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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클라이먼의 데이비드 하비 비판 3편을 아래 옮깁니다. 주석과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며 대괄호[ ] 안은 옮긴이가 덧붙인 내용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3편: 답변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5월 13일ㆍ링크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은 자본주의의 실제 특징을 해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법칙이 2007~2009년의 대침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둘 사이의 논쟁은 계속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을 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를 통해 자본주의 위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앤드루 클라이먼은 최근 뉴레프트프로젝트(New Left Project)를 통해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로 꼽힐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이론 비판에 대한 반론 두 편을 발표했다.
1편에서는 하비의 마르크스 해석을 비판했고 2편에선 미국 기업들의 2차 세계대전 후
장기적 이윤율 저하에 관해 마르크스의 법칙에 근거해 논했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하비는 "길게 봤을 땐 클라이먼이 옳은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면서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 이해하기 위한 내 유기적인 비유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논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두 비유를 대비시켰다.

아래는 클라이먼의 답변이다.


나는 데이비드 하비가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 자본주의 경제위기론이 기반을 둔 법칙이며, 대침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적절한 법칙이며 이론인 이 법칙을 비판(하비 2014ㆍ링크)한 데 대한 내 반론에 그가 시간을 내 답변해준 것에 감사하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답변(링크)에서 내가 쓴 것의 일부만 다뤘고 특히 내가 제시했던 문헌적(링크)이거나 경제적인(링크) 증거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내 유추를 '자본의 본성'이라는 비유로 묘사하며 오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익한 토론을 개시할 출발점으로 그의 답변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마르크스의 LTFRP가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독창적인 비난과 그에 대한 내 대답을 먼저 간단히 요약하겠다. 그런 다음 그러한 유추가 '자본의 본성'을 비유한 것이 아닌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계속해서 이 글의 나머지에선 LTFRP를 잘못 정의해놓고는 그 법칙이 옳을 가능성과 이에 대한 토론의 필요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하비의 새로운 비난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다시 증거를 검토해볼 것이다.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비난(첫 번째 버전)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과 이 법칙에 기반한 자본주의 위기론이 일원인론이라고 비난한다.[1] 이러한 비난은 이 법칙이 결정적으로 마르크스가 '엄격하게 가정한' 수치들에 기대고 있다는 하비의 주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처럼 의심받는 가정들 때문에 LTFRP는 노동 절약형 기술 변화를 제외한 수익성을 하락시키는 잠재적 원인 모두와 이윤율이 하락하지 않도록 하는 기술 변화에 의한 상쇄요인 모두를 배제하는 것으로 비친다.

물론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본론' 3권 3편은 금융제도와 같은 부가적인 위기 원인들에 더해 몇몇 상쇄요인들을 논한다. 대신 이 법칙이 일원인론이라는 그의 비난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의 구조,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설명에 다양한 요인들이 등장하는 순서에 초점을 맞춘다. 마르크스는 LTFRP에 대해 설명할 때 우선 '법칙 그 자체(das Gesetz als solches)'를 제시하고, 바로 그 후에 상쇄요인들을 배치하며 그 다음에야 위기의 부가적인 원인들을 끼어 넣는다.

서술을 구조화 하는 이런 방식은 매우 흔한 나무랄 데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비는 LTFRP를 '법칙 그 자체'로 축소시켜 일원인론적 서술처럼 묘사한다. 상쇄요인과 부가적인 원인들은 '법칙 그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비에게는) 그러한 요인들은 LTFRP에 포함되지 않으며 만약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면 법칙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 또 (하비에게는) 상쇄요인과 부가적 원인들의 존재를 마르크스가 인지하고 그의 설명에 그것들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LTFRP에서] 일원인론이라는 혐의를 벗겨주진 않는다. 이는 단지 LTFRP의 타당함에 대한 마르크스의 '동요와 양면성'을 보여준 것이며 그는 그 이상으로 법칙을 논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법칙에서 유래한 가정이 제거됐을 때 벌어질 일"을 논한다.

이에 대해 나는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설명했다. 나는 "그 글을 이런식으로 읽어선 안된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런 부당한 독서는 적절한 해석 방법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런 후 나는 내가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유추"라고 부른 것을 설명했다.

일원인론이라는 딱지붙이기가 왜 잘못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정교한 방법론적 논의를 펼칠 필요는 없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보편적 중력법칙을, 바람과 같이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 또는 공기 저항 같은 상쇄요인을 언급하지 않은 채 내가 제안한다고 해서 이 다른 요인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그것들을을 배제한, 그 대신 적용 가능성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제한적인 일원인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중력법칙으로부터 뉴튼의 운동에 관한 제2법칙을 이끌어내 설명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방정식에서 다른 요인들의 삽입을 삼간다고 해도 그런 [일원인론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다음 내가 공기 저항과 바람[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내가 내 양면성과 동요를 드러낸 것도 또는 보편적인 중력법칙이 오직 진공에서만 작용하고 실제 현실에선 작용하지 않는다고 시인한것도 아니다.(강조는 원문)

'자본의 본성'이라는 비유?

이 토론에서 하비(2014)의 처음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위기론 내 LTFRP의 지위에 대해, 그리고 이것의 대침체와 침체의 지속되는 여파와의 연관성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론에서 그의 여러 비판들 각각을 다뤘다. 그에 대한 하비의 대답은 오직 내 반론의 두 문장-앞에 인용한 구절의 셋째와 넷째 문장-을 논하는 데 전념하고 있고 그것 조차 이 두 문장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하비에 의하면 저 문장은 앤드루 클라이먼이 "이윤율 하락에 대한 그의 관점이 왜 일원인론이 아닌지 설명하는", 특히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개념화 하고 구조화 하는" 데 이용한 비유다. "내
[하비] 생각에 앤드루와 나의 큰 차이점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각각의 비유 형태에 있다".

앞 부분에 세 가지 중요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먼저 내 유추는 '자본의 본성'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구체적 현상, 즉 이윤율의 경향에 관한 것이다. 둘째 그 유추는 이윤율의 저하에 대한 내 관점 또는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과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 관한 것이다.
[2] 셋째 그 유추는 '자본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존재론적인 (존재에 관한) 게 아닌 인식론적인 (앎에 관한) 것이다.

나는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를 개념화 하거나 구조화하기 위해 그 구절과 다른 어떤 곳에서도 비유를 제시하지 않았고, 그와 같이 제시할 만한 비유를 갖고 있지도 않다. 자본에 대한 내 이해를 개념화 하기 위한 비유는 내게 필요 없다. 특히 '자본'은 그 스스로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이미 사실의 개념화이기 때문이다. 본래의 개념화(이리하여 가치는 이제 과정 중의 가치 value in process, 과정 중의 화폐로 되며, 이러한 것으로서 가치는 자본이 된다ㆍ'자본론' 1권, 2015년 개역판 202쪽)를 다른 비유로 어떻게 대체해야 내 이론적ㆍ경험적 연구를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 난 모르겠다.

