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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클라이먼의 데이비드 하비 비판 3편을 아래 옮깁니다. 주석과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며 대괄호[ ] 안은 옮긴이가 덧붙인 내용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3편: 답변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5월 13일ㆍ링크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은 자본주의의 실제 특징을 해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법칙이 2007~2009년의 대침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둘 사이의 논쟁은 계속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을 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를 통해 자본주의 위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앤드루 클라이먼은 최근 뉴레프트프로젝트(New Left Project)를 통해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로 꼽힐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이론 비판에 대한 반론 두 편을 발표했다.
1편에서는 하비의 마르크스 해석을 비판했고 2편에선 미국 기업들의 2차 세계대전 후
장기적 이윤율 저하에 관해 마르크스의 법칙에 근거해 논했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하비는 "길게 봤을 땐 클라이먼이 옳은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면서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 이해하기 위한 내 유기적인 비유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논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두 비유를 대비시켰다.

아래는 클라이먼의 답변이다.


나는 데이비드 하비가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 자본주의 경제위기론이 기반을 둔 법칙이며, 대침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적절한 법칙이며 이론인 이 법칙을 비판(하비 2014ㆍ링크)한 데 대한 내 반론에 그가 시간을 내 답변해준 것에 감사하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답변(링크)에서 내가 쓴 것의 일부만 다뤘고 특히 내가 제시했던 문헌적(링크)이거나 경제적인(링크) 증거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내 유추를 '자본의 본성'이라는 비유로 묘사하며 오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익한 토론을 개시할 출발점으로 그의 답변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마르크스의 LTFRP가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독창적인 비난과 그에 대한 내 대답을 먼저 간단히 요약하겠다. 그런 다음 그러한 유추가 '자본의 본성'을 비유한 것이 아닌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계속해서 이 글의 나머지에선 LTFRP를 잘못 정의해놓고는 그 법칙이 옳을 가능성과 이에 대한 토론의 필요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하비의 새로운 비난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다시 증거를 검토해볼 것이다.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비난(첫 번째 버전)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과 이 법칙에 기반한 자본주의 위기론이 일원인론이라고 비난한다.[1] 이러한 비난은 이 법칙이 결정적으로 마르크스가 '엄격하게 가정한' 수치들에 기대고 있다는 하비의 주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처럼 의심받는 가정들 때문에 LTFRP는 노동 절약형 기술 변화를 제외한 수익성을 하락시키는 잠재적 원인 모두와 이윤율이 하락하지 않도록 하는 기술 변화에 의한 상쇄요인 모두를 배제하는 것으로 비친다.

물론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본론' 3권 3편은 금융제도와 같은 부가적인 위기 원인들에 더해 몇몇 상쇄요인들을 논한다. 대신 이 법칙이 일원인론이라는 그의 비난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의 구조,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설명에 다양한 요인들이 등장하는 순서에 초점을 맞춘다. 마르크스는 LTFRP에 대해 설명할 때 우선 '법칙 그 자체(das Gesetz als solches)'를 제시하고, 바로 그 후에 상쇄요인들을 배치하며 그 다음에야 위기의 부가적인 원인들을 끼어 넣는다.

서술을 구조화 하는 이런 방식은 매우 흔한 나무랄 데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비는 LTFRP를 '법칙 그 자체'로 축소시켜 일원인론적 서술처럼 묘사한다. 상쇄요인과 부가적인 원인들은 '법칙 그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비에게는) 그러한 요인들은 LTFRP에 포함되지 않으며 만약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면 법칙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 또 (하비에게는) 상쇄요인과 부가적 원인들의 존재를 마르크스가 인지하고 그의 설명에 그것들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LTFRP에서] 일원인론이라는 혐의를 벗겨주진 않는다. 이는 단지 LTFRP의 타당함에 대한 마르크스의 '동요와 양면성'을 보여준 것이며 그는 그 이상으로 법칙을 논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법칙에서 유래한 가정이 제거됐을 때 벌어질 일"을 논한다.

이에 대해 나는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설명했다. 나는 "그 글을 이런식으로 읽어선 안된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런 부당한 독서는 적절한 해석 방법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런 후 나는 내가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유추"라고 부른 것을 설명했다.

일원인론이라는 딱지붙이기가 왜 잘못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정교한 방법론적 논의를 펼칠 필요는 없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보편적 중력법칙을, 바람과 같이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 또는 공기 저항 같은 상쇄요인을 언급하지 않은 채 내가 제안한다고 해서 이 다른 요인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그것들을을 배제한, 그 대신 적용 가능성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제한적인 일원인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중력법칙으로부터 뉴튼의 운동에 관한 제2법칙을 이끌어내 설명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방정식에서 다른 요인들의 삽입을 삼간다고 해도 그런 [일원인론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다음 내가 공기 저항과 바람[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내가 내 양면성과 동요를 드러낸 것도 또는 보편적인 중력법칙이 오직 진공에서만 작용하고 실제 현실에선 작용하지 않는다고 시인한것도 아니다.(강조는 원문)

'자본의 본성'이라는 비유?

이 토론에서 하비(2014)의 처음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위기론 내 LTFRP의 지위에 대해, 그리고 이것의 대침체와 침체의 지속되는 여파와의 연관성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론에서 그의 여러 비판들 각각을 다뤘다. 그에 대한 하비의 대답은 오직 내 반론의 두 문장-앞에 인용한 구절의 셋째와 넷째 문장-을 논하는 데 전념하고 있고 그것 조차 이 두 문장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하비에 의하면 저 문장은 앤드루 클라이먼이 "이윤율 하락에 대한 그의 관점이 왜 일원인론이 아닌지 설명하는", 특히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개념화 하고 구조화 하는" 데 이용한 비유다. "내
[하비] 생각에 앤드루와 나의 큰 차이점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각각의 비유 형태에 있다".

앞 부분에 세 가지 중요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먼저 내 유추는 '자본의 본성'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구체적 현상, 즉 이윤율의 경향에 관한 것이다. 둘째 그 유추는 이윤율의 저하에 대한 내 관점 또는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과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 관한 것이다.
[2] 셋째 그 유추는 '자본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존재론적인 (존재에 관한) 게 아닌 인식론적인 (앎에 관한) 것이다.

나는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를 개념화 하거나 구조화하기 위해 그 구절과 다른 어떤 곳에서도 비유를 제시하지 않았고, 그와 같이 제시할 만한 비유를 갖고 있지도 않다. 자본에 대한 내 이해를 개념화 하기 위한 비유는 내게 필요 없다. 특히 '자본'은 그 스스로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이미 사실의 개념화이기 때문이다. 본래의 개념화(이리하여 가치는 이제 과정 중의 가치 value in process, 과정 중의 화폐로 되며, 이러한 것으로서 가치는 자본이 된다ㆍ'자본론' 1권, 2015년 개역판 202쪽)를 다른 비유로 어떻게 대체해야 내 이론적ㆍ경험적 연구를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 난 모르겠다.

나는 '자본의 본성'이라는 구절이 의심스럽다. 난 자본주의의 '본성'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왜 작동하고 또는 고장나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특히 자본과 자본주의에 자연계와 같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혹은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에 중력의 힘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나의 것으로 돌리며 '자본의 본성'이라는 그 구절을 하비가 사용할 때 더 그렇다. 이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하비의 대답의 넷째, 다섯째 구절이 암시하는 것과 반대로 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정치는 비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이에 따라 클라이먼의 결론은'이라는 부분). 그것은 증거와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나는 내 정치를 방어할 것이며 그렇게 할수 있을 것이다. 비유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증거와 이론에 도전하는, 정말로 논쟁에 기반한 몇몇 논의를 따져본 후에 말이다. 어떤 한 비유의 개인적 선호나 이런 취향에 기반한 (내가 자본을 어떻게 보고 경험했는가와 같은) 주관적 경험은 토론 거리가 못된다.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선택하고 겪은 바에 따른 경험한다. 이걸로 끝이다. 비유와 주관적 경험에 따라 조직된 정치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실제 사실에 비췄을 때 다른 문제다. 그와 같은 정당성을 제공할 임무로 논쟁이 내게 주워지면 나는 기꺼이 그것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는 내 비유는 '자본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닌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지나치게 깔끔한 구분처럼 보인다. 제안된 한 종류의 설명은 특정한 현상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견고하게 연관돼 있지 않는가? 따라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유추는 LTFRP와 중력의 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아니, 전혀 아니다. 현상의 '본질'과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 사이에 필연적 연관은 없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만취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3]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의 유추는 자본주의를 물리적 현실과 비교하는 게 아니다. 그 유추는 대상이 무엇이든 다원인론적 설명이 일반적 법칙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또는 '경향적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묘사한 것이다.

만약 내가

●바람처럼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이나 공기 저항처럼 그에 대한 상쇄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기 위해 중력의 일반법칙을 언급하거나
●교수와 잠자리를 같는 것과 같은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나 멍청함 같은 다른 상쇄요인에 대한 설명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더 높은 점수를 밭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식 향상을 위해 공부한다는 법칙을 주장하거나
●목이 짧은 기린을 멸종시킬 수 있는 자연재해와 같은 요인이나 상대적으로 목이 짧은 새끼를 낳게 하는 돌연변이와 같은 상쇄요인을 말하지 않고 기린이 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선택 이론을 말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과 일할 사람을 찾는 사람이 지리적으로 어긋나는 것과 같은 실업률을 증가시킬 수 있는 요인이나 차별시정 정책과 같은 상쇄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불균형적인 잦은 실업에 의한 고통을 그들이 노동시장에서 직면한 차별의 법칙으로 설명하거나
●임금의 상승과 같이 이윤율을 떨어뜨릴 수 있는 요인이나 생산수단의 가격 하락 같은 상쇄요인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주장한다고 해서

부가적인 원인과 상쇄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그것들을 배제한, 따라서 적용 가능성이 엄격히 제한된 일원인론적 모델을 구축하겠는가. 그러한 설명 후 내가 부가적 원인과 상쇄요인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 양면성이나 동요, 혹은 내가 제안한 일반적인 설명 법칙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앞의 중요 항목 네 가지를 먼저 점검해보자. 그것들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를 구조화 하기 위해 이용한 비유인가? 떨어지는 사과, 좋은 성적, 목이 긴 기린, 불균형한 실업 빈도와 떨어지는 이윤율 모두에 공통적인 어떤 중요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중력의 일반법칙, 학습-지식의 연관성, 자연선택, 노동시장의 차별과 LTFRP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어떤 중요한 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각각의 현상이 지니는 '본성'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각각 그것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법칙은 매우 다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다섯 설명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를 지닌다. 그리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중요한 것은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일원인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비난(새로운 버전)

그럼에도 하비는 계속해서 이러한 결론에 대해 '투덜' 거린다.

우리는 여기서 일원인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만약 중력의 일반법칙이 없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사과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어떤 공기저항도 무관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또는 반대되는 힘)은 오직 일반법칙과의 연관 하에서만 적절하다.

일원인론의 일반적 의미는 "하나의 원인을 갖는다는 것"인 데 하비(2014)는 "많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위기가 만들어지는 한 가지 인과관계 이론을 주장하려 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강조는 클라이먼). 그렇지만 내 비유에서 사과가 운동하는 원인에는 단지 중력 만이 아니라 바람과 공기저항도 있다. 여기에는 하나가 아니라 세 가지 원인이 있다. 따라서 그 비유는 마르크스의 LTFRP와 위기이론이 '하나의 인과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하비의 비난에 들어맞는 전형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그는 여기서 일원인론이라는 단어를 흔치 않은 의미로 사용한다. 일원인론적 설명에 대한 은연중 드러나는 그의 새로운 정의는 "다른 그 어떤 원인과도 관련이 없는 원인을 지닌 설명"이라는 것이다. 내 반론의 2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다중원인론에 대한 주장들은 위기에 관한 하비의 (LTFRP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부재원인론에 대한 갈망을 가리는 가면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그는 분명 '자본론' 3권에 나와 설명되고 완료된 위기에 관한 명확한 다중원인론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본론' 3권에는 LTFRP 이론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금융 시스템과 같은 다른 결정 요인들이 이와 연결돼 그것이 드러나는 방법을 매개한다.(강조는 원문)

하비는 일원인론이란 단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분명하기에 난 그의 재정의에 이의를 재기할 필요를 못느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관념에 따라 사회적ㆍ경제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일원인론이라고 매도한다면 그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탄소가 없었다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인간의 활동도, 그 어떤 사회적 또는 경제적 현상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현상은 '오직' 탄소와 '연관해서만 유의미하다'. 그것들은 바로 탄소가 지구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그는 LTFRP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위기에 관한 부재원인론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하비는 "자본에 의해 구성된 유기적 총체는, 앤드루가 지지하고 있으며 그의 주장과 달리 나 또한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이윤율 하락을 향하는 구조에 의해 약화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가 수익성을 하락시키고 이러한 수익성 하락이 위기로 이어지는 경우와 같은 몇몇 예외적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그가 부인했다고 말하진 않았다. 이미 말했던 바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그는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갖는 이유를 성공적으로 설명한 일반법칙으로써 진정한 법칙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또한 이 법칙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위기 이론이 "태양이 궁극적으로 수명을 다할"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4] 그의 답변의 결론은 이러한 가능성들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유기체 비유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적절하다."(강조는 필자)

허수아비 LTFRP

떨어지는 사과 유추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비유라는 하비의 주장은 내 글을 잘못 이해한 것이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자본의 본성'을 아래의 말처럼 한정짓는다는 그의 주장은 같은 식으로 다룰 수 없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은 결국 경쟁이라는 추동력에 따라 상대적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며 사라지는 것으로, 뉴턴 세계의 시계와 같은 기계적 확실성은 끝을 맺는다. 자본의 노동 고용비율은 자본의 이익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이윤율은 떨어지게 된다. 유기적 전체로서 자본의 진화를 보고 경험해온 내게 이러한 기계적 모델은 지나치게 결정론적이고 너무나 일방적이며 결국엔 목적론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위기론은 금융화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앤드루 클라이먼은 가장 단호하게 주장해 왔다"는 그의 처음 주장처럼 그 어떤 근거와 인용도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틀렸다. 정말 명확히 말하자면 이 문제에 대한 내 입장은 내 것이라고 치부되는 주장의 반대편이다.

위기를 통한 자본가치 파괴는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런 파괴가 초래하는 수익성 회복도 역시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이윤율은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 걸쳐 확고한 장기 지속적 추세를 갖지 않았고, 그런 추세를 연역하거나 예측하는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다(클라이먼 2012, 53쪽).

뉴턴 물리학으로부터 가져와 결정론적 전망을 표현한 기계적 은유의 예로는 아래의 글이 문장이 더 적절할 것이다.

