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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온 한 랍비의 편지, 가자의 비극 '나크바'를 기억하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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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온 한 랍비의 편지, 가자의 비극 '나크바'를 기억하라

때때로 2023. 10. 20. 01:56

창세기 제4장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나?"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2023년 10월 10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무너진 가자지구. 게티이미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둘러싼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맞다 혼란이다.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1948년 '나크바(대재앙)' 이래로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2023년 10월 7일 시작된 하마스의 반격이 아무 일도 없이 평화스러웠던 이 지역에 재앙을 불러온양 그려지고 있다. 물론 잔혹한 비극의 폭풍은 평범한 이스라엘 시민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선한 마음으로 평화를 바라는 많은 이들은 양측에서 희생자가 발생한(사실 지난 75년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자신과 가족들의 평화를 바라는 평범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용기있는 유대인들은 이 사건의 진실에, 뿌리에 다가가길 주저하지 않고 있다. 한 유대인 랍비의 글을 옮긴다. 글쓴이는 미국 시카고 체데크 유대교 회당의 랍비이자 '평화를 위한 유대인의 목소리' 랍비위원회 설립자다.

※Deepl.com을 이용해 초역한 후 다듬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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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미국 유대인들은 미국이 후원하는 대량학살에 반대한다

브랜트 로젠|TRUTHOUT|2023년 10월 13일|링크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시카고 유대교 회당의 랍비로서 지금 나는 주체 못할 감정과 긴장에 가득찬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복수를 외치는 이스라엘 정부ㆍ언론의 목소리를 듣고, 가자지구 주민을 향한 이스라엘의 참혹한 군사적 대응을 지켜보면서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스라엘은 전기와 수도를 차단한 채, 병원ㆍ학교ㆍ모스크ㆍ시장ㆍ아파트 등을 공격해 20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는 비좁은 구역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1500명 이상이 죽고 5600명이 부상당했다. 3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잃었으며 이 숫자들은 시간이 흐르며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스라엘의 가자에 대한 참혹한 공격은 끔찍한 수준으로 강화되고 있다. 언론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북부 경계선에 병력을 집중한 채 110만명의 팔레스타인인에게 떠나라고 요구하고 있다. 유엔은 "파괴적인 인도주의적 참사"를 경고하며 이스라엘에 그 요구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며칠 동안 가자지구 친구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완전히 파괴된 동네와 마을의 모습들을 그곳의 주민처럼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미국 퀘이커 봉사 위원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에서 활동하는 예전 동료이자 친구는 최근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전기ㆍ수도ㆍ인터넷이 끊긴지 80시간이 넘었다. 가자지구 안이든 밖이든 소식을 주고받기가 매우 어렵다. 대학살의 그림자로 가득차 막막한 이곳에서 우리는 그저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다.

한편 아직 행방이 확인되지 않았거나 목숨을 잃은 이스라엘인을 지인으로 둔 이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와 사진들도 소셜미디어에 가득하다. 유대인 공동체의 많은 이들처럼 나 또한 이 소식들을 마주하고 있다.

하마스의 공격이 시작된 지난 토요일(2023년 10월 7일) 이후 최소 1200명의 이스라엘인이 목숨을 잃고 150여명이 납치돼 가자지구에 억류돼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과 전 세계의 많은 유대인들은 죽거나 부상당한, 또는 납치된 이들의 지인이거나 혹은 그 지인과 친분이 있는 이들이다.

우리 회당은 명백히 반시오니즘을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의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라거나 민간인 살해ㆍ납치를 묵인하라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의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에 사는 대가족 또는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다소 불편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반점령 운동을 펼치고 있는 활동가들과 적극 협력하고 있기도 하다.

