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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좀 지난 일이지만 8월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둘러싼 작은 논쟁이 있었다. 지난해 경향신문에 연재되면서 나를 포함한 몇몇에게 비판을 받았던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그 중심이다. 사실 논쟁이라고 하기도 부끄럽다. 강신준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기존 단어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사용하며 시종일관 말돌리기와 도덕적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이건 예견된 일이다. 내 비판에서도 촛점은 강신준 교수의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지식에 대한 왜곡과 날조였다. 정치적 이념 혹은 학문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강신준 교수는 논쟁에 정당하게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마르크스의 적자로 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부활한 사민당은 점차 우경화 하다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그 핵심인 계급투쟁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영국 노동당이 국유화 강령을 포기한 것보다 30여 년 앞선 것이다.

더 심한 왜곡은, 아니 왜곡이라기보다 뻔뻔한 사기라고 해야 마땅한 데, 마르크스를 개혁의 기수로 내세우고자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 이런 경향은 꽤 오래전부터, 사실상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존 당시부터 있어왔다. 엥겔스가 '반뒤링'을 쓴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뒤링이 마르크스주의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없으니 그 시작은 베른슈타인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강신준 교수에 비해선 매우 솔직하다. 그의 후예들도 대부분 강 교수보다는 정직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혁주의적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왜곡하기보다는 마르크스를 '수정'하는 것을 택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것도 한 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훨씬 정직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정도의 정직함을 지니지 못한 강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변혁'과 '개혁'을 제멋대로 사용하며 마르크스를 자본주의 개혁 정치의 선구자로 그리고자 시도한다.

애초에 학문적 논쟁이 될 수준도 못됐을 뿐더러 저열한 사기 공작에 불과한 강신준 교수의 시도에 일일이 대응하는 게 문제였을 수 있다. 게다가 기초적인 역사적 지식에서 잘못된 부분도 너무나 많아 비판 이전에 교정하는 데만도 너무 많은 수고가 들었다. 초기에 열정적으로 비판을 준비하다가 그만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 지나가 잊혀진 논쟁을 내가 다시 끄집어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잠언 26장 4~5절은 우리에게 여전한 딜레마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지 마라. 너도 그와 비슷해진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지혜로운줄 안다.

아래는 미디어오늘에 연재된 김성구-강신준 교수 논쟁의 링크다.

김성구 1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강신준 1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김성구 2 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강신준 2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김성구 3 쟁점은 수정주의·교조주의가 아니라 ‘자본’ 곡해 여부다
강신준 3 김성구 교수와의 논쟁을 끝내면서
김성구 4 자본론 논쟁의 결말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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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엉망진창 2013.11.15 0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정주의자도 못되는, 무슨 변종 우파 이데올로그 같은 인물이 <자본>의 한국어 번역자라니.... 기이하고, 기이하고, 기이한 나랍니다, 한국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란? 세계 곳곳의 반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고전적인 바리케이트와 무장한 시위대-경찰의 충돌이다. 사진은 6월 26일 칠레 산티아고의 시위 모습. [사진 europeans against the political system 페이스북]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의 반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2011년 튀니지ㆍ이집트 혁명부터 올해 터키ㆍ브라질 반란까지 모두 '중산층 혁명'이라고 주장한다[월스트리트저널 6월 28일ㆍ링크]. 후쿠야마의 기고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후 우리 언론에서도 '중산층 혁명'에 대한 기사가 잇따랐다. 특히 경향신문은 7월 3일자 1면과 8면 두 개 면을 사용해 가장 크게 '중산층의 반란'을 다뤘다. 이 글에서는 후쿠야마의 월스트리트 기고를 중심으로 '중산층 혁명'에 대해 따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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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7월 3일자 지면에는 '지구촌 휩쓰는 중산층의 반란'이란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물결을 분석하고 있다. 이번 시위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군부독재에 맞서는 정치세력도, 세계화의 그늘 속에 좌절한 젊은이들도 아닌 '글로벌 중산층'"이라는 게 요지다[경향신문 7월 3일자 1ㆍ8면ㆍ링크].

최근 저항에 대한 경향신문의 '중산층의 반란'이라는 규정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중산층 혁명(The Middle-Class Revolution)'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격차(the gap)'를 이번 시위의 공통점으로 꼽고 있다. 후쿠야마에 의하면 세계적인 자본주의 성장은 거대한 규모로 중산층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됐지만 정치가 이 증대된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직면한 실패가 최근 시위들이 공유하고 있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처럼 터키와 브라질에서도 정치적 저항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평균 이상의 교육 수준과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기술 친화적인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위를 조직하고 연대를 건설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반란과 혁명에 대한 틀에 잡힌 관념이 많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배운, 억압받는 이들이 들고 일어난 시위는 마치 옛 이야기처럼만 여겨진다. '중산층 혁명'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시위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중산층의 성장? 세계는 평평해졌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선 세계적으로 봤을 때 '중산층'의 성장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쿠야마 스스로도 중산층의 증가 현상이 중국ㆍ인도에 집중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지난 2000년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를 강태한 경제위기와 2000년대 초 미국의 IT버블 붕괴를 거친 후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네 개 나라가 매력적인 투자처로 새롭게 제시됐다. 브릭스(BRICs)는 이 네 나라의 이름에서 비롯한 단어로 세계적 금융자본인 골드만삭스가 2003년 처음 사용했다. 즉 애초 브릭스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금융자본의 반응이었다. 세계경제의 성장과 중산층의 부흥은 결코 전 세계적으로 고르게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후쿠야마가 주목하고 있는 터키와 브라질에서 지니계수(세계은행, 100 기준)는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과 룰라의 노동자당(PT)이 집권한 2003년 각 43.42와 58.78에서 2010년 터키 40.03, 2009년 브라질 54.69으로 줄어들었다. 2010년 멕시코의 지니계수가 47.16임을 감안하면 브라질의 불평등이 여전히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터키는 2008년 38.95까지 떨어졌던 지니계수가 2010년 다시 증가한 것이다. 후쿠야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불평등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중국은 1981년 이후 꾸준히 지니계수가 상승해 2009년에는 42.06에 다다른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지난해 12월 또다른 보도에 의하면 중국가정금융조사연구센터(쓰촨성 청두 시난차이징대와 인민은행 금융연구소가 함께 설립한 연구소)의 조사결과 2010년 중국 지니계수는 0.61에 달해 '폭동을 부를 수준'이다[동아일보 2012년 12월 11일자 21면ㆍ링크].

터키와 브라질에서 빈곤층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브라질의 빈곤층(국가 빈곤선 기준 빈곤층 인원수, 국제 빈곤선 기준 이하 인구 포함) 인구는 2004년 33.7%에서 2009년 21.4%로, 터키는 2004년 25.6%에서 2009년 18.1%로 줄었다. 그러나 실업률은 정체 수준이며, 터키의 경우 장기실업률은 2003년 23.4%에서 2011년 26.5%로 오히려 증가했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후쿠야마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도 "평균 이상의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서울경제는 무르시를 실각시킨 이집트 제2혁명의 원인을 "치솟는 청년 실업률ㆍ경제난"이라고 지적한다. 민간연구소들의 조사에 의하면 30세 이하의 청년 실업률은 60%에 달한다는 것이다. 튀니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랍의 봄의 도환선이었던 튀니지 혁명은 한 대졸 노점상의 분신으로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과일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경찰의 단속으로 노점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가 분신하면서 높은 실업률과 물가에 고통받던 튀니지 인민들이 반란에 나선 것이다[프레시안 2011년 1월 16일ㆍ링크].

경향신문이 '중산층의 반란'이라고 부른 최근의 보스니아 시위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스스로 지적하듯이 "보스니아는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이 유럽연합 평균의 29% 수준에 머무는 유럽 내 가장 가난한 국가"이고 "실업률이 44.6%에 달하면서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경향신문 7월 3일자 8면ㆍ링크]. 부패한 정치인의 공직 임명에 반발해 시작된 불가리아 반란도 다르지 않다. 이 반란이 시작되기 세 달 전 불가리아 인민은 전기요금의 급등에 반발해 거리로 나섰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분노한 시민을 달래기 위해 조기총선을 실시했지만 사태의 수습은 아직 멀어 보인다.

결국 이 모든 반란의 배경에는 고전적인 테마가 자리잡고 있다. 즉 극심해진 빈부격차, 열악해지는 삶의 질이 그 공통된 배경인 것이다. '중산층의 성장'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좀 더 평등해진 세계의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경제성장은 몇몇 나라의 소수에게만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가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경향신문은 이 중산층을 부르킹스 연구소의 기준을 빌어와 10~100달러의 소득수준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09년 '글로벌 중산층'은 18억명에 이른다. 이 추세는 계속 이어져 2030년에는 세계인구 80억명의 절반을 넘는 48억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이 적절한지 따지기 이전에 앞에서 살펴본 세계경제의 현실은 경제적 기준의 중산층 성장이라는 주장이 현실과 다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였을까. 후쿠야마는 중산층을 경제적 기준 만으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는 중산층을 "교육과 직업, 자산의 소유에 의해 정의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가 '중산층'의 정치적 태도를 예측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세금을 많이 내는 중산층은 정치에 더 민감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술 친화적인 이들은 다른 나라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더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수준이다. 더 높은 교육수준은 진보와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이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혁명들까지 끌고 온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중국 혁명 모두 불만을 품은 중산층이 주도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행동 방침이 소작농과 노동자, 빈민층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848년 '인민의 봄'은 사실상 유럽 대륙 전체에서 분출한 혁명이 직접적으로 앞선 수십여 년 동안의 유럽 중산층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혁명가들을 보자.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ㆍ생쥐스트, 1848년 혁명의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루이 블랑, 1871년 (비록 결정적 순간에 감옥에 갖혀있었지만) 파리 코뮌의 블랑키, 1917년의 레닌 …. 이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대표적 혁명가들은 몰락한 귀족 또는 교육 받은 지식인 출신이다. 심지어 엥겔스는 자본가다.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는 또 어떤가.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의사다. 우리는 이러한 목록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들 혁명의 대표자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배후에 더 거대한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1789년부터 1794년 사이 상퀼로트의 행동이 없었다면 로베스피에르의 위명 또는 악명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상퀴로트의 핵심 지도자들을 숙청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혁명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대중을 발견할 수 없었고 바로 그 때 그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 반동이 닥쳐왔다. 마르크스에게 '붉은 박사'라는 악명을 안겨줬지만 1848년 혁명은 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게 아니며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1871년 블랑키 없이 코뮌을 80일간 운영했다. 1917년 레닌에게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가 없었다면 볼셰비키의 10월 봉기는 실패했을 것이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동맹, 혁명의 필요조건

