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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직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자들은 흔히 알려진 대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뉘어있던 상태였다. 1917년 당시 혁명의 과제에 대한 이들의 입장 차이는 현실에서 당시 정부와 갈등을 빚던 자유주의자들, 자본가들에 대한 입장 차이로 드러났다. 아래의 두 호소문은 이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멘셰비키가 관여하고 있던 전쟁산업위원회 산하 노동위원회는 1월 24일
[구력] 차르의 전제정과 부르주아지의 갈등이 노동계급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전개할 것이라며 두마[의회]를 지지하는 행동에 나설 것을 노동자들에게 호소한다. 노동계급 대중의 지지가 없다면 아무런 힘도 없을 의회를 위해서 말이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위원회
[혁명 당시 러시아 수도의 지명은 '페트로그라드'였다. 원래 이에 맞춰 통일해 표기했으나, 볼셰비키가 원래의 지명을 고수한 것에 맞춰 '페테르스부르크 위원회'로 다시 수정한다. 멘셰비키의 성명서는 '페트로그라드'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에 맞서 부르주아지와 손잡아선 안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들은 두마에서 쫓겨난 사회주의자 의원들을 상기시키며 일일파업을 호소한다. 물론 이들의 파업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실패한다. 가장 큰 이유는 파업을 벌이자고 한 날이 공휴일이라는 것이었다.

분명 파업과 혁명 초기 멘셰비키의 역할과 활약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가진 약점은 결국 3월 이후 부르주아지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제 손으로 넘겨주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래 글은 존 리델이 편집해 그의 블로그(링크)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 Workerㆍ링크)에 연재하는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시리즈 3편과 4편을 옮긴 것이다. 본문의 대괄호 안의 내용과 글 아래 붙인 주석은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추가한 것이다.


+ + +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 대한 호소한다
전쟁산업위원회 노동위원회ㆍ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3편ㆍ링크

전제정부가 나라를 숨막히게 만들고 있다. 제정의 정책은 이미 심각하기 그지없는 전쟁의 참화를 더 악화시켜,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계급에 자신들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전쟁의 희생자들이 수없이 많은 상황에 정부의 이기적 행동은 그 희생을 더 크게 만들고 있다.

몇 번이나 식량공급 위기를 불러온 정부는 이에 아랑곳 없이 줄곧 나라를 기아와 폐허로 몰아넣고 있다. 전시상황을 핑계로 노동계급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 공장에 묶인 노동자들은 공장의 노예나 마찬가지다. 이 지배 체제는 전쟁에서 제대로된 전략을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이를 러시아의 여러 인민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더 강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인민 스스로가 아닌 현재의 전제 권력에 의해 전쟁이 끝난다면, 전쟁이 멈춘다 하더라도 지친 나라 전체가 갈구해온 평화는 인민을 재앙의 참화에서 구해낼 수 없을 것이다.

즉, 전제정은 전쟁을 끝내도 인민을 새로운 쇠사슬로 구속하려 할 것이다. 종전은 인민에게 해방 대신 새로운, 심지어 더 공포스러운 재난을 가져올 것이다. 정치적 권리 없이 손발이 묶인 인민, 특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부의] 독단과 실업ㆍ기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높은 물가와 실업은 정부의 폭정과 함께 노동계급을 빈곤과 노예상태에 빠지게 할 것이다.

노동계급과 민주 세력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하루하루가 시급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긴급히 제기되는 현재의 과제는 전제 정부를 단호히 제거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계급과 민주 세력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이 진행됨에 따라 부유한 부르주아 집단과 관료들 사이의 대립이 노동계급의 적극적 개입에 유리한 상태를 만든다는 게 분명해질 것이다. 인민의 운동은 전제정에 결정타를 날릴 날을 앞당기는데 두마(의회)와 정부의 대립을 이용할 수 있다.

우리 000의 노동자들은 결의한다. 지금 당장 우리의 힘을 하나의 조직으로 모아 단결해 공장위원회를 선출하자. 다른 작업장과 공장의 동지들과 뜻을 모으자. 곳곳의 집회에서 지금 이 순간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자. 그리고 우리의 결의를 다른 공장들에 알리자.

우리는 두마가 소집됐을 때 이를 조직된 대중적 힘이 전면적으로 이끌 수 있게끔 준비해야 한다.

두마 소집 전,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공장과 모든 지역의 노동자들이 노동계급과 민주 세력의 주요 요구를 들고 (두마가 열리는) 타우리드궁으로 행진하자.

나라 전체와 병사들이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투쟁을 통해 조직된 인민의 지지에 기댄 임시정부 만이 나라를 막다른 길과 치명적 붕괴로부터 구해내고, 정치적 자유를 강화하고, 러시아와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 +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위원회ㆍ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4편ㆍ링크

동지들! 지배계급은 유럽 인민의 목에 씌운 올가미를 더욱 옥죄고 있다. 수백 만 명이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젊은이들 중 제일 우수하고 건강한 이들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수백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포로가 돼 고통받았다. 공장이 멈춰선 자리를 빈곤이 대신 채웠다.

학살의 2년 동안 모든 교전국들에서 1500만 명이나 되는 인민이 목숨을 잃은 이 세계의 권력자들은 더 많은 이윤을 얻어왔다. 이건 정말 예전에 볼 수 없던 범죄다! 인민 중 가장 건강한 일부를 대규모의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은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피를 흘려온, 우리 노동자 전위와 탄압받는 민주세력은 위대하고 어려운 임무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범죄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무슨 일을 했는가?

인민을 억압하며 그 운명을 결정해온 지배계급으로부터 지난 2년 반 동안 작게라도 변명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이제 곧 두마의 러시아 노동계급 대표들이 재판에 회부된지 2주년이 된다. 전쟁이 막 시작했을 때 두마는 회기 내내 러시아 경제가 번창할 것이라고 외쳐댔다. 물론 타우리데 궁의 벽 안의 두마는 늑대처럼 탐욕스러운 신사 지주양반들과 자본주의적 공장 소유자들과 은행가들의 자비에 경제를 맡겨놓음으로써 이를 파괴하고 있었다.

우리 대표들이 두마에서 쫓겨나 재판을 받고 멀고 추운 시베리아로 유배돼자 신사 지주양반들과 자본가들은 만족스럽게 악수를 나누며 두마에서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그 후 2년간 두마에선 이들의 권리가 침해된 데 대해선 그 어떤 얘기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 대표들이 추방된지 2주년이 되는 지금도 이에 대해선 침묵만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그들이 배척했던 노동계급 사이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굽실대며 공감할, '동료'가 될 만한 이들을 유인해내려고 한다.

그리해 그들은 두마 자유주의자들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노동자들에게 전파시킬, 전쟁의 폭풍 속에서 눈이 멀어버린 국수주의적 노동자들을 찾아냈다. 2월 14일 두마 소집을 앞둔 지금 노동자들 사이에 두마의 의도에 관한 온갖 풍문이 돌고 있다. 두마가 새로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보기 쉽다. 그렇지만 들고 일어선 노동자들의 벽에 보호받는 동안 두마의 자유주의자들은
[차르 정부에]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두마를 응원해달라고, 심지어 타우리데 궁 앞에서 요구안을 내놓아 단호한 행동에 나서게끔 지지해달라는 호소가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들려온다. 이 호소는 불필요한 것일뿐 아니라 배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차르와 지배계급의 궁전으로 달려가 탄원하는 행동은 이 궁전의 주인들로부터 무언가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인민에게 결국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노동계급 정치인들은 자신이 충분한 화약을 갖고 있지 못했을 땐 기꺼이 인민의 대의명분을 위한 단호한 전사로서 이들 앞에 나선다. 그렇지만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감추게 마련이다. 동지들, 그들이 호소하는 도움은, 당신들을 결국 국가에 굴복하게, 더 나아가 군사적 약탈과 '최후까지' 끝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종사하게 만드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를 직설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진정한 희망이다.

우리의 호소

자유주의자들이 현 정부에 불만을 표할 때조차 그들의 옳아보이는 말들이 뜻하는 바는 비밀스럽게 미래 정부의 자리들을
[자기들끼리] 나누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이 단결한 인민의 지지에 기대 권력 장악이나 '임시정부'에 대해 단호하게 말할 때조차, 그들은 전쟁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직 강력한 민주적 힘 만이 인민의 고통과 시련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온 힘을 기울여 당신이 시작한 전쟁과 당신에 반대할 것이다. 군주제의 권능
[홀]은 당신의 탐욕과 뒷거래를 감춰준다. 바로 그 이유로 당신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차르의 군주제에 우리는 반대한다. 우리는 차르 정부에도 반대한다. 당신은 자신도 그에 맞서 투쟁하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정부의 패배를 두려워 한다. 오직 차르 정부 만이 당신이 인민을 희롱하는 것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민이 권력을 잡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우리는 노동자와 빈농의 임시혁명정부를 세울 것이다. 이 임시혁명정부는 보통ㆍ평등ㆍ직접ㆍ비밀투표로 선출된 제헌의회의 소집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 인민을 분열시켜 깊은 상처를 입힌 탐욕에 가득찬 자본가들의 국수주의적 범죄행위에 반대한다. 우리는 인민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전 세계 노동자들의 연대를 건설할 것이다.

2월 10일은 우리의 대표자들이 차르의 법정에서 탄핵당한 날이다. 우리의 투쟁과 구호에 강력한 힘을 심어준 그들을 우리는 경애한다. 우리의 대표자들을 즉시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우리는 이 날을 일일파업으로 기념할 것이다. 이 파업은 우리의 쫓겨난 대표자들이 공개적으로 선포한 요구를 위한 투쟁에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내걸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차르 군주제를 철폐하자! 전쟁에 맞선 전쟁을! 임시혁명정부 만세! 제헌의회 만세! 민주공화국 만세! 국제 사회주의 만세!

1905년 1월 9일,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의 겨울궁전 앞 학살과 이후 전국을 뒤흔든 1년여간의 사건을 빼놓고 1917년의 혁명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당장 아래 소개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지구연합위원회의 1월 22일 시위 호소문만 해도 그렇다. 1917년 1월 러시아 노동자들은 3년째 계속되고 있는 세계대전의 핏빛 행진에 지쳐있었고 하루하루 더해가는 슬픔에 분노의 도화선은 짧아져만 가고 있었다. 1917년의 노동계급 활동가들은 현재의 비극을 1905년의 비극과 겹쳐 회상한다. 전쟁에서의 잇따른 패배와 노동계급의 희생, 이와 대비되는 지배계급의 호의호식과 귀족ㆍ관료집단의 무능은 1905년에도 마찬가지였다. 1904년 2월 시작된 러일전쟁은 러시아 지배계급이 허우대만 멀쩡한 종이 호랑이임을 세계의 여러 경쟁국과 국경 안의 신민들에게 알려줬다.

●1905년 1월, 노동계급 반란을 조직한 경찰의 첩자

12년 전의 반란이 전쟁의 비극 만을 기억나게 한 것은 아니었다. 1905년 혁명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힘과 정치적 독립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당시까지,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주의의 '정통 교의'는 이랬다.

