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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00:52

촛불시위의 첫걸음 쟁점2016.12.19 00:52

아래 글은 10월 20일 올린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을 다시 고쳐쓴 글이다. 페이스북에 처음 올린 글로부터 따지면 세 번째 글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충하는 데 중점을 뒀다. 논점도 살짝 달라졌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바꾼 부분이 이 달라진 논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대중적 운동의 첫걸음에 좌파들이 불만을 갖는 일은 흔하다.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좌파의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경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패배적 평가가 대표적이다. 좌파의 다수는 기존 체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한계를 지적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전인권의 '애국가' 공연과 시위대의 집회 후 청소, 경찰버스에 붙인 스티커의 제거 행동에 대한 평가에서 극대화됐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도 내 실망감을 정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실망감은 내가 공부해온 '역사'에 반추해봤을 때 정당한 게 아니었다. 그 실망감은 내가 그토록 멀리해온 '국개론'(대중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 만을 갖는다며, 현재 상황을 대중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중이 운동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의식을 깨우친다는 것, 무엇보다 좌파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빼놓은 평론가적 태도였을 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전망'이 아니다. 나를 비롯해 좌파 일부가 놓치고 있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글일 뿐이다.

아래 글은 '사회주의자'에 기고한 글
(링크)의 원문이다.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글솜씨 때문에 내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사족을 또 달게 된다. '사회주의자'에 실린 글의 제목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회에서 고른 것이다.


11월 19일 '박근혜 정권 퇴진 4차 범국민 행동'에서 행진에 나선 사람들. [사진 自由魂]

촛불시위의 첫걸음

10월 24일이었다.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의 태블릿PC 속 국정 개입 증거를 폭로했다. 언론 보도를 접한 대중이 분노를 표시하기도 전 박근혜는 서둘러 1차 대국민 담화를 연다. 녹화 방송에 기자의 질문도 받지 않은 무성의한 담화였다. 아마 대중보다 지배계급이 더 빨리 이 보도의 위력을, 혹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가 이뤄졌을 때의 파급력을 깨달았을 것이다. 폭로로 가득했던 한 주가 지나고 29일 토요일 첫 대중적 촛불집회가 열린다. 3만~5만명으로 추산되는 참가자들은 분노로 가득했고 이들은 경찰과의 몸싸움도 꺼리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충돌은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이후 주말마다(당연히 평일에도 촛불은 계속 밝혀졌다) 계속된 촛불집회는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시위의 양상은 더 '평화'적이 됐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시위의 평화적 성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혹은 '명예혁명'이라며 촛불집회를 한껏 추켜세웠다.

좌파 일부에서 불만이 튀어나온 것은 이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한 촛불집회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 촛불에 불씨를 지핀 건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이었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만 한다. 시작은 언론재벌의 종합편성채널 JTBC의 보도였다. 같은 그룹의 중앙SUNDAY는 첫 촛불집회 다음날 (10월 30일자) 1면에서 '노력하면 성공하는 나라, 그 믿음이 깨졌다'는 제목으로 시위를 보도했다. 훌륭한 선동이다. 기껏 3만~5만명 나온 시위를 보도하며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하나로 잇는 분노의 동아줄을 잡아당겼다(작은 숫자는 아니다. '기껏'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 언론의 보도 태도를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토요일이 지난 첫 월요일 (10월 31일자) 사설에서 '심상찮은 시위'라며 정부와 정치권에 조속한 해결책을 내세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태도는 1905년 1월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킨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경찰의 첩자였던 가퐁 신부는 대중의 불만을 '평화'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워 페테르부르크 동궁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이끈다. 그러나 이 행진이 궁전을 수비하던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하자 가퐁은 "이제 우리에게 차르는 없습니다"고 선언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담화(11월 4일) 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다음날 더 많은 대중이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들자 조선일보는 점잖게 이렇게 말한다. "朴 대통령 국회 추천 총리에 內治 일임 선언하길."(11월 7일자 사설)

지배계급의 한 세력이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바로 그러했다.

"귀족 계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부르주아지에게 호소하는 방법도 주저하지 않았다. 법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족 계급에게 지지의 손을 뻗쳤으며, 또한 법원 서기와 고등 법원이나 귀족 가문의 출입 상인은 시위를 하라는 선동을 받았다. 베아른이나 도피네에서는 정기 소작인과 절반 소작인들까지도 동원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군대에도 귀족 계급의 선전이 침투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귀족 계급의 혁명적 선례를 잊지 않을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 54쪽, 을유문화사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특권계급은 자신을 기본권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1788년 프랑스 고등법원은 '왕국의 기본법 선언'을 공포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이 일부 포함됐지만 "당연하게도 조세의 평등과 특권의 폐지에 관한 언급이 없는 이 선언은 어떠한 혁명적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2쪽, 두레) 그럼에도 그들의 투쟁은 인민을 교육시켰고 훈련시켰다. 그 교육이 비록 지배계급 일부의 견해에 관한 것일지라도 이는 혁명을 향한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기본적으로 1788년 봄에 있어서 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바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의 결합이었다.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특권계급은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6쪽, 두레

특권계급의 교육 결과는 훌륭했다. 결국 1년여 후 프랑스 인민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에 나서 앙시앵 레짐을 끝장낼 혁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 ('독일 이데올록', 마르크스ㆍ엥겔스, 김대웅 옮김, 92쪽, 두레) 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실천 초기의 대중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체제에 대한 저항 자체도 바로 그 체제가 제공하고 가르친 표현ㆍ사상에 기반해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촛불집회 초기 문재인이 '명예로운 퇴진'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민주주의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대중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 ②항을 행동지침 삼아 왜곡된 '민주공화국'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게 된다.

조선일보의 가이드라인이 대중에게 통할까

안타깝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심지어 수십만 명의 저항이 이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대중이 배워온 이 표현과 사상이 실제 세계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1905년 1월 차르를 찬양하던 러시아 인민의 평화적 행진은 결국 피의 일요일 이후 파업과 시위로 가득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지배계급의 반란에서 시작한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 절대주의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되며 결국 그 권위를 잃었다. 끝내 그는 국가원수임에도 가족과 함께 도주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인민에게 입증해보인 후 1793년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렸다.

조선일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폭로 직후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희망을 내비쳤다. '내치를 넘기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대안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촛불집회의 급진화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두 번째 주말 촛불집회 후 조선일보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대신 협력"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일주일 전 집회 때 연행자는 물론 밤 늦게까지 충돌도 있었음은 모른 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태도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같은 야당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거리로 나온 대중이 '박근혜 퇴진' '하야' '탄핵'을 외쳤던 것과 달리 '질서있는 퇴진' 운운하며 '탄핵'에 주저했다.

그러나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5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12월 3일엔 전국 곳곳의 거리에서 232만 명의 인파가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 변화의 다가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거의 언제나 '폭력집회' 주도 세력 취급받던 농민의 트랙터 행진은 환영받았고, 이를 막아선 경찰은 비난받았다. 농민의 트랙터 행렬은 경찰의 방해에도 끝내 12월 9일 국회의사당 앞 탄핵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호 속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집회의 연설도 다양해지고 급진화하고 있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한 연사는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을 계속해온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의 눈물은 광장에 모인 100만명의 분노로 승화하고 있다. 한 학생은 "제 어머니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고,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가난합니다"며 불공정한 사회를 비판했다. 다른 학생은 "저는 공부를 못하지만 정유라 같은 이들이 너무 쉽게 학력을 따는 데는 열받는다"고 분노를 토했다. 많은 학생들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며 함께 행진하기도 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만이 이 투쟁의 배경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투쟁엔 이미 많은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고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움직일 준비가 돼있다.

집회 문화도 꼭 '애국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헌재 심판이 남아있긴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됐다. 평화로운 외양과 달리 대중의 굳은 의지가 정치권에게 탄핵을 강요했고 새누리당을 해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중앙일보가 "국민이 탄핵했다"며 "정치가 응답하라"
(12월 10일자 1면) 고 쓴 것은 이제 촛불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앙SUNDAY가 "촛불은 구체제 끝내라는 명령이다" (12월 11일자 1면) 고 말한게 내심은 아닐지언정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작가 샤토브리앙(1768~1848)은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그것을 성취하였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13쪽, 을유문화사) 고 평가했다. 2016년 겨울을 달군 촛불집회가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했던 것일지라도 그 끝은 오직 대중에 의해서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12월 10일에도 다시 100만여 명의 인파가 광화문광장에 모여 박근혜의 '즉각 퇴진'과 '구속' '처벌'을 외쳤다.

대중은 40여일의 행동을 통해 작지 않은 성과를 얻어냈다. 이는 스스로의 힘을 깨닫는 훌륭한 산교육이다. 게다가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헌법에 기반한 행동이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어냈지만 대중은 아직 만족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더 이상 이정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진 Revolution News]

급한 불은 끄게 된 것일까. 우크라이나에서 정부와 여야의 타협안 소식이 들려온다.

●[연합뉴스] 우크라 정부-야권 유혈사태 해법 담은 타협안 서명(종합2보)

요지는 조기 대선 실시와 대통령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헌법 개정이다. 현재 운동의 초점이 야누코비치 대통령 퇴진에 맞춰졌던 걸 고려하면 지금의 유혈사태를 진정시킬 어떤 돌파구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운동의 별명이 '유로마이단'이라는 걸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생디칼리스트인 키예프의 한 노동조합 활동가에 의하면 시위 초기 거리에 나선 우크라이나 인민에게 유럽은 "부패 없는 사회, 높은 임금, 사회적 안전, 법에 의한 지배, 정직한 정치인들, 미소 짓는 얼굴, 깨끗한 거리 등"을 뜻했다. 여기에는 단지 대통령의 과도한 권력, 정치적 지배구조의 문제만 포함돼 있지 않다. '높은 임금'이 상징하듯 여기엔 우크라이나 경제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지난해 유럽연합과의 협력협정을 추진했던 것도, 그리고 시위를 촉발시킨 그 협정의 중단도 모두 경제적인 배경에 놓여 있다(거기에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갈등으로 연결됐다).

실제로 마이단에서 목숨을 걸 각오를 서슴지 않고 말하던 한 사람, 아마도 파시스트일 가능성이 큰 무장 사수대 한 명은 "저는 10년 전 떠나 상선의 선원이 됐습니다. 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되돌아와 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서 투쟁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연합뉴스에 보도된 합의안에는 바로 이 문제, 우크라이나의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 청년들의 경제적 삶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이는 상대적으로 시위가 격화되면서 거리에서의 물리적 충돌 자체가 쟁점이 된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타협안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이 합의에는 스보보다(자유)도 포함돼 있다. 극우 파시스트인 이들은 합법정당이지만 불법적인 준군사 조직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18일 유혈 참극의 두 주범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야누코비치 정부다). 거리에서 무장하고 일정 지역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던 이들 파시스트를 새로 구성된 정부에서 완전히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저들은 합법적으로 어떤 권력을 공유하게 되면 더 기고만장해져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마치 1930년대 독일 나치처럼 말이다.