나는 '자본의 본성'이라는 구절이 의심스럽다. 난 자본주의의 '본성'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왜 작동하고 또는 고장나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특히 자본과 자본주의에 자연계와 같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혹은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에 중력의 힘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나의 것으로 돌리며 '자본의 본성'이라는 그 구절을 하비가 사용할 때 더 그렇다. 이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하비의 대답의 넷째, 다섯째 구절이 암시하는 것과 반대로 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정치는 비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이에 따라 클라이먼의 결론은'이라는 부분). 그것은 증거와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나는 내 정치를 방어할 것이며 그렇게 할수 있을 것이다. 비유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증거와 이론에 도전하는, 정말로 논쟁에 기반한 몇몇 논의를 따져본 후에 말이다. 어떤 한 비유의 개인적 선호나 이런 취향에 기반한 (내가 자본을 어떻게 보고 경험했는가와 같은) 주관적 경험은 토론 거리가 못된다.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선택하고 겪은 바에 따른 경험한다. 이걸로 끝이다. 비유와 주관적 경험에 따라 조직된 정치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실제 사실에 비췄을 때 다른 문제다. 그와 같은 정당성을 제공할 임무로 논쟁이 내게 주워지면 나는 기꺼이 그것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는 내 비유는 '자본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닌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지나치게 깔끔한 구분처럼 보인다. 제안된 한 종류의 설명은 특정한 현상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견고하게 연관돼 있지 않는가? 따라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유추는 LTFRP와 중력의 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아니, 전혀 아니다. 현상의 '본질'과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 사이에 필연적 연관은 없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만취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3]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의 유추는 자본주의를 물리적 현실과 비교하는 게 아니다. 그 유추는 대상이 무엇이든 다원인론적 설명이 일반적 법칙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또는 '경향적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묘사한 것이다.

만약 내가

●바람처럼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이나 공기 저항처럼 그에 대한 상쇄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기 위해 중력의 일반법칙을 언급하거나
●교수와 잠자리를 같는 것과 같은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나 멍청함 같은 다른 상쇄요인에 대한 설명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더 높은 점수를 밭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식 향상을 위해 공부한다는 법칙을 주장하거나
●목이 짧은 기린을 멸종시킬 수 있는 자연재해와 같은 요인이나 상대적으로 목이 짧은 새끼를 낳게 하는 돌연변이와 같은 상쇄요인을 말하지 않고 기린이 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선택 이론을 말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과 일할 사람을 찾는 사람이 지리적으로 어긋나는 것과 같은 실업률을 증가시킬 수 있는 요인이나 차별시정 정책과 같은 상쇄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불균형적인 잦은 실업에 의한 고통을 그들이 노동시장에서 직면한 차별의 법칙으로 설명하거나
●임금의 상승과 같이 이윤율을 떨어뜨릴 수 있는 요인이나 생산수단의 가격 하락 같은 상쇄요인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주장한다고 해서

부가적인 원인과 상쇄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그것들을 배제한, 따라서 적용 가능성이 엄격히 제한된 일원인론적 모델을 구축하겠는가. 그러한 설명 후 내가 부가적 원인과 상쇄요인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 양면성이나 동요, 혹은 내가 제안한 일반적인 설명 법칙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앞의 중요 항목 네 가지를 먼저 점검해보자. 그것들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를 구조화 하기 위해 이용한 비유인가? 떨어지는 사과, 좋은 성적, 목이 긴 기린, 불균형한 실업 빈도와 떨어지는 이윤율 모두에 공통적인 어떤 중요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중력의 일반법칙, 학습-지식의 연관성, 자연선택, 노동시장의 차별과 LTFRP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어떤 중요한 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각각의 현상이 지니는 '본성'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각각 그것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법칙은 매우 다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다섯 설명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를 지닌다. 그리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중요한 것은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일원인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비난(새로운 버전)

그럼에도 하비는 계속해서 이러한 결론에 대해 '투덜' 거린다.

우리는 여기서 일원인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만약 중력의 일반법칙이 없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사과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어떤 공기저항도 무관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또는 반대되는 힘)은 오직 일반법칙과의 연관 하에서만 적절하다.

일원인론의 일반적 의미는 "하나의 원인을 갖는다는 것"인 데 하비(2014)는 "많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위기가 만들어지는 한 가지 인과관계 이론을 주장하려 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강조는 클라이먼). 그렇지만 내 비유에서 사과가 운동하는 원인에는 단지 중력 만이 아니라 바람과 공기저항도 있다. 여기에는 하나가 아니라 세 가지 원인이 있다. 따라서 그 비유는 마르크스의 LTFRP와 위기이론이 '하나의 인과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하비의 비난에 들어맞는 전형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그는 여기서 일원인론이라는 단어를 흔치 않은 의미로 사용한다. 일원인론적 설명에 대한 은연중 드러나는 그의 새로운 정의는 "다른 그 어떤 원인과도 관련이 없는 원인을 지닌 설명"이라는 것이다. 내 반론의 2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다중원인론에 대한 주장들은 위기에 관한 하비의 (LTFRP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부재원인론에 대한 갈망을 가리는 가면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그는 분명 '자본론' 3권에 나와 설명되고 완료된 위기에 관한 명확한 다중원인론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본론' 3권에는 LTFRP 이론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금융 시스템과 같은 다른 결정 요인들이 이와 연결돼 그것이 드러나는 방법을 매개한다.(강조는 원문)

하비는 일원인론이란 단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분명하기에 난 그의 재정의에 이의를 재기할 필요를 못느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관념에 따라 사회적ㆍ경제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일원인론이라고 매도한다면 그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탄소가 없었다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인간의 활동도, 그 어떤 사회적 또는 경제적 현상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현상은 '오직' 탄소와 '연관해서만 유의미하다'. 그것들은 바로 탄소가 지구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그는 LTFRP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위기에 관한 부재원인론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하비는 "자본에 의해 구성된 유기적 총체는, 앤드루가 지지하고 있으며 그의 주장과 달리 나 또한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이윤율 하락을 향하는 구조에 의해 약화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가 수익성을 하락시키고 이러한 수익성 하락이 위기로 이어지는 경우와 같은 몇몇 예외적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그가 부인했다고 말하진 않았다. 이미 말했던 바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그는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갖는 이유를 성공적으로 설명한 일반법칙으로써 진정한 법칙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또한 이 법칙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위기 이론이 "태양이 궁극적으로 수명을 다할"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4] 그의 답변의 결론은 이러한 가능성들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유기체 비유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적절하다."(강조는 필자)

허수아비 LTFRP

떨어지는 사과 유추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비유라는 하비의 주장은 내 글을 잘못 이해한 것이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자본의 본성'을 아래의 말처럼 한정짓는다는 그의 주장은 같은 식으로 다룰 수 없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은 결국 경쟁이라는 추동력에 따라 상대적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며 사라지는 것으로, 뉴턴 세계의 시계와 같은 기계적 확실성은 끝을 맺는다. 자본의 노동 고용비율은 자본의 이익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이윤율은 떨어지게 된다. 유기적 전체로서 자본의 진화를 보고 경험해온 내게 이러한 기계적 모델은 지나치게 결정론적이고 너무나 일방적이며 결국엔 목적론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위기론은 금융화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앤드루 클라이먼은 가장 단호하게 주장해 왔다"는 그의 처음 주장처럼 그 어떤 근거와 인용도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틀렸다. 정말 명확히 말하자면 이 문제에 대한 내 입장은 내 것이라고 치부되는 주장의 반대편이다.