"사회주의 혁명은 강력한 프롤레타리아만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서만 강력해질 수 있다. 러시아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의 승리에 의해서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
-'볼셰비키 혁명사', E. H. 카, 이지원 옮김, 도서출판 禾多, 67쪽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부진한 발전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모두에게 천형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전의 운명은 러시아도 비켜갈 수 없었다. 그에 따른 노동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성장도 그랬다. 1903년 오데사에서는 러시아 최초의 노동계급 총파업이 벌어진다. 이 파업은 러시아 남부를 휩쓸고 코카서스에까지 확산된다. 제정 러시아의 관료, 특히 저항운동을 최일선에서 마주하던 경찰은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1886년부터 비밀경찰(오크라나)의 첩자로 활동하던 주바토프는 이 운동을 관리할 필요성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그는 1901년 '모스크바 기계공업 노동자 상조회'를 건설해 노동운동 내에서 급진파를 배제하고 합법적인 틀 내에서 운동을 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의 성장이 경찰의 계획과도 일치할 수는 없었다.

레닌은 "장기적으로 노동계급 운동의 합법화는 우리들의 이익이 될 뿐 주바토프 무리의 이익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대부분의 사회민주당원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2차 당대회의 마짐가 회의에서 그들은 가능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비록 '경찰 노동조합'에 따른 노동조합에라도 가입해서 노동자들을 깨우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던 것이다.
-'러시아혁명사', 김학준, 389쪽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1903년 총파업은 주바토프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주바토프 본인과 그의 하수인들은 정부에서 질책을 받고 고향으로 쫓겨나는 처지가 된다. 주바토프는 1903년 8월 해임된다.

그러나 결정적 그림은 1905년 1월 9일 그려진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가퐁 신부였다. 주바토프에게 스스로 찾아가 첩자로서 주바토프 운동을 펼치겠다고 제안한 그는 1904년 '러시아 공장 노동자들의 조합'을 세운다. 이 모임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꾀나 인기를 끌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조합원 1만1000명을 모았고 후보 조합원도 8000명이나 됐다. 그러나 이 단체도 주바토프주의 운동의 운명을 벗어날 순 없었다. 푸틸로프 기계공장 노동자들의 불만을 들은 그는 몇 가지 온건한 요구안을 기업주에게 제출하게 한다. 기업주는 이를 주도한 노동자 네 명을 해고하는 것으로 답했다. 곧 상황은 가퐁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1만2000명 규모의 푸틸로프 기계공장 노동자들은 해고된 네 명의 동료를 지켜내기 위해 1월 3일부터 파업에 들어간다. 이 파업은 1월 7일 페테르스부르크 전역으로 확산돼 8만2000명이 참여한다. 다음날인 1월 8일에는 10만~15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노동자들은 가퐁에게 그들을 차르의 겨울궁전 앞으로 이끌어줄 것을 요구한다. '존경하는 아버지 차르'에게 데려가 그들의 '온건한' 요구를 청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1월 9일 오전, 20만명이 겨울궁전을 향해 행진을 시작한다. 가퐁은 급진파의 개입을 막기 위해 대열을 수색해 강경파를 솎아내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의 개입을 막을 순 없었다. 이날 차르에게 요구할 청원은 사회주의자(주로 멘셰비키)의 개입으로 △8시간 노동 △노동자 집회의 자유 △농민에게 토지 분배 △언론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러일전쟁의 종식 △제헌의회 소집이 포함돼 있었다. 사회주의자의 개입보다 사건을 더 키운 건 차르의 대응이었다. 노동자들의 '겸손한 청원'을 받아달라는 가퐁 신부의 전날 편지에도 차르는 노동자 행진을 피해 황실 휴양지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겨울궁전을 지키던 제정 러시아의 경찰기구는 이 행진을 총탄으로 진압해 행진은 결국 혁명으로 진화한다.

●혁명의 교훈과 1917년의 사회주의자

1905년 혁명은 헌법과 두마(제정 러시아의 의회)를 만들어냈지만 이 성과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E. H. 카는 이 성과가 부르주아적인 것이었지만 "부르주아는 혁명을 일으킬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일으킨 혁명의 성과를 지킬 능력조차 없었기 때문에 1905년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1908년경에는 그 성과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고 그 결과를 설명한다.['볼셰비키 혁명사' 66쪽]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1905년의 운동을 통해 혁명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게 된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가졌던 '교의'를 현실에 맞게 수정해 러시아에 적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물론 이 교훈을 모두가 똑같이 받은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구분하는 멘셰비키의 '교의'는 이 혁명에도 영향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들 '교의'의 핵심은 "사회주의 혁명을 직접 준비하는 정책을 모두 배제시키고 이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단지 부르주아의 보조적인 동맹군으로서만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사' 67쪽]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사이 홀로 남아있던 트로츠키는 달랐다. 그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허약함 때문에 부르주아가 혁명적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았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혁명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경우, 권력은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넘어갈 것"이며 "일단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는 끝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1905년 혁명에서 교훈을 이끌어낸다.
['연속혁명, 평가와 전망' 104쪽, 118쪽]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부르주아 혁명에서조차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의 이상을 향해 독립적으로 행동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보통 알려진 것과 다르게 레닌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은 교훈을 이끌어낸다. 레닌은 1905년 9월에 쓴 글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해 혁명에서 승리한 후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쓴다.

"지배계급으로 올라선 프롤레타리아트와 [토지를 분배받음으로써] 부르주아가 된 농민 사이의 계급적 대결은 피할 수 없다. 이 투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며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혁명을 통해 지주에게 압수한] 땅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우리는 소위 '사회주의적'으로 평등한 분배를 약속해서도, 이 질문에 어물쩍 넘어가서도 안된다. 이 질문은 결국 우리가 후에 싸워야 할, 그리고 다시 새로운 전장에서 동맹[농민]과 다툴 내용이다. 지배계급이 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 노동계급과 함께 우리는 부르주아 농민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이는 -거대한 부가 농노제와 봉건제의 노예상태에 기반해있고 큰 규모의 사회적 생산을 위한 물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땅이 쁘띠 부르주아계급 농민의 소유가 됐을 때 실제로 벌어질 것이다. 이는 곧 국유화 또는 막대한 자본주의적 부가 노동자들의 연합의 소유를 이뤄냈을 때, 즉 우리의 힘과 계급의식적이고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민주주의 혁명이 완벽히 승리했을 때, 이 승리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개시해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연속된 혁명의 길에 설 것이다. 우리는 중간에 멈춰서지 않을 것이다."
-'Lenin Collected Works', 9권 pp.236~237ㆍ링크(강조는 옮긴이)

망명해있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구분이 명확치 않던 페테르스부르크의 노동자 호소문에서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볼 수 있다. '민주주의 혁명'을 바라지만 부르주아 혁명의 틀에 갇히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계급의 피를 이용한 것을 폭로하고, 이 부르주아들과 협력을 결코 숨기지 않는 '민주주의 옹호자'들에 대해 비판한다.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강조한 이 호소문이 배포된 날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 15만 명이 파업에 12년 전 '피의 일요일'을 기억하려 파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50여일 후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시 혁명으로 발전한다.

※아래 글은 존 리델이 편집해 그의 블로그(링크)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 Workerㆍ링크)’에 연재하는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시리즈 2편이다.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전쟁 당시 '페테르스부르크'로 불렸다.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로, 1924년 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불리다 소련 해체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라 부르게 된다. 본문의 대괄호 안의 내용과 글 아래 붙인 주석은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추가한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지구연합위원회 1917년 1월ㆍ링크

노동자 동지들이여! 부르주아지와 귀족들의 정부가 이 끔찍한 전쟁을 시작한 후로 슬픔으로 가득찬 날인 1월 9일이 벌써 세 번째를 맞고 있다. 전쟁은 3년째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수 백만 명의 노동인민을 전선으로 보냈다. 노동인민은 머나먼 전장의 참혹한 참호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고 있다. 그들은 자신만큼 아무 잘못이 없는 노동 형제들과의 핏빛 교전에서 배고품과 추위에 시달리다 죽어가고 있다.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이 끝없는 전투속에 잔혹하게 살육당하고, 폭파되고, 다른 이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건 왜인가. 유럽 남성의 절반이 상처입고, 불구가 되고, 말살당한
[이 전쟁의] 목표는 무엇인가. 부르주아지의 하수인인 언론이 우리에게 마구잡이로 떠들기로는 전쟁은 법과 정의, 모든 인민의 평등과 형제애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 목표를 위해 수 백만 인민이 다른 이들을 살육하고 고문했으며 죄없는 인간의 피가 흘러넘친 것이다.

동지들이여! 그들은 진실을 거짓으로 덮으려 하고 있다. 거짓말, 법과는 다른 말들, 도덕과 정의가 곳곳에서 수 백만 명의 살인을 감추는 데 동원되고 있다느 건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다. 우리의 '주군'과 귀족들, 은행가들과 기업가들은 더러운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거짓말에 의존해왔다. 그들의 힘은 속임수에 기대고 있다. 지배 계급은 인민의 무지와 분열 위에 그들의 힘과 부를 쌓고 있다.

바로 그 무지함 때문에, 1905년 1월 9일 겨울궁전 앞에서 군복을 입고 군율에 주눅든 우리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킨 프롤레타리아트를 향해 발포해 그들의 힘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로 그 불운한 광장을 채운 것이다. 정부는 총검과 채찍, 총탄으로 1905년과 1906년의 첫 번째 러시아혁명을 진압했다. "탄약을 아끼지 말라"고 트레포프
[1]는 명령했다. 그렇다면 누가 총검과 총탄으로 우리의 동지들을 상처입히고 살해할 것인가. 그것은 의식을 깨치지 못한 노동자와 빈농의 총검과 총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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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의 위대한 혁명에서 정부와 부르주아지는 작은 대가만 치르고 승리할 수 있었다. 단 몇 천 명의 노동자가 비명에 생을 마쳤고 몇 백 명의 군인이 살해당했을 뿐이다. 이 군인들 또한 노동자였고 빈농이었다. 동지들, 모든 전제정부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노동계급의 조직화를 가로막는 것을 통해 권력을 지킬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12년간 경험을 쌓아왔다. 부르주아지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기만할 수 없다! 부르주아 언론이 광적으로 떠들어대는 대로 법과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 산업의 부흥'을 위해 전선에서 죽어간 우리의 가까운 친척과 소중한 친구들과 후방에서 슬픔에 잠겨 우는 어머니와 아내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병사 동지들! 부르주아지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당신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들은 살육의 축제를 더 확산시키기 위해 당신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러시아는 너무 좁다. 콘스탄티노플ㆍ보스포루스ㆍ다르다넬스를 그들에게 주라. 모든 교전국의 부르주아지는 이처럼 아귀 같은 탐욕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방위주의자는 없다. 그들은 이제 모두 침략자일 뿐이다.