유럽연합과 러시아 정부로서는 우크라이나에서의 갈등이 자신들이 바랐던 것 이상으로 격화되는 데 놀랐던 듯싶다. 속보에 의하면 이번 타협에 이 둘 모두 참여했다고 한다. 그것은 중요한 석유와 가스 송유관이 지나고 흑해 북안의 중요 산업지대인 우크라이나가 내전으로 갈라지거나 파괴되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유럽연합과 러시아 정부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조지아에서처럼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이유로 군사적 개입을 감행할 가능성이 크다. 유럽연합도 과거 발칸 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바로 옆 소치에서 열리는 겨울올림픽을 핑계로 흑해에서 군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에 당장 맞서는 것은 유럽연합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로서도 현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 러시아를 비교하는 것은 물론 중국과도 자신을 비교하며 상황을 재고 있는, 즉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세력의 규모나 역할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군사적 개입이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더 큰 국내적ㆍ국외적 충돌을 준비할 여유 시간을 갖는 것, 아마도 이번 타협의 첫번째 가능성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도 파시스트의 활보와 권력 강화라는 끔찍한 것 뿐이다.

그러나 아직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다. 키예프 시내에서의 격렬한 물리적 충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노동계급은 아직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지 않다. 생디칼리스트 활동가의 지적처럼 키예프를 벗어난 "다른 지역에서 기업 활동이 아무런 방해 없이 평상시처럼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노동조합연맹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임금과 관련된 소수 작업장에서의 저항도 "정치적 저항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러한 사정이 거리에서의 충돌을 격화시키고 시위대에서 파시스트의 주도력을 강화시킨 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적은 가능성이지만 노동계급의 단결된, 그리고 유럽연합과 러시아 둘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파시스트와 정부로부터 자유로운 행동 만이 우크라이나를 구할 것이다. 이는 최근 혁명을 시작한 보스니아 인민이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다. 불과 20여년 전, 민족ㆍ종교 간 참혹한 내전을 치뤘던 보스니아 인민은 노동계급 투쟁을 통해 민족과 국가ㆍ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어 단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활동가들이 이로부터 보다 큰 영감을 얻어 과감한 행동에 나설 수 있길 바란다.

Posted by 때때로

혁명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보스니아 반란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권력이 필요하다. 성공했거나 성공에 가까웠던 모든 반란이 그랬듯이 말이다. 플리넘(Plenum)은 인민권력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보스니아 반란 ① 끝나지 않은 내전, 민영화
보스니아 반란 ② 플리넘, 인민권력이 싹트다
보스니아 반란 부록 - 인민의 목소리, 당신은 얼마나 배고픈가?


민영화 정책 재검토 등 일곱 개의 요구안을 들고 있는 시위대.

투즐라와 제니차 주지사는 7일 시위가 격화된 후 사임했다. 몇몇 자치주들로 이 사임의 물결이 확산됐다. 정부가 조기총선 카드를 빼들었지만 노동자와 반란에 나선 인민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플리넘(Plenum)'이라고 부르는 인민 의회를 건설했다. 시작은 역시 투즐라였다. 9일 투즐라에서 첫 플리넘이 열린 후 전국의 모든 반란 도시에서 플리넘이 개최되기 시작했다. 다미르 아르세니이에비치는 플리넘을 이렇게 설명한다.

"투즐라주 시민 플리넘은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우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플리넘은 토론을 위한 공개적인 공간입니다. 플리넘은 어떤 지도자와 금기도 갖지 않습니다. 결정은 대중의 투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플리넘은 정당이나 NGO, 독단적인 협회가 아닙니다. 플리넘은 현실적이고 유일한 민주주의입니다. 플리넘은 국가의 모든 권력기구에 제출할 요구안을 자신의 선언으로 만들고 채택합니다. 선언은 우리 모두의 말이고 우리 모두의 요구이기에 모두가 선언에 함께합니다. 국가의 권력기구를 향한 모든 다른 행동들은 부패, 정당의 도둑질, 개인적 이익의 추구와 인민을 약탈해 부유하게 되는 것들을 향해 계속될 것입니다."

이는 2011년 미국 뉴욕 오큐파이 운동의 '제너럴 어셈블리'보다 한결 발전한 모습이다. 오큐파이 운동의 제너럴 어셈블리는 저항운동 내의 이러저러한 문제를 처리하는 기관ㆍ과정ㆍ절차에 불과했지 권력에 도전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플리넘은 혁명의 실제적 요구들, 즉 권력에 대한 것을 다루기 시작했다. 12일 사라예보 첫 플리넘에서 결정된 플리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더 확실해진다.

플리넘이란 무엇인가: 플리넘은 참석한 이들 모두의 의회입니다. 이는 토론을 위한 공간입니다. 결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왜 플리넘인가: 그것은 모두에게 공개돼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투표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개인은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고 이 공간은 비폭력적인 모두에게 열린 곳입니다.

플리넘의 원칙, 모두는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갖습니다: 각 개인은 하나의 투표권을 갖습니다. 발언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혹은 그녀의 이름 또는 성(family name)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당신 동료 시민의 발언을 들으며 당신의 발언 기회를 기다립니다.
플리넘은 규칙과 의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제안과 추가발의가 진행됩니다.
이는 투표 없이 발언된 순서에 의해 의제에 덧붙여집니다.

플리넘의 진행: 플리넘은 지도자 없이 단지 토론을 용이하게 하거나 발언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리하는 사회자만 둡니다. 사회자는 발언자가 주제에서 벗어날 때 원래 의제로 되돌아오도록 지적할 권리를 갖습니다.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발언을 위해 손을 든 참가자를 확인하고 기록합니다.
한 사람은 플리넘 후 공개적으로 발표될 회의록을 기록합니다.

토론: 의제의 각 항목은 의제에 제기된 순서에 따라 토론합니다. 모든 논평은 그 항목에 연관된 것이어야 하며 질의는 바로 토론합니다.

투표: 논의되는 의제의 항목과 질의에 대한 토론을 시작한 후 최대 30분 내 투표를 시작합니다.

기본원칙이 플리넘을 다른 무엇보다 앞서 '토론을 위한 공간'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운영 규칙을 담은 아래의 항목은 무엇보다 '결정'을 위한 과정을 정하고 있다. 만장일치의 합의제로 토론을 위한 토론으로 그 역량을 소모시켜온 오큐파이 운동의 제너럴 어셈블리와 가장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여기서 채택된 첫 선언은 ①헌법에 기반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안전보장 ②새로 선임될 지방정부 책임자에 대한 헌법적 권리 인정 ③3월 1일까지 새로운 전문가 정부의 선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들은 아직 혼란스럽고 모순적이기까지 하지만 분명히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총선을 운운하며 시간 끌기에 나서려 했던 정부의 계획을 일축하고 인민의 힘에 의해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 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노동조합ㆍ방송 등 사회의 모든 것을 다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에미나 바보비치는 기업과 정부에 협조해왔던 '황색 노동조합'을 대체할 새로운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해선 말하지 않는가'라고 제게 묻습니다. 많은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부끄러워하고 있고 저는 개인적으로 디타(Dita)에서 소위 '황색' 노동조합이라고 불리는 조합이 정부를 위해서 일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대신 기업의 이익을 지켜 왔습니다. 노동조합 지도자는 사람들을 '매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위가 시작됐을 때 스스로를 대중과 격리시켰습니다. 지금 그들은 의회와 협상하는 단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스메트 바히라모비치[노동조합 지도자 중 한 명인 듯싶다. 정확히 찾아보진 못했다.-옮긴이]가 저를 대표할 수 없기에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저를 팔아버린 카타 이베리히치가 저를 대표하도록 놓아둘 수는 없죠. 저는, 그리고 많은 수의 노동자들은 투즐라에서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황색' 노동조합은 [플리넘에-옮긴이] 참여할 권리가 없습니다. 또한 저는 침묵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용기를 가지고 목소리를 높여 저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투지와 용기를 가졌고, 우리가 단결했음을 저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미라 시지크는 기업이 자행하는 온갖 비리와 부패를 밝히기 위해 인민의 방송국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저는 우리가 TV 방송을, 최소한 공공 라디오 방송국이라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방송을 위해 기부금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송에서는 정치인들이 메인 뉴스로 나오지 않겠죠. 그 방송은 인민이 말할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불평등을 직접 경험한 목소리, 이를테면 어떤 교수가 자신의 의견 때문에 상관으로부터 공격받거나 직장을 잃을 걱정 없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방송이 될 것입니다. 밝혀져야만 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식대로 50달러를 주면서 250달러를 받았다고 서명하라는 회사도 있어요. 우리는 이러한 모든 회사들을 공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언론을 가져야만 합니다."

발전 도상에 있는 플리넘, 약점은 극복될까

'헌법'을 여전히 자신들이 행동하는 근거로 삼으며 기존 의회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협력하려 하는 것, '전문가 정부'를 대안으로 요구하는 것은 분명 모순적으로 보인다. 이미 투즐라와 제니차 등 몇몇 주에서는 주지사 등 정부의 책임자들이 사임했고 주의회는 플리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발표했다. 즉 최소한 몇몇 지역에서는 실질적 권력이 거의 플리넘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허울뿐인 헌법과 의회를 존중한다는 것은 의외의 모습이다. '전문가 정부'를 요구하는 것도 그렇다.

"금융 특혜와 사라예보 주 모든 기업의 민영화에 대한 개정 사항, 2월 7일 시위에서 정부청사에 불이 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한 독립적인 보고서를 몇 주마다 보고하는 전문가들의 정부를 시민들은 원합니다."

