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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4 02:41

브렉시트가 보여준 것 쟁점/세계경제위기2016.07.04 02:41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만국의 민주주의당들의 연결과 합의를 이루는 것에 열중한다. ……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족쇄 말고는 공산주의혁명에서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공산주의 선언',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54쪽

'공산주의 선언'의 마지막 구절이다. 자본주의 세계의 혁명적 전복을 꿈꾸며 실천하는 이에게 이 구절은 잊을 수 없는 경구다. 그러나 한동안 이 구절은 명분일 뿐 실질적 행동지침이 되지 못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로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폐해가 너무나 극명해졌을 때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마르크스주의적 좌파의 행동 지침이 됐다.

'세계화 반대'. 이 구호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생산물의 판로를 끈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전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둥지를 틀어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접속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을 우려먹음으로써 만국의 생산과 소비가 범세계적인 꼴을 갖추게 했다. 반동배에게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밑에서 그 일국적 기반을 빼내가 버렸다. 태고의 일국적 산업들은 절멸되었고 또 나날이 절멸돼 가고 있다."
- 앞의 책, 12~13쪽

자본주의 세계에서 시장의 세계화는 당연한 일이다. 노동계급의 반란과 새로운 세계의 건설은 이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선 당연히 '세계화 반대'는 19세기 러다이트(기계 파괴 운동)와 같이 퇴행적 운동 취급 받았다. 어떤 이들은 이들을 '대안 세계화'라는 구호로 감싸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배경엔 자본주의적 발전이 노동계급에게 가져온 퇴행과 후퇴가 있었다. 일부 극우파의 퇴행적 반발이 이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음에도 반세계화 운동이 21세기 초 반자본주의 운동의 부활에 큰 기여를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운동은 2005년 프랑스에서 유럽헌법 반대 투쟁에서 절정을 맞았다. 신자유주의적, 즉 자본주의적 유럽연합이 노동계급이 원한 '국제주의'는 아니었던 것이다.

10여 년이 흐른 후 다시 영국에선 유럽연합 잔류를 둔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Brexit, 유럽연합 탈퇴)' 진영이 승리를 했다. 10여 년 전 처럼 이 운동엔 퇴행적 민족주의 우파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얼핏 보면 이는 난민의 이주를 반대하는, 파시스트의 광신적 민족주의의 승리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유럽연합에 잔류했다면 이들 난민들의 처지는 더 나아졌을까. 유럽 전역을 휩쓰는 인종주의는 약화됐을까. 오히려 이 인종주의,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고무한 건 유럽연합과 이를 지지하는 각국 정부,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적 중도파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영국에서 유럽연합 잔류를 두고 한 국민투표의 결과를 극우파의 승리로 쥐어주는 건 정말 누구인가. 오히려 극우파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는 건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유럽연합에 대한 타협적 태도 아닌가.

아래는 'ROAR Mag'의 제롬 로스가 쓴 글이다. 그는 이번 국민투표가 실제로는 유럽연합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가 '신자유주의 중도파'(블레어의 추종자들을 포함한)라고 부른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박이었고 그들의 도박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삶을 파괴당한 '평범한 노동계급'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세계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더 많은 토론을 바라며 아래 글을 옮긴다.

※ 상당히 많은 오역이 포함돼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지적해주시면 즉각 반영하겠습니다.
따라서 인용하시려면 아래 링크로 직접 찾아가 원문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브렉시트의 증언: 신자유주의 중도파는 이제 끝났다
Jerome Roos, June 29, 2016ㆍ링크

영국은 광범위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영국은 정당성 위기의 폭풍우 가운데 서게 됐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사임했고 여야는 분노한 군중 사이에서 내부 권력투쟁에 빠져들었다.

브렉시트 캠페인 지도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어떤 명확한 계획도 없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금융분야의 후폭풍은 계속해서 시티
[금융가가 밀집한 런던의 중심부]를 뒤흔들고 있다. 오늘[6월 29일]까지 파운드화는 1985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가치가 떨어졌고 정부의 신용등급은 2단계나 강등됐다. 세계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어 금요일과 월요일 주식시장에서는 각각 3조 달러가 증발했다. 더 나빠질 것이 없을 정도로 최근 영국 전역에서 증오범죄가 유행처럼 번져나간다는 보도를 보아 왔다.

[브렉시트 후 언론의] 헤드라인을 살펴보면, 포스트모던 시대를 관통하며 묵시록처럼, 하지만 은밀히 삶을 잠식해온 충격적 경험은 손쉽게 잊혀지곤 한다. 금융 언론은 세계시장이 받고 있는 충격에 대해 분 단위의 보도를 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자유주의적 칼럼니스트들은 이번 사태를 영국과 유럽이 2차 세계대전 후 겪는 '최악의 위기'라고 반복해서 선언하고 있고 뉴욕타임스는 이미 브렉시트를 세계질서가 붕괴하는 명백한 징후로 취급하고 있다.

그 중 최고는 토니 블레어가 지난 주말
[뉴욕타임스의] 같은 지면에서 예이츠의 '핏빛 어두운 조수'처럼 '말도 안되는 아나키즘'이 세계에 다시 한 번 풀려난다면 "중도파가 [상황을] 이끌어야 한다"며 세계화와 그의 실패한 제3의 길을 방어하기 위한 간절한 호소를 펼쳐놓은 것이다.

이 모든 소동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하다. 영국의 유럽연합 회원 자격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친 캐머런의 위험한 도박이 비참한 역풍을 맞은 것이다. 브렉시트 진영의 기대치 않았던 승리는 그들 중심부의 영국해협 양편의 좌우로 나뉜, 또 그 사이의 다리를 불태워버린 양 동맹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의 역사적 성격을 더는 부정할 수 없다. 세계는 지난 목요일
[2016년 6월 23일] 이후 새로운 자리에 서게 됐고 유럽과 영국이 미지의 영역에 들어섰음은 분명해졌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숨겨져 있는 진실은 금융에 미친 악영향과 최근의 정치적 혼란이 유럽에서 영국의 지위보다는 해협 양안의 광범위한 정치 엘리트, 보다 일반적으로는 유럽적 시민들과 더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물론 인종주의와 반이민자 정서는 브렉시트 캠페인이 시작될 때 중심 역할을 했지만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영국인의 52%가 파시즘에 기울어져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삶의 수준이 후퇴하며 그들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와중에도 그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을 찾을 수 없었고 책임지지 않는 기술관료들이 그들의 삶을 '통제'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브렉시트는 우선 그 무엇보다도 쫓겨나고 힘을 잃은 이들의 정치적 선언이다.

이 선언이 그토록 강렬한 이유는 많은 수의 매우 불안정한 사회적ㆍ정치적 단층선들, 브렉시트 이전부터 흔들리고 있었으며 브렉시트가 없었더라도 동요하고 있던, 브렉시트 이후에도 계속해서 오랫동안 덜컥거리고 요동할 단층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국민투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잔류가 승리했다고 장기적으로 매우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긴 정말 어렵다. 잔류 진영의 승리가 불만들 중 그 어떤 것이라도 진정시키고 사회적 긴장을 해소하며 국민투표의 충격적 결과의 배후에 놓인 정치적 갈등의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브렉시트가 영국독립당(UKIP)과 보수당 우파의 광신도들에게 승리를 부여한 것이 명백해 보이더라도 잔류 진영의 승리는 바로, 무엇보다도
[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사람들이 광신도들과 같은 편에 서게 만든, 피학적이며 민주주의에 반하는 신자유주의의 지속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극우의 광적인 민족주의와 친유럽연합 진영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대립하는 양극으로 더 이상 보아선 안 된다. 실제로 전자는 후자의 논리적 결과다. 이 둘은 살과 피를 공유한 샴 쌍둥이다. 친유럽연합 진영이 투표자들에게 제안할 수 있었던 건 이들을 브렉시트로 이끌, 그 결과 나올 것들에 대한 광신적 공포를 조성하는 것과 같은 구조적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일 뿐이다.

결국 영국인들이 실제로 현실이 되건 안되건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증은 없었다) 유럽연합을 떠나는 데 표를 던진 건 더 깊고 심각한 위기의 징후다. 최근 몇 년간 세계금융위기로부터 정치기구의 심각한 정당성 위기로 발전해온 민주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이제 사회적ㆍ정치적 질서의 통치성 위기로 전화해 폭발하고 있다. 영국과 유럽의 정치에 열려진 현재의 단층선들은 결국 이 국민투표 결과와 상관 없이 대륙의 전후 질서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있다. 브렉시트는 단지 정치적 해체의 과정에 속도를 더한 것 뿐이다.

보통 사람들이 유럽연합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 묻기 위해 데이비드 캐머런이 국민투표를 요청한 게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해 알렉시스 치프라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당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 위험한 도박에 자포자기식으로 국민투표에 판돈을 건 것이다. 보수당의 유로회의론 우파를 침묵시키고 그의 지도력에 거듭해서 도전하는 의원들을 무장해제시켜 미래 UKIP로의 이탈을 예방하기 위해서 말이다. 즉 이번 투표는 정말로 유럽연합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기에 처한 유럽의 신자유주의 중도파가 자신의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 중 하나일 뿐이다. 이는 영국의 토지귀족과 도시 부르주아지의 기반을 다시 탄탄히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되살아난 반동적 우파에 직면해 급격히 붕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제레미 코빈에 맞서 진행되는
[노동당 내] 쿠데타도 유럽과 약간의 연관을 지닐 뿐이다. 6월 13일 텔레그래프 보도에 의하면 노동당 하원의원들과 당내 블레어파는 몇 달 전은 아니겠지만 몇 주 전부터 국민투표 후 그 결과와 상관없이 '24시간 공세'를 통해 당 내 좌파 지도자인 코빈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반란을 계획해 왔다. 다시 말하자면 유럽연합과 관계 없이 말이다. 이는 흔들리는 신자유주의 중도파의 무능한 시종들, 즉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와 금융화, 국제적 군사 개입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은 당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기 위해 일을 벌렸지만 현재는 반발하는 '강경' 좌파에 직면해 급격히 붕괴, 또는 스스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따라서 블레어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예이츠의 종말론적 표현을 차용한 것은 정말 꼴사나운 짓이다. "사물은 흩어져 나가고 중심은 흔들린다."
[원문은 인용 표시 없음. 예이츠의 '재림ㆍThe Second Coming'] 이것이 문제의 요점이며, 이로부터 중도적 정부기구의 병적인 종말론적 담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세계화 된 후기민주주의적 공상적 세계는 바로 눈 앞에서 위기에 처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수동적 투표자이자 소비자들이, 긴축과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인해 뿌리내린, 결국 손상된 정치적 위기이자 향연으로서 선거의 결과들에 기반해 번창한 여러 '분노한 포퓰리스트'들에게 갑작스럽게 집어삼켜져 동원됐기 때문이다.

분명 지배적인 정치질서의 계속되는 붕괴에 대한 대응이 더 이상 같을 수는 없다. "중도파가
[상황을] 이끌어야 한다"는 블레어의 가망없는 외침에 맞서, 또 그의 의회 내 신자유주의적 시종들의 얄팍한 음모에 맞서, 그리고 이 모든 변절자들에 맞서 현재 제레미 코빈이 선 최후의 보루에 함께한,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이 순간에 극우파에 맞선 선거의 평형추에 자리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세력인 노동당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좌파는 굳게 뭉쳐 외쳐야 한다. 중도파는 실패했다고.

무엇보다 인종주의자와 반동들이 선거결과의 공백을 차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약해지고 분열한 좌파가 눈 앞의 역사적 전투를 목전에 두고 함께 행동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절망한 것과 달리 이는 현재 매우 간단한 선택이다. 코빈이냐 아니냐. 전투 태세를 갖춘 노동당 지도자가 독립적인 영국에 민주적 사회주의나 자동적으로 만족스러운 공산주의를 가져오든 그렇지 않든 원칙적 좌파는 이제 모든 인종의 평범한 노동계급 인민을 그들 사이에 풀려난 괴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수호자다.

Posted by 때때로


'제국주의론' 하면 보통 레닌을 떠올린다. 하지만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의 성취는 레닌에 못지 않다. 이정로(본명 백태웅)가 옮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는 당시의 검열 때문에 원작자의 이름이 표기되지 못하고 본문에서도 몇몇 문장을 삭제하고 어떤 표현은 순화시켜 옮겼다. 레닌이 쓴 서문이 빠진 것은 당연하다. 이를 대신해 서문으로 실린 엥겔스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3장조차도 여기저기 '완화'된 표현으로 인쇄돼야만 했다. 우선은 여기 레닌이 쓴 서문을 옮긴다. 이곳저곳 눈쌀 찌푸리게 할 의역과 오역이 많으니 원문을 꼭 참조하길 바란다. 대괄호[]는 옮긴이가 덧붙인 것이고 소괄호()는 원문에 있는 것이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레닌의 서문[1]
원문: N.I. Bukharin: Imperialism and World Economy - Introduction(링크)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 글에서 다룬 주제가 중요하고 시의적절하다는 것에는 다른 어떤 특별한 설명도 불필요하다. 제국주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최근 자본주의의 변화한 형태를 고찰함에 있어서 경제학 영역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경제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 생활의 어떤 본령에 관심을 가진 모두는 이 문제와 연관된 여러 사실들, 가장 최근 구할 수 있는 자료 중에서 필자에 의해 세밀하게 선별된 사실들을 숙지해야만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주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근거로 경제적이고 정치적 측면 모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근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분석 없이 최근 10년 간 경제적이고 외교적인 상황의 이해에 접근하기란 불가능하며 그러한 이해 없이 전쟁에 관한 올바른 판단의 형성을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일 뿐이다. 근대 과학의 요건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외교 '문서'들 또는 일상의 정치적 사건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한 나라의 지배계급에게 유익하고 편리할 뿐인 그와 같은 고립된 사실들로 구성된 방법의 '과학적' 가치와 전쟁에 관한 이러한 일련의 분석들에는 오직 비웃어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예를 들면 이제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플레하노프는 현대에 최고조로 발달한 원숙하고 과숙한 자본주의와 연관된 경제체제로서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특징과 경향을 분석하는 대신 푸리시케비치와 밀류코프의 비위에 맞춘 사소한 사실들에 눈높이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제국주의의 과학적 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러시아 제국주의자 두 명의 당면한 경쟁자, 적수, 반대자를 향해 내뱉어지는 욕설 수준으로 축소됐다. 그들의 계급적 기반이 외국 경쟁자ㆍ반대자들과 전적으로 같음에도 말이다. 잊혀진 단어, 포기된 원칙, 혼란에 빠진 세계에 대한 개념, 버려진 해법과 엄숙한 약속,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 놀랍지 않다.

