원처럼 비춰진다. 노동력의 구매자도 판매자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들은 동등한 상품소유자로서 평등하게 등가물끼리 교환한다. 이 상품소유자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처분권을 지닌다. 따라서 각자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지닌 이 모든 행동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설파하듯이 신의 섭리처럼 서로간의 이익,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이 된다. 오직 상품의 유통과 교환의 영역에만 관심을 지닌 주류 경제학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정된 조화를 이뤄낼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한 (따라서 위기와 파괴에 관심이 없거나 그것을 정상에서의 일탈로만 치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음 장부터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생산영역에 따라 들어감으로써 가치와 잉여가치 생산의 비밀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화폐소유자와 노동자가 앞서 가고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231쪽)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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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 교수는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오늘 '자본'을 읽다' 9월 22일자 연재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강의를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환가치와 가치를 구별하는 데 애를 먹는 것을 자주 봅니다."(강신준 9월 22일)

지금까지 강 교수가 연재한 글 중 바로 위 문장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애를 먹는' 사람에는 강 교수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교환가치와 가치만이 아니죠.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 전체를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를 갖기로 하고 오늘은 자본론 1장에 집중해 강 교수의 연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자본론의 모든 인용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판으로 대체했습니다. 강신준 교수로부터의 인용은 모두 연보라색 굵은 글자로 표시했습니다.


1. 상품의 이중성 … 사용가치ㆍ가치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1권 77쪽)

마르크스는 상품의 이중적 측면을 위와 같은 말로 정의합니다. 1장 1절의 제목도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입니다.

설명은 사용가치부터 시작합니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합니다. 여기서 유용성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연적 필연성에 한정하면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으로서 상품은 최소한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용가치로서 상품은 그것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질적ㆍ양적으로 구별됩니다.

상품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됩니다. 일정한 비율로 말이죠. 여기서 상품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 또는 관계가 교환가치입니다. 상품이 교환가치라는 것은 서로 다른 상품들 속에 공통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로 다른 상품이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품의 자연적 속성은 공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상품의 유용성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용가치와 연관된 것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교환에 있어서 사용가치는 서로 다른 것이기만 하다면 문제가 안됩니다. 결국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거기에 남는 유일한 것은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 뿐입니다.

"이들 노동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생산물들은 유령 같은 형상[즉, 동질적인 인간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형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노동생산물들은 인간노동력이 그 지출형태와는 관계없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노동이 그들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로서 가치, 상품가치이다."(1권 47쪽)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품은 우선 유용한 물건으로서 사용가치입니다. 이 상품은 서로 일정한 비율로 교환됩니다. 즉 교환가치입니다. 이 교환가치는 상품이 공통된 무엇인가를 지니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 못합니다. 그 공통된 것은 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이고, 이것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 강의'에서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이를 도식화 합니다.


하비 53쪽

강신준 교수는 이와 달리 교환가치를 사용가치의 '발전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의 설명과 완전히 다른 것이죠. 상품이 교환가치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용가치여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유용하지 않은 물건(또는 서비스)을 교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용가치가 발전해 교환가치가 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교환을 위해서도 상품의 사용가치적 측면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가 '두 요소'라는 제목으로 상품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한 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죠. 이 설명이 불분명하다면 아래의 데이비드 하비의 설명을 읽어보시죠. 재밌게도 이 책은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것입니다.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여기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면 사용가치가……? 그러나 맑스의 분석은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그것도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바꿔 말해 우리는 다른 개념을 말하지 않고는 이들 개념 가운데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이 개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 있고 어떤 하나의 전체(totality) 속에 내재하는 관계들인 것이다."(하비, 55쪽; 오역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하비는 강 교수와 같은 설명을 '인과론'적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마르크스가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를 설명하는 자본론 1권 1장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인과론'적인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변증법에 대해선 차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래의 그림을 앞의 하비의 도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강신준 9월 15일

따라서 강 교수의 아래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교환가치를 비교해주는 양적 단위는 바로 가치이고 그것은 인간의 노동입니다"(강신준9월 15일)

가치가 강 교수의 설명처럼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그것의 질적 측면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강 교수의 생각은 사실 주류 경제학에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죠. 애시당초 그것이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환되는 비율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강 교수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교환가치'를 매우 강조하죠. 주류 경제학에서 이러한 상품들 사이의 교환비율(교환가치)의 강조는 그들의 선배,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세웠던 노동가치론을 버리고 한계효용 혁명으로 나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강 교수가 어딘가 인터뷰에서 칭찬했던 책인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폴 스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양적 가치이론은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상대적인 비율을 규율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과만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주류의 이론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주류의 이론에서는 그것이 교환가치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에게 교환가치란 가치를 배후에 숨기고 있는 '현상적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단지 교환가치의 결정에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양적 가치의 문제란 무엇인가? 위에서 서술한 분석이 한 가지 답변을 해준다. 상품이 가치라는 사실은 상품은 물질화된 추상적 노동이라는 의미이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품은 사회의 총 부창출활동 가운데 일부를 흡수한다는 의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노동은 시간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교환가치와 구분되는 양적 범주로서의 가치가 어떤 의미인지가 분명해진다."(스위지 58쪽)


2. 노동의 이중성 …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

상품의 이중성은 노동의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사용가치로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유용노동이 필요합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목재를 만들고, 목재를 재단하고, 재단된 목재를 짜맞춰야 하는 것 같은 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이 꼭 육체노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가치로서 상품을 만드는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 과정이 사장된 말 그대로의 인간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루카치의 "자본주의의 본질을 반영하는 추상"이라는 주장을 인용한 폴 스위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의 그 어떤 사회형태에서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이동성보다 훨씬 더 높은 이동성을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며 마르크스의 추상노동 개념의 현실성을 설명합니다
(스위지 55쪽).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방향이 변함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부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의 형태로 또는 직포의 형태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노동형태의 이와 같은 변화가 마찰 없이 일어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1권 55쪽)

기업이 창의적 노동에 대한 무수한 찬양을 늘어놓으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노동과정의 표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이러한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죠. 추상적 인간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과 구분되는 현실성을 지니며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노동의 이중성을 구성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이 중 어느 하나의 측면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용가치를 만든 노동은 시장의 교환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으로 바뀝니다. … 배추라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에는 항상 농민의 힘든 노동이 들어갑니다. … 내가 생산한 배추의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다른 농민들이 생산한 배추와 비교되는 것은 물론 배추를 구매할 소비자의 사정도 고려되어야만 비로소 결정됩니다. 요컨대 나 혼자만의 사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우리가 마르크스를 잊은 채 읽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강 교수가 좋아하는 '개미와 베짱이' 비유로 들어가면서 완전한 파탄을 드러냅니다.

"개미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일 뿐,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은 아닌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굳이 이중성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동시에 갖는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개미(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구체적 유용노동일 뿐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추상적 인간노동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노동자가 교환가치, 정확하게는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베짱이)는 어떻게 잉여가치를 획득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여기에선 강 교수의 연재가 기대되기도 하네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아래의 마르크스 설명과 비교하면 강 교수의 설명이 얼마나 마르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권 58쪽)


3.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강신준 교수는 이 부분에서 자본론 1권 1장 3절 부분을 거의 통째로 건너뜁니다. 물론 여전한 헛소리로 분량을 채우고 있긴 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가치형태를 설명하는 것은 화폐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이어지는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기원'절과 함께 일반적 가치형태, 즉 화폐형태가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은폐하는 지 그 기원을 폭로해줍니다. 가치의 현상형태인 교환가치가 취하는 여러 형태를 사려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면의 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 절의 핵심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바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규제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화폐형태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또한 화폐형태의 등장은 가치가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킬 중심원리로서 응결되기 시작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항상 기억해두어야 할 점이기도 하지만 가치는 물적 존재가 아니면서도 객관적 대상이다."(하비 76쪽)

강 교수는 여기서 뜬금없이 화폐가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발전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강신준 9월 29일)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건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르크스나 그의 해설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인 것이죠. 하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 화폐형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고 대신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런식의 왜곡은 프루동과 크메르 루즈를 언급하며 화폐형태를 "역사의 필연적인 자연법칙"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프루동과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면 강신준 교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우선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프루동은 처음에 정의ㆍ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1권 109쪽 각주2)

프루동에 대한 비판만 놓고 보면 강 교수의 주장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정의로부터 비롯한 이상을 따르는 운동은 참혹한 결말을 맞곤 했죠. 하지만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약간 다르게 들립니다. "상품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며 노동화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힌 마르크스는 오웬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이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같다는 점"이라며 그 이유로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고 밝힙니다(1권 121쪽 각주1).

마르크스는 상품생산을 전제로 한, 즉 자본주의의 핵심적 원리를 그대로 둔채 그 현상형태인 화폐형태만 고치자는 주장에는 가차없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근본적인 변혁을 전제로 한 주장에는 호의적인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보면 강 교수의 입장이 마르크스와 같다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강 교수는 프루동에서 더 나가 화폐형태 자체가 "필연적인 자연법칙"이라며 자본주의의 성숙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고 있죠. 이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 몽상일 뿐이며 이러한 몽상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법칙을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주장으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4. 결론을 대신하며 … 중요하지만 빼먹은 것들

아직 연재가 계속되고 있으니 강신준 교수에 대한 비판의 결론을 여기서 내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본론 1권 1장을 마치고 7회차까지 연재를 보면 강 교수의 자본론 해설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강 교수의 오해는 계속해서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른 분량 중 가장 거슬렸던 것은 15일자 연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얘기처럼 내 이익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현실 자본가들의 노력은 경쟁을 빚고 경쟁의 결과가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거든요.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치가 빚어내는 변증법의 요술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가치량을 결정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1권 49쪽)이 이런식으로 왜곡되는 걸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간단히만 지적하자면 우선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경쟁의 강제법칙으로부터 연역해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마르크스가 1권에서 '경쟁'을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 즉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강 교수의 '사회적 평균'은 마치 보다 평등한 사회의 형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전체에 걸쳐서 자본가의 잉여가치 획득과 더 가난해지는 노동자의 현실이 자본주의적 법칙의 현실적 결과임을 설명하는 것과 반대되는 주장이죠. 또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형성하는 '경쟁' 운운하는 데, 마르크스는 경쟁의 강제법칙을 자본가가 개인이 아닌 자본의 인격화한 범주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핵심 원리로 설명합니다. 즉 '자본가들의 노력'이 '경쟁을 빚'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법칙이 자본가의 자본으로서의 노력을 강제하는 것이고 이는 노동자들에게 더 비참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강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결과조차도 자신의 희망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9월 22일자 연재에서 "모든 사용가치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집니다"는 단언도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동은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사용가치[즉,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1권 54쪽)

이 설명은 이후 자연과의 신진대사라는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죠. 강 교수의 단언은 마르크스가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후예들이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이론과 실천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번 주에도 어김 없이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연재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힘 닿는대로 비판적 검토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는 강 교수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만들어나가기 위함입니다. 격동을 앞둔 지금 마르크스의 유산을 제대로 살피는 일은 더 중요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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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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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etas 2012.10.08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동안 강 사마의 글을 안 읽었었는데, 요새 쓰는 글이 계속 저런 식인가 보군요. 명색이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학자인데 (정말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를 혼동하는 대목에서는 (부정적 의미에서)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강 사마께서는 아무래도 난독증이 심하신 모양입니다.