사라예보 플리넘에서 아심 무이키치의 발언이다. 시민들에게 보고함으로써, 시민들의 통제를 받는 정부는 분명 발전된 전망이다. 그러나 이 전망이 노동계급 스스로의 정부와 같은 것은 아니다. 소위 전문가들이 겨우 '몇 주마다의 보고'만으로 시민의 통제에 온전히 순종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운동이 이제막 시작된, 7일의 불꽃으로부터 겨우 열흘 지난 상황에서 제기된 것들이란 걸 고려하면 '아직은' 결정적 약점이라고 보긴 어렵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통신원을 파견해 반란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레볼루션 뉴스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선출되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기술관료'의 정부를 경험해 본 이들에겐 순진한 소리로 들릴 것"이라고 이를 지적한다. 그러나 플리넘이 요구한 '전문가 정부'는 "선거를 치를 때까지의 임시정부"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민은] 수십 년 간 대중과 먼 세 '민족' 정파의 오만한 과두지배를 경험해 왔기에 '인민권력'의 형태로 제안한 공적 감독 요구가 분명 소위 '기술적' 정부 요구에 앞서 제기된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1968년의 세계적 반란 등 역사적 경험은 이것 말고도 다른 플리넘의 약점들을 눈에 띄게 한다. 그들 스스로 인지하고 있듯이 너무나 분명한 투쟁의 계급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플리넘이 '시민'의 의회로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이 첫째 약점이다. 지금까지는 오직 '개인'으로서만 플리넘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 약점을 극복하고 있지만 민족주의적 우파와 지배자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할 때 플리넘의 이 약점은 치명적이 될 수 있다. 둘째 약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직까지 이 플리넘은 '무장'의 문제를 제가히자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란이 확산되면서 베니치의 경찰이 시위대와 참여했지만 무장한 정부의 힘은 만만한 게 아니다. 게다가 유럽연합과 국제사회는 이 반란이 '악화'되면 군사적으로 개입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보스니아 평화협정 이행 국제사회고위대표부(OHR)'의 발렌틴 인즈코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둔군 병력을 늘릴 것입니다. 만약 상황이 확대되면 아마 나는 유럽연합 군대를 파병하는 것을 고려하겠죠. 그렇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는 과거 1차 세계대전이 바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니 사라예보의 사건에서 촉발됐듯이 이번 반란이 주변국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옛 유고 연방이 영향을 받고 있다. 내전의 한 축이었던 이웃 나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연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베오그라드 경찰 노동조합은 반란이 국경을 넘어 확산돼도 진압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란 밀라노비치 크로아티아 총리가 반란 직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날아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에게 시위에 참여하지 말 것을 호소한 것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반란의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내전을 치뤘던 옛 유고 연방의 독립국들은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내전을 재개하는 방식으로] 손을 잡거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아직 완전한 주권을 갖지 못한 상황을 이용해 NATO의 개입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2011년 이후 PIGs라고 불리는 포르투갈ㆍ이탈리아ㆍ그리스 등 남부 유럽에서 반란의 불길이 터져나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3년 이 불길은 터키ㆍ우크라이나로 이어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격변은 바로 아래 그리스 또는 옛 사회주의권 국가의 동료인 우크라이나의 반란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를 흔들 격변의 시작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중해-흑해를 잇는 반란 벨트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보스니아에서의 저항은 2011년 이래 세계에서 일어난 반란 중 가장 발전된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대안적 형태의 권력을 '형성'한 단계에까지 이르진 않았지만 여러모로 그 가능성을 매우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세계는 정말 다른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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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에서 23일 사이 키예프 거리의 바리케이트. 1월 16일 집회와 시위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독재법'이 의회에서 통과된 후 거리 시위가 격화됐다. [사진 Ilya Varlamov]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과의 통상 강화 협상을 중단하고 친러시아 정책으로의 복귀를 천명했다. 대외정책 전환은 이후 3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거리 시위를 촉발시켰다. 가라앉을 듯 보이던 시위는 새해에 다시 폭발하고 있다. 1월 16일 시위를 억압하는 강력한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하면서부터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화염병이 날라다니는 모습이 외신을 타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시위는 지난해 터키ㆍ브라질ㆍ이집트와 달리 국제주의적 좌파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지 않다. 시위 초기 외신을 탄 레닌의 동상을 쓰러뜨리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그 사진의 시위를 주도한 것은 스보보다
(Svobodaㆍ자유)라는 이름의 극우파 정당의 당원들이었다. 이후 거리에서의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것도 극우파다.

처음부터 극우파가 시위를 주도한 것은 아니다. 유럽연합과의 협상 중단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가 지난해 11월 30일 경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한 후 눈앞의 경찰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12월 초 며칠 간 시위가 계속되면서 유럽연합과의 통합은 시위의 중요 의제에서 벗어났다. 이 저항이 여전히 '유로마이단'이라고 불림에도 말이다. 키예프-모힐라 대학의 미하일로 비니치키야
(Mychailo Wynnyckyj) 교수는 12월 1일 시위에 직접 참여한 후 "키예프의 상황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민들은 더 이상 유럽연합과의 통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것을 요구할 때조차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고 평가했다.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서 드러난 야누코비치의 권위주의적 통치, 임박한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에 쌓여온 불만이 폭발했다(최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이후 우크라이나는 모건스탠리에 의해 서든스톱 위험이 가장 높은 네 개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동부 산업지대 기반의 지배집단은 지금의 위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 그 배경엔 세계적 경제위기와 함께 러시아와 서방의 점증하는 제국주의적 갈등이 있다. 2010년 빅토르 유센코의 실각 후 다시 정권을 잡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유럽연합과 러시아, 심지어 중국까지 끼어든 갈등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수출의 21.2%, 수입의 28.4%가 러시아와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고 석유와 가스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지하는 나라에서 친서방 정책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이러한 관계를 이용해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을 견제해 왔다. 유센코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인 2005년 말부터 2006년 사이 원유가격 갈등으로 러시아는 공급을 중단했고 우크라이나는 결국 두 배 인상된 가격으로 수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가 친유럽연합 행보를 이어가자 러시아는 8월부터 우크라이나로부터의 수입과 가스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해 왔다
(지난해 시위가 시작된 뒤인 12월 17일 러시아를 방문한 야누코비치에게 푸틴은 150억 달러 지원과 가스가격의 33% 인하라는 '통큰'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이와 함께 야누코비치가 12월 초 중국을 방문하는 등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드네프르 강 동쪽의 산업지대에 기반한 야누코비치로는 대외 관계는 물론 국내적 지지기반 때문에도 러시아와의 거리 두기가 쉽지 않다.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에게 야누코비치가 인기가 없는 이유다. 게다가 야누코비치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상황은 서부 농업지대의 젊은이들이 극우파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손쉽게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극우파 성장의 첫 이유다.

극우파 성장의 두 번째 이유는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동부의 러시아인들, 특히 크림반도의 러시아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동부에서도 자치를 요구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인에게는 소련 시절 옛 지배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 소련이 실제 정체와 상관없이 마르크스주의를 공식 이데올로기로 삼았다는 사정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좌파가 성장할 공간은 여전히 비좁다.

그렇다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야당이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2004년 오렌지 혁명 때는 유센코라는 명확한 대안이 있었다. 그러나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이 유센코가 통치한 우크라이나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또는 과거의 우크라이나보다 더 나은 사회인지는 분명치 않다. 집권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급격히 하락한 경제성장률과 지지부진한 개혁 때문에 최악의 인기를 이어갔다. 유센코는 2010년 대선 땐 3위권의 군소호보로 전락했다. 2010년 야누코비치와 겨뤘던 율리아 티모센코 전 총리는 직권남용 혐의로 수감돼 있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파가 부재한 상황에서 제도권 정당의 허약함은 극우파의 성장을 부채질하고 있다.

가능한 정치적 대안의 부재는 극우파 성장을 위한 비옥한 토대가 되고 있다. 여기에 권위주의적 통치에 맞서 가장 적극적으로 거리 시위를 이끌면서 이 비민주주의적 집단이 가장 '민주주의적' 집단으로 대중의 정서적 공감을 얻고 있다. 결국 극우파의 성장은 단호한 좌파 정치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현재 극우파가 주도한다고 해서 좌파가 기권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게다가 1월 16일 독재법의 통과 이후 적은 규모지만 좌파 또한 거리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 역사적 경험, 정치 전통이 여러모로 좌파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에서 우리와 비슷한 여러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국외자로서 우리가 우크라이나 좌파의 분투로부터 적지 않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아래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의 인터뷰다. 마흐노 반란의 역사가 있기에 마르크스주의적 좌파와 손잡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와의 이 인터뷰는 사실은 부족할지언정 진실의 측면에서 많은 것을 들려준다.

※ 의역을 했기에 원문과 상당히 다릅니다. 오역도 많이 있으니 퍼가거나 인용하시려거든 꼭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대괄호 []는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입니다.



1월 22일에서 23일 사이 키예프 거리의 바리케이트. 시위대가 힘을 합쳐 거대한 새총으로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사진 Ilya Varlamov]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와의 인터뷰
유로마이단 "우리는 당신 투쟁을 지지하지만 파시스트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레볼루션 뉴스, 2014년 1월 30일

키예프의 자율 노동조합(Autonomous Workers' Union) 조합원과의 이 인터뷰는 2014년 1월 28일 이뤄졌다. 이 인터뷰는 유로마이단을 둘러싼 사건들 몇 가지를 해명해준다. 저항 이면의 원인들, 대통령에 초점이 맞춰진 분노, '오렌지 혁명'과의 차이, 우익의 역할, 사회적 투쟁의 약점과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Q: 키예프의 사진을 보면 바리케이트에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 같다. 그들이 함께 하게 된 이유를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바리케이트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그 지지자들은 무엇을 토론하고 있나? 단지 경찰에 맞선 싸움이 실제 쟁점인가? 아니면 바리케이트와 그 밖의 곳에서 그들의 집회 또는 어떤 다른 형태의 토론 '조직'이 이뤄지고 있는 것인가?

A: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주요 동기는 극단적으로 인기가 떨어진 대통령에 있다. 물론 실제 원인은 경제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부패, 공공 서비스의 쇠퇴, 가난, 실업에 있다. 이러한 불만의 목록이 사람들을 오늘날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이건 좌파의 견해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쟁점들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엌 구석에서 투덜거리기를 그만두고 큰 소리로 저항하게 된 것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한 그들의 감정 때문이다. 대통령 사임 요구는 가장 근본적인 요구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경찰력에 대한 순수한 분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시위대는 단지 경찰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만은 않는다. 이는 그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유리 루첸코가 내무장관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베르쿠트
[우크라이나의 특수 경찰]와 다른 특수 경찰력이 늘 그래왔듯이 행동했을 때 루첸코 그 자신은 최루 가스를 사용해 시위 군중을 해산할 것이라고 발표했었다. 그래서 지금 역시 그와 같은 (이곳의 모든 사회 계급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경찰에 맞선 시위는 비교적 무해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 생각에 대통령과 그의 정부, 경찰이 주요 토론 주제다. 시위대의 주요 목표는, 그들이 보기에 지역당
[야누코비치가 이끌고 있는 우크라이나 여당]을 몰아내는 것, 그것 뿐이다. 일부에선 헌법의 권력 균형을 대통령에서 의회로 바꿀 것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주요 주제는 사실 최루 가스, 음식, 방패, 화염병, 거리 전투의 전술과 끝없는 루머와 목전한 국가비상사태 선포 위협, 스나이퍼, 폭동진압경찰(그들이 러시아인인지 아닌지, 그들이 얼마나 더 오랫동안 개입할 것인 지 등)과 같은 실제적인 것들이다.

집회에 관해서 말하자면, 난 아무 것도 모른다. 내 생각에 상황은 매우 역동적이고 불안정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바리케이트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민주주의로 발달하는 기미는 확인하지 못했다.

Q: 정부 청사에 대한 많은 공격과 점거가 있는 것 같지만 도시에서 '일상적' 삶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키예프에서 사람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바리케이트로 가는 것인가? 시위대가 하는 다른 형식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듣기론 점거된 대학교도 있던데? 이를테면 최근 임금 미지급에 맞서 작업장에서 어떤 다른 것이 진행되고 있는가?