위기를 통한 자본가치 파괴는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런 파괴가 초래하는 수익성 회복도 역시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이윤율은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 걸쳐 확고한 장기 지속적 추세를 갖지 않았고, 그런 추세를 연역하거나 예측하는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다(클라이먼 2012, 53쪽).

뉴턴 물리학으로부터 가져와 결정론적 전망을 표현한 기계적 은유의 예로는 아래의 글이 문장이 더 적절할 것이다.

유체역학의 법칙들이 세계의 어느 강에서든 한결같이 적용되듯, 자본순환의 법칙들 또한 어느 수퍼마켓에서든, 어느 노동시장에서든, 어느 상품생산 체계에서든, 어느 나라에서든, 그리고 어느 가구에서든 한결같이 관철된다.

그런데 이 결정론적 비유는 내 것이 아니다.[5] 이 문장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하비 1990, 국역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ㆍ한울) 394~395쪽에 나온다.

하비는 그의 허수아비 LTFRP와 이에 기반한 위기이론의 혐의를 풀어주는 데 매우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윤율 하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기계론적 이해를 나의 것으로 돌리면서도 그는 다시 또 LTFRP와 이에 연관된 위기이론에 일반적인 '환원론'과 같은 의미로 일원인론의 책임을 묻는다. "(이윤율 하락의 구조)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죽는 원인으로 오직 심장마비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강조는 필자) 아니, 이건 그것과 다르다. '주로''오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위기의 원인으로 이윤율 하락에 주로 초점을 맞추진 않는다(대침체에 대한 내 책에서 다룬 2007~2008년 금융위기의 12가지 원인과 내 반론 1부에 정리한 목록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적게 이에 대해 말한다.

특정한 변수가 실제로 주요한 첫 번째 원인이 될지, 아니면 두 번째 원인이 될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런 역할도 못할지는 미리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경험적 증거를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하비가 토론의 방향을 그의 비유 대 나의 비유로 바꾸기 전 우리가 했던 게 바로 이것이다).

자료를 분석하기 전에, 나는 현실의 이윤율이 1980년대 초반 이후 반등하지 못했다는 어떠한 사전적인 믿음도 갖지 않았고 … 내가 미국 법인들의 수익성의 지속적인 하락이 이번 대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이고,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사실에 매우 잘 부합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내가 많은 자료들을 고속으로 처리하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에는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클라이먼 2012, 28쪽).

탐구의 길을 막아선 안 된다

심장마비에 대한 하비의 비유엔 문제가 있다. 왜냐면 찰스 샌더스 퍼스[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가 제시한 '사고의 첫 번째 규칙'을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탐구의 길을 막아선 안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접할 그 어떤 이론적 시도도 원칙적인 논리적 잘못은 없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시작된 연구는 방해없이, 그리고 낙담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를 향한 전진의 길목에 방어벽을 친 철학을 세우는 것은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강조는 원문)

심장마비의 비유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 경향이 위기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조차 막으려는 선험적 금지명령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증거를 살피고 평가하기에 앞서 이런 가능성이 선험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어쨌든 "다른 것들과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로 구성된 이른바 '유기적 전체'라는 비유는 "내가 자본에 대해 경험하고 본 방식에 딱 들어맞는" 그저 "내게 강한 인상을 준 비유"이기 때문에 말이다.[6]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가능성을 그들이 추가적으로 밝힐 때 비유는 탐구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험적으로 가능성을 배제하곤 했고, 탐구의 길을 가로막았으며, 연구를 방해하고 의욕을 꺾어 "진리를 향한 전진의 길목에 방어벽을 친다".

하비의 심장마비 비유는 "영리하고 기만적"이다. 이는 우선 심장마비가 인간을 죽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일 가능성을 -귀납적으로- 거부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우리가 이미 확보했다는 것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가 사회적 통념과 달리 '주요'란 단어를 '유일한'으로 대체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요란 단어를 복원해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흡연이 폐암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 화석연료의 사용이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 재정적 문제가 미국 대학생들이 학교를 졸업 못하는 주요 원인일 가능성도 증거에 앞서 배제하도록 명령할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고 답한다면 자본주의 위기의 실제 주요 원인을 제기한 것일 수 있는 이론은 증거를 살펴보기도 전에 왜 배제하라고 명령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한 원인이 주요한 것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을 만큼 호기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경험한 사건과 현상의 원인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큰 호기심을 가지지 않기도 한다고 이해한다. 나는 그들의 취향을 굳이 바꾸고 싶진 않다.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갖고 탐구하려는 길을 그들의 취향이 방해만 않는다면 말이다.

증거로 돌아가기?