    • 때때로 2012.10.08 14: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문제가 이해의 부족인지 의도적인 왜곡인지 여전히 헷갈립니다. 최근 발표한 다른 책과 예전에 썼던 '자본의 이해'가 다시 읽고 싶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지만, 이런 것 때문에 그 책들까지 보기엔 시간이 너무 없네요.

  2. EM 2012.10.16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때로 님께서 임자를 만나셨군요. ㅎㅎ
    잉여 님, 잠시 링크해주신 홈피에 들어가보니, 부산에 계신 모양이군요.
    아쉽습니다. 수도권이시라면 저희 자본 읽기모임에 초대하는 건데.. ㅎㅎ
    암튼 계속해서 생각 공유해주세요. 저같은 객도 구경하는 재미가 좋습니다 ^_^

    • 때때로 2012.10.17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러 사람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그러다 제 얕은 밑천이 모두 드러나느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고 합니다. 그래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니 다행이에요^^

    • 때때로 2012.11.22 1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잉여// EM님이 주도하는 모임은 말 그대로 함께 읽고 있습니다. 올해 3월쯤 시작해 지금까지 매주 하고 있는데 한번 할 때 2~3시간 정도 읽습니다. EM님 처럼 다른 참가자들을 지도하고 관련된 지식들을 전해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좋지요.

    •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부산에서도 자본읽기 모임을 하고싶고, 주도해서 자본을 읽고싶어 하는사람들을 모우고싶은데,,어떤방법으로 해야할지 잘몰라서요..
      혹시 노하우나 어떤식으로 모임을 하고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3.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 읽다 말았는데, 님이 문장의 이해를 잘 못하신 듯 한데여~
    이 부분에 대한 거요.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
    강교수님의 이부분의 대한 설명은 님이 이해한것처럼 사용가치가 발전해서 교환가치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품의 사실상 가치는 사용가치이고, 사용가치가 100원이라면 그 출발점인 100원에서 시장에서 수요공급원리에 의해 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님이 이해하고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며, 상품의 이중성에 대한 설명도 수업시간에 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집에가서 책을 봐야할듯^^

    • 때때로 2012.10.12 1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이 설명하신 것과 같은 강 교수의 사용가치 설명이 틀렸다는 겁니다. 사용가치가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에 조정돼 교환가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사용가치는 사용가치일 뿐 교환가치로 변하지 않습니다.

  4.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배우기에 사용가치는 그 상품안에 가변자본 + 불변자본과 그리고 노동력투입(가본자본)으로 인한 잉여가치가 포함된 게 사용가치이고, 교환가치는 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는 상품이 시장에 나왔을때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가격이 조정되게 되는데 그것이 교환가치로 알고있습니다. 이것이 상품의 이중성으로 기억이 되는데, 상품속에 가치가 사용가치(구체적노동)와 교환가치(추상노동) 둘로 나뉘는것. 아 기억이 났네요.
    아무튼 님이 쓴 글을 읽어보니 강교수님의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에 대한 이해와 님의 이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용가치에 잉여가치가 포함돼 있다니요. 이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를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군요. 자본론 읽기 전에 정치경제학 입문용 책 몇권이라도 읽어어보시길 권합니다.

  5.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

    제가 판단했을때 강교수님이 저렇게 쓴 이유는, 보통의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곡선을 그리면서 '가격' 이라는 것이 교환가치만을 말하고있지않습니까? 사실상 교환가치의 본질이자 상품이 처음 가지고 있는 가치의 본질은 생산가치인데, 주류경제학은 그것을 간과하고 있고 이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이 사실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측면에서 책정된 것이아니라 사용가치를 기반으로 하고있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함축적으로 쓴 글로 판단됩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격 또는 교환가치는 '사용가치'를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수요와 공급으로 인한 변동을 무시했을 때 교환가치는 상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추상적 인간노동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두꺼운 자본론(또는 자본) 읽으려 애쓰지 마시고 얇은 입문서들을 먼저 읽어보세요.

  6.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체적으로 님의 글은, 강교수의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해석 하는 경향이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잉여님이 쓰신 리플로 봐서는 제가 왜곡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강신준 교수가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으 전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드네요.

      교환가치와 가치 자체는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그가 개량주의자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방식(사용가치가 시장에서 수요공급의 조정을 거쳐 교환가치가 된다는 식의, 또는 사용가치에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잉여가치가 포함돼 있다는 식의)의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 그야 말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입니다.

  7.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입문서는 읽어봤어요 ^^;

    • 때때로 2012.10.12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약간 무례했던 제 발언을 먼저 사과드리며 추가로 약간 설명드리겠습니다.

      사과라는 상품으로 설명하자면 사과는 신맛에 약간의 단맛이 포함된 식물성 섬유질의 먹는 것입니다. 사과가 사용가치라는 것안 바로 이러한 물리적 소재적 특성 때문입니다.

      사과는 의자와 교환될 수 있습니다. 사과와 의자가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겠죠. 사용가치는 이 '공통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상품의 물리적 소재적 특성이 같다면 교환될 이유가 없죠. 교환된다는 것은 이미 상품의 물리적 소재적 특성이 다르다는 것으 전제하는 것입니다. 즉 사용가치는 교환가치가 나태나는 상품의 어떤 공통된 속성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환가치가 나타내는 상품의 공통된 속성이란 것은 결국 그것이 추상적 인간노동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사과든 의자든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졌죠(물론 그 과정에는 자연의 기여도 있습니다). 구체적 유용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들기 때문에 교환가치의 공통된 속성일 수 없습니다. 사과를 키우는 노동과 의자를 만드는 노동은 다르죠.

      결국 사과와 의자는 어떠한 구체적인 과정의 노동을 거쳤다는 게 아닌 오직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 공통적인 것입니다. 추상적 인간노동의 지출이 응고된 것, 그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마르크스의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에 대한 설명입니다. 1장에서도 몇 페이지 안 되는 부분이니 다시 차분하게 읽어보시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8.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위에 말한 사용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나봅니다. 제가 오해를 하고있었군요~
    제가 이해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드리니 교수님께서 답변을 해주셨는데,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상품가치와 교환가치가 아니더군요........ 제가 배우고있는사람이라 이해가 부족했나봅니다.

    답변을 요약하자면, 사용가치는 그냥 효용만 갖는 것이어서 양적 표현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런 사용가치 두개가 서로 만나면 양으로 비교하게 되고 그때 비교되는 양이 교환가치이며, 상품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상품이 가지고 있는 교환가치의 구성요소가 불변자본+가변자본+ 잉여가치이다.이런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이 시장에 나와서 거래될 때 시장의 수요공급 요인에 의해 원래의 가치대로 판매되지 못하고 변동하게 되는데 이 변동되는 것이 시장가격이다.

    제가 시장가격을 교환가치로 교환가치를 사용가치로 오해하고있었네요^^;;

    • 때때로 2012.10.13 0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강신준 교수의 답변을 제가 직접 듣지 않아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잉여님이 쓰신 부분 만 보면 잘못 설명된 부분이 또 있군요.

      "사용가치는 … 양적 표현을 가지고 있지 않고" => 중요한 건 아닙니다만 사용가치도 양적 표현을 가집니다. 물리적 소재가 양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포만감을 주는 '사과'라는 상품 자체로 (그 어떤 교환도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한) 한 개, 두 개 또는 1kg, 2kg이라는 양을 가집니다. 교환가치라는 것은 이것과는 별개의 상품 사이 관계의 양적 표현인 것이죠.

      "상품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 가치의 현상형태가 교환가치인 겁니다.

      "교환가치의 구성요소가 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이다." => 가치로서 상품은 추상적 잉여노동의 응고물입니다. 위와 같은 내용은 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라는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며 지금의 논의에서 추가적인 과정을 거쳐야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설명하자면 그것은 상품이 오직 단 한 명의 노동자에 의해 단 한 번에 완성되는 것 만은 아니라는 사정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선 먼저 톱과 망치, 못, 목재, 작업장과 같은 것이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이 것들 또한 현재의 생산과정 이전의 생산물인 것이죠. 그것 또한 추상적 인간노동의 지출로 이뤄진 것이었지만 현재의 생산과정에서는 죽은 노동으로 투입되어 새로운 생산물로 그 가치가 이전됩니다. 이 과정이 노동인 것이죠. 결국 불변자본이란 것은 현재의 생산에 필요한 상품(과거 생산의 결과물)을 구입하기 위해 투하한 자본이고 가변자본은 마찬가지로 노동력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투하된 자본입니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가치증식과정인 노동과정에서 추가적으로 만들어진 가치입니다. 교환가치가 표현하는 본질은 가치일 뿐입니다. 노동 생산물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교환가치로 나타나는 것은 맡지만 그 교환가치를 "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로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9.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다른참가자들을 지도하고 지식을 전해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 부산에서도 자본읽기 모임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공부가 될 것 같아서.....ㅎㅎ...

    • 때때로 2012.11.23 1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능하면 지도해주는 분이 있는 게 좋기는 하지만, 딱히 그럴 만한 분이 없어도 여럿이 함께 모여 읽는 것도 좋더군요. Socialandmaterial.net에 가면 heesang님이 연재하는 '자본론 읽기' 게시물도 도움이 될 겁니다. 부산에서도 꼭 읽기 모임 해보세요.



강신준 동아대 교수가 경향신문에 '자본(자본론)' 해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본'을 읽다'는 제목으로 8월 25일 시작했습니다. 연재 기사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실립니다. 9월 1일에는 두 번째 연재로 '혁명에 사로잡힌 물음 - '자본'의 출생과 변증법'이란 기사가 23면에 실렸습니다.

●[경향신문] 9월 1일 23면|'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링크)

최근 마르크스의 생애, 그의 사상, 자본론(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출판도 늘고 있습니다. 신문에까지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실린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신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지만 책보다는 읽는 사람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까지 읽고 나니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더 커집니다. 마르크스 스스로 말년에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고 한 만큼 마르크스주의는 논란에서 자유로운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강신준 교수의 두 번째 연재기사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중을 위한 신문에서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학문적 방법을 사상한 게 문제가 아닌 것이죠. 문제는 일반적인 사실의 왜곡에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명색이 '자본 강독'이라고 시작한 연재라면 자신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글)을 구분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가 모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경향신문 연재기사를 보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할 분들에겐 상당히 큰 오해를 심어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전공자도 아니지만 간단히 제가 아는 한도에서 9월 1일 두 번째 연재기사에서 문제가 될 듯한 부분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글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주저 말고 지적해주세요. 아래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강신준 교수의 글입니다.


1_ "오늘날 사회변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혁명이란 용어는 원래 프랑스혁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근대 혁명의 효시가 프랑스혁명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완전히 틀린 설명입니다. 혁명(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혁명이 급진적, 혹은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이 단어가 '사회구조의 근본적이고 돌연한 변화'를 뜻하는 정치적 의미로 쓰인 것은 1688년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윌리엄 3세가 즉위한 사건을 '명예혁명(The Glorius Revolution)'으로 부르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대해선 위키피디아 'revolution' 항목을 참조하시면 됩니다(링크).


