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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2권이 최근 출판됐다. 출판사는 책을 소개하면서 옮긴이가 "『자본』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비의 계산 오류를 바로잡기도 했으며, 적재적소에 주석을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1권을 읽으며 도움을 많이 받은 나로서도 역서가 얼른 나오길 바라왔다. 그렇게 펼쳐 든 책의 앞 부분에서 두 가지 오류를 발견해 여기에 적어놓는다. 우선 간단한 오역이다.

"한때 화폐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던 상인은 이제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덕분에, 그들에게 제공되는 잉여가치 부분만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하비 2권 강신준 옮김 56쪽

자본주의에서 상인이 얻는 수익의 근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상인이 '화폐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는 걸로 수익을 얻었던가. 화폐를 이용해 돈을 버는 건 상인이 아니라 금융자본 아니었던가. 원문을 확인해봤다.

"Merchants, who once made their money buying cheap (or by robbery and stealing) and selling dear, can appropriate only that share of the surplus-value that accrues to them by virtue of the services they render to surplus-value production and realization."
- 영문판 30~31쪽

'made their money …' 부분이다. 내가 보기엔 "한때 저렴하게 사들여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돈을 (혹은 강도행위와 도둑질로) 벌던 상인은 …"이라고 옮기는 게 맞는 것 같다. 괄호 안 'or by robbery and stealing'을 옮기지 않은 것도 아쉽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 하에서 '수탈'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상업자본이 정직한 부지런함과 상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민한 대처 만으로 돈을 벌어온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하비의 기존 주장들을 고려했을 때 괄호 안의 문구를 삭제한 것은 그의 주장을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옮긴이 주에서의 실수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 '참된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 오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던 생산물이 내일은 다른 비슷한 상품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M1: 122. 뒷 문장은 출처를 알 수 없음. 하비는 펭귄판 202~03면에 있다고 표시해두었지만 해당 부분에는 그런 구절이 없음-옮긴이)
- 하비 2권 강신준 옮김 58쪽

강신준 교수는 해당 부분을 찾지 못해 '그런 구절이 없음'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펭귄판 '자본론'에 분명히 있다. 물론 여기엔 하비의 잘못과 실수도 있다. 잘못은 앞뒤를 바꿔 조합해 인용했다는 것이고 실수는 펭귄판 202~203쪽이 아니라 201~202쪽에 해당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We see then that commodities are in love with money, but that 'the course of true love never did run smooth')"는 펭귄판 202쪽에 있고 "오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던 생산물이 내일은 다른 비슷한 상품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Today the product satisfies a social need. Tomorrow it may perhaps be expelled partly or completely from its place by a similar product)"는 201쪽에 있다. 강신준 교수가 MEW에서 직접 옮긴 길판에선 앞 문장이 176쪽, 뒷 문장은 175쪽에 나온다.

"알다시피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176쪽

"오늘 생산물은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그러나 내일은 그 생산물 가운데 전부 또는 일부가 다른 유사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그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
-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175쪽

지난해 작고한 김수행 교수의 2015년 개정판에는 다음과 같이 옮겨져 있다.

"이와 같이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140쪽

"오늘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생산물이, 내일에는 어떤 비슷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139쪽

하비가 앞뒤를 바꿔 인용하고 출처 표기를 실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런 구절이 없음'이라고 단정적으로 옮긴이 주를 단 것은 강신준 교수의 명백한 잘못이다. 그 앞뒤로 조금만 더 살폈어도 충분히 찾아내 하비의 실수를 교정할 수 있었다. 자본론의 번역자이고 연구자인 강신준 교수의 이런 실수는 너무 아쉽다.

오역의 문제는 1권에도 있었다. 떠오르는 게 하나 있어 찾아보니 1권 55쪽의 문장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 하비 1권 강신준 옮김 55쪽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가치의 변증법적 관계를 말하는 부분이다. 원문을 찾아보지 않아도 앞 문장과 뒤 문장이 똑같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원문은 이렇다.

"Can you talk about exchange-value without talking about use-value? No, you can't. Can you talk about value without talking about use-value? No."
- 영문판 24쪽

즉 뒷 부분의 '교환가치'는 '가치'가 맞다. 최근 판매되는 책에서 고쳐졌는지는 확인 못했다.

연구자와 번역자들의 노고는 내 독서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강신준 교수의 번역 작업에도 항상 고마움을 느껴왔다. 하지만 이런 실수들로 인해 그의 작업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곤 한다. 강신준 교수와 출판사는 서둘러 이런 오류들을 찾아 수정해줬으면 좋겠다.

Posted by 때때로

2014년 11월 15일 작성, 일부 수정

자크 비데와 제라르 뒤메닐이 쓴 새 책이 나왔다. 제목은 '대안마르크스주의'. 이 책의 서론에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이야기가 앞 부분에 나온다.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제공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스승을 찾고 있던 러시아의 [근대] 초기 혁명가들에게 "어떤 경우라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응답한 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 17쪽.

그래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독자들은 마치 이 이야기가 플레하노프와 자술리치 같은 러시아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해, 혹은 더 직접적으로 레닌과 그의 동료들에 대해 한 얘기인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와 관련해선 우선 프랑스 노동당 건설을 위해 쥘 게드와 마르크스가 함께 작성한 강령의 해설에서 이 이야기의 배경을 발견할 수 있다.

Accusing Guesde and Lafargue of "revolutionary phrase-mongering" and of denying the value of reformist struggles, Marx made his famous remark that, if their politics represented Marxism,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what is certain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개혁을 위한 투쟁의 가치를 폄하하며 '혁명적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게드(프랑스 노동계급 지도자)와 라파르그(마르크스의 사위)를 비난하며 마르크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발언을 내놓는다. 만약 저들의 정치를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면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확실한 것은 내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1880년 프랑스 노동당 강령에 대한 편집자의 해설(링크)

이는 노동당 건설을 위한 강령을 의논하기 위해 게드와 라파르그를 만난 이후를 설명한 글이다. 마르크스의 이 언급은 엥겔스가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Marx and Engels, Werke, Vol.35 p.388)에 인용돼 있다.

Nor have you any other source, i.e. other than Malon at second hand, for your reiterated assertion that in France 'Marxism' suffers from a marked lack of esteem. Now what is known as 'Marxism' in France is, indeed, an altogether peculiar product — so much so that Marx once said to Lafargue: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If anything is certain, it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존중받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는 당신의 반복된 주장은 말롱(제1 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한 염색 노동자)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근거도 제시할 수 없다. 현재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라고 알려진 것은, 정말로 완전히 기이한 결과물이다. 언젠가 마르크스가 라파르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정도로 말이다.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무언가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1882년 11월 2일 엥겔스가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링크)

엥겔스는 이 말을 1890년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반복한다.

Just as Marx used to say, commenting on the French "Marxists" of the late [18]70s: "All I know is that I am not a Marxist."
마르크스는 1870년대 후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해 언급할 때면 꼭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아는 전부는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1890년 8월 5일 엥겔스가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링크)

이 언급들 모두 매우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른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이 사정에는 그의 사위 라파르그가 끼어있다. 실제로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는 1889년 라파르그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We have never called you anything but 'the so-called Marxists' and I would not know how else to describe you. Should you have some other, equally succinct name, let us know and we shall duly and gladly apply it to you.
우리는 너를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 외에 어떤 것으로도 부르지 않았었고 그것 외에 어떻게 너를 묘사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간결한 이름 같은 다른 어떤 것을 네가 가졌다면 우리에게 알려주렴. 우리는 당연히도 기꺼이 너를 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 1889년 5월 11일 엥겔스가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링크)

그런데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구체적 맥락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물론 정확한 인용 표기도 없이 마구 사용되고 있다. 그것도 매우 눈에 잘 띄는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말이다. 최근 뒤메닐 글을 읽으며 자꾸 실망하는 데, 이번 글도 '서론'에서부터 실망스러운 것 투성이다. 그 앞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 말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저 문구를 그저 '일반적 상황'에 대입해 썼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터이다. 명백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를 대상으로 한 말을 '러시아의 근대 초기 혁명가'들에게 했다는 건 터무니없는 왜곡일 뿐이다.