A: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서 기업 활동이 아무런 방해 없이 평상시처럼 계속 진행되는 동안 키예프 중심가만 시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전국적인 정치 파업 선언 시도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실패했다. 반대파는 이를 위한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했고, 어떤 정치조직도 작업장에 뿌리내린 전국적 조직을 갖지 못했으며, 단순히 인민 자신이 파업과 같은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오래된 관료주의적 우크라이나 노동조합연맹(the Federation of Trade Unions of Ukraine)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학생조합인 '직접행동(Direct Action)'은 학생 파업을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오직 하나의 대학, 키예프-모힐라 대학에서만 부분적으로 가능했다. 네, 그렇게 사람들 대부분은 업무와 학업을 계속하며 그들의 자유시간 만을 바리케이트에서 보내고 있다.

아우토마이단이라고 불리는 자가용 소유자들의 모임은 그들의 차로 교통, 특히 중요한 정부청사 부근이나 권력자들의 주거지 인근의 교통을 차단하는 행동을 주도하고 있다. 근로자들이 벌이는 저항 형식 중 하나는 지역당 소속 자본가들이 만든 상품들에 대한 불매운동이다. 최소한 몇몇 보도에 의하면 이러한 운동은 비교적 성공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한 대학에서 점거가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당신이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직접행동'에 속한 우리의 동지는 모든 캠퍼스를 점거하고 그곳의 모든 활동을 중단시키려 시도하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는 여전히 실질적인 점거는 아니다.

임금 등과 관련된 작업장에서의 저항은 지금까지는 정치적 저항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도시 교통을 통제하는 공기업인 키예프패스트란스
(Kyivpastrans)의 노동자들이 12월 시위를 벌였고 몇몇 좌파 조직이 그들을 도왔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준법투쟁(이탈리아식 파업 Italian strikeㆍ준법투쟁 내지 태업과 같은 형식의 노동쟁의를 이르는 속어)조차 시도하지 않았고 마이단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실제로 12월 말 지방정부는 최선을 다해 밀린 임금을 지급해 그들의 시위를 가라앉혔다.

Q: 우크라이나에서 최근 있었던 가장 거대한 시위는 '오렌지 혁명'이다.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은? 누군가는 그 '역사'를 고려하겠죠? 시위대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그리고 유럽연합 가입을 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A: 무엇보다도 '오렌지 혁명'은 매우 개인적인 것에 맞춰진 저항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빅토르 유센코를 대통령 자리에 앉히겠다는 구체적 목표에 집중했다. 유센코의 정치체제는 대중을 꽤 치밀하게 통제했고 모든 것을 매우 부드럽게 조직했다. 현재 야당 지도자 세 명은 시위대 다수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대통령과의 협상에서 마이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그럴 권한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난 목요일[1월 23일] 그들은 군중으로부터 야유를 받았고 마이단은 그들이 야누코비치와 협상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화가 났지만 대중을 따라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대표자들'보다 더 급진적이다. 11월의 모든 시위는 그들에게 뜻밖의 일이었고 그 이후 그들은 사태를 통제하고나 이끄는 게 불가능했다. 이러한 진공상태는 곧 극우파에 의해 채워졌다.

또 다른 차이점은 2004년에는 토론되는 쟁점의 범위가 더 넓었다는 것이다. '혁명' 전체는 대통령 선거에 바쳐졌지만 여전히 좌파적 의제를 합법적으로 제안할 수 있었고, 사회적ㆍ경제적 쟁점을 토론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저항은 현재의 시위보다 더 비주류적이었다. 현재는 오직 부르주아 정치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다른 쟁점을 제기하고자 하면 당신은 곧 '선동가'로 딱지 부쳐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2004년의 사건과 현재 시위의 유사점을 떠올려보라고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당시 아동이었던 새로운 젊은 세대가 지난 10년 사이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시위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두 번째로 빅토르 유센코는 '오렌지 혁명'의 참가자 모두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주었다.

당연히 시위대는 법치가 이뤄지는 진정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부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발상에서 그들을 구별해주는 유일한 것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떠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연합 가입이 민주주의 또는 번영과 그 밖에 좋은 모든 것과 같은 뜻이라고 확신한다. 유럽연합은 그들의 모든 희망이 집약된 신화다. 세계에 대한 이 신화적 관점에서 러시아가 모르도르[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이 왕국을 세운 암흑의 땅을 이르는 명칭] 취급을 받는 동안 말이다.

Q: 우파 정당과 파시스트 그룹도 시위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가? 그들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나? 다른 시위대는 그들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나?

A: 극우파 정당 스보보다는 시위를 이끌고자 노력 중인 세 개의 큰 정치집단 중 가장 조직적이다. 그들은 다양한 지역에 실질적 활동에 기반한 실제로 활동하는 세포조직을 지닌 유일한 정당이다. 그래서 세 곳 중 가장 조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조직으로서 그들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스보보다를 제외하면 네오나치 전투 조직의 광범위한 연합이 있다. 그들은 '라이트 섹터(Right Sector)'라고 불린다. 그들은 시위 초기에 형성돼 비정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큰 명성을 얻는 성공을 거뒀다. 그들은 공개적인 전투성과 공격성으로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고 대중은 이 기민하고 젊은 애국자들의 어떤 잘못도 보지 않고 있다. 최근 네오나치 훌리건들이 경찰, 친정부 폭력배와 맞서 싸운 주요 돌격대로 드러나면서 같은 형태가 반복되고 있다.

1월 19일 시위에 비정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심지어 좌파인 여러 부류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때까지 파시스트의 헤게모니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1월 16일 통과된 '독재법
[최고 5년형과 고액의 벌금형, 노동교화형을 시위 참가자에게 내릴 수 있게 한 11개의 법안. 이 법은 의회에서 찬성 450표, 반대 235표로 통과됐다]' 폐지로 시위 의제가 바뀌면서 그렇게 됐다. 그로 인해 극우파가 약간 후퇴했지만 결국 이 시위에서 누가 승리하든 극우파가 큰 이득을 얻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반대파가 승리할 경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경찰력과 특수기구 등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야누코비치가 이긴다면 그것은 나라의 절반이 극우파, 추측컨대 독재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애국주의적 급진파로서 극우파의 확고한 지지자가 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좌파 활동가 또한 저 법들에 의해 극심한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1월 19일 이후 좌파 대부분도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이 비상병동에서의 간호와 같은 사회기반 활동들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경찰과 폭력배들이 부상자를 납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기에 머물러야만 했다. 좌파가 활동하는 다른 영역은 위에서 언급했던 정치 파업 시도다.

Q: 외부에서 보기에 시위는 지난해 이스탄불과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물론 확실히 강도는 다르지만 …). 키예프 혹은 우크라이나 다른 곳의 시위대에게서 지난 몇 년 간 세계적 봉기와의 연관성을 볼 수 있는가?

A: 확실히 몇몇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주관적 관점의 우크라이나 시위대는 저 다른 시위대를 눈에 담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이 사건을 저항의 국제적 물결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역사에 위치지우려 노력하며 순수한 민족적인 투쟁으로 바라본다.

Q: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것에 덧붙여 질문하자면, 당신은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그것을 뒤따라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발표한 몇몇 보고서를 읽었다. 당신이 시위에서 바라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긍정적 결과는 무엇인가? 당신이 떠올리는 최악의 결과는 무엇인가? 당신은 우크라이나 외부에 어떤 종류의 지지를 바라는가?

A: 내가 말했던 것처럼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야누코비치의 승리다. 이는 1970년대 남아메리카의 독재를 닮은 냉혹한 권위주의적 체제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야누코비치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절반의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는 그와 같은 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한 시나리오는 1980~90년대 북아일랜드 IRA와 다르지 않은 게릴라 운동 하에서의 군사적 대립의 증가다.

다른 결과는 야당의 최종적 승리가 될 것이다. 이는 허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지만 기본적 자유는 유지되는, 우크라이나에서 2005~2009년 사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파시스트가 권력의 전당과 거리 모두에서 더 강해질 것이다.

여기 세 번째, 아마도 최악의 하나가 될 시나리오도 있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키예프를 포함한 중부 사이에, 다른 한 편으로는 남부와 동부 사이에 본격적으로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편의 민족주의적 괴물을 위해 싸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최악의 참사가 될 것이다. 다른 한 편 우크라이나와 같이 거대한 산업국가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유럽연합과 러시아와 다른 세계적 권력들은 주요 가스ㆍ석유 송출관과 15개의 원자로를 가진 나라가 전쟁의 혼란에 빠지는 걸 보고만 있진 않을 것 같다.

내 생각에 그와 같은 조건에서 해외로부터의 최상의 지원은, 하지만 극우파와 연대하지 않는 지지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물러서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당신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당신의 파시즘적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와 같은 메시지가 해외에서 압박을 가하기 위한 최선의 형태일 것이다.


구호를 외치고 있는 시위대. 들고 있는 팻말에 적혀있는 구호는 파업을 지원하는 '교사 분대'라는 뜻. [사진=Felipe Dana/AP]

브라질 교사 파업이 계속되면서 경찰과의 폭력 충돌이 격화되고 있다. 언론은 폭력 시위의 중심에 '블랙 블록'이 있다고 주장한다. 경향신문 29일자 11면에 실린 '두 얼굴의 '블랙 블록''기사도 마찬가지다. 제목에서는 '두 얼굴'이라 칭했지만 기사는 "평화로운 행진이 (블랙 블록에게) 납치됐다"며 교원노조 조합원들이 반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블랙 블록은 "무엇에 대해 항의하는지 정확하게 모르"며 상점과 현금인출기를 공격하는 등 폭력적 행위에만 천착해 "시위의 본질을 퇴색"시킨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두 얼굴의 '블랙 블록'

그러나 시위를 폭력적으로 만드는 게 블랙 블록의 청년들 때문일까.

가디언과 브라질 지역 언론에 실린 증언에 의하면 블랙 블록은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시위대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어나니머스 가면을 쓴(따라서 블랙 블록은 아닌) 26세의 학생 아리아네 산토스는 "블랙 블록은 경찰이 투입됐을 때 항상 시위대를 방어했다. 그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교사들을 보호했다"고 말한다. 많은 교사들은 블랙 블록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부터 시위대를 보호했으며 충돌이 일어났을 때 블랙 블록은 부상자들을 응급처치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았다고 증언한다. 한 고등학교 교사는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은) 소년들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리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동맹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의도치 않게 형성된 것이라고 가디언은 말한다.

[The Guardian] Violence at Rio de Janeiro protest

또다른 기사에서 블랙 블록의 한 명은 "우리가 그저 공격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리의 저항할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이다"고 분명히 밝혔다.

[The Guardian] Thousands join teachers' protest in Rio de Janeiro

게다가 우리는 이미 지난 6월의 브라질 반란에서 경찰이 먼저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공격한 것을 목격한 바 있다. 당시 브라질 경찰은 기자들을 노골적으로 공격해 세계를 경악하게 했었다. 경찰은 10월의 파업과 시위를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총기를 사용해 과잉진압하고 있다(링크). 27일에는 경찰의 총격을 받은 19세 소년 더글라스 로드리게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링크). 경찰이 시위대와의 물리적 충돌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파업을 이끌고 있는 교원노조(SEPE)는 사복 경찰이 시위대에 잠입해 폭력을 선동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이 주장은 InSerbia라는 세르비아의 영자 인터넷 언론에 실린 것으로 다른 근거는 찾지 못했다ㆍ링크). 어찌보면 당연한 의심일 터이다.