2_ "1848년 혁명도 바로 이 [1789년] 프랑스혁명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의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혁명의 다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인민의 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호명하고 싶어하는 혁명가, 변혁가의 꿈은 과거와 현재 모두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의 점령자들은 자신을 99%라고 표현하며 결코 소수가 아닌 다수임을 강조했죠. 원래 '다수파'라는 뜻을 지닌 볼셰비키, 하지만 레닌의 볼셰비키는 그 분열 초기에는 멘셰비키보다 소수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시이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도 어찌보면 현재의 '우리는 99%다'라는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이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후에 스스로 "모든 것이다"고 답하죠. 그러므로 "제3신분은 국민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고 "제3신분이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국민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사', 알베르 소불, 두레, 29쪽).

마르크스주의자 또한 과거의 혁명들을 '노동자 혁명'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강할 것입니다. 열망은 현실과 다르죠.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를 따르는 혁명가들은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그는 나폴레옹의 조카가 일으킨 쿠데타를 다루는 책(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그들 앞에 전개되어 있는 원대한 전망에 대한 상상에 젖어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 몰두해 있었던 반면, 사회의 구세력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회합을 개최했으며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쁘띠부르주아에게서 예상치 않던 지지를 발견했다."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 21쪽.

마르크스는 분명하게도 1848년 혁명 당시 농민이 다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당시 프랑스에서 소수였고 그나마 파리에만 의미 있는 수를 형성하고 있었죠. 그렇기에 파리의 노동자들은 6월 봉기 때 "모든 계급과 정파"의 적으로 공격 대상이 됩니다. 결국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위대한 세계사적 투쟁이라는 영예를 안고 쓰러"집니다(앞의 책 23쪽). 1848년 혁명의 다수가 노동자였다는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설명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른 저자의 설명도 강신준 교수의 주장과는 다릅니다. 노명식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과 비교하며 이렇게 씁니다.

"[1830년] 7월혁명의 결정적 승자는 부르주아지였으나 2월혁명의 승자는 노동자계급과 중소 부르주아지의 연합이었다.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848년에는 부르주아지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책과함께, 343쪽.

분명히 1789년보다, 1830년보다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졌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함은 프랑스 전역의 혁명에서 파리가 지닌 역할과 비견할 만한 것이죠(서로 연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1848년 혁명 당시 노동자가 '다수'였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혁명 패배의 교훈과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3_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은 극히 제한된 형태로만 있었고 경제의 대부분은 자급자족하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것만을 소비했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경제구조에서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생산을 열심히 한 사람은 소비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고 설명할 수는 없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이전 생산양식의 귀족과 노예 소유주를 위한 생산, 즉 착취를 (자본주의적 착취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강신준 교수가 깜빡하고 잊은 듯합니다.


4_ "[1848년 혁명의 패배를 지켜본 다음] 1849년 마르크스는 독일 정부의 압력에 의해 다시 유럽대륙에서 추방당해 마지막 망명지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영국으로 가는 뱃전에서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는 그 엄청난 혁명의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혁명이 왜 실패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곧바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틀어박혀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67년 드디어 '자본[자본론]' 제1권을 출판했습니다."

이 문구만 읽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계기,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마치 1848년 혁명 때문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그 기초적 모습을 드러낸 '공산당 선언'이 1848년 2월 혁명 전야에 나왔다는 사실과 배치됩니다.

이뿐 아니죠. 마르크스는 1843년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미 경제적 탐구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악명 자자한 문장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8쪽.

마르크스가 현실의 경제적 삶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비슷한 시기 '라인신문'에서 일하면서입니다. 마르크스는 훗날 "'라이니셰 차이퉁[라인신문]' 편집장으로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야 할 때 나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미지의 영역[물질적 이해관계: 경제]에 처음 도전해본 것은 개인 소유 삼림에서 나무를 훔치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법을 길게 비판하게 되었을 때였다. … [이 문제를 다루면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계급, 개인 소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푸른숲, 69쪽.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쫓겨난 마르크스는 당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울한 학문, 경제학에 대한 탐구에 몰두합니다. 당시의 공부 결과는 현재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1844년 쓰여서 '1844년 수고', 또는 파리에서 작성됐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립니다.


5_ "한나라당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가 '잃어버린 10년'인데요. 이 말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10년 동안 이루어진 정치적 성과를 모두 없애고 10년 전의 상태로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사물의 운동법칙[변증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은 성숙해지면서 2가 되는데 이 2는 기존의 1에 1을 더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2=1+1). 만일 기존의 1을 없애버리면 새롭게 추가하는 1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보다 나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고 도로아미타불의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강신준 교수는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1+1=2'라는 공식을 내세웁니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설명이긴 합니다. 보통은 정-반-합의 과정을 설명하죠. 강신준 교수의 설명만 보면 사물의 운동은 발전만 있고 퇴보는 없는 듯합니다. 게다가 기존의 사물은 새로운 사물 내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새롭기는 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설명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사물의 변증법적 운동이 발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을 인용하며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하지만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합니다
(최형익 옮김, 비르투, 10쪽). 마르크스의 설명이 강신준 교수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고전정치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바로 그 한계 때문에 그들의 후예들이 과학적 입장에서 더 후퇴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사물의 운동법칙은 1+1=2처럼 단순히 계단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대립과 통일이라는 기존 설명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명이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왔지만,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그보다 더 큰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6_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강신준 교수의 '변증법' 해설의 더 큰 문제는 마르크스가 마치 자본주의를 '존속'시킨 채 그것의 개혁을 위한 방법을 발견한 사람처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재기사가 '강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최소한 마르크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구분할 수 있게끔 써줬어야 합니다.

19세기 후반 보통선거의 도입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민주적인 길의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합니다. 당시 아직 봉건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이던 러시아를 살피면서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 공산주의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존속'과 '개혁'을 주장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듭니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태도를 유지했죠.

"[1875년 라쌀레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회주의노동당(1890년 할레 대회에서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의 강령에 대해] 마르크스는 즉각 베를린에 있는 리프크네히트에게 격렬한 비난이 담긴 서한을 급송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엥겔스에게도 리프크네히트에게 그 정도로 강력한 서한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렀다. … 마르크스가 보기에 고타 강령에는 너무나 많은 타협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었다. 고타 강령은 사회주의와 그 최대의 적인 국가가 영원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타 강령은 특히 그러했다. 또한 고타 강령의 밑바탕에는 프루동 주의자들과 생시몽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여러 모순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든가 상속법의 폐지 같은 사소한 목적들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사회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안규남 옮김, 미다스북스, 383쪽.

게다가 강신준 교수 스스로 인용했듯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든 영원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운동 상태에 있으며 유동적이고, 따라서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파악됩니다. 강신준 교수가 인용한 부분을 좀 더 길게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ㆍ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ㆍ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19쪽.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개인의 바람에 따라 왜곡해서 살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한 때 속하기도 했던 청년헤겔파에 대한 비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들은 헤겔과 달리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바랐지만 사물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의 문제로만 파악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에서 청년헤겔파를 '무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에 비유해 조롱하기도 했죠(박재희 옮김, 청년사, 34쪽).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며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김수행 옮김, 19쪽).

아나키즘과 마르크스 이전에 유행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생시몽과 푸리에 등) 비판이라는 맥락도 살펴야 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적 상태에 대한 탐구가 아닌 이상적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변혁의 과학을 대치하려 했습니다(물론 그들의 '이상'은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현재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혁명적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변화할 지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연구로부터 끄집어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도 이러한 사정을 모를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랑스 혁명을 얘기하며 실컷 '혁명' 운운하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강신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잘못된 제목으로 나타납니다.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이라니요. 강신준 교수는 그나마 '개혁'이란 단어로 기사의 후반부에 대치시켰지만 경향신문의 편집기자는 그 차이를 이해 못하고 '혁명'이란 단어를 제목에 써버립니다. 하긴 이윤에 목매는 자본가들은 생산방식에 혁명적 방법을 도입해가며 자본주의 사회를 발전시켜왔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다만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꿈꿨던 마르크스의 생각은 아니죠. 제목 아래 크게 자리잡은 마르크스의 얼굴이 안쓰러울 뿐입니다.


p.s. 강신준 교수는 '개혁'이란 단어를 쓰기 전 '자본론'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인용하며 '혁명'이 마치 길고 긴 개혁의 과정인 것처럼 설명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죠.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21쪽.

그런데 이 문구는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자본론'을 시리즈로 분책해서 내자는 제안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책(자본론)이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읽어야만 한다는 충고죠. 강신준 교수의 해석은 과도한 것입니다. 맥락에서 떼어내 문구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문과 실천 모두에서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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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enai 2012.09.02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잉여노동이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에게서 강탈되는 그 형태"가 "경제적 사회구성체들의 차이"를 가름한다고 자본론 1권 제9장에서도 나오죠. '착취'라는 게 바로 자본주의가 취하는 강탈의 형태라고 했지요 아마...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니 내가 아는 노예제와 봉건제는 어디로 갔는가...;;

    저같이 뭘 몰라서 헤매는 초보는 머릿속 혼란만 가중될 것 같아서 이제부턴 저 연재물 안 읽으렵니다. 때때로님이 이렇게 설명해주신 거나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역사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안 하니까 아마 안 될 거야...)

    • 때때로 2012.09.02 1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착취를 자본주의에서 취하는 강탈의 형태로 이해하는 게 맞겠네요.

      읽다 보니 너무하더라고요. 아무리 경향신문 독자가 없어도, 최소한 몇 만명은 읽을 텐데 상황이 너무 안타깝게 돌아갑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 매우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는 한에서는 교정을 해놔야 할 것 같아요.

    • 잉여 2012.10.01 2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산과 소비의 일치라는게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신이 생산한 것이 눈에 보여서 생산한 것만큼 소비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교환이라는 매게가 등장함으로써 생산을 어느정도 했는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 생산을 증대시키려는 행위들 때문에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용..

    • 때때로 2012.10.02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잉여//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신이 생산한 것이 눈에 보여서 생산한 것만큼 소비가 가능했지만"이라는 전제가 틀렸죠.

      아마 봉건제에서 수탈이 부역일, 영주 몫의 농지 등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생산한 것 만큼 소비가 가능하진 않았죠. 말 그대로 '수탈'에 의해 자신의 것을 빼앗겼으니까요.

      게다가 노예제에서 노예는 아예 노예주의 생산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들 눈에 자신이 생산한 것들이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노예주의 것일 뿐 자신의 것이 아니었죠.

      이러한 사정을 도외시하고 생산과 소비의 일치 운운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로서 그 소양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2. okcom 2012.09.04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신준 교수가 여기저기의 환대에 취해 자폭을 하는 걸까요. 특히 6번은 많이 위험해 보이네요. 한편으론 앞으로도 흥미진진할 것 같으니 계속 정리해 주십쇼 ^^;;

  3. 윤희형 2012.09.11 0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맙습니다. 그냥 기사가 전부라 생각고 넘어갔다면 큰일날뻔했네요.
    가장 큰 문제는 저자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과 이론을 혼용해서 막써버린다는게 아닌가 싶네요.