특히 니콜라이 부하린 작업의 과학적 의의는 분명히 가장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단계로서 제국주의와 전체적으로 연관된 근본 사실을 조사했다는 데 있다. 유럽의 선진국들에서 봉건제를 극복했을 때, 여전히 점령되지 않은 막대한 지역과 아직 최종적으로 자본주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지 않은 나라들로 ‘평화롭게’ 퍼져나가며 비교적 평온하고 조화롭게 발달하는 위치에 있었을 때는 비교적 '평화로운 자본주의' 시대였다. 물론 그 시대에조차, 대략 1871년부터 1914년까지 '평화로운' 자본주의는 군대와 전체 계급이 이해하는 진정한 평화와는 매우 먼 삶의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선진국 거의 대부분의 대중에게, 식민지와 후진국 인민 수억 명에게 이 시대는 '평화'가 아닌 압제와 고문과 공포의, 끝이 없어 보이기에 더 두렵게 보인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는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돌연한 변화와 재앙, 갈등으로 가득찬 비교적 더 충동적인 시대, 그렇지만 힘든 노동에 종사하는 대중에게 더 이상 끝없는 두려움으로만 나타나지 않는, 그러한 공포를 완전히 종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와 일반화 된 상품생산[사회]의 뿌리 깊고 근본적인 경향의 직접적인 발전, 성장, 지속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란 걸 염두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상품교환의 성장, 대량생산의 성장은 전 세계의 나라들에서 관찰되는 근본적인 경향이다. 발달하는 교환의 어떤 단계에서, 성장하는 대량생산의 어떤 단계에서, 다시 말해 대략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될 즈음 도달한 단계에서 상품교환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막대한 규모의 대량생산 증가를 동반하고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하기 시작한 경제관계의 세계화와 자본의 세계화. 나라 안과 국가 간 교역에서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아닌 기업가들의 독점적 동맹, 즉 트러스트가 만연한 형식이 됐다. 특히 유동적이고 신축적인, 특히 국내외적으로 뒤얽힌, 특히 개성이라곤 전혀 없고 직접적인 생산과정과 분리된, 특히 집중되기 쉬운 권력인 금융자본, 이미 집중의 길로 매우 큰 걸음을 성큼 걸어와 문자 그대로 전 세계의 운명을 손에 움켜쥔 억만장자와 백만장자 수백 명의 권력인 금융자본이 세계의 전형적인 지배자가 됐다.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추론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던) 카우츠키가 내렸던 결론, 현재는 자본의 거물들이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로 단결할 시기, 즉 국민적 한계를 지닌 금융자본의 경쟁과 투쟁이 세계적으로 단결한 금융자본으로 대체될 때를 그리 멀리 남겨두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론은 지난 세기의 90년대 '스트루베주의자'들과 '경제주의자'들이 도달한 것과 유사한 결론으로서 추상적이고 단순하며 부정확한 것일 뿐이다. 후자, 자본주의의 혁신적 본질과 불가피성,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로부터 유래한 이들은 어떤 때는 (자본을 숭배하고 자본과 평화조약을 맺고 자본과 싸우는 대신 자본을 찬양하고) 옹호하며, 어떤 때는 비정치적이 되고(즉 정치 또는 정치의 중요성을 거부하고 일반적인 정치적 격변을 부인하는 등 이러한 것들은 '경제주의자'들이 특히 자주 범하는 실수다), 어떤 때는 다름 아닌 '파업'을 설교하기까지 한다(그들에게 '총파업'은 신격화 한 파업운동이다. 그것은 다른 형태의 운동이 잊히거나 무시당할 위치로까지 고양된다. 그것은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목숨을 건 도약이다). 어느 정도 속물적인 자유경쟁의 '낙원'과 비교되는 자본주의의 의심할 여지없는 혁신성과, 세계의 선진국에서 '평화적' 자본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의 피할 수 없는 최종적 승리 또한 수없이 다양한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실수와 불운으로 이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징후가 있다.

특히 카우츠키에 관해 말하자면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절연한 그는 정치를 거부하거나 체념한 것도, 무수하고 다양한 정치적 갈등과 격변, 특히 제국주의 시대 성격의 변화를 대충 건너뛴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의 옹호자가 된 것도 아니다. '평화로운 자본주의'를 꿈꿨을 뿐이다. '평화로운' 자본주의는 평화적이지 않은, 군사적이고 파멸적인 제국주의로 대체됐다. 카우츠키는 이것이 지나간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미 1909년 발표한 특별한 책
[2]에서 결론처럼 이끌어내며 동의한 것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제국주의에서 '평화로운' 자본주의로 되돌아간다는 꿈이 불가능하다면, 본질적으로 프티부르주아인 이들이 '평화로운' 초제국주의에 대한 순진무구한 기대를 꿈꾸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초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불편하고 가장 불안정하며 가장 혐오스러운, 그렇기에 프티부르주아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전쟁이나 정치적 격변과 같은 갈등을 없애 민족적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경으로 나뉜) 제국주의의 국제적 단결을 쟁취할 수 있다면, 모든 종류의 갈등과 재앙으로 가득찬 그 맨얼굴을 백일하에 드러낸 이미 도래한 현 제국주의 시대를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 비교적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갈등이 덜하며 재앙이 없는 초제국주의의 순진한 꿈으로 돌아가 보자. 현재 유럽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제기되는 '까다로운' 목표도 한쪽으로 제쳐둬 보자. 아마 이제 곧 지나가버릴 이 시대를 헛되이 보내기보다 그 뒤를 이어 곧 도래할 '과격한 목표' 따윈 필요하지 않은 비교적 '평화로운' 초제국주의 시대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직접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그와 같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초제국주의) 단계는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우리는 아직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이다.(신시대ㆍNeue Zeit, 144쪽, 1915년 4월 30일)[3]

현존하는 제국주의를 회피하려거나 '초제국주의' 시대라는 몽상에 빠져드는 이러한 경향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요소가 조금도 없다. 이러한 이론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지금 자본주의의 현 단계를 고려하면 이 이론은 실현 가능성의 측면에서 그 이론의 창안자 자신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모순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프티부르주아적이고 매우 반동적인 경향을 제안한다. 카우츠키는 다가오는 불안과 파국의 시대, 1909년 목전의 전쟁에 관해 글을 쓰면서 예견했고 분명히 인정해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할 것 같이 보였던 때가 있다. 그 시대가 도래한 것이 절대적으로 명백해진 지금 카우츠키는 다시 다가올, 하지만 언제 도래할 지 알수 없는 초제국주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할 것을 단지 약속할 뿐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조건, 지금 이 순간에서가 아니라 언젠가 다른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하겠다는 몇몇 약속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내일을 위한 미래의 외상 마르크스주의를 얻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약속으로서 연기됐다. 우리는 오늘날 모순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현재의 프티부르주아 기회주의적 이론-이론만 그런 것은 아니다-을 얻었다. 그것은 모국과 동맹국들을 제외한 어떤 나라, 즉 적국에 한해서라면 모든 국제주의적 표현에 공감하며, 그들 동맹국들과의 협정이 유지되는 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맹 가입자격이 있는 나라가 복속시킨 나라가 아닌 곳에서만 '민족자결권'에 동의하는 우리 시대의 열정적인, 더 이상 열정적일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국제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만연한 수출을 위한 국제주의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시대 만연한 수천 가지 위선 중 하나다.

그렇다면 추상적으로 제국주의의 뒤를 이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다시 말해 초제국주의 단계의 '가능성'도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니다. 추상적으로 그와 같은 단계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연한 미래의 목표를 핑계로 과격한 오늘날의 목표를 거부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이론적으로 그것은 자신을 현재의 실제 삶에서 전개되는 사태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자신을 꿈을 핑계로 그것으로부터 분리시켰음을 의미한다. 모든 기업과 국가를 예외 없이 집어 삼킨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가 도래하고, 개별 나라의 금융자본이 '초제국주의' 세계 연맹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앞에 언급한 압력ㆍ속도ㆍ모순ㆍ갈등ㆍ격변-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것들에서 또한-하에서 전개될 것이고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르러 그 반대물로 전화할 것이다.

1915년 12월

각주
1_ 이 서문은 원래 레닌의 익명인 'V. Ilyin' 서명으로 작성됐다[marxists.org 편집자].
2_ 카우츠키의 팜플렛 '권력으로 가는 길(Der Weg zur Macht)'.
3_ 이 구절은 카우츠키의 논문 '다시 사고하기 위한 두 단계(Zwei Schritte zum Umlernen, 신시대ㆍNeue Zeit 5호, 1915년)에서 가져온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



1월 22일에서 23일 사이 키예프 거리의 바리케이트. 1월 16일 집회와 시위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독재법'이 의회에서 통과된 후 거리 시위가 격화됐다. [사진 Ilya Varlamov]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과의 통상 강화 협상을 중단하고 친러시아 정책으로의 복귀를 천명했다. 대외정책 전환은 이후 3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거리 시위를 촉발시켰다. 가라앉을 듯 보이던 시위는 새해에 다시 폭발하고 있다. 1월 16일 시위를 억압하는 강력한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하면서부터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화염병이 날라다니는 모습이 외신을 타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시위는 지난해 터키ㆍ브라질ㆍ이집트와 달리 국제주의적 좌파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지 않다. 시위 초기 외신을 탄 레닌의 동상을 쓰러뜨리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그 사진의 시위를 주도한 것은 스보보다
(Svobodaㆍ자유)라는 이름의 극우파 정당의 당원들이었다. 이후 거리에서의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것도 극우파다.

처음부터 극우파가 시위를 주도한 것은 아니다. 유럽연합과의 협상 중단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가 지난해 11월 30일 경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한 후 눈앞의 경찰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12월 초 며칠 간 시위가 계속되면서 유럽연합과의 통합은 시위의 중요 의제에서 벗어났다. 이 저항이 여전히 '유로마이단'이라고 불림에도 말이다. 키예프-모힐라 대학의 미하일로 비니치키야
(Mychailo Wynnyckyj) 교수는 12월 1일 시위에 직접 참여한 후 "키예프의 상황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민들은 더 이상 유럽연합과의 통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것을 요구할 때조차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고 평가했다.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서 드러난 야누코비치의 권위주의적 통치, 임박한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에 쌓여온 불만이 폭발했다(최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이후 우크라이나는 모건스탠리에 의해 서든스톱 위험이 가장 높은 네 개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동부 산업지대 기반의 지배집단은 지금의 위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 그 배경엔 세계적 경제위기와 함께 러시아와 서방의 점증하는 제국주의적 갈등이 있다. 2010년 빅토르 유센코의 실각 후 다시 정권을 잡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유럽연합과 러시아, 심지어 중국까지 끼어든 갈등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수출의 21.2%, 수입의 28.4%가 러시아와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고 석유와 가스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지하는 나라에서 친서방 정책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이러한 관계를 이용해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을 견제해 왔다. 유센코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인 2005년 말부터 2006년 사이 원유가격 갈등으로 러시아는 공급을 중단했고 우크라이나는 결국 두 배 인상된 가격으로 수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가 친유럽연합 행보를 이어가자 러시아는 8월부터 우크라이나로부터의 수입과 가스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해 왔다
(지난해 시위가 시작된 뒤인 12월 17일 러시아를 방문한 야누코비치에게 푸틴은 150억 달러 지원과 가스가격의 33% 인하라는 '통큰'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이와 함께 야누코비치가 12월 초 중국을 방문하는 등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드네프르 강 동쪽의 산업지대에 기반한 야누코비치로는 대외 관계는 물론 국내적 지지기반 때문에도 러시아와의 거리 두기가 쉽지 않다.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에게 야누코비치가 인기가 없는 이유다. 게다가 야누코비치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상황은 서부 농업지대의 젊은이들이 극우파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손쉽게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극우파 성장의 첫 이유다.

극우파 성장의 두 번째 이유는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동부의 러시아인들, 특히 크림반도의 러시아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동부에서도 자치를 요구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인에게는 소련 시절 옛 지배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 소련이 실제 정체와 상관없이 마르크스주의를 공식 이데올로기로 삼았다는 사정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좌파가 성장할 공간은 여전히 비좁다.

그렇다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야당이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2004년 오렌지 혁명 때는 유센코라는 명확한 대안이 있었다. 그러나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이 유센코가 통치한 우크라이나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또는 과거의 우크라이나보다 더 나은 사회인지는 분명치 않다. 집권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급격히 하락한 경제성장률과 지지부진한 개혁 때문에 최악의 인기를 이어갔다. 유센코는 2010년 대선 땐 3위권의 군소호보로 전락했다. 2010년 야누코비치와 겨뤘던 율리아 티모센코 전 총리는 직권남용 혐의로 수감돼 있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파가 부재한 상황에서 제도권 정당의 허약함은 극우파의 성장을 부채질하고 있다.

가능한 정치적 대안의 부재는 극우파 성장을 위한 비옥한 토대가 되고 있다. 여기에 권위주의적 통치에 맞서 가장 적극적으로 거리 시위를 이끌면서 이 비민주주의적 집단이 가장 '민주주의적' 집단으로 대중의 정서적 공감을 얻고 있다. 결국 극우파의 성장은 단호한 좌파 정치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현재 극우파가 주도한다고 해서 좌파가 기권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게다가 1월 16일 독재법의 통과 이후 적은 규모지만 좌파 또한 거리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 역사적 경험, 정치 전통이 여러모로 좌파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에서 우리와 비슷한 여러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국외자로서 우리가 우크라이나 좌파의 분투로부터 적지 않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아래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의 인터뷰다. 마흐노 반란의 역사가 있기에 마르크스주의적 좌파와 손잡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와의 이 인터뷰는 사실은 부족할지언정 진실의 측면에서 많은 것을 들려준다.