각 나라의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의 저항을 약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애국자가 돼 조국을 방어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정말로 조국을 방어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쟁을 일으킨 도적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려 한다. 이들 살인자 패거리는 애국주의를 호소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반역의 대열을 분쇄하려 한다. 부르주아지와 그 하수인 언론들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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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산업위원회[2]의 노동자 그룹 회원 중 우리의 계급적 자의식을 잊은 배신자들은 부르주아지와의 단결을 주장한다. 그들은 서서히, 하지만 결정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신념을 잃고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뒤를 따라 이익을 얻기 위한 모든 일을 고분고분하게 반복한다. 그들을 위해 고언한다. "이제 손 떼!"

전쟁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시민의 평화에 대해 말했었다.

전쟁산업위원회 중앙위의 노동자 대표들은 지금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왜곡하고 있다. 그들은 정부와의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도와 '대규모 정치적 행동'을 수행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리보프 대공
[3]과 밀류코프[4]가 이끄는 부르주아지는 정치 체제 전반에 맞서는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콘스탄티노플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얻어내야 할 정복전쟁을 [정부가] 승리로 이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이들 노동자 대표들은 잊고 있다. 이 대표들은 또한 밀류코프가 혁명에 맞서 파산 직전인 피의 군주 부활시키기려 하는 구치코프[5]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잊지 말라 동지여. 우리와 그들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 부르주아지가 정부와 다툰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준다면 이는 혁명을 연기시켜 우리 상황을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지게 할 그들의 정복 야심의 실현을 더 쉽게 할 것이다.

노동자와 빈농, 전쟁으로 오랜 기간 고통받아온 병사들, 바로 우리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우리는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동지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길을 따라 용기있게 나가자.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는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자. 1905년 1월 9일의 현수막에 쓰여진 요구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과제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핏줄처럼 가까운 세계 곳곳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강력한 연합으로 모두의 새로운 삶과 사회주의를 향해 투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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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강력한 당을 만드는 것이다. [러시아]사회민주당의 우리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하나의 사회민주당을 건설할 것을 동지들에게 호소한다. 이를 통해 강력해진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군대를 일으켜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귀족과 관료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병사들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면 썩어빠진 정치 체제 전반을 뒤집어 엎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폐허 위에서 민주공화국은 건설될 수 있다. 동지들이여 분노의 날이 가까워졌다. 이날은 인민 대중에게 폭력을 저질러온 정부를 심판대에 세워 처벌할 날이자 복수의 날이 될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1월 9일, 1905년 배반당해 숨을 거둬야 했던 동지들을 잃은 기억에 슬픔과 비탄으로 가득찬 이날, 우리 계급은 더 단호해져야 한다. 우리는 동지애적 연대의 사슬로 스스로를 더 강하게 묶어낼 것이다. 동지들, 우리는 함께, 강력하게 외칠 것이다. 왕좌 위의 적에게 복수를! 인민의 피와 땀으로 가득찬 노동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차르의 앞잡이와 도살자들에게 파멸을! 인민이 고통에 신음하는 시대에 그들은 잔치를 벌여왔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편과 아들이 죽어가는 동안 아내와 어머니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동지들, 1905년 쓰러져간 이들을 1월 9일 하루 파업으로 기억하자. 전진하라 동지들이여! 전쟁에 맞선 저항 모임과 집회를 열자. 정치탄압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불법상태에 놓인 언론을 위해 모금에 동참하자. 이날,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이 평가받을 것이다. 바로 이날, 우리는 다시 한 번 힘차게, 모두의 뜻을 모아 외칠 것이다.

전제정은 물러가라! 혁명 만세! 임시혁명정부 만세! 전쟁을 끝장내자! 민주공화정 만세!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 만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단결 만세!

주석
[1] 페오도로비치 트레포프ㆍDmitri Feodorovich Trepov는 1916년 11월에서 1917년 1월까지 제정 러시아 정부의 총리를 맡았다. 1905년 1월 12일(구력) 페테르스부르크의 총독으로 임명됐다. 그는 알렉산드르 불리긴의 내각에서 차관에 임명됐다. 1905년 9월 잠시 유화책을 펼쳐 페테르스부르크 대학 내의 학생 모임과 집회를 허락하고 대학 구내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후인 10월 14일(구력) "가장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고… 군대의 활동에 직접 지원을 멈추지 말라… 탄창을 아끼지지 말고 맘껏 사용하라"고 페테르스부르크 경찰에 명령해 학생 반란과 철도 노동자의 파업 진압에 나섰다.
[2] 전쟁산업위원회ㆍthe war industry committees는 제정 러시아가 1915년 4월 폴란드 남부 갈리시아 전선에서 큰 패배를 당한 후 전쟁물자의 보급을 위해 차르가 조직한 위원회.
[3] 게오르기 리보프ㆍGeorgii L'vov 대공은 부유한 지주 출신으로 젬스트보에서 활약했다. 젬스토보는 1864년 설치된 지방자치기관. 전쟁 기간 전국의 젬스트보 연합체인 젬고르 의장이었다. 니콜라이 2세 퇴위 후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각료회의 의장 겸 내무장관에 오른다.
[4] 파벨 밀류코프ㆍ Pavel Milyukov는 러시아 입헌민주당ㆍ카데트의 지도자다. 임시정부에서 외무장관을 맡는다.
[5] 알렉산드르 구치코프ㆍAlexander Guchkov는 기업가 출신의 두마 의원이다. 10월당의 지도자로 전쟁에서의 패배가 분명해지면서 니콜라이 2세 강제로 퇴위시켜 러시아 제정을 지켜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16년 8월 그는 총사령관 알렉세예프에게 편지를 보내 쿠데타를 호소한다. 이 음모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알렉세예프는 3개월 뒤 다시 리보프공과 쿠데타를 모의한다. 구치코프는 임시정부에서 전쟁장관이 된다.

12일 박근혜의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다. 13일엔 정부 각 부처의 새해 업무보고가 이어졌다. 이 자리들에선 새롭진 않지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정책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시 강력하게 천명됐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기업을 위해선 모든 걸 다 내주겠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인민의 삶을 희생해서 말이다. 몇 가지만 간단히 정리해본다.


1. 기업형 임대주택 뉴 스테이(New Stay)

조선일보는 이렇게 요약한다.

"대기업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양도소득세ㆍ법인세 등 각종 세금을 최대 75%까지 깎아주고 택지도 시세보다 20~30% 싸게 제공할 방침이다."
-조선일보 14일자 3면

그동안 LH에서 85㎡ 이하로만 공급하던 임대주택 시장을 민간 건설기업에게까지 열겠다는 것이다. 부동산시장 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건설사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것이다. 굳이 어렵게 분양하려 하지 말고 임대해서 따박따박 월급에서 빼내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심 공공 택지를 최대한 싸게 많이 공급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제 혜택도 대폭 확대한다. 85㎡ 이하 임대주택에 대해선 취득세 감면 비율을 현 25%에서 50%로 확대하고,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비율은 현 20%에서 75%로 확대한다. 돈이 없으면 싼 값에 빌려주기도 한다. 국민주택기금 대출 금리를 현행보다 내리고 임대 기간이 8년을 넘을 경우 매해 0.1%씩 추가로 인하하겠다고 한다. 이 모든 혜택이 임대주택 사업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택 문제로 고통받는 노동계급 인민이 아닌 기업에게 말이다.


2.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예외) 제도

박근혜 정부는 기업의 수익률 제고를 위해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해고를 더 쉽게 만들고 비정규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임금은 깎겠다는 것이다. 기업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겠다는 것.

대표적인 것이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 제도 도입이다. 사무ㆍ연구ㆍ개발직 노동자들에 대해선 근로시간 규제를 없애겠다고 한다. 즉 이들 '화이트칼라'는 정해진 근무시간 이상을 일해도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것. 이들은 이를 '고액 연봉' 화이트칼라에게 적용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중앙일보는 이 정책의 내심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해마다 자동으로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 대신 직무ㆍ성과급 임금체계로 바꾸는 실험을 고액 연봉 화이트칼라부터 해보자는 취지다."
-중앙일보 14일자 5면

공무원 연금 '개혁'이 공무원 연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공공부문 노동자를 대상으로는 기존 2급 이상을 대상으로만 시행되던 성과연봉제를 7년 이상 근속 근무자에게까지 확대하겠다고 한다. 즉 대부분의 공공부문 노동자를 대상으로 성과연봉제를 도입하겠다는 것. 이 뿐 아니라 그동안 줄기차게 추진해왔던 임금피크제 또한 활성화하겠다고 한다.


3. 해외 돈으로 내수 키우기

노동계급 임금을 올려줄 생각이 단 한 톨도 없는 박근혜 정부와 기업들은 경제의 기초체력인 내수를 키우기 위해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겠다고 한다. 조선일보의 표현이니 정부와 기업주들의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올해 정부 정책의 키워드인 공공ㆍ노동ㆍ금융ㆍ교육 등 4대 부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기초 체력인 '내수'가 튼튼해야 하는데, 내수 진작을 위해서는 외국 자금과 손님을 끌어들여야 하는 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과다한 부채로 국내 가계 소비 여력이 제한되고, 기업들의 국내 투자도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국내인과 국내 기업만의 수요로 내수를 키우기는 어렵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조선일보 14일자 4면

그렇다면 해외의 돈은 어떻게 끌어들이겠다는 것인가. 결국은 각종 규제 완화가 그들의 답일 수밖에 없다. 면세점 늘리는 거야 애교다. 이들은 크루즈 운항을 늘리기 위해 마리나를 확대하고 수산자원보호구역 3230㎢를 해제하겠다고 한다. 호텔을 늘리기 위해 부동산투자신탁도 확대하겠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해외 환자 32만 명 유치 목표다. 조선일보는 이를 위해선 현재 경제자유구역에만 설치 가능한 '투자 개방형 의료법인'을 더 확대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뿐 아니라 민간 보험사의 환자 유치 활동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정부는 이런 내용을 포함한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을 국회에 제출해놓은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이 단지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 정책들은 의료 민영화를 확대해 공적 의료를 파괴하고 자연 환경을 해치는 방향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다.


4. "대한민국이 난리 났네 할 정도로 하라"

박근혜는 이 정책들을 강력하게 몰아부칠 계획이다. 실제로 그리할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겠지만 신년 기자회견과 업무보고에서 그의 의중은 충분히 드러냈다.

"오늘 나온 얘기를 그냥 일시에 '대한민국에 난리 났네'라고 할 정도로 해버려야 성장 기반이 마련된다"
-조선일보 14일자 3면

그와 그의 기업인 친구들이 그리 할 수 있을지는 아마 우리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지난 2년여 간 결정적 순간마다 머뭇거리게 만든 건 바로 노동계급 투쟁이었다. 2013년 말 박근혜를 위기 직전까지 몰고갔던 철도노동자 파업이 대표적이었다. 공무원 연금 개혁도 공무원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잠시 멈춰야만 했다(원래 지난해 내에 하겠다고 했었다. 지금 다시 강력하게 추진하려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도 그리 만만치 만은 않다. 현대중공업에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과 민주노총 첫 직선제 위원장으로 가장 투쟁적인 공약을 내세운 한상균씨가 뽑힌 것이 그 예일 것이다.

우리도 박근혜처럼 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난리 났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말이다.


마천루에서의 점심
|찰스 에버트가 1932년 촬영한 사진. 당시 건축 중인 뉴욕 록펠러 센터 69층(지상 260m)에서 철골 구조에 앉아 위태롭게 점심시간을 보내는 노동자들.