    • 때때로 2012.09.11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설서를 쓰면서 저자의 생각과 원저자의 생각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테죠. 그럼에도 좀 심한 것 같더라고요. 참세상에 박찬식씨가 기고한 글도 함께 읽어보세요.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7517

  4. 윤희형 2012.09.12 2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이 심한거 같더군요 ㅎ 씨네21이었나? 거기서 선생님 글에 박찬식님 글 링크되있는거 보고 이미 읽어 봤었습니다.
    경향신문에 9월들어 진중권 교수의 현대미술읽기랑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 상당히 기대했는데,
    기대에 못미치네요.
    앞으로도 경향신문에 강신준 교수의 연재가 계속 될텐데, 가감없이 촌철살인 리뷰 부탁드립니다 ㅎ

    • 때때로 2012.09.1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어떤 곳인지 알겠네요. 저도 보통의 노동자라서 연재 때마다 좇아가긴 힘들 것 같네요.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본문 들어가면 제 지식이 일천해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5. 잉여 2012.10.01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제가 예전에 강의를 들었을 때 자본주의의 개혁은 자본주의 모순이 공황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공황을 규제하기 위한 각종 정책들은 점차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으로 이행하게 한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공황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에 따른 규제와 처방들이 자본주의를 다른 양식으로 바꾸게 한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 때때로 2012.10.02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규제와 처방'으로 자본주의가 다른 생산양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사민주의 정치의 핵심이긴 하죠.

      여기서 강 교수의 문제는 여러가지인데, 우선 그 경제결정론적 서술이 문제가 되고, 다음은 변증법에 대한 몰이해가 문제가 됩니다.

      전자의 문제에서 '충분한 성숙'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따르지 않는 것은 그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후자에서는 보통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라면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합리적 핵심-놀라운 생산력, 불충분 하지만 자유와 개인 개념의 발달,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발견, 민주주의적 의식과 실천의 발전 등, 하지만 자본주의에선 결코 그 이상을 달성할 수 없는 것들-을 보존하고 더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 교수는 '그대로' '존속'한다고 말하고 있죠. 이는 좋게 봐줘도 학자로서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에 대한 숙고를 도외시 한 게으른 표현일 뿐입니다.

  6. 잉여 2012.10.02 18: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수행 교수의 책에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의 혁명과 투쟁보다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에서 존재하며 그것이 결국 자본주의를 바뀌게 한다라라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강교수의 의견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맑스의 자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으나, 강신준교수님의 제자로 수업을 듣고 맑스에 대한 시각이 바뀐 저로써는 님의 비판이 그저 안타깝게만 생각됩니다. 물론 다양한 해석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야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죵

    • 때때로 2012.10.03 0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한 것과 후대의 마르크스의 해석은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은 베른슈타인은 적어도 자신의 주장을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끌어냈죠.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글은 이러한 양심적 태도조차 버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의 혁명과 투쟁보다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에서 존재하며 그것이 자본주의를 바뀌게 한다"는 님의 주장만 놓고 보자면 마르크스가 때론 그런 식으로 서술한 부분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저작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 무엇보다 '계급투쟁'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본론의 핵심 중 하나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을 계급투쟁의 역학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마르크스가 영국에서의 공장법 제정과 자본의 시초축적 과정, 공장제의 도입 과정을 그토록 길게 서술한 것은 단지 '예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그의 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간의 현실적 행동, 실천에서 동떨어진 관념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p.s. 단지 혁명 또는 개혁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후 진행된 그의 경향신문 연재분을 보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환가치, 사용가치, 가치에 대한 오해는 지금껏 본 그 어떤 경제학 교과서보다 더 심각한 오류를 보여줍니다.

  7. 연풍청년 2013.02.20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가 들으려 들어왔다가 좋은 말글장(blog)을 보게 된거 같네요.. 경향신문은 그냥 찌라시입니다. 헌법을 부정한 무력 반란을 시민혁명으로 포장해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도 한 언론.
    제가 작년에 진보당 창준위에서 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 했던 적이 있었는데.. 대놓고 짜깁기 해서 소설을 썼습니다. 다른 언론들은 그 경향신문의 기사를 인용해서 보도를 솓아냈고 저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정말 그때만 생각하면..

  8. 브루스 2013.03.27 1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판을 잘 읽었습니다. 우선 저는 자본을 읽다를 매우 유용하게 읽고 있는 사람중에 한 사람입니다. 옅은 맑스주의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근데 일반인에게 이런 대중매체를 통해 맑스에 대해 알리는 작업이 매우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귀하의 비판적인 블로그 글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베른슈타인에 대해서는 소련 붕괴 후 새로운 조명이 있어왔고 당시 그가 수정주의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된 건 독일의 사민당의 이론 중심의 흐름을 깨고자 수정주의에 대한 입장을 표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돌아봐야 함에도 이론의 옳고 그름에 너무 치중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지적 말이죠. 몇몇의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술적인 부분보다는 경구나 해석의 잘못에 너무 치중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그 해석이 행동의 바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맑스주의를 알게 한다는 것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와 같은 맑스주의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각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맑스주의자들만의 울타리에서 멤도는 이런 비판이라면 그것이 과연 사회를 변혁하는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일부 맑스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베네수엘라를 추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베네수엘라에 가서 살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대중에게 새로운 깨달음의 불씨를 주는 것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때때로 2013.03.28 0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르크스주의를 떠나 고전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신의 주장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의 뜻과 주장', '현재의 의의'을 밝히는 건 지난하고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죠. 그럼에도 우선해야 할 것은 '자신의 해석'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상의 뿌리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배제하고 해석의 다양함만 주장한다면 고전은 그 의미를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제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가 아닙니다. 강신준 교수가 매우 기초적인 사실들조차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잘못된 사실에 기반한 마르크스의 설명이 마르크스주의의 성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여담으로 말씀하신 베네수엘라 얘기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모르겠네요.

4장에서는 단순상품유통이 자본으로서의 화폐 유통으로 전환한 모습을 살핌으로서 자본의 일반공식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화폐로 상품을 구매해 다시 판매함으로써 화폐를 얻은 자본가가 아닌 다른 상품 판매자 내지 상품 구매자 입장에서는 판매와 구매 순서의 뒤바뀜은 나타나지 않는다. 언제나 판매는 판매, 구매는 구매일 뿐이다. 즉 "우리가 순서를 거꾸로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단순상품유통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203쪽). 중요한 것은 등가교환에 의한 단순상품유통이 '화폐-상품-화폐' 유통에서의 더 큰 가치(잉여가치)를 허용하느냐는 것이다.

우선 단순상품유통을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고찰해보자. 밀과 포도주를 교환한 당사자는 자기에게 쓸모없는 사용가치를 내놓고 필요한 사용가치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양자 모두 이익이다. 질적으로 나타나는 이익은 양적인 이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밀 생산자가 밀과 포도주를 모두 생산하는 것보다 오직 밀만 생산하고 남는 밀을 포도주와 교환함으로써 동일한 교환가치로 더 많은 더 많은 포도주를 획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환가치의 측면에서는 사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밀 생산자가 오직 밀만 생산함으로써 더 많은 밀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가 생산한 상품의 교환가치(상품의 교환비율)는 변화하지 않는다. "상품의 가치는 상품이 유통에 들어가기 전에 그 가격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는 유통의 전제이지 그 결과가 아니"(204~205쪽)기 때문이다.

"동일한 가치[즉, 동일한 양의 대상화된 사회적 노동]가 동일한 상품소유자의 수중에서 처음에는 상품의 모습으로, 다음에는 [이 상품이 전환된] 화폐의 모습으로, 마지막에는 [이 화폐가 재전환된] 상품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변화는 가치량의 어떤 변화도 포함하지 않는다. …… 그리하여 상품의 유통이 상품가치의 형태변환만을 일으키는 한, 그것은 [만약 현상이 순수한 형태로 진행된다면] 등가물(等價物: equivalent)끼리의 교환임에 틀림없다."(205쪽)

이로부터 우리는 "상품교환은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등가물끼리의 교환이고, 따라서 가치증식의 수단으로 될 수 없다"(206쪽)는 것을 알게 된다. 구매자의 효용(사용가치의 획득과 소비) 증대를 이유로 유통이 더 많은 가치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혼동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효용은 구매자(소비자)에게만 유효한 것이며 그것은 유통을 마친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구매자가 상품에 대해 한 번은 사용가치로, 다른 한 번은 가치로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통과정이 그 순수한 과정에서 오직 등가물끼리의 교환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등가로 교환되지 않는 경우를 고려해보자. 우선 판매자가 자신의 상품을 그 가치보다 더 큰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러한 경우 판매자는 판매를 통해 상품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판매자들의 특권은 상품들의 가치관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는 화폐단위 1000전을 100원으로 변환함으로써 가격이 변화하지만 상품들 사이의 관계는 변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구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구매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상품가격의 이와 같은 일반적인 명목적 인상(名目的 引上)은 상품가치가 에컨대 금 대신 은으로 평가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상품들의 화폐명칭, 즉 가격(價格)은 인상되겠지만 상품들의 가치관계(價値關係)는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209쪽)

여기서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판매자와 구매자는 일반적인 상품생산사회에서 모두 생산자라는 것이다. 판매자가 생산자라는 것은 보통 당연해 보인다. 구매자 또한 화폐로 실현된 상품의 생산자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판매자가 그 상품을 자신이 직접 생산했거나 그 상품의 생산자를 대표하고 있듯이, 구매자 역시 [그의 화폐로 실현된] 상품을 자신이 직접 생산했거나 그 상품의 생산자를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은 생산자와 생산자인데, 그들을 구별하는 것은, 한 쪽은 구매하고 다른 쪽은 판매한다는 것이다. 상품소유자는, 생산자[판매자]라는 이름에서 상품을 그 가치보다 비싼 값으로 판매하고, 소비자[구매자]라는 이름에서는 상품에 그 가치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한다고 말해 보았자 우리는 한 걸음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210쪽)

즉 순수히 소비만 하는 구매자가 존재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 가격을 그 가치 이상으로 받는다고 해서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는 없다. 왜냐면 결국 생산자로서 판매자는 자신이 구매자의 위치에 섰을 때 그 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을 상품에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를 경제적 운동의 인격화된 범주로만 다뤄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개인, 즉 교활한 판매자를 고려하면 어떻게 될까? 교활한 연필 판매자가 100원짜리 연필을 200원에 판매했다고 가정해보자. 연필 판매자는 100원의 잉여가치를 얻었지만 연필 구매자는 100원 손해를 봤다. 결국 한 쪽에서의 이익은 다른 한 쪽에서의 손해다(제로섬 게임). 사회 전체로서는 그 어떤 잉여가치도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은 강탈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도둑질은 사회적으로 그 어떤 잉여가치도 만들지 않는다. 오직 도둑에게만 이득을 줄 뿐이다(이는 다른 편에서의 손실을 뜻한다).