'저명한 저자'라고 해서 의심 없이 읽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 글에도 심각한 오역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Posted by 때때로

이미 좀 지난 일이지만 8월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둘러싼 작은 논쟁이 있었다. 지난해 경향신문에 연재되면서 나를 포함한 몇몇에게 비판을 받았던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그 중심이다. 사실 논쟁이라고 하기도 부끄럽다. 강신준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기존 단어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사용하며 시종일관 말돌리기와 도덕적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이건 예견된 일이다. 내 비판에서도 촛점은 강신준 교수의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지식에 대한 왜곡과 날조였다. 정치적 이념 혹은 학문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강신준 교수는 논쟁에 정당하게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마르크스의 적자로 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부활한 사민당은 점차 우경화 하다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그 핵심인 계급투쟁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영국 노동당이 국유화 강령을 포기한 것보다 30여 년 앞선 것이다.

더 심한 왜곡은, 아니 왜곡이라기보다 뻔뻔한 사기라고 해야 마땅한 데, 마르크스를 개혁의 기수로 내세우고자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 이런 경향은 꽤 오래전부터, 사실상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존 당시부터 있어왔다. 엥겔스가 '반뒤링'을 쓴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뒤링이 마르크스주의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없으니 그 시작은 베른슈타인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강신준 교수에 비해선 매우 솔직하다. 그의 후예들도 대부분 강 교수보다는 정직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혁주의적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왜곡하기보다는 마르크스를 '수정'하는 것을 택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것도 한 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훨씬 정직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정도의 정직함을 지니지 못한 강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변혁'과 '개혁'을 제멋대로 사용하며 마르크스를 자본주의 개혁 정치의 선구자로 그리고자 시도한다.

애초에 학문적 논쟁이 될 수준도 못됐을 뿐더러 저열한 사기 공작에 불과한 강신준 교수의 시도에 일일이 대응하는 게 문제였을 수 있다. 게다가 기초적인 역사적 지식에서 잘못된 부분도 너무나 많아 비판 이전에 교정하는 데만도 너무 많은 수고가 들었다. 초기에 열정적으로 비판을 준비하다가 그만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 지나가 잊혀진 논쟁을 내가 다시 끄집어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잠언 26장 4~5절은 우리에게 여전한 딜레마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지 마라. 너도 그와 비슷해진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지혜로운줄 안다.

아래는 미디어오늘에 연재된 김성구-강신준 교수 논쟁의 링크다.

김성구 1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강신준 1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김성구 2 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강신준 2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김성구 3 쟁점은 수정주의·교조주의가 아니라 ‘자본’ 곡해 여부다
강신준 3 김성구 교수와의 논쟁을 끝내면서
김성구 4 자본론 논쟁의 결말

Posted by 때때로

협동조합 '가장자리'의 격월간지 '말과활'이 창간됐다. 가장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홍세화 선생이 머리말에서 '민중'이란 말 대신 '인민'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인민이란 말이 우리 언어 생활에 그리 익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은 왜 인민이란 말을 썼을까?

인민은 "국가를 구성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보통은 이와 함께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를 말할 때 사용된다. 비슷한 단어로 '민중'이 있다. 둘 다 특정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지만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은 민중에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ㆍ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인민이란 단어가 남북 분단 상황에서 금기시 된 때문이다. "늘 친하게 어울리거나 함께 노는 사람"을 뜻하는 '동무'란 단어가 분단 이후 잘 쓰이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즉 분단 상황에서 내면화한 반공주의의 영향으로 인민 대신 민중이 쓰이게 된 것이다. 내가 보통 민중 대신 인민을 사용하는 첫 번째 이유는 특정한 정세가 내 언어생활을 제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서다
(북한 정권에 동의하지 않고 북한 인민이 스스로 나서 지배자들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홍세화 선생도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홍 선생의 인민이란 단어의 사용이 반가운 것은 우선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민중 대신 인민을 사용하는 바로 그 이유와 연관된 다른 문제 때문에 홍 선생이 인민을 사용한 데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인민은 피지배 계급 일반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노동자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들이 오직 노동계급의 조건 개선 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피지배 계급 일반의 조건,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배와 피지배의 조건을 결정짓는 핵심 고리에 노동계급이 위치해서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회주의자는 인민 일반의 해방을 목표로 하지만 그 해방에서 노동계급이 핵심적 역할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민중 담론은 그렇지 않다. 이는 한편 위에서 지적한 내면화한 반공주의의 연장선에서 비롯한 것이기는 하다. '노동자'라는 말을 '근로자'가 대체한 사정과 같다. 그렇지만 더 중요하게는 민중 담론이 노동계급의 핵심적 역할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노동자ㆍ농민ㆍ학생의 연대를 강조하는 민중 담론은 이들 세 사회적 집단을 수평적으로만 파악한다. 핵심은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다. 홍세화 선생이 사용한 인민이란 단어가 불길한 것은 그것이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머리말에서 안개에 싸여있던 인민의 의미는 뒤이은 지젝과 이진경의 글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나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이란 개념을 포기할 수 없게끔 할 뿐만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어서 그 개념을 실존적 차원으로까지 급진화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적 주체에 대한 더 급진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 주체는 모든 실체적 내용을 제거한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무상의 지점으로까지 환원되는 주체다. 이런 이유에서 새로운 해방의 정치는 더이상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각기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인 결합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으나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젝은 그것을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유로 들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이전으로 후퇴하는 주장일 뿐이다. 무정형의, 단지 지배받는 집단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로 말이다. 마르크스가 한 작업은 이 프롤레타리아라는 로마 시절로부터 비롯한 개념을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 원리에 입각한 개념으로 바꿔놓는 것이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노동자인 것이다. 노동계급은 여러 사회적 집단 중 억압받고 착취받는, 지배받는 유일한 사회적 집단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지배 사슬의 핵심적 고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목한 것이다. 결국 지젝의 주장은 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진경에 의해 다시 반복된다. 이진경은 지젝보다는 덜 철학적인 언어로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M'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제가 혁명성을 말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이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트였다는 것을 일단 상기해주길 바랍니다. …… 역사적 조건에 따라 누가 무산자인가가 달라지는 거지요. 16세기에는 토지 잃고 부랑하던 농민들이 무산의 프롤레타리아트였다면, 19세기에는 끔찍한 조건에서 노동해야 했던 산업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였던 것이고, 당신(이진경)이 생각하듯이 안정적으로 노동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어버린 지금은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들이 새로이 무산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 거지요."

마르크스가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로 노동계급을 바라봤다는 것은 아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는 '공산당선언'에서 여러 번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의 노동계급(the proletariat, the modern working class)"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마르크스는 당대 자본주의의 발전, 아직은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서 일어나던 변화를 추적해 노동계급이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진경의 주장 대로 노동계급이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게 만드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진경은 마르크스를 사칭할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역사적 조건의 변화를 추적할 능력은 없는 듯하다. 그가 기껏 내세우는 것은 인상주의적 비평에 불과하다.


"지금은 정규직이란 단어와 함께 유사하게 사용되는 '노동자계급'……은 바로 옆에서 똑같은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정규직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게 차단하고, 그들이 옆에서 투쟁할 때 연대는커녕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통상적인 게 되었죠."

정규직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관한 비난에 불과한 것으로 마르크스의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대체할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대중의 상식에 부합하는 듯 보여도 말이다. 불길하게도 홍세화 선생은 이진경에게 동의하는 것 같다. 다시 들춰본 머리말에서 홍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인민도 이제 하나의 인민이 아니고, 노동자도 이미 하나의 노동자가 아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과의 대화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가치가 상승하기를 바라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 가입조차 안 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노동자가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인가, 더구나 이들이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인가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홍세화 선생은 이진경과 공명한다. 물론 우리는 홍 선생 외에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런 주장을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새로운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경향인가? 우리는 마르크스 시절부터 이미 인민이 하나의 인민이 아니었음을, 노동자가 하나의 노동자는 아니었음을 떠올려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영국의 노동자와 그 식민지 아일랜드의 노동자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계급 남성이 어떻게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 내 분열에 대한 인상주의적 비평이 아니다. 그 분열의 물질적 조건을 살피고 단결의 단초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안전판'으로 고려하게 된 조건, 그리고 그것을 벗어날 계기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홍세화 선생과 이진경은 분열만 얘기할 뿐 그 역사적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인상주의적 비평으로 어물쩍 넘어간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곳에서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만들고 재생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과 여성, 지역 공동체가 담당하던 많은 역할이 점점 더 자본주의적 경제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
(과거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위계제는 마르크스가 설명한 방식 그대로 사회에 더 많은 위계와 복잡한 지배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파악을 도외시한 채 현실을 지양하는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이 가능할까. 최근 잇따라 창간된 여러 진보 잡지들(월간 좌파, 진보신당-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말과활)이 현재 세계를 휩쓰는 반란의 물결에 침묵하는 것과 함께 2008년 이래 6년째 계속되고 있는 경제위기에 대한 분석을 피하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다.

p.s.'말과활' 창간호에 실린 이진경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마르크스는 신성한 이름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적 한계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즉 역사적 조건이 달라지면 그의 주장은 틀린 게 될 수 있다. 마르크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의 주장에서 변형되어야 할 부분과 이어받아야 할 부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점에서 이진경이 마르크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 자체를 뭐라 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후예를 자처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마르크스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름 뒤에 숨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우리는 앞에서 생산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은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동일한 노동과정의 한 단계로 취급될 수 있음을 살펴봤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보존되어 생산물로 이전한다. 면화는 방적노동에 의해 소멸되어 면사의 형성요소가 된다.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의 원래의 형태는 소멸되지만, 그것은 오직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위해 소멸될 뿐이다"(265쪽).