물론 후쿠야마가 '개인'으로서 혁명을 주도하는 중산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과거의 혁명을 얘기할 때 '개인'으로서 혁명가의 출신성분을 따지지만 현재의 혁명을 얘기할 때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혁명에서 이 중산층 '집단'의 다른 계급 또는 계층과의 동맹은 매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시위와 봉기, 때때로 혁명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이 주도하지만 마지막에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것에는 드물 게만 성공한다. 그것은 중산층이 발전된 국가에서 사회의 소수 이상을 대표하지 못하고 그들 내부가 스스로 분열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의 다른 부분과 동맹을 맺지 못하는 한 그들의 운동은 지속적인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후쿠야마는 동맹을 맺는 것 자체가 중요한 듯 말하지만 사회를 뒤흔드는 중요한 투쟁은 거의 언제나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행동하며 벌어진다. 다시 한 번 그 목록을 늘어놓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 1848년 혁명, 1817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혁명 모두가 그랬다. 보통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데서 오는 계급의 미발전(또는 충분히 분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혁명은 하나의 계급 또는 계층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노동계급은 소수였으며 레닌과 볼셰비키는 농민의 협력을 얻기 위해 여러 타협을 해야만 했다.

현재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터키에서 젊은 활동가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파업과 쿠르드족의 연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칠레에서는 무상교육과 공교육 강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에 교사ㆍ부두ㆍ광산ㆍ의료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연대에 나섰다
[참세상 2013년 6월 27일ㆍ링크].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은 오클랜드 항만 노동자와의 연대, 시카고 교사 파업, 월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거대한 투쟁들이 자동적으로 노동자 반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집트의 두 번째 혁명에는 무르시 정권에 반대하는 거의 모든 세력이 함께 참여했다.

계급 화해의 정치, 모호한 미래

이미 동맹은 현실에서 이뤄져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동맹이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중요한 동맹의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1849년 2월의 쁘띠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이 바로 그것이다. 1848년 파리 노동자의 6월 봉기가 무참히 진압된 뒤 쁘띠부르주아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위협받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보장해 주는 제반 민주주의적 보장책들이 반혁명으로 인해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쁘띠부르주아는 노동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접근했다". 6월 봉기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노동자는 이들의 제안에 동의해 공동강령을 마련하고 연합선거위원회를 발족해 공동후보를 추천했다.

"플로레타리아의 사회적 요구로부터 혁명적 요소가 사라지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대신하게 되었다. 쁘띠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주장에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형태가 없어지고 사회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 사회-민주주의의 독특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된다. 곧, 민주공화주의 제도가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 극단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양자 사이의 적개심을 무디게 하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 53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동맹의 결과 1849년 5월 28일 입법국민의회가 열렸을 때 마르크스가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한 산악당은 750석 중 200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 중 하나와는 맞먹을 수 있는 수였다. 특히 파리에서 선출된 의원의 다수가 산악당이라는 점에서 이 동맹은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월 13일 산악당은 2주 만에 질서당(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의 연합)에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후퇴한다. 그 지도자인 르드뤼롤랭은 영국으로 망명해 1870년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주파[산악당]는 과도적 계급, 즉 그 안에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동시에 서로 뭉뚱그러져 있는 쁘띠부르주아지의 대표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계급 적대 일반을 초월했다고 상상한다. 민주파들은 자신들이 특권계급과는 대립하고 있으나, 나머지 국민과 함께 인민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며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민의 이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법에 근거하여 투쟁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조차 그들은 여타 계급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원을 그다지 심각하게 평가할 필요조차도 없다. 단지 신호만 보내주면 인민은 자신들의 고갈될 줄 모르는 힘으로 압제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 58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1848년 6월 봉기의 패배로부터 쁘띠부르주아에 대한 의심이 가시지 않은 노동자에게 사회-민주주의의 모호한 정치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계급타협 정치의 종언

적대적인 계급의 이해관계를 화해키려는 모호한 정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브라질에서의 반란은 이러한 정치의 종말을 보여준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의 지도자인 페드로 스테딜레는 "신자유주의 15년, 그에 이어 계급타협 정부의 지난 10년은 정치를 자본의 인질로 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룰라 시절에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의 당근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세계경제위기로 지우마 호세프에겐 룰라와 같은 좋은 조건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참세상 2013년 7월 2일ㆍ링크, 레디앙 2013년 6월 27일ㆍ링크]. 그럼에도 후쿠야마는 "많은 것은 리더십에 달렸다"며 반란을 적절한 개혁에 대한 타협으로 이끌 수 있길 바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산층 중) 기업가적 소수는 정치인들에게 부패의 책임을 지우고 수혜자 중심의 정치를 가능케 하도록 원칙을 바꾸는, 브라질의 정치 체제 전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중산층 동맹의 기초를 지원할 수 있다. 이것은 광범위한 중산층이 동원돼 19세기적 정실주의를 끝장내고 공적 서비스를 개혁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성공적으로 이끈 미국의 진보 시대(1890~1920년)에 일어난 일이다. …… 호세프 대통령에게 봉기는 좀 더 야심찬 체제 개혁을 시작할 계기다."

실제로 그녀는 시위대에 대해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녀와 달리 브라질 경찰은 터키의 경찰, 이집트의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잔인한 폭력으로 시위대를 대하고 있다. 시위대 또한 정부의 유화적 태도에도 결코 물러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후쿠야마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진보 시대가 1차 세계대전과 세계적 혁명의 물결 속에 막을 내렸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터키와 이집트, 그 밖에 많은 나라의 반란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배자들이 실제로 양보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 정치인들은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의 압력하에 긴축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대중의 계속된 반란과 위협에도 말이다. 올해 초 대중의 저항에 직면해 조기총선을 치뤘던 불가리아에서는 제1당이 정부 구성 권리를 포기했다. 이집트에서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뿌리 내린 지난 수 십년의 활동을 기반으로 무슬림형제단이 1차 혁명의 성과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돼 그들도 대안이 아님이 입증됐다. 무슬림형제단은 국제통화기금의 식료품과 공공요금 보조금 삭감 압력에 굴복했다. 실업은 해결되지 못하고 더 심각해졌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억압당했다.

반란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들에서 권위주의의 강화, 경찰의 잔인한 시위대 탄압이 분노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양보할 게 없는, 타협할 여지가 없는 정부는 주먹에 의지하기 쉽다. 계급타협 정치는 좌파가 아니라 우파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먼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기회

그럼에도 계급타협 정치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반란에서 계급 간 대결이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진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중간계급의 지위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 전체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양대 계급의 대결로 몰아간다는 사정 자체가 갈등을 복잡하게 한다.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중간계급이 소부르주아적 습속을 버리긴 어려우며 프롤레타리아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현실 때문에 부르주아적 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중산층,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중간계급이 (이 둘이 완전히 일치하진 않더라도) 혁명의 대열에 끝까지 참여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무르시를 쫓아낸 2차 혁명에서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은 군부의 폭력에 기대고 있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반란의 배경이었던 국제통화기금의 긴축 압력에 맞서지 않고 있다.

노동계급도 분열돼 있다. 민족적ㆍ인종적ㆍ종교적ㆍ성적 차이에 기반한 전통적인 분열의 위세는 여전히 강력하다. 단결에 대한 열망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계급 간 타협에 대한 미련도 그렇다. 이번 반란들도 분열된 노동계급의 현실 때문에 단일한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인민' 또는 '민중'의 반란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는 없다. 패배든 승리든 반란은 현실의 역사에 흔적을 남길 것이고 그 흔적은 어느 계급이 혁명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최근의 반란으로 사회 전체가 흔들리며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진출하고 있다. 때로는 반란에 적대적인 세력까지도 집단적 행동으로 역사의 키를 쥐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산층의 혁명'은 지나치게 협소한 규정이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동맹은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고 갈등할 것이다. 중산층 중심의 계급타협 동맹은 우파와 지배계급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따라서 동맹에서 어떤 정치에 의한, 어느 계급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여러 투쟁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계급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학생 반란에는 교사와 광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스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노동계급은 2011년 아랍의 봄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허약해 보이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몇몇 짧은 장들을 예외로 한다면, 1848년에서 1849년까지의 혁명 연보는 중요한 부분마다 "혁명의 패배!"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패배 때문에 사라진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의 잔재, 다시 말해 아직 날카로운 계급 대립으로까지는 고양되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것은 2월 혁명 이전의 혁명적 당파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ㆍ환상ㆍ관념ㆍ계획들이었는데 혁명적 당파들은 2월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패배를 통해서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적 진보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진보의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들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결속력 있고도 막강한 반혁명이라는 하나의 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인데, 이 적과의 싸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혁명적 당파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으로 성숙해 갔다.
-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프랑스 혁명사 3부작' 39쪽, 임지현 외 옮김, 소나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당파는 패배를 통해서만 과거의 습속과 환상,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현대의 우리도 이어진 투쟁의 굴곡 속에 몇몇, 때로는 심각한 패배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열었고, 그들이 멈췄던 곳으로부터 보다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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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 교수는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오늘 '자본'을 읽다' 9월 22일자 연재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강의를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환가치와 가치를 구별하는 데 애를 먹는 것을 자주 봅니다."(강신준 9월 22일)

지금까지 강 교수가 연재한 글 중 바로 위 문장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애를 먹는' 사람에는 강 교수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교환가치와 가치만이 아니죠.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 전체를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를 갖기로 하고 오늘은 자본론 1장에 집중해 강 교수의 연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자본론의 모든 인용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판으로 대체했습니다. 강신준 교수로부터의 인용은 모두 연보라색 굵은 글자로 표시했습니다.


