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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21:02

DMZ를 보고 오다 기록/기억2018.08.04 21:02

8월 1일 DMZ(비무장지대)를 보기 위해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의 DMZ생태평화공원을 방문했다. 홈페이지(링크) 길 안내를 보면 내비게이션에서 '김화읍사무소'를 검색해 찾아오라고 돼있지만 '철원DMZ생태평화공원'으로 검색하면 바로 찾아갈 수 있다. 몇 년 전까지 이 탐방코스의 방문자센터가 위치한 생창리가 민통선 안쪽에 위치해 있어서다. 지금은 민통선이 조금 더 북쪽으로 이동해 다음과 네이버 지도는 물론 내비게이션 서비스에서도 검색이 된다.

DMZ생태평화공원 방문자센터를 찾은 날은 40도를 넘보는 폭염이 전국을 강타했고 철원 김화읍 일대도 38도에서 39도 내외의 기온을 기록했다. 안내자에 따르면 보통은 민통선 안쪽의 부대 앞 주차장까지 이동하고 3시간여 산길을 걷는 코스이다. 하지만 폭염 때문에 방문자센터의 차량으로 십자탑전망대 바로 아래까지 이동했다.


DMZ를 보러 갔지만 안타깝게도 DMZ 방향을 향해 사진을 찍을 순 없었다. 십자탑 전망대 아래에서 서쪽을 향해 찍은 사진인데 DMZ의 남방ㆍ북방한계선을 따라 이어진 남북한의 철책선을 일부 볼 수 있다. 사진 自由魂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각 2㎞ 거리 내부 지역이 DMZ다. 기껏 4㎞ 거리에 북의 철책과 초소가 있다. 설치된 망원경으로 본 북의 초소 앞에는 옥수수밭이 보였고 초소 뒷편으로는 무언가를 태우고 있는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망원경을 조금 더 뒤로 해 보면 마을로 보이는 건물도 볼 수 있었다.

DMZ는 이름과 달리 비무장지대는 아닌 듯했다. 북의 철책선을 따라 설치된 초소와 달리 철책 안쪽 지역에도 남북의 초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겨 무성한 숲으로 뒤덮였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키작은 초목만 가득했다. 곳곳에는 못으로 보이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삼림보다는 습지의 형태였다.

걸어서 내려오는 길 좌우로는 내내 지뢰밭이었다.


철책 인근 탐방로의 좌우엔 지뢰 경고판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지뢰지대는 민통선 밖 마을 곳곳에도 있었다. 대략 300만 발의 지뢰가 DMZ 인근에 묻혀있다고 한다. 사진 自由魂

풍성한 자연의 모습은 DMZ보다는 민통선과 DMZ 철책 사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오후 코스는 용양보 코스였다.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는 김화읍은 전쟁 전 '김화군'으로 현재의 철원보다 더 큰 군이었다고 한다. 금강산을 향한 철길은 끊겼지만 물길은 여전했다. 전쟁 이전 철로를 잇던 철교의 교각은 용양보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사진 위쪽이 DMZ 방향이다. 오른쪽 용양보의 일부는 금강산을 향하던 철교의 교각을 이용한 것이다. 끊어진 다리에는 가마우지가 앉아있다. 사진 自由魂

용양보 코스는 원래 유엔사 관할 지역으로 탐방코스 개발 이후에도 도보 이동은 안됐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차량 이동이 불가능해지면서 걸어서 용양보 통문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용양보 통문은 분단 상황에서 민간인이 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이다. 하천 위로 이어진 철책과 통문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통문 저 너머가 바로 DMZ지만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용양보 통문 앞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반대편 바로 코앞에 DMZ가 있다. 사진 自由魂

언젠가 합법적으로 DMZ 내부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길 기대한다. 그날이 멀지만 않길 바랄뿐이다.


민통선을 조금 지난 자리에 위치한 암정교 모습. 지금의 김화읍, 옛 김화군은 꽤나 번화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사진 自由魂










용암보에서 용암보 통문까지 걷는 길에서 담은 풍경이다. 사진 自由魂

2018년 4월 27일.

역사적인 날이기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길 바라는 마음에 임진각을 찾았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제일 마지막 북단이죠.


[사진=自由魂]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65년 염원은 곳곳에 쌓여있었죠.