※ 의역을 했기에 원문과 상당히 다릅니다. 오역도 많이 있으니 퍼가거나 인용하시려거든 꼭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대괄호 []는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입니다.



1월 22일에서 23일 사이 키예프 거리의 바리케이트. 시위대가 힘을 합쳐 거대한 새총으로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사진 Ilya Varlamov]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와의 인터뷰
유로마이단 "우리는 당신 투쟁을 지지하지만 파시스트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레볼루션 뉴스, 2014년 1월 30일

키예프의 자율 노동조합(Autonomous Workers' Union) 조합원과의 이 인터뷰는 2014년 1월 28일 이뤄졌다. 이 인터뷰는 유로마이단을 둘러싼 사건들 몇 가지를 해명해준다. 저항 이면의 원인들, 대통령에 초점이 맞춰진 분노, '오렌지 혁명'과의 차이, 우익의 역할, 사회적 투쟁의 약점과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Q: 키예프의 사진을 보면 바리케이트에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 같다. 그들이 함께 하게 된 이유를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바리케이트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그 지지자들은 무엇을 토론하고 있나? 단지 경찰에 맞선 싸움이 실제 쟁점인가? 아니면 바리케이트와 그 밖의 곳에서 그들의 집회 또는 어떤 다른 형태의 토론 '조직'이 이뤄지고 있는 것인가?

A: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주요 동기는 극단적으로 인기가 떨어진 대통령에 있다. 물론 실제 원인은 경제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부패, 공공 서비스의 쇠퇴, 가난, 실업에 있다. 이러한 불만의 목록이 사람들을 오늘날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이건 좌파의 견해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쟁점들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엌 구석에서 투덜거리기를 그만두고 큰 소리로 저항하게 된 것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한 그들의 감정 때문이다. 대통령 사임 요구는 가장 근본적인 요구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경찰력에 대한 순수한 분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시위대는 단지 경찰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만은 않는다. 이는 그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유리 루첸코가 내무장관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베르쿠트
[우크라이나의 특수 경찰]와 다른 특수 경찰력이 늘 그래왔듯이 행동했을 때 루첸코 그 자신은 최루 가스를 사용해 시위 군중을 해산할 것이라고 발표했었다. 그래서 지금 역시 그와 같은 (이곳의 모든 사회 계급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경찰에 맞선 시위는 비교적 무해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 생각에 대통령과 그의 정부, 경찰이 주요 토론 주제다. 시위대의 주요 목표는, 그들이 보기에 지역당
[야누코비치가 이끌고 있는 우크라이나 여당]을 몰아내는 것, 그것 뿐이다. 일부에선 헌법의 권력 균형을 대통령에서 의회로 바꿀 것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주요 주제는 사실 최루 가스, 음식, 방패, 화염병, 거리 전투의 전술과 끝없는 루머와 목전한 국가비상사태 선포 위협, 스나이퍼, 폭동진압경찰(그들이 러시아인인지 아닌지, 그들이 얼마나 더 오랫동안 개입할 것인 지 등)과 같은 실제적인 것들이다.

집회에 관해서 말하자면, 난 아무 것도 모른다. 내 생각에 상황은 매우 역동적이고 불안정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바리케이트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민주주의로 발달하는 기미는 확인하지 못했다.

Q: 정부 청사에 대한 많은 공격과 점거가 있는 것 같지만 도시에서 '일상적' 삶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키예프에서 사람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바리케이트로 가는 것인가? 시위대가 하는 다른 형식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듣기론 점거된 대학교도 있던데? 이를테면 최근 임금 미지급에 맞서 작업장에서 어떤 다른 것이 진행되고 있는가?

A: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서 기업 활동이 아무런 방해 없이 평상시처럼 계속 진행되는 동안 키예프 중심가만 시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전국적인 정치 파업 선언 시도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실패했다. 반대파는 이를 위한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했고, 어떤 정치조직도 작업장에 뿌리내린 전국적 조직을 갖지 못했으며, 단순히 인민 자신이 파업과 같은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오래된 관료주의적 우크라이나 노동조합연맹(the Federation of Trade Unions of Ukraine)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학생조합인 '직접행동(Direct Action)'은 학생 파업을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오직 하나의 대학, 키예프-모힐라 대학에서만 부분적으로 가능했다. 네, 그렇게 사람들 대부분은 업무와 학업을 계속하며 그들의 자유시간 만을 바리케이트에서 보내고 있다.

아우토마이단이라고 불리는 자가용 소유자들의 모임은 그들의 차로 교통, 특히 중요한 정부청사 부근이나 권력자들의 주거지 인근의 교통을 차단하는 행동을 주도하고 있다. 근로자들이 벌이는 저항 형식 중 하나는 지역당 소속 자본가들이 만든 상품들에 대한 불매운동이다. 최소한 몇몇 보도에 의하면 이러한 운동은 비교적 성공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한 대학에서 점거가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당신이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직접행동'에 속한 우리의 동지는 모든 캠퍼스를 점거하고 그곳의 모든 활동을 중단시키려 시도하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는 여전히 실질적인 점거는 아니다.

임금 등과 관련된 작업장에서의 저항은 지금까지는 정치적 저항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도시 교통을 통제하는 공기업인 키예프패스트란스
(Kyivpastrans)의 노동자들이 12월 시위를 벌였고 몇몇 좌파 조직이 그들을 도왔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준법투쟁(이탈리아식 파업 Italian strikeㆍ준법투쟁 내지 태업과 같은 형식의 노동쟁의를 이르는 속어)조차 시도하지 않았고 마이단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실제로 12월 말 지방정부는 최선을 다해 밀린 임금을 지급해 그들의 시위를 가라앉혔다.

Q: 우크라이나에서 최근 있었던 가장 거대한 시위는 '오렌지 혁명'이다.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은? 누군가는 그 '역사'를 고려하겠죠? 시위대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그리고 유럽연합 가입을 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A: 무엇보다도 '오렌지 혁명'은 매우 개인적인 것에 맞춰진 저항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빅토르 유센코를 대통령 자리에 앉히겠다는 구체적 목표에 집중했다. 유센코의 정치체제는 대중을 꽤 치밀하게 통제했고 모든 것을 매우 부드럽게 조직했다. 현재 야당 지도자 세 명은 시위대 다수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대통령과의 협상에서 마이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그럴 권한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난 목요일[1월 23일] 그들은 군중으로부터 야유를 받았고 마이단은 그들이 야누코비치와 협상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화가 났지만 대중을 따라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대표자들'보다 더 급진적이다. 11월의 모든 시위는 그들에게 뜻밖의 일이었고 그 이후 그들은 사태를 통제하고나 이끄는 게 불가능했다. 이러한 진공상태는 곧 극우파에 의해 채워졌다.

또 다른 차이점은 2004년에는 토론되는 쟁점의 범위가 더 넓었다는 것이다. '혁명' 전체는 대통령 선거에 바쳐졌지만 여전히 좌파적 의제를 합법적으로 제안할 수 있었고, 사회적ㆍ경제적 쟁점을 토론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저항은 현재의 시위보다 더 비주류적이었다. 현재는 오직 부르주아 정치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다른 쟁점을 제기하고자 하면 당신은 곧 '선동가'로 딱지 부쳐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2004년의 사건과 현재 시위의 유사점을 떠올려보라고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당시 아동이었던 새로운 젊은 세대가 지난 10년 사이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시위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두 번째로 빅토르 유센코는 '오렌지 혁명'의 참가자 모두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주었다.

당연히 시위대는 법치가 이뤄지는 진정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부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발상에서 그들을 구별해주는 유일한 것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떠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연합 가입이 민주주의 또는 번영과 그 밖에 좋은 모든 것과 같은 뜻이라고 확신한다. 유럽연합은 그들의 모든 희망이 집약된 신화다. 세계에 대한 이 신화적 관점에서 러시아가 모르도르[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이 왕국을 세운 암흑의 땅을 이르는 명칭] 취급을 받는 동안 말이다.

Q: 우파 정당과 파시스트 그룹도 시위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가? 그들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나? 다른 시위대는 그들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나?

A: 극우파 정당 스보보다는 시위를 이끌고자 노력 중인 세 개의 큰 정치집단 중 가장 조직적이다. 그들은 다양한 지역에 실질적 활동에 기반한 실제로 활동하는 세포조직을 지닌 유일한 정당이다. 그래서 세 곳 중 가장 조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조직으로서 그들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스보보다를 제외하면 네오나치 전투 조직의 광범위한 연합이 있다. 그들은 '라이트 섹터(Right Sector)'라고 불린다. 그들은 시위 초기에 형성돼 비정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큰 명성을 얻는 성공을 거뒀다. 그들은 공개적인 전투성과 공격성으로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고 대중은 이 기민하고 젊은 애국자들의 어떤 잘못도 보지 않고 있다. 최근 네오나치 훌리건들이 경찰, 친정부 폭력배와 맞서 싸운 주요 돌격대로 드러나면서 같은 형태가 반복되고 있다.

1월 19일 시위에 비정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심지어 좌파인 여러 부류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때까지 파시스트의 헤게모니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1월 16일 통과된 '독재법
[최고 5년형과 고액의 벌금형, 노동교화형을 시위 참가자에게 내릴 수 있게 한 11개의 법안. 이 법은 의회에서 찬성 450표, 반대 235표로 통과됐다]' 폐지로 시위 의제가 바뀌면서 그렇게 됐다. 그로 인해 극우파가 약간 후퇴했지만 결국 이 시위에서 누가 승리하든 극우파가 큰 이득을 얻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반대파가 승리할 경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경찰력과 특수기구 등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야누코비치가 이긴다면 그것은 나라의 절반이 극우파, 추측컨대 독재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애국주의적 급진파로서 극우파의 확고한 지지자가 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좌파 활동가 또한 저 법들에 의해 극심한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1월 19일 이후 좌파 대부분도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이 비상병동에서의 간호와 같은 사회기반 활동들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경찰과 폭력배들이 부상자를 납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기에 머물러야만 했다. 좌파가 활동하는 다른 영역은 위에서 언급했던 정치 파업 시도다.

Q: 외부에서 보기에 시위는 지난해 이스탄불과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물론 확실히 강도는 다르지만 …). 키예프 혹은 우크라이나 다른 곳의 시위대에게서 지난 몇 년 간 세계적 봉기와의 연관성을 볼 수 있는가?

A: 확실히 몇몇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주관적 관점의 우크라이나 시위대는 저 다른 시위대를 눈에 담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이 사건을 저항의 국제적 물결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역사에 위치지우려 노력하며 순수한 민족적인 투쟁으로 바라본다.

Q: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것에 덧붙여 질문하자면, 당신은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그것을 뒤따라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발표한 몇몇 보고서를 읽었다. 당신이 시위에서 바라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긍정적 결과는 무엇인가? 당신이 떠올리는 최악의 결과는 무엇인가? 당신은 우크라이나 외부에 어떤 종류의 지지를 바라는가?

A: 내가 말했던 것처럼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야누코비치의 승리다. 이는 1970년대 남아메리카의 독재를 닮은 냉혹한 권위주의적 체제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야누코비치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절반의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는 그와 같은 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한 시나리오는 1980~90년대 북아일랜드 IRA와 다르지 않은 게릴라 운동 하에서의 군사적 대립의 증가다.

다른 결과는 야당의 최종적 승리가 될 것이다. 이는 허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지만 기본적 자유는 유지되는, 우크라이나에서 2005~2009년 사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파시스트가 권력의 전당과 거리 모두에서 더 강해질 것이다.

여기 세 번째, 아마도 최악의 하나가 될 시나리오도 있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키예프를 포함한 중부 사이에, 다른 한 편으로는 남부와 동부 사이에 본격적으로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편의 민족주의적 괴물을 위해 싸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최악의 참사가 될 것이다. 다른 한 편 우크라이나와 같이 거대한 산업국가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유럽연합과 러시아와 다른 세계적 권력들은 주요 가스ㆍ석유 송출관과 15개의 원자로를 가진 나라가 전쟁의 혼란에 빠지는 걸 보고만 있진 않을 것 같다.

내 생각에 그와 같은 조건에서 해외로부터의 최상의 지원은, 하지만 극우파와 연대하지 않는 지지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물러서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당신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당신의 파시즘적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와 같은 메시지가 해외에서 압박을 가하기 위한 최선의 형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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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은행은 12월 18일 양적완화 축소를 발표했다. "현재 월 850억 달러인 자산매입 규모를 내년 1월부터 750억 달러로 100억 달러 축소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5년 동안 3조 달러 이상의 돈을 시장에 풀었다. 중앙일보는 "세계경제, 링거는 뽑았다"며 경기 회복의 신호탄으로 풀이했지만 상황이 간단치는 않다. 사실상 제로인 금리는 2015년이냐 돼야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점쳐졌다. 실업률은 여전히 7%대다(중앙일보 12월 20일 6면).

