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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9월 2일) 작성한 '뉴라이트와 손잡은 '뉴레프트' 주대환?'에서 쓴 것과 달리 레디앙에 실려있는 주대환의 글을 읽어 봤습니다.

주대환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레디앙)

그의 글은 생각보다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NL과 PD(지금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지 않지만)에 대한 빈약한 근거의 비난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지난 10여년 간 NL과 PD의 후신들이 여전히 변치 않은 부분이 있음에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의 노력을 기울여 왔고 '사회민주주의'를 자신의 현실적 대안으로 고민하고 적용해 왔음이 그의 눈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네요. 그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대표되는 NL과 PD의 후신이 여전히 20세기 초반 코민테른식 전략과 전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 또한 19세기 페이비언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문제는 그의 비판 태도가 우파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겠죠. 그는 민주노당당과 진보신당 '실패'의 원인을 그들의 '속'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바로 그 '속'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현실의 표면에 영향을 끼쳐 실패를 불러왔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진 않습니다.

그는 항상 현실을 강조해왔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 그가 지금 현실적 대안으로 삼는 건 열린우리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세력 내 좌파와의 연대, 미국식 민주당의 건설입니다. 미국식 민주당이 '현실'에서 노동자와 서민들의 더 나은 삶과 한반도ㆍ세계의 평화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대안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각종 폐해를 제어하거나 없애기 위해서라도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이 필수적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가 지향점으로 삼는 유럽의 사회민주당, 대표적으론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추진에 가장 크게 기여해왔다는 것에는 침묵하더군요.

마지막으로 그는 원래 이 글을 좌파매체에 동시 게재를 조건으로 '시대정신'에 실었지만 좌파매체의 발간이 늦어지며 여러 사정상 '시대정신'에 먼저 실렸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변명할 꺼리가 못되죠. 아마도 제가 지난 글에서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가 연대의 대상으로 생각한 자유주의 좌파 계열의 이론지의 부재 때문에 '시대정신'에 기고했겠죠. 구색 맞추기 식으로 '좌파매체에 동시 게재'를 조건으로 내세운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왜냐면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그의 글은 자유주의 좌파, 결국엔 우파에 대한 짝사랑 고백 편지 이상이 아니거든요.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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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전 정책위 의장이었던 주대환씨가 뉴라이트 재단이 발행하는 계간지 '시대정신'에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라는 글을 실었다. 발빠른 조선일보는 류근일 칼럼 '어느 좌파 지식인의 '커밍아웃''(조선일보 9월 2일, A34면)에서 주대환씨의 글을 칭찬하고 나섰다.

한국의 좌파가 진정으로 유의미(有意味)한 진보로서 동시대인들의 행복추구에 기여하려면 그들은 그런 이중성에서 벗어나 주대환씨 등이 던진 안팎의 비판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주대환씨가 남한 좌파 내에서 노골적인 우파 사민주의 정책을 주장해 온 것은 꽤나 오래된 일이다. 그는 남한의 보수 우파에 대한 비판보다 NL의 민족주의ㆍ친북경향에 대한 비판에 더 큰 힘을 쏟아왔다. NL에 대한 공격만큼 급진적 좌파에 대한 공격도 빼놓지 않고 계속해왔다. 류근일 칼럼에 인용된 구절들로 봤을 때 새로운 얘기랄 것 없는 내용들이라 딱히 뉴라이트 재단의 '시대정신'을 구입해 주대환의 글을 읽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이제 좌파는 뉴레프트 운동으로 업그레이드되고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을 '시대정신'이라는 우파 잡지에서 한 것이다.

그가 그간 겪은 자신의 고뇌의 결과를 좌파 매체 아닌 우파 매체를 통해 커밍아웃시켰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했느냐"는 내용 이전에 잔잔한 충격을 던지기에 충분하다.

주장이 어떤 매체를 통해 실리느냐는 호소하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좌파 매체에서 실렸던 주대환의 주장은 좌파에게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우파의 기관지에 실린 주대환의 이번 글은 우파, 뉴라이트를 향한 것일게다. 그렇다면 주대환의 주장은 다시 읽어야 한다.