[사진=自由魂]

아래 사진 철조망 앞의 나무는 임진각에 보존돼있는 녹슨 증기기관차에 뿌리내리고 살던 것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올해 봄에도 어김없이 푸른 싹을 틔우고 있네요.

경의선 복원사업의 일원으로 놓인 임진강철교 옆, 옛 철교, 독개다리에선 끊어진 철길 곳곳에서 반세기 넘게 묵은 오랜 상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自由魂]

동그란 원으로 표시된 한국전쟁 총탄의 흔적은 가슴에 아프게 박혀왔죠.

하늘은 맑았지만 미세먼지가 짙었던 이날에도 임진강은 고요하게 흐르고 있더군요. 회복되지 않은 상처는 덩그러니 남아있는 오래된 교각에 생생했습니다.






[사진=自由魂]

임진각에는 많은 취재진이 북적이며 강 건너를 주시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간 곳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역사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죠.


[사진=自由魂]

평양까지 153㎞ 고속도로로 달리면 1시간 조금 넘으면 도착할 곳. 6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발길은 아직 그곳에 가 닿지 못하고 있네요.


[사진=自由魂]

남으로, 북으로. 곧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발길을 옮길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아래 붙인 노래는 일제강점기 KAPF 활동을 했던 박세영이 시를 쓰고, 고종한이 곡을 붙인 1957년 노래입니다. 1960년대 마츠야마 타케시가 일본어로 번안한 곡을 일본의 포크 그룹 포크 크루세이더가 불러 히트쳤죠. 우리나라에서도 알음알음 불리다 일본 영화 '박치기'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입니다. 영상의 노래는 재일교포 가수 이정미가 부른 것입니다.


2015.11.15 22:22

11월 14일 민중 총궐기 기록/기억2015.11.15 22:22

2015년 11월 14일. 오전 중 그치리라던 비는 하루종일 흩뿌렸다. 그래도 비옷을 챙겨입은 사람들은 서울시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짧은 집회를 끝낸 이들은 청와대로 향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평로의 청와대 방향은 이미 이중 삼중의 경찰 차벽과 차단선으로 막혀있었다. 종각으로, 신문로로, 대열은 흩어져 청와대로 향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노동자대회를 마친 노동자들이 경찰청 방향으로 우회해 신문로로 향하고 있다. [사진 自由魂]

그러나 길은 없었다. 사람들은 목소리로, 스프레이 글씨로, 스티커로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가 차벽을 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길을 막은 노동자들이 박근혜 퇴진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요구하는 스티커를 경찰 차벽에 부치고 있다. 몇몇은 스프레이 도료를 이용해 비에 젖은 도로에 '박근혜 퇴진' '국정화 반대'라는 글씨를 썼다. [사진 自由魂]

대답은 물대포와 무장한 경찰력의 공격으로 되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비보다는 물대포의 최루액에 젖었다. 매케한 냄새는 종로 거리까지 장악했다. 동행한 이가 고통스러워 해 잠시 피해봤지만 종각 넘어 종로 2가에서도 매케한 냄새는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경찰은 태평로 방향 3대, 종각 방향 3대, 신문로 방향 2대의 물대포 차를 동원해 노동자ㆍ농민 대열을 공격했다. 70대의 한 농민은 경찰이 머리를 겨눠 쏜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놓였다. [사진 自由魂]

그런 한 편 텅 빈 거리는, 모든 경찰이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된 그 시간 텅 빈 종로 거리는 차 없는 거리 행사라도 열린 듯 시민들로 채워졌다. 경찰도 차도 없는 거리에 무슨 사정인지 알지 못한 시민들은 거리에서 자유를 누렸다.


경찰이 청와대를 방어하기 위해 모두 동원된 시간 시민들은 텅 빈 종로 거리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경찰력이 미치지 않은 곳 자유로운 즐거움만 가득했다. [사진 自由魂]

2015.08.05 21:41

2015년 8월 제주 여행 사진들 기록/기억2015.08.05 21:41

7월 31일부터 8월 5일까지 제주도를 여행했다. 꽤 긴 시간을 제주에서 보냈지만 많은 곳을 둘러보진 못했다. 더운 날씨 탓을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쇠소깍이다. 지난 겨울에도 들렀던 곳이다. 역시 아름다운 곳이다.



위미항을 거쳐 보목을 향해 걸었다.