"[결국] 등가물끼리 서로 교환된다면 아무런 잉여가치도 발생하지 않으며, 또 비등가물끼리 서로 교환된다고 하더라도 잉여가치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유통(流通), 즉 상품교환은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않는다."(213쪽)

우리가 자본의 고전적 형태인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을 자본형태의 분석에서 고려치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의 이 두 형태는 파생적인 형태로 다뤄진다(이에 대한 분석은 3권에서 계속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우리는 잉여가치가 유통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유통의 밖에서 상품소유자에게 상품은 자신의 일정 노동량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어떤 더 큰 가치는 없다. "상품소유자는 자기의 노동으로 가치를 창조할 수 있지만 자기증식하는 가치를 창조할 수는 없다"(215쪽). 상품소유자는 가치를 증식시키기 위해 다른 상품소유자와 접촉해야만 한다.

즉, 등가물의 교환으로부터 출발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가치의 자기증식 운동은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날 수 없다. 우리가 4장에서 발견한 자본의 일반공식이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구매해 그 가치대로 판매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나비로의 성장[즉, 완전한 자본가로의 발전]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보라!"(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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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231쪽)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옛 물건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신문에 가끔 실리곤 합니다(링크). 기사의 출처와 물건의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죠. 의료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일부(간ㆍ신장ㆍ혈액ㆍ안구 등)를 타인에게 기증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윤리의식과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거래'도 일부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는 18세기 이전의 잔혹한 풍습을 연상시키는 비유("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를 사용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예와 다릅니다. 노예는 그의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 능력 일부를 자본가에게 판매할 뿐입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만난 노동력 판매자(노동자)와 노동력 구매자(자본가)는 법적으로 평등한 관계죠. 물론 현실에서는 근로계약서조차 제대로 안 만드는 경우가 많고, 만들어진 근로계약을 안 지키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긴 합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 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같은 책 219쪽)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사업에 대한 기대에 가득차 거만하게 앞서 걸어가는 자본가의 모습과 주춤대며 마지못해 끌려가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물론 이 자체는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법률적으로 공평하게 계약한 관계에서 구매한 노동력 상품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노동력의 소비는 곧 자본이 지휘하는 노동과정입니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된다."(같은 책 307쪽)

따라서 노동을 지휘하는 자본은 더 많은 일을 시키고자 하는 (그래서 더 많은 잉여노동을 짜내고자 하는) 강제적 힘으로 발전합니다. 효율적 업무를 위한 합리적 동선ㆍ과정을 만들어내는 것,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연장노동은 기본입니다. 자본가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잉여노동을 뽑아내기 위해 출근 시간 전과 후에 조회ㆍ회의ㆍ교육을 강제합니다. 주말에도 다종 다양한 회사 행사에 동원하기 일쑤죠.

문제는 노동자가 판매한 노동력 상품이 노동자 그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자본가는 노동력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강제를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주장합니다. 법률적으로 공평한 근로계약을 맺고 그 계약이 잘 지켜진다고 해도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임금 노예'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죠.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같은 책 416~417쪽)

결국 노동자는 장화를 만들기 위해 무두질 당하는 가죽처럼 생산과정에서 자본가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그가 판매한 상품이 동물의 가죽처럼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구사회에서 인권의 발명은 더이상 사람 가죽으로 만든 책과 같은 잔혹한 물건과 풍습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예 노동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노동력은 노동자 자신과 떨어질 수 없기에 공개적인 노예제는 은폐된 노예제로 변신하고, 사람의 가죽은 사람과 함께 무두질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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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enai 2012.05.25 2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끔찍하군요. 임금 노예도, 무두질도, 인간 가죽으로 된 책도...

    • 때때로 2012.05.25 22: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끔찍한 뉴스에 경악하곤 하지만, 노동자들의 일상도 정말 끔찍하죠. 사실 정말 약간의 진보라도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 기륭 노동자였을 겁니다, 다시 현장에 돌아가 중국에서 온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을 한 경험을 담은 기사가 있었어요. 그의 글에 의하면 80년대 자신이 경험했던 노동보다 현재의 노동이 훨씬 더 강화됐다는 겁니다. 저도 지금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 7년째인데,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강도와 지금의 강도를 비교하면 정말 이게 가능한 것인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울 때가 많아요.

    • ienai 2012.05.25 2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노동 강도가 힘겨워서 다들 골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늘 한계를 느껴요. 이게 사는 건가.

우리는 3장까지 상품과 그 교환과정을 살펴봤다. 상품유통의 결과 화폐를 발견했다. 이 화폐는 자본의 최초의 형태다.

"상품유통은 자본(資本)의 출발점이다. …… 우리는 이 [상품유통] 과정의 최후의 산물로 화폐를 발견하게 된다. 상품유통의 이 최후의 산물은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現象形態: form of appearance)이다."(189쪽)

우리가 살펴본 상품유통은 '상품-화폐-상품'의 과정이다. 앞으로 살펴볼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 형태는 '화폐-상품-화폐'의 형태를 지닌다.

상품유통(단순상품유통): 상품→화폐→상품 (C-M-C)
자본으로서의 화폐 유통: 화폐→상품→화폐 (M-C-M)


상품유통과 자본으로서의 화폐 유통의 첫째 차이는 판매와 구매의 앞뒤가 바뀐다는 것이다. 자본의 유통은 구매가 판매를 앞선다. 둘째로 상품유통에서 화폐는 상품으로 전환돼 사용가치로 소비되어 사라진다. '화폐-상품-화폐'의 유통에서 화폐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다시 화폐를 얻기 위해서다. 따라서 "화폐는 소비된 것이 아니라 투하(投下)된 것"(192쪽)이다. 셋째 단순상품유통(상품-화폐-상품)은 화폐가 교환을 매개하며 위치를 두 번 바꾸지만 자본으로서의 화폐 유통에서는 상품이 과정을 매개하며 두 번 위치를 바꾼다. 여기서 상품이 두 번 위치를 바꾼 결과는 화폐를 최초의 소유자 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화폐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돌아온 화폐의 양이 더 크거나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문제가 되지만 이 '환류 현상' 자체가 더 큰 화폐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상품유통은 한 번의 과정으로 끝나지만 자본으로서 화폐 유통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는 "화폐가 지출되는 방식 그 자체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193쪽).

"순환 C-M-C는 어떤 한 상품의 극에서 출발해 다른 한 상품의 극에서 끝나는데, 이 상품은 유통에서 빠져나와 소비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소비[욕망의 충족], 한 마디로 말해 사용가치(使用價値)가 이 순환의 최종목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순환 M-C-M은 화폐의 극에서 출발하여 최후에는 동일한 화폐의 극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이 순환을 야기시키는 동기 및 그것을 규정하는 목적은 교환가치(交換價値) 그 자체이다."(193쪽)

이로부터 자본으로서 화폐 유통의 목적이 파악된다. 상품유통은 질적으로 다른 사용가치를 교환함으로서 사회적 물질대사를 이룬다. 그러나 '화폐-상품-화폐'의 과정은 그 양극에서 질적으로 동일한 모습을 지닌다. 오직 양적인 차이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 즉 "최초에 유통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화폐가 유통으로부터 끌려나와야 한다"(195쪽). 자본가가 100억 원을 투자할 때 오직 100억 원 만을 벌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해 보인다. 우리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이 과정을 다시 적는다면 이와 같다.

화폐 -> 상품 -> 다른 양의 화폐(M-C-M')

"이 증가분, 즉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나는 잉여가치(剩餘價値: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최초에 투하한 가치는 유통중에서 자신을 보존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치량을 증대시키고 잉여가치를 첨가한다. 바꾸어 말해, 자기의 가치를 증식(增殖)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운동이 이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195쪽)

우리는 이곳에서 최초로 자본의 정의를 발견한다. 가치의 자기 증식 운동이 바로 자본이다. 더 큰 가치를 획득한 운동이 그로부터 멈춘다면 그 가치는 더 이상 자본이 아니다. 운동을 멈춘 화폐는 더 큰 가치(잉여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지하 금고에 5만 원 권 100억 원어치를 넣어두면 10년 후에도 오직 100억 원어치의 5만 원 권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더 큰 가치가 문제가 되는 한 이 운동은 멈출 수 없다. 한 번의 순환을 마친 가치는 여전히 한정된 크기만을 지닐 뿐이다. 100억 원보다 1000억 원이 크고, 1000억 원보다 1조 원이 크다. 한정된 양적 표현만이 가능한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은 그로부터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숙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순환은 그 출발점과 최종 지점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오직 화폐). 따라서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적합한 형태로 하나의 순환을 마친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196쪽)

이러한 가치의 자기 증식 운동을 자신의 의지로 받아 행동하는 화폐소유자는 자본가가 된다. 100억 원이 있어도 그것을 오직 자신의 생활ㆍ향락을 위해 사용하는 이, 또는 단 한 번의 거래를 통한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이는 자본가가 아니다.

가치의 자기 증식 운동은 자동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이 운동에서 "가치는 그 자체가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스러운 성질을 얻었다"(199쪽). 우리는 은행에 맡겨놓은 돈에 이자(더 많은 돈)가 붙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한 번은 상품과 화폐의 형태를 번갈아가며 취한다. 그 출발점과 종착점에서는 화폐형태를 취하지만 상품형태를 취하지 않고서는 화폐가 자본이 될 수는 없다.

"이리하여 가치는 이제 과정 중의 가치(value in process), 과정 중의 화폐로 되며, 이러한 것으로서 가치는 자본이 된다. 가치는 유통에서 나와 다시 유통에 들어가며, 유통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증식시키며, 더 커져서 유통으로부터 나오고, 그리고 이 동일한 순환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200쪽)

'화폐-상품-화폐'의 운동이 상인자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자본도 마찬가지로 화폐로 구매한 상품을 다시 판매해 더 많은 화폐로 재전환되는 화폐이다. 중간단계를 생략한 형태가 이자 낳는 자본(M-M')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일반공식은 M-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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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가치의 척도

가치로서 모든 상품은 추상적 인간노동의 응고물이다. 따라서 상품들의 가치 크기는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있다. 하나의 특수한 상품이 측정을 위한 기준으로 등장한다. 이 특수한 상품 금은 상품세계 공통의 가치척도, 화폐가 된다. 화폐상품 금은 가치의 일반적 척도로 기능한다.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의 가치를 화폐상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품 X량=화폐상품 Y량
스마트폰 1개=금 3돈(70만원)


가치등식은 이제 처음의 간단한 모양으로 돌아갔다. 이 등식을 거꾸로 읽으면, 즉 가격표를 거꾸로 읽으면(금 3돈은 스마트폰 1개다) 온갖 상품으로 표현된 화폐의 가치량(구매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폐는 가격을 갖지 않는다. 화폐상품을 일반적 등가물로 유지하기 위해선 그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등가물로 자기 자신을 두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어반복일 뿐이다(금 3돈은 금 3돈이다).

“상품의 가격 또는 화폐형태는 …… 순전히 관념적인 또는 개념적인 형태이다”(122쪽). 무게나 부피와 같이 물리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 화폐상품과의 관계(동등성)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가격표에 얼마를 써넣을 지는 상품 판매자 마음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가치척도의 기능에서는 다만 상상적인 또는 관념적인 화폐로서만 역할한다”(123쪽). 그러나 가격은 실제의 화폐재료에 달려있다. 즉 화폐로 사용되는 재료의 생산에 얼마만큼의 추상적 인간노동이 응고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스마트폰 1개의 가격은 금 3돈으로 표시될 수도 있고, 은 50g으로 표시될 수도 있다. 두 개의 상품(금과 은)이 화폐상품으로 사용될 때 두 상품의 가치 비율이 동일할 때는 아무런 문제없이 두 상품 모두 가치척도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상품의 생산조건의 변화로 가치 비율이 변할 때 가격의 서로 다른 표현 사이에 교란이 발생한다.