유체역학의 법칙들이 세계의 어느 강에서든 한결같이 적용되듯, 자본순환의 법칙들 또한 어느 수퍼마켓에서든, 어느 노동시장에서든, 어느 상품생산 체계에서든, 어느 나라에서든, 그리고 어느 가구에서든 한결같이 관철된다.

그런데 이 결정론적 비유는 내 것이 아니다.[5] 이 문장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하비 1990, 국역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ㆍ한울) 394~395쪽에 나온다.

하비는 그의 허수아비 LTFRP와 이에 기반한 위기이론의 혐의를 풀어주는 데 매우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윤율 하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기계론적 이해를 나의 것으로 돌리면서도 그는 다시 또 LTFRP와 이에 연관된 위기이론에 일반적인 '환원론'과 같은 의미로 일원인론의 책임을 묻는다. "(이윤율 하락의 구조)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죽는 원인으로 오직 심장마비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강조는 필자) 아니, 이건 그것과 다르다. '주로''오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위기의 원인으로 이윤율 하락에 주로 초점을 맞추진 않는다(대침체에 대한 내 책에서 다룬 2007~2008년 금융위기의 12가지 원인과 내 반론 1부에 정리한 목록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적게 이에 대해 말한다.

특정한 변수가 실제로 주요한 첫 번째 원인이 될지, 아니면 두 번째 원인이 될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런 역할도 못할지는 미리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경험적 증거를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하비가 토론의 방향을 그의 비유 대 나의 비유로 바꾸기 전 우리가 했던 게 바로 이것이다).

자료를 분석하기 전에, 나는 현실의 이윤율이 1980년대 초반 이후 반등하지 못했다는 어떠한 사전적인 믿음도 갖지 않았고 … 내가 미국 법인들의 수익성의 지속적인 하락이 이번 대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이고,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사실에 매우 잘 부합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내가 많은 자료들을 고속으로 처리하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에는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클라이먼 2012, 28쪽).

탐구의 길을 막아선 안 된다

심장마비에 대한 하비의 비유엔 문제가 있다. 왜냐면 찰스 샌더스 퍼스[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가 제시한 '사고의 첫 번째 규칙'을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탐구의 길을 막아선 안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접할 그 어떤 이론적 시도도 원칙적인 논리적 잘못은 없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시작된 연구는 방해없이, 그리고 낙담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를 향한 전진의 길목에 방어벽을 친 철학을 세우는 것은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강조는 원문)

심장마비의 비유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 경향이 위기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조차 막으려는 선험적 금지명령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증거를 살피고 평가하기에 앞서 이런 가능성이 선험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어쨌든 "다른 것들과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로 구성된 이른바 '유기적 전체'라는 비유는 "내가 자본에 대해 경험하고 본 방식에 딱 들어맞는" 그저 "내게 강한 인상을 준 비유"이기 때문에 말이다.[6]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가능성을 그들이 추가적으로 밝힐 때 비유는 탐구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험적으로 가능성을 배제하곤 했고, 탐구의 길을 가로막았으며, 연구를 방해하고 의욕을 꺾어 "진리를 향한 전진의 길목에 방어벽을 친다".

하비의 심장마비 비유는 "영리하고 기만적"이다. 이는 우선 심장마비가 인간을 죽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일 가능성을 -귀납적으로- 거부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우리가 이미 확보했다는 것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가 사회적 통념과 달리 '주요'란 단어를 '유일한'으로 대체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요란 단어를 복원해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흡연이 폐암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 화석연료의 사용이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 재정적 문제가 미국 대학생들이 학교를 졸업 못하는 주요 원인일 가능성도 증거에 앞서 배제하도록 명령할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고 답한다면 자본주의 위기의 실제 주요 원인을 제기한 것일 수 있는 이론은 증거를 살펴보기도 전에 왜 배제하라고 명령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한 원인이 주요한 것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을 만큼 호기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경험한 사건과 현상의 원인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큰 호기심을 가지지 않기도 한다고 이해한다. 나는 그들의 취향을 굳이 바꾸고 싶진 않다.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갖고 탐구하려는 길을 그들의 취향이 방해만 않는다면 말이다.

증거로 돌아가기?

그런데 또 짜증나는 것은 내가 자본주의의 위기가 한 가지 주요 원인에서 비롯한다고, 심지어 '현재 이곳'의 위기-대침체와 그 여파-가 한 가지 주요 원인 때문이라고도 제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주장한 것, 즉 미국 기업들의 수익성 하락은 대침체의 중요한 근본원인이며 이윤율 하락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이 경우 매우 잘 들어맞는다는 주장은 그리 대담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 증거를 살피기도 전에 이 가설을 배제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도 문제다. 이미 난 증거를 제시했다. 내가 예전에 제시한 이윤율 하락의 증거에 대한 하비의 몇몇 반론을 다루며 나는 예상한 증거에 대한 해석과 내 분석을 보여줬다. 그는 이에 대해 마땅한 반증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제시한 노동력 성장 통계는 이윤율이 상승하거나 LTFRP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더 중요한 건, (정당한) 증거들을 무시하는 것이, 또 이 증거로부터 이끌어낸 내 추론을 비유적으로 옳지 않은 '비유 형태'(그런게 있지도 않은데)라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는 무관한 어떤 것으로 묵살하는 게 적절하냐는 점이다. 하비를 부당하게 비난하지 않게끔, '독자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비유 형태를 단순히 비교하거나 대비시킨 것이었다고 이해되지 않게끔 내가 여기서 다시 반복하해보자면 ①나에 대한 그의 대답은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유기적 비유는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잘들어맞는다"는 단정적인 주장으로 결론을 맺으며 ②이 결론은 경험적 증거에 대한 고려없이 이뤄진다. 그는 내가 제시한 증거에 도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험적인 그 어떤 종류의 합당한 반증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더 잘 들어맞는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 자신에게 '인상적'이었던 것과 자신이 "자본을 어떻게 보고 겪었는지"에 대해 늘어놓을 뿐이다.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승인하기 위한 목적이나, 결론의 정당성을 사후 승인하기 위한, 실제론 정치적 편의를 위한 목적을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이런 식의 방법이 명백한 증거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이런 방법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단점을 지닌다. 벌어진 일을 사람들이 '보고 겪는' 방식의 이해는 실제 일어난 일과 다르기 십상이며, 이런 방식은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부적절하기 일쑤다.
[7] '보고 겪은' 일의 정확성과 타당성을 받아들이기 전 주의깊게 명확한 증거를 숙고하고 추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경험은 사건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곤 한다. 하비는 고용의 성장이 그 자체로 이윤율을 향상과 LTFRP가 작동하지 않는 중요한 증거라고 주장한다(하비 2014). 그는 상품의 가격이 가치와 일치할 때만 마르크스의 법칙은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여러 반론들이 이미 예측된 것일뿐 아니라 충분히 해명됐음을 들어보지 못한 듯 이윤율 하락 증거의 현실적 적합성에 의문을 표한다. 그와 같은 오해에 기반한 주관적 경험에 의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위기에 관한 이론이 '지금 여기'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내 생각에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독단주의에 맞서 싸워 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은 무척 중요하다.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완강히 고집하는 것은 독단주의의 한 형태다. 하비에겐 분명 이런 잘못은 없다. 그는 "그럼에도 앤드루와 나의 비유 형태 모두가 옳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부당하게도 내가 제시하지도 않았고 지지하지도 않은 비유를 탓하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최소한 독단적이진 않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독단주의도 있다. 명백한 증거와 논리적 추론을 두고도 믿음을 완강히 고집하려는 태도다. "당신은 당신의 의견을 지녔고 나는 나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거나 "당신과 나의 경험은 다르다"는 말은 열린 태도나 상호 존중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가 증거와 논리를 묵살하기 위한 것일 때 이는 자신이 잘못됐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걸 거부하는 독단주의에 다름 아니다.
[8]

하비가 두 번째 형태의 독단주의에 빠져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하비는 경험적 증거를 두고 그의 생각을 다시 숙고해보길 거부하진 않는다. 단지 그는 증거와 겨뤄보질 않았을 뿐이다. 그에겐 여전히 그럴 기회가 있고 나는 그가 그렇게 했으면 한다. 이는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게 아니다. 우리 지식인들에겐 이와 다른 책임도 있다. 그 책임 중 하나는 알곡에서 쭉정이를 골라내듯
[9] 경험적으로 옳은 것,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분하는 일이다. 이는 중요한 책임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독자들은, 그들 스스로 증거와 주장을 적절하게 평가할 지식, 그리고 이 지식을 충분히 쌓는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의 임무다.

독자들은 주로 시간과 지식이 부족한 이유로 그들 일부가 스스로 평가할 수 없는 증거와 주장들 대신 더 '유용한' 비유의 비교를 찾는다. 어떤 독자는 그 비유가 맘에 드는지 안드는지에 기댐으로써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더 잘 적용되는' 것을 대신 결정해주는 '유용한' 의견에 마음이 쏠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다른 자본의 화신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벌어진 일에 책임이 있는, 자본의 여러 화신들 중 하나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변혁시키길 바란다면,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또 망가지는지에 대한 진정한 지식-증거와 이 지식에 기반한 주장을 갖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유용한' 제안은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클리포드(William Kingdon Cliffordㆍ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가, 1845~1879)가 '믿음의 윤리학'에서 설득력있게 주장한 데 따르면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모든 믿음은 항상,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쟁점을 판단하기에 능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은 "믿음을 굳힐 시간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1990.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s of Cultural Change. Cambridge, MA and Oxford: Blackwell Publishers.('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구동회ㆍ박영민 옮김, 한울 2013)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Kliman, Andrew.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Marx, Karl. 1971. Theories of Surplus-Value, Part III. Moscow: Progress Publishers.
_______. 1989b.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_______. 1990.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I.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 개역판)
_______. 1991.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III.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 개역판)
Quine, W. V. O. 1960. Word and Object, Cambridge, MA and London: MIT Press.

주석
[1] 이 반론의 1편에서 내가 썼듯이 마르크스의 법칙은 자본주의 하에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노동절약형 기술의 발전 때문에 일어난다. 생산비용의 절감에 따라 기술 혁신은 생산가격의 상승을 저지시키는 경향을 띠며 이는 기업이 생산을 위해 투자하는 자본량이 늘어나는 만큼 빠르게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을 어렵게 한다.
[2] 하비와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충돌은 여기에 있다. 내가 언급했 듯이 그는 처음 글(하비 2014)에서 자주, 그리고 매우 길게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하비의 답변에선 마르크스가 거의 사라졌다. 그는 LTFRP와 이에 기반한 위기이론을 다루면서 단 몇 번만 [마르크스를] 언급하며, 거의 대부분을 비유와 연관해 그와 마르크스의 대립을 자신과 나와의 대립으로 그려낸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왜인가? 하비는 왜 갑자기 증거에 대한 토론에서 비유에 대한 토론으로 방향을 바꿨는가? 클라이먼이 제안한 '비유 형식'이 옳을 것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봐도 되는가. 그렇다면 대침체(the Great Recession)의 발생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옳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왜 이리 다른가?
[3]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만취상태를 분석한다"는 문장은 타데즈 보이-젤렌스키(Tadeusz Boy-Zelenskiㆍ폴란드 시인, 1874~1941)가 마이클 드 몬테인(Michael de Montaigneㆍ프랑스의 르네상스 철학자, 1533~1592)의 '만취에 관하여'라는 수필을 묘사하며 처음 쓴 표현이다.
[4] 하비는 아마 이 표현을 "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자본주의의 붕괴는 태양이 꺼질 때까지처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로부터 빌어왔을 것이다.['자본의 축적', 황선길 번역, 826쪽(Ⅱ책) 128번 각주]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이윤율 하락 때문에 반드시 혹은 그렇게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와 달리 그는 "상쇄요인들이 작용하여 그 일반법칙(이윤율의 경항적 저하의 법칙)의 효과를 억제하고 취소"['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289쪽]하기에 LTFRP는 "공황에 의하여 끊임없이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것"['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 322쪽]인데 "항구적인 공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잉여가치학설사' 이성과 현실, 589쪽 *표 각주]고 주장한다.
[5] 현대 유체역학의 나비에-스토크스방정식이 유체의 흐름은 '혼돈 상태'일 것이라는 가설에 기반해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여기서 혼돈 상태는 기술적인 정의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 다르다. 실제 예측이 불가능함에도 혼돈 상태의 동적 체계에서 변수의 작용은 완벽히 결정돼있는 것과 같다.
[6] 이 묘사에 딱 맞는 유일한 유기적 총체로는, 콰인(1960, p.52)의 '가바가이(gavagai)'가 있다. 이는 우리 중 나머지가 토끼 전체에 자극받을 때 가상의 '원초적' 자극으로서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이란 구절은 그의 '위기이론과 이윤율 저하'(하비, 2014)와 최근 답변에서 반복된다. 그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학설사[3부 20장 3절]'*에서 이 말을 인용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분리돼 있고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요인들의 폭력적인 융합으로서 경제위기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 하비가 이 구절을 위기의 원인들은 서로 분리돼 있고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며 인용한 것과 달리 말이다.

※하비가 인용했던 '잉여가치학설사' 3부 20장 3절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링크)
The capitalist directly produces exchange-value in order to increase his profit, and not for the sake of consumption. It is assumed that he produces directly for the sake of consumption and only for it. [If it is] assumed that the contradictions existing in bourgeois production?which, in fact, are reconciled by a process of adjustment which, at the same time, however, manifests itself as crises, violent fusion of disconnected factors operating independently of one another and yet correlated?if it is assumed that the contradictions existing in bourgeois production do not exist, then these contradictions obviously cannot come into play.
자본가는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바로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그가 직접소비하기 위해서, 오직 이를 위해서만 생산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부르주아적 생산에 존재하는 모순-실제에서 이 모순들은 존재함과 동시에 교정의 과정을 거쳐 조화를 이룬다. 물론 위기로서 그 자체는 서로에게 독립적일뿐 아니라 연관해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의 폭력적 융합이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순들이 작동하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할 것이다.

[7]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 1037쪽) 그 둘은 일치하지 않기에 '과학'이 필요하다.
[8] 난 관찰의 이론의존성과 같은 것들과 [이를] 비교할 수 없음을 잘 안다. 이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 지점에서 내가 논하는 것에 적절치 않다. 증거와 이유가 대립을 종식시키기에 불충분한 경우도 있고 증거와 이유가 충분하지만 대립의 한 편이 그 결론을 받아들이길 독단적으로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9]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 분명히 하자면 이는 '자본의 본성'을 농업생산에 비교하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2권이 최근 출판됐다. 출판사는 책을 소개하면서 옮긴이가 "『자본』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비의 계산 오류를 바로잡기도 했으며, 적재적소에 주석을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1권을 읽으며 도움을 많이 받은 나로서도 역서가 얼른 나오길 바라왔다. 그렇게 펼쳐 든 책의 앞 부분에서 두 가지 오류를 발견해 여기에 적어놓는다. 우선 간단한 오역이다.