브라질에서의 시위가 격렬히 충돌하는 것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림의 전부는 아니다. 평화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더 많은 사람들과 행진이 있었지만 언론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인 블랙 블록의 폭력에만 관심을 쏟는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흔히 겪은 일이다. 19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있었던 5시간의 평화적인 시위도 마찬가지였다. The Crisis Republic에서 스케치한 이날의 시위는 언론이 평화적으로 진행된 시위보다는 아주 잠깐의 긴장과 충돌에만 관심을 쏟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링크).

언론이 시위의 폭력에만 관심을 쏟으며 이를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블랙 블록'의 탓으로 몰아가는 것은 운동의 급진화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연대를 위해 시위를 참여한 이들은 더 많은 사회적 불만을 투쟁에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과 정부의 블랙 블록에 대한 비난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물론 시위대 일부가 우리의 요구와 상관 없는 폭력 행위를 벌일지라도 말이다. 운동 자체의 힘으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을 합의해야 한다.

상황이 워낙 급히 돌아가고 있어 지금은 어찌 변했는지 모르나, 브라질 교사 노동자들의 초기 대응은 훌륭했다. 물리적 충돌과 블랙 블록에 대한 언론과 정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사 알라이네 데 루카는 다시 또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교사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사회적 동원은 예전엔 볼수 없었던 것"이라며 "(교육제도) 개선은 희망적"이라고 주장했다. 또 교원노조(SEPE)는 거리에서 경찰과 블랙 블록의 폭력적 충돌이 있은 후 열린 한 회합에서 "교사들의 저항을 조직하는 것은 노동조합이지만 블랙 블록이 (연대를 위해) 참여하는 것은 항상 환영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O DIA] Teachers Union Officially Declares Unconditional Support for Black Bloc(영문 번역 기사)

화염병으로 상점을 공격하고 현금인출기를 깨뜨린다고 사회가 진보적으로 변화할리는 없다. 그러나 정부와 경찰은 우리 운동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언제든 과감히 폭력을 사용할 것이고 우리 운동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폭력은 불가피하다. 급진파의 배제는 운동의 요구와 행동 범위를 제한할 뿐이다. 저항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은 급진파의 배제가 아니라 운동을 더 크고 강력하게 성장시키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란? 세계 곳곳의 반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고전적인 바리케이트와 무장한 시위대-경찰의 충돌이다. 사진은 6월 26일 칠레 산티아고의 시위 모습. [사진 europeans against the political system 페이스북]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의 반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2011년 튀니지ㆍ이집트 혁명부터 올해 터키ㆍ브라질 반란까지 모두 '중산층 혁명'이라고 주장한다[월스트리트저널 6월 28일ㆍ링크]. 후쿠야마의 기고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후 우리 언론에서도 '중산층 혁명'에 대한 기사가 잇따랐다. 특히 경향신문은 7월 3일자 1면과 8면 두 개 면을 사용해 가장 크게 '중산층의 반란'을 다뤘다. 이 글에서는 후쿠야마의 월스트리트 기고를 중심으로 '중산층 혁명'에 대해 따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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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7월 3일자 지면에는 '지구촌 휩쓰는 중산층의 반란'이란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물결을 분석하고 있다. 이번 시위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군부독재에 맞서는 정치세력도, 세계화의 그늘 속에 좌절한 젊은이들도 아닌 '글로벌 중산층'"이라는 게 요지다[경향신문 7월 3일자 1ㆍ8면ㆍ링크].

최근 저항에 대한 경향신문의 '중산층의 반란'이라는 규정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중산층 혁명(The Middle-Class Revolution)'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격차(the gap)'를 이번 시위의 공통점으로 꼽고 있다. 후쿠야마에 의하면 세계적인 자본주의 성장은 거대한 규모로 중산층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됐지만 정치가 이 증대된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직면한 실패가 최근 시위들이 공유하고 있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처럼 터키와 브라질에서도 정치적 저항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평균 이상의 교육 수준과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기술 친화적인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위를 조직하고 연대를 건설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반란과 혁명에 대한 틀에 잡힌 관념이 많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배운, 억압받는 이들이 들고 일어난 시위는 마치 옛 이야기처럼만 여겨진다. '중산층 혁명'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시위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중산층의 성장? 세계는 평평해졌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선 세계적으로 봤을 때 '중산층'의 성장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쿠야마 스스로도 중산층의 증가 현상이 중국ㆍ인도에 집중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지난 2000년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를 강태한 경제위기와 2000년대 초 미국의 IT버블 붕괴를 거친 후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네 개 나라가 매력적인 투자처로 새롭게 제시됐다. 브릭스(BRICs)는 이 네 나라의 이름에서 비롯한 단어로 세계적 금융자본인 골드만삭스가 2003년 처음 사용했다. 즉 애초 브릭스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금융자본의 반응이었다. 세계경제의 성장과 중산층의 부흥은 결코 전 세계적으로 고르게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후쿠야마가 주목하고 있는 터키와 브라질에서 지니계수(세계은행, 100 기준)는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과 룰라의 노동자당(PT)이 집권한 2003년 각 43.42와 58.78에서 2010년 터키 40.03, 2009년 브라질 54.69으로 줄어들었다. 2010년 멕시코의 지니계수가 47.16임을 감안하면 브라질의 불평등이 여전히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터키는 2008년 38.95까지 떨어졌던 지니계수가 2010년 다시 증가한 것이다. 후쿠야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불평등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중국은 1981년 이후 꾸준히 지니계수가 상승해 2009년에는 42.06에 다다른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지난해 12월 또다른 보도에 의하면 중국가정금융조사연구센터(쓰촨성 청두 시난차이징대와 인민은행 금융연구소가 함께 설립한 연구소)의 조사결과 2010년 중국 지니계수는 0.61에 달해 '폭동을 부를 수준'이다[동아일보 2012년 12월 11일자 21면ㆍ링크].

터키와 브라질에서 빈곤층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브라질의 빈곤층(국가 빈곤선 기준 빈곤층 인원수, 국제 빈곤선 기준 이하 인구 포함) 인구는 2004년 33.7%에서 2009년 21.4%로, 터키는 2004년 25.6%에서 2009년 18.1%로 줄었다. 그러나 실업률은 정체 수준이며, 터키의 경우 장기실업률은 2003년 23.4%에서 2011년 26.5%로 오히려 증가했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후쿠야마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도 "평균 이상의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서울경제는 무르시를 실각시킨 이집트 제2혁명의 원인을 "치솟는 청년 실업률ㆍ경제난"이라고 지적한다. 민간연구소들의 조사에 의하면 30세 이하의 청년 실업률은 60%에 달한다는 것이다. 튀니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랍의 봄의 도환선이었던 튀니지 혁명은 한 대졸 노점상의 분신으로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과일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경찰의 단속으로 노점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가 분신하면서 높은 실업률과 물가에 고통받던 튀니지 인민들이 반란에 나선 것이다[프레시안 2011년 1월 16일ㆍ링크].

경향신문이 '중산층의 반란'이라고 부른 최근의 보스니아 시위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스스로 지적하듯이 "보스니아는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이 유럽연합 평균의 29% 수준에 머무는 유럽 내 가장 가난한 국가"이고 "실업률이 44.6%에 달하면서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경향신문 7월 3일자 8면ㆍ링크]. 부패한 정치인의 공직 임명에 반발해 시작된 불가리아 반란도 다르지 않다. 이 반란이 시작되기 세 달 전 불가리아 인민은 전기요금의 급등에 반발해 거리로 나섰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분노한 시민을 달래기 위해 조기총선을 실시했지만 사태의 수습은 아직 멀어 보인다.

결국 이 모든 반란의 배경에는 고전적인 테마가 자리잡고 있다. 즉 극심해진 빈부격차, 열악해지는 삶의 질이 그 공통된 배경인 것이다. '중산층의 성장'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좀 더 평등해진 세계의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경제성장은 몇몇 나라의 소수에게만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가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경향신문은 이 중산층을 부르킹스 연구소의 기준을 빌어와 10~100달러의 소득수준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09년 '글로벌 중산층'은 18억명에 이른다. 이 추세는 계속 이어져 2030년에는 세계인구 80억명의 절반을 넘는 48억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이 적절한지 따지기 이전에 앞에서 살펴본 세계경제의 현실은 경제적 기준의 중산층 성장이라는 주장이 현실과 다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였을까. 후쿠야마는 중산층을 경제적 기준 만으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는 중산층을 "교육과 직업, 자산의 소유에 의해 정의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가 '중산층'의 정치적 태도를 예측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세금을 많이 내는 중산층은 정치에 더 민감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술 친화적인 이들은 다른 나라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더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수준이다. 더 높은 교육수준은 진보와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이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혁명들까지 끌고 온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중국 혁명 모두 불만을 품은 중산층이 주도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행동 방침이 소작농과 노동자, 빈민층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848년 '인민의 봄'은 사실상 유럽 대륙 전체에서 분출한 혁명이 직접적으로 앞선 수십여 년 동안의 유럽 중산층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혁명가들을 보자.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ㆍ생쥐스트, 1848년 혁명의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루이 블랑, 1871년 (비록 결정적 순간에 감옥에 갖혀있었지만) 파리 코뮌의 블랑키, 1917년의 레닌 …. 이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대표적 혁명가들은 몰락한 귀족 또는 교육 받은 지식인 출신이다. 심지어 엥겔스는 자본가다.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는 또 어떤가.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의사다. 우리는 이러한 목록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들 혁명의 대표자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배후에 더 거대한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1789년부터 1794년 사이 상퀼로트의 행동이 없었다면 로베스피에르의 위명 또는 악명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상퀴로트의 핵심 지도자들을 숙청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혁명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대중을 발견할 수 없었고 바로 그 때 그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 반동이 닥쳐왔다. 마르크스에게 '붉은 박사'라는 악명을 안겨줬지만 1848년 혁명은 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게 아니며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1871년 블랑키 없이 코뮌을 80일간 운영했다. 1917년 레닌에게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가 없었다면 볼셰비키의 10월 봉기는 실패했을 것이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동맹, 혁명의 필요조건

물론 후쿠야마가 '개인'으로서 혁명을 주도하는 중산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과거의 혁명을 얘기할 때 '개인'으로서 혁명가의 출신성분을 따지지만 현재의 혁명을 얘기할 때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혁명에서 이 중산층 '집단'의 다른 계급 또는 계층과의 동맹은 매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시위와 봉기, 때때로 혁명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이 주도하지만 마지막에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것에는 드물 게만 성공한다. 그것은 중산층이 발전된 국가에서 사회의 소수 이상을 대표하지 못하고 그들 내부가 스스로 분열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의 다른 부분과 동맹을 맺지 못하는 한 그들의 운동은 지속적인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후쿠야마는 동맹을 맺는 것 자체가 중요한 듯 말하지만 사회를 뒤흔드는 중요한 투쟁은 거의 언제나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행동하며 벌어진다. 다시 한 번 그 목록을 늘어놓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 1848년 혁명, 1817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혁명 모두가 그랬다. 보통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데서 오는 계급의 미발전(또는 충분히 분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혁명은 하나의 계급 또는 계층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노동계급은 소수였으며 레닌과 볼셰비키는 농민의 협력을 얻기 위해 여러 타협을 해야만 했다.