상품의 가격은 금의 양으로 표시된다. 일정한 금의 양이 가치의 도량단위가 된다. 이제 금의 중량을 표시할 때 사용되던 도량표준이 가격의 도량표준에도 적용된다(서구의 화폐 명칭에는 아직도 이러한 금 중량의 도량표준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영국의 ‘파운드’화가 대표적이다).

“가치의 척도 및 가격의 도량표준은 화폐의 전혀 다른 두 가지 기능이다. 화폐가 가치의 척도인 것은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化身)이기 때문이고, 가격의 도량표준인 것은 고정된 금속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척도로서 화폐는 다종다양한 상품의 가치를 가격[즉, 상상적인 금량]으로 전환시키는 데 봉사하며,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 화폐는 이러한 금량을 측정한다.”(125쪽)

화폐의 가치척도로서의 기능과 도량표준으로서의 기능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금이 가치척도로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금 자체가 노동생산물”(125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의 가치는 가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가치의 가변성은 도량표준으로서 화폐상품의 기능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금의 가치 변화는 모든 상품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금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질 때 노트북컴퓨터의 가격 금 6돈, 스마트폰의 가격 금 3돈은 동시에 노트북컴퓨터 금 12돈, 스마트폰 6돈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노트북컴퓨터와 스마트폰 가치의 상호관계는 여전히 2대 1로 동일하다. 화폐가치의 변화가 언제나 상품 가격의 비례적 변화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화폐가치와 상품가치가 동일한 비율로 오르면 상품 가격은 그대로일 수 있다.

이제 가격형태를 살펴보자. 금속의 무게로부터 유래한 화폐 명칭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원래의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된다.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화폐 명칭이 그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국민적 관습에 속하는 것으로 되었다. 화폐의 도량표준은 한편으로는 순수히 관습적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효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므로, 결국은 법률에 의해 규제된다.”(127~128쪽)

따라서 다양한 “화폐 명칭에는 가치관계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129쪽)게 됐다. 그러나 가치가 “물적일 뿐 아니라 순수히 사회적인” 화폐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다. 이로써 가치량의 지표로서의 가격과 상품과 화폐의 교환비율로서의 가격에 모순에 처하게 된다.

“상품가치량의 지표로서의 가격은 그 상품과 화폐의 교환비율의 지표이기는 하지만, 그 상품과 화폐의 교환비율의 지표[즉, 가격]는 반드시 그 상품의 가치량의 지표로 되지는 않는다.”(130쪽)

우선 상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변동은 상품의 가격(화폐와의 교환비율)과 가치량의 양적 불일치를 불러올 수 있다. 또 하나의 모순은 질적인 것이다. “그 자체로서는 상품이 아닌 것[예컨대 양심이나 명예 등]이 그 소유자에 의해 판매용으로 제공”돼 가격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 가치의 척도로서의 화폐를 살펴봤다. 그러나 가격표만 붙인다고 상품 판매자가 실제 화폐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상품은 무엇보다 화폐와 실제로 교환되어야만 한다.

“상품이 실제로 교환가치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 현물형태를 벗어버리고 단순한 상상적인 금으로부터 현실적인 금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상품에 가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상상적인 금을 상품에 등치하면 되지만, 상품이 그 소유자에게 일반적 등가(물)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금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131쪽)

따라서 우리는 2절 ‘유통수단’에서 상품이 어떻게 화폐로 변신하는 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제2절 유통수단

(a) 상품의 변태(變態: metamorphosis)
상품 판매가 성공해 그것을 필요로 한 사람(구매자)의 품에 들어가면 그것은 교환의 영역에서 떠나 소비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로 교환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상품의 형태변환(변태)다. 금이라는 상품의 소재에서 비롯한 신비적 기능이 상품과 교환(혹은 상품의 변태)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금은 화폐형태로서 가격을 통해 상품과 관계를 맺는다.

상품이 교환과정에 들어가면 그 내적 대립(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은 외적 대립, 즉 사용가치로서의 상품과 교환가치로서의 화폐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등식의 한 편에는 보통의 상품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 그것의 가치로서의 존재는 가격에서 다만 관념적으로 나타날 뿐이며, 이 가격을 통해 상품은 [상품가치의 진정한 화신인] 금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등식의 다른 한편에 있는〕 금이라는 물건은 오직 가치의 화신, 화폐로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금은 현실적으로 교환가치(交換價値)이다.”(134쪽)

이 등식을 도표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다시 관심을 상품 판매자자에게 돌려보자. (아직 이 상품 판매자 A는 화폐 자체를 모으기 위한 욕망-화폐 퇴장의 욕망은 없다.) 상품 판매자 A가 자신의 상품 스마트폰 1개를 무사히 금 3돈과 교환에 성공한다. 그 후 그 상품 판매자 A는 이제 구매자가 되어 자신의 수중에 있는 금 3돈을 지불하고 다른 상품 판매자 B의 태블릿PC를 구입한다. 즉 상품교환은 판매와 구매 두 과정으로 나뉘어진다. 첫 단계에서 상품은 화폐로 전환되며, 두 번째 단계에서 화폐는 다시 상품으로 전환한다.

상품(C) - 화폐(M) - 상품(C)

상품의 화폐로의 성공적인 변신(판매)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판매되기 위해 상품은 “우선 화폐소유자에게 사용가치로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 상품에 지출된 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형태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노동은 사회적 분업(分業)의 일환이어야 한다”(136쪽). 그러나 이 분업은 상품 생산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조직된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어제까지 상품 생산의 조직 작업 중 하나였던 것이 오늘은 독립된 상품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각종 부품산업의 발전, 아웃소싱과 같은 것들). 게다가 사회의 평균적인 생산조건은 생산자 개인의 사정과 무관하게 변할 수 있다. 즉 그의 노동지출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을 수도 있다.

“분업은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전환시키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생산물의 화폐로의 전환을 불가피하게 한다. 동시에, 분업은 이 전환의 성공 여부를 우연적인 것으로 만든다.”(138쪽)

즉 판매는 “상품의 결사적인 도약”(136쪽)이고 그 과정은 진정한 사랑의 길처럼 결코 평탄하지 않다(138쪽). 그러나 우리는 이 상품의 결사적인 도약이 성공한 상황을 전제로 교환과정을 마저 살펴볼 것이다.

상품의 화폐로의 변화는 상품 소유자의 입장에서는 판매이다. 이 과정은 화폐 소유자 입장에서는 구매의 과정이기도 한다. 금의 생산지에서는 생산물이 처음부터 화폐형태로 이 과정에 들어선다. 다른 곳에서 화폐는 다른 생산물의 성공적인 판매의 결과물로서 소유자에게 주어지면서 이 과정에 들어선다. 앞의 스마트폰 생산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금 3돈으로 교환한 후, 다시 그 금 3돈으로 태블릿PC를 구입한다. 여기서 금 3돈의 소유자, 즉 스마트폰 구매자를 돌아보자. 그가 금 생산자가 아니라면 그는 다른 무엇인가를 판매해 화폐를 미리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가 바람막이 재킷을 판매해 금을 얻었다고 하자. 그럼 우리는, 애초의 스마트폰의 판매는 다른 운동, 즉 바람막이 재킷운동의 마지막 운동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산자 A(철수)에게 그의 상품 스마트폰 1개의 생애는 그 자신이 태블릿PC를 구입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태블릿PC 생산자 B(정민)는 이 과정에서 얻은 금 3돈으로 또 다른 상품(디지털카메라)을 구매하게 될 것이다. 상품생산자의 생산 품목은 제한돼 있지만 그의 욕망은 보통 그보다 더 많은 분야에 걸쳐있다. “따라서 하나의 판매는 여러 가지 상품의 수많은 구매로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한 상품의 최종변태는 다른 상품들의 제1변태의 합계로 이루어지고 있다”(142쪽). “이와 같이 각 상품의 변태계열이 그리는 순환은 다른 상품들의 여러 순환과 뗄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다. 이러한 과정 전체가 상품유통(circulation of commodities)을 구성한다”(143~144쪽). 위의 교환과정을 역주(김수행)에 따라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상품유통은 직접적인 물물교환과 형태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스마트폰 판매자 A(철수)에게 구매자 C(영희)가 어디서 어떻게 화폐를 얻게 됐는지는 중요치 않다. 마찬가지로 태블릿PC 판매자 B(정민)는 A(철수)가 지불한 화폐가 어떤 상품이 변태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상품유통에서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상품교환이 어떻게 직접적인 생산물교환의 개인적 및 지방적 한계를 타파하고 인간노동의 물질대사를 발전시키는가를 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교환이 어떻게 당사자들의 통제 밖에 있는 자연발생적인 사회적 연결망을 발전시키는가를 보게 된다.”(144쪽)

따라서 유통과정은 멈추지 않는다. 상품이 판매에 성공해 유통에서 탈락하면 화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 상품이 다른 상품을 대체하면 화폐상품은 제3자의 손에 붙게 된다. 유통은 끊임없이 화폐라는 땀을 쏟아낸다”(144~145쪽).

판매가 곧 구매라는 사실 때문에 이 둘이 언제나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주장을 마르크스 시대는 물론 지금도 흔히 들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상품의 화폐로의 결사적 도약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게 필요하다. 또한 상품 판매자가 판매를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곧바로 다른 구매를 할 것이라는 것은 오직 가정일 뿐이다. 화폐를 갖게 된 판매자가 다시 구매에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은 판매에 성공할 수 없다.

“유통은 물물교환에 존재하는 [자기 생산물의 양도와 타인 생산물의 취득 사이의] 직접적 동일성을 판매와 구매라는 대립적 행위로 분열시킴으로써 물물교환의 시간적·장소적·개인적 한계를 타파한다. 서로 독립적이고 대립적인 과정들[판매와 구매]이 하나의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또한 바로 그 과정들의 내적 통일이 외적 대립을 통해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두 과정은 서로 보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두 과정의 외적 독립화가 일정한 점에 도달하면 그 내적 통일은 공황(crisis)이라는 형태를 통해 폭력적으로 관철된다.”(145~146쪽)

우리는 공황의 시기 한쪽의 넘칠 만큼 가득한 화폐와 다른 한쪽의 팔리지 않는 상품 더미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통에서의 모순은 아직 공황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b) 화폐의 유통
상품유통의 결과 화폐는 그 출발점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진다. 화폐는 상품 소유자의 품에서 다른 상품 소유자의 품으로 옮겨간다. 상품은 유통의 첫 단계에서 화폐와 그 위치를 바꾼다. 이제 상품유통의 후반은 화폐의 모습으로 통과한다. 상품 입장에서는 판매(상품의 화폐로의 전환)와 구매(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환)의 반대 과정을 포함하지만 화폐 입장에서는 언제나 같은 과정(화폐와 상품의 자리바꿈)이다.