이 양적완화 축소를 두고 11월 한 차례 논쟁이 있었다. 11월 8일 워싱턴에서 열린 IMF 위기 대응 포럼에서 래리 서머스와 버냉키가 맞붙었다. 서머스는 미 중앙은행의 제로금리ㆍ양적완화 정책에도 "2009년 이후 4년 동안 미국인의 삶이 개선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국경제 11월 11일 15면). 그는 양적완화와 제로금리 정책이 "어떤 효과도 없었다"며 "이후로 우리는 명목 이자율이 0인 상황이 경제활동을 만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억제하는, 우리 경제가 잠재성장률 아래에 머무는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상황을 감당해내기 위해 인플레이션에 겁먹지 말고 양적완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적완화 축소를 앞장서 주장해왔던 이였기에 충격은 컸다. 정태인은 이를 두고 '개과천선'이라고까지 주장했다(프레시안). 정태인의 소개에 의하면 폴 크루그먼도 서머스의 '개과천선'을 반기며 격찬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여전히 피상적이거나 외생적이다. 마이클 로버츠는 이 논쟁에 마르크스주의적으로 개입하며 크루그먼이 '인구 성장률' 저하라는 경제 외적 자연법칙에서 위기의 뿌리를 찾는 것을 비판한다. 사실 이는 혜성의 주기에서 경제법칙을 추정했던 신비주의적 경제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즈의 '명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도 비판한다. 울프에게 "위기는 '과잉 소비'에서 비롯했고 현재 불황은 '과잉 저축'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에 결국 "자본주의는 단지 하나의 상황
[과잉 소비]에서 다른 하나[과잉 저축]로 반복"하는 진자운동으로만 파악한다고 비판한다. 정부의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 이러한 케인즈적 전통은 자본의 이윤율에 생긴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것이 그의 비판의 핵심이기도 하다. 1930년대 대공황, 그리고 그 이전의 공황들 모두는 자본의 대규모 파괴를 통해서만 이윤율을 회복하고 경제성장의 정상적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민간 부문을 '자극'하거나 (일시적으로) 대체하기 위해 계획된 더 많은 정부지출은 묘책이 되지 못한다"며 이러한 방책으로는 현재의 '장기 침체가 끝나기 전에 "또 다른 침체를 예상"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이클 로버츠는 이윤율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축적 법칙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진 않는다. 하지만 최근의 양적완화와 위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떤 입장에 서있는지를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래 그의 글을 옮겨놓는다.


케인즈적 불황인가 마르크스적 불황인가?
2013년 11월 20일 마이클 로버츠 블로그

이 블로그를 읽어왔던 독자라면 세계경제가 현재 자본주의 선진국가들이 이끄는 장기간의 불황 상태에 있다는 것이 내가 주로 이야기해온 것 중 하나라는 걸 알 것이다.

경제성장이 이전 성장률 수준보다 지속적으로 낮아지며 실업률은 대공황 이전 수준 이상이 되고 디스인플레이션(속도가 느려진 인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는 것(물가 하락)이 내가 말하는 '장기 불황'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생산 자본에 대한 투자가 회복의 기미 없이 이전의 평균적 수준보다 낮은 경제적 환경을 말한다. 게다가 이 불황은 현재 소위 '신흥
[시장] 경제'라고 불리는, 막대한 규모의 값싼 노동력과 신기술을 갖춘 나라에까지 도달하면서 [이들 나라에서] 실질GDP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세계경제 성장률

['장기 불황'이라는] 이러한 호칭은 지금까지는 어떤 이론적 경향의 경제학자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영구 불황'이라는 이야기가 '위대하고 훌륭한' 주류 경제학에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골드만삭스의 전 경영진이자 미국 재무부 장관, 하바드 대학 총장이었고 [최근]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후보를 사임한 래리 서머스는 최근 위기의 원인에 대한 IMF 콘퍼런스에서 아주 낮거나 제로인 금리를 통해, 또는 정부에서 '돈을 찍어내' 정부와 사적 부문의 채권을 사들이는 양적완화의 방식으로 경제를 회생시키려는 중앙은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정상적 성장'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거대한 거품조차도 총수요를 진작시키는 데에는 충분치 못했다…… 수요를 자극하기 위한 인공적인 조치, 이 모든 재정상의 경솔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어떤 효과도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후로 우리는 명목 이자율이 0인 상황이 경제활동을 만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억제하는, 우리 경제가 잠재성장률 아래에 머무는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명백히도 '전통적이지 않은' 통화 정책들은 새로운 거품(통화 팽창을 일으키지 않는)인 주가 상승을 제외하고는 경제를 위한 묘책이 되지 못한다. 폴 크루그먼, 전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이자 파이낸셜타임즈 블로거인 가빈 데이비스, 파이낸셜타임즈 칼럼니스트이자 그들 모두의 친구인 마틴 울프와 같은 케인즈 후예들의 장황한 설명이
[지난] 여름 내내 울려퍼졌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균형 성장'으로 복귀하는 방향으로 '자동적'으로 작동할 수 없으며 디플레이션 압력은 새로운 지배적 힘이 된 것으로 파악한다.

크루그먼은 블로그에서 '영구 침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지난 5년 동안 겪어온 삶이 새로운 정상이라면 어떻게 될까? 불경기 비슷한 상황이 또다른 한 해 또는 두 해 만이 아니라 10년 간 계속 제 궤도를 유지할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경우'는 '장기정체
[미국의 케인스주의 경제학자 알빈 한센이 주장한 것.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면 경제성장률이 점차 감소되며 파국에 이르게 될 위험이 있다는 이론]' 아닐까? 완전 고용이라는 것을 극히 드문 오래전의 일회적 사건으로 만드는, 불경기가 계속되는 이 상황이 정상이 아닐까?" 크루그먼은 계속해서 "[지난] 여름 우리는 단지 완전 고용에 가까운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 아마도 거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거품의 부재로 경제는 마이너스 금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갖게 됐다. 그리고 이것은 2008년 금융 위기 때부터만 진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심각함이 증대돼 왔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그래서 결국 주요 자본주의 경제는 더 이상 마이너스 실질 금리에서도 완전 고용에 도달할 수 있는 성장은 불가능한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이제 위대한 경제 스승이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상태에 대해 내게 동의한다는 것을 뜻할까? 글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여름께부터의 불황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러브인
[히피들이 갖던 사랑의 집회]'의 크루그먼과 울프가 나와 (그리고 내가 마르크스의 설명이라고 고려하는 것들과) 왜 다른지 설명해보겠다. 우선 케인즈주의자에게 불황은 '유효수요' 부족으로 이어지는 자본가에 의한 화폐 퇴장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크루그먼류의 주장은 이러한 퇴장이 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마이너스 실질 금리에도 불구하고 왜 끝나지 않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의 설명을 따르면] 우리는 실물경제에서 지속되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금융 부문과 중앙은행의 조치들 외에 다른 것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이윤율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뜻한다.

크루그먼은 이제 전쟁 직후에 완만한 성장 둔화를 의도해 케인즈의 이론에 외삽된 신 케인즈 학파 경제학자인 알빈 한센의 주장 또는 보다 최근의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혁신성과 생산성의 붕괴에 관한 로버트 고든의 사상이에 대해서는 을 되풀이하며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장기 침체'에 관해 말한다.

현재 크루그먼은 점진적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된다는 것을 케인즈 이론에 외삽한 신케인즈 학파 경제학자인 알빈 한센의 주장, 또는 보다 최근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혁신성과 생산성의 붕괴에 관한 로버트 고든의 사상을 되풀이하며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장기 침체'에 관해 말한다.

크루그먼은 이러한 장기 침체는 아마 유효수요를 낮게 만드는 '인구 성장률 저하' 또는 '오르내리긴 했지만 결코 사라지진 않은' 1980년대부터 부각된 '만성적 무역 적자'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설명은 어떤
[경제]외적 자연 법칙으로 자본 축적 운동의 외부를 살피며, 두 번째는 세계 경제로써 자본주의보다는 자본주의 경제들 사이의 불균형에서 원인을 찾는다. 두 설명 모두 현대 자본주의 작동의 기초에 존재하는 어떤 결함을 부정한다. 그리고 둘 모두 설득력이 떨어진다.

마틴 울프 또한 '스태그네이션'이라는 주제를 파이낸셜타임즈에 있는 그의 블로그 최근 글에서 계속 이어가며 왜 미래는 불안하게 보이는가라고 묻는다. 울프에게 이 새로운 불황의 원인은 '세계적 저축 과잉' 또는 투자를 꺼리는 자본가들의 저축에 따른 '과도한 퇴장'에서 비롯한 '투자 결핍'이다. "세계 경제는 매우 낮은 금리에서조차 사업에 사용될 것보다 더 많은 저축을 만들어내 왔다. 이것은 미국에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중요한 고소득 경제에서 사실이다." 그렇기에 장기 불황의 문제는 낮은 이윤율이 아니라 이윤의 과잉에 있다.

이것은 현 연방준비제도 의장인 벤 버냉키가 2000년대 초반 미국과 영국의 '만성적 무역 적자'의 원인이 아시아와 OPEC 국가들의 '흑자'로 인한 '너무 많은 저축'에 있다고 주장한 것에 뿌리를 둔 진부하고 오래된 생각이다. 그렇기에 과도한 신용 확장과 뒤이은 신용 붕괴는 진실로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나라들이 미국의 상품을 충분히 구입하지 않은 잘못이었다! 지금 그것은 충분히 소비하지 않은 모두의 잘못이 됐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의문은 왜 모두는 충분히 소비하지 않는가이다. 보통의 가구들이 소득과 고용의 감소로 심각하게 훼손됐을 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왜 미국과 영국, 유럽의 자본주의적 기업들은 더 투자하지 않는가? 울프는 거대한 경기후퇴 전 신용 확장 기간에 구축된 '과도한 빚'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기는 '과잉 소비'에서 비롯했고 현재 불황은 '과잉 저축' 때문에 생겨났다. 자본주의는 단지 하나의 상황
[과잉 소비]에서 다른 하나[과잉 저축]로 반복해서 움직일 뿐이다!

또 울프는 투자 부족은 더 이상 생산 자본에의 투자를 원하지 않고 대신 주식시장에서의 활동과 금융자산의 구입을 더 선호하는 자본주의적 기업 문화의 변화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위대한 자본주의 체제는 '금리생활자' 경제가 된 것이다. 나는 전에 이 블로그에서 이러한 주장들과 상대해 왔고 이후 이 주제로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일단 다시 말하자면 크루그먼과 울프의 설명에는 결국 이윤 생산을 위한 투자로 정의되는 영리경제에서 자본의 이윤율이라는 생각이 전적으로 결여돼 있다.

케인즈주의 불로거인 노아 스미스는 최근 어떻게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검토했다. "저성장과 (비자발적) 실업 증가의 해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결국 누군가는 유휴 자산을 다 써버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민간 부문이 독립적으로 야생적 충동에 의해 침체를 벗어나거나 정부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다." 오, 그렇지 '야생적 충동'이 되돌아올 것이다. 아니면 그들이? 스미스는 "경제가 그래왔던 것처럼 부채 상환 압력에서 기인한 매우 낮은 금리, 저조한 기대감과 자신감 등을 지닌 채 불황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해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바로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불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많은 부채가 여전히 상환되고 있고 (이윤에 대한?) '기대는 낮고' (무엇에 대한?) '자신감은 저조하다'. 여기에서도 이윤율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스미스는 "비이성적으로 꼬인 불황 상태에 있는 시장이 유휴 자원을 바로 써버리기에 적절치 않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리인은 정부다. 정부는 (유휴 노동을 사용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유휴 자본을 이용한) 돈을 빌릴 수 있고 금리를 올리고 실업률을 낮출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누구에게도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순히 시장경제와 정부가 유휴 자원이 사용되지 않고 있을 때 이것을 이용할 것만 요구한다. …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내가 대개 시장 경제를 선호하며 주목하는 것들이다. 정부의 개입은 최소한의 필요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 투자는 민간 투자가 충분치 못할 때 최소한을 유지시킴으로써 곤경을 면하게 할 수 있다.

"실업률 저하와 유휴 자본의 사용으로 (가급적이면 공공 사회기반시설과 과학기술 프로젝트, 신 사업에 대한 대출을 섞어) 더 많은 사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정부가 구제자 역할을 하면 우리는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곧 아니면 조금 후에 민간 부문은 되살아나 자원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는 정상 상태가 "매우 매우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위해 조절된, 변화가 계속됨으로써 조절이 계속되는 생산 체계를 원한다면 막대한 양의 자원을 유휴 상태로 놓아두는 것은 그것을 위해 나쁜 행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설정된 재정정책"이 필요하다. 구제를 위한 정부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왜 자본이 사용되지 않은 채 놓여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수익성이 충분히 없어서일까?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축적된 비생산적 자본의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남아있는 가치의) 이윤율을 상승시키고 축적 과정의 재개를 가능케 하는 침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실물자본과 가공자본 모두가 엄청나게 축적된 후 자본주의는 대공황의 시기에 들어섰다. 1930년대 대공황은 죽은 자본의 대량 파괴 없이 이 침체를 벗어날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그것을 해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도 계속된 성장을 재개하기 전에 중요한 침체를 겪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단지 민간 부문을 '자극'하거나 (일시적으로) 대체하기 위해 계획된 더 많은 정부지출은 묘책이 되지 못한다. 자본 축적을 대체한 정부가 계획한 투자는 단지 생산을 이끄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장기' 침체가 끝나기 전 겪어야 할 또 다른 침체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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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문성원ㆍ안규남 옮김|아고라 프락시스 총서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이 시작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궁전에서 쫓겨났다. 황제가 물러난 겨울궁전에는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공장과 군대에는 소비에트가 세워졌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고 집행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한 권력 기관이다. 이 소비에트는 1905년 혁명 때 처음 등장했었다.

세계 여성의 날인 2월 23일
(신력으로 3월 8일) 시작된 혁명은 구권력을 무너트렸지만 아직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건 쉽지 않았다. 겨울궁전의 임시정부는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도 임시정부를 넘어서진 못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교착된 전선처럼 러시아 내부에서도 지리한 고착상태가 들어서는 듯 싶었다. 노동자와 병사의 가장 급진적인 부위에서 당장의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불만이 위험스럽게 쌓여갔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하는 소비에트는 머뭇거렸다.

카데츠와 멘셰비키ㆍ사회혁명당의 연립 임시정부는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전선에서 군사 규율을 강화하고, 페트로그라드의 혁명적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6월 18일엔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2월 혁명의 반란이 시작됐던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지구에서 설익은 반란이 계획된다. 레닌과 볼셰비키 중앙위는 이들의 행동을 만류하지만 7월 3일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직 때는 아니었다. 노동자ㆍ농민ㆍ병사의 다수는 아직 볼셰비키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연립정부, 즉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연립정부는 즉각 반격했다. 7월 5일 정부는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사무실을 습격했다. 6일에는 레닌 체포령을 내렸다. 이어 트로츠키와 주요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도 이어졌다. 경찰과 우익 깡패 집단 흑백인조가 활개쳤다. 레닌은 몸을 피해야만 했다. 국경을 넘어 핀란드를 향했다.

