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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지 못한…
나토(NATO)는 2000년대 동진 정책을 강화했다. 1999년 폴란드ㆍ체코ㆍ헝가리가 가입했고 2004년에는 러시아의 목 아래인 발트3국(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ㆍ리투아니아)를 비롯해 7개 나라가 동시에 가입했다. 2009년에는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가 가입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부터 계속된 나토의 동진 정책과 유럽연합의 지속적인 확장은 공공연하게 러시아의 고립을 목적으로 했다. 2000년대 러시아의 군사적 재무장과 옛 러시아 제국 부활의 꿈은 일차적으로 이에 대한 반발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픽=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사태 초기 반러시아 정서가 시위대를 지배했다. 2008년 조지아에서와 같은 러시아의 개입은 처음부터 주요 두려움이었다. 천연가스라는 목줄을 쥔 러시아는 몇 차례 가스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
아래 글은 3월 6일 참세상에 기고한 글이다. 글이 공개된 후 유럽연합과 미국을 한 편으로 하고 러시아를 다른 한 편으로 한 갈등이 크림자치공화국의 지위를 중심으로 더 격화되고 있다. 나토(NATO)는 폴란드에 F-16 등 전투기를 배치하고 미국은 알레이버크급 이지스 구축함을 흑해에 파견했다. 러시아도 대규모 군사훈련을 반복하며 군사적 긴장 강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국내의 긴장도 친유럽연합이냐 친러시아냐를 중심으로 커져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나토는 꾸준히 러시아 국경을 향해 동진해왔다. 발트3국(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ㆍ리투아니아)의 2004년 나토 가입은 러시아에게 결정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서방의 군대가 진격한 것이다. 유럽연합의 경제..
'제국주의론' 하면 보통 레닌을 떠올린다. 하지만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의 성취는 레닌에 못지 않다. 이정로(본명 백태웅)가 옮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는 당시의 검열 때문에 원작자의 이름이 표기되지 못하고 본문에서도 몇몇 문장을 삭제하고 어떤 표현은 순화시켜 옮겼다. 레닌이 쓴 서문이 빠진 것은 당연하다. 이를 대신해 서문으로 실린 엥겔스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3장조차도 여기저기 '완화'된 표현으로 인쇄돼야만 했다. 우선은 여기 레닌이 쓴 서문을 옮긴다. 이곳저곳 눈쌀 찌푸리게 할 의역과 오역이 많으니 원문을 꼭 참조하길 바란다. 대괄호[]는 옮긴이가 덧붙인 것이고 소괄호()는 원문에 있는 것이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레닌의 서문[1] 원문: N.I..
3월 2일 러시아 정부의 우크라이나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위대를 경찰이 체포하고 있다. 이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도시에서 수백명이 전쟁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당연하게도 푸틴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했다. [사진 Revolution News] 야누코비치가 쫓겨난 후 크림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개입 조짐이 확산되고 있다. 2월 27일에는 친러시아 무장세력이 크림자치공화국의 수도 심페르폴의 정부청사ㆍ주의사당ㆍ공항 등 주요 시설을 점거했다. 3월 1일 러시아 상원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내 군사력 사용 요청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푸틴은 그 즉시 6000명의 군대를 크림반도에 배치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푸틴과 긴급하게 통화를 해 즉시 철군할 것을 요청하며 흑..
[사진 Revolution News] 급한 불은 끄게 된 것일까. 우크라이나에서 정부와 여야의 타협안 소식이 들려온다. ●[연합뉴스] 우크라 정부-야권 유혈사태 해법 담은 타협안 서명(종합2보) 요지는 조기 대선 실시와 대통령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헌법 개정이다. 현재 운동의 초점이 야누코비치 대통령 퇴진에 맞춰졌던 걸 고려하면 지금의 유혈사태를 진정시킬 어떤 돌파구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운동의 별명이 '유로마이단'이라는 걸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생디칼리스트인 키예프의 한 노동조합 활동가에 의하면 시위 초기 거리에 나선 우크라이나 인민에게 유럽은 "부패 없는 사회, 높은 임금, 사회적 안전, 법에 의한 지배, 정직한 정치인들, 미소 짓는 얼굴, 깨끗한 거리 등"을 뜻했다..