“상품유통의 결과[즉, 다른 상품에 의한 한 상품의 교체]는 마치 그 상품 자신의 형태변환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니라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의해 매개된 듯이 보이며, 마치 화폐가 [그 자체로서는 운동하지 않는] 상품을 유통시켜, 상품을 [그것이 비사용가치인]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것이 사용가치인] 사람의 손으로, 언제나 화폐 자신의 진행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이전시키는 듯이 보인다. …… 그러므로 화폐유통은 사실상 상품유통의 표현에 지나지 않지만, 외관상으로는 반대로 상품유통이 화폐운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인다.”(148쪽)

어떠한 상품이라도 유통에 들어와 제1의 형태변환을 겪은 후 유통으로부터 떨어져나간다. 그러나 화폐는 여전히 유통에 남아있다. 그렇다면 유통영역은 얼마만큼의 화폐를 흡수하는가?

유통과정에 들어온 각 상품은 가격에 의해 그 상상적인 화폐량을 등치하고 있다. 따라서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은 상품들의 가격총액이다. 상품가치가 변하지 않더라도 금의 가치 변화에 따라 가격이 그 반대방향으로 변한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봤다. 따라서 금의 가치가 변하면 그에 따라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도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이 경우 유통수단의 양의 변동은 분명히 화폐 그 자체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척도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기인하는 것이다”(150쪽).

화폐상품은 최초의 생산지에서 지속적으로 유통에 유입된다. 덜 발전된 상품교환에서 관습적으로 이뤄졌던 상품의 상대적 가치가 금의 가치에 의해 따라 평가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조정과정은, [귀금속과 직접 교환되는] 상품의 대금으로 귀금속이 유입되기 때문에, 귀금속량의 계속적인 증대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상품들의 가격이 조정되어 가는 데 비례하여, 다시 말해 상품들의 가치가 귀금속의 새로운 가치(이미 떨어졌거나 어느 수준까지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에 따라 평가되는 데 비례하여, 그것과 같은 속도로 이 새로운 가격의 실현에 필요한 귀금속의 추가량도 이미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151쪽)

즉 유통수단으로서 금의 양이 늘어나서 상품 가격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

다시 유통수단의 양 문제로 돌아가자. 각 2원인 네 개의 상품이 동시에 다른 곳에서 판매된다고 보자. 가격총액은 8원이고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도 8원이다. 그런데 이 네 개의 상품이 순차적으로 판매된다고 보자.

밀 1쿼터 – 2원 – 아마포 20m – 2원 – 성경책 1권 – 2원 – 위스키 2갤론 – 2원

2원의 돈이 여러 상품의 가격을 순차적으로 실현시키고 마지막에 위스키 생산자의 손에 들어갔다. 이 때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은 2원이다. 즉 화폐의 회전회수에 따라 주어진 기간동안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은 달라진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즉 일정 기간에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화폐의 총량은 가격, 유통상품의 양, 화폐의 유통속도 이 세 가지 요소에 의존한다.

“화폐유통은 일반적으로 상품들의 유통과정[즉, 대립적인 변태들을 통한 상품들의 순환]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폐의 유통속도는 상품의 유통속도-형태변환 속도, 각 변태계열들의 연속, 사회의 물질대사의 속도, 상품의 소멸과 유입 속도 등-를 반영한다. 상품유통의 정체 원인을 화폐량의 부족으로부터 찾는 것은 본말을 전도한 진단이다. 물론 “정부의 졸렬한 ‘통화조절(通貨調節)’로 말미암은 유통수단의 현실적 부족이 정체를 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155쪽).

(c) 주화(coin). 가치의 상징
“화폐는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에 의해 주화의 형태를 취한다”(159쪽). 가격의 도량표준을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화를 제조하는 것 또한 국가의 일이다. 조폐소로부터 나오자마자 금화의 명칭(법정 무게)과 실체(실질적 무게)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유통수단으로서의 금의 무게는 가격의 도량표준으로서의 금의 무게로부터 이탈하고, 그리하여 가격을 실현할 상품들의 진정한 등가물로 될 수 없게 된다.”(160쪽)

몇 가지 사정이 화폐유통에서 금속화폐를 다른 재료로 만든 토큰(token: 주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상징)으로 대체하게 만든다. 우선 기술적으로 금을 아주 작은 단위의 주화로까지 만들기 어렵다. 또한 유통속도가 빠른 소규모 상품유통 영역(시장과 동네 구멍가게에서는 동전이 많이 사용되지만 백화점에서 동전을 보긴 어렵다. 회사 간 거래, 국가 간 거래와 같은 큰 규모의 거래에서도 마찬가지다.)에서는 금의 마모가 더 빨리 일어나므로 상징적 주화 혹은 저급 금속이 금화를 대체한다. 이는 애초에 저급 금속이 가치척도로 기능하다가 고급 금속이 대체한 역사적 사정도 이러한 가능성을 설명해준다. “금은 끊임없이 소액유통에 들어오지만, 은·동제의 토큰과 교체되어 끊임없이 거기에서 쫓겨난다”(161쪽). 토큰의 금속 무게는 법률로 정한다. 이들 소액유통에서 금속의 마멸이 더 빨리 일어남으로 주화기능은 사실상 그것들의 중량(가치)과는 관계없다. “금의 주화로서의 기능은 금의 금속적 가치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162쪽). 주화의 상징적인 성격은 지폐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폐는 화폐의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으로부터 발생한다.

국가에 의해 유통에 투입된 지폐가 동일한 양의 금을 대신하는 한 그것의 운동은 화폐유통의 법칙을 반영한다. 그러나 지폐가 모든 유통수단으로서 모든 금을 대체할 때 가격의 도량표준에 문제가 발생한다. 지폐가 법률에 의해 규정된 금량보다 더 많이 유통된다면 “지폐는 상품유통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금량만을 대표하게 될 것이다”(163쪽).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은(혹은 그 표기량보다 더 적은 가치만 지닌) 주화와 지폐는 유통의 영역에서 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화폐상품 자체를 이러한 상징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유통수단으로서 화폐를 볼 때 가능해 보인다. “화폐를 끊임없이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에서는 화폐의 단순한 상징적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를테면, 화폐의 기능적 존재가 화폐의 물질적 존재를 흡수하는 것이다”(164~165쪽). 그러나 화폐의 상징(주화나 지폐)이 사회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통용력이 필요하다. 이는 국가의 강제 아래서 국내 유통 분야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이 유통분야 안에서만 화폐는 오로지 유통수단의 기능에 전념하며, 따라서 지폐의 형태로 순수히 기능적인 존재양식[이 경우 화폐는 금속실체와 외부적으로 분리된다]을 얻을 수 있다.”(165쪽)


제3절 화폐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다시 한 번 화폐를 정의한다.

“가치척도로 기능하고, 따라서 또한 자신이 직접 또는 대리물을 통해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상품이 화폐(貨幣)이다.”(165쪽)

가치척도 기능에서 화폐는 관념적이고, 유통수단 기능에서는 다른 것(주화와 지폐)이 대리 가능하다. 그러나 금이 화폐로 기능하기 위해 그 몸체 그대로 나타나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a) 퇴장화폐
상품유통의 발전과 함께 상품의 제1변태의 산물, 즉 화폐를 확보하려는 필요성과 열망이 발생한다. 자신에게 비사용가치인 상품을 사용가치인 다른 상품으로 교환(즉 구매를 위한 판매)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화폐의 취득 자체가 목적인 판매가 나타난다.

“이제 상품이 변화한 형태〔화폐〕는 상품의 절대적으로 양도가능한 모습[또는 오직 순간적인 화폐형태]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고, 이리하여 화폐는 퇴장화폐(退藏貨幣: hoard)로 화석화되며, 상품판매자는 화폐퇴장자로 된다.”(166쪽)

상품유통의 첫 단계에서는 사용가치의 잉여분이 상품으로 판매된다. 따라서 판매에 따른 대금, 금과 은 자체가 여유분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소박한 형태의 화폐퇴장은 금과 은에 대한 전통적인 열망을 설명한다. 상품생산의 발전은 다른 이유에서 화폐퇴장의 열망을 발전시킨다.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서 걸리는 시간 때문에 구매를 위한 여유분의 화폐가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상품유통의 확대에 따라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의 부(absolutely social form of wealth)인 화폐의 권력이 증대한다.”(168쪽)

화폐는 무엇이 변화한 것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화폐에서는 상품의 모든 질적 차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화폐는 “누구의 사유물(私有物)도 될 수 있는 외적인 물건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으로 된다”(169쪽). 화폐의 가치가 변동될 수 있다는 사실이 퇴장의 욕구를 방해하진 않는다. 100돈의 금이 50돈의 금보다 더 큰 가치를 갖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사정이 금을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이 되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화폐는 어떤 상품으로도 직접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물질적 부(富)의 일반적 대표라는 점에서 질적으로나 형태상으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화폐액은 모두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구매수단으로서 한정된 효력만을 가진다. 화폐의 이러한 양적 제한성과 질적 무제한성 사이의 모순은 화폐퇴장자를 축적의 시지프스적 노동으로 끊임없이 몰아넣는다.”(170쪽)

화폐를 보유하기 위해선 화폐의 유통을 막아야 한다. 즉 상품의 변태는 판매에서 멈춰야 한다. 따라서 화폐퇴장자는 금욕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다.

화폐퇴장이 금에 대한 오도된 욕망으로부터 비롯한 것만은 아니다. “퇴장화폐는 금속유통의 경제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171쪽). 상품의 유통속도와 가격의 변동으로부터 화폐유통량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데서 퇴장화폐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퇴장화폐의 저수지는 화폐가 유통으로 흘러 들어가고 유통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수로로 되며, 이리하여 유통하고 있는 화폐는 결코 그 유통수로에서 범람하지 않는다.”(171쪽)

(b) 지불수단
상품유통의 발전과 함께 상품의 양도와 가격의 실현이 시간적으로 분리된다. 이 경우 화폐는 지불수단이 된다.

“유통수단이 퇴장화폐로 전환된 것은 유통과정이 제1단계 이후에 곧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지불수단이 유통에 들어가는 것은 상품이 이미 유통에서 빠져나온 이후의 일이다. 화폐는 이제 과정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절대적 존재형태[즉, 일반적 상품]로서 독립적으로 개입해 유통과정을 종결짓는다.”(174쪽)

즉 판매(상품-화폐)의 과정에 앞서 구매(화폐-상품)가 수행된다. 가격은 화폐청구권(채권)으로 실현된다. 그 상품은 화폐로 실현되기에 앞서 사용가치로 전환된다. 제1변태(판매)는 나중에 완성된다.

수많은 판매가 동시에 일어난다. 따라서 유통화폐량이 유통속도를 못 따라갈 수 있다. 따라서 지불수단의 절약을 위한 방법들이 만들어진다. 일정한 장소에 일정한 날짜로 지불의 결제를 정하게 되는 것이다. 채무의 연쇄에 따라 지불해야 할 실제 화폐는 상소되며 유통되는 지불수단의 양은 더 절약된다. 이렇게 지불이 상쇄되는 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계산화폐(計算貨幣) 또는 가치척도로서 오직 관념적으로 기능할 뿐이다”(175쪽).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불이 이뤄져야 하는 한 화폐는 유통수단이 아닌 “사회적 노동의 개별적 화신, 교환가치의 독립적 존재형태, 일반적 상품으로 등장”(176쪽)한다.