국가, 전진하는 혁명의 피할 수 없는 벽

7월 사태 후 핀란드로 피신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국가와 혁명'을 쓰는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이제 막 수립된 부르주아 국가와 대결하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봉건 권력에 맞선 혁명에서 부르주아는 노동계급 대중의 무장을 용인하곤 한다(여러 혁명을 겪은 후인 1836년 스페인 혁명 당시 부르주아는 이러한 무장조차 허락하길 꺼려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로서는 노동자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첫 번째 계율이었다. 따라서 노동자가 쟁취한 모든 혁명 이후에는 노동자의 패배로 끝나는 새로운 투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레닌 재인용ㆍ126쪽,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에 대한 엥겔스의 1891년 서문)

1848년 2월 혁명은 파리 노동계급의 협력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을 승리로 이끈 파리의 노동계급은 '사회공화국'의 전망에 들떠있었다. 그러나 오를레앙 왕조를 몰아낸 파리 부르주아지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조롱하고 모독했다. 분노한 노동계급은 6월 봉기했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무장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잔혹하게 진압당한다.

레닌이 떠올린 것은 이러한 역사였을 것이다. 이미 레닌은 7월 사태를 겪으며 부르주아지의 음험한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7월의 공격으로 자신감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더 나아가려 했다. 연립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 장군과 손을 잡고 볼셰비키와 노동자ㆍ병사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코르닐로프는 더 과감했다. 8월 25일 자신의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향해 진격시켰다. 26일에는 지금까지 협력자였던 케렌스키에게 물러나라고 협박했다.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코르닐로프의 이름은 혁명을 압살하는 데 성공한 장군으로 1936년 스페인의 프랑코, 1961년 한국의 박정희,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앞에 놓였을 것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인 상비군과 경찰ㆍ감옥과 같은 억압 기구를 국가의 핵심으로 꼽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부딪혔을 때, 서유럽과 러시아의 속물들은 …… 공공생활이 복잡해지고 기능이 분화된다는 등의 사실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한 지적은 얼핏 보기에는 '과학적'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사회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계급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은폐하여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있다."(21쪽)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혁명적 노동자ㆍ병사와 궁전의 부르주아지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였다. 엥겔스가 국가의 존재를 "사회가 해결 불가능한 자기모순에 봉착했고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화해 불가능한 대립물들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레닌 재인용ㆍ15쪽,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고 설명한 것은 레닌에게 너무나도 자명해 보였다. 겨울궁전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ㆍ병사와의 대립을 견딜 수 없기에 자신의 힘을 소비에트와 혁명적 노동자ㆍ병사의 무력화에 집중해야 했다. 국가는 "계급 간의 충돌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장 힘이 있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의 것이기 때문이다(레닌 재인용ㆍ25쪽, 앞의 책). 혁명이라는 역동적 시기 국가는 "계급지배의 기관이자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자신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17쪽).

스페인ㆍ한국ㆍ칠레의 경험은 이러한 국가의 본질이 여전히 다르지 않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최근 이집트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평화적인 시기에는 군대ㆍ경찰과 같은 억압 기관이 국가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기의 시기면 군대는 어김 없이 자신의 존재를 만방에 과시하며 역사의 주재자로 등장한다. 최근 미국 연방정부의 폐쇄는 '평화적인 시기'임에도 이러한 국가의 본질을 얼핏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부예산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미국 정부는 10월 1일 폐쇄됐다. 그러나 "국방, 경찰, 소방, 우편, 항공 등 '핵심 서비스' 업무는 정상 운영됐다". 국립위생연구소가 심각한 암 환자 200명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노동통계청은 실업률 발표를 연기했으며, 식품의약국은 수입 식품과 의약품에 대한 안전검사를 중단했다. 부당노동행위를 감시하는 전국노동관계위원회도 활동이 마비됐다. 노동계급 대중을 위한 필수적 공공서비스가 중단된 이 와중에도 미국 군대의 세계적 활동은 계속됐다. 테러리스트를 잡는다는 핑계의 10월 5일 리비아와 소말리아에서 군사 작전은 정부 폐쇄에도 아무런 차질 없이 진행됐다. 군대를 운영하는 데 종사하는 민간 군무원도 복귀했다.

국가는 화해 불가능한 계급대립의 산물이자 지배계급의 계급지배 기관이기 때문에 혁명에 성공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먼저 할일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것이다.

"나의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 장을 본다면, 당신은 내가 프랑스 혁명의 우선적 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 예전처럼 관료ㆍ군사기구를 한편의 수중에서 다른 편의 수중으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 이것이 대륙에서의 모든 현실적 인민혁명의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레닌 재인용ㆍ65쪽, 마르크스가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 저작선집 4권 425쪽)

그러나 혁명의 시기 부르주아지는 내각의 일부를 노동계급 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 한다. 1848년 혁명 후 프랑스에서 그랬고 레닌이 이 책을 쓰고 있던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그랬다. 사회혁명당의 케렌스키가 수상이 됐고 멘셰비키 7명이 내각에 들어갔다. 1936년 스페인 인민정부 내각에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국가에 대한 근본적 반대파인 아나키스트까지 포함돼 있었다. 1970년 칠레에선 심지어 사회주의자가 대통령이 된다.

위기가 이러한 권력의 '재분배'를 통해 해결되진 않는다. 그러나 "관료기구의 자리가 여러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 정당들에 많이 '재분배'되면 될수록, 피억압계급들과 그들의 정점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전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그들의 화해 불가능한 적개심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가장 민주적인 정당들조차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바로 그 억압장치인 국가기구를 강화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53~54쪽). 자유주의 좌파 또는 사회주의자였던 이들이 권력을 잡은 후 강화되거나 여전히 유지되는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은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공통되게 경험했던 바다. 브라질 정부는 올해 6월 대중교통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반란과 10월의 교사 노동자 파업을 강력한 경찰력으로 잔인하게 공격했다. 이 정부의 수장인 브라질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는 사회주의 게릴라 출신이다. 정치권력의 일부를 분배받거나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것이 혁명의 과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혁명은 국가권력을 향해 '자신의 모든 파괴력을 집중'시키고, 국가기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고 절멸시킬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된다."(54쪽)

부르주아 독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핀란드로 피해있던 레닌에게 과제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와의 대결 만은 아니었다. 아나키스트들에겐 국가기구의 파괴가 끝일테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점차적으로 모든 자본을 부르주아지로부터 탈취하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생산량을 있는 대로 급속히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는 과제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했었다(레닌 재인용ㆍ42~43쪽, '공산당 선언' 이론과실천판 39쪽).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은 아직 국가 일반을 없애지 못한다.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사멸할 테지만 이제 막 혁명을 시작한 러시아에서는 "착취자의 저항을 억누리기 위해서도, 그리고 사회주의적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 농민ㆍ프티부르주아ㆍ반(半)프롤레타리아 등을 지도하기 위해서도, 국가권력ㆍ집중화된 권력조직ㆍ폭력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레닌의 생각이었다
(46쪽).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특수한 폭력조직으로서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 역할의 완성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다"(47쪽).

한국의 어떤 자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레닌과 볼셰비키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강신준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볼셰비키는 ……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연히 독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낸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ㆍ링크).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완전한 왜곡이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848년과 1871년 혁명을 경험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술로부터의 빼곡한 인용으로 가득하다. 레닌이 인용한 마르크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나를 두고 말하자면, 나의 공적은 근대사회에서 계급의 존재나 그들 상호간의 투쟁을 발견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나보다 훨씬 전에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서술하였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을 경제적으로 해부하였습니다, 나의 새로운 점은 ①계급의 존재는 다만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 ②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간다는 것, ③이러한 독재 자체는 모든 계급을 지양하고 무계급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일 뿐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레닌 재인용ㆍ58쪽, 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저작선집 2권 497쪽)

파괴된 부르주아 국가를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완전하고 철저하게 수행"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줬듯이 "다수의 인민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72쪽). 파리 코뮌은 이러한 완전한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몇 가지 조치도 보여준다. 코뮌은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위원들로 구성된다. 이 위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보수도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조정된다. 각종 특권은 폐지된다. 법관들도 표면상의 독립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이 코뮌은 부르주아 의회와 달리 직접적인 실행기구이고 위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을 여는 것이다. 혁명의 발전은 이러한 조치들에 덧붙여 구체적 상황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로의 대체는 단지 행정부에 대한 것 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입법ㆍ행정과 함께 사법도 노동계급의 직접적 통제 하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교육과 종교 등도 예외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코뮌은 옛 정부의 권력의 물질적 도구였던 상비군과 경찰을 일단 제거하고 나서, 곧바로 정신적 억압도구인 성직자 권력을 분쇄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1789년 혁명 이후 종교는 혁명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유럽에서 종교는 인민을 교육하는 기관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의 교육은 언제나 가장 보수적인 색채를 띄었었다. 즉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핵심이었다
(71~72쪽).

민주주의의 한계 극복하기

국가의 폭력적 전복,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행. 민주주의가 아직 확립되지 않고 국가가 여전히 폭력에 의한 지배에 머무르던 제정 러시아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까. 민주적 제도의 진전은 사회의 부정의를 교정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확대할 것이라는 게 보통의 기대다.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민주적 절차와 방법이 아직 덜 발전했고 대중이 민주주의에 익숙치 않아서 그렇다고 말해지기 일쑤다.

그러나 레닌에 의하면 "'부'의 전능함이 민주공화국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부의 "전능함이 정치적 메커니즘의 개별적 결함이나 자본주의의 열악한 정치적 외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로서는 가능한 최선의 정치적 외피다. 따라서 자본은 이 최선의 외피를 획득한 뒤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인물이나 제도나 정당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자기의 권력에는 하등의 동요도 없을 만큼 견고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권력을 확립한다."(27쪽)

이는 "고대 공화정들에 있었던 자유"가 "노예 소유자들을 위한 자유"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보통선거가 확립된 한국의 2012년 4월 총선의 투표율은 54.2%에 불과했다. 12월 18대 대선의 투표율은 17대보다 12.8%나 급증했음에도 75.8%에 불과했다. 그것은 레닌에 따르면 "현대의 임금노예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조건으로 인해 궁핍과 빈곤에 몹시 짓눌려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신경쓸 여지도 없고' '정치에 신경 쓸 여지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일이 통상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는 주민의 다수가 공적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146쪽). 게다가 미국에는 아직 스스로 등록한 사람 만이 투표할 수 있고, 최근까지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이 포함된 조직적인 투표 등록 방해가 존재했다.

여기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수호자 미국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동지역 최대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엔 민주주의라는 건 눈꼽만치도 없다. 1970년 칠레에서 사회주의자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에 뽑히자 자본가들은 온갖 사보타쥬를 자행했으며 민주 국가 미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미국은 올해 7월 이집트 군부가 쿠데타를 자행했음에도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는 자본가들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매우 예민한 눈으로, 특히 피억압계급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다음과 같은 레닌의 지적은 우리에게 여전히 매우 소중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극소수를 위한 민주주의,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기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어디서나, 즉 선거권의 '사소한', 아니 사소하다고 이야기되는 세부 조항들에서만이 아니라 대의기관들을 구성하는 기술상의 문제에서, 단체조직권에 대한 실제적 방해에서, 일간지들의 순전히 자본주의적인 구성에서, 그 밖에 우리의 눈길이 미치는 도처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제한들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러한 제한, 예외, 배제, 방해들은 특히 가난을 직접 체험해본적이 전혀 없고 피억압계급들의 실생활을 가까이 접해본적도 없는 자들의 눈에는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들은 빈민을 정치로부터, 민주주의에의 적극적 참여로부터 제외하고 배제하는 것이다."(147~148쪽)

국가 없는 삶의 시작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대체는 국가 일반의 사멸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진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진실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나서는 최초의 행위-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는 동시에 국가가 국가로서 독자적으로 행하는 마지막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한 영역 한 한 영역에서 차츰 불필요해지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스스로 조락한다. 인간에 대한 통치 대신에 사물에 대한 관리와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등장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사멸한다."(레닌 재인용ㆍ31~32쪽, 엥겔스 '반 듀링론')

부자가 아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민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확장시킬 것이다. 그러나 억압자와 자본가들에 대한 제한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완전한 민주주의라고만 말하지는 않는다. "억압이 있고 폭력이 있는 곳에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과도적이고 하지만 필수적인 과정이다. "인민의 착취자ㆍ억압자에 대한 폭력적 억압, 즉 그들을 민주주의로부터 배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민주주의가 겪게 되는 변화"인 것이다(149쪽).

"자본가들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되고 자본가들이 소멸하고 더 이상 어떠한 계급도 없는(즉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서 사회성원들 사이에 전혀 차별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에 가서야 비로소, 그때에야 비로소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자유에 관해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참으로 완전하고 참으로 아무런 제외도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적 노예제로부터, 자본주의적 착취의 무수한 참상ㆍ야만성불합리추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옛날부터 알려져왔고 수천 년에 걸쳐 모든 교훈서에서 반복된 사회적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들을 폭력 없이, 강제 없이, 복종 없이, 국가라고 하는 특별한 강제기관 없이 준수하는 데 점차 습관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사멸하기 시작한다."(149~150쪽).


즉 사회주의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 인민 다수가 "투표와 선거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 사무에도 자주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누구나 다 '국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될 때 국가 일반은 사멸의 길로 접어든다(197~200쪽).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가장 큰 고비에 이르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의 과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트는 이전의 국가기구를 인수해 이용할 수 없다.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파괴돼야 한다. 즉 혁명 러시아의 임시정부와 군대ㆍ경찰, 부르주아적 두마와 제헌의회는 제거돼야 한다. 부르주아 국가를 무너트린 자리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들어선다. 소비에트는 이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인민의 공적 생활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곳의 대표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고 보수는 노동계급의 평균 임금으로 제한돼야 한다.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하지만 아직 억압자에 대한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는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억압자를 억압함으로써 스스로의 사멸을 향한 길을 닦는다.