1. 상품의 이중성 … 사용가치ㆍ가치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1권 77쪽)

마르크스는 상품의 이중적 측면을 위와 같은 말로 정의합니다. 1장 1절의 제목도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입니다.

설명은 사용가치부터 시작합니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합니다. 여기서 유용성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연적 필연성에 한정하면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으로서 상품은 최소한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용가치로서 상품은 그것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질적ㆍ양적으로 구별됩니다.

상품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됩니다. 일정한 비율로 말이죠. 여기서 상품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 또는 관계가 교환가치입니다. 상품이 교환가치라는 것은 서로 다른 상품들 속에 공통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로 다른 상품이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품의 자연적 속성은 공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상품의 유용성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용가치와 연관된 것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교환에 있어서 사용가치는 서로 다른 것이기만 하다면 문제가 안됩니다. 결국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거기에 남는 유일한 것은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 뿐입니다.

"이들 노동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생산물들은 유령 같은 형상[즉, 동질적인 인간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형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노동생산물들은 인간노동력이 그 지출형태와는 관계없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노동이 그들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로서 가치, 상품가치이다."(1권 47쪽)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품은 우선 유용한 물건으로서 사용가치입니다. 이 상품은 서로 일정한 비율로 교환됩니다. 즉 교환가치입니다. 이 교환가치는 상품이 공통된 무엇인가를 지니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 못합니다. 그 공통된 것은 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이고, 이것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 강의'에서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이를 도식화 합니다.


하비 53쪽

강신준 교수는 이와 달리 교환가치를 사용가치의 '발전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의 설명과 완전히 다른 것이죠. 상품이 교환가치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용가치여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유용하지 않은 물건(또는 서비스)을 교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용가치가 발전해 교환가치가 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교환을 위해서도 상품의 사용가치적 측면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가 '두 요소'라는 제목으로 상품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한 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죠. 이 설명이 불분명하다면 아래의 데이비드 하비의 설명을 읽어보시죠. 재밌게도 이 책은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것입니다.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여기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면 사용가치가……? 그러나 맑스의 분석은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그것도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바꿔 말해 우리는 다른 개념을 말하지 않고는 이들 개념 가운데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이 개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 있고 어떤 하나의 전체(totality) 속에 내재하는 관계들인 것이다."(하비, 55쪽; 오역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하비는 강 교수와 같은 설명을 '인과론'적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마르크스가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를 설명하는 자본론 1권 1장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인과론'적인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변증법에 대해선 차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래의 그림을 앞의 하비의 도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강신준 9월 15일

따라서 강 교수의 아래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교환가치를 비교해주는 양적 단위는 바로 가치이고 그것은 인간의 노동입니다"(강신준9월 15일)

가치가 강 교수의 설명처럼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그것의 질적 측면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강 교수의 생각은 사실 주류 경제학에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죠. 애시당초 그것이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환되는 비율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강 교수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교환가치'를 매우 강조하죠. 주류 경제학에서 이러한 상품들 사이의 교환비율(교환가치)의 강조는 그들의 선배,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세웠던 노동가치론을 버리고 한계효용 혁명으로 나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강 교수가 어딘가 인터뷰에서 칭찬했던 책인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폴 스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양적 가치이론은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상대적인 비율을 규율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과만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주류의 이론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주류의 이론에서는 그것이 교환가치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에게 교환가치란 가치를 배후에 숨기고 있는 '현상적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단지 교환가치의 결정에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양적 가치의 문제란 무엇인가? 위에서 서술한 분석이 한 가지 답변을 해준다. 상품이 가치라는 사실은 상품은 물질화된 추상적 노동이라는 의미이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품은 사회의 총 부창출활동 가운데 일부를 흡수한다는 의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노동은 시간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교환가치와 구분되는 양적 범주로서의 가치가 어떤 의미인지가 분명해진다."(스위지 58쪽)


2. 노동의 이중성 …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

상품의 이중성은 노동의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사용가치로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유용노동이 필요합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목재를 만들고, 목재를 재단하고, 재단된 목재를 짜맞춰야 하는 것 같은 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이 꼭 육체노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가치로서 상품을 만드는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 과정이 사장된 말 그대로의 인간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루카치의 "자본주의의 본질을 반영하는 추상"이라는 주장을 인용한 폴 스위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의 그 어떤 사회형태에서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이동성보다 훨씬 더 높은 이동성을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며 마르크스의 추상노동 개념의 현실성을 설명합니다
(스위지 55쪽).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방향이 변함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부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의 형태로 또는 직포의 형태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노동형태의 이와 같은 변화가 마찰 없이 일어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1권 55쪽)

기업이 창의적 노동에 대한 무수한 찬양을 늘어놓으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노동과정의 표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이러한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죠. 추상적 인간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과 구분되는 현실성을 지니며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노동의 이중성을 구성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이 중 어느 하나의 측면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용가치를 만든 노동은 시장의 교환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으로 바뀝니다. … 배추라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에는 항상 농민의 힘든 노동이 들어갑니다. … 내가 생산한 배추의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다른 농민들이 생산한 배추와 비교되는 것은 물론 배추를 구매할 소비자의 사정도 고려되어야만 비로소 결정됩니다. 요컨대 나 혼자만의 사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우리가 마르크스를 잊은 채 읽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강 교수가 좋아하는 '개미와 베짱이' 비유로 들어가면서 완전한 파탄을 드러냅니다.

"개미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일 뿐,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은 아닌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굳이 이중성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동시에 갖는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개미(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구체적 유용노동일 뿐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추상적 인간노동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노동자가 교환가치, 정확하게는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베짱이)는 어떻게 잉여가치를 획득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여기에선 강 교수의 연재가 기대되기도 하네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아래의 마르크스 설명과 비교하면 강 교수의 설명이 얼마나 마르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권 58쪽)


3.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강신준 교수는 이 부분에서 자본론 1권 1장 3절 부분을 거의 통째로 건너뜁니다. 물론 여전한 헛소리로 분량을 채우고 있긴 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가치형태를 설명하는 것은 화폐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이어지는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기원'절과 함께 일반적 가치형태, 즉 화폐형태가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은폐하는 지 그 기원을 폭로해줍니다. 가치의 현상형태인 교환가치가 취하는 여러 형태를 사려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면의 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 절의 핵심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바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규제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화폐형태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또한 화폐형태의 등장은 가치가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킬 중심원리로서 응결되기 시작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항상 기억해두어야 할 점이기도 하지만 가치는 물적 존재가 아니면서도 객관적 대상이다."(하비 76쪽)

강 교수는 여기서 뜬금없이 화폐가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발전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강신준 9월 29일)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건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르크스나 그의 해설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인 것이죠. 하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 화폐형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고 대신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런식의 왜곡은 프루동과 크메르 루즈를 언급하며 화폐형태를 "역사의 필연적인 자연법칙"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프루동과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면 강신준 교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우선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프루동은 처음에 정의ㆍ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1권 109쪽 각주2)

프루동에 대한 비판만 놓고 보면 강 교수의 주장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정의로부터 비롯한 이상을 따르는 운동은 참혹한 결말을 맞곤 했죠. 하지만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약간 다르게 들립니다. "상품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며 노동화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힌 마르크스는 오웬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이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같다는 점"이라며 그 이유로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고 밝힙니다(1권 121쪽 각주1).

마르크스는 상품생산을 전제로 한, 즉 자본주의의 핵심적 원리를 그대로 둔채 그 현상형태인 화폐형태만 고치자는 주장에는 가차없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근본적인 변혁을 전제로 한 주장에는 호의적인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보면 강 교수의 입장이 마르크스와 같다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강 교수는 프루동에서 더 나가 화폐형태 자체가 "필연적인 자연법칙"이라며 자본주의의 성숙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고 있죠. 이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 몽상일 뿐이며 이러한 몽상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법칙을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주장으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4. 결론을 대신하며 … 중요하지만 빼먹은 것들

아직 연재가 계속되고 있으니 강신준 교수에 대한 비판의 결론을 여기서 내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본론 1권 1장을 마치고 7회차까지 연재를 보면 강 교수의 자본론 해설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강 교수의 오해는 계속해서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른 분량 중 가장 거슬렸던 것은 15일자 연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얘기처럼 내 이익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현실 자본가들의 노력은 경쟁을 빚고 경쟁의 결과가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거든요.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치가 빚어내는 변증법의 요술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가치량을 결정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1권 49쪽)이 이런식으로 왜곡되는 걸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간단히만 지적하자면 우선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경쟁의 강제법칙으로부터 연역해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마르크스가 1권에서 '경쟁'을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 즉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강 교수의 '사회적 평균'은 마치 보다 평등한 사회의 형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전체에 걸쳐서 자본가의 잉여가치 획득과 더 가난해지는 노동자의 현실이 자본주의적 법칙의 현실적 결과임을 설명하는 것과 반대되는 주장이죠. 또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형성하는 '경쟁' 운운하는 데, 마르크스는 경쟁의 강제법칙을 자본가가 개인이 아닌 자본의 인격화한 범주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핵심 원리로 설명합니다. 즉 '자본가들의 노력'이 '경쟁을 빚'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법칙이 자본가의 자본으로서의 노력을 강제하는 것이고 이는 노동자들에게 더 비참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강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결과조차도 자신의 희망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9월 22일자 연재에서 "모든 사용가치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집니다"는 단언도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동은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사용가치[즉,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1권 54쪽)

이 설명은 이후 자연과의 신진대사라는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죠. 강 교수의 단언은 마르크스가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후예들이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이론과 실천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번 주에도 어김 없이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연재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힘 닿는대로 비판적 검토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는 강 교수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만들어나가기 위함입니다. 격동을 앞둔 지금 마르크스의 유산을 제대로 살피는 일은 더 중요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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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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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etas 2012.10.08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동안 강 사마의 글을 안 읽었었는데, 요새 쓰는 글이 계속 저런 식인가 보군요. 명색이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학자인데 (정말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를 혼동하는 대목에서는 (부정적 의미에서)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강 사마께서는 아무래도 난독증이 심하신 모양입니다.