"한때 화폐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던 상인은 이제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덕분에, 그들에게 제공되는 잉여가치 부분만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하비 2권 강신준 옮김 56쪽

자본주의에서 상인이 얻는 수익의 근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상인이 '화폐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는 걸로 수익을 얻었던가. 화폐를 이용해 돈을 버는 건 상인이 아니라 금융자본 아니었던가. 원문을 확인해봤다.

"Merchants, who once made their money buying cheap (or by robbery and stealing) and selling dear, can appropriate only that share of the surplus-value that accrues to them by virtue of the services they render to surplus-value production and realization."
- 영문판 30~31쪽

'made their money …' 부분이다. 내가 보기엔 "한때 저렴하게 사들여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돈을 (혹은 강도행위와 도둑질로) 벌던 상인은 …"이라고 옮기는 게 맞는 것 같다. 괄호 안 'or by robbery and stealing'을 옮기지 않은 것도 아쉽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 하에서 '수탈'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상업자본이 정직한 부지런함과 상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민한 대처 만으로 돈을 벌어온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하비의 기존 주장들을 고려했을 때 괄호 안의 문구를 삭제한 것은 그의 주장을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옮긴이 주에서의 실수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 '참된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 오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던 생산물이 내일은 다른 비슷한 상품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M1: 122. 뒷 문장은 출처를 알 수 없음. 하비는 펭귄판 202~03면에 있다고 표시해두었지만 해당 부분에는 그런 구절이 없음-옮긴이)
- 하비 2권 강신준 옮김 58쪽

강신준 교수는 해당 부분을 찾지 못해 '그런 구절이 없음'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펭귄판 '자본론'에 분명히 있다. 물론 여기엔 하비의 잘못과 실수도 있다. 잘못은 앞뒤를 바꿔 조합해 인용했다는 것이고 실수는 펭귄판 202~203쪽이 아니라 201~202쪽에 해당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We see then that commodities are in love with money, but that 'the course of true love never did run smooth')"는 펭귄판 202쪽에 있고 "오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던 생산물이 내일은 다른 비슷한 상품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Today the product satisfies a social need. Tomorrow it may perhaps be expelled partly or completely from its place by a similar product)"는 201쪽에 있다. 강신준 교수가 MEW에서 직접 옮긴 길판에선 앞 문장이 176쪽, 뒷 문장은 175쪽에 나온다.

"알다시피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176쪽

"오늘 생산물은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그러나 내일은 그 생산물 가운데 전부 또는 일부가 다른 유사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그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
-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175쪽

지난해 작고한 김수행 교수의 2015년 개정판에는 다음과 같이 옮겨져 있다.

"이와 같이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140쪽

"오늘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생산물이, 내일에는 어떤 비슷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139쪽

하비가 앞뒤를 바꿔 인용하고 출처 표기를 실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런 구절이 없음'이라고 단정적으로 옮긴이 주를 단 것은 강신준 교수의 명백한 잘못이다. 그 앞뒤로 조금만 더 살폈어도 충분히 찾아내 하비의 실수를 교정할 수 있었다. 자본론의 번역자이고 연구자인 강신준 교수의 이런 실수는 너무 아쉽다.

오역의 문제는 1권에도 있었다. 떠오르는 게 하나 있어 찾아보니 1권 55쪽의 문장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 하비 1권 강신준 옮김 55쪽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가치의 변증법적 관계를 말하는 부분이다. 원문을 찾아보지 않아도 앞 문장과 뒤 문장이 똑같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원문은 이렇다.

"Can you talk about exchange-value without talking about use-value? No, you can't. Can you talk about value without talking about use-value? No."
- 영문판 24쪽

즉 뒷 부분의 '교환가치'는 '가치'가 맞다. 최근 판매되는 책에서 고쳐졌는지는 확인 못했다.

연구자와 번역자들의 노고는 내 독서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강신준 교수의 번역 작업에도 항상 고마움을 느껴왔다. 하지만 이런 실수들로 인해 그의 작업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곤 한다. 강신준 교수와 출판사는 서둘러 이런 오류들을 찾아 수정해줬으면 좋겠다.

Posted by 때때로

※앤드루 클라이먼의 데이비드 하비 비판 2편을 아래 옮깁니다. 주석과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며 대괄호[ ] 안은 옮긴이가 덧붙인 내용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2편: 수익성에 대한 오해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3월 12일ㆍ링크
증거는 명확하다.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대침체 때까지 미국 기업들 전반의 이윤율은 떨어졌고 이러한 하락은 거의 전적으로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 따라 설명된다.

이 논문 1편[링크]에선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와 함께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마르크스가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학 법칙"으로 인정한 법칙(LTFRP)에 대한 하비의 해석(하비 2014ㆍ링크)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하지만] LTFRP가 1980년대부터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하비의 믿음은 다루지 않았다.

LTFRP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하비의 유일한 '증거'는 노동인구 데이터에 관한 논의였다. 그는 이윤율(즉 투하자본의 규모에 대한 이윤량의 비율)에 관한 그 어떤 직접적인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며 이윤율이 하락했음을 보여주는 나와 다른 이들이 내놓은 증거에 도전했다(그림 1을 보라).
[1]


그림 1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하비는 이 증거들에 관해 "몇몇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점에서 매우 옳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도 던진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의문을 들어보지도 고려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논지를 전개하는 게 문제다. 그 의문들은 실제로 오래된 상투적인 질문이다. 그러한 질문을 받아온 이들 중 한 명으로서 나는 데이터를 모으고 해석해오면서 그것들 모두를 다뤄왔다. 그러므로 그 질문들에 [모두] 답할 필요는 없다. 데이터에 대한 내 분석과 해석은 이미 그 의문들을 예상하며 다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 의문들이 어떻게 설명되는지 확인해주기만 하면 된다.[2]

그가 "대부분의 이윤율 저하 논문"에서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의문"이라며 제기한 "어떤 이유에서든 이윤율이 저하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그가 비판하는 핵심은 불분명하다. - 그러므로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마르크스가 보여주려 한 (노동절약형 기술변화의) 특별한 동학의 존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정말 옳다. 그래서 내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대침체 때까지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궤적을 고려하며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인 하락이 분명하게 사실과 일치한다"(클라이먼 2012, 213쪽)고 결론 내린 이 결론이 단순히 기업들의 이윤율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이는 여러 잠재적 하락 원인을 (분해해) 구분하는 '분해분석법(decomposition analysis)'과 각각의 요인들이 이윤율에 대해 갖는 효과의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원인을 연구하는 데 사용한 이윤율을 분석하는 표준적인 방식이 특별히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하비가 강조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다시] 분석해보겠다.

전통적으로 이윤율은 잉여가치율(또는 고용에 대비한 이윤의 비율)과 자본의 가치구성(또는 투하된 자본 중 고정자본과 가변자본의 가치 비율)의 함수로 분석된다. 어떤 맥락에서 이는 괜찮은 방법이지만 연구자들이 구성한 표준적인 가치구성은 마르크스가 가리킨 가치구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생산수단의 획득과 노동자의 고용에 투하된 상대적 가치량 뿐 아니라 상품의 실제 가치에 비해 오르는 상품의 가격 비율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두 개의 다른 요인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표준적 가치구성의 운동은 명백한, 모호하지 않은 경향을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에서 표준적인 가치구성이 변화하지 않았을 때 생산수단 획득과 노동자 고용에 투하된
[자본의] 상대적 가치량 또한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가 결론내릴 순 없다. 생산수단 획득에 더 많은 가치가 사용돼 가치구성이 상승하는 경향을 띠었지만 이 효과는 인플레이션에 의해 상쇄됐다고 가정할 수 있다.[3] 하비가 옳게 강조했듯이 이는 '중요한 문제'다.

나의 대안적 분석은 이 문제를 구별되는 두 요인으로 다룬다. 나는 이윤율의 전체 운동을 아래와 같이 분석한다.

① 상품의 실제 가격에 비해 오른 상품 가격 비율의 변화에 기인한 운동
② 고용된 노동에 대한 이윤율의 변화에 기인한 운동
③ '그밖에 모든 것'에 기인한 운동

나는 앞의 두 원인이 어느정도 짧은 기간에는 중요할 수 있지만 그 둘 모두 장기적으로 - 우리가 전후 기간 전체를 고려할 때 - 이윤율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전체는 '그밖에 모든 것'에서의 변화에 기인한다

. 따라서 일단 ①과 ②를 제외한 다음 수학적으로 계산하자면 '그밖에 모든 것'은 바로 투자한 고정자산에 대한 노동시간으로 측정된
[노동력] 고용 비율이다.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의 거의 전부는 이 비율의 하락에 기인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고용이 자본축적보다 항상 더 늦은 속도로 증가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경향을 마르크스의 법칙이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식으로 그 법칙은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하락의 거의 전부를 설명한다.

고용에 대한 이윤의 비율은 이윤율에 약간의 영향만 미친다. 이윤율은 그 비율에 따라 아주 약간만 변동할 뿐이다. (전후 초기에만 아주 약간 그렇게 보일 뿐 1970년대부터 대침체 때까지는 상승이나 하락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비율이 오랜 기간 안정적이었다는 게 CEO들이나 기업의 고위 경영진들
[의 소득]을 이윤이 아니라 고용 부문으로 미국 정부가 분류한 것에 따른 통계적 착시는 아니라는 걸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고위 경영진에게 지급된 것을 이윤으로 재분류한 내 최근 추정(클라이먼 2014b를 보라)에서도 아주 약간의 차이만 보인다. 물론 최근 수 십 년간 그들의 보수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그렇지만 통계에 영향을 미치기엔 고위 경영진의 수는 너무 적다. 내 계산에 따르면 1979년에서 2005년 사이 0.1% 또는 1%(소득 분배에서 상위 0.1% 또는 1% 부분)라고 불리는 경영진이 받은 생산 몫의 증가는 기업의 다른 부문인 고용 몫(employees' share)에 단지 0.4%포인트 또는 0.6%포인트의 하락을 불러왔을 뿐이다.

하비는 또 이윤율이 저하한다는 증거에 대해 "이윤(가치ㆍ원문 그대로)이 생산되는 곳과 그것이 실현되는 곳 사이엔 차이가 있다. … 자본과 수익이 흘러가는 … 양식은 … 뒤얽혀 있고 시스템의 한 부분에서 선택된 데이터가 그것의 전체 운동을 정확하게 대표하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반론을 편다. 그의 지적은 다시 한 번 옳다. 앞서 논의한 국내 자본 투자의 수익률과 관련한 데이터 만으로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이 전반적으로, 국내 투자에 대한 것 만큼 해외 투자에 대한 이윤율 또한 하락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내 결론은 그 대신 해외와 국내 계정 모두를 고려해 내려진 것이다. 미국 기업의 해외 투자와 해외 투자로부터의 수익에 관한 정부 데이터는 1983년부터 이용할 수 있다. 이 데이터는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해외 투자에 대한 이윤율이 데이터의 시작점으로부터 대침체 때까지 대체로 하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림 2)
[4]. 국내와 해외 이윤율을 측정하기 위한 분모는 약간 다르기 때문에 두 데이터 모음을 적절히 연결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 기업들 전체의 이윤율 하락 규모를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해외와 국내 이윤율 모두 하락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전체 이윤율 또한 하락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림 2 미국 다국적 기업의 해외 이윤율
(해외 직접투자 누적액에 대한 해외 직접투자로부터의 세후 수입 비율)

또 하비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한 나라에서 생산된 이윤을 세금이 없거나 낮은 다른 나라의 자회사 계정으로 옮기는 '이전가격 조작'을 사용한다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국적 기업의 해외 수익과 투자 데이터가 그들의 자회사가 자리한 나라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생산이 이뤄지는 나라와 그 생산품이 판매되는 나라는 자주 다르기도 하다. 그 결과 다국적 기업의 이윤율이 어떤 특정한 나라에서 정확히 어찌 되는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렵다. 그러나 이는 전체적인 그림을 살펴볼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전가격 조작의 술수는 기업이 투자의 소유권과 이윤을 이리저리 옮길 수 있도록 하지만 이윤 또는 투자의 총량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하비는 이전가격 조작이 '숨겨진' 이윤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증거도 내놓진 않는다. 내가 알기론 그런 증거는 없다. 조세 당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이윤을 보호하는 것은 숨겨진 이윤과 같은 게 아니다.

앞서 논의한 증거는 오직 미국 기업들과만 관련된 것이다. 하비는 "그러한 데이터가 세계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일의 증거가 될 순 없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그 데이터들이 증거가 될 순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이 맥락에서 반대를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그의 논문 주제는 경제 위기의 잠재적 원인으로서 이윤율의 하락이다. 그리고 그는 최근의 위기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감염을 통해" 세계로 확산되기 전 미국에서 시작됐음을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위기가 시작돼 그 다음 다른 곳으로 확산됐다는 것은 금융적으로 간단히 설명된다. 따라서 세계가 아니라 미국에서 이윤율 하락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또 그것이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작용한 것인지에 우리는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비는 최근 몇 년간 수익성이 상당히 회복됐다고 주장한다. 물론 침체 후 추세는 이전의 이윤율 하락이 대침체의 원인인지 아닌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의 지적은 이윤율 측정 방법이 침체 후 반등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의문을 갖게 됐고 이전에 수익성 하락을 알려준 그 방법을 믿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이윤에 관한 거의 모든 정의를 이용해) 계산한 모든 이윤율은 침체 후 반등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것들 모두는 대침체 기간 동안 하락했다(바닥을 쳤을 땐
[호황의] 절정기였던 2006년 값보다 24%에서 38%까지 낮았다). 그러다 그 값들 모두는 반등해 2013년쯤엔 2006년 수준에 근접하거나 넘어섰다. 기업이 노동력을 늘리지 않고 생산하는 데 따른, 침체 이후 생산에서 노동자 몫의 급격한 감소가 수익성 회복의 주요 원인이다. 이는 '임금 억제' 때문이 아니다. 인플레이션 효과를 보정한 후에도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상승했다.