혁명은 무엇보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의 귀환을 뜻한다.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되찾는 것.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노동계급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보스니아 반란 ① 끝나지 않은 내전, 민영화 보스니아 반란 ② 플리넘, 인민권력이 싹트다 보스니아 반란 부록 - 인민의 목소리, 당신은 얼마나 배고픈가? 한 남성이 한달 30유로인 자신의 연금 명세서를 보여주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민은 자신의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을 무시해 왔던 지배자들과 세계를 향해서 말이다. 2월 7일 시위에 참여했던 니콜라 추파스는 반란에 나선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이번 일요일 쿠르셰바츠[세르비아에 있는 도시]는 잠잠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사람들은 아마 선거..
혁명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보스니아 반란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권력이 필요하다. 성공했거나 성공에 가까웠던 모든 반란이 그랬듯이 말이다. 플리넘(Plenum)은 인민권력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보스니아 반란 ① 끝나지 않은 내전, 민영화 보스니아 반란 ② 플리넘, 인민권력이 싹트다 보스니아 반란 부록 - 인민의 목소리, 당신은 얼마나 배고픈가? 민영화 정책 재검토 등 일곱 개의 요구안을 들고 있는 시위대. 투즐라와 제니차 주지사는 7일 시위가 격화된 후 사임했다. 몇몇 자치주들로 이 사임의 물결이 확산됐다. 정부가 조기총선 카드를 빼들었지만 노동자와 반란에 나선 인민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플리넘(Plenum)'이라고 부르는 인민 의회를 건설했다. 시작은 역시 투즐라였다. 9일 투즐라에서 첫 플리넘이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북동부 도시 투즐라는 유럽에서 유일한 염호로 유명하다. 터키어로 소금을 뜻하는 '투즈(Tuz)'에서 이름이 유래하기도 했다. 이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부터 유고슬라비아 시절까지 대표적인 산업지역이었다. 지금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세 번째로 큰 산업도시다. 1992~1995년 내전은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참혹한 재앙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투즐라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역의 노동자들에게 재앙은 끝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재구축 과정에서의 민영화는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은 노동자들에게 남겨진 얼마 안되는 것들까지 약탈해 갔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다시 시작된 내전, 이번엔 계급전쟁인 내전에 대해 살펴보겠다. 보스니아 반란 ① 끝나지 않은 내전, 민영..
1월 22일에서 23일 사이 키예프 거리의 바리케이트. 1월 16일 집회와 시위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독재법'이 의회에서 통과된 후 거리 시위가 격화됐다. [사진 Ilya Varlamov]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과의 통상 강화 협상을 중단하고 친러시아 정책으로의 복귀를 천명했다. 대외정책 전환은 이후 3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거리 시위를 촉발시켰다. 가라앉을 듯 보이던 시위는 새해에 다시 폭발하고 있다. 1월 16일 시위를 억압하는 강력한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하면서부터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화염병이 날라다니는 모습이 외신을 타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시위는 지난해 터키ㆍ브라질ㆍ이집트와 달리 국제주의적 좌파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지 않다. 시위 초기 외신을 탄 레닌의 동상을..
Marina Ginestà 1919.01.29 - 2014.01.06 프랑코 쿠데타에 맞서 투쟁한 젊은 사회주의자였던 마리나 히네스타가 1월 6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는 당시 17세로 카탈루냐통합사회당(PSUC)의 투사였다. 이 사진은 1936년 7월 21일 PSUC의 본부로 사용되던 콜론 호텔 옥상에서 찍었다. 프랑코가 17일 쿠데타를 일으킨 지 5일째 되던 이날 반파시즘 의용군중앙위원회가 구성됐다. 혁명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긴 사진. 히네스타는 1919년 프랑스 툴르즈에서 태어났다. 11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주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여단에 지원해 프라우다지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