"노동자가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즉, 그것을 생산물의 가치성분으로 생산물로 이전하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일반(勞動一般)을 첨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첨가되는 노동의 특수한 유용성(有用性), 그것의 특수한 생산적 형태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265쪽)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수단에 가치를 첨가하는 것은 오직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으로서만 그렇게 한다.

"노동의 단순한 양적(量的)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質)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노동의 이중성(二重性)으로부터 생기는 이러한 이중의 효과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명백히 나타난다."(266쪽)

생산조건의 변화로 방적노동이 동일한 시간에 여섯 배의 면화를 면사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자. 동일한 시간의 노동에 생산물로 이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여섯 배가 된다. 그러나 여섯 배의 생산수단에 첨가된 노동량은 이전과 같다. 즉 1파운드의 면화는 이전의 1/6의 노동만이 첨가된다. 생산성이 변하지 않고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있다.

생산적 노동은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와 가치를 소멸시키고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는 한에서만 새로운 노동을 첨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첨가하는 노동은 반드시 특정의 유용한 형태이어야 하며, 생산물들을 새로운 생산물의 생산수단으로 사용해 그들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유용한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273쪽).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중의 노동력[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경기가 좋은 동안에는 자본가는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노동의 이 무상(無償)의 선물을 보지 못하지만, 노동과정의 강제적인 중단, 즉 공황(恐慌)은 자본가로 하여금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273~274쪽)

정리하면 생산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은 생산수단의 사용가치다. 가치는 소비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再現)"된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다른 요소, 활동하는 노동력의 경우는 다르다. 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으로서 생산수단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는동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앞의 7장의 예에서 방적공이 6시간의 노동을 하고 일을 마친다고 하자. 그는 12원의 생산수단에 3원의 가치를 덧붙인다. 이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전된 가치(12원)를 넘는 가치다.

"이 가치는 이 생산과정 내부에서 발생한 유일한 본원적 가치(本源的 價値)이며, 생산물의 가치 중 이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된 유일한 부분이다."(275쪽)

물론 우리의 자본가는 자신이 노동력 구매를 위해 지출한 화폐(3원)를 들먹일 것이다. 지출된 화폐에서 보자면 3원이라는 새로운 가치는 재생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재생산된 것이고, 생산수단의 가치처럼 외관상으로만 재생산된 것【가치가 이전된 것】은 아니다. 한 가치의 다른 가치에 의한 대체는 이 경우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276쪽)

당연히 우리의 자본가는 6시간을 넘겨 노동과정을 지속시킨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再生産)할 뿐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超過價値)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差異)이다"(276쪽).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한다. 그는 생산수단과 노동력 구입에 들어간 자본 중 생산수단에 투입된 것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른다. 이는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시장에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조건 등의 변화로 끊임없이 변동한다).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은 그 가치를 보전하고 이전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력 구입에 들어간 자본을 가변자본이라고 부른다. 노동력은 그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그 이상의 초과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제1절 노동과정 【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으스대며 앞서 걸어가고 노동자는 풀이 죽어 뒤따라간다. 그들은 공장ㆍ농장ㆍ광산ㆍ공사장ㆍ상가ㆍ사무실로 들어간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소비하기 위해서 구매했다. "노동력(勞動力)의 사용이 바로 노동(勞動)이다"(235쪽).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우선 사용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은 사회형태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7장 1절에서 사용가치 생산의 일반적 성질, 즉 노동과정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검토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다. 인간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사용해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자신도 변화시킨다. 자연과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는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노동이 동물과 다른 것은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236쪽)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目的)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organs)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236쪽)

노동과정에서 인간의 의지ㆍ정신은 자연과 자기 자신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타인 혹은 스스로에 의한 규제와 통제를 요구한다. "노동의 내용과 수행방식이" 노동자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236쪽)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노동 일반은 인간 생존의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예찬 받아야 할 어떤 이상적 상태는 아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을 '육체노동'으로만 한정짓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신체의 활용은 '머리', 즉 정신 또는 관념의 사용도 포함된다. '합목적적 의지'는 타인에 의해서 주어지든, 자기 자신에 의해 강제되든 인간 노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노동과정에는 노동 그 자체(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와 노동대상, 노동수단이 요소로 필요하다. 노동대상은 인간의 노동이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다. 노동수단은 노동대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와 노동대상을 연결해주는(중개하는) '전도체(conductor)'다. 노동과정 수행에 필요한 다른 모든 개체적 조건들도 노동수단에 포함된다. 벌목꾼에게 숲의 나무는 노동대상이다. 나무를 베기 위한 톱과 도끼는 노동수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재는 목수에게 노동대상이다. 목수는 망치와 대패 등의 노동수단을 이용해 노동대상인 목재를 책상과 의자로 만든다. 목수가 책상과 의자를 만드는 작업장(땅과 기둥ㆍ천장 등)도 노동수단이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인간을 '도구(道具)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遺物)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238쪽)

선사시대를 석기시대ㆍ청동기시대ㆍ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여기서 '석기ㆍ청동기ㆍ철기'는 그 시기 인간이 사용한 주요 도구(노동수단)다. '자연과학적 연구'로 취급되긴 하지만 인간의 물질적 생산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측면에서 올바르다.

지금까지를 요약하면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變化)를 일으킨다"(239쪽).

노동과정의 결과물인 생산물 입장에서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노동은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 생산물은 또 다른 노동과정에 투입돼 생산수단으로 되기도 한다. 따라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結果)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條件)이기도 하다"(240쪽). 생산의 결과인 사용가치가 다음 과정의 생산에 어떠한 역할을 할지는 가변적이다. 면화는 그 자체로 솜옷과 이불에 사용된다. 때론 실을 뽑아내기 위한 원료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치가 변하는 데 따라 그 사용가치의 규정도 변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 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242쪽). 결함이 없는 생산물에는 과거의 노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소비'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생산적 소비(productive consu mption)'라고 부른다. 개인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는 소비자 자신을 만들어 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 자신과 구별되는 생산물을 만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勞動過程)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밀죽의 맛을 보고 누가 그 밀을 경작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노동과정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 하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다. 즉, 노예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밑에서인지 또는 자본가의 주의깊은 눈초리 밑에서인지, 또는 킨킨나투스【Cincinnatus: 고대 로마의 장군, 은퇴 한 뒤 농사를 지었다.】가 자기의 작은 토지의 경작으로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돌로 야수를 쳐죽이는 미개인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244쪽)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특수하고 역사적인 사회형태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한 자본가의 공장에서도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동일하다(마르크스는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산방식 그 자체가 변화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의 생산방식에서의 혁신에 대한 찬사(?)로 유명하다).

마르크스는 다음 절(가치증식과정)로 넘어가기 전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 노동과정의 특징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所有)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所有物)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245쪽).


제2절 가치증식과정(valorization process)

노동과정의 결과물 그 자체를 위해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교환가치를 지닌 사용가치, 즉 판매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의 총액은 그 자신이 생산을 위해 투하한 화폐의 총액(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는 데 든 총액)보다 커야 한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價値)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려고 한다."(247쪽)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노동과정은 상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價値形成過程)의 통일이어야 한다"(247쪽). 이번 절에서는 바로 이 가치형성과정을 고찰한다.

마르크스는 면사의 생산과정을 예로 들어 가치형성과정을 살핀다. 10파운드의 면사 생산에 10파운드의 면화와 1개의 방추가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면화 10파운드의 가격은 10원, 방추 1개의 가격은 2원이라고 하면 면사 10파운드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은 12원이다. 12원의 금량을 생산하는 데 2노동일(24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생산수단 12원에는 2노동일의 사회적 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것이다.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가 된다. "여러가지 특수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는] 노동과정들은 동일한 하나의 노동과정의 순차적인 각각의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249쪽).