잊혀진 꿈의 귀환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실제로 이렇게 흐르진 못했다. 참혹했던 내전은 혁명적 노동계급을 산산조각 내놓았다. 독일혁명의 패배로 인한 고립은 모든 과거의 오물을 부활시켰다. 옛 억압자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관료의 독재로 대체됐고 국가는 사멸하지 않고 강화됐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붕괴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모든 국가의 사멸이라는 희망을 백일몽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쓰던 100여 년 전과 다른 운명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경제를 구하기 위해 각 나라의 주권, 인민의 민주적 권리가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다. 그리스 선거에서 급진좌파연합이 부상하자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부르주아 언론은 그리스 인민들을 협박하는 짓도 개의치 않았다.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유럽연합헌법을 국민투표에서 부결시킨 아일랜드 국민들을 겁박했다. 프랑스에서도 헌법이 부결됐지만 유럽의 지배자들은 방법을 바꿔 국민투표 없이도 유럽연합의 원칙을 각 나라에 강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유럽에서 국가는 혁명가들의 행동이 아닌 지배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약화되고 곳곳에서 무시당하는 국가가 국민에 대해서 만은 그 강력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경찰의 잔인한 폭력은 유럽과 중동, 남미의 저항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 차원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국가적 차원의 폭력기구에 의지해 계급지배를 유지하고 있다.

고전적 국가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핵심 역할로써 억압기구의 활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미국에선 공화당의 부시가 애국자법을 만든 데 이어 민주당의 오바마가 국방수권법을 만들어 인민의 민주주의적 기본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오큐파이 운동은 연방정부가 조직한 계획에 따라 전국의 경찰에 의해 일제히 폭력적으로 해산됐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경제를 지닌 중국은 민주주의하고 거리가 먼 나라다. 천안문 광장을 점령한 것은 인민 대중이 아닌 공안이다. 계급지배의 도구인 국가의 혁명적 전복을 꿈꾸었던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는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우리 생활 곳곳에서 고전적 국가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때때로

협동조합 '가장자리'의 격월간지 '말과활'이 창간됐다. 가장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홍세화 선생이 머리말에서 '민중'이란 말 대신 '인민'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인민이란 말이 우리 언어 생활에 그리 익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은 왜 인민이란 말을 썼을까?

인민은 "국가를 구성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보통은 이와 함께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를 말할 때 사용된다. 비슷한 단어로 '민중'이 있다. 둘 다 특정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지만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은 민중에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ㆍ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인민이란 단어가 남북 분단 상황에서 금기시 된 때문이다. "늘 친하게 어울리거나 함께 노는 사람"을 뜻하는 '동무'란 단어가 분단 이후 잘 쓰이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즉 분단 상황에서 내면화한 반공주의의 영향으로 인민 대신 민중이 쓰이게 된 것이다. 내가 보통 민중 대신 인민을 사용하는 첫 번째 이유는 특정한 정세가 내 언어생활을 제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서다
(북한 정권에 동의하지 않고 북한 인민이 스스로 나서 지배자들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홍세화 선생도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홍 선생의 인민이란 단어의 사용이 반가운 것은 우선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민중 대신 인민을 사용하는 바로 그 이유와 연관된 다른 문제 때문에 홍 선생이 인민을 사용한 데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인민은 피지배 계급 일반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노동자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들이 오직 노동계급의 조건 개선 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피지배 계급 일반의 조건,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배와 피지배의 조건을 결정짓는 핵심 고리에 노동계급이 위치해서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회주의자는 인민 일반의 해방을 목표로 하지만 그 해방에서 노동계급이 핵심적 역할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민중 담론은 그렇지 않다. 이는 한편 위에서 지적한 내면화한 반공주의의 연장선에서 비롯한 것이기는 하다. '노동자'라는 말을 '근로자'가 대체한 사정과 같다. 그렇지만 더 중요하게는 민중 담론이 노동계급의 핵심적 역할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노동자ㆍ농민ㆍ학생의 연대를 강조하는 민중 담론은 이들 세 사회적 집단을 수평적으로만 파악한다. 핵심은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다. 홍세화 선생이 사용한 인민이란 단어가 불길한 것은 그것이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머리말에서 안개에 싸여있던 인민의 의미는 뒤이은 지젝과 이진경의 글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나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이란 개념을 포기할 수 없게끔 할 뿐만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어서 그 개념을 실존적 차원으로까지 급진화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적 주체에 대한 더 급진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 주체는 모든 실체적 내용을 제거한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무상의 지점으로까지 환원되는 주체다. 이런 이유에서 새로운 해방의 정치는 더이상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각기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인 결합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으나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젝은 그것을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유로 들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이전으로 후퇴하는 주장일 뿐이다. 무정형의, 단지 지배받는 집단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로 말이다. 마르크스가 한 작업은 이 프롤레타리아라는 로마 시절로부터 비롯한 개념을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 원리에 입각한 개념으로 바꿔놓는 것이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노동자인 것이다. 노동계급은 여러 사회적 집단 중 억압받고 착취받는, 지배받는 유일한 사회적 집단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지배 사슬의 핵심적 고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목한 것이다. 결국 지젝의 주장은 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진경에 의해 다시 반복된다. 이진경은 지젝보다는 덜 철학적인 언어로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M'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제가 혁명성을 말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이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트였다는 것을 일단 상기해주길 바랍니다. …… 역사적 조건에 따라 누가 무산자인가가 달라지는 거지요. 16세기에는 토지 잃고 부랑하던 농민들이 무산의 프롤레타리아트였다면, 19세기에는 끔찍한 조건에서 노동해야 했던 산업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였던 것이고, 당신(이진경)이 생각하듯이 안정적으로 노동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어버린 지금은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들이 새로이 무산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 거지요."

마르크스가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로 노동계급을 바라봤다는 것은 아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는 '공산당선언'에서 여러 번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의 노동계급(the proletariat, the modern working class)"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마르크스는 당대 자본주의의 발전, 아직은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서 일어나던 변화를 추적해 노동계급이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진경의 주장 대로 노동계급이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게 만드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진경은 마르크스를 사칭할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역사적 조건의 변화를 추적할 능력은 없는 듯하다. 그가 기껏 내세우는 것은 인상주의적 비평에 불과하다.


"지금은 정규직이란 단어와 함께 유사하게 사용되는 '노동자계급'……은 바로 옆에서 똑같은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정규직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게 차단하고, 그들이 옆에서 투쟁할 때 연대는커녕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통상적인 게 되었죠."

정규직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관한 비난에 불과한 것으로 마르크스의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대체할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대중의 상식에 부합하는 듯 보여도 말이다. 불길하게도 홍세화 선생은 이진경에게 동의하는 것 같다. 다시 들춰본 머리말에서 홍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인민도 이제 하나의 인민이 아니고, 노동자도 이미 하나의 노동자가 아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과의 대화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가치가 상승하기를 바라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 가입조차 안 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노동자가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인가, 더구나 이들이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인가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홍세화 선생은 이진경과 공명한다. 물론 우리는 홍 선생 외에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런 주장을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새로운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경향인가? 우리는 마르크스 시절부터 이미 인민이 하나의 인민이 아니었음을, 노동자가 하나의 노동자는 아니었음을 떠올려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영국의 노동자와 그 식민지 아일랜드의 노동자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계급 남성이 어떻게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 내 분열에 대한 인상주의적 비평이 아니다. 그 분열의 물질적 조건을 살피고 단결의 단초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안전판'으로 고려하게 된 조건, 그리고 그것을 벗어날 계기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홍세화 선생과 이진경은 분열만 얘기할 뿐 그 역사적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인상주의적 비평으로 어물쩍 넘어간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곳에서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만들고 재생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과 여성, 지역 공동체가 담당하던 많은 역할이 점점 더 자본주의적 경제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
(과거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위계제는 마르크스가 설명한 방식 그대로 사회에 더 많은 위계와 복잡한 지배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파악을 도외시한 채 현실을 지양하는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이 가능할까. 최근 잇따라 창간된 여러 진보 잡지들(월간 좌파, 진보신당-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말과활)이 현재 세계를 휩쓰는 반란의 물결에 침묵하는 것과 함께 2008년 이래 6년째 계속되고 있는 경제위기에 대한 분석을 피하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다.

p.s.'말과활' 창간호에 실린 이진경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마르크스는 신성한 이름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적 한계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즉 역사적 조건이 달라지면 그의 주장은 틀린 게 될 수 있다. 마르크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의 주장에서 변형되어야 할 부분과 이어받아야 할 부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점에서 이진경이 마르크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 자체를 뭐라 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후예를 자처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마르크스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름 뒤에 숨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Posted by 때때로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란? 세계 곳곳의 반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고전적인 바리케이트와 무장한 시위대-경찰의 충돌이다. 사진은 6월 26일 칠레 산티아고의 시위 모습. [사진 europeans against the political system 페이스북]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의 반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2011년 튀니지ㆍ이집트 혁명부터 올해 터키ㆍ브라질 반란까지 모두 '중산층 혁명'이라고 주장한다[월스트리트저널 6월 28일ㆍ링크]. 후쿠야마의 기고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후 우리 언론에서도 '중산층 혁명'에 대한 기사가 잇따랐다. 특히 경향신문은 7월 3일자 1면과 8면 두 개 면을 사용해 가장 크게 '중산층의 반란'을 다뤘다. 이 글에서는 후쿠야마의 월스트리트 기고를 중심으로 '중산층 혁명'에 대해 따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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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7월 3일자 지면에는 '지구촌 휩쓰는 중산층의 반란'이란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물결을 분석하고 있다. 이번 시위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군부독재에 맞서는 정치세력도, 세계화의 그늘 속에 좌절한 젊은이들도 아닌 '글로벌 중산층'"이라는 게 요지다[경향신문 7월 3일자 1ㆍ8면ㆍ링크].

최근 저항에 대한 경향신문의 '중산층의 반란'이라는 규정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중산층 혁명(The Middle-Class Revolution)'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격차(the gap)'를 이번 시위의 공통점으로 꼽고 있다. 후쿠야마에 의하면 세계적인 자본주의 성장은 거대한 규모로 중산층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됐지만 정치가 이 증대된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직면한 실패가 최근 시위들이 공유하고 있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처럼 터키와 브라질에서도 정치적 저항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평균 이상의 교육 수준과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기술 친화적인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위를 조직하고 연대를 건설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반란과 혁명에 대한 틀에 잡힌 관념이 많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배운, 억압받는 이들이 들고 일어난 시위는 마치 옛 이야기처럼만 여겨진다. '중산층 혁명'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시위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중산층의 성장? 세계는 평평해졌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선 세계적으로 봤을 때 '중산층'의 성장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쿠야마 스스로도 중산층의 증가 현상이 중국ㆍ인도에 집중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지난 2000년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를 강태한 경제위기와 2000년대 초 미국의 IT버블 붕괴를 거친 후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네 개 나라가 매력적인 투자처로 새롭게 제시됐다. 브릭스(BRICs)는 이 네 나라의 이름에서 비롯한 단어로 세계적 금융자본인 골드만삭스가 2003년 처음 사용했다. 즉 애초 브릭스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금융자본의 반응이었다. 세계경제의 성장과 중산층의 부흥은 결코 전 세계적으로 고르게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후쿠야마가 주목하고 있는 터키와 브라질에서 지니계수(세계은행, 100 기준)는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과 룰라의 노동자당(PT)이 집권한 2003년 각 43.42와 58.78에서 2010년 터키 40.03, 2009년 브라질 54.69으로 줄어들었다. 2010년 멕시코의 지니계수가 47.16임을 감안하면 브라질의 불평등이 여전히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터키는 2008년 38.95까지 떨어졌던 지니계수가 2010년 다시 증가한 것이다. 후쿠야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불평등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중국은 1981년 이후 꾸준히 지니계수가 상승해 2009년에는 42.06에 다다른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지난해 12월 또다른 보도에 의하면 중국가정금융조사연구센터(쓰촨성 청두 시난차이징대와 인민은행 금융연구소가 함께 설립한 연구소)의 조사결과 2010년 중국 지니계수는 0.61에 달해 '폭동을 부를 수준'이다[동아일보 2012년 12월 11일자 21면ㆍ링크].

터키와 브라질에서 빈곤층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브라질의 빈곤층(국가 빈곤선 기준 빈곤층 인원수, 국제 빈곤선 기준 이하 인구 포함) 인구는 2004년 33.7%에서 2009년 21.4%로, 터키는 2004년 25.6%에서 2009년 18.1%로 줄었다. 그러나 실업률은 정체 수준이며, 터키의 경우 장기실업률은 2003년 23.4%에서 2011년 26.5%로 오히려 증가했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후쿠야마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도 "평균 이상의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서울경제는 무르시를 실각시킨 이집트 제2혁명의 원인을 "치솟는 청년 실업률ㆍ경제난"이라고 지적한다. 민간연구소들의 조사에 의하면 30세 이하의 청년 실업률은 60%에 달한다는 것이다. 튀니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랍의 봄의 도환선이었던 튀니지 혁명은 한 대졸 노점상의 분신으로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과일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경찰의 단속으로 노점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가 분신하면서 높은 실업률과 물가에 고통받던 튀니지 인민들이 반란에 나선 것이다[프레시안 2011년 1월 16일ㆍ링크].

경향신문이 '중산층의 반란'이라고 부른 최근의 보스니아 시위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스스로 지적하듯이 "보스니아는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이 유럽연합 평균의 29% 수준에 머무는 유럽 내 가장 가난한 국가"이고 "실업률이 44.6%에 달하면서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경향신문 7월 3일자 8면ㆍ링크]. 부패한 정치인의 공직 임명에 반발해 시작된 불가리아 반란도 다르지 않다. 이 반란이 시작되기 세 달 전 불가리아 인민은 전기요금의 급등에 반발해 거리로 나섰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분노한 시민을 달래기 위해 조기총선을 실시했지만 사태의 수습은 아직 멀어 보인다.