바닷가에 들어선 집들은 한결 같이 도로를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어놓은 것인지, 자연스럽게 자란 것인지 현무암 돌담 사이의 식물들이 눈에 띄었다.



서귀포 숙소에 가기 전 정방 폭포를 다시 들렀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답게 사람이 가득했다. 웅장한 폭포는 끊임없이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고 한여름의 더위를 순간 잊게 해준다.



다음 날엔 돈내코에 들렀다. 외지인보다는 도민들에게 유명한 피서지다. 최근엔 많이 알려지면서 외지인 관광객도 크게 늘었다. 내륙의 계곡은 깊을 수록 산도 높지만 제주의 계곡은 다르다. 산줄기는 그리 높지 않아도 계곡은 깊다.




제주의 숲은 많이 다르다. '정글'이란 느낌이 그대로 든다. 특히 셋째 날 들른 곶자왈이 더 그렇다. 아래는 화순 곶자왈에서 산방산을 바라보며 담은 사진이다.




서해와 남해, 동해 해변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제주도 해변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제주도의 동서남북 해변도 저마다 다르다. 다녀본 해변 중에는 남쪽의, 서귀포 방향의 해변이 더 마음에 든다. 산방산에서 서귀포로 돌아오는 길 대평 포구의 모습이다.



제주도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있다고 한다. 그중 다랑쉬 오름을 올랐다. 이 다랑쉬 오름에선 1991년 10여 구의 4ㆍ3 학살 희생자 유골이 발견됐다. 이 오름 아래 있던 마을은 완전히 사라졌다. 유골은 굴 안에서 발견됐다. 그러나 그 굴은 지금 매몰돼 있다. 1992년 행정 당국은 유골을 화장하고 포크레인을 동원해 그 흔적을 마저 지워버렸다.


다랑쉬 오름을 오르면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인근의 용눈이 오름과 손자봉도 눈에 들어온다.



앞에 보이는 작은 오름은 이끈다랑쉬 오름이다.



시선을 표선쪽으로 돌려보면 손자봉이 보인다.



그 왼쪽으로 용눈이 오름이 보인다.



다랑쉬 오름을 내려오는 길, 이끈다랑쉬오름과 성산일출봉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성산일출봉은 명불허전이다.




섭지코지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모습.



서귀포 앞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여럿 있다. 높은 벼랑을 지닌 이 섬들은 망망대해의 막막함을 한결 덜어준다. 보목 포구 앞의 섶섬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맛은 일품이다.



밤중에 오른 한라산은 제주도의 또다른 멋을 보여준다. 습기 가득했던 바닷바람은 어느순간 싸늘한 산바람으로 변한다. 어둔 밤하늘은 별로 가득해진다.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북극성을 함께 담았다.



제주에 내려갈 때 제주시쪽은 잘 들르지 않는다. 마지막날엔 제주국제공항 옆 해변을 잠시 달렸다. 지는 해의 열기가 여전한 바다다.



2015.01.10 17:36

간월암과 공세리성당 기록/기억2015.01.10 17:36

의도치 않게 뜨는 해를 보게 됐다. 엇그제 본 조선일보의 한 사진 때문이다. 새벽에 잠이 깨자 무작정 달려 도착한 곳은 충청남도 서산 간월암이다. 맑은 날씨였지만 지평선 근처 구름이 몰려 있어 맑은 해의 모습을 보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 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해는 주저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간월암과 육지를 잇는 길 사이에서 본 일출. [사진 自由魂]

간월암은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붙여진 이름. 해가 밝은 후에도 아쉬운 듯 한참 바다 위에서 머뭇거리던 달을 보니 그럴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명이 아직 가시지 않은 하늘과 바다. [사진 自由魂]

일출은 금방이다. 고개를 내미는 듯 했는 데 어느새 중천에 뜨기 일쑤다. 여명이 아직 남아있다고 안심할 수 없다. 해와 간월암을 함께 바라보기 위해 간월항의 방파제로 내달렸다. 홍성쪽 능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간월암을 함께 사진으로 담던 몇몇 사진가들은 벌써 철수한다. 늦었지만 그래도 담아본다.