이를 위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우선 면화와 방추가 실제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 둘째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이후 면사의 생산에도) 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선 안 된다. 금으로 만든 방추를 사용한다고 해서 면사가 더 많은 가치를 얻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살피는 것은 "방적공의 노동이 면화에 첨가하는 가치부분"이다.

노동과정으로서 면사의 생산을 살필 경우 방적공의 노동은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특수한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다. 그러나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한 그 노동은 대포를 만드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면화재배ㆍ방추제조ㆍ방적이 면사의 가치라는 하나의 총가치(總價値)의 단순히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부분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250쪽), 즉 동일한 노동과정의 각각의 단계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자의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량의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변화시킨다. 즉 면화에 일정량의 노동이 첨가된다. 여기서도 다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일정한 [경험적으로 확정된] 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따름이다."(251쪽)

이제 면사 10파운드에 들어있는 총가치를 검토하자. 우선 면사 10파운드 생산에는 면화 10파운드와 방추 1개가 필요하다. 이는 12원이고 모두 2노동일이 대상화돼 있다. 방적 노동자는 1시간에 1과2/3파운드의 면화를 1과2/3파운드의 면사로 변화시킨다고 가정하자. 10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6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방적 노동자의 하루 노동력 가치는 3원이다. 따라서 면사 10파운드에는 모두 2와1/2노동일의 노동이 응고되어 있고, 그 가격은 15원이다. 면사 10파운드를 생산하는 데 투하한 가치 15원은 여전히 15원이다. 이래서는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생산에 나설 이유가 없다.

"투하된 가치는 증식(增殖)되지 않았고,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資本)으로 전환되지 않았다."(252~253쪽)



그러나 노동력 재생산에 6시간(3원, 1/2노동일)이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의 자본가가 노동자를 6시간만 일을 시킬 이유는 없다.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즉,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즉, 하루의 노동]은 그에게 속한다. 노동력은 하루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하루동안 유지하는 데는 1/2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257쪽)

이제 자본가는 노동력을 12시간동안 사용하려 한다. 작업장에 들어간 노동자는 12시간의 노동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발견한다. 노동자는 20파운드의 면화(20원, 3과1/3노동일), 2개의 방추(4원, 2/3노동일)을 발견한다. 24원의 생산수단과 3원의 노동력이 생산에 투입된다. 3원의 노동력은 추가된 6시간동안 3원의 가치(6시간, 1/2노동일)를 더한다. 이제 생산물의 총가치는 30원이 된다. "그리하여 27원은 30원으로 되었으며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낳았다.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258쪽).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칙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방추·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원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원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원이나 더 많이 유통으로부터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 과정은 유통영역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258쪽)

가치증식과정은 가치창조과정이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로 보상되는 점을 넘어 계속되는 과정이다.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나 가치형성과정은 오직 양적 측면에서만 다뤄진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繼續時間)뿐이다"(259쪽).

가치형성과정의 고찰에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259쪽). 즉 사회의 주어진 생산조건 하에서 평균적인 조건하에서 노동력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뮬 자동 방적기가 지배적인 생산수단인 사회에서 물레로 방적을 해서는 안 된다. 물레를 이용해 면사를 생산할 때 더 들어가는 초과시간은 가치를 형성하지 못한다.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 것인가 아닌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다"(260쪽). 하지만 현실에서 자본가들은 화폐를 아끼기 위해 정상보다 뒤쳐진 생산수단을 투입하면서도 노동력에게는 정상 이상의 활동을 요구하기도 한다(이는 한편 이윤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생산수단을 아껴야 하는 내적 동인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한편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260쪽). 자본가는 시장에서 평균적인 능률 이상의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노력한다(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고급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사회적 평균보다 낮은 가치를 지닌 노동력-이주노동자-을 구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생산과정에서 능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잠시라도 노동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일정한 기간 구매했으므로,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260쪽). 낭비된 원료와 생산수단도 생산물의 가치에 들어가지 않기에 자본가는 원료와 노동수단의 절약을 위해 노력한다.

마르크스는 1장에서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다(261쪽). 이 차이는 생산과정의 두 측면으로 나타난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261쪽)

가치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우선 화폐 그 자체로는 가치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구매수단과 지불수단으로서 화폐는 상품의 가격을 실현할 뿐이다. 화폐를 유통에서 빼내어 쌓아놓는 것(퇴장)이 가치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도 자명하다.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을 다시 살펴보자. 구매한 상품을 다시 판매하는 과정(C-M)에서도 가치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상품을 현물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치변화는 구매(M-C)한 상품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 상품의 가치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구매 또한 오직 그 가치대로 지불되는 등가물끼리의 교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消費)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그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노동의 대상화, 따라서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勞動力: labour-power)이다."(218~219쪽)

화폐소유자가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것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노예와 농노는 노예주와 봉건영주의 의지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 또한 노동력 소유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오직 한정된 시간 동안만 판매해야 한다. 자신의 전 생애를 모두 판매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한 노예 혹은 농노와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노예적 강제 노동을 오직 일탈로서만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개별 자본가의 이해와 달리 보통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는 노예적 강제 노동을 강력히 단속하려 한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두 번째 조건은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 자신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는 방법 이외에 자신의 생활수단과 상품을 생산할 수단(생산수단)을 지니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 유지 혹은 시장에 내놓을 상품의 생산을 위한 수단을 지닌 노동자는 그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free)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自由人: free individual)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物件)을 가지고 있지 않다(free of)는 의미다."(221쪽)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를 만나게 되는 사연은 뒤의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에서 다룰 것이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221쪽).

분명히 어느 정도 발전한 사회적 분업을 기초로 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勞動者)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222쪽). 따라서 이 조건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새로운 세계사를 형성한다.

우리의 관심을 다시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돌려보자. 이 상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지니고 그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223쪽). 노동력은 노동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상품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은 결국 노동자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로 계산된다.

노동자가 정상적인 건강상태를 유지해 다음날 다시 노동과정에 투입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은 육체의 물리적인 한계에 의해서만 규정되진 않는다.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이 어떤 조건 하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및 도덕적 【정신적】 요소(historical and moral element)가 포함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의 일정한 나라에는 노동자들의 필요생활수단의 평균적 범위는 주어져 있다."(224쪽)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에는 또한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재생산하기 위한 생활수단들도 포함된다. 즉 출산과 육아를 위한 생활수단이 포함됨으로써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노동력 판매자를 세대를 넘어 영원히 만날 수 있게 된다. 한편 작업의 숙련을 위한 교육 비용도 노동력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에 포함된다.

실제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최저생계비(빈곤선)를 결정하는 데는 육체적 지속을 위한 상품들의 가격과 함께 출산과 육아ㆍ교육, 문명의 발전 정도가 반영된다. 한국의 경우 과거에 포함돼 있지 않던 통신비가 최근에는 필수적 항목으로 포함된다. 나라에 따라서는 적당한 문화생활(영화, 공연, 스포츠)을 위한 비용을 포함하기도 한다.

역사적 도덕적 조건과 함께 상품가치 변동은 노동력의 가치를 변화시킨다. 임금수준을 결정하기 위한 갈등에서 물가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미국 노동자의 임금 1970년대 중반 이후 오르지 않았음에도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중국산의 싸구려 상품 덕이다. 대형 마트의 저가 상품은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노동력 상품은 구매와 동시에 사용가치가 실현되지 않는다. 노동력의 사용가치, 즉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걸쳐서 실현된다. 보통은 노동계약 후 일정한 기간 노동력을 발휘한 다음에 후불로 임금을 지불받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의 구매와 판매에 대해 살펴봤다. 노동력 사용가치의 실현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노동력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유통의 밖에서 이뤄진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바로 그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및 노동력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분야를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230쪽)

우리가 이 비밀을 파헤치기 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상품교환과 유통분야의 모습은 천부인권이 지켜지는 참다운 낙원처럼 비춰진다. 노동력의 구매자도 판매자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들은 동등한 상품소유자로서 평등하게 등가물끼리 교환한다. 이 상품소유자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처분권을 지닌다. 따라서 각자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지닌 이 모든 행동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설파하듯이 신의 섭리처럼 서로간의 이익,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이 된다. 오직 상품의 유통과 교환의 영역에만 관심을 지닌 주류 경제학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정된 조화를 이뤄낼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한 (따라서 위기와 파괴에 관심이 없거나 그것을 정상에서의 일탈로만 치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음 장부터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생산영역에 따라 들어감으로써 가치와 잉여가치 생산의 비밀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화폐소유자와 노동자가 앞서 가고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231쪽)

강신준 교수는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오늘 '자본'을 읽다' 9월 22일자 연재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강의를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환가치와 가치를 구별하는 데 애를 먹는 것을 자주 봅니다."(강신준 9월 22일)

지금까지 강 교수가 연재한 글 중 바로 위 문장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애를 먹는' 사람에는 강 교수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교환가치와 가치만이 아니죠.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 전체를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를 갖기로 하고 오늘은 자본론 1장에 집중해 강 교수의 연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자본론의 모든 인용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판으로 대체했습니다. 강신준 교수로부터의 인용은 모두 연보라색 굵은 글자로 표시했습니다.