나처럼 시온주의와 점령에 반대하는 미국 전역의 유대인들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알게 된 더 많은 이들이 처한 상황에 우려하고 함께 슬퍼하는 진실한 감정과 이스라엘 역사상 하루 새 일어난 가장 큰 학살에 대한 공포 속에서도, 가자지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건을 식민지 점령 하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무장저항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우리 회당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이 혼란과 모순 속에서 층층이 쌓인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유대인들에게서 이러한 혼란과 모순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고 썼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끔찍한 폭력의 근본적인 맥락을 밝혀야만 한다고 나는 이어 썼다. 나는 이러한 신념을 단호히 지켜내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설명 가능할뿐 아니라 필연적이었던 이 사건의 진실을 큰 목소리로 알려낼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인과 지지자들은 오래 전부터 경고해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잔혹하고 폭력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로 내몰고 있음에도 그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있으며,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스라엘의 무책임한 행동에 이어 격렬한 폭력사태가 필연적으로 뒤따를 것이라고도 수없이 경고했다. 팔레스타인 역사가인 라시드 할리디는 최근 "한 민족 전체가 마치 압력밥솥에 갇힌 것처럼 가늠할 수 없는 억압을 받아왔다. 결국 폭발하고 말 것이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최근 폭력사태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파악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고려하면 최근 며칠간의 언론 분석은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전문가들은 현재의 폭력사태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거래 또는 네타냐후 정권의 극우적 정책에서 비롯했다고 판단한다. 이 중 어느 것이 최근 사건의 도화선이 됐을 지 모르겠지만, 이번 폭력사태와 관련해 '나크바(대재앙)'를 언급한 분석은 거의 없었다. 이는 놀랍지는 않더라도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분명 나크바는 1948년부터 오늘날까지 강(요르단강)과 바다(지중해) 사이의 모든 곳을 휩쓴 폭력과 파괴 행동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75년간 유대인이 지배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팔레스타인인을 폭력적으로 내쫓아왔다. 마찬가지로 75년간 팔레스타인 인민은 추방에 맞서 저항해 왔다. 때론 폭력을 불사한 저항도 포함해서 말이다.

최근의 폭력사태가 가자지구와 그 인근에서 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많은 논평가들이 지적했듯이 가자는 여러 면에서 나크바와 이에 맞선 팔레스타인 인민 저항의 진앙이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자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봉쇄나 하마스의 정치적 부상과 함께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자지구'라고 부르는 곳은 해안 평야와 갈릴리 하류의 도시와 마을에서 인종청소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이 모여들며 1949년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나크바 이전 이 작은 지역 인구는 6만~8만명에 불과했다. 대재앙이 끝날 무렵엔 20만명이 넘는 난민이 140제곱마일에 불과한 비좁은 지역에 몰려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난민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중 일부는 철조망 너머 눈에 보이는 동네와 마을에서 떠나온 이들이었다. 놓고 온 재산을 챙기기 위해, 또는 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가는 이스라엘에 의해 '침입자'로 간주돼 발견 즉시 총살됐다. 해가 지나면서 텐트는 콘크리트건물이 됐고 비좁은 회랑지역엔 고층건물이 가득 들어섰다. 이 지역에 희박했던 인구는 차츰 늘어나 오늘날 200만명을 넘어섰다. 그중 70%는 난민이다.

이스라엘 건국 후 가자 경계에 세워진 초기 정착촌과 키부츠는 대부분 군사 전초기지였다. 그 대부분은 파괴된 팔레스타인 마을의 잔해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난 토요일 학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크파르 아자' '레임' '스데롯' 키부츠 등은 이스라엘의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이 지역에 세워진 초기 정착촌들이다.

그중 한 곳인 '나할 오즈' 키부츠에선 목격자들에 따르면 수십명의 하마스 전사들이 침입해 최소 두 가족을 살해하고 두 명 이상을 납치해 가자 지구로 끌고갔다고 한다. 나할 오즈의 학살 소식을 들었을 때 이곳에서의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56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는 이곳을 침입해 키부츠 주민인 로이 로트베르크를 살해했다. 당시 이 비극은 건국 초기 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시 로이의 장례식에서 유명한 이스라엘 장군 모세 다얀은 추도사를 통해 잔혹한 자신의 계획을 뜻밖에도 솔직하게 밝혔다.

오늘 우리는 저 살인자들의 범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저들이 우리를 증오한다고 해서 우리가 슬퍼하고 있어야만 합니까. 가자 난민캠프의 저들은 지난 8년 동안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과 조상들이 살아왔던 땅과 마을을 나눠 가진 우리를 말입니다. …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말살하겠다는 저들의 희망을 없애려면,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무장하고 준비해야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정착 세대는 철모와 대표 없이는 나무를 키우고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대피소가 없인 아이들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철조망과 기관총 없인 도로를 닦거나 수로를 낼 수도 없습니다. 땅이 없어 (유럽에서) 학살당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옛 잔해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령합니다. 우리 민족을 위한 땅을 되찾고 건설하라고.