이제 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 시절부터의 광범한 합의를 할 수 있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등한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 건국된 위대한 나라다. 결코 세계에서 뒤떨어졌다고 볼 수 없는 보통선거권을 실시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였다.
-주대환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
(류근일 칼럼 '어느 좌파 지식인의 '커밍아웃''에서 재인용)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이 주장 뜬금없지 않은가? 뜬금없지 않다. 최근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우파들은 이명박 정권의 출범과 함께 지난 '좌파'들의 '자학주의 사관'을 고쳐 '승리주의 사관'에 입각한 현대사를 새로 써야 한다며 대한민국의 지난 역사를 '긍정'적으로 볼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물론 지난 60년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만큼의 경제적 발전과 민주화를 이뤄낸 민중들의 힘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아니 더 크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반공주의와, 군사주의, 독재와 반인권적 노동 탄압에 대한 역사를 우린 또한 잊을 수 없다. 더구나 지난 100여일의 촛불시위로 많은 사람들이 소수만을 위했던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대환은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주대환이 모를리 없겠지만 뉴라이트가 '대한민국의 긍정'을 얘기하는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을 잇는 독재 세력들의 민주주의 파괴행위와 인권 탄압,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의 역사를 지워버리기 위함이다. 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일자리와 낮은 임금에 고통받고 있고 미래를 만들어갈 청소년들이 오직 '경쟁'과 '승리'만이 진리인 '미친 교육'을 받고 있다. 친일파와 그 협조자들에 의한 독재와 착취, 억압의 과거는 우리에게 아직 현실이다. 우리의 과거를 잊는 것은 주대환이 제아무리 '사회민주주의'적 미래의 청사진을 그린다 할지라도 삶의 더 큰 고통만을 현실에서 안겨줄 것이다.

지난 10 몇 년간 경계에서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여줬던 주대환은 결국 균형을 잃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레디앙 이광호 기자의 글귀를 인용하면서 마친다.

사실 주 전 의장의 말은 그가 평소에 해오던 주장들이다. 진보정당 내부에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가 주장해온 내용이다. 그 얘기를 다른 곳, 소위 '뉴라이트'의 기관지에 게재한 것은 같은 내용이라도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곳은 이제 과거의 동지들이 아니라, 새로 사귀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이며,  그곳은 유럽식 사민주의를 고민하는 곳이 아니라, 친북 빨갱이 독재 등의 표현을 동원해서 좌파에 대한 '역사적 구타'를 해오던 곳이다.
주 전 의장은 자신이 사회주의와 이별하고, 진보정당과 결별했다는 ‘전향 소식’을 공개적으로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지난 총선 당시 ‘무소속’ 출마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주 전 의장의 글 제목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가 '시대정신'에 게재되고 '조선일보'에 인용된 것을 보면서, 그 제목이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주대환의 진로’와 겹쳐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 레디앙 '조선일보 류근일, 주대환 칭찬한 까닭은?'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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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작성]

하루종일 뭔가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뭔가 얘기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럴 때 제 대신 얘기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입니다.

오늘 제 얘기를 대신 해준 분은 진중권씨입니다.

이 싸움을 이끌어온 주경복 후보께 위로를, 그리고 그를 도운 선거운동원과 자원봉사자들께 격려를, 투표 마감까지 문자와 전화를 거느라 분주했던 진보신당과 아고라의 그 수많은 손가락들에게 감사를, 그리고 애초에 가망이 없었던 이 선거를 박빙의 승부까지 밀고 간 우리 모두의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여러분, 정말 훌륭하게 싸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전사들에게 최고의 명예를....  여러분, 당신들은 정말 최고의 전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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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복 후보를 첨 보고 그에 대해 들은 건 아마 6월 초였을 겁니다. 민노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노회찬 후보의 비서로 활동하던 선배를 시청 광장에서 봤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 서울시교육감을 서울 시민의 '직선'을 통해 뽑는다는 걸 알지 못했죠. 주경복 후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죠. 제가 알고 있던건 그가 민교협 상임대표 지냈으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의 부록으로 '신자유주의를 말한다'를 썼다는 것 정도였죠.

사실 이런 '듣보잡' 선거에서 우리 측 후보가 이토록 선전할 것이라곤 당시로선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날 제 선배도 매우 자신없는 모습으로 제게 "많이 도와줘"라며 후보의 명함을 나눠줬을 때도(아마 예비후보로 활동중이었을 겁니다) 그저 의례적으로 "네"라고 답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촛불의 힘이었습니다. 촛불이 없었다면 주경복 후보가 과연 이인규 후보만큼의 표는 얻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지난 60여년간 한국을 지배해온 사람들의 단결력, 계급의식은 역시 탄탄했습니다. 아직 우리의 힘이 그만큼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걸 보여줬죠.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기엔 지난 3달간 우리의 땀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3달간 걸어온 길은 지난 20년의 길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력을과 가능성을 우린 옅봤습니다.