1. 상품의 이중성 … 사용가치ㆍ가치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1권 77쪽)

마르크스는 상품의 이중적 측면을 위와 같은 말로 정의합니다. 1장 1절의 제목도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입니다.

설명은 사용가치부터 시작합니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합니다. 여기서 유용성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연적 필연성에 한정하면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으로서 상품은 최소한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용가치로서 상품은 그것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질적ㆍ양적으로 구별됩니다.

상품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됩니다. 일정한 비율로 말이죠. 여기서 상품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 또는 관계가 교환가치입니다. 상품이 교환가치라는 것은 서로 다른 상품들 속에 공통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로 다른 상품이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품의 자연적 속성은 공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상품의 유용성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용가치와 연관된 것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교환에 있어서 사용가치는 서로 다른 것이기만 하다면 문제가 안됩니다. 결국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거기에 남는 유일한 것은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 뿐입니다.

"이들 노동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생산물들은 유령 같은 형상[즉, 동질적인 인간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형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노동생산물들은 인간노동력이 그 지출형태와는 관계없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노동이 그들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로서 가치, 상품가치이다."(1권 47쪽)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품은 우선 유용한 물건으로서 사용가치입니다. 이 상품은 서로 일정한 비율로 교환됩니다. 즉 교환가치입니다. 이 교환가치는 상품이 공통된 무엇인가를 지니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 못합니다. 그 공통된 것은 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이고, 이것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 강의'에서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이를 도식화 합니다.


하비 53쪽

강신준 교수는 이와 달리 교환가치를 사용가치의 '발전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의 설명과 완전히 다른 것이죠. 상품이 교환가치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용가치여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유용하지 않은 물건(또는 서비스)을 교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용가치가 발전해 교환가치가 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교환을 위해서도 상품의 사용가치적 측면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가 '두 요소'라는 제목으로 상품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한 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죠. 이 설명이 불분명하다면 아래의 데이비드 하비의 설명을 읽어보시죠. 재밌게도 이 책은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것입니다.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여기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면 사용가치가……? 그러나 맑스의 분석은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그것도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바꿔 말해 우리는 다른 개념을 말하지 않고는 이들 개념 가운데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이 개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 있고 어떤 하나의 전체(totality) 속에 내재하는 관계들인 것이다."(하비, 55쪽; 오역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하비는 강 교수와 같은 설명을 '인과론'적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마르크스가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를 설명하는 자본론 1권 1장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인과론'적인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변증법에 대해선 차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래의 그림을 앞의 하비의 도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강신준 9월 15일

따라서 강 교수의 아래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교환가치를 비교해주는 양적 단위는 바로 가치이고 그것은 인간의 노동입니다"(강신준9월 15일)

가치가 강 교수의 설명처럼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그것의 질적 측면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강 교수의 생각은 사실 주류 경제학에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죠. 애시당초 그것이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환되는 비율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강 교수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교환가치'를 매우 강조하죠. 주류 경제학에서 이러한 상품들 사이의 교환비율(교환가치)의 강조는 그들의 선배,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세웠던 노동가치론을 버리고 한계효용 혁명으로 나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강 교수가 어딘가 인터뷰에서 칭찬했던 책인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폴 스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양적 가치이론은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상대적인 비율을 규율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과만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주류의 이론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주류의 이론에서는 그것이 교환가치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에게 교환가치란 가치를 배후에 숨기고 있는 '현상적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단지 교환가치의 결정에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양적 가치의 문제란 무엇인가? 위에서 서술한 분석이 한 가지 답변을 해준다. 상품이 가치라는 사실은 상품은 물질화된 추상적 노동이라는 의미이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품은 사회의 총 부창출활동 가운데 일부를 흡수한다는 의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노동은 시간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교환가치와 구분되는 양적 범주로서의 가치가 어떤 의미인지가 분명해진다."(스위지 58쪽)


2. 노동의 이중성 …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

상품의 이중성은 노동의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사용가치로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유용노동이 필요합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목재를 만들고, 목재를 재단하고, 재단된 목재를 짜맞춰야 하는 것 같은 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이 꼭 육체노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가치로서 상품을 만드는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 과정이 사장된 말 그대로의 인간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루카치의 "자본주의의 본질을 반영하는 추상"이라는 주장을 인용한 폴 스위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의 그 어떤 사회형태에서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이동성보다 훨씬 더 높은 이동성을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며 마르크스의 추상노동 개념의 현실성을 설명합니다
(스위지 55쪽).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방향이 변함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부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의 형태로 또는 직포의 형태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노동형태의 이와 같은 변화가 마찰 없이 일어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1권 55쪽)

기업이 창의적 노동에 대한 무수한 찬양을 늘어놓으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노동과정의 표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이러한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죠. 추상적 인간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과 구분되는 현실성을 지니며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노동의 이중성을 구성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이 중 어느 하나의 측면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용가치를 만든 노동은 시장의 교환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으로 바뀝니다. … 배추라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에는 항상 농민의 힘든 노동이 들어갑니다. … 내가 생산한 배추의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다른 농민들이 생산한 배추와 비교되는 것은 물론 배추를 구매할 소비자의 사정도 고려되어야만 비로소 결정됩니다. 요컨대 나 혼자만의 사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우리가 마르크스를 잊은 채 읽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강 교수가 좋아하는 '개미와 베짱이' 비유로 들어가면서 완전한 파탄을 드러냅니다.

"개미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일 뿐,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은 아닌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굳이 이중성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동시에 갖는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개미(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구체적 유용노동일 뿐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추상적 인간노동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노동자가 교환가치, 정확하게는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베짱이)는 어떻게 잉여가치를 획득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여기에선 강 교수의 연재가 기대되기도 하네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아래의 마르크스 설명과 비교하면 강 교수의 설명이 얼마나 마르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권 58쪽)


3.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강신준 교수는 이 부분에서 자본론 1권 1장 3절 부분을 거의 통째로 건너뜁니다. 물론 여전한 헛소리로 분량을 채우고 있긴 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가치형태를 설명하는 것은 화폐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이어지는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기원'절과 함께 일반적 가치형태, 즉 화폐형태가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은폐하는 지 그 기원을 폭로해줍니다. 가치의 현상형태인 교환가치가 취하는 여러 형태를 사려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면의 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 절의 핵심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바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규제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화폐형태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또한 화폐형태의 등장은 가치가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킬 중심원리로서 응결되기 시작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항상 기억해두어야 할 점이기도 하지만 가치는 물적 존재가 아니면서도 객관적 대상이다."(하비 76쪽)

강 교수는 여기서 뜬금없이 화폐가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발전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강신준 9월 29일)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건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르크스나 그의 해설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인 것이죠. 하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 화폐형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고 대신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런식의 왜곡은 프루동과 크메르 루즈를 언급하며 화폐형태를 "역사의 필연적인 자연법칙"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프루동과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면 강신준 교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우선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프루동은 처음에 정의ㆍ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1권 109쪽 각주2)

프루동에 대한 비판만 놓고 보면 강 교수의 주장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정의로부터 비롯한 이상을 따르는 운동은 참혹한 결말을 맞곤 했죠. 하지만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약간 다르게 들립니다. "상품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며 노동화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힌 마르크스는 오웬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이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같다는 점"이라며 그 이유로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고 밝힙니다(1권 121쪽 각주1).