황금 빛으로 태양은 푸른 어둠을 몰아낸다. [사진 自由魂]


간월암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다. [사진 自由魂]

해가 뜨고, 물이 물러나자 간월암은 육지가 된다. 따로 산문이 있긴 하지만 바다 자체가 산문이다. 사람의 의지와 달리 밀물이 들어차 간월암으로 가는 길을 사라진다. 간월암과 육지를 잇는 바닷길에는 커다란 바위가 네 개 놓여있다. 모양새가 꼭 사천왕이다. 옛 사진에는 안보이던 것. 사천왕을 대신해 가져다 놓았나보다.


완전히 열린 간월암. [사진 自由魂]


간월암과 주변의 모습들. [사진 自由魂]

해가 뜨자 방문객이 찾는다. 꽤 이른 시간 가족들은 함께 사천왕 사이를 지나 간월암에 들어간다. 수행자의 모습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공양을 받는 이가 자리를 지키고 밥 짓는 연기가 난다. 바위가 사천왕을 대신한 것도 이채롭지만 장승이 산문을 장식한 것도 그에 못지 않게 낯설다. 밀물을 기다려보고 싶었지만 연 가게도 없고 있을 곳도 없어 차를 돌렸다.


간월암을 떠나 향한 곳은 공세리성당. 32명의 순교자를 모신 성당으로 1895년 설립됐다. 영조 때까지 충남 지방의 세곡을 모은 창고가 있던 자리에 연 교회다. 옛 공세창의 흔적은 마을과 성당 곳곳에 남아있다. 지금의 성당 건물은 1956년 신축한 건물이다.


한반도에서 근대에 세워진 성당의 전형적 모습이다. [사진 自由魂]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공세리성당은 외관 만으로는 다른 근대 성당 건물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전주의 전동성당, 횡성의 풍수원성당이 얼핏 떠오른다. 규모는 그 중간 정도. 전동성당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더 정숙한 느낌이다. 그것은 아마도 성당 근처를 호위하듯 지키고 서 있는 여러 고목들 때문일 것이다.


수령 350년의 보호수 건너로 본 성모 마리아상. [사진 自由魂]

본당 건물 뒷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조용히 산책하기 딱인 분위기나 실제로 그리 조용하진 않다. 가까이에 큰 도로가 있어 쉴새 없이 자동차 소음이 들린다. 이 소음만 없었어도 한참을 앉아 쉬다 돌아왔을 것이다.


Marina Ginestà 1919.01.29 - 2014.01.06

프랑코 쿠데타에 맞서 투쟁한 젊은 사회주의자였던 마리나 히네스타가 1월 6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는 당시 17세로 카탈루냐통합사회당(PSUC)의 투사였다. 이 사진은 1936년 7월 21일 PSUC의 본부로 사용되던 콜론 호텔 옥상에서 찍었다. 프랑코가 17일 쿠데타를 일으킨 지 5일째 되던 이날 반파시즘 의용군중앙위원회가 구성됐다. 혁명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긴 사진.

히네스타는 1919년 프랑스 툴르즈에서 태어났다. 11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주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여단에 지원해 프라우다지 특파원 미하일 콜소프를 도와 번역과 통신원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 부상으로 프랑스 몽펠리에로 휴양을 떠난다. 2차 대전이 일어나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자 멕시코로, 다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몸을 피한다. 그곳에서 벨기에 외교관과 결혼해 이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1970년대 초 파리로 이주해 1월 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문다.

공산당과 파시스트 프랑코 사이에 길을 잃은 스페인혁명처럼 젊은 사회주의자였던 그녀도 여러 나라를 전전하게 된다. 사실 혁명은 그녀가 사진을 찍은 이 때로부터 1년쯤 후에는 사실상 질식 직전에 이르게 된다. 1년 후 1937년 5월 이 호텔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카탈루냐 광장 인근의 전화교환소에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조지 오웰이 '카탈루냐 찬가'에서 다뤘던 바로 그 사건에 등장했던 곳이다. 파시즘에 맞선 젊은 사회주의 투사로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그녀의 영면을 바란다.

조선의 천주교는 그 시작이 다른 나라와 많이 다르다. 외국인 신부에 의한 포교가 아닌 자생적인 학습을 통해 신자가 확대됐다. 물론 일단 천주교가 퍼지기 시작한 후에는 신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김대건이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최양업과 정규하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곳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성당은 정규하 신부가 지은 성당이다.