그런데 또 짜증나는 것은 내가 자본주의의 위기가 한 가지 주요 원인에서 비롯한다고, 심지어 '현재 이곳'의 위기-대침체와 그 여파-가 한 가지 주요 원인 때문이라고도 제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주장한 것, 즉 미국 기업들의 수익성 하락은 대침체의 중요한 근본원인이며 이윤율 하락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이 경우 매우 잘 들어맞는다는 주장은 그리 대담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 증거를 살피기도 전에 이 가설을 배제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도 문제다. 이미 난 증거를 제시했다. 내가 예전에 제시한 이윤율 하락의 증거에 대한 하비의 몇몇 반론을 다루며 나는 예상한 증거에 대한 해석과 내 분석을 보여줬다. 그는 이에 대해 마땅한 반증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제시한 노동력 성장 통계는 이윤율이 상승하거나 LTFRP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더 중요한 건, (정당한) 증거들을 무시하는 것이, 또 이 증거로부터 이끌어낸 내 추론을 비유적으로 옳지 않은 '비유 형태'(그런게 있지도 않은데)라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는 무관한 어떤 것으로 묵살하는 게 적절하냐는 점이다. 하비를 부당하게 비난하지 않게끔, '독자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비유 형태를 단순히 비교하거나 대비시킨 것이었다고 이해되지 않게끔 내가 여기서 다시 반복하해보자면 ①나에 대한 그의 대답은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유기적 비유는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잘들어맞는다"는 단정적인 주장으로 결론을 맺으며 ②이 결론은 경험적 증거에 대한 고려없이 이뤄진다. 그는 내가 제시한 증거에 도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험적인 그 어떤 종류의 합당한 반증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더 잘 들어맞는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 자신에게 '인상적'이었던 것과 자신이 "자본을 어떻게 보고 겪었는지"에 대해 늘어놓을 뿐이다.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승인하기 위한 목적이나, 결론의 정당성을 사후 승인하기 위한, 실제론 정치적 편의를 위한 목적을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이런 식의 방법이 명백한 증거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이런 방법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단점을 지닌다. 벌어진 일을 사람들이 '보고 겪는' 방식의 이해는 실제 일어난 일과 다르기 십상이며, 이런 방식은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부적절하기 일쑤다.
[7] '보고 겪은' 일의 정확성과 타당성을 받아들이기 전 주의깊게 명확한 증거를 숙고하고 추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경험은 사건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곤 한다. 하비는 고용의 성장이 그 자체로 이윤율을 향상과 LTFRP가 작동하지 않는 중요한 증거라고 주장한다(하비 2014). 그는 상품의 가격이 가치와 일치할 때만 마르크스의 법칙은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여러 반론들이 이미 예측된 것일뿐 아니라 충분히 해명됐음을 들어보지 못한 듯 이윤율 하락 증거의 현실적 적합성에 의문을 표한다. 그와 같은 오해에 기반한 주관적 경험에 의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위기에 관한 이론이 '지금 여기'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내 생각에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독단주의에 맞서 싸워 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은 무척 중요하다.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완강히 고집하는 것은 독단주의의 한 형태다. 하비에겐 분명 이런 잘못은 없다. 그는 "그럼에도 앤드루와 나의 비유 형태 모두가 옳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부당하게도 내가 제시하지도 않았고 지지하지도 않은 비유를 탓하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최소한 독단적이진 않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독단주의도 있다. 명백한 증거와 논리적 추론을 두고도 믿음을 완강히 고집하려는 태도다. "당신은 당신의 의견을 지녔고 나는 나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거나 "당신과 나의 경험은 다르다"는 말은 열린 태도나 상호 존중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가 증거와 논리를 묵살하기 위한 것일 때 이는 자신이 잘못됐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걸 거부하는 독단주의에 다름 아니다.
[8]

하비가 두 번째 형태의 독단주의에 빠져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하비는 경험적 증거를 두고 그의 생각을 다시 숙고해보길 거부하진 않는다. 단지 그는 증거와 겨뤄보질 않았을 뿐이다. 그에겐 여전히 그럴 기회가 있고 나는 그가 그렇게 했으면 한다. 이는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게 아니다. 우리 지식인들에겐 이와 다른 책임도 있다. 그 책임 중 하나는 알곡에서 쭉정이를 골라내듯
[9] 경험적으로 옳은 것,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분하는 일이다. 이는 중요한 책임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독자들은, 그들 스스로 증거와 주장을 적절하게 평가할 지식, 그리고 이 지식을 충분히 쌓는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의 임무다.

독자들은 주로 시간과 지식이 부족한 이유로 그들 일부가 스스로 평가할 수 없는 증거와 주장들 대신 더 '유용한' 비유의 비교를 찾는다. 어떤 독자는 그 비유가 맘에 드는지 안드는지에 기댐으로써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더 잘 적용되는' 것을 대신 결정해주는 '유용한' 의견에 마음이 쏠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다른 자본의 화신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벌어진 일에 책임이 있는, 자본의 여러 화신들 중 하나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변혁시키길 바란다면,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또 망가지는지에 대한 진정한 지식-증거와 이 지식에 기반한 주장을 갖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유용한' 제안은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클리포드(William Kingdon Cliffordㆍ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가, 1845~1879)가 '믿음의 윤리학'에서 설득력있게 주장한 데 따르면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모든 믿음은 항상,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쟁점을 판단하기에 능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은 "믿음을 굳힐 시간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1990.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s of Cultural Change. Cambridge, MA and Oxford: Blackwell Publishers.('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구동회ㆍ박영민 옮김, 한울 2013)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Kliman, Andrew.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Marx, Karl. 1971. Theories of Surplus-Value, Part III. Moscow: Progress Publishers.
_______. 1989b.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_______. 1990.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I.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 개역판)
_______. 1991.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III.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 개역판)
Quine, W. V. O. 1960. Word and Object, Cambridge, MA and London: MIT Press.

주석
[1] 이 반론의 1편에서 내가 썼듯이 마르크스의 법칙은 자본주의 하에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노동절약형 기술의 발전 때문에 일어난다. 생산비용의 절감에 따라 기술 혁신은 생산가격의 상승을 저지시키는 경향을 띠며 이는 기업이 생산을 위해 투자하는 자본량이 늘어나는 만큼 빠르게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을 어렵게 한다.
[2] 하비와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충돌은 여기에 있다. 내가 언급했 듯이 그는 처음 글(하비 2014)에서 자주, 그리고 매우 길게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하비의 답변에선 마르크스가 거의 사라졌다. 그는 LTFRP와 이에 기반한 위기이론을 다루면서 단 몇 번만 [마르크스를] 언급하며, 거의 대부분을 비유와 연관해 그와 마르크스의 대립을 자신과 나와의 대립으로 그려낸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왜인가? 하비는 왜 갑자기 증거에 대한 토론에서 비유에 대한 토론으로 방향을 바꿨는가? 클라이먼이 제안한 '비유 형식'이 옳을 것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봐도 되는가. 그렇다면 대침체(the Great Recession)의 발생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옳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왜 이리 다른가?
[3]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만취상태를 분석한다"는 문장은 타데즈 보이-젤렌스키(Tadeusz Boy-Zelenskiㆍ폴란드 시인, 1874~1941)가 마이클 드 몬테인(Michael de Montaigneㆍ프랑스의 르네상스 철학자, 1533~1592)의 '만취에 관하여'라는 수필을 묘사하며 처음 쓴 표현이다.
[4] 하비는 아마 이 표현을 "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자본주의의 붕괴는 태양이 꺼질 때까지처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로부터 빌어왔을 것이다.['자본의 축적', 황선길 번역, 826쪽(Ⅱ책) 128번 각주]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이윤율 하락 때문에 반드시 혹은 그렇게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와 달리 그는 "상쇄요인들이 작용하여 그 일반법칙(이윤율의 경항적 저하의 법칙)의 효과를 억제하고 취소"['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289쪽]하기에 LTFRP는 "공황에 의하여 끊임없이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것"['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 322쪽]인데 "항구적인 공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잉여가치학설사' 이성과 현실, 589쪽 *표 각주]고 주장한다.
[5] 현대 유체역학의 나비에-스토크스방정식이 유체의 흐름은 '혼돈 상태'일 것이라는 가설에 기반해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여기서 혼돈 상태는 기술적인 정의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 다르다. 실제 예측이 불가능함에도 혼돈 상태의 동적 체계에서 변수의 작용은 완벽히 결정돼있는 것과 같다.
[6] 이 묘사에 딱 맞는 유일한 유기적 총체로는, 콰인(1960, p.52)의 '가바가이(gavagai)'가 있다. 이는 우리 중 나머지가 토끼 전체에 자극받을 때 가상의 '원초적' 자극으로서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이란 구절은 그의 '위기이론과 이윤율 저하'(하비, 2014)와 최근 답변에서 반복된다. 그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학설사[3부 20장 3절]'*에서 이 말을 인용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분리돼 있고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요인들의 폭력적인 융합으로서 경제위기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 하비가 이 구절을 위기의 원인들은 서로 분리돼 있고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며 인용한 것과 달리 말이다.