마르크스는 상품생산을 전제로 한, 즉 자본주의의 핵심적 원리를 그대로 둔채 그 현상형태인 화폐형태만 고치자는 주장에는 가차없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근본적인 변혁을 전제로 한 주장에는 호의적인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보면 강 교수의 입장이 마르크스와 같다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강 교수는 프루동에서 더 나가 화폐형태 자체가 "필연적인 자연법칙"이라며 자본주의의 성숙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고 있죠. 이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 몽상일 뿐이며 이러한 몽상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법칙을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주장으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4. 결론을 대신하며 … 중요하지만 빼먹은 것들

아직 연재가 계속되고 있으니 강신준 교수에 대한 비판의 결론을 여기서 내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본론 1권 1장을 마치고 7회차까지 연재를 보면 강 교수의 자본론 해설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강 교수의 오해는 계속해서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른 분량 중 가장 거슬렸던 것은 15일자 연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얘기처럼 내 이익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현실 자본가들의 노력은 경쟁을 빚고 경쟁의 결과가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거든요.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치가 빚어내는 변증법의 요술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가치량을 결정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1권 49쪽)이 이런식으로 왜곡되는 걸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간단히만 지적하자면 우선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경쟁의 강제법칙으로부터 연역해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마르크스가 1권에서 '경쟁'을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 즉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강 교수의 '사회적 평균'은 마치 보다 평등한 사회의 형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전체에 걸쳐서 자본가의 잉여가치 획득과 더 가난해지는 노동자의 현실이 자본주의적 법칙의 현실적 결과임을 설명하는 것과 반대되는 주장이죠. 또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형성하는 '경쟁' 운운하는 데, 마르크스는 경쟁의 강제법칙을 자본가가 개인이 아닌 자본의 인격화한 범주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핵심 원리로 설명합니다. 즉 '자본가들의 노력'이 '경쟁을 빚'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법칙이 자본가의 자본으로서의 노력을 강제하는 것이고 이는 노동자들에게 더 비참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강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결과조차도 자신의 희망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9월 22일자 연재에서 "모든 사용가치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집니다"는 단언도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동은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사용가치[즉,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1권 54쪽)

이 설명은 이후 자연과의 신진대사라는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죠. 강 교수의 단언은 마르크스가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후예들이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이론과 실천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번 주에도 어김 없이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연재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힘 닿는대로 비판적 검토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는 강 교수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만들어나가기 위함입니다. 격동을 앞둔 지금 마르크스의 유산을 제대로 살피는 일은 더 중요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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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때때로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는 좌파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특히 대안 사회의 미래를 그리려는 시도를 꺼리게끔 했죠.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현실의 모순을 지양하는 운동쯤으로만 취급됐습니다.

이런 상황은 2000년대 들어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단속적으로 파탄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높아져갔죠. 특히 세계사회포럼의 성장과 베네수엘라에서의 격변은 좌파들에게 큰 영감을 줬습니다. 새롭게 성장한 젊은 세대는 현실 사회주의를 경험하지 않았고 그 만큼 사회주의에 대한 레드콤플렉스도 적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가 정치적 대안으로 성장하기 위해 보다 분명한 미래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제기할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지역사회 차원에서의 대안 검토가 확산되고 있었죠. 지금은 진보정당의 기본 정책이 된 '참여예산제' 같은 경우 브라질 노동당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됐습니다. 생태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도시에 대한 대안으로 브라질의 '꾸리찌바'가 관심을 끌기도 했죠.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박용남의 '꿈의 도시 꾸리찌바: 재미와 장난이 만든 생태도시 이야기(박용남 지음, 녹색평론사)'는 이 분야의 필독서가 됐습니다.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의 대안도 제안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Parecom): 자본주의 이후, 인류의 삶(마이클 앨버트 지음, 김익희 옮김, 북로드)'이 여기에 대한 관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파레콘은 참여와 경제의 합성어, 참여경제(Participatory Economics)를 말합니다. 앨버트의 책이 당시 좌파에 충격을 던져준 것은 그것이 '시장'과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마르크스를 따르는 고전적 좌파 안에서는 다수가 동의하는 내용일 겁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실패 이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시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사적소유의 폐지를 앞세우는 것은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 됐지요.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비판적 입장임을 숨기지 않는 마이클 앨버트가 시장과 사적소유의 폐지를 포함한 미래사회 청사진을 제기한 것입니다.

마이클 앨버트에 의하면 자본주의 이후 건설될 파레콘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제거하고 노동자평의회와 소비자평의회가 할당과 생산, 분배 등 경제생활의 핵심 기구로 활용할 것입니다(할당이란 사회의 가용 자원을 어떤 부분에 얼마만큼 사용할 것인가,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각 부문별 투하비율을 결정하는 문제를 말합니다). 각각의 평의회는 그 내부에서, 또는 다른 평의회와 위계적이지 않은 합의 과정을 거쳐 경제의 문제를 결정합니다.

"평의회는 노동자와 소비자가 자신의 정책결정권을 행사하는 수단이며, 매우 다양한 수준에 걸쳐 조직된다. … 결정될 정책의 상이성에 따라 투표와 의결 방식 또한 달라진다. 고정불변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정책 때문에 파생될 영향의 정도에 비례해서 구성원들이 그 결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규범이 지켜지기만 하면 된다." ('파레콘' 25쪽)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앨버트의 '파레콘'을 반깁니다. 하지만 거기에 썩 만족할 수만은 없었죠. 왜냐면 마이클 앨버트는 중앙집권적인 계획과 조정에 일반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기된 질문은 이미 세계적으로 연결되고 융합된 경제를 평의회 각각의 파편화된 자율적 결정과 합의에 의해 조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캘리니코스는 "자본주의에서 지속가능한 경제로 이행하는 데 필요할 엄청난 재건작업과 방향 전환" 같은 것을 고려할 때 파레콘에서 제안한 "[각 평의회들 간 합의의] 반복을 통해 전반적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과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민주적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자본주의의 대안과 사회주의 가치 논쟁' 25쪽). 마이클 앨버트는 '비례적 결정권을 통한 합의'라고 부르는 것을 제안하면서도 그것이 좌파 내에서 "끝없는 논쟁을 야기"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하긴 합니다('파레콘' 161~171쪽). 이 문제는 꼭 앨버트의 '파레콘'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죠. 뒤에서 더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관심은 김수행 교수에게도 이어졌습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만든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의 주제를 새로운 사회로 잡아 발표했죠. 그 결과물이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발표한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ㆍ신정완 외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부)'입니다.

2007년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나온 후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황에 비견되는 위기를 겪습니다. 위기가 극복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남유럽에서의 위기로 EU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의 불똥이 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갈등과 위기에도 한결 같은 것은 이 체제를 이끄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용(복지 정책 등)이 문제라며 긴축정책을, 즉 노동자계급과 서민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애시당초 재정위기가 위기에 빠진 금융기업들을 구해주기 위한 행동들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깔끔하게 잊혀졌죠. 금융기업들의 잘못에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사라지고 이 모든 게 게으른 남유럽 노동자들 때문이라는 목소리만 높습니다. EUㆍECB(유럽중앙은행)ㆍIMF 트로이카는 심지어 그리스의 노동자들이 주 6일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노동시간은 연간 2109시간으로 유럽에서 가장 긴데도 말입니다(링크).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김수행 교수가 쉬운 글로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내놓았습니다. 김수행 교수는 이렇게 묻습니다.

""자본주의만이 인류의 등불"이라던 자본주의 옹호자들도 2007년 이래 세계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업자의 대홍수, 빈민들의 울부짖음, 모든 노동자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 노동자계급 precarious proletariat)로의 전환, 민주주의의 후퇴, 제국주의적 침략의 확산, 성과 인종의 차별, 자연의 파괴 등에 직면하면서, 자본주의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4~5쪽)

김수행 교수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길도 있음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길'입니다. 이미 완성된, 우리의 도착만 기다리는 유토피아는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행기'입니다. 이행기에 우리는 사회제도 뿐 아니라 개인들의 습관ㆍ의식 모두 바꿔야 합니다.