    • 때때로 2012.10.08 14: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문제가 이해의 부족인지 의도적인 왜곡인지 여전히 헷갈립니다. 최근 발표한 다른 책과 예전에 썼던 '자본의 이해'가 다시 읽고 싶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지만, 이런 것 때문에 그 책들까지 보기엔 시간이 너무 없네요.

  2. EM 2012.10.16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때로 님께서 임자를 만나셨군요. ㅎㅎ
    잉여 님, 잠시 링크해주신 홈피에 들어가보니, 부산에 계신 모양이군요.
    아쉽습니다. 수도권이시라면 저희 자본 읽기모임에 초대하는 건데.. ㅎㅎ
    암튼 계속해서 생각 공유해주세요. 저같은 객도 구경하는 재미가 좋습니다 ^_^

    • 때때로 2012.10.17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러 사람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그러다 제 얕은 밑천이 모두 드러나느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고 합니다. 그래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니 다행이에요^^

    • 때때로 2012.11.22 1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잉여// EM님이 주도하는 모임은 말 그대로 함께 읽고 있습니다. 올해 3월쯤 시작해 지금까지 매주 하고 있는데 한번 할 때 2~3시간 정도 읽습니다. EM님 처럼 다른 참가자들을 지도하고 관련된 지식들을 전해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좋지요.

    •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부산에서도 자본읽기 모임을 하고싶고, 주도해서 자본을 읽고싶어 하는사람들을 모우고싶은데,,어떤방법으로 해야할지 잘몰라서요..
      혹시 노하우나 어떤식으로 모임을 하고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3.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 읽다 말았는데, 님이 문장의 이해를 잘 못하신 듯 한데여~
    이 부분에 대한 거요.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
    강교수님의 이부분의 대한 설명은 님이 이해한것처럼 사용가치가 발전해서 교환가치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품의 사실상 가치는 사용가치이고, 사용가치가 100원이라면 그 출발점인 100원에서 시장에서 수요공급원리에 의해 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님이 이해하고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며, 상품의 이중성에 대한 설명도 수업시간에 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집에가서 책을 봐야할듯^^

    • 때때로 2012.10.12 1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이 설명하신 것과 같은 강 교수의 사용가치 설명이 틀렸다는 겁니다. 사용가치가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에 조정돼 교환가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사용가치는 사용가치일 뿐 교환가치로 변하지 않습니다.

  4.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배우기에 사용가치는 그 상품안에 가변자본 + 불변자본과 그리고 노동력투입(가본자본)으로 인한 잉여가치가 포함된 게 사용가치이고, 교환가치는 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는 상품이 시장에 나왔을때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가격이 조정되게 되는데 그것이 교환가치로 알고있습니다. 이것이 상품의 이중성으로 기억이 되는데, 상품속에 가치가 사용가치(구체적노동)와 교환가치(추상노동) 둘로 나뉘는것. 아 기억이 났네요.
    아무튼 님이 쓴 글을 읽어보니 강교수님의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에 대한 이해와 님의 이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용가치에 잉여가치가 포함돼 있다니요. 이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를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군요. 자본론 읽기 전에 정치경제학 입문용 책 몇권이라도 읽어어보시길 권합니다.

  5.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

    제가 판단했을때 강교수님이 저렇게 쓴 이유는, 보통의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곡선을 그리면서 '가격' 이라는 것이 교환가치만을 말하고있지않습니까? 사실상 교환가치의 본질이자 상품이 처음 가지고 있는 가치의 본질은 생산가치인데, 주류경제학은 그것을 간과하고 있고 이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이 사실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측면에서 책정된 것이아니라 사용가치를 기반으로 하고있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함축적으로 쓴 글로 판단됩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격 또는 교환가치는 '사용가치'를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수요와 공급으로 인한 변동을 무시했을 때 교환가치는 상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추상적 인간노동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두꺼운 자본론(또는 자본) 읽으려 애쓰지 마시고 얇은 입문서들을 먼저 읽어보세요.

  6.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체적으로 님의 글은, 강교수의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해석 하는 경향이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 때때로 2012.10.12 1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잉여님이 쓰신 리플로 봐서는 제가 왜곡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강신준 교수가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으 전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드네요.

      교환가치와 가치 자체는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그가 개량주의자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방식(사용가치가 시장에서 수요공급의 조정을 거쳐 교환가치가 된다는 식의, 또는 사용가치에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잉여가치가 포함돼 있다는 식의)의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 그야 말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입니다.

  7. 잉여 2012.11.26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입문서는 읽어봤어요 ^^;

    • 때때로 2012.10.12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약간 무례했던 제 발언을 먼저 사과드리며 추가로 약간 설명드리겠습니다.

      사과라는 상품으로 설명하자면 사과는 신맛에 약간의 단맛이 포함된 식물성 섬유질의 먹는 것입니다. 사과가 사용가치라는 것안 바로 이러한 물리적 소재적 특성 때문입니다.

      사과는 의자와 교환될 수 있습니다. 사과와 의자가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겠죠. 사용가치는 이 '공통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상품의 물리적 소재적 특성이 같다면 교환될 이유가 없죠. 교환된다는 것은 이미 상품의 물리적 소재적 특성이 다르다는 것으 전제하는 것입니다. 즉 사용가치는 교환가치가 나태나는 상품의 어떤 공통된 속성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환가치가 나타내는 상품의 공통된 속성이란 것은 결국 그것이 추상적 인간노동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사과든 의자든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졌죠(물론 그 과정에는 자연의 기여도 있습니다). 구체적 유용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들기 때문에 교환가치의 공통된 속성일 수 없습니다. 사과를 키우는 노동과 의자를 만드는 노동은 다르죠.

      결국 사과와 의자는 어떠한 구체적인 과정의 노동을 거쳤다는 게 아닌 오직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 공통적인 것입니다. 추상적 인간노동의 지출이 응고된 것, 그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마르크스의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에 대한 설명입니다. 1장에서도 몇 페이지 안 되는 부분이니 다시 차분하게 읽어보시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8.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위에 말한 사용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나봅니다. 제가 오해를 하고있었군요~
    제가 이해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드리니 교수님께서 답변을 해주셨는데,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상품가치와 교환가치가 아니더군요........ 제가 배우고있는사람이라 이해가 부족했나봅니다.

    답변을 요약하자면, 사용가치는 그냥 효용만 갖는 것이어서 양적 표현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런 사용가치 두개가 서로 만나면 양으로 비교하게 되고 그때 비교되는 양이 교환가치이며, 상품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상품이 가지고 있는 교환가치의 구성요소가 불변자본+가변자본+ 잉여가치이다.이런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이 시장에 나와서 거래될 때 시장의 수요공급 요인에 의해 원래의 가치대로 판매되지 못하고 변동하게 되는데 이 변동되는 것이 시장가격이다.

    제가 시장가격을 교환가치로 교환가치를 사용가치로 오해하고있었네요^^;;

    • 때때로 2012.10.13 0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강신준 교수의 답변을 제가 직접 듣지 않아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잉여님이 쓰신 부분 만 보면 잘못 설명된 부분이 또 있군요.

      "사용가치는 … 양적 표현을 가지고 있지 않고" => 중요한 건 아닙니다만 사용가치도 양적 표현을 가집니다. 물리적 소재가 양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포만감을 주는 '사과'라는 상품 자체로 (그 어떤 교환도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한) 한 개, 두 개 또는 1kg, 2kg이라는 양을 가집니다. 교환가치라는 것은 이것과는 별개의 상품 사이 관계의 양적 표현인 것이죠.

      "상품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 가치의 현상형태가 교환가치인 겁니다.

      "교환가치의 구성요소가 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이다." => 가치로서 상품은 추상적 잉여노동의 응고물입니다. 위와 같은 내용은 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라는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며 지금의 논의에서 추가적인 과정을 거쳐야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설명하자면 그것은 상품이 오직 단 한 명의 노동자에 의해 단 한 번에 완성되는 것 만은 아니라는 사정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선 먼저 톱과 망치, 못, 목재, 작업장과 같은 것이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이 것들 또한 현재의 생산과정 이전의 생산물인 것이죠. 그것 또한 추상적 인간노동의 지출로 이뤄진 것이었지만 현재의 생산과정에서는 죽은 노동으로 투입되어 새로운 생산물로 그 가치가 이전됩니다. 이 과정이 노동인 것이죠. 결국 불변자본이란 것은 현재의 생산에 필요한 상품(과거 생산의 결과물)을 구입하기 위해 투하한 자본이고 가변자본은 마찬가지로 노동력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투하된 자본입니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가치증식과정인 노동과정에서 추가적으로 만들어진 가치입니다. 교환가치가 표현하는 본질은 가치일 뿐입니다. 노동 생산물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교환가치로 나타나는 것은 맡지만 그 교환가치를 "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로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9. 잉여 2012.11.26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다른참가자들을 지도하고 지식을 전해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 부산에서도 자본읽기 모임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공부가 될 것 같아서.....ㅎㅎ...