이곳 성당은 1801년 신유박해로부터 유래한다. 박해를 피해 살 곳을 찾던 용인의 신자 40여 명이 이 마을에 터전을 잡은 것이다. 이후 정규하 신부가 이곳에 오면서 마을 신자들의 힘으로 성당이 지어진다. 조선에 지어진 네 번째 성당(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전북 완주 되재성당, 서울 명동성당)이자 조선인 신부가 만든 첫 번째 성당이다.

풍수원성당을 중심으로 십자가의 길, 신자들의 유물 전시관 등이 꾸며져 있다. 십자가의 길은 판화가 이철수의 그림으로 세워진 비석 14점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십자가의 고난은 성당 내부에도 다른 그림으로 전시돼 있다. 현재 풍수원성당 주변은 성역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유물전시관이 완공돼 있고 마을의 모습도 재현할 예정이다. 풍수원성당에서는 이 사업을 위한 모금을 받고 있다.


풍수원성당 입구. 설명은 따로 없으나 아마 아기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의 모습을 담은 듯싶다.


앞에서 본 풍수원성당 모습. 오른쪽으로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성당을 지켜주듯 서있다.






성당 왼쪽으로는 유물전시관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에서 성당을 바라본 모습.


느티나무 아래서 바라본 풍수원성당의 첨탑.

여름 휴가가 아직 멀은 5월. 부처님오신날 연휴에 집에만 앉아있기엔 엉덩이가 쑤신다. 결국 거리로 나섰지만 나 같은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게다가 그러한 이들 다수가 수도권에 모여사는 사정을 고려한다면 교외로 나가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겠거니 하게 된다. 결국 집에 있는 것보다 엉덩이가 더 쑤실 수밖에. 엉덩이면 다행이지만 차안에 몇 시간을 갖혀 있자니 허리, 무릎, 어깨 등 안아픈 곳이 없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하며 기어간 곳. 아침해를 보며 출발했건 만 어느새 해가 누엿누엿 지려 하고 있다. 동강과 서강이 휘감아 도는 영월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된지는 오래였고 청령포에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영월 청령포는 세조에게 왕위를 뺐긴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남한강 지류인 서강이 삼면을 빠르게 휘돌고 있고 뒤로는 높은 절벽에 가로막힌 곳. 내륙에 이보다 더 완벽한 유배지가 있을까 싶다. 이러한 지형은 우리 땅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모양이다. 같은 영월의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이 이곳 다음에 들른 단양도 삼면이 강으로 둘러쌓여 있다. 폐위된 단종의 상심이야 어쨌을지 모르지만 이곳의 풍경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 넓지 않은 강을 사이에 두고 기암과 노송이 자리잡은 절벽이 꿋꿋한 기개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단종의 처소 주변에 가득한 소나무 숲은 지는 해를 더 아름답게 담는다.




안내하는 분의 이야기로는 이 소나무숲의 나무들은 모두 단종의 처소를 향해 굽어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듯도 싶다.






바로 위 사진 두 장은 '관음송(觀音松)'의 모습이다. 이 나무는 지상 1m가 조금 넘은 부분에서 두 개의 줄기로 갈라져 자랐다. 단종이 그 갈라진 틈에 앉아 쉬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서 대략 600년 된 것 같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觀) 오열을 들었다(音)는 소나무. 아마 이 소나무는 600년동안 한반도 인민의 고달픈 삶을 지켜보며 버텨왔을 것이다.




청령포를 둘러싼 강줄기는 그리 넓지 않고 깊이도 얕아보인다. 하지만 절벽을 끼고 도는 도도한 흐름 만은 큰 강 못지 않다.




결국 영월에선 청령포만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단양으로 향해야 했다. 숙소를 단양에 잡았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도담삼봉이 있었지만 밤에 그곳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진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야에 들어온 조명받은 도담삼봉의 모습은 압도적 모습으로 유혹했다. 결국 숙소에 간단히 짐을 풀고 다시 도담삼봉으로 왔지만 이미 조명은 꺼진 후였다. 도담삼봉 주차장은 유료로 운영되고 있지만 오후 7시 이후에는 무료다. 오후 10시까지는 조명으로 도담삼봉을 환히 밝히니 그 사이에 들르면 관광지의 번잡함 없이 도담삼봉을 즐길 수 있다. 조명에 밝혀진 도담삼봉의 모습은 다음날에야 담을 수 있었다.