“이 모순은 산업·상업의 공황 중 화폐공황(貨幣恐慌: monetary crisis)으로 알려진 국면에서 폭발한다. 이 화폐공황은, 지불들의 연쇄와 지불결제의 인위적 조직이 충분히 발전한 경우에만 일어난다.”(176쪽)

원인이 무엇이든 교란이 전면적으로 나타났을 때 화폐는 계산화폐라는 관념적인 모습을 벗고 실제로 지불해야 할 ‘경화’로 변한다. 얼마든지 화폐로 변환 가능해보였던 자산들은 더이상 화폐를 대신할 수 없게 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르주아는 호경기에 도취되어 자신만만하게 ‘상품이야말로 화폐’라고 하면서, 화폐를 순전히 관념적 산물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시장에서 화폐만이 상품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176쪽).

우리는 이러한 화폐공황의 고전적인 예를 2008년 미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이 계속 상승하고, 언제든 현금으로 전환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광범위한 부동산 대출(서브프라임모기지)의 증가로 이어졌다. 원인이 어찌됐든 채무자들이 더이상 채무를 지불하지 못하게 됐을 때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는 화폐의 부족에 시달렸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조폐공장에서 돈을 찍어내 헬리콥터로 뿌리듯 금융가에 살포해야 했다.

“공황에서는 상품과 그 가치형태인 화폐 사이의 대립은 절대적 모순으로까지 격화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화폐의 현상형태가 어떠하든 상관이 없는데, 지불을 금으로 하든 은행권과 같은 신용화폐로 하든 화폐기근(貨幣饑饉: monetary famine)은 여전히 완화되지 않는다.”(176~177쪽)

신용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때는 채무증서 자체가 화폐를 대리해 유통된다. 월스트리트에서 최신의 금융공학을 이용해 자산을 유동화시킨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한편 지불수단으로서 화폐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준비금이라는 형태로 퇴장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c) 세계화폐
국경을 넘어선 화폐는 그 국내적 기능-가격의 도량표준, 주화·지폐 등의 국지적 기능-을 벗어버린다. 세계무역에서 상품은 가치형태를 세계적 차원으로 전개한다. 따라서 “상품의 독립적인 가치형태도 세계화폐로서 상품에 대립한다”(181쪽). 추상적 인간노동이 현물형태로 실현된 상품으로서 화폐는 그 자신을 완전하게 드러낸다. 즉 국내에서는 오직 국경 내의 인간노동에 의해 계산된 가치가, 이제 인류 전체의 노동에 의해 완전히 추상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시장에서 상품의 가치척도로서 금(혹은 은)만이 화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화폐는 보통 국제수지의 결제를 위한 지불수단으로 기능한다. 국내 유통을 위해 준비금이 필요하듯 세계시장에서의 유통을 위해서도 준비금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으로부터 퇴장화폐가 발생했듯이 세계화폐의 기능으로부터 다시 퇴장화폐의 기능이 발생한다.

“이 후자의 역할을 위해서는 언제나 현실적인 화폐상품, 즉 금과 은의 실물이 요구된다.”(183~184쪽)

1997년 경제위기에서 국제적인 준비금(달러화)의 부족을 심하게 겪은 한국 정부는 이후 외환 보유를 무척 중시하게 된다. 한국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현실적인 화폐상품’, 즉 달러화의 부족을 겪은 여러 나라들은 달러화 확보에 나선다.

“부르주아적 생산이 어느 정도 발전한 나라에서는 [은행의 금고에 집적되는] 퇴장화폐는 자기의 독특한 기능에 필요한 최소한도로 제한된다.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이 퇴장화폐가 그 평균 수준을 크게 능가하는 것은 상품유통의 정체[즉, 상품변태의 진행의 중단]를 가리킨다.”(184~185쪽)

한국·일본·대만·중국 등의 높은 달러화 보유고가 문제시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높은 달러화 보유고는 ‘글로벌 불균형’의 한 축으로 세계경제에서 해소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꼽힌다. 한편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한국에서 대기업들이 기업 내부에 준비금(유보금)을 쌓아놓는 것에 대한 경제 전문가의 불만 섞인 논평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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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enai 2012.05.06 0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이제부터 장 끝날 때마다 여기 와서 복습해야겠네요.
    늘 A학점만 받는 학생의 노트를 보는 기분입니다. 부럽습니다. ㅠ
    지난번에는 바쁘셨나 봐요. 다음 모임 때는 꼭 같이 공부해요.. :)

    • 때때로 2012.05.06 0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부끄럽습니다. 김공회 선생님과 함께 읽기 전에 정리해둔 것이라서, 강독 이후 수정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몸이 안 따라주네요. 8장까지는 전에 정리해둔 게 있는 데 손 보려니 참 어렵습니다.

  2. Nara 2016.11.21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도 윗분 댓글에 공감합니다~ 너무 요약을 잘하셨네요~ 자본론 정독 중인데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때때로 2016.11.21 2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다 감사하네요. 개정판이 나오기 전에 한 거라, 최근 나온 개정판하고는 문구와 쪽수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1장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의 발전을 통해 화폐의 기원을 밝혔다. 우리는 2장에서 화폐가 “종류가 다른 노동생산물이 실제로 서로 동등시되고, 따라서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인 산물”(112쪽)임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상품은 스스로의 발로 시장에 나가 교환을 할 수 없다. 상품은 소유자들에 의해 시장에서 판매되고 구입된다. 상품의 소유자는 교환을 위해 서로의 소유를 인정해야만 한다. 철수가 영희의 연필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교환은 불가능하다. 철수는 영희의 연필을 폭력적이거나 몰래 갈취할 수 있지만, 동등한 교환은 이뤄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법적 관계[또는 의지 관계]의 내용은 경제적 관계 그 자체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108~109쪽).

“사람들은 여기에서 다만 상품의 대표자, 따라서 소유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제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제적 관계들의 인격화(人格化: personification)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은 이 경제적 관계들의 담지자(擔持者)로 서로 상대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109쪽)

상품은 소유자와 달리 다른 상품의 물리적 특징, 유용성을 파악할 수 없다. 상품은 다른 상품을 오로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소재(등가형태)로서만 대한다. 그러나 상품소유자에게 그 자신의 상품은 사용가치가 아니다. 자신의 생존이나 다양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사용가치를 구하기 위해 그는 시장에 가서 다른 이의 상품과 자신의 상품을 교환해야 한다.

“그의 상품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가치(使用價値)를 가지고 있다. 상품소유자에게는 상품은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담지자[따라서 교환수단]라는 점에서만 직접적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109쪽)

즉 상품이 누군가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먼저 시장에 나가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어야 한다. “상품은 사용가치로 실현될 수 있기 전에 먼저 가치로 실현되어야 한다”(110쪽)는 것이다.

그러나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상품은 자신이 다른 이에게 사용가치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교환된 후에만 입증할 수 있다. 즉 사용해봤을 때만 그 사용가치를 확신할 수 있다(타인에게 사용가치의 입증을 위한 홍보-광고의 발전은 필연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상품소유자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용가치(상품)을 얻기 위해서만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럴 때 교환은 순전히 개인적 과정이다. 그러나 시장에 내놓은 자신의 상품은 타인에게 사용가치인지 아닌지 중요치 않다. 오직 동일한 가치를 지닌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는 사회적 과정이다. 상품소유자는 개인적 과정으로서 교환에서 다른 모든 상품을 자기 상품의 특수한 등가물로 간주하며, 동시에 자신의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된다(1장 등가형태의 두 번째 형태). 이는 모든 상품소유자에게 마찬가지이므로 “어떤 상품도 사실상 일반적 등가(물)로 되지 못하며, 따라서 상품들은 [서로 가치로 동등시되며 가치량으로 서로 비교되는] 일반적 상대적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한다”(111쪽).

이 곤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상품소유자들은 하나의 특수한 상품을 선출한다. “이 선발된 상품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등가형태로 된다. 사회적 과정을 통해 일반적 등가(물)는 이 선발된 상품의 독자적인 사회적 기능으로 된다. 그리하여 이 상품은 화폐(貨幣)로 된다”(111쪽).

이러한 과정,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되고 원활한 교환을 위해 독립적인 가치형태를 만드는 과정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에 발맞추어 특정상품이 화폐로 전환된다”(112쪽).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위에서 우리는 상품이 소유자에게 비(非)사용가치임을 확인했다. 상품은 우선 소유자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된 사용가치로부터 비롯한다. 이 초과분의 사용가치는 양도할 수 있어야 하고, (앞에서 확인했듯이) 상품소유자 서로를 독립된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 이러한 (타인을 독립적 인격으로 대하는) 태도는 자연발생적인 공동체에선 존재하지 않는다(가족을 떠올려도 된다). 따라서 상품의 교환은 공동체의 경계에서 시작된다. 공동체 사이의 교환은 욕망의 확대와 함께 정상적인 사회적 과정으로 교환된다. 이 과정에서 교환을 위한 생산이 확대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별이 시작되는 것이다.

직접적인 생산물 교환에서는 독립적인 가치형태가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교환의 확대는 보편적 등가물을 제3의 상품 형태로 등장시킨다. 우연적인 교환에서 보편적 등가물은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상품 교환의 발달은 이 보편적 등가형태를 배타적인 특수한 상품 종류에 고정시킨다. “즉, 화폐형태(貨幣形態)로 응고한다. 화폐형태가 어떤 종류의 상품에 부착되는가는 처음에는 우연이다”(114쪽). 상품 교환의 확대로 화폐형태는 귀금속에 부착되게 된다.

“상품교환이 좁은 국지적(局地的) 한계를 타파하고, 따라서 상품가치가 인간노동 일반의 체현물로 발전해 감에 따라 화폐형태는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자연적으로 적합한 상품인] 귀금속으로 옮아간다.”(114쪽)

그러나 화폐를 상품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려움은 화폐가 상품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왜·무엇에 의해 상품이 화폐로 되는가를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다”(118쪽). 교환이 화폐상품에 ‘가치’를 준 것은 아니다. 교환과정은 화폐가 된 상품에 ‘가치형태’를 준 것이다. 즉 화폐가 된 금과 은이 교환의 필요에 의해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모든 상품처럼 화폐도 그 자신의 가치량을 상대적으로 다른 상품들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화폐 자신의 가치는 화폐의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며, 동일한 양의 노동시간이 응고되어 있는 다른 상품의 양으로 표현된다.”(117~118쪽)

화폐의 상대적 가치는 원산지에서 물물교환에 의해 정해진다. 따라서 “화폐상품이 화폐로서 유통에 들어갈 때 그 가치는 이미 주어져 있다”(118쪽).

여기서 상품물신은 화폐물신으로 이어진다. “일반적 등가형태가 하나의 특정 상품의 현물형태와 동일시되어 화폐형태로 고정될 때 ……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 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119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금이 채굴 되자마자 가치의 기준(인간노동의 화신)으로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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