"'수탈자를 수탈하는' 정치혁명의 개시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자개연)이 형성되기까지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가는 '진정한' 이행기입니다. 이행기에는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사회적 점유'의 형태로 숨어 있는 '사회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를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로부터 분리ㆍ자립하여 그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의 손에서 빼앗아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면서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동하는 개인들이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임금노예'의 상태를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행기에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들에게 광범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사회의 생산수단 전체와 개인의 노동력 전체를 사회의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이용하는 것의 우월성을 인식시키고,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달의 기초가 된다는 것과 개인이 타인과 자연에 대해 '인류'의 입장에서 관계를 맺는 것이 모든 차별과 자연 파괴를 막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97~98쪽)

김수행 교수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자면 주식회사와 협동조합이 그러한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마르크스가 주식회사에서 "자본은, 이제 사적 자본과 구별되는 사회적 자본(직접적으로 연합한 개인들의 자본)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하며, 이런 자본의 기업은 사적 기업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기업의 형태를 취한다(80쪽; '자본론' 3권 상 541쪽)"고 말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렇듯 자본주의 안에 숨어있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로 가는 길의 이정표를 마르크스에 기대 찾을 수 있다는 게 김수행 교수의 주장입니다. 마르크스가 정리된 형태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그려낸적은 없지만 그의 여러 저술 속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중요한 자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김수행 교수가 미래사회의 명칭으로 제시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모습이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계급들과 계급대립을 가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의 자유로운 발달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달의 조건이 되는 연합이 나타나게 된다." (115쪽; '공산당 선언' 저작선집 1권 421쪽)

김수행 교수가 먼지 쌓인 마르크스의 책속에서만 미래사회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2007년 이후 세계경제위기라는 현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듯이 그는 소련과 베네수엘라라는 과거와 현재의 사례들로부터도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소련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입니다. 현실 사회주의로 인정하자는 주장에서부터, 관료적으로 타락한 노동자 국가, 국가자본주의, 새로운 계급사회 등 소련에 대한 다양한 규정이 좌파의 조직적ㆍ정치적 실천을 갈갈이 찢어놓았었습니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는 소련이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착취와 억압을 제거한다는 목표는 국가의 착취로 대체됐고, 사회적 소유라는 전망은 '국가소유' 아래 국가 관료의 전횡으로 실현됐다는 것입니다
(148쪽). 무엇보다 소련은 자유로운 연합에 기초한 개인들의 전면적 발달이라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오랜 이상과 배치됩니다.

소련의 이탈은 어디서부터 비롯한 것일까요. 스탈린은 '생산의 무정부성'을 자본주의의 가장 큰 폐해로 지적하고 이 무정부성을 극복하기 위한 '국가소유'와 '계획'을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의 가장 큰 특징으로 앞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 아닙니다.

"사회적 소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점유하여 사용하던 생산수단들이 정치혁명을 통해 자기들의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경우 '사회'는 개인들을 초월하여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적ㆍ경제적ㆍ이데올로기적 존재가 아니라, 자각한 개인들의 연합을 가리키거나 연합한 개인들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소련의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폐기되어, 이런 연합한 개인들의 사회적 소유가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가소유는 실질적으로 노멘클라투라의 소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8~159쪽)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사회를 고려할 때 '사회적 소유'라는 것은 여전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앨버트가 평의회의 수평적 자율관리 커뮤니케이션을 주장하고, 캘리니코스가 이를 보충하며 민주적 계획을 강조한 것은 이 모호함을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자본주의의 대안과 사회주의 가치 논쟁' 41~43쪽). 국가 혹은 이를 대체한 어떤 사회적 제도가 구성원 모두의 의사를 충분히 민주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면 국가 혹은 대체 제도의 소유가 곧 사회적 소유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현실성을 갖기 위해선 무엇보다 민주적 통제와 조정 과정 수립, 앨버트와 캘리니코스가 강조한 것 이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소련의 현실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면 어떤 사례를 또 찾을 수 있을까요. 최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베네수엘라를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김수행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베네수엘라 혁명을 이끌고 있는 차베스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자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조직된 노동운동도 베네수엘라에서는 기득권층의 입장에 섰었죠. 차베스의 주요 지지자들은 광범위한 빈민들입니다. 차베스가 대자본가들의 쿠데타로 대통령궁에 갇혔을 때 그를 구해낸 것은 빈민들의 힘이죠. 베네수엘라의 혁명적 변화를 위한 조치들도 아래로부터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차베스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된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제게 차베스는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죠.

하지만 차베스가 우파 언론들의 데마고기와 자본가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참여에 기초한 대안 권력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그의 정책이 남미에 뿌리 깊은 포퓰리즘 정치처럼 시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차베스는 2001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볼리바르 서클을 조직해 빈민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서클의 회원들은 빈민촌인 바리오에서 활동하면서 바리오의 상하수도ㆍ주택ㆍ의료ㆍ전기ㆍ노인복지ㆍ환경ㆍ취업ㆍ교육ㆍ범죄ㆍ질서유지ㆍ운동장ㆍ문화시설 등의 문제를 지역 주민들과 토론하여 각종 프로젝트를 만들고, 그 프로젝트를 실행할 자금을 정부의 '플랜 볼리바르 2000'으로부터 받아 주면서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그 프로젝트를 완성하게 도와준 것입니다. 그러나 볼리바르 서클은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2006년 4월에는 법적 근거를 가진 주민자치회가 새로 설치되어 빈민촌의 공동사업을 볼리바르 서클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179쪽)

차베스는 이러한 인민권력의 강화와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다섯 개의 인민권력법을 만들어 "주민자치회ㆍ정부연방주민자치회ㆍ코뮌ㆍ노동자치회ㆍ주의회ㆍ지방의회 등이 전국의 공공계획과 예산ㆍ결산을 토론하고 결정하며 감찰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만듭니다(192쪽). 이행기에 필요하다고 강조된 광범위한 교육과 훈련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의 자기계몽 과정이라는 특징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아직 매우 불안정한 이행기를 거치고 있습니다. 이 혁명이 진정한 혁명으로 거듭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거대 기업의 자본가들과 언론, 미국의 방해와 견제가 여전히 심하기 때문입니다.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차베스의 정책이 타협의 길로 이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가장 최근의, 그리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현장으로서 베네수엘라는 충분히 관심을 쏟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 책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는 '파레콘'에 비해 정밀하진 못합니다. 국가소유가 곧 사회적 소유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개인적 소유의 회복으로서 사적소유의 철폐와 사회적 소유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할 지는 막연합니다. '계급투쟁'이란 것도 '99%' '서민' 등의 단어를 사용해 그 정체를 불분명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베네수엘라 인구의 60~80%에 달하는 '빈민'의 계급적 분석이 없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의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는 자본주의가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꼭 참고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 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점,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에 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에 이 책의 장점이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행동은 비참한 현실로부터 비롯하기보다 미래의 희망으로부터 더 큰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국제적 금융자본은 자기의 위험한 투기로 입게 될 손실을 국제적 국가기구를 통해 세계의 서민들에게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금융공황에서 금융자본이 2007~2011년에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으로부터 약 20조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자기의 손실을 납세자의 혈세로 메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리스 이외에도 포르투갈ㆍ스페인ㆍ아일랜드ㆍ이탈리아ㆍ프랑스ㆍ영국ㆍ미국 등 거의 모든 나라가 국가채무 문제로 허덕이고 있는데, 그리스 형식의 금융자본 독재가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금융자본을 세계적 차원에서 인류의 소유로 전환하는 정치혁명이 필요할 것이고, 자본이 자본가계급의 이윤 욕심에 봉사하기보다는 인류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에 기여하도록, 개인들이 연합하고 단결하여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자개연)'을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203쪽)



강신준 동아대 교수가 경향신문에 '자본(자본론)' 해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본'을 읽다'는 제목으로 8월 25일 시작했습니다. 연재 기사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실립니다. 9월 1일에는 두 번째 연재로 '혁명에 사로잡힌 물음 - '자본'의 출생과 변증법'이란 기사가 23면에 실렸습니다.

●[경향신문] 9월 1일 23면|'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링크)

최근 마르크스의 생애, 그의 사상, 자본론(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출판도 늘고 있습니다. 신문에까지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실린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신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지만 책보다는 읽는 사람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까지 읽고 나니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더 커집니다. 마르크스 스스로 말년에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고 한 만큼 마르크스주의는 논란에서 자유로운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강신준 교수의 두 번째 연재기사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중을 위한 신문에서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학문적 방법을 사상한 게 문제가 아닌 것이죠. 문제는 일반적인 사실의 왜곡에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명색이 '자본 강독'이라고 시작한 연재라면 자신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글)을 구분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가 모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경향신문 연재기사를 보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할 분들에겐 상당히 큰 오해를 심어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전공자도 아니지만 간단히 제가 아는 한도에서 9월 1일 두 번째 연재기사에서 문제가 될 듯한 부분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글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주저 말고 지적해주세요. 아래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강신준 교수의 글입니다.


1_ "오늘날 사회변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혁명이란 용어는 원래 프랑스혁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근대 혁명의 효시가 프랑스혁명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완전히 틀린 설명입니다. 혁명(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혁명이 급진적, 혹은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이 단어가 '사회구조의 근본적이고 돌연한 변화'를 뜻하는 정치적 의미로 쓰인 것은 1688년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윌리엄 3세가 즉위한 사건을 '명예혁명(The Glorius Revolution)'으로 부르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대해선 위키피디아 'revolution' 항목을 참조하시면 됩니다(링크).