아래는 조슈아 B. 프리먼의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 서문이다. 뉴욕주립대학교 퀸스 칼리지 역사학 교수로 '수송 중: 뉴욕 운송 노동조합 1933-1966'을 썼고 '미국을 만든 건 누구인가? 노동 인민과 국민경제, 정치, 문화 그리고 사회' '파렴치한 민주주의: 노동, 지식, 그리고 미국 사회의 재구성'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 의역이 많고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주석은 후주로, 옮긴이가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은 본문 대괄호 안에 담았습니다. 저자가 이탤릭으로 표기한 것은 굵은 글씨로 강조했습니다.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 2차 세계대전 후 뉴욕의 삶과 노동
조슈아 B. 프리먼

서문: 무엇이 뉴욕을 위대하게 만들었나

20세기 중반 뉴욕의 거리를 거니는 방문자는 노동계급이 그곳의 사회적 중추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산한 항구와 도시 심장부의 공업지대, 브루클린ㆍ브롱크스ㆍ맨하탄의 무질서하게 뻗어나간 주거지역, 주기적으로 지역을 마비시키던 파업들, 많은 지지자를 거느린 미국 노동당과 진보당, 국제적 명성을 얻은 뮤지컬과 코메디 스타일, 지역사회 주민들 내에서 통용되는 은어 등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뉴욕 노동계급은 정치 집단, 지역 주민들의 조합, 친목 또는 민족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을 통해 도시의 사회ㆍ경제ㆍ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곳곳에서 기여했다. 지식인ㆍ예술가ㆍ엔터테이너ㆍ상인들이 전유하고 전파한 그들의 문화ㆍ스타일ㆍ세계관 등의 요소는 도시와 국가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조직 양식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뉴욕 노동 대중의 세계시민주의ㆍ열정ㆍ교양은 2차 세계대전 후 권력ㆍ혁신ㆍ현대성의 세계적 중심이 되고자 한 뉴욕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노동자와 그들의 단체들은 자신을 소외시킨 일련의 사건 전개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됐다. 스스로 힘들게 일해온 다수가 뒷전으로 물러나는 사이 1990년대 뉴욕의 행로와 궤적은 시장과 유행의 선구자라는 세계적 도시로서의 위치에 점점 더 이끌렸다.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는 승리와 고립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의 주민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했었지만 미래에는 더 이상 중심적 열할을 하지 못할 단체들이 권력을 얻고 영향력을 잃는 대하소설이기도 하다. 또 이것은 대중과 산업, 권리와 평등을 위한 끈질긴 투쟁, 계속되는 차별과 불평등의 거대한 변동에 관한 이야기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뉴욕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주목할 만한 역사가 그곳에 살았던 이들 계급 외에는 거의 모두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것이다. 전후 뉴욕을 기념하는 방대한 문학작품들-E. B. 화이트, V. S. 프리쳇, 쟌 모리스, 트루먼 카포티, 윌리 모리스 등등-은 전성기에 인구ㆍ경제ㆍ정치ㆍ사회 모든 면에서 뉴욕이 노동계급 도시로 보통 묘사되던 동안 놀라울 정도의 맹목적인 태도로 바로 그 노동자의 존재를 대개 무시한다. 노동자가 이야기에 등장할 때면 이 작가들은 대개 범죄의 온상,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다채로운 배경으로서만 그려진다.
[1] 뉴욕의 기록가들은 너무 자주 그곳에 살고 있는 수백 만명의 노동자, 그 남편과 아내, 아이들, 즉 뉴욕을 경제ㆍ정치ㆍ문화적으로 중요하게 만들고 그곳의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무시한 채 자신과 같은 작가ㆍ예술가ㆍ기업가ㆍ정치인들을 도시와 그 정신의 창조주(the creator)로 간주한다. 그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뉴욕의 노동계급 역사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적게 써왔다.[2]

노동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뉴욕의 과거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도시의 정치ㆍ사회ㆍ경제, 심지어 물질적 발전에서조차 전국적 표준에서 그토록 벗어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뉴욕을 살펴보는 것은 미국 노동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뉴욕 노동계급과 단체는 보통 대량생산 산업과 산업별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ㆍCIO)와 연결돼 있던 남성 중심적 산업노조를 강조한 2차 세계대전 후 노동의 역사에 기초한 묘사에 들어맞지 않는다.
[3] 뉴욕에선 작은 회사와 공방 또는 복합기업[다각기업ㆍ하나의 기업이 여러 종류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의 재벌과 비슷한 형태]에 많은 수의 여성 조합원을 거느린 노조들-흔히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ㆍAFL)과 연결된-이 지배적이었다. 거기에 또 뉴욕에서 노동조합주의는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 회복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2차 세계대전부터 1980년대 사이 나라 전체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이 급격히 떨어졌지만 뉴욕에선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그래서 1990대 뉴욕의 노동조합가입률은 전국의 두 배 이상이었다).[4] 그뿐 아니라 보통 조직된 노동자가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던 것으로 묘사되는 데 반해 뉴욕 노동운동의 힘은 1950년대 초와 1970년대 중반 사이 최고조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노동이 약해지는 동안 뉴욕이 노동조합 중심지로 남은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 노동운동의 특징과 그것의 정치경제적 지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의도적으로 학술적ㆍ정치적 유행을 거스른 것이다. 현대적 담론에서 바로 그 '노동계급'이란 단어는 불쾌한 느낌을 준다. 한 세기 동안 이 단어는 흔히 공업에 관한 어휘에 속했다. 보통 단순하게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총괄해 가리켰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용어를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 그들의 직계가족을 포함해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계급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 요즘 미국인들은 보통 그것을 사람들이 일하는 형태가 아닌 사람들의 소득이나 재산 수준에 따라 정의한다. 때때로 나 역시 중산층 또는 빈곤층이라는 단어와 같은 그러한 범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의 중심 논지는 뉴욕의 노동자들이 많은 경우와 상황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경제에서 그들의 구조적 위치로부터 제약받는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도시에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5]

다른 언급이 없다면 나는 뉴욕을
[펜실베니아주 북부와 온타리오호 사이에 있는 주가 아닌] 엄밀한 의미로 뉴욕시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 전후 뉴욕에 관한 많은 연구는 도시의 어느 부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체로서 대도시권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6] 이 연구는 도시 주민들 매일의 일상을 빚어내는 도시의 단체들과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과 거의 모든 내 성년의 삶을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 동안 뉴욕에서 보냈다.
[이 책이] 어떤 식으로든 회고록인 건 아니지만 나는 종종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삽화처럼 끌어내곤 했다. 대부분의 뉴요커처럼 나는 도시에 대해 큰 긴장감을 느껴 왔다. 그러한 어려움과 무자비함에 끝없이 좌절하면서도 다른 곳에서의 삶은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뉴욕을 지키는 것은 박물관이나 콘서트홀의 고급 문화 때문도, 비할 데 없는 일자리ㆍ식사 기회 또는 뉴요커들이 흥청대며 보내곤 하는 곳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명백하게 너그럽고, 개방적이지만 회의적이고, 이상적이지만 가식 따윈 없는, 폭발적인 열정과 활동에서의 헌신과 같은 노동계급 감수성 때문이다. 이것은 힘든 하루일을 마친 후 저녁 시간과 주말을 노동조합 모임, 친구들 사이의 일, 강연 또는 놀이공원에서 보내온 내 조부모들의 감수성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을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봉양하고, 지방을 전전하며, 그리고 대단친 않지만 자부심을 갖고 정의와 평등의 이름으로 사회 변혁을 모색했다. 지하철과 거리, 공립학교에서 나는 이러한 감수성을 여전히 느끼곤 한다.

노동계급이 영향력을 잃으면서 뉴욕에서 문화는 후퇴했고 공동체는 소원해졌다. 나 또한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때로 돌아갈 가능성을 원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50년 전 다저스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의 원래 연고지는 브루클린이었다. 1958년 현재의 LA로 옮긴다]는 브루클린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겠지만, 뉴요커 대부분에게 50년 전의 삶은 힘든 노동, 불안한 치안, 더 큰 적대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도시와 나라를 만드는 데 오늘날보다 더 위대한 역할을 맡을 가능성에 이 책이 빛을 비추길 바란다. 그들의 노동, 투쟁, 농담, 노래가 뉴욕을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다. 이를 잊는 것은 우리 모두를 약하게 만들 것이다.


[1] E. B. 화이트 『Here Is New York』(뉴욕, 1949, 국역 『여기 뉴욕』), V. S. 프리쳇 『New York Proclaimed』(뉴욕, 1965), 쟌 모리스 『Manhattan'45』(뉴욕, 1987), 안드레아 와이어트 섹스톤과 앨리스 레세스 파워스가 편집한 『The Brooklyn Reader: Thirty Writers Celebrate America's Favorite Borough』(뉴욕, 1994)에 실린 트루먼 카포티의 「A House on the heights」, 윌리 모리스 『New York Days』(보스톤, 1993).

[2] 최근 나온 데브라 베르나르와 레이첼 번스타인의 『Ordinary People, Extraordinary Lives』(뉴욕, 2000)은 예외다.

[3] 예를 들면 데이비드 브로디의 『Workers in Industrial America: Essays on the 20th Century Struggle』(뉴욕, 1980) 5장과 6장, 스티브 프레이저와 게리 게슬이 편집한 『The Rise and Fall of the New Deal Order, 1930-1980』(프린스턴, 1989)에 실린 넬슨 리히텐시타인의 「From Corporatism to Collective Bargaining: Organized Labor and the Eclipse of Social Democracy in the Postwar Era」, 킴 무디의 『An Inujury to All: The Decline of American Unionism』(런던, 1988)을 보라.

[4] 뉴욕과 전국의 노동조합 조합원 수에 관해선 3장과 17장에서 다룬다.

[5] R. 에메트 머레이 『The Lexicon of Labors』(뉴욕 1998) 187쪽. 계급에 관한 문학은 막대하다. 이라 카츠넬슨과 아리스티드 R. 졸버그가 편집한 『Working-Class Formation: Nineteenth-Century Patterns in We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프린스턴, 1986)에 실린 이라 카츠넬슨의 「Working-Class Formation: Constructing Cases and Comparisons」는 이에 관한 유용한 안내를 제공한다.

[6] 특히 이러한 관심은 1950년대 동안 지역개발연합[the Regional Plan AssociationㆍRPAㆍ1922년 설립된 비영리 기구로 뉴욕ㆍ뉴저지ㆍ코네티컷 3개 주 31개 카운티의 경제적 경쟁력과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했다]의 후원을 받은 일련의 연구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요약된 것은 에드가 M. 후버와 레이몬드 버논이 쓴 『Anatomy of a Metropolis』(케임브리지, 1959)에서 볼 수 있다.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상연 옮김|에이도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도시다.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은 거대한 도시공간으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집중시킨다. 대규모로 형성된 노동인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투쟁의 저수지다. 사실 마오와 체게바라의 농민 게릴라 운동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실천이다.