다음날 먼저 찾은 곳은 사인암이다. 청련암이라는 작은 절이 자리 잡은 중간 규모의 절벽인 사인암은 꽤 오래전부터 명승지였던 듯 싶다. 위 사진에 담진 않았지만 과거 인물들의 서명과 싯구가 가득하다. 관광지마다 가득한 낙서에 눈쌀을 찌푸리곤 했는 데 사인암을 보니 이러한 습속이 현대에 와서 생긴 것만은 아닌 듯 싶다. 그래도 정성들여 새긴 글자들은 세월의 힘인지 별 위화감 없이 자연과 어울리고 있다.






사인암을 떠나 오른 곳은 단양시내 맞은편에 자리한 양방산 활공장이다. 차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좁은 길을 10여 분 올라가면 단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단 운전이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직접 운전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미리 예약하면 패러글라이딩도 즐길 수 있다. 혼자 타는 것은 아니고 숙련된 사람과 함께 활공한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들의 상처엔 눈길이 간다. 이곳은 대표적인 석회암 지대로 굉장히 많은 씨멘트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도시에서의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것을 마련하기 위해 자연을 얼마나 훼손하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다시 찾은 도담삼봉이다. 사실 도담삼봉 건너편으로 해가 뜨는 모습을 담고 싶었으나 전날 밤부터 구름이 끼기 시작해 포기하고 아예 밤에 찾았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더 가깝게 더 크게 다가온다. 이곳을 관람하기엔 유람선과 모터보트가 쉼 없이 돌아다니는 낮보다는 밤이 좋은 것 같다.

Posted by 때때로

강화도엔 많은 군 부대가 있다. 이 부대들은 북한을 향해 경계에 여념이 없다. 과거에도 강화엔 군대가 주둔하던, 그리고 격전을 치뤘던 많은 진지가 있었니다. 대개 이 진지는 외부를 향하기보다 우리나라의 내부를 향해 위치해 있다. 얕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를 경계하는 모습이다. 강화가 쫓겨난 왕조의 마지막 피난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강화도의 진지들은 외부의 침략 세력에 맞서 싸우는 가장 앞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방향은 안쪽(내륙)을 향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광성보도 그런 여러 진지 중 하나. 신미양요 때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여러 돈대(오늘날의 포대) 중 용두돈대가 특히 매력적이다. 이 돈대는 이름 처럼 용머리 모양으로 바다로 툭 튀어나와 있다. 용두돈대 인근의 바다는 물살이 빨라 물이 들어오거나 나갈 때면 계곡 못지않은 거친 물소리를 들려준다.

세 개의 돈대를 잇는 산책로도 광성보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이미 여러번 가보았지만 일몰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다 넘어로, 산 넘어로 떨어지는 해를 동시에 볼 수 있다.









2012.12.17 11:48

눈꽃, 바다, 바위 기록/기억2012.12.17 11:48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 옛길 대신 쭉 뻗은 고속도로가 깔리고, 미시령 터널이 뚫리면서 태백산맥 넘어 강원도 영동지방에 가는 게 많이 편해졌다. 도로 정체만 없다면 여유 있게 가도 세 시간이면 강릉이나 속초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게 쭉 뻗은 길로 내달려 달려간 동해는 예전 만한 감흥을 전해주지 않는다. 중앙선 열차를 타고 영주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태백을 거쳐 12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강릉이 진짜 강릉 같고, 한계령 구비구비를 아찔하게 지나쳐 발아래로 쫙 펼쳐진 동해를 보지 않으면 속초에 가도 속초에 간 것 같지 않다.

전날 강원도 산간 지방에 폭설이 내려 통행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지만 굳이 한계령으로 올라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마침 능숙한 운전자도 있어 큰 위험 없이 오를 수도 있었다. 올라갈 수록 설악에 쌓인 눈은 경이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계령 정상은 구름의 끝자락을 잡고 동해의 절경을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구름 사이 나뭇가지들마다 피어있는 눈꽃은 서울에서 쉬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경관이었다.

 

 

 

한계령에 오르는 길.

 

 

 

 

한계령 정상에 핀 눈꽃.

 

 

 

내려오는 길.

 

 

 

양양 수산항의 모습.

 

 

 

속초 대포항. 흐렸던 날씨는 개이지만 파도는 여전히 거칠었다.

 

 

구름 사이로 자태를 드러낸 울산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