결국 이 모든 반란의 배경에는 고전적인 테마가 자리잡고 있다. 즉 극심해진 빈부격차, 열악해지는 삶의 질이 그 공통된 배경인 것이다. '중산층의 성장'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좀 더 평등해진 세계의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경제성장은 몇몇 나라의 소수에게만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가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경향신문은 이 중산층을 부르킹스 연구소의 기준을 빌어와 10~100달러의 소득수준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09년 '글로벌 중산층'은 18억명에 이른다. 이 추세는 계속 이어져 2030년에는 세계인구 80억명의 절반을 넘는 48억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이 적절한지 따지기 이전에 앞에서 살펴본 세계경제의 현실은 경제적 기준의 중산층 성장이라는 주장이 현실과 다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였을까. 후쿠야마는 중산층을 경제적 기준 만으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는 중산층을 "교육과 직업, 자산의 소유에 의해 정의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가 '중산층'의 정치적 태도를 예측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세금을 많이 내는 중산층은 정치에 더 민감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술 친화적인 이들은 다른 나라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더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수준이다. 더 높은 교육수준은 진보와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이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혁명들까지 끌고 온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중국 혁명 모두 불만을 품은 중산층이 주도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행동 방침이 소작농과 노동자, 빈민층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848년 '인민의 봄'은 사실상 유럽 대륙 전체에서 분출한 혁명이 직접적으로 앞선 수십여 년 동안의 유럽 중산층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혁명가들을 보자.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ㆍ생쥐스트, 1848년 혁명의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루이 블랑, 1871년 (비록 결정적 순간에 감옥에 갖혀있었지만) 파리 코뮌의 블랑키, 1917년의 레닌 …. 이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대표적 혁명가들은 몰락한 귀족 또는 교육 받은 지식인 출신이다. 심지어 엥겔스는 자본가다.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는 또 어떤가.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의사다. 우리는 이러한 목록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들 혁명의 대표자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배후에 더 거대한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1789년부터 1794년 사이 상퀼로트의 행동이 없었다면 로베스피에르의 위명 또는 악명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상퀴로트의 핵심 지도자들을 숙청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혁명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대중을 발견할 수 없었고 바로 그 때 그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 반동이 닥쳐왔다. 마르크스에게 '붉은 박사'라는 악명을 안겨줬지만 1848년 혁명은 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게 아니며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1871년 블랑키 없이 코뮌을 80일간 운영했다. 1917년 레닌에게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가 없었다면 볼셰비키의 10월 봉기는 실패했을 것이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동맹, 혁명의 필요조건

물론 후쿠야마가 '개인'으로서 혁명을 주도하는 중산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과거의 혁명을 얘기할 때 '개인'으로서 혁명가의 출신성분을 따지지만 현재의 혁명을 얘기할 때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혁명에서 이 중산층 '집단'의 다른 계급 또는 계층과의 동맹은 매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시위와 봉기, 때때로 혁명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이 주도하지만 마지막에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것에는 드물 게만 성공한다. 그것은 중산층이 발전된 국가에서 사회의 소수 이상을 대표하지 못하고 그들 내부가 스스로 분열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의 다른 부분과 동맹을 맺지 못하는 한 그들의 운동은 지속적인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후쿠야마는 동맹을 맺는 것 자체가 중요한 듯 말하지만 사회를 뒤흔드는 중요한 투쟁은 거의 언제나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행동하며 벌어진다. 다시 한 번 그 목록을 늘어놓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 1848년 혁명, 1817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혁명 모두가 그랬다. 보통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데서 오는 계급의 미발전(또는 충분히 분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혁명은 하나의 계급 또는 계층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노동계급은 소수였으며 레닌과 볼셰비키는 농민의 협력을 얻기 위해 여러 타협을 해야만 했다.

현재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터키에서 젊은 활동가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파업과 쿠르드족의 연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칠레에서는 무상교육과 공교육 강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에 교사ㆍ부두ㆍ광산ㆍ의료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연대에 나섰다
[참세상 2013년 6월 27일ㆍ링크].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은 오클랜드 항만 노동자와의 연대, 시카고 교사 파업, 월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거대한 투쟁들이 자동적으로 노동자 반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집트의 두 번째 혁명에는 무르시 정권에 반대하는 거의 모든 세력이 함께 참여했다.

계급 화해의 정치, 모호한 미래

이미 동맹은 현실에서 이뤄져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동맹이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중요한 동맹의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1849년 2월의 쁘띠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이 바로 그것이다. 1848년 파리 노동자의 6월 봉기가 무참히 진압된 뒤 쁘띠부르주아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위협받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보장해 주는 제반 민주주의적 보장책들이 반혁명으로 인해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쁘띠부르주아는 노동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접근했다". 6월 봉기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노동자는 이들의 제안에 동의해 공동강령을 마련하고 연합선거위원회를 발족해 공동후보를 추천했다.

"플로레타리아의 사회적 요구로부터 혁명적 요소가 사라지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대신하게 되었다. 쁘띠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주장에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형태가 없어지고 사회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 사회-민주주의의 독특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된다. 곧, 민주공화주의 제도가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 극단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양자 사이의 적개심을 무디게 하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 53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동맹의 결과 1849년 5월 28일 입법국민의회가 열렸을 때 마르크스가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한 산악당은 750석 중 200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 중 하나와는 맞먹을 수 있는 수였다. 특히 파리에서 선출된 의원의 다수가 산악당이라는 점에서 이 동맹은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월 13일 산악당은 2주 만에 질서당(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의 연합)에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후퇴한다. 그 지도자인 르드뤼롤랭은 영국으로 망명해 1870년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주파[산악당]는 과도적 계급, 즉 그 안에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동시에 서로 뭉뚱그러져 있는 쁘띠부르주아지의 대표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계급 적대 일반을 초월했다고 상상한다. 민주파들은 자신들이 특권계급과는 대립하고 있으나, 나머지 국민과 함께 인민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며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민의 이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법에 근거하여 투쟁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조차 그들은 여타 계급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원을 그다지 심각하게 평가할 필요조차도 없다. 단지 신호만 보내주면 인민은 자신들의 고갈될 줄 모르는 힘으로 압제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 58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1848년 6월 봉기의 패배로부터 쁘띠부르주아에 대한 의심이 가시지 않은 노동자에게 사회-민주주의의 모호한 정치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계급타협 정치의 종언

적대적인 계급의 이해관계를 화해키려는 모호한 정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브라질에서의 반란은 이러한 정치의 종말을 보여준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의 지도자인 페드로 스테딜레는 "신자유주의 15년, 그에 이어 계급타협 정부의 지난 10년은 정치를 자본의 인질로 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룰라 시절에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의 당근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세계경제위기로 지우마 호세프에겐 룰라와 같은 좋은 조건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참세상 2013년 7월 2일ㆍ링크, 레디앙 2013년 6월 27일ㆍ링크]. 그럼에도 후쿠야마는 "많은 것은 리더십에 달렸다"며 반란을 적절한 개혁에 대한 타협으로 이끌 수 있길 바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산층 중) 기업가적 소수는 정치인들에게 부패의 책임을 지우고 수혜자 중심의 정치를 가능케 하도록 원칙을 바꾸는, 브라질의 정치 체제 전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중산층 동맹의 기초를 지원할 수 있다. 이것은 광범위한 중산층이 동원돼 19세기적 정실주의를 끝장내고 공적 서비스를 개혁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성공적으로 이끈 미국의 진보 시대(1890~1920년)에 일어난 일이다. …… 호세프 대통령에게 봉기는 좀 더 야심찬 체제 개혁을 시작할 계기다."

실제로 그녀는 시위대에 대해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녀와 달리 브라질 경찰은 터키의 경찰, 이집트의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잔인한 폭력으로 시위대를 대하고 있다. 시위대 또한 정부의 유화적 태도에도 결코 물러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후쿠야마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진보 시대가 1차 세계대전과 세계적 혁명의 물결 속에 막을 내렸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터키와 이집트, 그 밖에 많은 나라의 반란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배자들이 실제로 양보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 정치인들은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의 압력하에 긴축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대중의 계속된 반란과 위협에도 말이다. 올해 초 대중의 저항에 직면해 조기총선을 치뤘던 불가리아에서는 제1당이 정부 구성 권리를 포기했다. 이집트에서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뿌리 내린 지난 수 십년의 활동을 기반으로 무슬림형제단이 1차 혁명의 성과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돼 그들도 대안이 아님이 입증됐다. 무슬림형제단은 국제통화기금의 식료품과 공공요금 보조금 삭감 압력에 굴복했다. 실업은 해결되지 못하고 더 심각해졌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억압당했다.

반란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들에서 권위주의의 강화, 경찰의 잔인한 시위대 탄압이 분노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양보할 게 없는, 타협할 여지가 없는 정부는 주먹에 의지하기 쉽다. 계급타협 정치는 좌파가 아니라 우파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먼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기회

그럼에도 계급타협 정치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반란에서 계급 간 대결이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진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중간계급의 지위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 전체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양대 계급의 대결로 몰아간다는 사정 자체가 갈등을 복잡하게 한다.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중간계급이 소부르주아적 습속을 버리긴 어려우며 프롤레타리아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현실 때문에 부르주아적 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중산층,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중간계급이 (이 둘이 완전히 일치하진 않더라도) 혁명의 대열에 끝까지 참여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무르시를 쫓아낸 2차 혁명에서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은 군부의 폭력에 기대고 있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반란의 배경이었던 국제통화기금의 긴축 압력에 맞서지 않고 있다.

노동계급도 분열돼 있다. 민족적ㆍ인종적ㆍ종교적ㆍ성적 차이에 기반한 전통적인 분열의 위세는 여전히 강력하다. 단결에 대한 열망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계급 간 타협에 대한 미련도 그렇다. 이번 반란들도 분열된 노동계급의 현실 때문에 단일한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인민' 또는 '민중'의 반란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는 없다. 패배든 승리든 반란은 현실의 역사에 흔적을 남길 것이고 그 흔적은 어느 계급이 혁명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최근의 반란으로 사회 전체가 흔들리며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진출하고 있다. 때로는 반란에 적대적인 세력까지도 집단적 행동으로 역사의 키를 쥐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산층의 혁명'은 지나치게 협소한 규정이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동맹은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고 갈등할 것이다. 중산층 중심의 계급타협 동맹은 우파와 지배계급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따라서 동맹에서 어떤 정치에 의한, 어느 계급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여러 투쟁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계급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학생 반란에는 교사와 광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스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노동계급은 2011년 아랍의 봄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허약해 보이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몇몇 짧은 장들을 예외로 한다면, 1848년에서 1849년까지의 혁명 연보는 중요한 부분마다 "혁명의 패배!"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패배 때문에 사라진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의 잔재, 다시 말해 아직 날카로운 계급 대립으로까지는 고양되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것은 2월 혁명 이전의 혁명적 당파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ㆍ환상ㆍ관념ㆍ계획들이었는데 혁명적 당파들은 2월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패배를 통해서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적 진보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진보의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들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결속력 있고도 막강한 반혁명이라는 하나의 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인데, 이 적과의 싸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혁명적 당파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으로 성숙해 갔다.
-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프랑스 혁명사 3부작' 39쪽, 임지현 외 옮김, 소나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당파는 패배를 통해서만 과거의 습속과 환상,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현대의 우리도 이어진 투쟁의 굴곡 속에 몇몇, 때로는 심각한 패배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열었고, 그들이 멈췄던 곳으로부터 보다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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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에서 생산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은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동일한 노동과정의 한 단계로 취급될 수 있음을 살펴봤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보존되어 생산물로 이전한다. 면화는 방적노동에 의해 소멸되어 면사의 형성요소가 된다.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의 원래의 형태는 소멸되지만, 그것은 오직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위해 소멸될 뿐이다"(265쪽).

"노동자가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즉, 그것을 생산물의 가치성분으로 생산물로 이전하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일반(勞動一般)을 첨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첨가되는 노동의 특수한 유용성(有用性), 그것의 특수한 생산적 형태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265쪽)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수단에 가치를 첨가하는 것은 오직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으로서만 그렇게 한다.

"노동의 단순한 양적(量的)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質)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노동의 이중성(二重性)으로부터 생기는 이러한 이중의 효과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명백히 나타난다."(266쪽)

생산조건의 변화로 방적노동이 동일한 시간에 여섯 배의 면화를 면사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자. 동일한 시간의 노동에 생산물로 이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여섯 배가 된다. 그러나 여섯 배의 생산수단에 첨가된 노동량은 이전과 같다. 즉 1파운드의 면화는 이전의 1/6의 노동만이 첨가된다. 생산성이 변하지 않고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있다.

생산적 노동은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와 가치를 소멸시키고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는 한에서만 새로운 노동을 첨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첨가하는 노동은 반드시 특정의 유용한 형태이어야 하며, 생산물들을 새로운 생산물의 생산수단으로 사용해 그들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유용한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273쪽).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중의 노동력[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경기가 좋은 동안에는 자본가는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노동의 이 무상(無償)의 선물을 보지 못하지만, 노동과정의 강제적인 중단, 즉 공황(恐慌)은 자본가로 하여금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273~274쪽)

정리하면 생산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은 생산수단의 사용가치다. 가치는 소비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再現)"된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다른 요소, 활동하는 노동력의 경우는 다르다. 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으로서 생산수단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는동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앞의 7장의 예에서 방적공이 6시간의 노동을 하고 일을 마친다고 하자. 그는 12원의 생산수단에 3원의 가치를 덧붙인다. 이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전된 가치(12원)를 넘는 가치다.