도시는 생산 뿐 아니라 재생산 공간으로서 노동계급의 일상 전체를 조직한다. 가난의 비참은 열악한 도시환경에서 더 비극적이 된다. 오웰이 경험한 밑바닥 생활이 그랬다. 그리고 엥겔스 자신이 오랫동안 천착했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도시의 하층 노동계급 문제는 좌파에게 꽤 오랫동안 핵심적 과제였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노동운동과의 연대가 후퇴하던 자리에 빈민과의 연대를 배치했다. 철거촌에 세워진 골리앗(사실은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비계로 만들어진 앙상한 구조물)에서 학생과 빈민은 건설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조직 폭력배와 맞서 싸웠다. 꼭 90년대만은 아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태는 전쟁 후 성장을 거듭하던 서울이라는 대도시 이면에 빈곤이 축적되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조세희가 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1970년대 한국사회 하층 노동계급의 삶과 분노ㆍ좌절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비가 도시에서의 비정형적 반란에 주목하며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축적이 일어나고 조직되는 공간으로서 도시 자체에 돋보기를 들이밀은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비참과 반란을 자본의 축적과정과 반란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은 다른 좌파에게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곤 하는 '약탈에 의한 축적'은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다. 물론 이 '약탈'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정의를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약탈을 착취와 함께 자본의 두 무기로 고려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약탈'이라는 개념이 참으로 모호하게 정의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약탈'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문제들을 '다양성' 그 자체로 남게 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을 고려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약탈'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비역사적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 부분을 보라.

"도시 전역에 걸친 투쟁이 상징적이고 혁명적 지위를 얻은 1871년 파리 코뮌의 경우는 훨씬 더 복잡한 혁명운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봉기'라고 주장한다(마르크스가 처음에 이렇게 주장했고, 레닌이 한층 더 강조했다). 하지만 파리 코뮌에서는 일터에서 계급적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해방에 대한 욕망만큼이나 도시 자체를 부르주아지의 영유에서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파리 코뮌 당시 처음 발표된 두 가지 포고령이었다. 하나는 빵 공장의 야간노동 철폐이고(노동문제), 또 하나는 임대료 지불정지 명령(도시문제)이었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09쪽

1871년 파리에서의 반란과 혁명을 '노동문제'와 '도시문제'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애초 노동조합 쟁점에만 적용되는, 즉 작업장, 특히 대규모 공장 내에서만 적용되는 쟁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비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노동조합 쟁점으로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코뮌을 돌아보자. 파리코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제정 붕괴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봉기 이전 몇 년 간의 노동계급 투쟁의 상승을 고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정면으로 맞부딛친 첫 경험인 1848년 6월 봉기에서 노동자는 패배했지만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노동계급 투쟁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1860년대 들어서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1862년 나폴레옹 3세의 배려로 런던 만국박람회에 다녀온 노동자 대표단은 귀국 후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1864년 파리 인쇄공 파업은 1789년 대혁명 때 제정돼 노동계급의 단결을 금지해 온 르 샤플리에 법을 사실상 무력화 했다. 1864년 9월에는 인터내셔널이 만들어졌고 1865년 프랑스 지부가 파리에 건설됐다. 프루동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프랑스 인터내셔널 지부들은 1867년 주물공 파업 이후 더 급진화됐다. 파리코뮌 1년 전 1870년에도 노동계급 투쟁의 물결은 계속 고조됐다. 그해 4월 인터내셔널 조합원은 24만명을 넘어섰다. 즉 파리코뮌은 보불전쟁으로 인한 제정의 붕괴와 함께 노동계급 투쟁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모태가 1870년 9월 국방 임시정부 수립 후 인터내셔널이 주도해 건설된 파리 20구 감시위원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명백한 사실이다.

노동계급 투쟁의 이러한 동학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본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에서 비롯한 다양한 갈등은 수시로 불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투쟁이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의 수준에 다다르기까지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이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계급이라서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그 이전 몇년 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4년 2월 보스니아 반란은 투즐라의 다섯 개 기업 민영화에 반기를 든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됐다. 때론 노동계급 외부에서 시작된 사회적 운동이 노동계급을 자극해 투쟁을 더 결정적 국면으로 성장시키기도 한다.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 대표적 사례다 2011년 뉴욕 오큐파이 운동도 이후 시카고 교사 총파업과 월마트 등의 노동자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하비는 반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 도시에서의 지역적 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GM의 플린트 공장 점거 파업, 1984년 영국 탄광 파업 등을 예로 들지만 이는 오히려 정 반대의 사례다. 단호한 노동계급 투쟁이 지역적 차원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직 '공장' 노동자 만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물론 마르크스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여러 좌파가 '공장' 노동자 만을 특권화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파리코뮌 당시 파리 기업들은 오늘날 대규모 공장과 달랐다. 평균 다섯 명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이었을 뿐이다. '아르티클 드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공예품을 만드는 영세 작업장이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이 봉기를 '플로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으로 주장했다. 하비 스스로 예를 들었듯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80년대 후반 공장 외부의 쟁점인 '인두세 반대 투쟁'에 전력을 다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혁명이 오직 공장 안에서의 변혁을 뜻하는 것만도 아니다. 레닌은 사회주의 정치가 공장 외부에서 도입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노동조합 서기가 아닌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 혁명, 1970~1973년 칠레전투에서 노동계급 투쟁은 지역 차원에서의 치안ㆍ행정ㆍ사법ㆍ생필품 보급을 책임지는 데까지 발전했다. 반란과 봉기는 그랬을 때만이 '혁명'의 수준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비가 '도시권'을 강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 도시 노동계급에게 주거는 핵심적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이 문제를 핵심 고리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곤 한다. 1980년대 영국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핵심 고리 중 하나는 공공주택의 개인 소유로의 전환이었다. 하비가 강조하듯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노동계급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교외 주거단지의 개발을 추진했다. 한국에서 대표적 사례는 울산일 것이다. 대규모 아파트 건설, 백화점 등 근린 생활시설의 보급, 이를 통한 부르주아적 문화 헤게모니의 확립은 노동조합을 기업, 또는 지역적 한계로 가둬두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대량 소비는 노동계급을 부채의 허울에 가둬 기업의 테두리 안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매달 갚아야 하는 카드값과 전세 혹은 주택자금 대출 이자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대다수 좌파는 이러한 문제에 기권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1980년 4월 사북 탄좌 노동자들의 반란에 대한 좌파의 상대적 무관심은 이러한 문제점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이 사건은 인용될 때조차 5월 광주항쟁의 전조로만 매우 간단히 다뤄진다).

이러한 도시생활의 문제는 체제의 문제와 별개로 개인적 선택 또는 지역 활동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지곤 한다. 귀농귀촌, 마을 만들기, 사회적 기업 열풍등이 그런 것이다. 하비의 장점은 이러한 운동들과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권'의 문제를 반자본주의적 관점 안에 위치지우고자 노력한다. 소규모 대안 공동체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역적 차원의 거버넌스와 국가적ㆍ지구적 차원의 거버넌스에 적용되는 원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유재를 어떤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공유재를 결정하는 문제 자체가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도시문제를 둘러싼 문제는 노동계급 문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투쟁이 받아 안아야 할 문제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설명한 한계 때문에 그의 서술은 서로 다른 입장에 쉽게 인용될 수 있다. 한겨레 한승동의 서평 기사처럼 말이다. 하비는 서문 말미에 이렇게 쓴다.

"자본주의의 영속적 축적 시스템 자체는 물론 이와 밀접히 결부된 착취계급과 국가권력의 구조를 전복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목표로 가는 길에 있는 중간역과 같다. 설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여도 도시권에 대한 요구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2쪽

이 말은 하비 스스로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제국주의론' 하면 보통 레닌을 떠올린다. 하지만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의 성취는 레닌에 못지 않다. 이정로(본명 백태웅)가 옮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는 당시의 검열 때문에 원작자의 이름이 표기되지 못하고 본문에서도 몇몇 문장을 삭제하고 어떤 표현은 순화시켜 옮겼다. 레닌이 쓴 서문이 빠진 것은 당연하다. 이를 대신해 서문으로 실린 엥겔스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3장조차도 여기저기 '완화'된 표현으로 인쇄돼야만 했다. 우선은 여기 레닌이 쓴 서문을 옮긴다. 이곳저곳 눈쌀 찌푸리게 할 의역과 오역이 많으니 원문을 꼭 참조하길 바란다. 대괄호[]는 옮긴이가 덧붙인 것이고 소괄호()는 원문에 있는 것이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레닌의 서문[1]
원문: N.I. Bukharin: Imperialism and World Economy - Introduction(링크)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 글에서 다룬 주제가 중요하고 시의적절하다는 것에는 다른 어떤 특별한 설명도 불필요하다. 제국주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최근 자본주의의 변화한 형태를 고찰함에 있어서 경제학 영역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경제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 생활의 어떤 본령에 관심을 가진 모두는 이 문제와 연관된 여러 사실들, 가장 최근 구할 수 있는 자료 중에서 필자에 의해 세밀하게 선별된 사실들을 숙지해야만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주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근거로 경제적이고 정치적 측면 모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근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분석 없이 최근 10년 간 경제적이고 외교적인 상황의 이해에 접근하기란 불가능하며 그러한 이해 없이 전쟁에 관한 올바른 판단의 형성을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일 뿐이다. 근대 과학의 요건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외교 '문서'들 또는 일상의 정치적 사건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한 나라의 지배계급에게 유익하고 편리할 뿐인 그와 같은 고립된 사실들로 구성된 방법의 '과학적' 가치와 전쟁에 관한 이러한 일련의 분석들에는 오직 비웃어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예를 들면 이제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플레하노프는 현대에 최고조로 발달한 원숙하고 과숙한 자본주의와 연관된 경제체제로서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특징과 경향을 분석하는 대신 푸리시케비치와 밀류코프의 비위에 맞춘 사소한 사실들에 눈높이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제국주의의 과학적 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러시아 제국주의자 두 명의 당면한 경쟁자, 적수, 반대자를 향해 내뱉어지는 욕설 수준으로 축소됐다. 그들의 계급적 기반이 외국 경쟁자ㆍ반대자들과 전적으로 같음에도 말이다. 잊혀진 단어, 포기된 원칙, 혼란에 빠진 세계에 대한 개념, 버려진 해법과 엄숙한 약속,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 놀랍지 않다.