※하비가 인용했던 '잉여가치학설사' 3부 20장 3절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링크)
The capitalist directly produces exchange-value in order to increase his profit, and not for the sake of consumption. It is assumed that he produces directly for the sake of consumption and only for it. [If it is] assumed that the contradictions existing in bourgeois production?which, in fact, are reconciled by a process of adjustment which, at the same time, however, manifests itself as crises, violent fusion of disconnected factors operating independently of one another and yet correlated?if it is assumed that the contradictions existing in bourgeois production do not exist, then these contradictions obviously cannot come into play.
자본가는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바로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그가 직접소비하기 위해서, 오직 이를 위해서만 생산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부르주아적 생산에 존재하는 모순-실제에서 이 모순들은 존재함과 동시에 교정의 과정을 거쳐 조화를 이룬다. 물론 위기로서 그 자체는 서로에게 독립적일뿐 아니라 연관해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의 폭력적 융합이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순들이 작동하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할 것이다.

[7]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 1037쪽) 그 둘은 일치하지 않기에 '과학'이 필요하다.
[8] 난 관찰의 이론의존성과 같은 것들과 [이를] 비교할 수 없음을 잘 안다. 이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 지점에서 내가 논하는 것에 적절치 않다. 증거와 이유가 대립을 종식시키기에 불충분한 경우도 있고 증거와 이유가 충분하지만 대립의 한 편이 그 결론을 받아들이길 독단적으로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9]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 분명히 하자면 이는 '자본의 본성'을 농업생산에 비교하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다.

"영국으로 말하면 런던 금융가의 자본가들은 현 체제의 수혜자들임이 분명한 반면 그 주변부의 산업자본가들은 스스로 피해자로 느끼고 있다. 이들이 현 국제체제를 타파하고자 이 국제체제에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 중·하층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 '브렉시트와 그 해법' 김승호ㆍ링크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표가 다수인 것으로 드러나자 많은 지식인들이 충격을 받은 듯하다. 보통은 멍청한 인종주의자들의 불장난이라며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 좀 더 점잖은 쪽도 위 글처럼 인종주의자 혹은 자본가의 한 분파에 '동원'됐다는 식이다. 전자든 후자든 교정 불가능한 엘리트주의로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이번 영국 국민투표는 바로 이 오만한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다.

인민이 그 스스로 정답을 알고 있다는 식의 NL과 같은 대중추수주의에 동의하진 않는다. 하지만 인민의 정서라는 현실에 기반해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1920~30년대 독일에선 바로 여기서 좌파가 실패했다. 사민당도, 공산당도 말이다. 그리고 그 자리 나치가 성장했다. 그러니까 우린 지금 영국에서 파시스트의 현실화 된 힘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21세기 첫 10여 년간 반자본주의 운동이 반세계화 운동으로 시작돼 성장할 때 극우파는 운동 곳곳에서 개입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좌파는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운동 자체의 성패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극우파의 국수주의적 정서는 운동을 지배하지 못했다.

이것을 패배가 아니라 기회로 만들려면 현실에 대한 보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그러한 판단은 좌파보다는 우파에게서 더 많이 보이곤 한다. 아래는 영국의 시사 주간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스펙테이터의 정치는 보수에 가까울 것이다. 필자가 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가난한 이들, 노동계급을 계속 그들(they)로 표현할 정도다. 이들의 계급의식과 계급적 본능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 상당히 많은 오역이 포함돼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지적해주시면 즉각 반영하겠습니다.
따라서 인용하시려면 아래 링크로 직접 찾아가 원문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브렉시트 지지자가 멍청이거나 인종주의자인 건 아니다, 단지 가난할 뿐
그들은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함으로써 자신들을 경멸하던 엘리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Brendan O'Neill, 스펙테이터, 2016년 7월 2일ㆍ링크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일을 저질렀다. 공공주택에 살며 '선'을 읽는, GCSE[영국의 중등교육자격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 (이 시험은 주로 계급지표를 보여줄 뿐 어리석음을 말해주진 않는다) 이들 말이다. 이들이 들고 일어나 투표소를 짓밟으며 유럽연합 반대를 외쳤다.

이번 국민투표 결과는 쇠스랑만 안들었다 뿐이지 현대에 재현된 농민반란과 같다. 투표결과는 인상적이다. 잘 사는 이들은 잔류를, 곤궁한 이들은 탈퇴를 지지했다. 브렉시트 지지자와 잔류 지지자들
[The Brexiteer/Remainer]은 거의 완벽하게, 정말 기막히게 계급 구분선을 따라 나뉘었다. 생산직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86%라는 엄청난 수가 탈퇴에 표를 던졌다. 생산직이 적은 영국의 다른 소수 지역에서는 42%가 그랬을 뿐이다. 주택가격이 평균 28만2000파운드가 안 되는 지역에서는 79%가 탈퇴를 지지했다. 주택가격이 그 이상인 지역에서는 단지 28% 만 그랬다. 교육수준이 낮은 (예를 들면 GCSE에서 성인 4분의 1 만이 'five A'에서 'Cs'까지의 등급을 획득한) 240개 지역에서는 83%가 탈퇴에 투표했다. 소득수준 기초조사 순위로도 마찬가지다. 다수가 적은 임금(2만3000파운드 이하)을 받는 지역의 77%가 탈퇴에 표를 던진데 비해 급여가 괜찮은 지역에선 35%가 그랬을 따름이다.

이 얼마나 극명한 차이인가. 당신이 육체노동을 하며 보통의 집에 살고 있고, 대학문이라곤 한 번도 넘어본 적 없다면 당신은 유럽연합에 '쥐어짜내지고 있다'고 말하는 걸 이웃한 여러 도시의 부유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보다 더 선호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스코틀랜드의 16개 지역은 생산직이 다수지만 탈퇴보다 잔류에 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계급은 투표에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는 정말 내게 놀라운 일이다. 사회등급이 D 또는 E(반숙련 또는 미숙련 노동자와 실업자)인 사람이 다수인 영국의 50개 지역 중 오직 세 지역 만이 잔류에 투표했다. 세 곳이다. 이는 기득권층이 그들에게 '예스'에 표를 던져야 한다고 고집했음에도 매우 가난한 47개 지역이 일제히 '노'를 외친 것이다.