2_ "1848년 혁명도 바로 이 [1789년] 프랑스혁명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의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혁명의 다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인민의 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호명하고 싶어하는 혁명가, 변혁가의 꿈은 과거와 현재 모두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의 점령자들은 자신을 99%라고 표현하며 결코 소수가 아닌 다수임을 강조했죠. 원래 '다수파'라는 뜻을 지닌 볼셰비키, 하지만 레닌의 볼셰비키는 그 분열 초기에는 멘셰비키보다 소수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시이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도 어찌보면 현재의 '우리는 99%다'라는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이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후에 스스로 "모든 것이다"고 답하죠. 그러므로 "제3신분은 국민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고 "제3신분이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국민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사', 알베르 소불, 두레, 29쪽).

마르크스주의자 또한 과거의 혁명들을 '노동자 혁명'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강할 것입니다. 열망은 현실과 다르죠.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를 따르는 혁명가들은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그는 나폴레옹의 조카가 일으킨 쿠데타를 다루는 책(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그들 앞에 전개되어 있는 원대한 전망에 대한 상상에 젖어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 몰두해 있었던 반면, 사회의 구세력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회합을 개최했으며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쁘띠부르주아에게서 예상치 않던 지지를 발견했다."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 21쪽.

마르크스는 분명하게도 1848년 혁명 당시 농민이 다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당시 프랑스에서 소수였고 그나마 파리에만 의미 있는 수를 형성하고 있었죠. 그렇기에 파리의 노동자들은 6월 봉기 때 "모든 계급과 정파"의 적으로 공격 대상이 됩니다. 결국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위대한 세계사적 투쟁이라는 영예를 안고 쓰러"집니다(앞의 책 23쪽). 1848년 혁명의 다수가 노동자였다는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설명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른 저자의 설명도 강신준 교수의 주장과는 다릅니다. 노명식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과 비교하며 이렇게 씁니다.

"[1830년] 7월혁명의 결정적 승자는 부르주아지였으나 2월혁명의 승자는 노동자계급과 중소 부르주아지의 연합이었다.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848년에는 부르주아지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책과함께, 343쪽.

분명히 1789년보다, 1830년보다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졌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함은 프랑스 전역의 혁명에서 파리가 지닌 역할과 비견할 만한 것이죠(서로 연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1848년 혁명 당시 노동자가 '다수'였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혁명 패배의 교훈과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3_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은 극히 제한된 형태로만 있었고 경제의 대부분은 자급자족하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것만을 소비했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경제구조에서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생산을 열심히 한 사람은 소비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고 설명할 수는 없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이전 생산양식의 귀족과 노예 소유주를 위한 생산, 즉 착취를 (자본주의적 착취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강신준 교수가 깜빡하고 잊은 듯합니다.


4_ "[1848년 혁명의 패배를 지켜본 다음] 1849년 마르크스는 독일 정부의 압력에 의해 다시 유럽대륙에서 추방당해 마지막 망명지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영국으로 가는 뱃전에서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는 그 엄청난 혁명의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혁명이 왜 실패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곧바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틀어박혀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67년 드디어 '자본[자본론]' 제1권을 출판했습니다."

이 문구만 읽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계기,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마치 1848년 혁명 때문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그 기초적 모습을 드러낸 '공산당 선언'이 1848년 2월 혁명 전야에 나왔다는 사실과 배치됩니다.

이뿐 아니죠. 마르크스는 1843년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미 경제적 탐구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악명 자자한 문장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8쪽.

마르크스가 현실의 경제적 삶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비슷한 시기 '라인신문'에서 일하면서입니다. 마르크스는 훗날 "'라이니셰 차이퉁[라인신문]' 편집장으로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야 할 때 나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미지의 영역[물질적 이해관계: 경제]에 처음 도전해본 것은 개인 소유 삼림에서 나무를 훔치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법을 길게 비판하게 되었을 때였다. … [이 문제를 다루면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계급, 개인 소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푸른숲, 69쪽.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쫓겨난 마르크스는 당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울한 학문, 경제학에 대한 탐구에 몰두합니다. 당시의 공부 결과는 현재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1844년 쓰여서 '1844년 수고', 또는 파리에서 작성됐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립니다.


5_ "한나라당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가 '잃어버린 10년'인데요. 이 말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10년 동안 이루어진 정치적 성과를 모두 없애고 10년 전의 상태로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사물의 운동법칙[변증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은 성숙해지면서 2가 되는데 이 2는 기존의 1에 1을 더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2=1+1). 만일 기존의 1을 없애버리면 새롭게 추가하는 1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보다 나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고 도로아미타불의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강신준 교수는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1+1=2'라는 공식을 내세웁니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설명이긴 합니다. 보통은 정-반-합의 과정을 설명하죠. 강신준 교수의 설명만 보면 사물의 운동은 발전만 있고 퇴보는 없는 듯합니다. 게다가 기존의 사물은 새로운 사물 내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새롭기는 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설명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사물의 변증법적 운동이 발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을 인용하며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하지만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합니다
(최형익 옮김, 비르투, 10쪽). 마르크스의 설명이 강신준 교수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고전정치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바로 그 한계 때문에 그들의 후예들이 과학적 입장에서 더 후퇴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사물의 운동법칙은 1+1=2처럼 단순히 계단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대립과 통일이라는 기존 설명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명이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왔지만,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그보다 더 큰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6_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강신준 교수의 '변증법' 해설의 더 큰 문제는 마르크스가 마치 자본주의를 '존속'시킨 채 그것의 개혁을 위한 방법을 발견한 사람처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재기사가 '강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최소한 마르크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구분할 수 있게끔 써줬어야 합니다.

19세기 후반 보통선거의 도입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민주적인 길의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합니다. 당시 아직 봉건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이던 러시아를 살피면서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 공산주의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존속'과 '개혁'을 주장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듭니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태도를 유지했죠.

"[1875년 라쌀레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회주의노동당(1890년 할레 대회에서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의 강령에 대해] 마르크스는 즉각 베를린에 있는 리프크네히트에게 격렬한 비난이 담긴 서한을 급송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엥겔스에게도 리프크네히트에게 그 정도로 강력한 서한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렀다. … 마르크스가 보기에 고타 강령에는 너무나 많은 타협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었다. 고타 강령은 사회주의와 그 최대의 적인 국가가 영원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타 강령은 특히 그러했다. 또한 고타 강령의 밑바탕에는 프루동 주의자들과 생시몽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여러 모순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든가 상속법의 폐지 같은 사소한 목적들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사회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안규남 옮김, 미다스북스, 383쪽.

게다가 강신준 교수 스스로 인용했듯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든 영원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운동 상태에 있으며 유동적이고, 따라서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파악됩니다. 강신준 교수가 인용한 부분을 좀 더 길게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ㆍ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ㆍ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19쪽.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개인의 바람에 따라 왜곡해서 살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한 때 속하기도 했던 청년헤겔파에 대한 비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들은 헤겔과 달리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바랐지만 사물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의 문제로만 파악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에서 청년헤겔파를 '무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에 비유해 조롱하기도 했죠(박재희 옮김, 청년사, 34쪽).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며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김수행 옮김, 19쪽).

아나키즘과 마르크스 이전에 유행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생시몽과 푸리에 등) 비판이라는 맥락도 살펴야 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적 상태에 대한 탐구가 아닌 이상적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변혁의 과학을 대치하려 했습니다(물론 그들의 '이상'은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현재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혁명적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변화할 지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연구로부터 끄집어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도 이러한 사정을 모를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랑스 혁명을 얘기하며 실컷 '혁명' 운운하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강신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잘못된 제목으로 나타납니다.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이라니요. 강신준 교수는 그나마 '개혁'이란 단어로 기사의 후반부에 대치시켰지만 경향신문의 편집기자는 그 차이를 이해 못하고 '혁명'이란 단어를 제목에 써버립니다. 하긴 이윤에 목매는 자본가들은 생산방식에 혁명적 방법을 도입해가며 자본주의 사회를 발전시켜왔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다만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꿈꿨던 마르크스의 생각은 아니죠. 제목 아래 크게 자리잡은 마르크스의 얼굴이 안쓰러울 뿐입니다.


p.s. 강신준 교수는 '개혁'이란 단어를 쓰기 전 '자본론'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인용하며 '혁명'이 마치 길고 긴 개혁의 과정인 것처럼 설명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죠.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21쪽.

그런데 이 문구는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자본론'을 시리즈로 분책해서 내자는 제안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책(자본론)이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읽어야만 한다는 충고죠. 강신준 교수의 해석은 과도한 것입니다. 맥락에서 떼어내 문구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문과 실천 모두에서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