특히 니콜라이 부하린 작업의 과학적 의의는 분명히 가장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단계로서 제국주의와 전체적으로 연관된 근본 사실을 조사했다는 데 있다. 유럽의 선진국들에서 봉건제를 극복했을 때, 여전히 점령되지 않은 막대한 지역과 아직 최종적으로 자본주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지 않은 나라들로 ‘평화롭게’ 퍼져나가며 비교적 평온하고 조화롭게 발달하는 위치에 있었을 때는 비교적 '평화로운 자본주의' 시대였다. 물론 그 시대에조차, 대략 1871년부터 1914년까지 '평화로운' 자본주의는 군대와 전체 계급이 이해하는 진정한 평화와는 매우 먼 삶의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선진국 거의 대부분의 대중에게, 식민지와 후진국 인민 수억 명에게 이 시대는 '평화'가 아닌 압제와 고문과 공포의, 끝이 없어 보이기에 더 두렵게 보인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는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돌연한 변화와 재앙, 갈등으로 가득찬 비교적 더 충동적인 시대, 그렇지만 힘든 노동에 종사하는 대중에게 더 이상 끝없는 두려움으로만 나타나지 않는, 그러한 공포를 완전히 종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와 일반화 된 상품생산[사회]의 뿌리 깊고 근본적인 경향의 직접적인 발전, 성장, 지속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란 걸 염두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상품교환의 성장, 대량생산의 성장은 전 세계의 나라들에서 관찰되는 근본적인 경향이다. 발달하는 교환의 어떤 단계에서, 성장하는 대량생산의 어떤 단계에서, 다시 말해 대략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될 즈음 도달한 단계에서 상품교환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막대한 규모의 대량생산 증가를 동반하고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하기 시작한 경제관계의 세계화와 자본의 세계화. 나라 안과 국가 간 교역에서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아닌 기업가들의 독점적 동맹, 즉 트러스트가 만연한 형식이 됐다. 특히 유동적이고 신축적인, 특히 국내외적으로 뒤얽힌, 특히 개성이라곤 전혀 없고 직접적인 생산과정과 분리된, 특히 집중되기 쉬운 권력인 금융자본, 이미 집중의 길로 매우 큰 걸음을 성큼 걸어와 문자 그대로 전 세계의 운명을 손에 움켜쥔 억만장자와 백만장자 수백 명의 권력인 금융자본이 세계의 전형적인 지배자가 됐다.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추론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던) 카우츠키가 내렸던 결론, 현재는 자본의 거물들이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로 단결할 시기, 즉 국민적 한계를 지닌 금융자본의 경쟁과 투쟁이 세계적으로 단결한 금융자본으로 대체될 때를 그리 멀리 남겨두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론은 지난 세기의 90년대 '스트루베주의자'들과 '경제주의자'들이 도달한 것과 유사한 결론으로서 추상적이고 단순하며 부정확한 것일 뿐이다. 후자, 자본주의의 혁신적 본질과 불가피성,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로부터 유래한 이들은 어떤 때는 (자본을 숭배하고 자본과 평화조약을 맺고 자본과 싸우는 대신 자본을 찬양하고) 옹호하며, 어떤 때는 비정치적이 되고(즉 정치 또는 정치의 중요성을 거부하고 일반적인 정치적 격변을 부인하는 등 이러한 것들은 '경제주의자'들이 특히 자주 범하는 실수다), 어떤 때는 다름 아닌 '파업'을 설교하기까지 한다(그들에게 '총파업'은 신격화 한 파업운동이다. 그것은 다른 형태의 운동이 잊히거나 무시당할 위치로까지 고양된다. 그것은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목숨을 건 도약이다). 어느 정도 속물적인 자유경쟁의 '낙원'과 비교되는 자본주의의 의심할 여지없는 혁신성과, 세계의 선진국에서 '평화적' 자본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의 피할 수 없는 최종적 승리 또한 수없이 다양한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실수와 불운으로 이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징후가 있다.

특히 카우츠키에 관해 말하자면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절연한 그는 정치를 거부하거나 체념한 것도, 무수하고 다양한 정치적 갈등과 격변, 특히 제국주의 시대 성격의 변화를 대충 건너뛴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의 옹호자가 된 것도 아니다. '평화로운 자본주의'를 꿈꿨을 뿐이다. '평화로운' 자본주의는 평화적이지 않은, 군사적이고 파멸적인 제국주의로 대체됐다. 카우츠키는 이것이 지나간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미 1909년 발표한 특별한 책
[2]에서 결론처럼 이끌어내며 동의한 것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제국주의에서 '평화로운' 자본주의로 되돌아간다는 꿈이 불가능하다면, 본질적으로 프티부르주아인 이들이 '평화로운' 초제국주의에 대한 순진무구한 기대를 꿈꾸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초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불편하고 가장 불안정하며 가장 혐오스러운, 그렇기에 프티부르주아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전쟁이나 정치적 격변과 같은 갈등을 없애 민족적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경으로 나뉜) 제국주의의 국제적 단결을 쟁취할 수 있다면, 모든 종류의 갈등과 재앙으로 가득찬 그 맨얼굴을 백일하에 드러낸 이미 도래한 현 제국주의 시대를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 비교적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갈등이 덜하며 재앙이 없는 초제국주의의 순진한 꿈으로 돌아가 보자. 현재 유럽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제기되는 '까다로운' 목표도 한쪽으로 제쳐둬 보자. 아마 이제 곧 지나가버릴 이 시대를 헛되이 보내기보다 그 뒤를 이어 곧 도래할 '과격한 목표' 따윈 필요하지 않은 비교적 '평화로운' 초제국주의 시대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직접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그와 같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초제국주의) 단계는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우리는 아직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이다.(신시대ㆍNeue Zeit, 144쪽, 1915년 4월 30일)[3]

현존하는 제국주의를 회피하려거나 '초제국주의' 시대라는 몽상에 빠져드는 이러한 경향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요소가 조금도 없다. 이러한 이론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지금 자본주의의 현 단계를 고려하면 이 이론은 실현 가능성의 측면에서 그 이론의 창안자 자신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모순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프티부르주아적이고 매우 반동적인 경향을 제안한다. 카우츠키는 다가오는 불안과 파국의 시대, 1909년 목전의 전쟁에 관해 글을 쓰면서 예견했고 분명히 인정해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할 것 같이 보였던 때가 있다. 그 시대가 도래한 것이 절대적으로 명백해진 지금 카우츠키는 다시 다가올, 하지만 언제 도래할 지 알수 없는 초제국주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할 것을 단지 약속할 뿐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조건, 지금 이 순간에서가 아니라 언젠가 다른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하겠다는 몇몇 약속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내일을 위한 미래의 외상 마르크스주의를 얻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약속으로서 연기됐다. 우리는 오늘날 모순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현재의 프티부르주아 기회주의적 이론-이론만 그런 것은 아니다-을 얻었다. 그것은 모국과 동맹국들을 제외한 어떤 나라, 즉 적국에 한해서라면 모든 국제주의적 표현에 공감하며, 그들 동맹국들과의 협정이 유지되는 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맹 가입자격이 있는 나라가 복속시킨 나라가 아닌 곳에서만 '민족자결권'에 동의하는 우리 시대의 열정적인, 더 이상 열정적일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국제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만연한 수출을 위한 국제주의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시대 만연한 수천 가지 위선 중 하나다.

그렇다면 추상적으로 제국주의의 뒤를 이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다시 말해 초제국주의 단계의 '가능성'도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니다. 추상적으로 그와 같은 단계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연한 미래의 목표를 핑계로 과격한 오늘날의 목표를 거부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이론적으로 그것은 자신을 현재의 실제 삶에서 전개되는 사태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자신을 꿈을 핑계로 그것으로부터 분리시켰음을 의미한다. 모든 기업과 국가를 예외 없이 집어 삼킨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가 도래하고, 개별 나라의 금융자본이 '초제국주의' 세계 연맹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앞에 언급한 압력ㆍ속도ㆍ모순ㆍ갈등ㆍ격변-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것들에서 또한-하에서 전개될 것이고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르러 그 반대물로 전화할 것이다.

1915년 12월

각주
1_ 이 서문은 원래 레닌의 익명인 'V. Ilyin' 서명으로 작성됐다[marxists.org 편집자].
2_ 카우츠키의 팜플렛 '권력으로 가는 길(Der Weg zur Macht)'.
3_ 이 구절은 카우츠키의 논문 '다시 사고하기 위한 두 단계(Zwei Schritte zum Umlernen, 신시대ㆍNeue Zeit 5호, 1915년)에서 가져온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


[사진 Revolution News]

급한 불은 끄게 된 것일까. 우크라이나에서 정부와 여야의 타협안 소식이 들려온다.

●[연합뉴스] 우크라 정부-야권 유혈사태 해법 담은 타협안 서명(종합2보)

요지는 조기 대선 실시와 대통령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헌법 개정이다. 현재 운동의 초점이 야누코비치 대통령 퇴진에 맞춰졌던 걸 고려하면 지금의 유혈사태를 진정시킬 어떤 돌파구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운동의 별명이 '유로마이단'이라는 걸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생디칼리스트인 키예프의 한 노동조합 활동가에 의하면 시위 초기 거리에 나선 우크라이나 인민에게 유럽은 "부패 없는 사회, 높은 임금, 사회적 안전, 법에 의한 지배, 정직한 정치인들, 미소 짓는 얼굴, 깨끗한 거리 등"을 뜻했다. 여기에는 단지 대통령의 과도한 권력, 정치적 지배구조의 문제만 포함돼 있지 않다. '높은 임금'이 상징하듯 여기엔 우크라이나 경제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지난해 유럽연합과의 협력협정을 추진했던 것도, 그리고 시위를 촉발시킨 그 협정의 중단도 모두 경제적인 배경에 놓여 있다(거기에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갈등으로 연결됐다).

실제로 마이단에서 목숨을 걸 각오를 서슴지 않고 말하던 한 사람, 아마도 파시스트일 가능성이 큰 무장 사수대 한 명은 "저는 10년 전 떠나 상선의 선원이 됐습니다. 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되돌아와 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서 투쟁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연합뉴스에 보도된 합의안에는 바로 이 문제, 우크라이나의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 청년들의 경제적 삶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이는 상대적으로 시위가 격화되면서 거리에서의 물리적 충돌 자체가 쟁점이 된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타협안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이 합의에는 스보보다(자유)도 포함돼 있다. 극우 파시스트인 이들은 합법정당이지만 불법적인 준군사 조직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18일 유혈 참극의 두 주범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야누코비치 정부다). 거리에서 무장하고 일정 지역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던 이들 파시스트를 새로 구성된 정부에서 완전히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저들은 합법적으로 어떤 권력을 공유하게 되면 더 기고만장해져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마치 1930년대 독일 나치처럼 말이다.

유럽연합과 러시아 정부로서는 우크라이나에서의 갈등이 자신들이 바랐던 것 이상으로 격화되는 데 놀랐던 듯싶다. 속보에 의하면 이번 타협에 이 둘 모두 참여했다고 한다. 그것은 중요한 석유와 가스 송유관이 지나고 흑해 북안의 중요 산업지대인 우크라이나가 내전으로 갈라지거나 파괴되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유럽연합과 러시아 정부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조지아에서처럼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이유로 군사적 개입을 감행할 가능성이 크다. 유럽연합도 과거 발칸 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바로 옆 소치에서 열리는 겨울올림픽을 핑계로 흑해에서 군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에 당장 맞서는 것은 유럽연합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로서도 현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 러시아를 비교하는 것은 물론 중국과도 자신을 비교하며 상황을 재고 있는, 즉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세력의 규모나 역할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군사적 개입이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더 큰 국내적ㆍ국외적 충돌을 준비할 여유 시간을 갖는 것, 아마도 이번 타협의 첫번째 가능성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도 파시스트의 활보와 권력 강화라는 끔찍한 것 뿐이다.