이제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영국의 가난하고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유럽연합과 영국의 그 지지자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줬다. 또 그들은 영국이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의 오래된 이데올리기적 분열을 떨쳐내고 우리 모두가 사회의 '주주'로 간주되는제3의 길 또는 탈계급 사회에 들어섰다는 것과 같은 블레어주의 신화를 완전히 깨버렸다. 국민투표 후 우리는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여전히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것은 소유냐 소유하지 않았냐의 문제 만은 아니다. 이는 관점의 전쟁이다. 사회의 부유한 부류는
[국내] 정치가 외부의 국제기구들과 연관되는 것을 선호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그렇지 않다. 유복한 이들 중 소수 만이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몫을 주장할 뿐 (무엇보다도 '주주 사회'라는 터무니 없는 말을 앞장서 홍보하는) 여론 주도층은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 농민 반란이 엘리트에게 준 충격으로 인류학자와 같은 이들이 이러한 미지의 집단을 조사하게 됐고 그들은 현재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정신 없이 연구하고 있다. 그들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았다. 하나는 분노고 더 나쁜 다른 하나는 연민이다. 분노한 이들은 서민들이 탈퇴표를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전적으로 인종주이적이진 않지만 나이젤 파라지
[영국독립당의 창립자이자 대표, 7월 4일 대표직을 사임했다]와 같은 이들의 악질적인 외국인 혐오 선동에 속아넘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악질 선동가들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는 이런 생각은 1840년대 차티스트 운동이 들었던 것과 같은 알맹이 없는 설명이다. 가난한 이들은 "성숙한 지혜'를 지니지 못해 다른 어떤 계급보다도 더 잔혹한 극단주의자들로 바뀌기 쉽다"는 오만한 비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국제적 대도시의 시민들은 약자들을 다시 한 번 바로 그 자리에 세워 고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사에 따르면 반유럽연합 진영의 사람들이 외국인 혐오에 휘둘리고 있다는 주장은 일축된다. 투표 후 ComRes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브렉시트를 지지한 이 중 단 34% 만이 그들이 표를 던진 주요 이유로 이민자를 언급(이민자 언급이 꼭 인종주의와 연관된 것은 아니기도 하다)하고 있다. 절반이 넘는 53%의 사람들은 영국이 스스로의 법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유럽연합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어리석게도 포그롬[집단 학살, 러시아에서의 유대인 학살에서 유래]의 편을 들어준 것이라며 모욕당한, 전국을 휩쓴 [반란자들의] 발자국은 실제론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다.

이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평에 대해 말해보자. 그들의 진단은 치료법의 하나다. 유복한 사람들 중 소수 만이 분노 충동에 시달린다. 무시당한다고 느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당연한 건 아니지만 채찍을 휘두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겉보기에 배려 넘치는 대중에 대한 오프라
[아마도 오프라 윈프리를 말하는 듯]식의 접근법에 넘어가선 안된다. 이 또한 그들의 민주적 선택을 정치적 선언보다는 본능적 비명 취급함으로써 비하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선 기득권층의 입장에 대한 의식적 반란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 들어달라는 감상적 애원이 된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탈퇴표를 던진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본 결과 그들은 정치계급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에 반대한 것이다. 그들은 엘리트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많이 간섭하는 걸 더 문제 삼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비난받는 데 신물 나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들을 낮잡아 보는 국가기구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 혹은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을 도덕적ㆍ사회적으로 교정될 필요가 크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내가 자랐던, 노동계급이 극소수인 런던 북서부 교외의 번트오크에서 탈퇴 투표자를 찾긴 어렵다. 바넷구 전체를 살펴도 그렇다. 이 곳에선 6만1000~10만 명의 사람들이 잔류에 표를 던졌다. 이들은 모두 비슷하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를 무릎 꿇렸다." 나와 대화했던 모두는
[탈퇴표에 투표한] 그들이 영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해서 바로 인종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 중 다수가 집시(번트오크에는 다수의 집시가 살고 있다)와 함께 일하며 어울려 산다는 것은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그들의 책임이 아님을 보여준다.

[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가난한] 그들은 아랫사람 취급 받으며 모욕당하고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시당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계급 문화와 태도가 멸시받는다고 느낀다. 관료집단은 이들을 건강하지 못하며, 정치적으로 공정치 않고, 축구에 지나치게 몰입하며, 자식 낳는 데 너무 집착하고, 술독에 빠져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잉글랜드라는 사고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반란은 인종주나 유치한 분노의 발작이 원인이 아니다. 이를 숙고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경멸하던 엘리트의 콧대를 꺾을 기회를 알아채 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발휘했고 그 과정에서, 맙소사. 세계를 변화시켰다.

2016.07.04 02:41

브렉시트가 보여준 것 쟁점/세계경제위기2016.07.04 02:41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만국의 민주주의당들의 연결과 합의를 이루는 것에 열중한다. ……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족쇄 말고는 공산주의혁명에서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공산주의 선언',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54쪽

'공산주의 선언'의 마지막 구절이다. 자본주의 세계의 혁명적 전복을 꿈꾸며 실천하는 이에게 이 구절은 잊을 수 없는 경구다. 그러나 한동안 이 구절은 명분일 뿐 실질적 행동지침이 되지 못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로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폐해가 너무나 극명해졌을 때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마르크스주의적 좌파의 행동 지침이 됐다.

'세계화 반대'. 이 구호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생산물의 판로를 끈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전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둥지를 틀어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접속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을 우려먹음으로써 만국의 생산과 소비가 범세계적인 꼴을 갖추게 했다. 반동배에게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밑에서 그 일국적 기반을 빼내가 버렸다. 태고의 일국적 산업들은 절멸되었고 또 나날이 절멸돼 가고 있다."
- 앞의 책, 12~13쪽

자본주의 세계에서 시장의 세계화는 당연한 일이다. 노동계급의 반란과 새로운 세계의 건설은 이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선 당연히 '세계화 반대'는 19세기 러다이트(기계 파괴 운동)와 같이 퇴행적 운동 취급 받았다. 어떤 이들은 이들을 '대안 세계화'라는 구호로 감싸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배경엔 자본주의적 발전이 노동계급에게 가져온 퇴행과 후퇴가 있었다. 일부 극우파의 퇴행적 반발이 이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음에도 반세계화 운동이 21세기 초 반자본주의 운동의 부활에 큰 기여를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운동은 2005년 프랑스에서 유럽헌법 반대 투쟁에서 절정을 맞았다. 신자유주의적, 즉 자본주의적 유럽연합이 노동계급이 원한 '국제주의'는 아니었던 것이다.

10여 년이 흐른 후 다시 영국에선 유럽연합 잔류를 둔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Brexit, 유럽연합 탈퇴)' 진영이 승리를 했다. 10여 년 전 처럼 이 운동엔 퇴행적 민족주의 우파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얼핏 보면 이는 난민의 이주를 반대하는, 파시스트의 광신적 민족주의의 승리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유럽연합에 잔류했다면 이들 난민들의 처지는 더 나아졌을까. 유럽 전역을 휩쓰는 인종주의는 약화됐을까. 오히려 이 인종주의,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고무한 건 유럽연합과 이를 지지하는 각국 정부,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적 중도파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영국에서 유럽연합 잔류를 두고 한 국민투표의 결과를 극우파의 승리로 쥐어주는 건 정말 누구인가. 오히려 극우파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는 건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유럽연합에 대한 타협적 태도 아닌가.