"이 가치는 이 생산과정 내부에서 발생한 유일한 본원적 가치(本源的 價値)이며, 생산물의 가치 중 이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된 유일한 부분이다."(275쪽)

물론 우리의 자본가는 자신이 노동력 구매를 위해 지출한 화폐(3원)를 들먹일 것이다. 지출된 화폐에서 보자면 3원이라는 새로운 가치는 재생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재생산된 것이고, 생산수단의 가치처럼 외관상으로만 재생산된 것【가치가 이전된 것】은 아니다. 한 가치의 다른 가치에 의한 대체는 이 경우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276쪽)

당연히 우리의 자본가는 6시간을 넘겨 노동과정을 지속시킨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再生産)할 뿐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超過價値)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差異)이다"(276쪽).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한다. 그는 생산수단과 노동력 구입에 들어간 자본 중 생산수단에 투입된 것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른다. 이는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시장에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조건 등의 변화로 끊임없이 변동한다).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은 그 가치를 보전하고 이전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력 구입에 들어간 자본을 가변자본이라고 부른다. 노동력은 그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그 이상의 초과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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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노동과정 【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으스대며 앞서 걸어가고 노동자는 풀이 죽어 뒤따라간다. 그들은 공장ㆍ농장ㆍ광산ㆍ공사장ㆍ상가ㆍ사무실로 들어간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소비하기 위해서 구매했다. "노동력(勞動力)의 사용이 바로 노동(勞動)이다"(235쪽).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우선 사용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은 사회형태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7장 1절에서 사용가치 생산의 일반적 성질, 즉 노동과정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검토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다. 인간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사용해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자신도 변화시킨다. 자연과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는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노동이 동물과 다른 것은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236쪽)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目的)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organs)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236쪽)

노동과정에서 인간의 의지ㆍ정신은 자연과 자기 자신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타인 혹은 스스로에 의한 규제와 통제를 요구한다. "노동의 내용과 수행방식이" 노동자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236쪽)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노동 일반은 인간 생존의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예찬 받아야 할 어떤 이상적 상태는 아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을 '육체노동'으로만 한정짓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신체의 활용은 '머리', 즉 정신 또는 관념의 사용도 포함된다. '합목적적 의지'는 타인에 의해서 주어지든, 자기 자신에 의해 강제되든 인간 노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노동과정에는 노동 그 자체(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와 노동대상, 노동수단이 요소로 필요하다. 노동대상은 인간의 노동이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다. 노동수단은 노동대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와 노동대상을 연결해주는(중개하는) '전도체(conductor)'다. 노동과정 수행에 필요한 다른 모든 개체적 조건들도 노동수단에 포함된다. 벌목꾼에게 숲의 나무는 노동대상이다. 나무를 베기 위한 톱과 도끼는 노동수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재는 목수에게 노동대상이다. 목수는 망치와 대패 등의 노동수단을 이용해 노동대상인 목재를 책상과 의자로 만든다. 목수가 책상과 의자를 만드는 작업장(땅과 기둥ㆍ천장 등)도 노동수단이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인간을 '도구(道具)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遺物)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238쪽)

선사시대를 석기시대ㆍ청동기시대ㆍ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여기서 '석기ㆍ청동기ㆍ철기'는 그 시기 인간이 사용한 주요 도구(노동수단)다. '자연과학적 연구'로 취급되긴 하지만 인간의 물질적 생산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측면에서 올바르다.

지금까지를 요약하면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變化)를 일으킨다"(239쪽).

노동과정의 결과물인 생산물 입장에서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노동은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 생산물은 또 다른 노동과정에 투입돼 생산수단으로 되기도 한다. 따라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結果)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條件)이기도 하다"(240쪽). 생산의 결과인 사용가치가 다음 과정의 생산에 어떠한 역할을 할지는 가변적이다. 면화는 그 자체로 솜옷과 이불에 사용된다. 때론 실을 뽑아내기 위한 원료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치가 변하는 데 따라 그 사용가치의 규정도 변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 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242쪽). 결함이 없는 생산물에는 과거의 노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소비'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생산적 소비(productive consu mption)'라고 부른다. 개인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는 소비자 자신을 만들어 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 자신과 구별되는 생산물을 만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勞動過程)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밀죽의 맛을 보고 누가 그 밀을 경작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노동과정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 하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다. 즉, 노예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밑에서인지 또는 자본가의 주의깊은 눈초리 밑에서인지, 또는 킨킨나투스【Cincinnatus: 고대 로마의 장군, 은퇴 한 뒤 농사를 지었다.】가 자기의 작은 토지의 경작으로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돌로 야수를 쳐죽이는 미개인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244쪽)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특수하고 역사적인 사회형태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한 자본가의 공장에서도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동일하다(마르크스는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산방식 그 자체가 변화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의 생산방식에서의 혁신에 대한 찬사(?)로 유명하다).

마르크스는 다음 절(가치증식과정)로 넘어가기 전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 노동과정의 특징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所有)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所有物)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245쪽).


제2절 가치증식과정(valorization process)

노동과정의 결과물 그 자체를 위해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교환가치를 지닌 사용가치, 즉 판매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의 총액은 그 자신이 생산을 위해 투하한 화폐의 총액(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는 데 든 총액)보다 커야 한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價値)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려고 한다."(247쪽)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노동과정은 상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價値形成過程)의 통일이어야 한다"(247쪽). 이번 절에서는 바로 이 가치형성과정을 고찰한다.

마르크스는 면사의 생산과정을 예로 들어 가치형성과정을 살핀다. 10파운드의 면사 생산에 10파운드의 면화와 1개의 방추가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면화 10파운드의 가격은 10원, 방추 1개의 가격은 2원이라고 하면 면사 10파운드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은 12원이다. 12원의 금량을 생산하는 데 2노동일(24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생산수단 12원에는 2노동일의 사회적 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것이다.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가 된다. "여러가지 특수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는] 노동과정들은 동일한 하나의 노동과정의 순차적인 각각의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249쪽).

이를 위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우선 면화와 방추가 실제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 둘째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이후 면사의 생산에도) 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선 안 된다. 금으로 만든 방추를 사용한다고 해서 면사가 더 많은 가치를 얻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살피는 것은 "방적공의 노동이 면화에 첨가하는 가치부분"이다.

노동과정으로서 면사의 생산을 살필 경우 방적공의 노동은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특수한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다. 그러나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한 그 노동은 대포를 만드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면화재배ㆍ방추제조ㆍ방적이 면사의 가치라는 하나의 총가치(總價値)의 단순히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부분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250쪽), 즉 동일한 노동과정의 각각의 단계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자의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량의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변화시킨다. 즉 면화에 일정량의 노동이 첨가된다. 여기서도 다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일정한 [경험적으로 확정된] 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따름이다."(251쪽)

이제 면사 10파운드에 들어있는 총가치를 검토하자. 우선 면사 10파운드 생산에는 면화 10파운드와 방추 1개가 필요하다. 이는 12원이고 모두 2노동일이 대상화돼 있다. 방적 노동자는 1시간에 1과2/3파운드의 면화를 1과2/3파운드의 면사로 변화시킨다고 가정하자. 10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6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방적 노동자의 하루 노동력 가치는 3원이다. 따라서 면사 10파운드에는 모두 2와1/2노동일의 노동이 응고되어 있고, 그 가격은 15원이다. 면사 10파운드를 생산하는 데 투하한 가치 15원은 여전히 15원이다. 이래서는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생산에 나설 이유가 없다.

"투하된 가치는 증식(增殖)되지 않았고,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資本)으로 전환되지 않았다."(252~253쪽)



그러나 노동력 재생산에 6시간(3원, 1/2노동일)이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의 자본가가 노동자를 6시간만 일을 시킬 이유는 없다.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즉,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즉, 하루의 노동]은 그에게 속한다. 노동력은 하루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하루동안 유지하는 데는 1/2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257쪽)

이제 자본가는 노동력을 12시간동안 사용하려 한다. 작업장에 들어간 노동자는 12시간의 노동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발견한다. 노동자는 20파운드의 면화(20원, 3과1/3노동일), 2개의 방추(4원, 2/3노동일)을 발견한다. 24원의 생산수단과 3원의 노동력이 생산에 투입된다. 3원의 노동력은 추가된 6시간동안 3원의 가치(6시간, 1/2노동일)를 더한다. 이제 생산물의 총가치는 30원이 된다. "그리하여 27원은 30원으로 되었으며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낳았다.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258쪽).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칙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방추·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원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원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원이나 더 많이 유통으로부터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 과정은 유통영역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258쪽)

가치증식과정은 가치창조과정이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로 보상되는 점을 넘어 계속되는 과정이다.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나 가치형성과정은 오직 양적 측면에서만 다뤄진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繼續時間)뿐이다"(259쪽).

가치형성과정의 고찰에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259쪽). 즉 사회의 주어진 생산조건 하에서 평균적인 조건하에서 노동력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뮬 자동 방적기가 지배적인 생산수단인 사회에서 물레로 방적을 해서는 안 된다. 물레를 이용해 면사를 생산할 때 더 들어가는 초과시간은 가치를 형성하지 못한다.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 것인가 아닌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다"(260쪽). 하지만 현실에서 자본가들은 화폐를 아끼기 위해 정상보다 뒤쳐진 생산수단을 투입하면서도 노동력에게는 정상 이상의 활동을 요구하기도 한다(이는 한편 이윤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생산수단을 아껴야 하는 내적 동인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한편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260쪽). 자본가는 시장에서 평균적인 능률 이상의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노력한다(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고급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사회적 평균보다 낮은 가치를 지닌 노동력-이주노동자-을 구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생산과정에서 능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잠시라도 노동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일정한 기간 구매했으므로,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260쪽). 낭비된 원료와 생산수단도 생산물의 가치에 들어가지 않기에 자본가는 원료와 노동수단의 절약을 위해 노력한다.

마르크스는 1장에서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다(261쪽). 이 차이는 생산과정의 두 측면으로 나타난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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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우선 화폐 그 자체로는 가치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구매수단과 지불수단으로서 화폐는 상품의 가격을 실현할 뿐이다. 화폐를 유통에서 빼내어 쌓아놓는 것(퇴장)이 가치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도 자명하다.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을 다시 살펴보자. 구매한 상품을 다시 판매하는 과정(C-M)에서도 가치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상품을 현물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치변화는 구매(M-C)한 상품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 상품의 가치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구매 또한 오직 그 가치대로 지불되는 등가물끼리의 교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消費)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그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노동의 대상화, 따라서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勞動力: labour-power)이다."(218~219쪽)

화폐소유자가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것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노예와 농노는 노예주와 봉건영주의 의지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 또한 노동력 소유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오직 한정된 시간 동안만 판매해야 한다. 자신의 전 생애를 모두 판매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한 노예 혹은 농노와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노예적 강제 노동을 오직 일탈로서만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개별 자본가의 이해와 달리 보통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는 노예적 강제 노동을 강력히 단속하려 한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두 번째 조건은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 자신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는 방법 이외에 자신의 생활수단과 상품을 생산할 수단(생산수단)을 지니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 유지 혹은 시장에 내놓을 상품의 생산을 위한 수단을 지닌 노동자는 그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free)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自由人: free individual)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物件)을 가지고 있지 않다(free of)는 의미다."(221쪽)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를 만나게 되는 사연은 뒤의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에서 다룰 것이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221쪽).

분명히 어느 정도 발전한 사회적 분업을 기초로 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勞動者)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222쪽). 따라서 이 조건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새로운 세계사를 형성한다.

우리의 관심을 다시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돌려보자. 이 상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지니고 그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223쪽). 노동력은 노동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상품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은 결국 노동자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로 계산된다.

노동자가 정상적인 건강상태를 유지해 다음날 다시 노동과정에 투입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은 육체의 물리적인 한계에 의해서만 규정되진 않는다.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이 어떤 조건 하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및 도덕적 【정신적】 요소(historical and moral element)가 포함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의 일정한 나라에는 노동자들의 필요생활수단의 평균적 범위는 주어져 있다."(224쪽)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에는 또한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재생산하기 위한 생활수단들도 포함된다. 즉 출산과 육아를 위한 생활수단이 포함됨으로써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노동력 판매자를 세대를 넘어 영원히 만날 수 있게 된다. 한편 작업의 숙련을 위한 교육 비용도 노동력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에 포함된다.

실제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최저생계비(빈곤선)를 결정하는 데는 육체적 지속을 위한 상품들의 가격과 함께 출산과 육아ㆍ교육, 문명의 발전 정도가 반영된다. 한국의 경우 과거에 포함돼 있지 않던 통신비가 최근에는 필수적 항목으로 포함된다. 나라에 따라서는 적당한 문화생활(영화, 공연, 스포츠)을 위한 비용을 포함하기도 한다.

역사적 도덕적 조건과 함께 상품가치 변동은 노동력의 가치를 변화시킨다. 임금수준을 결정하기 위한 갈등에서 물가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미국 노동자의 임금 1970년대 중반 이후 오르지 않았음에도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중국산의 싸구려 상품 덕이다. 대형 마트의 저가 상품은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노동력 상품은 구매와 동시에 사용가치가 실현되지 않는다. 노동력의 사용가치, 즉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걸쳐서 실현된다. 보통은 노동계약 후 일정한 기간 노동력을 발휘한 다음에 후불로 임금을 지불받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의 구매와 판매에 대해 살펴봤다. 노동력 사용가치의 실현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노동력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유통의 밖에서 이뤄진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바로 그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및 노동력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분야를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230쪽)

우리가 이 비밀을 파헤치기 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상품교환과 유통분야의 모습은 천부인권이 지켜지는 참다운 낙원처럼 비춰진다. 노동력의 구매자도 판매자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들은 동등한 상품소유자로서 평등하게 등가물끼리 교환한다. 이 상품소유자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처분권을 지닌다. 따라서 각자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지닌 이 모든 행동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설파하듯이 신의 섭리처럼 서로간의 이익,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이 된다. 오직 상품의 유통과 교환의 영역에만 관심을 지닌 주류 경제학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정된 조화를 이뤄낼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한 (따라서 위기와 파괴에 관심이 없거나 그것을 정상에서의 일탈로만 치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음 장부터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생산영역에 따라 들어감으로써 가치와 잉여가치 생산의 비밀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화폐소유자와 노동자가 앞서 가고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231쪽)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