그러나 아직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다. 키예프 시내에서의 격렬한 물리적 충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노동계급은 아직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지 않다. 생디칼리스트 활동가의 지적처럼 키예프를 벗어난 "다른 지역에서 기업 활동이 아무런 방해 없이 평상시처럼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노동조합연맹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임금과 관련된 소수 작업장에서의 저항도 "정치적 저항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러한 사정이 거리에서의 충돌을 격화시키고 시위대에서 파시스트의 주도력을 강화시킨 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적은 가능성이지만 노동계급의 단결된, 그리고 유럽연합과 러시아 둘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파시스트와 정부로부터 자유로운 행동 만이 우크라이나를 구할 것이다. 이는 최근 혁명을 시작한 보스니아 인민이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다. 불과 20여년 전, 민족ㆍ종교 간 참혹한 내전을 치뤘던 보스니아 인민은 노동계급 투쟁을 통해 민족과 국가ㆍ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어 단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활동가들이 이로부터 보다 큰 영감을 얻어 과감한 행동에 나설 수 있길 바란다.

Posted by 때때로


영화 '명왕성'.

※아래 글에는 영화 '명왕성' '더 테러 라이브' '설국열차'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우승열패(優勝劣敗)'는 우리 시대 유일한 도덕률이다. 그렇다고 말해진다. 보다 나은 능력과 자원을 지닌 자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사회가 나뉘어지는 것은 당연하게 치부된다. 승자독식은 우승열패 사회의 당연한 결과다. 믿을 것은 자신의 몸뚱이 뿐인 노동자는 "겁에 질려 주춤주춤" 자본가의 작업장으로 걸어들어간다. 탈출구는 교육이다. 물론 자신은 탈출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식만이라도 다른 삶을 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교육은 상층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이 되어 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회의 동아줄은 많지 않았고 그럴 수록 동아줄을 잡기 위한 노동계급 자녀들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민주화 이전 사교육이 금지됐다. 하지만 이는 법의 단속을 피할 수 있고 금지로 인해 높아진 비용을 감당할 여지가 있는 상층 계급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화 이후 치열한 대입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대학 입학정원을 크게 늘렸으나 이는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 이제 대학은 모두가 당연히 가야할 곳 취급 받았다. 국내의 명문대를 넘어 해외의 유명 대학ㆍ대학원으로 쌓아야할 스펙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치뤄야 할 경쟁의 폭은 더 넓어졌다.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현실, 그리고 상층 계급으로의 이동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교육에서 경쟁을 제거하기 어렵게 만든다.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잡아먹어야만 했던 '설국열차'의 꼬리칸은 동료를 토끼사냥하는 영화 '명왕성'의 교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최근 잇따라 개봉한 '명왕성' '더 테러 라이브' '설국열차'는 각자 다른 방향에서 이 '꼬리칸'의 문제를 다룬다. 물론 그 태도는 영화마다 다르다. 특정한 주제의식보다는 상황의 긴박함에서 오는 긴장감을 목적으로 소재가 다뤄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될 수 없다. 단지 영화들에서 떠올릴 수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풀어 재구성해볼 뿐이다. 아래는 이 세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명왕성의 김준

영화 '명왕성'은 이러한 교육이 만들어내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서울 강북의 한 학교에서 꽤나 그럴듯한 성적을 올리던 한 학생은 명문고로 전학을 간다. 자신의 자그마한 세계에서 승자였을 그 학생, 김준은 자신이 원했던 더 높은 자리에서 자신의 위치가 이전과 다름을 알게 된다. 이미 한 번 더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데 성공한 그에게 계급 상승의 욕망은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비밀에 쌓여있는 '오답노트'를 얻기 위한 욕망은 자신의 동료를 배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뛰어넘기 힘든 계급의 장벽이 존재함을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는 1%의 학생들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일회용 도구에 불과했다. 교육을 통한 계급 이동은 기만이었다. 상층 계급의 동료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과 그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한다. 청소년 자살률이 계속해서 높아져왔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이기도 하다(2010년 기준 10~24세 인구 10만명 당 자살자 수는 9.4명으로 OECD 평균 6.5명을 큰 폭으로 상회한다). 영화 '명왕성'에서 이다윗이 열연한 김준의 이야기다.

김준이 만약 자폭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했다면 그의 세계는 아버지의 세계와 달라졌을까. 우리는 아주 높은 확률로 그가 경험할 사회가 학교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거대하게 가로막은 계급 장벽은 우리의 삶을 끊임 없이 좌절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김준이 자폭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수 있다. 이다윗이라는 배우가 두 영화 모두에서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역할로 나온 것은 우연하게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더 테러 라이브의 박노신

'더 테러 라이브'에서 박노규는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 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 야근수당 2만5000원을 더 받기 위해 마포대교 난간에 메달렸던 그는 한강의 어두운 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세계의 지배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위해 강행된 공사였다. 그러나 박노규의 죽음은 세계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세계는 여전히 성공을 위한 아귀다툼으로 가득할 뿐. 그렇게 잊혀져 간다. 경제개발 시절 스러져간 무수히 많은 노동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지만 지금 60~70대일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비루한 삶 뿐이다. 아파트 경비 자리를 얻기 위해, 거리에서 폐휴지를 줍기 위해 자신의 또래들과 경쟁은 계속된다. 하지만 박노신의 아버지 박노규의 이야기는 또한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11년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2114명으로 하루 6명 꼴이다. 박노신이 아버지 박노규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산업 현장에서 스러져가는 노동자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산업재해의 문제는 이 체제가 노동자를 다루는 더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상층 계급으로의 이동을 미끼로 경쟁을 옹호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기계 부속품 이상이 되지 못한다. '명왕성'의 김준이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그의 삶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일부분 이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보여주지 않는 테러범 박노신의 삶이 아마 그러햇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폭탄을 만들 정도로 뛰어났을지라도, 대학 진학 후 더 높은 수준의 폭탄과 격발장치를 제작하고 경찰의 전화추적을 따돌릴 정도로 뛰어난 해킹 실력을 지니게 됐다고 할지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승-전-치킨집이라는 IT노동자와 엔지니어들의 자괴감 가득한 농담을 떠올려보라.

성공한 샐러리맨 윤영화

박노규의 아들 박노신과 성공한 샐러리맨의 상징 윤영화 앵커의 만남은 이러한 계급 장벽이 사회 곳곳을 치밀하게 둘러싸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정우가 연기한 윤영화는 성공의 사다리에서 아주 잠깐 삐끗한 것처럼 보인다. 몇몇 불운이 있었지만 박노신의 테러는 다시 성공 사다리에 올라탈 기회로 보였다. 그는 차대은 국장에게 9시 뉴스 메인 앵커 자리를, 박정민 테러대응팀장에게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은 마치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황을 주도한다는 윤영화의 생각이 잘못됐음은 바로 드러난다. 방송국과 차대은 국장은 오직 시청률에만 관심있었고 청와대와 경찰청은 테러범의 체포와 면책, 즉 정부의 유지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체제에서 그의 명예와 생명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윤영화가 박노신과 공명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다. 이러한 공감은 윤영화가 박노신에게 이어받은 폭탄 스위치를 누르게 만든다. 테러는 모두 끝났다는 정부의 뻔뻔한 발표에 엿먹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기묘하게 이어지는 이 두 영화에서 주인공 모두는 경쟁사회에서 계급 상승을 위한 사다리에 메달리고자 노력했다. 현실의 우리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배 계급의 일회용 도구에 불과했다. 역시 우리 대부분이 그런것처럼. '명왕성'에서 김준은 스터디그룹 '토끼사냥'의 오답노트가 자신을 1%의 승리자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라디오로 밀려난 윤영화는 차대은 국장과 함께 다시 성공의 길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거짓된 희망마져 사라졌을 때 그들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기

이에 반해 영화 '설국열차'는 꽤나 희망찬 이야기를 전해준다. 체제-열차는 살아남은 인류를 관리해야 하는 기계의 일부분으로 다룬다.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이 열차-체제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지 오래고 그 현실은 더 노골적이다. 인간의 존재가 기계의 안녕을 위협할 땐 주저없이 제거된다. 하지만 체제-열차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 인간이었다. 무한정한 시간 동안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영구기관은 없었다. 그것이 폭로된 순간 체제-열차는 폭파되고 땅을 밟아본 적 없는 새 인류가 대지를 밟는다.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서 거대한 폭발에도 불구하고 체제가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설국열차'의 희망에 가득찬 태도는 더 명확해진다. 아직 현실은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 더 가깝다. 안타깝게도 '설국열차'는 판타지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 희망이 체제-열차의 안이 아닌 밖에 있음은 분명하다. 열차에서 내리려면 우리는 우선 이 기관차를 멈춰 세워야만 한다.

협동조합 '가장자리'의 격월간지 '말과활'이 창간됐다. 가장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홍세화 선생이 머리말에서 '민중'이란 말 대신 '인민'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인민이란 말이 우리 언어 생활에 그리 익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은 왜 인민이란 말을 썼을까?

인민은 "국가를 구성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보통은 이와 함께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를 말할 때 사용된다. 비슷한 단어로 '민중'이 있다. 둘 다 특정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지만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은 민중에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ㆍ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인민이란 단어가 남북 분단 상황에서 금기시 된 때문이다. "늘 친하게 어울리거나 함께 노는 사람"을 뜻하는 '동무'란 단어가 분단 이후 잘 쓰이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즉 분단 상황에서 내면화한 반공주의의 영향으로 인민 대신 민중이 쓰이게 된 것이다. 내가 보통 민중 대신 인민을 사용하는 첫 번째 이유는 특정한 정세가 내 언어생활을 제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서다
(북한 정권에 동의하지 않고 북한 인민이 스스로 나서 지배자들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홍세화 선생도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홍 선생의 인민이란 단어의 사용이 반가운 것은 우선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민중 대신 인민을 사용하는 바로 그 이유와 연관된 다른 문제 때문에 홍 선생이 인민을 사용한 데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인민은 피지배 계급 일반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노동자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들이 오직 노동계급의 조건 개선 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피지배 계급 일반의 조건,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배와 피지배의 조건을 결정짓는 핵심 고리에 노동계급이 위치해서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회주의자는 인민 일반의 해방을 목표로 하지만 그 해방에서 노동계급이 핵심적 역할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민중 담론은 그렇지 않다. 이는 한편 위에서 지적한 내면화한 반공주의의 연장선에서 비롯한 것이기는 하다. '노동자'라는 말을 '근로자'가 대체한 사정과 같다. 그렇지만 더 중요하게는 민중 담론이 노동계급의 핵심적 역할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노동자ㆍ농민ㆍ학생의 연대를 강조하는 민중 담론은 이들 세 사회적 집단을 수평적으로만 파악한다. 핵심은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다. 홍세화 선생이 사용한 인민이란 단어가 불길한 것은 그것이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머리말에서 안개에 싸여있던 인민의 의미는 뒤이은 지젝과 이진경의 글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나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이란 개념을 포기할 수 없게끔 할 뿐만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어서 그 개념을 실존적 차원으로까지 급진화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적 주체에 대한 더 급진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 주체는 모든 실체적 내용을 제거한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무상의 지점으로까지 환원되는 주체다. 이런 이유에서 새로운 해방의 정치는 더이상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각기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인 결합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으나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젝은 그것을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유로 들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이전으로 후퇴하는 주장일 뿐이다. 무정형의, 단지 지배받는 집단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로 말이다. 마르크스가 한 작업은 이 프롤레타리아라는 로마 시절로부터 비롯한 개념을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 원리에 입각한 개념으로 바꿔놓는 것이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노동자인 것이다. 노동계급은 여러 사회적 집단 중 억압받고 착취받는, 지배받는 유일한 사회적 집단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지배 사슬의 핵심적 고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목한 것이다. 결국 지젝의 주장은 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진경에 의해 다시 반복된다. 이진경은 지젝보다는 덜 철학적인 언어로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M'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제가 혁명성을 말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이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트였다는 것을 일단 상기해주길 바랍니다. …… 역사적 조건에 따라 누가 무산자인가가 달라지는 거지요. 16세기에는 토지 잃고 부랑하던 농민들이 무산의 프롤레타리아트였다면, 19세기에는 끔찍한 조건에서 노동해야 했던 산업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였던 것이고, 당신(이진경)이 생각하듯이 안정적으로 노동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어버린 지금은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들이 새로이 무산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 거지요."