현재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터키에서 젊은 활동가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파업과 쿠르드족의 연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칠레에서는 무상교육과 공교육 강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에 교사ㆍ부두ㆍ광산ㆍ의료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연대에 나섰다
[참세상 2013년 6월 27일ㆍ링크].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은 오클랜드 항만 노동자와의 연대, 시카고 교사 파업, 월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거대한 투쟁들이 자동적으로 노동자 반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집트의 두 번째 혁명에는 무르시 정권에 반대하는 거의 모든 세력이 함께 참여했다.

계급 화해의 정치, 모호한 미래

이미 동맹은 현실에서 이뤄져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동맹이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중요한 동맹의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1849년 2월의 쁘띠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이 바로 그것이다. 1848년 파리 노동자의 6월 봉기가 무참히 진압된 뒤 쁘띠부르주아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위협받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보장해 주는 제반 민주주의적 보장책들이 반혁명으로 인해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쁘띠부르주아는 노동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접근했다". 6월 봉기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노동자는 이들의 제안에 동의해 공동강령을 마련하고 연합선거위원회를 발족해 공동후보를 추천했다.

"플로레타리아의 사회적 요구로부터 혁명적 요소가 사라지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대신하게 되었다. 쁘띠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주장에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형태가 없어지고 사회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 사회-민주주의의 독특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된다. 곧, 민주공화주의 제도가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 극단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양자 사이의 적개심을 무디게 하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 53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동맹의 결과 1849년 5월 28일 입법국민의회가 열렸을 때 마르크스가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한 산악당은 750석 중 200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 중 하나와는 맞먹을 수 있는 수였다. 특히 파리에서 선출된 의원의 다수가 산악당이라는 점에서 이 동맹은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월 13일 산악당은 2주 만에 질서당(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의 연합)에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후퇴한다. 그 지도자인 르드뤼롤랭은 영국으로 망명해 1870년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주파[산악당]는 과도적 계급, 즉 그 안에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동시에 서로 뭉뚱그러져 있는 쁘띠부르주아지의 대표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계급 적대 일반을 초월했다고 상상한다. 민주파들은 자신들이 특권계급과는 대립하고 있으나, 나머지 국민과 함께 인민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며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민의 이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법에 근거하여 투쟁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조차 그들은 여타 계급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원을 그다지 심각하게 평가할 필요조차도 없다. 단지 신호만 보내주면 인민은 자신들의 고갈될 줄 모르는 힘으로 압제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 58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1848년 6월 봉기의 패배로부터 쁘띠부르주아에 대한 의심이 가시지 않은 노동자에게 사회-민주주의의 모호한 정치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계급타협 정치의 종언

적대적인 계급의 이해관계를 화해키려는 모호한 정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브라질에서의 반란은 이러한 정치의 종말을 보여준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의 지도자인 페드로 스테딜레는 "신자유주의 15년, 그에 이어 계급타협 정부의 지난 10년은 정치를 자본의 인질로 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룰라 시절에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의 당근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세계경제위기로 지우마 호세프에겐 룰라와 같은 좋은 조건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참세상 2013년 7월 2일ㆍ링크, 레디앙 2013년 6월 27일ㆍ링크]. 그럼에도 후쿠야마는 "많은 것은 리더십에 달렸다"며 반란을 적절한 개혁에 대한 타협으로 이끌 수 있길 바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산층 중) 기업가적 소수는 정치인들에게 부패의 책임을 지우고 수혜자 중심의 정치를 가능케 하도록 원칙을 바꾸는, 브라질의 정치 체제 전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중산층 동맹의 기초를 지원할 수 있다. 이것은 광범위한 중산층이 동원돼 19세기적 정실주의를 끝장내고 공적 서비스를 개혁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성공적으로 이끈 미국의 진보 시대(1890~1920년)에 일어난 일이다. …… 호세프 대통령에게 봉기는 좀 더 야심찬 체제 개혁을 시작할 계기다."

실제로 그녀는 시위대에 대해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녀와 달리 브라질 경찰은 터키의 경찰, 이집트의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잔인한 폭력으로 시위대를 대하고 있다. 시위대 또한 정부의 유화적 태도에도 결코 물러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후쿠야마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진보 시대가 1차 세계대전과 세계적 혁명의 물결 속에 막을 내렸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터키와 이집트, 그 밖에 많은 나라의 반란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배자들이 실제로 양보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 정치인들은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의 압력하에 긴축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대중의 계속된 반란과 위협에도 말이다. 올해 초 대중의 저항에 직면해 조기총선을 치뤘던 불가리아에서는 제1당이 정부 구성 권리를 포기했다. 이집트에서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뿌리 내린 지난 수 십년의 활동을 기반으로 무슬림형제단이 1차 혁명의 성과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돼 그들도 대안이 아님이 입증됐다. 무슬림형제단은 국제통화기금의 식료품과 공공요금 보조금 삭감 압력에 굴복했다. 실업은 해결되지 못하고 더 심각해졌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억압당했다.

반란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들에서 권위주의의 강화, 경찰의 잔인한 시위대 탄압이 분노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양보할 게 없는, 타협할 여지가 없는 정부는 주먹에 의지하기 쉽다. 계급타협 정치는 좌파가 아니라 우파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먼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기회

그럼에도 계급타협 정치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반란에서 계급 간 대결이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진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중간계급의 지위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 전체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양대 계급의 대결로 몰아간다는 사정 자체가 갈등을 복잡하게 한다.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중간계급이 소부르주아적 습속을 버리긴 어려우며 프롤레타리아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현실 때문에 부르주아적 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중산층,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중간계급이 (이 둘이 완전히 일치하진 않더라도) 혁명의 대열에 끝까지 참여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무르시를 쫓아낸 2차 혁명에서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은 군부의 폭력에 기대고 있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반란의 배경이었던 국제통화기금의 긴축 압력에 맞서지 않고 있다.

노동계급도 분열돼 있다. 민족적ㆍ인종적ㆍ종교적ㆍ성적 차이에 기반한 전통적인 분열의 위세는 여전히 강력하다. 단결에 대한 열망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계급 간 타협에 대한 미련도 그렇다. 이번 반란들도 분열된 노동계급의 현실 때문에 단일한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인민' 또는 '민중'의 반란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는 없다. 패배든 승리든 반란은 현실의 역사에 흔적을 남길 것이고 그 흔적은 어느 계급이 혁명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최근의 반란으로 사회 전체가 흔들리며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진출하고 있다. 때로는 반란에 적대적인 세력까지도 집단적 행동으로 역사의 키를 쥐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산층의 혁명'은 지나치게 협소한 규정이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동맹은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고 갈등할 것이다. 중산층 중심의 계급타협 동맹은 우파와 지배계급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따라서 동맹에서 어떤 정치에 의한, 어느 계급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여러 투쟁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계급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학생 반란에는 교사와 광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스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노동계급은 2011년 아랍의 봄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허약해 보이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몇몇 짧은 장들을 예외로 한다면, 1848년에서 1849년까지의 혁명 연보는 중요한 부분마다 "혁명의 패배!"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패배 때문에 사라진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의 잔재, 다시 말해 아직 날카로운 계급 대립으로까지는 고양되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것은 2월 혁명 이전의 혁명적 당파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ㆍ환상ㆍ관념ㆍ계획들이었는데 혁명적 당파들은 2월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패배를 통해서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적 진보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진보의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들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결속력 있고도 막강한 반혁명이라는 하나의 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인데, 이 적과의 싸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혁명적 당파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으로 성숙해 갔다.
-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프랑스 혁명사 3부작' 39쪽, 임지현 외 옮김, 소나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당파는 패배를 통해서만 과거의 습속과 환상,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현대의 우리도 이어진 투쟁의 굴곡 속에 몇몇, 때로는 심각한 패배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열었고, 그들이 멈췄던 곳으로부터 보다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30일 이집트 제2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봉기한 인민들.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전국적 봉기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이 위기에 처했다. 장관들의 사임이 잇따르고 군부도 나섰다. 군부는 "정치 세력은 48시간 이내로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라"며 "국민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부는 마치 봉기한 인민의 편인 것처럼 나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2011년을 기억해야 한다. 2011년 11월 군부는 '신(新)헌법 기본원칙'을 발표했었다. 이 기본원칙에는 군부가 정부 및 국회의 관리ㆍ감독을 피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선거법을 매우 복잡하게 꼬아놓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 또한 가로막았다. 인민에 의한 정부로의 권력 이양도 최대한 늦추려고 했었다. 이에 분노한 이집트 인민이 거리로 나서자 군부는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저격수가 시위대의 눈을 조준사격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2012년 집권한 무슬림형제단과 무르시 대통령이 내세운 '파라오법'은 종교적 색채만 덧칠됐을 뿐 민주주의를 제한한다는 측면에서 군부의 지배와 다를 바 없었다. 무르시와 군부는 때론 갈등하고 싸우지만 인민의 삶을 억압하고 민주적 권리를 제한하는 데는 같았다.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군부는 인민의 친구가 아니다.

6월 30일 봉기로 무르시 정부는 식물정권이 될 듯 싶다. 다시 경계해야 할 것은 군부다. 시위대가 자신의 당면 목표를 달성한 후, 즉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이 권력에서 물러산 후 거리로 나선 인민이 다시 집과 직장으로 얌전히 돌아간다면 군부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2011년 보여줬 듯이 말이다.