이전엔 옳았던 하비(마르크스의 '과소소비론'에 대해)

'충돌하는 힘들'과 '다양한 모순과 위기 경향들'이 있다는 것을 하비는 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일원인론인 LTFRP의 허수아비로 묘사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들을 함께 다룰 때 이 둘이 암시하는 바를 주목해야 한다. 이는 법칙이 위기의 다른 원인들과 상쇄 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만 옳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법칙을 일단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1편에서 지적한 대로 다중원인론에 대한 주장들은 위기에 관한 하비의 부재원인론에 대한 갈망을 가리는 가면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그는 분명 '자본론' 3권에 나와 설명되고 완료된 위기에 관한 명확한 다중원인론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본론' 3권에는 LTFRP 이론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금융 시스템과 같은 다른 결정 요인들이 이와 연결돼 그것이 드러나는 방법을 매개한다.

특히 하비는 과소소비 위기론, 즉 '유효수요' 부족을 LTFRP 그리고 기업의 투자 결정과 금융 동요와 같은 중간매개들이 작동한 간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연관되지 않은 대중의 제한된 소비가 만들어낸 현상으로 보는 이론을 마르크스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곧 그는 "만약 임금이 너무 낮다면 유효수요의 부족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관념을 마르크스의 것으로 돌린다. 증거로 그는 '자본론' 3권(그리고 2권의 비슷한 주석)에서 한 문장,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자본론 3권, 597쪽)는 마르크스의 설명을 인용한다.

하비는 곳곳에서 이 문장을 등장하는 맥락을 제거하고 전통적인 과소소비론의 방식으로 다룬다. 맥락을 따져보면 그 문장은 저임금이 부족한 수요로 이어지는 시기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대중의 제한된 소비를 위기의 '원인', 현대적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용인'이라고 말한) '원인'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의 '원인'으로 보는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위기가 가능한 조건(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형상인')일 뿐이고 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5]

바로 몇 해 전, 하비는 언급된 그 문장과 구절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그 맥락에 따라 조심스레 분석했다. 잉여가치가 생산돼 화폐로 실현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추가 수요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물은 후 하비는 "마르크스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냉혹하게 솔직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으로 구성된 폐쇄된 사회에서 추가 수요는 오직 하나의 원천, 즉 자본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고 따라서 착취받는 노동자는 그것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하비 2012, p.25)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추가적인 생산수단을 위한 자본가들의 기업 수요-투자수요-와 판매될 잉여가치를 포함하는 생산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자본가 가정의 소비재 수요다. 그에 따라 하비는 경제 위기를 특징지우는 수요의 부족이 위기 때든 위기가 아니든 언제나 소비를 제한받아온 '대중' 또는 '착취받는 노동자'의 제한된 소비 탓이 아님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하고 많은 부분을 질문하는 식으로 요약한다. 따라서 위기를 대중의 제한된 소비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행기 사고를 (사고가 났을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언제나 존재하는) 중력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대신 수요의 부족은 '자본으로부터' 나와야 할 추가 수요의 발생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현실이 원인이다. 핵심 문제는 하비가 '지속적인 자본축적'(하비 2012, p.26)이라고 부른 것, 즉 생산을 위한 추가적인 투자를 자본주의가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추가적인 생산적 투자의 규모가 필요한 것보다 적어졌을 때, 바로 그 때문에 수요 부족은 발생한다.

하비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적어도 그랬었다) 왜 갑자기 '제한된 소비' 문장을 맥락에서 떼내어 과소소비론적 '임금 억제' 위기 이론을 마르크스가 실제로
[의미했던] 수요 문제에 관한 '냉혹하게 솔직한' 설명과 연관짓는 데 이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냉혹하게 솔직한' 설명이 우리를 이윤율의 저하로 곧장 되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우리가 수요 부족이 거의 항상 투자수요 부족의 문제임을 이해하게 되면 뒤를 이어 투자는 왜 부족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의문은 더 나가서 두 가지 질문으로 연결된다. 투자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만큼 넉넉한 양의 이윤(잉여가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오늘날 새로운 투자의 이윤율이 미래에 적절한 규모의 투자로 이어질 만큼 충분히 높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불충분한 수익성은 미국에서 생산적 고정자산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수요가 장기적으로 둔화해 온 주요 원인이다. 1948년에서 2007년 사이 기업들의 고정자산 축적률은 41%까지 떨어졌다. 축적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유일한 요인은 이윤 중 생산에 재투자된 부분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주 약간(3%) 올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생산적 자본 축적률의 대체적인 감소는 이윤율 하락의 결과다(더 진전된 논의는 클라이먼ㆍ윌리엄스 2014를 보라).

생산적 투자의 미래 수익성이 불충분할 것이라는 예상은 오랫동안 중요한 문제로 간주됐고 여기에 대침체 후 회복이 그토록 약하고 오래 걸린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미약한 회복을 설명하기 위해 폴 크루그먼, 마틴 울프와 미국의 전 재무장관인 로렌스 서머스와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과 경제지 필자들은 미국 경제가 침체 이전, (즉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실질 단기 수익률이 -2% 또는 -3% 수준으로 터무니 없이 낮아서 충분한 수요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시기인 1980년대 중반쯤부터 꽤 오랫동안 '구조적 장기 침체(secular stagnation)'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계산했을 때 대출자들이 빌린 것보다 더 적게 갚는다는 걸 의미한다. 기업이 충분한 투자에 착수하도록 유도할 유일한 방법이 그들에게 되갚지 않아도 될 돈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투자의 예상되는 수익률은 정말로 지독하게 낮을 것이다!(더 진전된 논의는 클라이먼 2014a를 볼 것)

나는 하비가 말하 듯 "그것 모두가 어떤 숨어있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결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틀린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중간매개의 모든 방식이 복합적 요인들과 작동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대침체는 기업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약화시켰다.) 둘째로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은 '숨겨진' 게 아니다. 헤겔이 말했 듯이 본질은 현상으로 나타나고야 마는 것이다
[국역 '철학강요' 160쪽]. 나는 그렇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앤드루 클라이먼은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마르크스 '자본론'의 복권: 모순이라는 신화에 대한 반박 Reclaiming Marx's 'Capital': A Refutation of the Myth of Inconsistency'(Lexington Books 2007)의 저자다. 페이스 대학(뉴욕)의 경제학 명예교수이며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이니셔티브(the Marxist-Humanist Initiative)' 함께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2012. History versus Theory: A Commentary on Marx’s Method in Capital, Historical Materialism 20:2, 3-38.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Kliman, Andrew.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_______. 2014a. Clarifying “Secular Stagnation” and the Great Recession, New Left Project. March 3.
_______. 2014b. Were Top Corporate Executives Really Hogging Workers’ Wages?, Truthdig. Sept. 18.
Kliman, Andrew and Shannon D. Williams. 2014. Why “Financialisation” Hasn’t Depressed US Productive Investment,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Print version forthcoming.
Marx, Karl. 1991a.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Ⅲ.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8)

주석
[1] '그림 1'의 데이터는 미국경제분석국(BEA)의 분석을 이용했다. 국민소득과 생산 계정 표 1.14의 1ㆍ4ㆍ 7ㆍ9ㆍ10ㆍ12행. 고정자산 표 6.3의 2행. 고정자산 표 6.6의 2행. 순영업 잉여와 세후 순익은 이익에서 계산했다. 두 비율의 분모는 감가상각을 고려한 고정자산에 축적된 투자다. 감가상각은 역사적 비용으로 평가된다.
[2] 나는 이를 내 자신의 분석을 논의하는 데만 그칠 것이다. 다른 이들의 주장에 대해선 그 만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 하비의 주장에 따르면 - 마르크스가 명목상의 것보다 더 적게 참조한 - 자본의 '실질적인' 가치구성조차 순수한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의 지표가 아니다. 이점에 있어 그것은 '기술적' 그리고 '유기적' 구성과 다르다. 그러나 내 추정은 미국 기업의 실질적 가치구성이 기술적ㆍ유기적 구성에 매우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7년부터 2007년까지 실질적 가치구성은 약 160%까지 증가했다. 심지어 이 기간의 거의 대부분 동안 다른 자본구성들 사이의 연관은 이 수치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했다. 성장률에서의 차이는 대부분 예외적으로 빠르게 늘어나 실질적 가치구성을 일시적으로 압박했던 임금 때문이다.
[4] '그림 2'는 미국경제분석국(BEA)의 '국제수지와 직접투자대조표'에서 가져왔다. 이윤율의 분자는 '시가 보정 전 직접투자수입'이고 분모는 '역사적 비용에 기초한 미국의 해외직접투자'다. 데이터는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했다.
[5] 이 구절에 대한 더 진전된 분석은 클라이먼 2012 의 253~255쪽(국역본)을 보라. 과소소비 위기론의 약점에 대한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논의는 이 책의 8장을 보면 된다.

하비는 올해 출간될 '2008년의 대붕괴'의 초안으로 2014년 발표한 글[링크]에서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비판적으로 논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앤드루 클라이먼이 반박에 나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아래는 앤드루 클라이먼의 첫 번째 하비 비판이다.

※ 'crisis'는 '위기'로 통일했습니다. 1847년과 1858년 공황과 관련해 마르크스의 용어를 검토하는 부분에서만 '공황'이라고 썼습니다. 인용 중 국역본이 있는 것은 이를 활용했습니다. 대괄호[ ]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추가한 것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 6월 14일 수정. 김공회 선생의 꼼꼼한 충고를 반영해 수정했습니다. 단, 잘못 옮긴 것의 책임은 전적으로 제게 있습니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1편: 마르크스를 오해하기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3월 10일ㆍ링크
칼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은 대침체(the Great Recession)를 설명하고 미래의 중대한 경제위기들에 어떻게 대비할지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로 잘 알려진 데이비드 하비는 최근 발표한 논문(하비 2014ㆍ링크)에서 칼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LTFRP)의 ▲마르크스 자본주의 경제위기 이론 내 지위와 ▲대침체 그리고 지속되는 침체 여파와의 관련성을 격렬히 비판했다. 법칙은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 절약형 기술 진보로 인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기술 혁신은 생산비용을 떨어뜨리면서 생산물 가격 상승을 저지하는 경향을 띠며, 이는 기업이 자신의 생산물 생산에 투자한 자본의 크기 만큼 이윤을 빠르게 증가시키는 걸 어렵게 한다.

이 과정이 대침체의 근본원인 중 하나인지 아닌지는 매우 큰 정치적 중요성을 지닌 문제다. 쟁점은 자본주의 작동방식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정책들-국가가 통제하는 자본주의로 신자유주의를 대체하고, 금융을 규제하고, 불평등을 줄이고 금융보다 생산에 더 친화적인 정책들 등-이 미래의 중대한 경제위기들을 막는 데 성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LTFRP에 뿌리를 둔 위기 이론은 그와 같은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암시한다. 왜냐면 그 정책들은 이윤 극대화를 위한 충동, 기술 진보와 수익성 하락 사이의 관계와 같은 자본주의의 모든 형태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거의 그대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하비의 주된 불만은 LTFRP와 위기 이론이 일원인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상쇄 요인들에 더해 위기의 다른 원인들을 무시하고, 이 이론의 현 지지자들에 의해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배제'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주장은 단지 허수아비 때리기일 뿐이라고 논할 것이다.

진정한 쟁점은 누군가가 일원인론을 옹호해왔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부재원인론
[앤드루 클라이먼은 'apousa-casual theory'라고 적고 있다. 'apousa'는 그리스어 'απουσα'의 알파벳 표기로 'absent'를 뜻한다. 하비가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확인 못했다]이라고 불러야 할, LTFRP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이론을 하비가 적극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어떤 의견을 배제하려 하는 사람 중 하나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된 힘들의 소용돌이'와 '복합적인 모순과 위기 경향'에 대한 그의 강조에 비추어 보면 그가 그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은 위기의 모든 잠재적 원인을 우리가 고려해야 한다고 충고하려는 것이라고 예상될 것이다. 그러나 하비는 위기의 다른 잠재적 원인을 LTFRP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다. 그는 그 이론과 이에 기반한 위기 이론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으려 단단히 결심한 것 같다. 그는 LTFRP가 진정한 법칙인지, 마르크스가 마침내 그 이론에 정말로 동의했는지, 이윤율이 하락한다는 타당한 증거가 있는지, 하락하는 경향을 언급하는 이 법칙 때문에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인지 의문을 던지는 데 논문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에도 대답할 것이다.

하비 논문의 두 가지 다른 측면 또한 논할 것이다.

1. 하비는 1980년대 시작된 노동인구의 세계적 성장은 LTFRP가 작동되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이 법칙에 대한 초보적인 오해에 기반해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2. 마르크스가 "만약 임금이 너무 낮으면 유효수요의 부족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논했다고 하비는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의 글에 대한 그의 최근 해석(하비 2012)과 모순됨을 보여주고 그의 앞선 입장이 옳음을 논할 것이다.

LTFRP에 대한 그의 태도는 나를 놀라게 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의 법칙에 기반한 위기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자들 내에서 헛된 우상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고 썼고 사실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다. 정치 영역에서 만큼 학계에서도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좌파들은 소위 이론에서의 교조조의와 그 지지자들을 자주 격렬히 비난해 왔다. 그들은 또한 연구에서 그 이론을 배제하려 해왔다. 예를 들면 M. C. 하워드와 J. E. 킹 교수는 자신들의 책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역사(A History of Marxian Economics, 1992, ⅹⅲ)'에 LTFRP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학문적 신뢰도에 큰 상처를 줘 왔다"고 적고 있고 크샤마 사완트의 조직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a Workers' InternationalㆍCWIㆍ영국에 시작된 트로츠키주의 조직. 영국 노동당 내 밀리턴트 경향에서 발원했으며 현재 세계 45개 나라에 조직을 두고 있다]'는 최근 '교조주의자' 두 명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연구에서 가능한 설명을 배제하려는 노력이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로 표현되고 이런 편견이 그토록 자주 받아들여지는 게 특히 불쾌하다.

노동인구에 관한 데이터

하비는 고용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세계 노동인구는 1980년에서 2005년 사이 11억 명이 증가했다-를 끌어들여 이를 세계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고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증거로 사용하려 한다. 그는 이 주제에 천 단어 이상을 사용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현 자본주의가 겪는 곤경들을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의 결과로 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노동 참여의 증거로 인해 심각한 오류에 빠졌다는 판정받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잉여가치 생산과 추출이 압박받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데이터는 확실히 잉여가치 또는 이윤이 - 절대적으로 - 크게 증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 쟁점은 이윤, 투자된 자본량에 대한 잉여가치 또는 이윤의 비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이다. 비율[분수]에서 분자의 증가는 비율 전체가 증가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이윤율에서 분모, 투자된 자본의 비율 증가가 분자의 비율 증가보다 훨씬 크다면 이윤율은 떨어진다. 분모가 더 큰 비율로 증가하지 않았음을 하비가 보여주지도 암시하지도 못한, 그가 끌어모은 통계는 이윤율이 증가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럼에도 하비는 - 투자된 자본의 그 어떤 증가도 무시한 채 - 고용의 증가는 그 자체로 마르크스의 LTFRP가 1980년대 초부터는 작동하지 않아 왔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일반 이론이 옳다면 노동 절약형 기술 변화의 확산은 … 자본에 고용된 임금노동자 수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기꺼이 인정했던 바이기도 하다."