마르크스가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로 노동계급을 바라봤다는 것은 아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는 '공산당선언'에서 여러 번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의 노동계급(the proletariat, the modern working class)"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마르크스는 당대 자본주의의 발전, 아직은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서 일어나던 변화를 추적해 노동계급이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진경의 주장 대로 노동계급이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게 만드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진경은 마르크스를 사칭할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역사적 조건의 변화를 추적할 능력은 없는 듯하다. 그가 기껏 내세우는 것은 인상주의적 비평에 불과하다.


"지금은 정규직이란 단어와 함께 유사하게 사용되는 '노동자계급'……은 바로 옆에서 똑같은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정규직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게 차단하고, 그들이 옆에서 투쟁할 때 연대는커녕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통상적인 게 되었죠."

정규직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관한 비난에 불과한 것으로 마르크스의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대체할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대중의 상식에 부합하는 듯 보여도 말이다. 불길하게도 홍세화 선생은 이진경에게 동의하는 것 같다. 다시 들춰본 머리말에서 홍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인민도 이제 하나의 인민이 아니고, 노동자도 이미 하나의 노동자가 아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과의 대화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가치가 상승하기를 바라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 가입조차 안 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노동자가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인가, 더구나 이들이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인가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홍세화 선생은 이진경과 공명한다. 물론 우리는 홍 선생 외에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런 주장을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새로운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경향인가? 우리는 마르크스 시절부터 이미 인민이 하나의 인민이 아니었음을, 노동자가 하나의 노동자는 아니었음을 떠올려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영국의 노동자와 그 식민지 아일랜드의 노동자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계급 남성이 어떻게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 내 분열에 대한 인상주의적 비평이 아니다. 그 분열의 물질적 조건을 살피고 단결의 단초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안전판'으로 고려하게 된 조건, 그리고 그것을 벗어날 계기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홍세화 선생과 이진경은 분열만 얘기할 뿐 그 역사적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인상주의적 비평으로 어물쩍 넘어간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곳에서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만들고 재생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과 여성, 지역 공동체가 담당하던 많은 역할이 점점 더 자본주의적 경제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
(과거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위계제는 마르크스가 설명한 방식 그대로 사회에 더 많은 위계와 복잡한 지배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파악을 도외시한 채 현실을 지양하는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이 가능할까. 최근 잇따라 창간된 여러 진보 잡지들(월간 좌파, 진보신당-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말과활)이 현재 세계를 휩쓰는 반란의 물결에 침묵하는 것과 함께 2008년 이래 6년째 계속되고 있는 경제위기에 대한 분석을 피하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다.

p.s.'말과활' 창간호에 실린 이진경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마르크스는 신성한 이름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적 한계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즉 역사적 조건이 달라지면 그의 주장은 틀린 게 될 수 있다. 마르크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의 주장에서 변형되어야 할 부분과 이어받아야 할 부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점에서 이진경이 마르크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 자체를 뭐라 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후예를 자처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마르크스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름 뒤에 숨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유럽의 재정위기로 이어지는 신호탄을 올린 것은 그리스다. 치솟는 실업률과 계속되는 임금 삭감과 해고에 그리스 인민의 고통은 더해만 가고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SYRIZA)를 제치고 집권에 성공한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ㆍ신민당(ND)ㆍ민주좌파당(DIMAR) 연정은 이전 정부와 다르지 않은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이 정책은 그리스의 부자와 기업을 구하기 위한 지원금을 유럽연합으로부터 얻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노동자 등 가난한 인민을 위한 국가의 지원을 축소하고 있다. 집권 연정은 이전 정부보다 더 반노동적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한과 파업권을 크게 축소하는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참세상] 그리스 총리, 파업권 제한… 연정 내부 반발 확산, 붕괴 임박ㆍ링크).

다양한 부문의 노동자들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투쟁은 작업의 중단 만이 아니다. 이미 기업가들이 버리고 간 공장은 노동자의 의지와 상관 없이 활동이 중단돼 있다. 이러한 자본가들에 의한 사보타쥬는 그리 낯선 것 만은 아니다. 기업가들은 자신에게 이윤을 안겨주지 못할 때 공장을 닫는다. 때론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공장을 폐쇄하곤 한다. 노동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겠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한다. 1970년 칠레에서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벌어진 일이 그것이다(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무력으로 짓밟힌 사회주의 향한 평화적 길ㆍ링크).

노동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든, 이윤이 남지 않아서 때문이든 그리스의 많은 공장과 기업은 그 활동을 멈췄다. 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실업과 빈곤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비오-미 공장도 그러한 곳 중 하나다. 사장은 공장과 노동자를 버리고 떠났다. 노동자들은 2011년 5월 이후 임금을 받지 못했다. 2013년 2월 12일 이 비오-미 노동자들이 공장을 스스로의 힘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1970~1973년 자본가들의 사보타쥬에 맞서 칠레 노동자들 스스로 공장을 움직이고 유통을 연결하려 한 것처럼 말이다.

여느 투쟁처럼 이 노동자 자주관리 생산의 성패도 이 새로운 생산모델이 다른 공장과 사업장으로 얼마나 많이 확산되고 일반화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당장에 공장을 돌리고 노동자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종잣돈도 필요하다. 비오-미 노동자들의 제안은 정부와 노동조합 관료로부터 냉대를 받았지만 지역과 세계의 운동가들은 이 제안에 적극적인 지지로 대답하고 있다. 데이비드 하비, 나오미 클라인, 존 할러웨이, 조르지오 아감벤 등 저명한 지식인들이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비오-미 노동자들의 호소문은 viome.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roarmag.org에 올라온 비오-미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 오역과 의역이 많은 글이니 참고하실 분은 꼭 원문과 대조해 읽기 바랍니다.




그리스 공장이 노동자 통제하에 생산을 시작하다
roarmg.org 2013년 2월 11일ㆍ링크

실업자와 사장이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와중에 경제위기에 고통받고 있는 그리스 비오-미(the Vio.Me. Viomichaniki Metalleutiki) 공장이 노동자의 민주적 통제하에 생산을 시작했다.

빵 반죽을 하는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고,
We are the ones who knead and yet we have no bread,
석탄을 캐는 우리는 여전히 춥다.
we are the ones who dig for coal and yet we are cold.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We art the ones who have nothing,
우리는 세계를 가질 것이다.
and we are coming to take the world.
- 타소스 리바디티스(Tassos Livaditis, 그리스 시인, 1922~1988)


비오-미의 노동자들, 위기의 심장에서 착취와 빈곤의 심장을 정조준하다

실업률이 30%대로 오르면서 노동자들의 수입은 '0'에 다다르고 있다. 과장된 말과 약속들, 더 많은 세금은 진절머리가 난다. 월급은 2011년 5월 이후로 나오지 않았고 현재도 그들에게 일은 주어지지 않는다. 고용주들에게 버림받은 공장에서 비오-미 노동자들은 그들의 대중집회(General Assembly)의 결정을 통해 끝없는 실업상태의 희생자로 남는 대신 그들의 손으로 공장을 점거하고 운영하기 위한 투쟁의 의지를 밝혔다.

2011년 10월부터 정식 제안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의 참여로 통제되는 노동자 협동조합의 설립을 요청해 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이 따라할 수 있도록 법적 인정을 요구했다. 동시에 그들은 공장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사회의 부를 생산해온 노동자의 자격으로 그들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는- 돈을 요구했다.

작성된 계획은 정부와 노동조합 관료의 무관심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세계적 사회운동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지난 6개월 간 사회 전체에 비오-미의 주장을 확산시키기 위해 투쟁해온 테살로니키 연대를 위한 열린 제안(the Open Initiative of Solidarity in Thessaloniki)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많은 다른 도시들에서 비슷한 제안이 이어졌다.


이제 노동자들이 비오-미를 장악할 시간이다!

노동자들은 파산한 국가의 가능성 없는 지원 약속(그리스 노동부가 약속했던 1000유로 긴급지원조차 재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의 실현을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문을 닫거나 파산하거나 노동자를 정리해고 한 다른 공장들 뿐 아니라 옛 사장이나 새 소유주에 기대지 않고 노동자들에 의해 다시 문을 연 비오-미를 주목할 때다.

투쟁은 비오-미 노동자들이 승리하기까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투쟁은 문 닫은 모든 공장과 업체들로 확산되고 일반화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주관리 공장의 연결망을 통해서 만이 비오-미의 시도는 번창할 수 있고 착취ㆍ불평등ㆍ계급 없는 생산과 경제의 다른 체제를 향한 길을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장이 연이어 문을 닫으면서 그리스에서 실업자의 수는 200만 명에 다다르고 있고 전 정부의 정책을 지속하고 있는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ㆍ신민당(ND)ㆍ민주좌파당(DIMAR) 집권 연정에 의해 인구의 어마어마한 규모가 빈곤과 고통에 처하게 됐다. 노동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공장 운영 요구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재앙에 대한 유일하고 합리적인 대응이자 실업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다.


비오-미의 투쟁은 우리 모두의 투쟁이다

우리는 노동자, 실업자, 위기로부터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한다. 비오-미 노동자들과 연대할 것과 노동자들이 사장 없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그들의 노력에 지지해줄 것을. 우리는 테살로니키에서 3일간 절정에 달할 투쟁과 연대의 행진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가 작업장 안에서 사장 없이 직접 민주적 과정을 통해 그들 스스로 조직하고 싸울 것을 주장한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총파업에 모두를 초대한다.

우리가 바라는 더이상 지배자가 없는 경제ㆍ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공장을 넘어 모든 생산에 노동자 통제가 수립되기는 것을 목표로!

이제 비오-미의 시간이다. 일하러 가자!
모든 곳에 노동자 자주관리를 도입하자!
지배자 없는 사회 건설을 시작하자!



비오-미 노동자 투쟁 연대와 지원을 위한 열린 제안
Open Initiative of Solidarity and Support to the struggle of the workers of Vi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