● [2011년 11월] 이집트 인민은 왜 다시 거리로 나섰나?
● [2011년 11월] 이집트 총선 첫날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 [2012년 12월] 끝나지 않는 이집트 혁명, 코앞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의 2011년과 2013년. 아랍의 봄으로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쫓아낸 지 2년 만에 다시 광장으로 돌아온 이집트 인민들. 다시 출발한 이들이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의 주요 도시 거리에 수 백만 명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은 이미 2011년 독재자 무바라크를 쫓아낸 경험이 있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떠난 자리에 오른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종교의 탈을 쓴 또 다른 독재자였을 뿐이다. 이집트의 동지들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물론 일시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다시 일어섰다. 이 점이 중요하다. 애초 2011년 이후 미국의 점령하라 운동, 스페인의 분노하라 운동, 2012년 터키와 브라질 반란에 영감을 전해줬던 이집트 동지들이 다시 터키와 브라질 반란으로부터 고무받아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다시 시작된 이집트의 운동은 전과는 다를 것이다. 전에 멈춘 곳에서 출발하게 된 운동은 그 결과가 인민의 승리든 패배든 더 격렬하게 지배자들과 충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30일 시위 전날인 29일 로어매그(ROARMAG.org)에 실린 이집트 활동가들의 편지는 그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스스로를 '카이로의 동지들'이라고 칭한 이들은 단지 "권리나 시민권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합법성에 대한 강조"가 체제의 진정한 핵심을 가리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이번 행동이 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물론 이들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이러한 목표가 거리로 나온 시위대 모두의 동의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대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어제의 시위는 이들의 주장이 허언 만은 아닐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이집트 활동가들의 공개 편지를 아래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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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가스 속 탁심과 리우의 동지들에게
Roarmag.org 6월 29일ㆍ링크

우리와 함께 투쟁하는 당신에게,

우리에게 6월 30일은 2011년 1월 25일과 28일 시작된 반란의 새로운 단계로 기록될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 경제적 착취와 경찰 폭력, 고문과 살해의 더 심한 판본일 뿐인 무슬림형제단의 통치에 맞서 일어선다.

'민주주의'의 도입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적절한 생계수단과 존엄의 [향상을 나타내는] 어떤 지표를 지닌 괜찮은 삶을 누릴 가능성과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 선거 과정에서의 합법성에 대한 강조는 이집트에서 우리가 투쟁을 계속해야 만 하는 이유, 즉 얼굴만 바뀌었을 뿐 탄압과 긴축, 경찰 폭력의 원리는 그대로인 억압적 체제의 영구화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든다. 정권은 여전히 공중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고 고위직은 개인의 권력과 부를 획득할 기회로만 이해된다.

6월 30일 다시 시작될 혁명의 외침은 이거다: "인민은 체제의 폐지를 원한다". 우리는 비겁한 권위주의나 무슬림형제단의 식민주의적 자본주의, 여전히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삶의 목을 죄는 군부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무바라크 시대의 구체제로 돌아가지 않는 미래를 찾고 있다. 6월 30일 거리로 쏟아져나올 시위대 구성원들은 아직 이 요구로 하나가 되진 않았지만, 피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 [활동가] 네트워크는 여전히 약하지만 최근의 봉기, 특히 터키와 브라질의 봉기로부터 희망과 영감을 받고 있다. 그것들은 각자 다른 정치적ㆍ경제적 현실에서 비롯했지만 우리 모두는 인민에게 도움이 될 것은 생각도 안하는 체제를 영구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최상층의 지배를 받아왔다. 우리는 2003년 브라질 바히아의 무상교통운동의 수평적 조직과 터키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민중의회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은 지역화된 신자유주의 원리가 인민의 삶을 짓밟는 과정에 오직 종교적 허식만을 추가했을 뿐이다. 민간 부분을 공격적으로 성장시킨 터키의 전략은 반대자들과 진보적 계획에 대한 시도를 억압하는 주요 무기로서 경찰의 폭력적 지배와 같은 원리의 권위주의적 지배로 변화했다. 브라질에서 혁명적 전통에 뿌리를 둔 정부는 그들의 과거가 인민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협력하는 자신을 가리는 가면일 뿐임을 입증했다.

최근의 이러한 투쟁들은 보다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쿠르드족과 라틴 아메리카 토착민 투쟁의 영향을 받았다. 지난 10여 년간 터키와 브라질 정부는 생존을 위한 이 운동을 진압하려고 시도해왔지만 실패했다. 정부 탄압에 맞선 그들의 저항은 터키와 브라질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저항 물결의 선구자다. 우리는 각자의 투쟁이 중대함을 인식하는 것의 절실함을 알고, 새로운 공간과 주민, 공동체로 확산되는 반란의 양식을 찾아냈다.

우리의 투쟁은 국가들로 구성된 세계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다. 무바라크와 군부, 무슬림형제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집트에서는 위세를 떨치고 있는 위기 때 국가가 권력을 사용해 저들의 부와 특혜를 보호하고 확산하기 위해 [인민의] 재산을 빼앗고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투쟁하는 우리는 고립돼 있지 않다. 우리는 바레인, 브라질, 보스니아, 칠레, 팔레스타인, 시리아, 터키, 쿠르디스탄, 튀니지, 수단, 사하라 서부 지역과 이집트에서 공통의 적에 맞서고 있다. 이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모든 곳에서 그들은 우리를 폭력배, 파괴자, 약탈자,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우리는 경제적 착취, 적나라한 경찰 폭력, 부조리한 법질서에 이상의 것에 맞서 싸우고 있다. 권리나 시민권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우리는 지역 지배자들이 우리의 삶을 착취할 수 있게 하거나 세계적 권력이 우리 매일의 삶에 대한 통치권을 유지시킬 수 있게 하는 중앙집권적 억압기구로서 국가에 반대한다. 총탄과 방송,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모든 것이 동시에 작동한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투쟁을 [억지로] 통일하려 하거나 동일시 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투쟁들의 배경에는 우리가 싸우고 해체해 쓰러뜨리려 하는 지배와 권력의 동일한 구조가 있다. 함께하면 우리의 투쟁은 더 강해질 것이다.

우리는 체제를 쓰러뜨리길 바란다.

카이로의 동지가.

※ 위 편지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제가 임의로 옮긴 것임으로 인용하거나 퍼가시려면 꼭 원문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잘못 옮겼거나 틀리게 이해한 데 대한 지적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2008년 11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시민들이 경제난에 거리로 나서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레이캬비크=신화/뉴시스]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지자 워싱톤은 대규모의 구제금융을 준비했습니다. 인쇄기에서 찍어낸 막대한 달러가 주요 은행과 기업들에 뿌려졌습니다. 공화당은 이를 공산주의라고 비난했죠.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는 부시가 대통령이었지만 막상 구제금융이 본격화되던 때는 오바마 정부였으니 공화당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맘껏 레드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악선전을 퍼부을 수 있었겠죠. 이 악선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티파티라는 극우 운동은 공화당에서 꽤나 큰 지분을 차지하기까지 했습니다.

구제금융을 공산주의라고 비난한 공화당의 악선전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젝은 이를 비꼬아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정부에게 막대한 재정부담을 안긴 금융위기에도 대다수의 부자는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지킬 수 있었죠. 막강한 달러의 힘 때문에 지금 당장엔 인쇄기를 돌리는 것 빼고 큰 부담이 없을 수 있지만 결국 미래 노동자들이 세금으로 메꿔야 할 빚이 엄청나게 쌓인 것이죠.

다른 나라들에선 이와 같이 위기를 넘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약한 경제를 지닌 나라들은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긴축을 시도하고 있죠. 부자들 스스로 저지른 잘못으로 인한 손해를 가난한 이들에게 메꾸라는 것입니다. IMF와 국제금융기관들은 구제금융의 대가로 긴축정책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내정간섭이라고 할정도의 협박도 서슴지 않고 말입니다.

해외 채권자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정부는 굴욕적인 조건이라도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의 국민보다는 국내외의 소수 자본이 중요하다는 듯한 태도는 얼핏 이해 안가지만 자본주의적 세계에서 거의 모든 나라 정부의 공통된 입장이죠. 스페인과 그리스 등 남부유럽을 휩쓸고 있는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강력한 경찰력을 동원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국민을 피흘리게 해서라도 IMF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자본가들을 안심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방법 밖에 없을까요? 아이슬란드의 사례는 다른 길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남유럽에서 저항이 폭발한 최근 트위터에서 아이슬란드가 다시 한 번 관심을 끈 이유일 것입니다.

2008년 위기가 터졌을 때 아이슬란드는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있었습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2008년 2/4분기 아이슬란드의 대외채무는 GDP의 7.3배 규모인 1205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당시 외환보유액은 9월 말 기준 36억7000만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29쪽). 아이슬란드 정부는 여러 나라에 손을 벌려야만 했고 결국 그해 11월 IMF로부터 21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모든 은행을 포함한 공기업 민영화. 금융시장 개방과 규제완화. 법인세 감세. 신자유주의 정책을 모범적으로 따르던 아이슬란드는 한 때 선망의 대상이었죠. 인구 32만 명의 화산섬 나라가 1인당 GDP 6만 달러의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로 떠올랐으니까요. 한 때 우리나라에서 추진하던 '동북아 금융허브'의 모델로 두바이와 함께 언급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곳이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나라로 급락한 것입니다.

금융위기를 다룬 기사와 책은 아이슬란드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언론에서 아이슬란드의 위기와 관련된 이야기는 사라졌습니다. 2010년 봄 화산폭발로 잠시 관심을 받긴 했지만 위기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었죠. 여러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슬란드 뉴스가 없다고? 왜지? 우리가 지난번 들었던 것은 인민이 봉기하고 은행가들을 쓸어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2년간 TV와 신문에선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신문과 TV는 은행가들이 어떻게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또다른 반란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는지 왜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답은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 그들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인민이 승리한 것이다."(보도되지 않는 아이슬란드의 놀라운 혁명ㆍCrazyemailsandbackstories)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돌멩이를 든 채 총리실과 의회로 향하던 시위대의 소식은 얼핏 기억나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이 질문을 담아온 블로거는 흔치 않은 아이슬란드에 관한 소식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에서 혁명이, 평화적인 변혁이 진행됐다고 전합니다. 아래는 여러 기사들로부터 간략한 사실들만 추린 것입니다.

- 2008년 주요 은행이 국유화
- 2010년 350억 유로를 5.5%의 이자로 향후 15년간 영국과 네덜란드에 갚겠다는 정부의 계획에 반대해 시민들이 봉기
- 대통령은 시민의 저항에 굴복해 이 계획안 승인을 국민투표에 부침
- 2010년 3월 국민투표에서 93%의 유권자가 부채상환 반대에 표를 던짐
- IMF는 즉시 구제금융을 동결
- 중단하지 않은 시민들의 투쟁으로 금융위기 책임자들에 대한 민사ㆍ형사소추 시작
- 가장 큰 은행의 경영진을 포함한 90명 가량의 기소 추진
- 집값의 110%를 넘는 가계부채를 탕감키로 결정
- 대법원은 2010년 6월 외환채무는 무효라고 판결
- 2011년 외환부채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새 헌법을 제정키로 함
- 18세 이상 성인 중 30명 이상의 추천을 받은 522명의 후보 중제헌의회 의원 25명 선출
- 온라인을 활용한 시민들의 참여로 헌법초안 작성

그야말로 놀라운 얘기들입니다. 특히 사실상 국유화에 가까운 막대한 재정을 민간기업에 투입하고도 경영권에 대한 그 어떤 관여도 하지 않는 미국과 비교하면 더 믿기 어렵죠. 게다가 미국에선 버나드 메이도프와 같은 사기꾼을 제외한다면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으로 그 어떤 금융가와 기업가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dailykos의 필자는 아이슬란드의 교훈을 우리 모두가 꼼꼼히 되새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의 인민은 공공 부문의 민영화 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들어왔고 이탈리아ㆍ스페인ㆍ포르투갈도 같은 위협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글을 마무리 합니다.