이게 바로 틀렸다. LTFRP가 고용 감소를 의미한다고 마르크스가 "기꺼이 인정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비가 끌어온 구절은 실제로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생산성 향상')가 "주어진 자본에 의해 고용되는 노동력의 양을 감소시키는 경향을 가진다"고 말한다(자본론 3권, 280쪽, 강조는 글쓴이). 예를 들어 만약 투자된 자본이 원래 100만 달러이고 노동자 10명을 고용했고 이후엔 400만 달러를 투자해 노동자 20명을 고용했다면 '주어진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 수는, 이를테면 100만 달러 당 10명에서 5명으로 감소했다. 즉 이는 하비가 설명하듯 고용 규모의 절대적 감소를 뜻하는 게 아니다. 절대적인 고용 규모는 10명에서 20명으로 두 배가 됐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LTFRP를 제시하는 앞 부분의 확장된 논의에서 그는 하비가 말한 "기꺼이 인정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윤율의 점진적 저하의 법칙은 … 사회적 자본에 의해 운동되고 착취되는 노동의 절대량, 그리고 또 사회적 자본에 의해 취득되는 잉여노동의 절대량이 증가하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으며 …

이윤율의 저하는 총자본 중 가변적 구성분의 절대적 감소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감소, 즉 불변적 구성부분에 대한 가변적 구성부분의 상대적 감소로부터 발생한다.

이윤의 절대량(그것의 총량)은, 이것과 총투하자본 사이의 비율의 비상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50%나 증가한 것이다. 자본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 즉 자본이 운동시키는 노동의 절대량, 그리고 또 자본이 흡수하는 잉여노동의 절대량, 즉 자본이 생산하는 잉여가치의 양, 이리하여 자본이 생산하는 이윤의 절대량은, 이윤율의 점진적인 저하에도 불구하고 증가할 수 있으며 그리고 점진적으로 증가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바탕 위에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변동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자본론 3권, 259~261쪽, 강조는 원문

요점을 좀 더 강조해 명확히 다시 말하자면 고용의 증가는 LTFRP에 반대되는 증거가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의 '분명한 동요와 양면성'

하비는 "그 법칙의 보편적 타당성에 관한" 자신의 "오랜 회의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자신의 발견을 법칙, 경향의 법칙 혹은 가끔 단지 경향이라고까지 부른다는 데서 그의 언어가 갈수록 동요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고 썼다. 하비가 '경향'과 '법칙' 사이의 동요로 이해한 것은 사실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그것을 설명하는 것 사이의 불가피한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 하락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법칙을 제안한다. [여기에] 동요는 어디에 있는가?[1]

마르크스는 LTFRP를 '법칙'으로 부르거나 '경향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서 동요한 것도 아니다. 그는 모든 경제적 법칙을 경향의 법칙으로 여겼다. 예를 들면 그는 '자본론' 3권 10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 잉여가치율을 모든 경제법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경향으로서 … 가정하고 있다."(자본론 3권, 207쪽)고 적었다. 핵심은 충분히 간단하다. 이윤율 같은 경제적 변수에서 모든 변동을 담아낼 법칙은 발견할 순 없다. 이러한 변동들이 순수하게 법칙을 따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든 종류의 우연적 사건과 방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우연적 사건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드러나는 변수들의 경향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하비는 마르크스가 LTFRP에 대해 양면적이었다는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추가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첫째는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 같은 그의 정치적 저작에서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내전'에서는 잉여노동이나 잉여가치와 같은 현상들도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비는 이러한 부재를 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의 존재에 대해 마르크스가 의심해왔다는 타당한 증거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들의 일반적인 타당성에 대한 오래된 회의론"의 근거로 간주해야하는 것 아닐까?

더 나가 마르크스가 LTFRP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는 증거로 하비는 1848년과 1857년 공황들을 '상업과 금융 공황들(commercial and financial crises)'로 묘사하며 이윤율 하락에 관해서는 단지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하는 마르크스의 분석을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미하엘 크래티케는 비슷한 주장을 해왔다. 이는 경기후퇴와 불황을 위기(crises)라고 부르는 현재 통용되는 마르크스주의 학술용어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중요한 증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용어의 사용법은 마르크스 시대 이후 크게 변해왔다. 그가 말한 경제위기들(economic crises)은 상업과 금융공황을 의미했다. 그는 경기변동의 연이은 국면들을 "중간 정도의 활황, 번영, 과잉생산, 공황, 불황" 또는 "평균수준의 호황ㆍ활황ㆍ공황ㆍ침체"(자본론 1권, 607쪽, 863쪽)로 묘사하며 이러한 위기들을 그것들이 초래한 경기하강과 구분한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업 또는 금융위기들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윤율의 감소는 간접적으로, 그리고 약간의 지체를 겪은 후 위기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이 경향은 과잉생산을 촉진한다(이를테면 생산적 투자수요의 침체를 통해). 또한 금융 투기와 사기도 조장한다. "이윤율이 저하하면 … 어떤 종류의 특별이윤이라도 얻기 위하여 새로운 생산방법, 새로운 투자 및 새로운 모험 등을 앞뒤 가리지 않고 시도하기 때문에 투기와 투기의 일반적 촉진이 나타난다." 오직 부채를 최종적으로 갚지 못할 때 위기-이 경우 금융위기-가 폭발하고 이 위기는 침체로 이어진다. "특정한 지불일이 붙어있는 지불의무의 연쇄는 여러 곳에서 끊어지는데, 이것은 자본과 함께 발전하여 온 신용제도의 동시적 붕괴에 의해 더욱 격화된다. 이 모든 것들이 격렬하고 첨예한 공황, 갑작스럽고 강력한 가치감소, 재생산과정의 현실적 정체와 교란, 따라서 또 재생산의 현실적 축소를 일으킨다."(자본론 3권, 289~291쪽, 310~311쪽, 305쪽)

마르크스가 상업과 금융 관계의 파국을 '위기'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그가 이윤율의 하락과 위기의 폭발 사이에 많은 중간매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면 그가 때론 이윤율의 하락 경향을 추상적으로만 다루며 위기들을 논한다는 게 놀랍거나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한 번에 모든 것을 다루려 하다가 혼란스러운 잡동사니를 만들어내기보다 한 번에 하나의 것을 다루기를 선호하는 오직 엄격하고 변증법적인 인물이었을 뿐이다.

또한 하비는 1868년 이후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 이론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았다"며 "마르크스가 일찌기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the Grundrises)'에서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그의 마지막 10여 년 간 연구에서 무시하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던 것은 이상야릇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LTFRP를 '무시'했다는 추정에는 근거가 뒤따르지 않는다. 나는 이론적이거나 실증적인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했을 때 더 이상 집요하게 그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문제로] 관심을 옮긴다. 이는 내가 도달한 결론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다. 주어진 대답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르크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증거가 내겐 있다. 하비는 어떤 식으로 작업하는가?

따라서 진정한 질문은 다른 문제로 나가기 전 마르크스가 이윤율이 하락하는 원인에 대한 자신의 해명에 만족했느냐는 것이다. 증거들엔 의심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다. 미하엘 하인리히(그는 최근 하비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에 대한 대답에서 나와 공저자는 "1865년부터 1877년 사이 마르크스의 편지들에서 그가 자신의 이론적 결론에 만족했으며 그가 출간한 첫째 권 뿐 아니라 출간하지 못한 채 남겨뒀던 다른 권들을 포함한 자본론을 이론적인 면에서 최종적인 결과물로 간주했다는 많은 증거"(클라이먼ㆍ프리먼ㆍ포츠ㆍ구세프ㆍ코니 2013)를 보여줬다. 하인리히는 이 증거에 답하지 않았고 하비는 이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피했다.

LTFRP가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는 마르크스의 관점은 초기에만 한 번 언급된 것도 아니고 이후 '무시'되지도 않았다. 그는 이를 1857~58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뿐 아니라 1861~63년 원고에서도 단언했다.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인 이 법칙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따라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MECW Vol.33, 104쪽. 강조는 원문) 후에 마르크스는 3권을 쓸 때 LTFRP가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는 주장을 넘어선다. 그는 애덤 스미스 이후 모든 정치경제학은 이 법칙을 찾기 위해 움직여 왔을 만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법칙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하여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애덤 스미스 이래의 정치경제학 전체는 이 수수께끼의 해결을 둘러싸고 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자본론 3권, 255~256쪽)

신화적인 일원인론

또한 LTFRP 및 그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위기이론은 일원인론이라는 그의 비난은 마르크스의 글에 대한 그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한다. 마르크스의 법칙은 약간은 '엄격한' 가정에 기초한 '고도로 단순화된 모델'에서 유래했다고 하비는 주장한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모든 가정이 꼭 들어맞을 때만 법칙은 유효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 때문에 법칙은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 외에 수익성 하락의 모든 잠재적 원인들과 기술변화의 상쇄 효과로 인해 이윤율 하락을 저지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배제한다. 따라서 법칙은, 그리고 외부적 요인을 취사선택해 결합시키는 것 없이 그것을 채용한 어떤 위기 이론도 일원인론인 것이다.

물론 하비는 그 엄격한 가정을 마르크스의 글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그의 가정을 꼼꼼하게 펼쳐내면서도 (3권의) 이윤율 하락 이론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마르크스가 펼친 그 엄격한 가정을 어떻게 아는가?

그는 최소한 한 번은 명백히 틀렸다. 하비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법칙은 모든 상품("노동력은 제외하고")이 구매되고 그 실제 가치, 이 가치와는 다른 가격이 아닌 가치 그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한다.
[2] 바로 이 경우가 틀렸다. 3권 3편의 주제가 그 법칙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2편에서 이미 상품의 가치와 그것이 실제로 팔릴 때의 가격 사이에 큰 차이가 있겠지만 경제에서 산출물의 총 가격은 전체적으로 이 산출물의 총 가치와 같다(그리고 그에 따라 그 한계가 된다)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따라서 하나의 기업 또는 산업이 생산물의 가치를 넘어선 가격을 받을 때 이 이득은 순전히 다른 자본가들의 손실을 상쇄하는 대가가 된다. [손실을 입은] 이들의 생산물 가격은 그 가치보다 적다. 그리고 이로부터 첫째 총 이윤은 만들어진 총 잉여가치와 같다(그리고 그 한계가 된다)는 것, 둘째 가격과 가치 사이의 차이는 LTFRP와 관련해 경제 전반의 이윤율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이 이어진다.[3]

모든 상품이 그 가치대로 팔린다는 가정이 아니라 앞선 것과 같은 결론이 마르크스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이끌어낸 기초적 조건이다(MECW Vol.33, 104쪽. 강조는 원문).

우리는 개별 자본의 이윤율이 투하자본 총량 대비 잉여가치의 비율과 다름을 살펴봤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의 총 자본을 고려하면 평균적 이윤율은 이 총 자본에 계산되고 관련된 총 잉여가치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도 … 보여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로부터 다시 한 번 다수 자본의 경쟁을 고려하지 않고도 자본이 [충분히] 발달된 것인 한 그 일반적 특성에서 직접적으로 일반적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견고한 기초를 갖게 된다.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인 이 법칙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전개되면서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대개 하비는 마르크스의 법칙을 가능한 제한적인 해석에 따른 여러 한정적 추정들에 기댄 모델로 치부한다. 그는 3권 3편 전체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법칙의 현상으로서 소위 "법칙 그 자체(das Gesetz als solches)"라고 부른 것을 다룬 부분들만 고려한다. 이는 그 법칙을 일원인론적이고 마르크스가 3편 뒷부분에서 논한 다른 현상ㆍ제도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법칙은 (내가 앞에서 논했 듯) 여러 상쇄 요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금융제도의 매개를 통해 작동하는 게 아니라 실제 세상의 그처럼 많은 요인들을 배제하고 무시한 상상속 조건에서만 오직 소환될 수 있는 딴 세상의 관념처럼 보인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그처럼 많은 "여러 제한적 (법칙의) 적용 가능성"을 "배제"했다고 말한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다른 현상과 제도들을 잇따라 분석에 도입했음을 알고 있지만, "법칙 그 자체"를 저지선 바깥으로 쳐냄으로써 그는 이런 사실을 LTFRP의 다원론적 성격의 증거로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
[그에겐] 추가적인 현상과 제도들의 도입은, 법칙이 자신을 드러내는 구체적 형태들 속에서 그 법칙을 묘사하는, 법칙의 변증법적 풍부화로 나타나기보다는, 법칙이 작동할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시인으로 나타난다. 법칙은 온전히 남지 못한 것으로 비친다. [이제] 마르크스는 전과는 별개의 논의에, 즉 “법칙을 도출해낸 가정들이 제거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와 관련된 논의에 천착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는 법칙의 지위에 의문을 나타내며 그의 "동요와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에겐 전혀 다른 틀을 갖는 위기 이론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 어떤 내적 연관도 갖지 않는, 서로 너무 달라서 "어떤 일원인론으로 쑤셔넣는 것"이 불가능한 다수의 잠재적 설명 요인과 현상으로 가득찬 체계화되지 않은 하나의 공간이다.

그 글을 이런식으로 읽어선 안된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런 부당한 독서는 적절한 해석 방법이 아니다.