    • 때때로 2012.11.23 1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능하면 지도해주는 분이 있는 게 좋기는 하지만, 딱히 그럴 만한 분이 없어도 여럿이 함께 모여 읽는 것도 좋더군요. Socialandmaterial.net에 가면 heesang님이 연재하는 '자본론 읽기' 게시물도 도움이 될 겁니다. 부산에서도 꼭 읽기 모임 해보세요.



강신준 동아대 교수가 경향신문에 '자본(자본론)' 해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본'을 읽다'는 제목으로 8월 25일 시작했습니다. 연재 기사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실립니다. 9월 1일에는 두 번째 연재로 '혁명에 사로잡힌 물음 - '자본'의 출생과 변증법'이란 기사가 23면에 실렸습니다.

●[경향신문] 9월 1일 23면|'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링크)

최근 마르크스의 생애, 그의 사상, 자본론(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출판도 늘고 있습니다. 신문에까지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실린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신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지만 책보다는 읽는 사람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까지 읽고 나니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더 커집니다. 마르크스 스스로 말년에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고 한 만큼 마르크스주의는 논란에서 자유로운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강신준 교수의 두 번째 연재기사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중을 위한 신문에서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학문적 방법을 사상한 게 문제가 아닌 것이죠. 문제는 일반적인 사실의 왜곡에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명색이 '자본 강독'이라고 시작한 연재라면 자신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글)을 구분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가 모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경향신문 연재기사를 보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할 분들에겐 상당히 큰 오해를 심어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전공자도 아니지만 간단히 제가 아는 한도에서 9월 1일 두 번째 연재기사에서 문제가 될 듯한 부분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글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주저 말고 지적해주세요. 아래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강신준 교수의 글입니다.


1_ "오늘날 사회변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혁명이란 용어는 원래 프랑스혁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근대 혁명의 효시가 프랑스혁명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완전히 틀린 설명입니다. 혁명(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혁명이 급진적, 혹은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이 단어가 '사회구조의 근본적이고 돌연한 변화'를 뜻하는 정치적 의미로 쓰인 것은 1688년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윌리엄 3세가 즉위한 사건을 '명예혁명(The Glorius Revolution)'으로 부르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대해선 위키피디아 'revolution' 항목을 참조하시면 됩니다(링크).


2_ "1848년 혁명도 바로 이 [1789년] 프랑스혁명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의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혁명의 다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인민의 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호명하고 싶어하는 혁명가, 변혁가의 꿈은 과거와 현재 모두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의 점령자들은 자신을 99%라고 표현하며 결코 소수가 아닌 다수임을 강조했죠. 원래 '다수파'라는 뜻을 지닌 볼셰비키, 하지만 레닌의 볼셰비키는 그 분열 초기에는 멘셰비키보다 소수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시이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도 어찌보면 현재의 '우리는 99%다'라는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이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후에 스스로 "모든 것이다"고 답하죠. 그러므로 "제3신분은 국민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고 "제3신분이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국민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사', 알베르 소불, 두레, 29쪽).

마르크스주의자 또한 과거의 혁명들을 '노동자 혁명'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강할 것입니다. 열망은 현실과 다르죠.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를 따르는 혁명가들은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그는 나폴레옹의 조카가 일으킨 쿠데타를 다루는 책(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그들 앞에 전개되어 있는 원대한 전망에 대한 상상에 젖어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 몰두해 있었던 반면, 사회의 구세력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회합을 개최했으며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쁘띠부르주아에게서 예상치 않던 지지를 발견했다."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 21쪽.

마르크스는 분명하게도 1848년 혁명 당시 농민이 다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당시 프랑스에서 소수였고 그나마 파리에만 의미 있는 수를 형성하고 있었죠. 그렇기에 파리의 노동자들은 6월 봉기 때 "모든 계급과 정파"의 적으로 공격 대상이 됩니다. 결국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위대한 세계사적 투쟁이라는 영예를 안고 쓰러"집니다(앞의 책 23쪽). 1848년 혁명의 다수가 노동자였다는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설명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른 저자의 설명도 강신준 교수의 주장과는 다릅니다. 노명식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과 비교하며 이렇게 씁니다.

"[1830년] 7월혁명의 결정적 승자는 부르주아지였으나 2월혁명의 승자는 노동자계급과 중소 부르주아지의 연합이었다.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848년에는 부르주아지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책과함께, 343쪽.

분명히 1789년보다, 1830년보다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졌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함은 프랑스 전역의 혁명에서 파리가 지닌 역할과 비견할 만한 것이죠(서로 연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1848년 혁명 당시 노동자가 '다수'였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혁명 패배의 교훈과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3_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은 극히 제한된 형태로만 있었고 경제의 대부분은 자급자족하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것만을 소비했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경제구조에서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생산을 열심히 한 사람은 소비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고 설명할 수는 없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이전 생산양식의 귀족과 노예 소유주를 위한 생산, 즉 착취를 (자본주의적 착취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강신준 교수가 깜빡하고 잊은 듯합니다.


4_ "[1848년 혁명의 패배를 지켜본 다음] 1849년 마르크스는 독일 정부의 압력에 의해 다시 유럽대륙에서 추방당해 마지막 망명지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영국으로 가는 뱃전에서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는 그 엄청난 혁명의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혁명이 왜 실패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곧바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틀어박혀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67년 드디어 '자본[자본론]' 제1권을 출판했습니다."

이 문구만 읽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계기,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마치 1848년 혁명 때문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그 기초적 모습을 드러낸 '공산당 선언'이 1848년 2월 혁명 전야에 나왔다는 사실과 배치됩니다.

이뿐 아니죠. 마르크스는 1843년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미 경제적 탐구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악명 자자한 문장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8쪽.

마르크스가 현실의 경제적 삶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비슷한 시기 '라인신문'에서 일하면서입니다. 마르크스는 훗날 "'라이니셰 차이퉁[라인신문]' 편집장으로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야 할 때 나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미지의 영역[물질적 이해관계: 경제]에 처음 도전해본 것은 개인 소유 삼림에서 나무를 훔치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법을 길게 비판하게 되었을 때였다. … [이 문제를 다루면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계급, 개인 소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푸른숲, 69쪽.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쫓겨난 마르크스는 당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울한 학문, 경제학에 대한 탐구에 몰두합니다. 당시의 공부 결과는 현재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1844년 쓰여서 '1844년 수고', 또는 파리에서 작성됐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립니다.


5_ "한나라당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가 '잃어버린 10년'인데요. 이 말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10년 동안 이루어진 정치적 성과를 모두 없애고 10년 전의 상태로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사물의 운동법칙[변증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은 성숙해지면서 2가 되는데 이 2는 기존의 1에 1을 더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2=1+1). 만일 기존의 1을 없애버리면 새롭게 추가하는 1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보다 나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고 도로아미타불의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강신준 교수는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1+1=2'라는 공식을 내세웁니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설명이긴 합니다. 보통은 정-반-합의 과정을 설명하죠. 강신준 교수의 설명만 보면 사물의 운동은 발전만 있고 퇴보는 없는 듯합니다. 게다가 기존의 사물은 새로운 사물 내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새롭기는 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설명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사물의 변증법적 운동이 발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을 인용하며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하지만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합니다
(최형익 옮김, 비르투, 10쪽). 마르크스의 설명이 강신준 교수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고전정치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바로 그 한계 때문에 그들의 후예들이 과학적 입장에서 더 후퇴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사물의 운동법칙은 1+1=2처럼 단순히 계단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대립과 통일이라는 기존 설명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명이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왔지만,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그보다 더 큰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6_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강신준 교수의 '변증법' 해설의 더 큰 문제는 마르크스가 마치 자본주의를 '존속'시킨 채 그것의 개혁을 위한 방법을 발견한 사람처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재기사가 '강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최소한 마르크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구분할 수 있게끔 써줬어야 합니다.

19세기 후반 보통선거의 도입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민주적인 길의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합니다. 당시 아직 봉건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이던 러시아를 살피면서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 공산주의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존속'과 '개혁'을 주장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듭니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태도를 유지했죠.

"[1875년 라쌀레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회주의노동당(1890년 할레 대회에서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의 강령에 대해] 마르크스는 즉각 베를린에 있는 리프크네히트에게 격렬한 비난이 담긴 서한을 급송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엥겔스에게도 리프크네히트에게 그 정도로 강력한 서한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렀다. … 마르크스가 보기에 고타 강령에는 너무나 많은 타협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었다. 고타 강령은 사회주의와 그 최대의 적인 국가가 영원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타 강령은 특히 그러했다. 또한 고타 강령의 밑바탕에는 프루동 주의자들과 생시몽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여러 모순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든가 상속법의 폐지 같은 사소한 목적들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사회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안규남 옮김, 미다스북스, 383쪽.

게다가 강신준 교수 스스로 인용했듯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든 영원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운동 상태에 있으며 유동적이고, 따라서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파악됩니다. 강신준 교수가 인용한 부분을 좀 더 길게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ㆍ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ㆍ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19쪽.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개인의 바람에 따라 왜곡해서 살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한 때 속하기도 했던 청년헤겔파에 대한 비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들은 헤겔과 달리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바랐지만 사물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의 문제로만 파악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에서 청년헤겔파를 '무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에 비유해 조롱하기도 했죠(박재희 옮김, 청년사, 34쪽).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며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김수행 옮김, 19쪽).