오늘 하루만 이리저리 불평을 늘어놓겠습니다. 살짝 좌절도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촛불을 들며 만났던 환한 얼굴을 기억하며 내일부턴 다시 환한 빛을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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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나폴리의 해변에서 지난 19일 피서객들이 집시 소녀 2명의 시신을 옆에 두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유럽에서의 유태인에 대한 학살, 차별, 억압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집시에 대한 차별과 억압, 학살은 깊디 깊은 역사적 뿌리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집시'라는 단어를 들을 때 '낭만적 유랑 생활'을 떠올리곤 했지만 그만큼 고단했던 그들의 삶은 알지 못했죠.

오늘(31일) 경향신문 주말섹션에 집시에 대한 기사가 실렸더군요. 두 집시 소녀의 죽음과 유럽에서의 집시에 대한 짧은 글입니다. 과거의 차별에 대해선 들은 얘기가 있었지만 그들이 지금까지도 사회적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는 지는 몰랐습니다. 흑인, 무슬림, 여성, 동성애자, 집시 …. 개인의 혈통, 생물학적 특징, 취향 등에 의한 차별이 여전히 우리 지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네요.

[세계의 창] 죽어서도 멸시 받는 유럽의 불가촉 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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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야 하루이틀 얘기는 아니죠. 물론 정말로 체포하느냐는 문제는 그때그때 다른 문제긴 하죠.

2MB로선 똥줄이 타긴 할겁니다. 사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민주노총으로선 '총파업'을 선언한다고 해서 결코 90년대 후반같은 힘을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고 장마비와 경찰의 강경타압에 사그라들것 같으면서도 이어지는 촛불을 보면서 그는 아마 더 초조해지고 있긴 할 겁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교육감 선거에서도, 그 결과는 막상 뚜껑을 열어봐야 하겠지만 생각보다 더 2MB와 보수세력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약하더라도 민주노총의 파업에 불이 붙으면 상황은 어디로 치다를지 알 수 없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로선 아마 최선을 다해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꺼놓고 볼 일이죠.

하지만 지금이 전두환이나 박정희 시대도 아니고 무조건 적 탄압 만으로 지금의 정국을 수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그 어떤 비공식적 대화채널도 유지하지 않으려 한다는 겁니다.

- 민주노총이 1995년에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경찰이 본부로 진입해서 검거작전을 편 적은 없다고 하는데?
그렇기도 하고, 과거에는 위원장을 체포영장 발부해서 사법처리할 땐 반드시 대화의 창구인 사무총장이나 수석부위원장은 놔뒀다. 그리고 사무총장 영장을 청구할 때는 위원장을 놔둔 예도 있다. 이번처럼 위원장, 수석부위원장, 사무총장을 한꺼번에 체포영장을 발부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노동조합의 총연맹, 즉 내셔널센터에 있는 임원들을 이렇게 한번에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OECD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CBS와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인터뷰의 일부입니다. 물론 민주노총 총파업이라는 당장 발등에 붙은 불은 끌 수 이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그 어떤 대화채널도 유지하지 않고 탄압 만으로 일관할 때 그 결론은 더 파국적이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과 CBS와의 인터뷰 전문은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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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사진연출' 진상조사위 꾸려 (기사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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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7월 8일자 2면

촛불정국이 가라앉지 않고있는 와중에 중앙일보에 실린 한 사진이 논란에 휩싸였네요. 검역개시와 거의 동시에 시중에 풀린 미국산 쇠고기가 소비자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다는 투의 기사에 실린 사진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사진은 신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연출사진 중 하나죠. 특히 경제면 쪽에서 모 회사의 신상품 출시가 소비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투의 기사에, 아니면 사진 단독으로 실리곤 하죠. 꼭 경제면이 아니더라도 사회면이나 이런 데서 특정 행사 사진을 실을 때 사진기자의 요청으로 장면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아요.

'연출된 사진'이 사용된다는 건 객관적 보도라는 신문의 주장이 거짓이란 걸 단적으로 드러내보인다고 생각해요. 사진 기자들에게도 연출된 사진을 찍길 원하는 데스크와 편집기자의 요구는 당혹스럽기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사진 기자들도 신문밥을 먹어가면서 월급쟁이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지다보면 그냥 묻어가기 일쑤죠.

전 신문의 '객관성'은 믿질 않아요. 굳이 연출 사진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진엔 모종의 의도된 '연출'이 가미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최소한의 거리를 두려는 노력은 필요하겠죠. 기자가 직접 '배우'가 되어 사진을 촬영한다는 건 신문을 광고지로 전락시키는 것이고 '기자'일 것을 포기하는 행동이죠.