아래는 'ROAR Mag'의 제롬 로스가 쓴 글이다. 그는 이번 국민투표가 실제로는 유럽연합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가 '신자유주의 중도파'(블레어의 추종자들을 포함한)라고 부른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박이었고 그들의 도박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삶을 파괴당한 '평범한 노동계급'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세계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더 많은 토론을 바라며 아래 글을 옮긴다.

※ 상당히 많은 오역이 포함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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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인용하시려면 아래 링크로 직접 찾아가 원문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브렉시트의 증언: 신자유주의 중도파는 이제 끝났다
Jerome Roos, June 29, 2016ㆍ링크

영국은 광범위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영국은 정당성 위기의 폭풍우 가운데 서게 됐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사임했고 여야는 분노한 군중 사이에서 내부 권력투쟁에 빠져들었다.

브렉시트 캠페인 지도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어떤 명확한 계획도 없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금융분야의 후폭풍은 계속해서 시티
[금융가가 밀집한 런던의 중심부]를 뒤흔들고 있다. 오늘[6월 29일]까지 파운드화는 1985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가치가 떨어졌고 정부의 신용등급은 2단계나 강등됐다. 세계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어 금요일과 월요일 주식시장에서는 각각 3조 달러가 증발했다. 더 나빠질 것이 없을 정도로 최근 영국 전역에서 증오범죄가 유행처럼 번져나간다는 보도를 보아 왔다.

[브렉시트 후 언론의] 헤드라인을 살펴보면, 포스트모던 시대를 관통하며 묵시록처럼, 하지만 은밀히 삶을 잠식해온 충격적 경험은 손쉽게 잊혀지곤 한다. 금융 언론은 세계시장이 받고 있는 충격에 대해 분 단위의 보도를 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자유주의적 칼럼니스트들은 이번 사태를 영국과 유럽이 2차 세계대전 후 겪는 '최악의 위기'라고 반복해서 선언하고 있고 뉴욕타임스는 이미 브렉시트를 세계질서가 붕괴하는 명백한 징후로 취급하고 있다.

그 중 최고는 토니 블레어가 지난 주말
[뉴욕타임스의] 같은 지면에서 예이츠의 '핏빛 어두운 조수'처럼 '말도 안되는 아나키즘'이 세계에 다시 한 번 풀려난다면 "중도파가 [상황을] 이끌어야 한다"며 세계화와 그의 실패한 제3의 길을 방어하기 위한 간절한 호소를 펼쳐놓은 것이다.

이 모든 소동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하다. 영국의 유럽연합 회원 자격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친 캐머런의 위험한 도박이 비참한 역풍을 맞은 것이다. 브렉시트 진영의 기대치 않았던 승리는 그들 중심부의 영국해협 양편의 좌우로 나뉜, 또 그 사이의 다리를 불태워버린 양 동맹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의 역사적 성격을 더는 부정할 수 없다. 세계는 지난 목요일
[2016년 6월 23일] 이후 새로운 자리에 서게 됐고 유럽과 영국이 미지의 영역에 들어섰음은 분명해졌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숨겨져 있는 진실은 금융에 미친 악영향과 최근의 정치적 혼란이 유럽에서 영국의 지위보다는 해협 양안의 광범위한 정치 엘리트, 보다 일반적으로는 유럽적 시민들과 더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물론 인종주의와 반이민자 정서는 브렉시트 캠페인이 시작될 때 중심 역할을 했지만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영국인의 52%가 파시즘에 기울어져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삶의 수준이 후퇴하며 그들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와중에도 그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을 찾을 수 없었고 책임지지 않는 기술관료들이 그들의 삶을 '통제'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브렉시트는 우선 그 무엇보다도 쫓겨나고 힘을 잃은 이들의 정치적 선언이다.

이 선언이 그토록 강렬한 이유는 많은 수의 매우 불안정한 사회적ㆍ정치적 단층선들, 브렉시트 이전부터 흔들리고 있었으며 브렉시트가 없었더라도 동요하고 있던, 브렉시트 이후에도 계속해서 오랫동안 덜컥거리고 요동할 단층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국민투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잔류가 승리했다고 장기적으로 매우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긴 정말 어렵다. 잔류 진영의 승리가 불만들 중 그 어떤 것이라도 진정시키고 사회적 긴장을 해소하며 국민투표의 충격적 결과의 배후에 놓인 정치적 갈등의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브렉시트가 영국독립당(UKIP)과 보수당 우파의 광신도들에게 승리를 부여한 것이 명백해 보이더라도 잔류 진영의 승리는 바로, 무엇보다도
[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사람들이 광신도들과 같은 편에 서게 만든, 피학적이며 민주주의에 반하는 신자유주의의 지속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극우의 광적인 민족주의와 친유럽연합 진영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대립하는 양극으로 더 이상 보아선 안 된다. 실제로 전자는 후자의 논리적 결과다. 이 둘은 살과 피를 공유한 샴 쌍둥이다. 친유럽연합 진영이 투표자들에게 제안할 수 있었던 건 이들을 브렉시트로 이끌, 그 결과 나올 것들에 대한 광신적 공포를 조성하는 것과 같은 구조적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일 뿐이다.

결국 영국인들이 실제로 현실이 되건 안되건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증은 없었다) 유럽연합을 떠나는 데 표를 던진 건 더 깊고 심각한 위기의 징후다. 최근 몇 년간 세계금융위기로부터 정치기구의 심각한 정당성 위기로 발전해온 민주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이제 사회적ㆍ정치적 질서의 통치성 위기로 전화해 폭발하고 있다. 영국과 유럽의 정치에 열려진 현재의 단층선들은 결국 이 국민투표 결과와 상관 없이 대륙의 전후 질서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있다. 브렉시트는 단지 정치적 해체의 과정에 속도를 더한 것 뿐이다.