일원인론이라는 딱지붙이기가 왜 잘못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정교한 방법론적 논의를 펼칠 필요는 없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보편적 중력법칙을, 바람과 같이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 또는 공기 저항 같은 상쇄 요인을 언급하지 않은 채 내가 제안한다고 해서 이 다른 요인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그것들을을 배제한, 그 대신 적용 가능성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제한적인 일원인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중력법칙으로부터 뉴튼의 운동에 관한 제2법칙을 이끌어내 설명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방정식에서 다른 요인들의 삽입을 삼간다고 해도 그런
[일원인론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다음 내가 공기 저항과 바람[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내가 내 양면성과 동요를 드러낸 것도 또는 보편적인 중력법칙이 오직 진공에서만 작용하고 실제 현실에선 작용하지 않는다고 시인한것도 아니다.[4]

마르크스의 법칙이 자본주의 동학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지적한 점에서 하비는 옳다. 다시 말해 그것은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윤율 궤적의 모든 일시적 변화를 해명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는 그 법칙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단지'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이, 그의 자본축적 이론과 결합하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당시 경제학자들을 괴롭히던]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비는 글의 대부분에서 오늘날 그가 비판하는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매우 모호하다. 예를 들어 그는 LTFRP에 뿌리를 둔 위기 이론은 그 현대적인 지지자들 사이에서 "다른 가능성의 고려를 배제하는 식으로" "전형적으로 제시되"며, "많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원인이 하나인 위기 이론"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고 단언한다. 이름을 언급하는 걸 삼갔다는 것 때문에 그의 비난에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부분에서 그는 법칙의 "어떤 지지자들"이 "금융화는 2007~8년의 붕괴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고 했을 뿐 아니라 "앤드루 클라이먼이 가장 단호하게 위기와 금융화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단호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내 선배들에 대해 존중을 표하기는 했어도 스스로 그것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아니] 나는 정반대로 주장했다. "물론 금융위기가 불황을 촉발했고, 금융 부문의 특유한 현상들(과도한 레버리지, 위험한 모기지 대출 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클라이먼 2012, 24~25쪽)

내가 인용한 이 문장은 대침체의 근본적 원인으로 내 책의 첫 장에 나오는 것이다.
[5] 그 다음 장에선 "이윤율 저하를 최근의 경제위기와 침체에 연결하는 두 가지 중간매개 고리-낮은 수익성과 신용제도-에 집중한다".(클라이먼 2012, 40~41쪽) 그리고 3장은 2007~8년의 금융위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의에 할애했다. ▲1990년대 닷컴 버블이 터진 이후 연방준비제도의 지나친 금융완화 정책 ▲모기지 대출의 자산 유동화 ▲서브프라임 대출 ▲주택 순자산 신용한도 대출 ▲증가하는 모기지론 주택담보대출비율 ▲대출자 레버리지 비율의 상승과 자금 수요의 감소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증가하는 가계대출 ▲닷컴과 주택가격 거품 부상의 심리학 ▲신용평가기관들의 비참할정도로 부정확한 전망 모델 ▲의회의 [금융위기] 초기 TARP(Troubled Assets Relief Programㆍ부실 자산 구제 프로그램) 거부 ▲미국으로 향한 해외로부터의 저축 유입. 이것이 금융화가 2007~8년 금융위기의 원인임을 부정[6]하는 혹은 일원인론적으로 접근하는 최선의 사례라면 나는 그의 다른 사례들을 [굳이]] 더 살펴보진 않을 것이다.

앤드루 클라이먼은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마르크스 '자본론'의 복권: 모순이라는 신화에 대한 반박 Reclaiming Marx's 'Capital': A Refutation of the Myth of Inconsistency'(Lexington Books 2007)의 저자다. 페이스 대학(뉴욕)의 경제학 명예교수이며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이니셔티브(the Marxist-Humanist Initiative)' 함께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2012. History versus Theory: A Commentary on Marx's Method in Capital, Historical Materialism 20:2, 3-38.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Howard, M. C. and J. E. King. 1992. A History of Marxian Economics: Volume II, 1929-1990. Princeton, NJ: Princeton Univ. Press.
Kliman, Andrew. 2007. Reclaiming Marx's 'Capital': A Refutation of the Myth of Inconsistency. Lanham, MD: Lexington Books.
_______.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Kliman, Andrew, Alan Freeman, Nick Potts, Alexey Gusev, and Brendan Cooney. 2013. The Unmaking of Marx's Capital: Heinrichs Attempt to Eliminate Marxs Crisis Theory’.
Kliman, Andrew and Shannon D. Williams. 2014. Why 'Financialisation' Hasn't Depressed US Productive Investment,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Print version forthcoming.
Marx, Karl. 1990.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Ⅰ.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4)
_______. 1991a.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Ⅲ.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8)
_______. 1991b.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33.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주석
[1] 법칙의 함수에 대한 논의와, 이와 관련한 '법칙'의 의미에 대해서는 클라이먼ㆍ프리먼ㆍ포츠ㆍ구세프ㆍ코니(2013)을 보라.
[2] 그는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상품은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자본론 1권과 2권 곳곳에서 중시한 가정이 3권에서도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의 그 가정은 노동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노동력 역시 그것의 모든 가치대로 구매된다는 가정에 따라 마르크스는 시장이 아니라 생산에서 이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상품교환이야 말로 "자유ㆍ평등ㆍ소유ㆍ벤담이 지배하는 … 천부인권의 참다운 낙원"(자본론 1권, 230쪽)이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채 설명할 수 있었다.
[3] 마르크스가 이런 결과를 이끌어낸 과정의 내적 모순이 입증됐다는 주장을 들은 바 있는 데 이는 단지 악의에 찬 신화일 뿐이다. 클라이먼(2007) 8장을 보라
[4] 이는 마르크스가 하나하나 엄격하게 절차를 밟아나가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력 법칙은 LTFRP와 비슷하다. 운동 제2법칙은 노동시간에 따른 가치 결정 법칙(가치법칙)과 유사하다.
[5] 하비는 그의 논문 어떤 곳에서 내 책을 끌어들이지만 내가 주장했다고 그가 말하는 어떤 증거 또는 인용도 제시하지 않는다.
[6] 샤넌 윌리엄스와 나는 금융화가 대침체가 진행된 10년간 미국에서 기업의 자본축적률 하락의 원인이 아님을 보여줬다.(클라이먼ㆍ윌리엄스 2014) 당연히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Posted by 때때로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상연 옮김|에이도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도시다.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은 거대한 도시공간으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집중시킨다. 대규모로 형성된 노동인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투쟁의 저수지다. 사실 마오와 체게바라의 농민 게릴라 운동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실천이다.

도시는 생산 뿐 아니라 재생산 공간으로서 노동계급의 일상 전체를 조직한다. 가난의 비참은 열악한 도시환경에서 더 비극적이 된다. 오웰이 경험한 밑바닥 생활이 그랬다. 그리고 엥겔스 자신이 오랫동안 천착했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도시의 하층 노동계급 문제는 좌파에게 꽤 오랫동안 핵심적 과제였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노동운동과의 연대가 후퇴하던 자리에 빈민과의 연대를 배치했다. 철거촌에 세워진 골리앗(사실은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비계로 만들어진 앙상한 구조물)에서 학생과 빈민은 건설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조직 폭력배와 맞서 싸웠다. 꼭 90년대만은 아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태는 전쟁 후 성장을 거듭하던 서울이라는 대도시 이면에 빈곤이 축적되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조세희가 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1970년대 한국사회 하층 노동계급의 삶과 분노ㆍ좌절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비가 도시에서의 비정형적 반란에 주목하며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축적이 일어나고 조직되는 공간으로서 도시 자체에 돋보기를 들이밀은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비참과 반란을 자본의 축적과정과 반란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은 다른 좌파에게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곤 하는 '약탈에 의한 축적'은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다. 물론 이 '약탈'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정의를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약탈을 착취와 함께 자본의 두 무기로 고려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약탈'이라는 개념이 참으로 모호하게 정의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약탈'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문제들을 '다양성' 그 자체로 남게 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을 고려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약탈'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비역사적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 부분을 보라.

"도시 전역에 걸친 투쟁이 상징적이고 혁명적 지위를 얻은 1871년 파리 코뮌의 경우는 훨씬 더 복잡한 혁명운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봉기'라고 주장한다(마르크스가 처음에 이렇게 주장했고, 레닌이 한층 더 강조했다). 하지만 파리 코뮌에서는 일터에서 계급적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해방에 대한 욕망만큼이나 도시 자체를 부르주아지의 영유에서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파리 코뮌 당시 처음 발표된 두 가지 포고령이었다. 하나는 빵 공장의 야간노동 철폐이고(노동문제), 또 하나는 임대료 지불정지 명령(도시문제)이었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09쪽

1871년 파리에서의 반란과 혁명을 '노동문제'와 '도시문제'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애초 노동조합 쟁점에만 적용되는, 즉 작업장, 특히 대규모 공장 내에서만 적용되는 쟁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비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노동조합 쟁점으로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코뮌을 돌아보자. 파리코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제정 붕괴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봉기 이전 몇 년 간의 노동계급 투쟁의 상승을 고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정면으로 맞부딛친 첫 경험인 1848년 6월 봉기에서 노동자는 패배했지만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노동계급 투쟁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1860년대 들어서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1862년 나폴레옹 3세의 배려로 런던 만국박람회에 다녀온 노동자 대표단은 귀국 후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1864년 파리 인쇄공 파업은 1789년 대혁명 때 제정돼 노동계급의 단결을 금지해 온 르 샤플리에 법을 사실상 무력화 했다. 1864년 9월에는 인터내셔널이 만들어졌고 1865년 프랑스 지부가 파리에 건설됐다. 프루동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프랑스 인터내셔널 지부들은 1867년 주물공 파업 이후 더 급진화됐다. 파리코뮌 1년 전 1870년에도 노동계급 투쟁의 물결은 계속 고조됐다. 그해 4월 인터내셔널 조합원은 24만명을 넘어섰다. 즉 파리코뮌은 보불전쟁으로 인한 제정의 붕괴와 함께 노동계급 투쟁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모태가 1870년 9월 국방 임시정부 수립 후 인터내셔널이 주도해 건설된 파리 20구 감시위원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명백한 사실이다.

노동계급 투쟁의 이러한 동학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본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에서 비롯한 다양한 갈등은 수시로 불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투쟁이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의 수준에 다다르기까지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이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계급이라서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그 이전 몇년 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4년 2월 보스니아 반란은 투즐라의 다섯 개 기업 민영화에 반기를 든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됐다. 때론 노동계급 외부에서 시작된 사회적 운동이 노동계급을 자극해 투쟁을 더 결정적 국면으로 성장시키기도 한다.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 대표적 사례다 2011년 뉴욕 오큐파이 운동도 이후 시카고 교사 총파업과 월마트 등의 노동자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하비는 반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 도시에서의 지역적 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GM의 플린트 공장 점거 파업, 1984년 영국 탄광 파업 등을 예로 들지만 이는 오히려 정 반대의 사례다. 단호한 노동계급 투쟁이 지역적 차원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직 '공장' 노동자 만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물론 마르크스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여러 좌파가 '공장' 노동자 만을 특권화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파리코뮌 당시 파리 기업들은 오늘날 대규모 공장과 달랐다. 평균 다섯 명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이었을 뿐이다. '아르티클 드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공예품을 만드는 영세 작업장이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이 봉기를 '플로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으로 주장했다. 하비 스스로 예를 들었듯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80년대 후반 공장 외부의 쟁점인 '인두세 반대 투쟁'에 전력을 다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혁명이 오직 공장 안에서의 변혁을 뜻하는 것만도 아니다. 레닌은 사회주의 정치가 공장 외부에서 도입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노동조합 서기가 아닌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 혁명, 1970~1973년 칠레전투에서 노동계급 투쟁은 지역 차원에서의 치안ㆍ행정ㆍ사법ㆍ생필품 보급을 책임지는 데까지 발전했다. 반란과 봉기는 그랬을 때만이 '혁명'의 수준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비가 '도시권'을 강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 도시 노동계급에게 주거는 핵심적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이 문제를 핵심 고리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곤 한다. 1980년대 영국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핵심 고리 중 하나는 공공주택의 개인 소유로의 전환이었다. 하비가 강조하듯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노동계급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교외 주거단지의 개발을 추진했다. 한국에서 대표적 사례는 울산일 것이다. 대규모 아파트 건설, 백화점 등 근린 생활시설의 보급, 이를 통한 부르주아적 문화 헤게모니의 확립은 노동조합을 기업, 또는 지역적 한계로 가둬두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대량 소비는 노동계급을 부채의 허울에 가둬 기업의 테두리 안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매달 갚아야 하는 카드값과 전세 혹은 주택자금 대출 이자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대다수 좌파는 이러한 문제에 기권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1980년 4월 사북 탄좌 노동자들의 반란에 대한 좌파의 상대적 무관심은 이러한 문제점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이 사건은 인용될 때조차 5월 광주항쟁의 전조로만 매우 간단히 다뤄진다).

이러한 도시생활의 문제는 체제의 문제와 별개로 개인적 선택 또는 지역 활동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지곤 한다. 귀농귀촌, 마을 만들기, 사회적 기업 열풍등이 그런 것이다. 하비의 장점은 이러한 운동들과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권'의 문제를 반자본주의적 관점 안에 위치지우고자 노력한다. 소규모 대안 공동체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역적 차원의 거버넌스와 국가적ㆍ지구적 차원의 거버넌스에 적용되는 원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유재를 어떤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공유재를 결정하는 문제 자체가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도시문제를 둘러싼 문제는 노동계급 문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투쟁이 받아 안아야 할 문제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설명한 한계 때문에 그의 서술은 서로 다른 입장에 쉽게 인용될 수 있다. 한겨레 한승동의 서평 기사처럼 말이다. 하비는 서문 말미에 이렇게 쓴다.

"자본주의의 영속적 축적 시스템 자체는 물론 이와 밀접히 결부된 착취계급과 국가권력의 구조를 전복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목표로 가는 길에 있는 중간역과 같다. 설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여도 도시권에 대한 요구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2쪽

이 말은 하비 스스로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강신준 교수는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오늘 '자본'을 읽다' 9월 22일자 연재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강의를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환가치와 가치를 구별하는 데 애를 먹는 것을 자주 봅니다."(강신준 9월 22일)

지금까지 강 교수가 연재한 글 중 바로 위 문장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애를 먹는' 사람에는 강 교수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교환가치와 가치만이 아니죠.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 전체를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를 갖기로 하고 오늘은 자본론 1장에 집중해 강 교수의 연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자본론의 모든 인용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판으로 대체했습니다. 강신준 교수로부터의 인용은 모두 연보라색 굵은 글자로 표시했습니다.


1. 상품의 이중성 … 사용가치ㆍ가치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1권 77쪽)

마르크스는 상품의 이중적 측면을 위와 같은 말로 정의합니다. 1장 1절의 제목도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입니다.

설명은 사용가치부터 시작합니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합니다. 여기서 유용성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연적 필연성에 한정하면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으로서 상품은 최소한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용가치로서 상품은 그것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질적ㆍ양적으로 구별됩니다.

상품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됩니다. 일정한 비율로 말이죠. 여기서 상품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 또는 관계가 교환가치입니다. 상품이 교환가치라는 것은 서로 다른 상품들 속에 공통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로 다른 상품이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품의 자연적 속성은 공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상품의 유용성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용가치와 연관된 것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교환에 있어서 사용가치는 서로 다른 것이기만 하다면 문제가 안됩니다. 결국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거기에 남는 유일한 것은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 뿐입니다.