이참에 신문에 사용되는 다양한 연출 사진에 대한 반성도 이뤄졌으면 합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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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가 당신을 말한다' 기사 보러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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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이현의 서재. 사진=한겨레

어릴 때부터 서재를 갖는 게 꿈이었죠. 책이 많은 집에 가면 무척 부러웠어요. 금성사에서 나왔던 세계 위인전이라 던가 세계문학전집이라던가 심지어 만화책 보물섬까지 제 부모님은 어려웠던 가계 사정에도 책에 대한 투자만은 아끼지 않으셨죠. 그 영향 때문인지 '책 읽기'보다는 '책 모으기'에 흠뻑 빠졌었죠.

읽지 않지만 왠지 있어 보이는 책으로 지적 허영심을 때우는 건전한 습관은 이때부터 길들기 시작해 도무지 서문 끝까지도 독파가 요원한 푸코와 알튀세르와 <이론>지 따위로 책장을 채우던 대학시절 정점에 이르렀다. 저서 한 줄 안 읽었어도 들뢰즈를 만나면 선뜻 악수라도 요청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친근감을 불러 넣어준 <키노>를 책장에 차곡차곡 채워 넣는 것도 큰 재미였다.

하지만 가난한 학생의 주머니  사정에 만족할 만큼 책을 사진 못했죠. 학생 때는 본의 아니게 도서관에 많이 있었죠.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서점에서 몰래 들고 나온 책들도 꽤나 됐었어요. 뭐 정당하지 못한 행위로 얻은 책이라서 그런지 그 책들은 지금은 모두 어딘가로 사라졌더군요. 그때에 대한 반성 때문인지 제가 취업을 하고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해지면서는 단 한 줄을 읽기 위해서라도 책을 사게 됐죠.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 때문일까요. 몇 번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기도 했지만 전 여전히 오프라인 서점을 애용해요.

[소설가 정이현씨는] 배송을 기다리는 게 싫어 꼭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하고 표지를 열어 보고 대여섯 권씩 무겁게 들고 오는 과정과 읽기까지를 다 좋아하지만 책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는 별로 없다.

물론 전 '소유' 자체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편이라 읽지 않는 책도 한무더기씩 쌓아놓곤 해요. 그나마 전 제가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산다고 생각했어요. 출판사에 다니는 제 친구들과 선배들한테 제 덕에 먹고 산다고 큰소리도 치곤 했죠.

[영화평론가 이동진씨는] 특히나 책 수집에 대한 애정은 별나서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며 한 달에 100만원 가까운 돈을 책 사는 데 바쳐왔다. 30평 아파트는 모든 방과 거실, 베란다, 현관과 화장실 귀퉁이까지 살뜰하게 책장으로 꼭꼭 채웠다. 장식장과 책장 기능을 겸하는 보통 책장은 책과 칸막이 사이의 공간이 아까워 직접 사이즈를 맞춰 무려 8단짜리 책장을 짰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물론 연봉이 많은 직장에 다니신 분이긴 했지만 제가 같은 연봉을 받았어도 한 달에 100만원어치 책을 샀을까를 되물어보면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하진 못할 것 같네요.

책은 사는 것보다 읽는 게 중요하죠. 하지만 역시 실천에 옮기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부족한 '읽기'를 '수집'으로 대체하는 지금의 생활을 언제나 중단할 수 있을진 모르겠네요.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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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경찰과 대치 상황에서 시위대는 흔히 그들도 우리의 아들이고 형제고 친구라며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폭력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하곤 한다. 전경과 시위대로 다시 만난 친구와 연인의 사연들은 알게모르게 신화와 같이 이어지고 있고 만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마도 그만큼, 흔치 않은 건 사실이겠지만, 현실 가능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내 선배들 중에도 전투경찰로 근무한 경우가 몇몇 있다. 물론 그 선배와 내가 만난 적은 없지만.

어제(28일) 밤, 경찰들의 폭력이 폭우 속에서 자행되던 그 시간, 전경들이 말 그대로 자신들이 인간의 자식이 아닌 야수들임을 증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위 링크의 경향신문 기사를 읽어보면 된다. 그 부분만 인용해보면 이렇다.

김경숙씨(47.여)의 경우는 너무 허탈하다. 아들이 걱정돼 집회 현장에 나왔다. 김씨의 아들은 전경(상경)이다. 집회 현장에서 떨어진 인도에 서 있었는데, 진압 경찰이 느닷없이 달려오더니 군홧발로 가슴을 차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후 경찰은 김씨의 머리를 방패로 찍고 온몸을 밟았다고 김씨는 전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폭행을 한 전경들이 그 어머니가 같은 동료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때리고 위협하는 시위대가 바로 그들의 어머니고 가족이고 친구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건이다.

그들을 여전히 우리의 친구로, 가족으로 인정해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은 이미 이명박 정권과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길들여진 야수일 뿐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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