다얀의 말은 저주가 돼 오늘날에도 울려퍼지고 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자지구의 캠프에는 초기 난민의 후손들이 "그들과 조상들이 살아왔던 땅과 마을을 나눠 가진 우리를 철망 넘어 지켜보고 있다". 다얀의 추도사는 수십 년 동안 더 깊어지기만 한 과민한 불안 또한 잘 보여주고 있다. 나크바로부터 시작해 팔레스타인인을 고향에서 남김없이 내쫓으려는 인종청소는 가능하지도 않고 결과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이후 75년 동안 이스라엘은 '철모와 대포' 등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기술을 이용해 그들을 통제하려 했다. 그 기간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하기 위해 폭력적 체제를 유지해왔다. 팔레스타인인은 일상의 매순간 조직적이고 끊임없는 국가폭력에 시달려 왔다.

다얀은 또 추도사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투라우마가 그의 세대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히려 이 트라우마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최근 폭력사태를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유대인 학살'이라고 받아들이는 데서도 세대를 이어온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나라에서 다시 한 번 이러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극우 정부가 복수심에 들끓는 분노를 자극하기 위해 염치없이 학살을 언급하며 팔레스타인을 악마화하는,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이용하는 방식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요아프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최근 "이스라엘은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과 싸우고 있다"며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네타냐후는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그들에게 여러 세대에 걸쳐 잊지 못할 충격을 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스라엘의 한 유명한 장군도 "지억문을 열 것"이라고 공언했다.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이스라엘 의회의 한 의원은 "1948년의 나크바를 잊게 할 정도의 두 번째 나크바"를 촉구했다는 점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를 무자비하게 포격하고 있고 이건 무척 끔찍한 만행이다.

유대인 공동체가 현재 심각한 도덕적 도전에 직면해있다고 말하는 것이 과언은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현재 자행하고 있는 대량 학살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에 항의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 유대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인민에 자행하고 있는 엄청난 범죄행위에 침묵하는 사람들은 이 끔찍한 유혈사태의 공모자와 다를 바 없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이번 주에 읽은 토라
(구약성서의 첫 다섯편으로 흔히 모세오경이라고 부른다)의 유명한 이야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인류의 역사에서 첫 번째로 기록된 이 폭력이 발생했을 때 신은 카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이 저주받았다."(창세기 제4장 10~11절, 가톨릭성경, 세번째 문장에서 생략된 성경구절을 더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구절은 유혈사태가 이 땅을 황폐화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한다. 토라의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피를 본 후에는 그 어떤 것도 이전과 같을 수 없고 정상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창세기의 이어지는 구절은 이렇다. 창세기 제4장 12절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저주 풀려면 매우 복잡하면서도 명백한 희생제의를 통해 속죄해야만 한다. 오늘날로 치면 배상, 복구, 귀환 허용 같은 것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와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를 통해서만 현재의 희생에 대해 진정으로 속죄할 수 있다.

나는 토라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크바의 공포스러운 나날에 흘린 피가 이스라엘 땅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피가 애끊는 아우성이 되어 흐느끼고 있고, 우리가 귀를 기울인다면 이 집단적 외침을 듣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와 저들" 사이의 구분을 고집한다면 그 외침은 결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이들보다 더 붉고 더 고귀한 피를 지니고 있진 않다. 사실 이번에 읽은 토라 구절엔 '편'이라는 그 어떤 말도 없다. 민족도, 이스라엘 사람도, 가나안 사람도, 아말렉 사람도, 모압 사람도도 없다. 때론 가혹하고 때론 냉혹한 세상에서 함께 살기 위해 애쓰는 오직 하나의 평범한 인간만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고 어렵겠지만 이 땅에서 오랫동안 울려퍼져온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해와 연민, 행동으로 응답하자. 끔찍한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이 폭력의 근원을 흔들림 없이 직시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을 위해 정의 평등에 기반한 희망찬 미래를 밝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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