아나키즘과 마르크스 이전에 유행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생시몽과 푸리에 등) 비판이라는 맥락도 살펴야 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적 상태에 대한 탐구가 아닌 이상적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변혁의 과학을 대치하려 했습니다(물론 그들의 '이상'은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현재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혁명적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변화할 지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연구로부터 끄집어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도 이러한 사정을 모를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랑스 혁명을 얘기하며 실컷 '혁명' 운운하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강신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잘못된 제목으로 나타납니다.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이라니요. 강신준 교수는 그나마 '개혁'이란 단어로 기사의 후반부에 대치시켰지만 경향신문의 편집기자는 그 차이를 이해 못하고 '혁명'이란 단어를 제목에 써버립니다. 하긴 이윤에 목매는 자본가들은 생산방식에 혁명적 방법을 도입해가며 자본주의 사회를 발전시켜왔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다만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꿈꿨던 마르크스의 생각은 아니죠. 제목 아래 크게 자리잡은 마르크스의 얼굴이 안쓰러울 뿐입니다.


p.s. 강신준 교수는 '개혁'이란 단어를 쓰기 전 '자본론'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인용하며 '혁명'이 마치 길고 긴 개혁의 과정인 것처럼 설명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죠.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21쪽.

그런데 이 문구는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자본론'을 시리즈로 분책해서 내자는 제안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책(자본론)이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읽어야만 한다는 충고죠. 강신준 교수의 해석은 과도한 것입니다. 맥락에서 떼어내 문구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문과 실천 모두에서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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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enai 2012.09.02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잉여노동이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에게서 강탈되는 그 형태"가 "경제적 사회구성체들의 차이"를 가름한다고 자본론 1권 제9장에서도 나오죠. '착취'라는 게 바로 자본주의가 취하는 강탈의 형태라고 했지요 아마...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니 내가 아는 노예제와 봉건제는 어디로 갔는가...;;

    저같이 뭘 몰라서 헤매는 초보는 머릿속 혼란만 가중될 것 같아서 이제부턴 저 연재물 안 읽으렵니다. 때때로님이 이렇게 설명해주신 거나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역사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안 하니까 아마 안 될 거야...)

    • 때때로 2012.09.02 1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착취를 자본주의에서 취하는 강탈의 형태로 이해하는 게 맞겠네요.

      읽다 보니 너무하더라고요. 아무리 경향신문 독자가 없어도, 최소한 몇 만명은 읽을 텐데 상황이 너무 안타깝게 돌아갑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 매우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는 한에서는 교정을 해놔야 할 것 같아요.

    • 잉여 2012.10.01 2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산과 소비의 일치라는게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신이 생산한 것이 눈에 보여서 생산한 것만큼 소비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교환이라는 매게가 등장함으로써 생산을 어느정도 했는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 생산을 증대시키려는 행위들 때문에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용..

    • 때때로 2012.10.02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잉여//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신이 생산한 것이 눈에 보여서 생산한 것만큼 소비가 가능했지만"이라는 전제가 틀렸죠.

      아마 봉건제에서 수탈이 부역일, 영주 몫의 농지 등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생산한 것 만큼 소비가 가능하진 않았죠. 말 그대로 '수탈'에 의해 자신의 것을 빼앗겼으니까요.

      게다가 노예제에서 노예는 아예 노예주의 생산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들 눈에 자신이 생산한 것들이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노예주의 것일 뿐 자신의 것이 아니었죠.

      이러한 사정을 도외시하고 생산과 소비의 일치 운운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로서 그 소양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2. okcom 2012.09.04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신준 교수가 여기저기의 환대에 취해 자폭을 하는 걸까요. 특히 6번은 많이 위험해 보이네요. 한편으론 앞으로도 흥미진진할 것 같으니 계속 정리해 주십쇼 ^^;;

  3. 윤희형 2012.09.11 0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맙습니다. 그냥 기사가 전부라 생각고 넘어갔다면 큰일날뻔했네요.
    가장 큰 문제는 저자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과 이론을 혼용해서 막써버린다는게 아닌가 싶네요.

    • 때때로 2012.09.11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설서를 쓰면서 저자의 생각과 원저자의 생각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테죠. 그럼에도 좀 심한 것 같더라고요. 참세상에 박찬식씨가 기고한 글도 함께 읽어보세요.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7517

  4. 윤희형 2012.09.12 2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이 심한거 같더군요 ㅎ 씨네21이었나? 거기서 선생님 글에 박찬식님 글 링크되있는거 보고 이미 읽어 봤었습니다.
    경향신문에 9월들어 진중권 교수의 현대미술읽기랑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 상당히 기대했는데,
    기대에 못미치네요.
    앞으로도 경향신문에 강신준 교수의 연재가 계속 될텐데, 가감없이 촌철살인 리뷰 부탁드립니다 ㅎ

    • 때때로 2012.09.1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어떤 곳인지 알겠네요. 저도 보통의 노동자라서 연재 때마다 좇아가긴 힘들 것 같네요.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본문 들어가면 제 지식이 일천해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5. 잉여 2012.10.01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제가 예전에 강의를 들었을 때 자본주의의 개혁은 자본주의 모순이 공황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공황을 규제하기 위한 각종 정책들은 점차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으로 이행하게 한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공황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에 따른 규제와 처방들이 자본주의를 다른 양식으로 바꾸게 한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 때때로 2012.10.02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규제와 처방'으로 자본주의가 다른 생산양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사민주의 정치의 핵심이긴 하죠.

      여기서 강 교수의 문제는 여러가지인데, 우선 그 경제결정론적 서술이 문제가 되고, 다음은 변증법에 대한 몰이해가 문제가 됩니다.

      전자의 문제에서 '충분한 성숙'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따르지 않는 것은 그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후자에서는 보통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라면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합리적 핵심-놀라운 생산력, 불충분 하지만 자유와 개인 개념의 발달,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발견, 민주주의적 의식과 실천의 발전 등, 하지만 자본주의에선 결코 그 이상을 달성할 수 없는 것들-을 보존하고 더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 교수는 '그대로' '존속'한다고 말하고 있죠. 이는 좋게 봐줘도 학자로서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에 대한 숙고를 도외시 한 게으른 표현일 뿐입니다.

  6. 잉여 2012.10.02 18: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수행 교수의 책에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의 혁명과 투쟁보다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에서 존재하며 그것이 결국 자본주의를 바뀌게 한다라라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강교수의 의견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맑스의 자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으나, 강신준교수님의 제자로 수업을 듣고 맑스에 대한 시각이 바뀐 저로써는 님의 비판이 그저 안타깝게만 생각됩니다. 물론 다양한 해석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야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죵

    • 때때로 2012.10.03 0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한 것과 후대의 마르크스의 해석은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은 베른슈타인은 적어도 자신의 주장을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끌어냈죠.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글은 이러한 양심적 태도조차 버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의 혁명과 투쟁보다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에서 존재하며 그것이 자본주의를 바뀌게 한다"는 님의 주장만 놓고 보자면 마르크스가 때론 그런 식으로 서술한 부분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저작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 무엇보다 '계급투쟁'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본론의 핵심 중 하나는 '자본주의 자체 내의 모순'을 계급투쟁의 역학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마르크스가 영국에서의 공장법 제정과 자본의 시초축적 과정, 공장제의 도입 과정을 그토록 길게 서술한 것은 단지 '예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그의 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간의 현실적 행동, 실천에서 동떨어진 관념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p.s. 단지 혁명 또는 개혁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후 진행된 그의 경향신문 연재분을 보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환가치, 사용가치, 가치에 대한 오해는 지금껏 본 그 어떤 경제학 교과서보다 더 심각한 오류를 보여줍니다.

  7. 연풍청년 2013.02.20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가 들으려 들어왔다가 좋은 말글장(blog)을 보게 된거 같네요.. 경향신문은 그냥 찌라시입니다. 헌법을 부정한 무력 반란을 시민혁명으로 포장해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도 한 언론.
    제가 작년에 진보당 창준위에서 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 했던 적이 있었는데.. 대놓고 짜깁기 해서 소설을 썼습니다. 다른 언론들은 그 경향신문의 기사를 인용해서 보도를 솓아냈고 저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정말 그때만 생각하면..

  8. 브루스 2013.03.27 1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판을 잘 읽었습니다. 우선 저는 자본을 읽다를 매우 유용하게 읽고 있는 사람중에 한 사람입니다. 옅은 맑스주의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근데 일반인에게 이런 대중매체를 통해 맑스에 대해 알리는 작업이 매우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귀하의 비판적인 블로그 글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베른슈타인에 대해서는 소련 붕괴 후 새로운 조명이 있어왔고 당시 그가 수정주의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된 건 독일의 사민당의 이론 중심의 흐름을 깨고자 수정주의에 대한 입장을 표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돌아봐야 함에도 이론의 옳고 그름에 너무 치중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지적 말이죠. 몇몇의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술적인 부분보다는 경구나 해석의 잘못에 너무 치중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그 해석이 행동의 바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맑스주의를 알게 한다는 것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와 같은 맑스주의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각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맑스주의자들만의 울타리에서 멤도는 이런 비판이라면 그것이 과연 사회를 변혁하는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일부 맑스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베네수엘라를 추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베네수엘라에 가서 살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대중에게 새로운 깨달음의 불씨를 주는 것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때때로 2013.03.28 0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르크스주의를 떠나 고전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신의 주장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의 뜻과 주장', '현재의 의의'을 밝히는 건 지난하고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죠. 그럼에도 우선해야 할 것은 '자신의 해석'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상의 뿌리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배제하고 해석의 다양함만 주장한다면 고전은 그 의미를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제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가 아닙니다. 강신준 교수가 매우 기초적인 사실들조차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잘못된 사실에 기반한 마르크스의 설명이 마르크스주의의 성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여담으로 말씀하신 베네수엘라 얘기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모르겠네요.