"이들 노동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생산물들은 유령 같은 형상[즉, 동질적인 인간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형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노동생산물들은 인간노동력이 그 지출형태와는 관계없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노동이 그들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로서 가치, 상품가치이다."(1권 47쪽)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품은 우선 유용한 물건으로서 사용가치입니다. 이 상품은 서로 일정한 비율로 교환됩니다. 즉 교환가치입니다. 이 교환가치는 상품이 공통된 무엇인가를 지니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 못합니다. 그 공통된 것은 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이고, 이것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 강의'에서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이를 도식화 합니다.


하비 53쪽

강신준 교수는 이와 달리 교환가치를 사용가치의 '발전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의 설명과 완전히 다른 것이죠. 상품이 교환가치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용가치여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유용하지 않은 물건(또는 서비스)을 교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용가치가 발전해 교환가치가 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교환을 위해서도 상품의 사용가치적 측면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가 '두 요소'라는 제목으로 상품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한 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죠. 이 설명이 불분명하다면 아래의 데이비드 하비의 설명을 읽어보시죠. 재밌게도 이 책은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것입니다.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여기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면 사용가치가……? 그러나 맑스의 분석은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그것도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바꿔 말해 우리는 다른 개념을 말하지 않고는 이들 개념 가운데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이 개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 있고 어떤 하나의 전체(totality) 속에 내재하는 관계들인 것이다."(하비, 55쪽; 오역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하비는 강 교수와 같은 설명을 '인과론'적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마르크스가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를 설명하는 자본론 1권 1장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인과론'적인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변증법에 대해선 차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래의 그림을 앞의 하비의 도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강신준 9월 15일

따라서 강 교수의 아래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교환가치를 비교해주는 양적 단위는 바로 가치이고 그것은 인간의 노동입니다"(강신준9월 15일)

가치가 강 교수의 설명처럼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그것의 질적 측면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강 교수의 생각은 사실 주류 경제학에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죠. 애시당초 그것이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환되는 비율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강 교수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교환가치'를 매우 강조하죠. 주류 경제학에서 이러한 상품들 사이의 교환비율(교환가치)의 강조는 그들의 선배,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세웠던 노동가치론을 버리고 한계효용 혁명으로 나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강 교수가 어딘가 인터뷰에서 칭찬했던 책인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폴 스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양적 가치이론은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상대적인 비율을 규율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과만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주류의 이론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주류의 이론에서는 그것이 교환가치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에게 교환가치란 가치를 배후에 숨기고 있는 '현상적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단지 교환가치의 결정에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양적 가치의 문제란 무엇인가? 위에서 서술한 분석이 한 가지 답변을 해준다. 상품이 가치라는 사실은 상품은 물질화된 추상적 노동이라는 의미이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품은 사회의 총 부창출활동 가운데 일부를 흡수한다는 의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노동은 시간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교환가치와 구분되는 양적 범주로서의 가치가 어떤 의미인지가 분명해진다."(스위지 58쪽)


2. 노동의 이중성 …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

상품의 이중성은 노동의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사용가치로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유용노동이 필요합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목재를 만들고, 목재를 재단하고, 재단된 목재를 짜맞춰야 하는 것 같은 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이 꼭 육체노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가치로서 상품을 만드는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 과정이 사장된 말 그대로의 인간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루카치의 "자본주의의 본질을 반영하는 추상"이라는 주장을 인용한 폴 스위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의 그 어떤 사회형태에서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이동성보다 훨씬 더 높은 이동성을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며 마르크스의 추상노동 개념의 현실성을 설명합니다
(스위지 55쪽).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방향이 변함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부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의 형태로 또는 직포의 형태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노동형태의 이와 같은 변화가 마찰 없이 일어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1권 55쪽)

기업이 창의적 노동에 대한 무수한 찬양을 늘어놓으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노동과정의 표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이러한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죠. 추상적 인간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과 구분되는 현실성을 지니며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노동의 이중성을 구성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이 중 어느 하나의 측면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용가치를 만든 노동은 시장의 교환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으로 바뀝니다. … 배추라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에는 항상 농민의 힘든 노동이 들어갑니다. … 내가 생산한 배추의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다른 농민들이 생산한 배추와 비교되는 것은 물론 배추를 구매할 소비자의 사정도 고려되어야만 비로소 결정됩니다. 요컨대 나 혼자만의 사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우리가 마르크스를 잊은 채 읽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강 교수가 좋아하는 '개미와 베짱이' 비유로 들어가면서 완전한 파탄을 드러냅니다.

"개미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일 뿐,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은 아닌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굳이 이중성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동시에 갖는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개미(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구체적 유용노동일 뿐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추상적 인간노동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노동자가 교환가치, 정확하게는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베짱이)는 어떻게 잉여가치를 획득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여기에선 강 교수의 연재가 기대되기도 하네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아래의 마르크스 설명과 비교하면 강 교수의 설명이 얼마나 마르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권 58쪽)


3.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강신준 교수는 이 부분에서 자본론 1권 1장 3절 부분을 거의 통째로 건너뜁니다. 물론 여전한 헛소리로 분량을 채우고 있긴 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가치형태를 설명하는 것은 화폐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이어지는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기원'절과 함께 일반적 가치형태, 즉 화폐형태가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은폐하는 지 그 기원을 폭로해줍니다. 가치의 현상형태인 교환가치가 취하는 여러 형태를 사려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면의 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 절의 핵심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바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규제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화폐형태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또한 화폐형태의 등장은 가치가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킬 중심원리로서 응결되기 시작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항상 기억해두어야 할 점이기도 하지만 가치는 물적 존재가 아니면서도 객관적 대상이다."(하비 76쪽)

강 교수는 여기서 뜬금없이 화폐가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발전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강신준 9월 29일)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건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르크스나 그의 해설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인 것이죠. 하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 화폐형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고 대신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런식의 왜곡은 프루동과 크메르 루즈를 언급하며 화폐형태를 "역사의 필연적인 자연법칙"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프루동과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면 강신준 교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우선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프루동은 처음에 정의ㆍ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1권 109쪽 각주2)

프루동에 대한 비판만 놓고 보면 강 교수의 주장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정의로부터 비롯한 이상을 따르는 운동은 참혹한 결말을 맞곤 했죠. 하지만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약간 다르게 들립니다. "상품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며 노동화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힌 마르크스는 오웬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이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같다는 점"이라며 그 이유로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고 밝힙니다(1권 121쪽 각주1).

마르크스는 상품생산을 전제로 한, 즉 자본주의의 핵심적 원리를 그대로 둔채 그 현상형태인 화폐형태만 고치자는 주장에는 가차없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근본적인 변혁을 전제로 한 주장에는 호의적인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보면 강 교수의 입장이 마르크스와 같다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강 교수는 프루동에서 더 나가 화폐형태 자체가 "필연적인 자연법칙"이라며 자본주의의 성숙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고 있죠. 이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 몽상일 뿐이며 이러한 몽상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법칙을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주장으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4. 결론을 대신하며 … 중요하지만 빼먹은 것들

아직 연재가 계속되고 있으니 강신준 교수에 대한 비판의 결론을 여기서 내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본론 1권 1장을 마치고 7회차까지 연재를 보면 강 교수의 자본론 해설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강 교수의 오해는 계속해서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른 분량 중 가장 거슬렸던 것은 15일자 연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얘기처럼 내 이익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현실 자본가들의 노력은 경쟁을 빚고 경쟁의 결과가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거든요.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치가 빚어내는 변증법의 요술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가치량을 결정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1권 49쪽)이 이런식으로 왜곡되는 걸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간단히만 지적하자면 우선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경쟁의 강제법칙으로부터 연역해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마르크스가 1권에서 '경쟁'을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 즉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강 교수의 '사회적 평균'은 마치 보다 평등한 사회의 형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전체에 걸쳐서 자본가의 잉여가치 획득과 더 가난해지는 노동자의 현실이 자본주의적 법칙의 현실적 결과임을 설명하는 것과 반대되는 주장이죠. 또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형성하는 '경쟁' 운운하는 데, 마르크스는 경쟁의 강제법칙을 자본가가 개인이 아닌 자본의 인격화한 범주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핵심 원리로 설명합니다. 즉 '자본가들의 노력'이 '경쟁을 빚'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법칙이 자본가의 자본으로서의 노력을 강제하는 것이고 이는 노동자들에게 더 비참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강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결과조차도 자신의 희망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9월 22일자 연재에서 "모든 사용가치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집니다"는 단언도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동은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사용가치[즉,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1권 54쪽)

이 설명은 이후 자연과의 신진대사라는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죠. 강 교수의 단언은 마르크스가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후예들이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이론과 실천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번 주에도 어김 없이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연재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힘 닿는대로 비판적 검토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는 강 교수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만들어나가기 위함입니다. 격동을 앞둔 지금 마르크스의 유산을 제대로 살피는 일은 더 중요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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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때때로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 데이비드 하비 / 최병두
1979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혁명은 민주적 수단을 통해 이뤄져야만 했다. 이처럼 중대한 이행이 가능하려면, 선거에서 이길 정도로 충분히 큰 범위에 걸친 정치적 동의가 사전에 구축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공동으로 보유되는 지각'으로 정의되는) '상식'이라고 한 것이 전형적으로 동의의 기반을 이룬다. - 59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1970년대 초반 칠레ㆍ아르헨티나와 같이 폭력에 의한 강제로 이뤄진 것만은 아닙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모두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결정적 계기가 됐죠. 이러한 '민주주의'적 전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거대한 규모의 정치적 동의가 구축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람시가 상식이라고 한 것이 바로 동의의 기반입니다.

 

상식은 지역과 국가에 기반한 문화적 전통에 깊숙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즉 상식은 편견과 모호함, 이주민ㆍ공산주의자ㆍ동성애자와 같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포괄합니다.

 

미국에서는 '자유'라는 단어가 대중의 상식적 이해에 크게 공명했죠. 이라크 전쟁의 이유로 제시된 많은 것들이 증명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은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전쟁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동의를 구축하기 위한 첫 걸음은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지닌 여러 제도(물질적 기반)의 구축이었습니다. 기업의 후원을 받는 싱크탱크와 전문가들의 모임, 대학 교육과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이후 정당과 국가권력을 장악하죠.

 

운동의 핵심 가치는 개인적 자유의 확대로 천명됐습니다. 1960년대의 정치적 격변은 개인적 자유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강화했습니다. 이 운동들은 사회정의도 요구했었지만 쉽게 개인적 자유의 차원으로 환원되곤 했죠.

 

개인적 자유를 근본적으로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수사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자유지상주의, 정체성의 정치, 다문화주의, 그리고 자기중심적 소비자주의로 분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로, 미국의 좌파 내에서 개인의 자유와 특정한 정체성의 완전한 인정 및 표현을 위한 정치적 활동가들의 희망을 꺾지 않으면서, 사회적 정의를 달성하려는 정치적 행동에 필요한 집단 규율을 세우는 것은 극히 어렵다는 점이 오랫동안 입증되어왔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구분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쉽게 악용하거나 조장할 수 있었다. - 62

68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적은 강력한 국가였죠. 신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개인적 자유'의 이상을 자신들이 장악한 체, 68운동의 참가자들이 강력한 국가에 대한 적의와 함께 지니고 있었던 자본주의적 기업과 경영에 대한 적대감을 돌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닉슨에 의해 대법관으로 승진하게 되어 있었던 파월은 1971년 전국상업회의소에 편지를 보내죠. 그는 그 편지에서 자유기업 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분쇄하기 위해 미국 기업들이 '지혜ㆍ재능ㆍ자원을 배치'해 대학ㆍ학교ㆍ대중매체ㆍ출판ㆍ법정에 대한 공격을 주도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파월의 호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972년 '기업을 위해 공격적으로 정치권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CEO들의 경영원탁회의가 만들어집니다. 이 회의는 1970년대 연간 9억 달러를 정치적 문제에 지출했죠. 기업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헤리티지재단, 후버연구소, 미국경영연구센터와 같은 싱크탱크와 전국경제연구소가 공격적 활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반기업 정서의 파괴를 위한 보다 주도면밀한 계획이 필요했습니다.

 

파월은 국가권력의 확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영은 국가를 '주도면밀하게 육성해야' 했고, 필요하다면 이를 '공격적이고 단호하게' 이용해야 했다. - 65

1970년대 뉴욕시 재정위기가 이러한 노선을 실험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은행들은 채무상환연장 조치를 거부해 도시를 파산으로 몰고 갔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공적 서비스 분야 노동자의 임금이 동결됐고, 수익자 부담 원칙이 도입돼 요금이 부과됐습니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억제됐고, 노동조합의 연기금은 채권에 투자할 것이 강요됐습니다.

 

뉴욕에서의 일상생활은 "녹초가 되었고, 도시의 분위기는 비참해졌다.". 도시 정부, 지역 노동운동, 그리고 뉴욕의 노동계급은 "지난 30년 동안 쌓아올렸던 권력의 많은 부분"을 결국 박탈당했다. 탈도덕화된 뉴욕의 노동계급은 마지못해 새로운 현실을 인정했다. ……

기업복지가 사람 복지를 대체했다. 도시의 엘리트 기관들은 ('I♡NY'라는 유명한 로고를 고안하면서) 문화센터이며 관광지로서 뉴욕의 이미지를 팔기 위해 동원되었다. 지배 엘리트는 종종 까다롭게 다양한 범세계적 경향들의 모든 방식들이 도입될 수 있도록 문화적 장의 개방을 지원했다. 자아, 성, 정체성으로의 자기중심적 천착이 부르주아적 도시문화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도시의 강력한 문화기관들에 의해 촉진된 예술적 자유와 방종은 결과적으로 문화의 신자유주의화를 유도했다. 쿨하스의 기억할 만한 문구인 '광란의 뉴욕(Delirious New York)'은 민주적 뉴욕에 관한 집단 기억을 지워버렸다.

- 68

재정 위기에 의한 뉴욕의 변화는 이후 IMF에 의해 국제적인 모델로 만들어집니다. "금융기관들의 위원회 및 채권소유자들의 수익과 시민들의 복지가 대립하는 경우 전자에 특혜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죠.

 

뉴욕 사례의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확산을 위해 "경영은 계급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경영자들은 공화당을 장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1970년대의 정치자금법 개혁은 이들의 수고를 덜어줬습니다. 기업이 정당에 기부할 '권리'가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보장됐습니다. 기업들이 만든 정치행동위원회(PACs)는 "업계, 재계, 전문가 협회의 이해관계에 의한 양대 정당의 금전적 지배를 확보"했습니다. "PACs 기부에 있어 개별로 5000달러까지 허용하는 상한은 상이한 기업들과 산업들의 PACs가 함께 활동하도록 강제했으며, 이는 특정한 이해관계라기보다는 계급적 이해관계에 기초를 둔 연합의 구축을 의미"했습니다.