"[그리스ㆍ이탈리아ㆍ스페인ㆍ포르투갈 등 위기에 직면한 나라의] 그들은 아이슬란드를 봐야 한다. 외국 [금융세력의] 이익에 굴복하는 것을 거절하고, 작은 나라는 인민에게 권력이 있음을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Daily Kos)

아직 외부로부터의 위기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우리 서민은 더 길어진 노동시간, 더 강해진 노동, 더 적은 고용, 더 많은 실업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분담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아이슬란드 인민의 투쟁과 승리는 우리에게 누구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할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내외의 한줌 부자들을 위한 것인지.

● 참고한 기사와 글
[Crazyemailsandbackstories] 언론이 침묵하고 있는 아이슬란드의 놀라운 혁명
[Daily Kos] 아이슬란드의 계속되는 혁명
[Bloomberg] 분노한 아이슬란드인, 부채를 탕감시키다
[한겨레] 아이슬란드, 민주적 참여로 67년 만에 헌법 개정

● 함께 읽어볼 만한 글
[자유롭지 못한] 뜨거운 10월 … 긴축에 맞선 인민의 저항이 폭발하다

신대륙의 흔한 시위 코스 |2월 시작된 퀘벡의 학생파업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은채 4개월여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는 학생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학생 시위 봉쇄 비상입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퀘벡 학생시위대가 행진하겠다고 경찰에 신고한 코스가 '신대륙의 흔한 시위 코스'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서 소개되고 있다.

2008년의 경제위기가 4년 만에 더 큰 파도로 세계를 덮치고 있습니다. 민간 은행과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은 위기의 근원을 치료하지 못한 채 경제위기를 공공부문으로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뻔뻔한 은행가들과 사장들은 자신들의 실패는 잊어버리고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용, 특히 복지예산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EU와 ECB(유럽중앙은행), IMF는 그리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끝을 알 수 없는 긴축을 요구했죠. 그리스 국민들은 일자리와 연금을 잃고, 교육과 각종 복지의 축소로 삶의 질이 후퇴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만이 아니죠. 스페인도 예산 삭감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스페인 정부는 GDP의 8.9%인 재정적자를 5.3% 수준으로 낮추기 위해 교육 예산을 30억유로(약 4조4600억원)로 삭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기존 평균 1000유로(약 150만원)에서 1500유로(약 220만원)로 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25세 이하 청년실업률이 52%에 달하는 상황은 스페인 청년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미 지난해부터 주목받고 있는 인디그나도스(Indignados:분노한 시민들)의 저항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부의 교육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교사ㆍ학생ㆍ학부모가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5월 22일 열렸습니다. 이날 시위는 5개 교직원 노동조합이 함께 준비했고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중 14개 주에서 80%의 교사가 파업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노조에 의하면 마드리드에는 10만명, 바르셀로나에서는 15만명이 시위에 나섰다고 합니다.

● [경향신문] 스페인 교육 예산 삭감에 교사 파업, 수십만명 시위(링크)

대서양 건너 캐나다에서도 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시위가 전국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퀘벡 주정부는 현 2519달러(280여만 원) 수준의 등록금을 올 하반기부터 5년간 단계적으로 인상해 4144달러(470여만 원)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학생들은 2월부터 가두시위와 파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학생파업이 주목받는 것은 경제위기 시기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시위와 파업이 계속되자 퀘벡 주정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듭니다. 우리 나라의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떠오르게 하는 법이죠. 5월 18일 주의회에서 통과된 비상입법안에서는 25명 이상이 참여하는 시위는 경찰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수업 방해, 등교 저지 시위에 참여한 개인에게는 1000~5000달러(110만~570만원)의 벌금, 시위 주동자에게는 7000~3만5000달러(800만~398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연합뉴스] 캐나다 퀘벡주, 학생 시위 봉쇄 비상입법(링크)

정부의 강경 조치에도 저항은 중단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민들도 시위에 동참해 5월 30일 1차 야간 냄비시위(the Casseroles Night in Canada), 6월 6일 2차 야간 냄비시위가 진행됐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퀘벡 학생과 연대하는 시위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OWS 홈페이지는 6월 6일 전 세계 130개 도시에서 연대시위가 열렸다고 알렸습니다.

특히 미국에서의 학생운동은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과 이주민 운동이 결합되며 더 큰 힘을 받고 있는 듯 싶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노동운동이 서부의 이주노동자 운동의 활력으로 재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960~70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민권 운동이 미국의 급진적 사회운동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을 상키시키기도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출발해 워싱턴D.C.까지 3000마일(4800여㎞)을 행진하고 있는 이주민 청년들의 핵심 구호는 '추방이 아니라 교육이다(Education Not Deportation)'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였던 드림액트(
DREAM Act:주로 히스패닉계인 미등록 이주민 자녀 학비지원 등을 포함한 이민법 개정안. 오바마의 2008년 대선 공약 중 하나. 링크 1, 링크 2)의 의회 통과를 요구하는 행진이죠. 이와 함께 이 법이 통과됐을 때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추방을 금지하는 대통령령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행진의 참여자들은 5일 콜로라도 덴버의 오바마 선거운동 본부를 점거하기도 했습니다. 두 명은 단식투쟁을 진행하고 있죠.

● [OWS] 학생ㆍ미등록 이주 청년이 국제적 교육운동 이끈다(링크)

6월 5일 치러진 위스콘신 주지사 소환선거에서의 패배는 점령하라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입니다(링크). 미국의 우파들은 이 소식을 올 연말 대선에서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도 의기소침해지는 소식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기소침할 수록 경제위기는 우리의 삶을 더욱 갉아먹을 것입니다.

경제위기는 언제나 양방향으로 정치를 발전시킵니다. 이른바 '양극화'죠.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의 올랑드가 당선됐지만, 극우파 장 마리 르펜의 선전은 좌파들에게 경악할 소식이었습니다. 그리스 극우파 황금새벽당의 대변인은 TV 생방송 토론에서 상대 토론자에게 폭력을 행사에 해외토픽에 실렸죠. 이 황금새벽당 또한 지난 5월 총선에서 급진좌파정당 시리자(SYRIZA)와 함께 약진했습니다.

분명히 경제위기는 현재의 세계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인민을 위한 체제로 변할 수도 있고, 자본과 권력자들에게만 더 유리한 체제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퀘벡에서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극우 정치인들 뿐 아니라 현재 세계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 때는 반민주주의적 행동에도 거침없이 나설 것입니다. 우리 99% 인민의 정치가 투표장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 위에 링크한 OWS 홈페이지의 '학생ㆍ미등록 이주 청년이 국제적 교육운동 이끈다' 글을 제멋대로 아래 옮겨놓습니다. 제 영어실력이 요즘 초등생보다 못해 상당한 오역이 있으니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세요. 원문 링크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시카고에서 열린 퀘벡 연대 행진.

학생ㆍ미등록 이주 청년이 국제적 교육운동 이끈다

캐나다에서 두 번째 냄비시위(the Casseroles Night in Canada)가 진행되는 동안 전 세계 130개 도시에서 저항이 표출됐다. 시위대는 냄비와 후라이팬을 두드려 퀘벡 학생운동과 캐나다 역사상 가장 장기간 진행되며 긴축시대에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재정립하는 학생파업에 연대했다. 무기한 총파업은 정치가들과 언론에 계속 충격을 주고 있다. 그것(학생파업)을 불법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운동을 파괴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단지 캐나다에서 광범위한 시민불복종을 만들 뿐이고 전 세계적로 반란의 불꽃이 퍼지는 것을 도울 뿐이다.

전 세계적인 학생, 점령자들, 분노한 사람들, 사회운동은 거리를 점령하고 단지 퀘벡의 우리 동료들 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무상의 해방된 교육제도에 대한 지지를 보여줬다. 우리는 빚에 기반한 사회와 착취 경제에 저항하기 위해 봉기했다. 점점 더 우리의 다양한 지역 운동들은 거대한 국제연대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막 시작했다.

이주민 청년들, 오바마 선거캠프 점령

'드림액트(DREAM Act)'를 요구하며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에서 출발해 워싱턴D.C.까지 3000마일을 도보행진 중인 이주민 학생의 모임 '아메리칸 드림을 위한 캠페인(The Campaign for an American Dream)'이 콜로라도 덴버 서쪽 77번 도로 9번가의 오바마 선거운동(the Obama for America) 본부를 점령하기 위해 덴버에서 멈췄다. 시위대는 6월 5일 오후 5시30분쯤 선거운동본부에 들어가 경찰과 대치하는 대신 선거운동원과 함께 밤을 보냈다. 몇몇 청년들은 체포됐을 때 추방당할 위험이 있었다. 적어도 두 명의 시위대는 드림액트가 시행됐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들의 추방을 중단시키는 대통령령에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할 것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오큐파이 덴버의 수백명의 사람들은 사무실 밖에서 시위를 했다. 이 시위는 사무실을 고립시키려는 작전을 막았다.

오레곤 학생들, 등록금 인상 반대 연좌시위

'빌어먹게도 비싼 등록금 동맹(the Tuition is Too Damn High Coalition)'은 최근 오레곤 대학의 등록금 6.1% 인상안 승인에 대한 대응으로 로버트 버달 총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예산 삭감 반대, 등록금 반대, 무상교육 실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존슨홀에서 행진했다. 버달 총장은 오늘(6월 7일) 학생 수십 명이 참여하는 비공개 면담을 승낙했다.

시카고ㆍ뉴욕 점령자들, 퀘벡 연대행진

시카고를 점령하라는 퀘벡의 무기한 총파업을 지지하는 소란스러운, 하지만 완벽하게 비폭력적인 행진을 진행했다. 엄청난 수의 경찰이 시위대를 뒤쫓아 마치 고양이 쥐 게임처럼 도시 곳곳을 누볐다. 경찰은 전에 미시건과 오하이오에서 시위대를 야만스럽게 공격한 것 처럼 학생들을 길가로 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시카고를 점령하라 활동가에 의하면 여성들이 길 위로 질질 끌려갔고 그 외에 많은 사람들도 경찰의 곤봉에 맞았다. 목표물이었던 것으로 드러난 12명의 핵심 조직자들은 체포됐다.

퀘벡 외에 가장 큰 시위 중 하나는 2000여 명이 행진한 토론토 시위다. 그 밖에도 지난밤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샌프란시스코, 피닉스, 밴쿠버, 자그레브, 시애틀에서 있었다. 뉴욕에서는 10여 명이 체포됐다.

5월 30일 수요일 캐나다에서 첫번째 냄비시위(the Casseroles Night in Canada)가 열렸을 때에는 뉴욕, 토론토, 밴쿠버, 브뤼셀, 부에노스아이레스, 베를린, 런던 등지에서 연대시위가 열렸다. 미국에서는 워싱턴, 워싱턴D.C., 아틀란타, 오클랜드, 덴버, 리틀록에서 연대 행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