서울 삼성동 전력거래소의 모습. [강윤중 기자/경향신문]


1994년에 비견되는 폭염이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냉방용 전력 사용이 크게 늘면서 대규모 정전 사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죠. 입추가 지나면서 더위도 기세가 꺾였습니다. 일단 정전사태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전력 공급 부족 문제가 큰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전력 위기를 핑계로 8월 6일 고리원전 1호기를 재가동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고리 1호기는 수명이 다하고 고장이 잇따라 안전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지요.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8월 7일자 사설에서 나란히 고리원전 1호기 재가동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 [한겨레 8월 7일자] 고리 1호기, 전력난 구실로 재가동 안 된다(링크)
● [경향 8월 7일자] 고리 1호기 재가동, 국민 신뢰 확보가 먼저다(링크)

두 신문 모두 안전성에 대한 검증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고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고리 1호기의 재가동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전력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도한 전력 사용량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설 모두 정부의 '전력난 구실'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은 없습니다.

한겨레는 우리나라의 "1인당 전력소비 증가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전력 과소비국"임을 지적하며 정부의 에너지 정책 전환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에너지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는 불투명합니다. 전력 과소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애매하게 처리되죠. 문구 그대로 보자면 우리 국민 모두의 책임인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경향의 태도는 안타깝습니다. 경향은 전력 위기가 정점이던 8월 6일자에 '전력 수요 억제 위해 요금 현실화 불가피하다'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 [경향8월 6일자] 전력 수요 억제 위해 요금 현실화 불가피하다(링크)

경향은 이 사설에서 한겨레와 마찬가지로 에너지 정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보다 분명하게 표현된 정책 방향은 제목에서처럼 '요금 현실화'가 핵심입니다.

"일반 국민 중에서도 요금 인상을 반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민과 기업의 부담 증가에도 불구하고 현재 원가의 87%가량에 불과한 전기요금은 단계적으로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 전력 수요 증가세를 그대로 반영해 공급을 늘릴 것이 아니라 수요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전력 낭비와 과소비를 막기 위한 최우선 대책은 요금 현실화다."
- 경향신문 8월 6일자 27면

물론 이런 입장은 중앙일보의 뜬금 없는 '공동체 의식' 운운보다는 낫습니다(8월 7일자 중앙일보 사설 '전력위기 공동체의식으로 극복하자'ㆍ링크). 하지만 경향의 입장은 (한겨레도 마찬가지지만) 중앙일보와 마찬가지로 전력 낭비의 책임을 국민 모두에게 지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금 현실화' 요구는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반발만 살 대안입니다. 월급만 빼고 다 오르는 현실에서 전기요금을 인상하겠다는 것은 끓는 물에 기름을 붓는 격이죠.

전력 과소비의 현실은 어떨까요?

수치만 보면 우리나라가 전력 과소비국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 보입니다. 2009년 기준 우리나라의 1인당 연간 전력소비량은 8092㎾h입니다. 이는 일본 6739㎾h, 독일 5844㎾h, 프랑스 7020㎾h 등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한겨레신문ㆍ경향신문ㆍ중앙일보가 함께 입을 모으듯 국민 모두가 책임지고 전력 소비를 줄이거나, 전기요금을 올려야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많이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8월 8일자 사설에 의하면 1인당 가정용 연간 전력소비량은 1088㎾h로 일본 2189㎾h, 프랑스 2326㎾h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지난해 한국의 전력소비량 가운데 산업용은 55%지만 주택용은 18%밖에 안 됩니다.

조선일보는 8월 8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절전 보조금은 기업들의 방만한 전기 소비 탓에 발생한 전력난을 해결하려고 국민 세금으로 기업들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와 기업은 이 상황을 국민이 언제까지 납득해줄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 조선일보 8월 8일자 35면

위에 제가 인용한 수치들은 모두 이 사설(8월 8일자 조선일보 사설 '기업들이 電氣 더 아끼지 않으면 '전력 위기' 계속된다'ㆍ링크)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조선의 사설은 전력 소비구조와 함께 비정상적인 전기요금 체계의 문제도 짚습니다. 현재 산업용 전기요금은 ㎾h당 97원입니다. 이는 지난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전기생산 원가의 87.5% 수준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산업용 전기요금은 누진제 적용도 받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주택용은 ㎾h당 128원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이라는 가중 누진제를 적용"받고 있습니다. 이는 경향이 생산 원가의 87%라고 애매하게 지적한 낮은 전기요금의 혜택을 국민 모두가 동일하게 받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기업이라고 다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3300V 이상 고압 전기를 공급받는 대기업은 ㎾h당 96.6원의 전기요금을 내지만, 저압을 사용하는 중소기업은 ㎾h당 112.9원을 부담하더군요. 즉 대기업은 가장 많은 전기를 쓰면서도 가장 적은 비용을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너지 과소비의 겉으로 드러난 '현실'만 지적하며 요금 현실화를 요구하는 경향, 모두 함께 아끼며 살자는 중앙보다 조선의 분석이 훨씬 구체적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전기 부족을 이유로 고리원전 1호기를 재가동하고, 추가적인 원전 건설을 추진하는 정부에 대응할 때도 설득력 있는 반대 근거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업들의 이익에 도전하지 못하는 중앙일보야 그렇다 칩니다. 하지만 한겨레와 경향의 사설 수준은 많이 아쉽습니다. 그들이 특히 특권과 부당한 권력 행사에 분노하는 시민들 편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신문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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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칼럼]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링크)
만약 20대라면 실업자일 가능성이 높고, 중년이라 해도 비정규직이기 쉬우며 큰 병에 걸리면 가정이 파탄나고, 늙는 것은 곧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가난한 여자가 구원받는 길은 재벌2세의 여자가 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퍼뜨리는 한 세상은 쉬 변하지 않을 것이다. 먹는 밥의 한 숟가락, 하루 중 단 몇 분, 번 돈과 노동의 일부라도 세상을 바꾸는 데 쓰지 않으면 죽음의 행진을 막을 수 없다. 내가 돈과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못한다. 내가 그렇게 못할 사정이 있다면, 다른 사람도 사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그래도 하지 않겠다면 죽음의 공포가 연탄가스처럼 스며드는 이 조용한 사회에서 당신은 죽을 각오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당신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기름값이 오릅니다. 우유값이 오릅니다. 수입 밀 가격도 급등하고 있습니다. 빵값도 곧 오르겠죠. 고기값도 오르죠. 모든 것이 오르는데 제 월급만 안 오릅니다. 잘리지만 않아도 다행이죠. 쌀값이나마 안 올라준다면 고맙겠습니다.

긴 얘기를 덧붙일 필요가 없는 칼럼입니다. 저라면 제목을 이렇게 달았겠습니다.

"당신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p.s. 한국사회포럼이 오늘(17일)부터 토요일까지 서강대학교 다산관에서 열립니다. 개막토론 주제는 '한반도 긴장, 진보적 관점과 대응'입니다. 이 토론에는 김하영(다함께), 박경순(민주노동당), 이대근(경향신문), 정욱식(평화네트워크)이 참여합니다. 이 밖에도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가 두루 포함돼 있습니다. △삼성의 지배구조와 무노조 경영 △공정하고 효과적인 온실가스 감축방안을 위한 모색 △간접고용, 대안과 해결 방향이 기획토론회 주제로 잡혀 있습니다. 진보진영의 재편도 토론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토요일(19일) 오후 3시30분부터 시작되는 폐막대토론회에는 김장민(민주노동당), 박용진(진보신당), 신석준(사회당)이 발표자로 나서서 진보정치의 재구성을 주제로 토론합니다. 박용진은 진보신당에서 통합파에 가까운 사람인데 발표자로 나섰다니 좀 의외입니다. 결국 중앙당은 통합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 싶어요(이게 제 기우이기만을 바라지만).

오늘 내일은 평일이라 힘들지만 토요일엔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사회운동과 비전 2012 '한국사회포럼 2011'(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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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23. 16:18

진보ㆍ개혁세력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2009. 11. 23. 16:18

<2007년 3월 6일 DVDPrime '시사게시판'에 작성>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 진보ㆍ개혁의 위기를 말하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후마니타스


진보ㆍ개혁세력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0. 최근 '진보논쟁'이 언론과 각종 게시판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최장집 교수의 한겨레 신문 인터뷰가 계기가 됐긴 했지만 그 본격적인 서막을 알린 것은 경향신문에서 2006년 9월 14일부터 12월 26일까지 연재된 '진보개혁의 위기-길 잃은 한국' 연재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연재기사가 최근 후마니타스(최장집 교수의 여러 저서를 펴낸 출판사)에서 묶여져 나왔습니다.

1. 학계와 좌파 내에서 노무현 정권의 성격에 대한 논쟁은 정권의 출범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처음에는 환경 문제들로부터 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뒤를 이어 노동ㆍ평화ㆍ대미관계에서 비판적 입장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죠. 이 논의들이 의미가 없진 않았지만 여전히 학술적이거나 운동권 특유의 추상적 언어로 보통 사람들이 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물론 좌파 학계에 대한 언론의 무관심도 한 몫 했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의미가 없진 않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높은 추상 수준에서 진행되던가 인상 비평이 주도하고 있죠.

오늘 소개하는 이 책은 저널리스트들이 주도해서 기획하고 쓴 글들로 그 간의 추상적 논의를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충실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학술적으로 엄밀한 이론 체계를 가지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언론 특유의 구체적 접근은 진보의 문제에 대해 매우 생생한 언어로 읽혀지게 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현실을 다양한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로 드러낸 글은 매우 어려운 내용들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 이 책은 좌파와 '민주세력'에게 그 칼을 향하고 있습니다. 흔히 얘기되는 진보ㆍ개혁 세력에게 말입니다. 그 첫 대상은 당연히도 노무현 정부입니다. 최근의 논쟁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연재 중 청와대의 정면 반박(12월 6일자에 대한 반박)이 있었고 그에 경향신문 정치부는 지면의 한 면을 통째로 재반박에 할애했습니다.(12월 7일자 5면)

비판의 대상은 좌파 내부로도 향하고 그 비판은 더욱 뼈아프게 다가오곤 합니다. 민주노총, 전교조, 민주노동당, 시민단체에 대한 비판들은 눈을 감아버리고 싶게까지도 합니다.