 

공화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는 하나가 더 필요했습니다.기독교 우파와의 연합이 그것입니다. 1978년 파웰의 '도덕적 다수'의 창립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공화당은 "종교 및 문화적 국민주의"를 긍정하게 됐고,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암묵적인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그리고 반페미니즘"으로 대중을 동원하게 됐습니다. 탄탄한 재정적 후원을 받고 있는 신보수주의적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의 과잉된 개입주의(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론자, 환경운동가 등)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도덕적ㆍ문화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결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대처의 정부를 신자유주의 혹은 신보수주의라고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애초 신자유주의의 주창자들은 과격할 만큼 개인적 자유를 강조했고, 도덕ㆍ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죠. 즉 이러한 결합은 애초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경제적 신자유주의를 추진했던 자들에게 '개인적 자유의 확보'는 명분이었을 뿐 지고의 가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당은 기업적ㆍ금융적 이해관계와의 화해와 동시에 대중을 위한 생활조건의 개선이라는 모순된 목표를 지녀야만 했습니다. 1980년대 내내 민주당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화당은 거대한 금융 자원을 동원하고 물질적 이해관계에 반해 문화적ㆍ종교적 토대에 따라 투표하도록 대중적 기반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민주당은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지 기반인 대중들의 물질적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공화당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좀 더 확고해졌다. - 73

레이건 당선 후 정부의 모든 기구와 법률, 제도 등은 신자유주의적 이행을 위해 조정되고 개혁됐습니다. 전국노동관계위원회는 노동의 권리를 공격하고 규제하는 기관으로 전환했습니다. 관리예산청은 모든 규제에 대해 비용편익분석을 하도록 지시받았습니다. 개인의 상위 조세율이 78%에서 28%로 낮아졌습니다. 세금 계산의 교묘한 개정은 많은 기업들에게 실질적으로 면세 혜택을 줬습니다. 공적 부문의 많은 자산이 사적 부문으로 이전됐습니다.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처럼 전국에서도 노동자와 노동조직의 순응이 필요했습니다. 기업들은 이전(노조가 없는 남부 주로, 혹은 멕시코와 동남아시아와 같은 해외로)을 무기로 노동조합의 권리를 공격했습니다.

 

채찍과 함께 '당근'도 필요했습니다.

 

유연성의 결여는 흔히 자본에 있어서만큼이나 개별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도 많은 결점이었다. 노동과정에서 유연적 전문화와 탄력적 시간 편성에 대해 고결한 체하는 주장은 개별 노동자들, 특히 강력한 노조화가 때로 제공한 독점적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설득했던 신자유주의적 수사의 일부가 되었다. 노동시장에서 더 큰 행동의 자유와 자율을 선사하겠다는 것은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덕목으로 여겨졌고, 이는 여기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의 '상식'에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통합시키는 데 기여했다. - 75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실업은 노동의 최저제한가격이 너무 높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따라서 실업의 해소를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복지"를 축소해야만 했습니다. '복지의 여왕'에 대한 그 많은 전설이 만들어진 건 이 시기죠.

 

'월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경영 신문(우리나라에선 경제지라고 하죠)'이 이러한 사고를 퍼뜨리는 데 가장 앞장섰습니다. 스탠퍼드와 하버드 같은 특권적 대학에는 기업의 지원을 받아 경영학부가 만들어져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만들어내고 확산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대학을 통해 해외의 인재들이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습득해 고국으로 돌아갔고 국제적인 신자유주의 확산에 큰 역할을 했죠.

 

영국에서는 탄탄한 노동조합과 지역의 노동당 정부가 복지국가를 지탱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지였던 런던의 금융중심지로서의 역할은 때론 산업자본과 충돌을 일으켰죠. 1970년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조합의 권력과 복지국가는 모두에게 비난의 대상이 됐습니다. 때론 성공적이었던 투쟁을 통해 노동조합은 임금을 인상했지만 강력한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는 못했습니다. 정부의 재정위기는 계속됐고 결국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복지 지출의 감축이 진행됐습니다. 이로부터 1978년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이 분출했고 이와 함께 노동조합에 대한 언론의 공격은 강화됐습니다. 결국 등 돌린 중간계급의 지지를 기반으로 대처가 집권하게 됐습니다.

 

노동에 대한 싸움,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에서 영국과 미국은 가장 큰 공통점을 드러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높은 이자율을 유지했고, 이는 곧 실업의 확산을 뜻했습니다. 실업의 증가는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약화시켰죠.

 

대처의 경제자문관이었던 버드(Alan Budd)는 후에 "경제와 공공지출을 압박함으로써 인플레이션에 대처했던 1980년대 정책은 노동자 타도를 위한 은폐물이었다"라고 주장했다. - 81

1984년 1년간 계속된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광부는 패했고 대처는 승리했습니다. 외국인 투자의 개방, 국유화된 영국 자동차 산업의 민영화로 노동자 계급의 힘은 더욱 약화됐습니다.

 

그녀는 인플레이션을 근절했고, 노조에 재갈을 물렸으며, 노동력을 순화시켰고, 진행 중인 정책에 대해 중간층의 동의를 구축했다. - 82

대처는 또하나의 전선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좌파가 장악하고 있는 지방 정부에 맞서야 했죠. 1980년대 중반까지 이들 지방 정부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격전지가 됐습니다.

 

대처의 광범위한 민영화 정책에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공공주택의 판매입니다. 세입자에게 공공주택을 판매함으로써 10년간 주택 소유자 수를 급속히 증가시켰죠. 이를 통해 민영화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공공주택의 판매는] 노동계급의 꿈으로서 전통적인 개인 재산 소유권 이상을 만족시켰으며, 주택 시장에 새롭고 때로는 투기적인 역동성을 도입했다. 이는 그들의 재산 가치 상승-최소한 1990년대 초 재산 붕괴 이전까지-을 경험했던 중간계급에 의해 높게 평가받았다. - 84

대처는 중간계급을 배양(주택 소유자의 확대)과 소비문화의 확대를 통해 노동계급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면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가속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신자유주의는 계급 권력을 미국에서 만큼 복원시킬 수는 없었지만 런던의 금융 지구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로 탈바꿈 했죠.

 

[레이건과 대처] 이들이 협력해 공고하게 만든 세력 간 연합과 이들이 유도했던 다수파들은 후임 정치지도자 세대들이 제거하기 어려운 유산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의 가장 큰 증거는 클린턴과 블레어가 그 자신의 정책을 구현할 여지가 매우 제한된 상황에서 심지어 그들 자신의 훌륭한 성향을 거스르면서까지 계급 권력의 회복 과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 86

미국에서 레이건은 기독교 보수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효과적으로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대처는 영국에서 중간계급의 배양을 통해 비슷한 시도를 해냈죠. 이들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 20년 가까이 그들의 정책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성공을 보여주는 바입니다.

 

'제3장 신자유주의적 국가'로 이어집니다.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 데이비드 하비 / 최병두

뉴욕에서의 일상생활은 "녹초가 되었고, 도시의 분위기는 비참해졌다.". 도시 정부, 지역 노동운동, 그리고 뉴욕의 노동계급은 "지난 30년 동안 쌓아올렸던 권력의 많은 부분"을 결국 박탈당했다. 탈도덕화된 뉴욕의 노동계급은 마지못해 새로운 현실을 인정했다. ……

기업복지가 사람 복지를 대체했다. 도시의 엘리트 기관들은 ('I♡NY'라는 유명한 로고를 고안하면서) 문화센터이며 관광지로서 뉴욕의 이미지를 팔기 위해 동원되었다. 지배 엘리트는 종종 까다롭게 다양한 범세계적 경향들의 모든 방식들이 도입될 수 있도록 문화적 장의 개방을 지원했다. 자아, 성, 정체성으로의 자기중심적 천착이 부르주아적 도시문화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도시의 강력한 문화기관들에 의해 촉진된 예술적 자유와 방종은 결과적으로 문화의 신자유주의화를 유도했다. 쿨하스의 기억할 만한 문구인 '광란의 뉴욕(Delirious New York)'은 민주적 뉴욕에 관한 집단 기억을 지워버렸다.

- 2장/ 68쪽

하비에 의하면 우리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TV와 인쇄물의 수많은 여행 기사를 통해 받아들인 뉴욕의 이미지는 '계급 전쟁'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점령하라> - 슬라보예 지젝 / 유영훈
D는 내가 그의 큰할아버지와 연락하여 '과격파 어르신'들이 뉴욕에서 '현장 실습'을 할 수 있게끔 좀 도와달라고 했다. …… D의 큰할아버지가 계신 양로원의 많은 노인분들이 열정적으로 점령 시위 참여를 원한다고 했다. 공원까지 올 밴과 운전사도 이미 구해놨단다. 이곳은 좌파의 고향 뉴욕이다. '과격파 어르신 시위'에 동참을 원하는 연로한 좌파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 분명하다. 나이든 분들도 점령을 원한다. 돕는 게 도리다. - 31 소문들, '애스트라 테일러/ 276쪽

최근 '점령하라'의 이 부분을 읽으며 하비가 70년대 뉴욕시의 재정 위기를 설명한 부분이 떠오른 것은 필연적일 것입니다. "마지못해 인정"인정했던 현실이 30여년 만에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편 같은 책 16장 '뉴욕 경찰과 월가 점령, 스타일의 충돌'이라는 장에서 브루클린대 사회학과 부교수인 앨릭스 비텔리는 70년대 뉴욕시의 재정 위기 이후 뉴욕 경찰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핍니다.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 데이비드 하비 / 최병두

데이비드 하비는 1장을 마무리하기 전에 폴라니의 견해를 인용하며 자유의 전망을 살핍니다.

 

그는 자유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두 종류가 있다고 서술한다. 후자의 사례로 "동료를 착취하는 자유, 공동체에 급부로 제공하는 서비스 없이 비정상적 이득을 취하는 자유, 기술적 고안들을 공공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자유, 사적 이익을 위해 은밀하게 획책된 공적 재난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유" 등을 열거했다. 그러나 폴라니는 계속해서 "이러한 자유들이 번창하는 시장경제는 우리가 높게 평가하는 자유도 만들어냈으며 이는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라고 서술했다. - 제1장/55~56

폴라니는 '나쁜 자유'를 만들어낸 시장이 또한 '착한 자유'도 만들어냈다고 말합니다. 자유 자체에 모순적 이상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죠. 폴라니는 자유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 때문에 착한 자유가 나쁜 자유를 책임지고 순화하는 것이 방해받고 위기에 처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사족 소유권에 대한 근본주의적 집착, 그 어떠한 규제도 자유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이상들이 착한 자유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과 강제가 없는 사회는 물론, 폭력이 가능하지 않는 세계도 있을 수 없"기에 "자유주의적 또는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주의는 권위주의 또는 심지어 명백한 파시즘에 의해 좌절될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하비가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서 인용하는 구절들은 신자유주의가 현실이 된 우리 세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교리를 따르는 이들이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이상에도 불구하고 왜 더 국가의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면모에 기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자유가 만연했던 30년은 좁은 의미의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회복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대중매체, 제약(製藥), 교통, 그리고 심지어 판매 영역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 권력을 엄청나게 집중시켰다. …… 폴라니가 말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소득, 여가, 그리고 안전이 더 이상 향상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 권리와 자유를 수여하며, 나머지 우리들에게는 소량의 자유만을 남겨뒀다. 그렇다면, '나머지 우리들'은 어째서 쉽게 이러한 상황을 따르고 있는가? - 제1장/58

이제 2장 '동의의 구축'으로 이어집니다.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 데이비드 하비 / 최병두
신자유주의화는 계급 권력의 회복과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인물에 대한 경제적 권력의 회복을 필연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 제1장/50

'계급 권력'이 '회복'됐다면, 그로부터 혜택을 받는 '계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급'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보통은 전통적인 계층(양반, 귀족)과 결탁해왔죠. 그런데 때로는 "신자유주의화가 상위 계급의 구성을 재편하는데 동반 되었"습니다. 하비에 의하면 영국에서 그랬습니다. 게다가 계급의 현실은 장소(나라)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죠.

 

그럼에도 하비는 신자유주의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일반적인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소유와 관리의 특권들-전통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을 CEO들(관리자들)에게 주식 선택권(즉, 소유권)을 제공함으로써 융합시키련는 것이다. - 제1장/51

이른바 '스톡옵션'의 문제입니다. 그 결과 기업들이 단기적 '주주 이익'에 더 집중하게 됐죠.

 

두 번째 경향은 한편으로 배당과 이자를 얻는 화폐자본과 다른 한편으로 이윤을 얻고자 하는 생산ㆍ제조 자본과 상업 자본 간 역사적 차이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 제1장/51

하나의 뿌리를 지닌 산업자본, 금융자본, 상업자본은 때론 경쟁하고 다투기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서로 다른 형태의 자본이 서로 융합하기 시작했다는 거죠. 가장 큰 특징은 '금융화'입니다. 레닌이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 제국주의의 특징 중 하나로 금융자본의 과두지배를 들었었죠. 현대에는 '과두지배'라기보다 융합과 금융화라는 것이 더 특징적입니다. 하비는 미국 철강(US Steel)의 변화를 예로 들고 있네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GM도 마찬가지였죠. '자동차 회사'로 알려진 GM조차 금융 부문에 큰 투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의 현대캐피탈, 현대카드 등 금융 부문이 점차 커지고 있죠.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는 슬로건은 1990년대 "월스트리트에 좋은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슬로건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하에서 부상하는 계급 권력의 본질적 핵심은 CEO들, 즉 기업 이사회의 주요 운영자와 자본주의적 활동의 내적 성소(聖所)를 둘러싼 금융적ㆍ법적ㆍ기술적 장치들의 선도자들에게 있다. - 제1장/52

이른바 월스트리트를 이끄는 1%의 사람들입니다.

 

이윤 획득을 위한 새로운 기회의 확대(공공 부문 민영화)와 개척(ITㆍBT 등 신기술 분야)은 새로운 상위 계급을 부상케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과의 밀착과 그로 인한 특혜 관계가 발생했죠.

 

경제에서 거대한 권력을 획득하게 된 소수는 정치에서도 큰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계급 권력을 회복한 상위 계급은 국민국가와의 관계에서 이점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들의 활동이 그 한계 내에 머물지만은 않습니다. 언론 재벌 머독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해서 영국에서 활동하고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었죠. 이러한 이들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과 같은 조직으로 교류하면서 과업을 협의하고, 생각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