이 책이 한나라당과 우파들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뭐라 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이 책은 이 사회의 진보와 발전은 진보ㆍ개혁세력의 임무라고 봅니다. 최근 보수 세력의 부활에 대한 장도 있지만 주된 서술 목표는 이른바 젊은 층의 '보수화'와 사회적으로 보수 이데올로기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의 해명에 있습니다.

3.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자 아쉬운 부분은 '진보의 10대 의제'를 제시한 4부에 있습니다. 조세 개혁, 부동산, 교육 정상화, 재벌 개혁, 고령화ㆍ저출산, 소외된 소수(이주노동자와 장애인), 건강 불평등, 생태주의, 빈곤 문제 해소, 비정규직 10가지의 현실을 구체적 자료와 목소리로 제시합니다. 물론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의제들에 대한 좌파와 진보의 구체적 접근이 부족했던 현실(특히 조세와 고령화, 저출산, 부동산 문제)에 비추어 봤을 때 말 그대로 과제의 제출이라는 측면에서 훌륭합니다. 그 간극을 체우는 것은 진보세력의 임무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진보 세력에게 희망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겠지요.

아쉬운 것은 평화와 대미ㆍ대북관계에 대한 의제가 제출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더 이상 동방의 이름 없는 소국이 아닙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입니다. 또한 이라크에는 미국ㆍ영국에 이어 세번째 규모의 군대를 파병해 놓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도 우리 군대가 가 있죠. 레바논에도 곧 파병될 예정입니다. 세계의 주요 분쟁 지역에 우리 군대가 개입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국제 분쟁에서 제 3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로 몇일 전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 젊은이가 목숨을 달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크게 보도가 되진 않았지만 미군 소속의 한국계 군인의 사망도 두 건이나 있었죠. 아프가니스탄ㆍ이라크 침략의 명분이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단지 미국의 패권적 군사전략의 산물인 것이죠. 이 전쟁에 주요 동맹국으로 한국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미ㆍ대북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선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에 연재된 기사를 엮은 것이기에 증보판이 나올지 의문이긴 하지만 이후 증보된다고 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보충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는 진보가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가? 저는 절반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기사화가 됐었지만 한나라당 보좌관 중 민주노동당 당원이 다수 있었습니다. 보도 전에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요. 한나라당 의원은 유능하기에 고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진정한 무능은 다양한 대안과 프로그램들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힘을 못 만들어낸다는 것이겠지요.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해 보입니다. 노무현이 진보입장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기존 체제의 헤게모니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데 있었죠.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이 주목받는 것은 그들이 똑똑하거나 훌륭한 프로그램, 대안을 제시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는데 있는 것이죠.

5. 이 책은 '진보논쟁'을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안을 제시하고 현실화 시킬 방법을 만들어내는 임무는 진보 세력에게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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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5. 11:52

[경향신문] 용산 테러리스트 언론스크랩2009. 2. 5. 11:52

[경향신문] 용산 테러리스트|이대근 칼럼(클릭하면 경향신문 '이대근 칼럼'으로 이동합니다.)

어렸을 땐 신문의 오피니언 면을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회면은 건성으로 읽더라도 오피니언 면은 꼼꼼하게 읽으려 노력하고 있죠.

지난 후에라도 찾아보는 칼럼 몇몇이 있습니다. 경향신문 이대근 칼럼이 그 대표죠. 오늘 실린 칼럼의 제목은 '용산 테러리스트'입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조언'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아니, 사실은 필요 없는게 아니라 '소용'이 없는 것이겠죠. 이 대통령의 마이동풍 속도전,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조차 표현치 않는 후안무치를 보며 그가 "이명박의 말대로 조언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고 적을 때 가졌을 씁쓸한 심정에 공감하게 됩니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군주가 현명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은 군주가 정말 현명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조언자들 덕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견해이다. 군주의 지혜가 좋은 조언을 낳는 것이지, 좋은 조언이 군주의 지혜를 낳을 수는 없다.’ 이명박의 말대로 조언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사회적 현실을 적절히 표현해 줄 지언정 진실을 설명해주는 말은 못됩니다. 재벌 회장들이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아 죄를 '용서'받을 때 '밥벌이'를 지키기 위해 망루로 올라간 철거민들은 '법치'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 벌을 받고 격리되어야만 하는게 현실입니다. 사회를 운영하는 최소한의 규칙, 법이 공정성을 잃었을 때 민주주의적 대통령 선거는 5년에 한 번 '독재자'를 뽑는 선거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큰 죄를 진 재벌총수를 죄다 용서함으로써 법이 정의와는 무관한 기득권 보호 장치임을 전 국민에게 학습시켰을 때 법질서는 이미 무너졌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철거민들은 벌써 법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고, 한 명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테러리스트였다는 선전으로는 무너진 법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법의 정신이 이 정권에 의해 너무 많이 훼손되었다. 어쩔 텐가. 이제는 국가의 이름으로,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다. 국가와 시민의 사회계약은 거의 깨졌다."

깨어진 사회계약. 결국 우리는 이 야만에 길들여져야 하든가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해 나서야 할 때가 온 것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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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23. 16:17

[경향신문] 'MB 법안'이 통과되면… 언론스크랩2008. 12. 23. 16:17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방학때면 반공도서 독후감 쓰기 숙제가 있었죠. 반공 웅변대회, 반공 포스터 그리기 등 다양한 게 있지만 그때도 워낙 책을 좋아했던 지라 가장 기억에 남는건 반공도서 독후감 쓰기였습니다. 그때 그 책들엔 '천리마 운동' '새벽별 보기 운동' 등 이북에서 이뤄지던 다양한 대중 동원 운동이 쓰여 있었죠.

요새 뉴스를 보면 꼭 그 당시의 '반공 도서'를 보는 느낌입니다. '속도전'이라니. 요새 뉴스에 나오는 2MB가 가장 자주 쓰는 말이 '속도'더군요. 우파 헤게모니의 완성을 위한 저들의 '속도전'을 보고 있노라면 상대적으로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의 느린 행보에 갑갑해져 옴을 느낍니다. 2MB는 최근의 환율 안정세를 보며 자신감을 가진 것 같더군요. 이른바 'MB 법안'들을 국회에서 강행 처리하려는 듯 합니다. 사실 한나라당이 이미 국회 내 최대 다수당이고 여타 보수 정당들까지 포함하자면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후퇴' 시키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진 않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1997년의 1월을 되돌아 봅니다. 우리는 그때처럼 할 수 있을까? 멀리 갈 필요도 없죠. 2008년의 6월을 되돌아 봅니다. 우린 다시 그 거리에 모일 수 있을까? 알 수 없습니다.

어제(22일)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그렇지않아도 이번에 한나라당이 강행 처리 하려는 'MB 법안'들에 대해 정리해봐야 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형식은 '가상 시나리오'지만 잘 정리된 듯 해 링크해봅니다. 아무래도 가상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과장은 있지만 그게 영 '과장'만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일이죠. 'MB 법안'은 이미 저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사후 정당화' 시키려는 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마스크 시위' 긴급체포 … 느닷없이 '범법자'로

지주회사 전환, 금융그룹 출범, 거대재벌 탄생

은행인수 컨소시엄 참여했다 '파산 위기'

(※클릭하시면 경향신문의 해당 기사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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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20. 10:29

촛불 그 65일의 기록|경향닷컴 촛불팀 2008. 8. 20. 10:29

경향신문에서 5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65일간의 촛불시위의 기록을 담은 책을 내놨습니다.

촛불 그 65일의 기록  경향닷컴 촛불팀|경향신문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촛불시위는 그 후 8월 15일까지 100일 간 타올랐죠. 16일에도 여전히 촛불을 드신 분들도 계시고 강남에서는 어제도 여전히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이 책의 첫 번째 한계는 7월 5일 이후의 상황을 담지 못했다는 겁니다. 물론 책의 제작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기도 했을 겁니다. 촛불이 다 꺼지길 기다려야 한다면 2MB가 물러날 때까지 미뤄야 했을지도 모르죠.

두 번째 한계는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들로만 책을 만들었다는 점이죠. 물론 아고라의 몇몇 글들도 인용되긴 했지만 큰 분량은 아닙니다. 즉 이 책은 촛불이 타오르는 와중에 신문 지면을 벗어나서 진행된 다양한 토론과 논쟁을 온전히 담지 못했다는 거죠. 아고라 뿐만 아니라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토론과 논쟁을 이끌었던 MBC 100분 토론을 비롯해서 의제의 확장을 둘러싼 이견, 가두 진출을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들이 그 외관만 어렴풋이 비춰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개인이 땀흘려가며 가위로 오리고, 검색을 통해 펌질 해야만 했던 기사들을 한 번에 모아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당장에 100여일 간의 촛불시위에 대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평가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그 생생한 기록, 목소리들일 것입니다. '촛불 그 65일의 기록'이 현재의 역사를 기록하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 무엇보다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촛불에 대한 책이 몇 권 나왔지만 '기록'이란 측면에선 이 책이 첫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목소리들이 공식적 기록으로 출간되길 바랍니다.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정보가 쌓이는 인터넷에서 기록은 쉽게 잊혀지기도 합니다. 지금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이 잊혀질 정보들을 모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곧 뜨겁게 타오를 촛불을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일은 우리가 어떻게 촛불을 밝히고 넓혀왔는지, 저들의 대응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사실'의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숨 고르는 국면. 육체적 휴식과 함께 얇은 이 책으로 우리의 걸음걸음을 다시 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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