보통 사람들이 유럽연합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 묻기 위해 데이비드 캐머런이 국민투표를 요청한 게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해 알렉시스 치프라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당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 위험한 도박에 자포자기식으로 국민투표에 판돈을 건 것이다. 보수당의 유로회의론 우파를 침묵시키고 그의 지도력에 거듭해서 도전하는 의원들을 무장해제시켜 미래 UKIP로의 이탈을 예방하기 위해서 말이다. 즉 이번 투표는 정말로 유럽연합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기에 처한 유럽의 신자유주의 중도파가 자신의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 중 하나일 뿐이다. 이는 영국의 토지귀족과 도시 부르주아지의 기반을 다시 탄탄히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되살아난 반동적 우파에 직면해 급격히 붕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제레미 코빈에 맞서 진행되는
[노동당 내] 쿠데타도 유럽과 약간의 연관을 지닐 뿐이다. 6월 13일 텔레그래프 보도에 의하면 노동당 하원의원들과 당내 블레어파는 몇 달 전은 아니겠지만 몇 주 전부터 국민투표 후 그 결과와 상관없이 '24시간 공세'를 통해 당 내 좌파 지도자인 코빈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반란을 계획해 왔다. 다시 말하자면 유럽연합과 관계 없이 말이다. 이는 흔들리는 신자유주의 중도파의 무능한 시종들, 즉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와 금융화, 국제적 군사 개입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은 당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기 위해 일을 벌렸지만 현재는 반발하는 '강경' 좌파에 직면해 급격히 붕괴, 또는 스스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따라서 블레어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예이츠의 종말론적 표현을 차용한 것은 정말 꼴사나운 짓이다. "사물은 흩어져 나가고 중심은 흔들린다."
[원문은 인용 표시 없음. 예이츠의 '재림ㆍThe Second Coming'] 이것이 문제의 요점이며, 이로부터 중도적 정부기구의 병적인 종말론적 담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세계화 된 후기민주주의적 공상적 세계는 바로 눈 앞에서 위기에 처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수동적 투표자이자 소비자들이, 긴축과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인해 뿌리내린, 결국 손상된 정치적 위기이자 향연으로서 선거의 결과들에 기반해 번창한 여러 '분노한 포퓰리스트'들에게 갑작스럽게 집어삼켜져 동원됐기 때문이다.

분명 지배적인 정치질서의 계속되는 붕괴에 대한 대응이 더 이상 같을 수는 없다. "중도파가
[상황을] 이끌어야 한다"는 블레어의 가망없는 외침에 맞서, 또 그의 의회 내 신자유주의적 시종들의 얄팍한 음모에 맞서, 그리고 이 모든 변절자들에 맞서 현재 제레미 코빈이 선 최후의 보루에 함께한,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이 순간에 극우파에 맞선 선거의 평형추에 자리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세력인 노동당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좌파는 굳게 뭉쳐 외쳐야 한다. 중도파는 실패했다고.

무엇보다 인종주의자와 반동들이 선거결과의 공백을 차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약해지고 분열한 좌파가 눈 앞의 역사적 전투를 목전에 두고 함께 행동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절망한 것과 달리 이는 현재 매우 간단한 선택이다. 코빈이냐 아니냐. 전투 태세를 갖춘 노동당 지도자가 독립적인 영국에 민주적 사회주의나 자동적으로 만족스러운 공산주의를 가져오든 그렇지 않든 원칙적 좌파는 이제 모든 인종의 평범한 노동계급 인민을 그들 사이에 풀려난 괴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수호자다.

※앤드루 클라이먼의 데이비드 하비 비판 2편을 아래 옮깁니다. 주석과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며 대괄호[ ] 안은 옮긴이가 덧붙인 내용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2편: 수익성에 대한 오해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3월 12일ㆍ링크
증거는 명확하다.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대침체 때까지 미국 기업들 전반의 이윤율은 떨어졌고 이러한 하락은 거의 전적으로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 따라 설명된다.

이 논문 1편[링크]에선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와 함께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마르크스가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학 법칙"으로 인정한 법칙(LTFRP)에 대한 하비의 해석(하비 2014ㆍ링크)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하지만] LTFRP가 1980년대부터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하비의 믿음은 다루지 않았다.

LTFRP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하비의 유일한 '증거'는 노동인구 데이터에 관한 논의였다. 그는 이윤율(즉 투하자본의 규모에 대한 이윤량의 비율)에 관한 그 어떤 직접적인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며 이윤율이 하락했음을 보여주는 나와 다른 이들이 내놓은 증거에 도전했다(그림 1을 보라).
[1]


그림 1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하비는 이 증거들에 관해 "몇몇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점에서 매우 옳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도 던진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의문을 들어보지도 고려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논지를 전개하는 게 문제다. 그 의문들은 실제로 오래된 상투적인 질문이다. 그러한 질문을 받아온 이들 중 한 명으로서 나는 데이터를 모으고 해석해오면서 그것들 모두를 다뤄왔다. 그러므로 그 질문들에 [모두] 답할 필요는 없다. 데이터에 대한 내 분석과 해석은 이미 그 의문들을 예상하며 다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 의문들이 어떻게 설명되는지 확인해주기만 하면 된다.[2]

그가 "대부분의 이윤율 저하 논문"에서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의문"이라며 제기한 "어떤 이유에서든 이윤율이 저하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그가 비판하는 핵심은 불분명하다. - 그러므로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마르크스가 보여주려 한 (노동절약형 기술변화의) 특별한 동학의 존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정말 옳다. 그래서 내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대침체 때까지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궤적을 고려하며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인 하락이 분명하게 사실과 일치한다"(클라이먼 2012, 213쪽)고 결론 내린 이 결론이 단순히 기업들의 이윤율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이는 여러 잠재적 하락 원인을 (분해해) 구분하는 '분해분석법(decomposition analysis)'과 각각의 요인들이 이윤율에 대해 갖는 효과의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원인을 연구하는 데 사용한 이윤율을 분석하는 표준적인 방식이 특별히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하비가 강조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다시] 분석해보겠다.

전통적으로 이윤율은 잉여가치율(또는 고용에 대비한 이윤의 비율)과 자본의 가치구성(또는 투하된 자본 중 고정자본과 가변자본의 가치 비율)의 함수로 분석된다. 어떤 맥락에서 이는 괜찮은 방법이지만 연구자들이 구성한 표준적인 가치구성은 마르크스가 가리킨 가치구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생산수단의 획득과 노동자의 고용에 투하된 상대적 가치량 뿐 아니라 상품의 실제 가치에 비해 오르는 상품의 가격 비율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두 개의 다른 요인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표준적 가치구성의 운동은 명백한, 모호하지 않은 경향을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에서 표준적인 가치구성이 변화하지 않았을 때 생산수단 획득과 노동자 고용에 투하된
[자본의] 상대적 가치량 또한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가 결론내릴 순 없다. 생산수단 획득에 더 많은 가치가 사용돼 가치구성이 상승하는 경향을 띠었지만 이 효과는 인플레이션에 의해 상쇄됐다고 가정할 수 있다.[3] 하비가 옳게 강조했듯이 이는 '중요한 문제'다.

나의 대안적 분석은 이 문제를 구별되는 두 요인으로 다룬다. 나는 이윤율의 전체 운동을 아래와 같이 분석한다.

① 상품의 실제 가격에 비해 오른 상품 가격 비율의 변화에 기인한 운동
② 고용된 노동에 대한 이윤율의 변화에 기인한 운동
③ '그밖에 모든 것'에 기인한 운동

나는 앞의 두 원인이 어느정도 짧은 기간에는 중요할 수 있지만 그 둘 모두 장기적으로 - 우리가 전후 기간 전체를 고려할 때 - 이윤율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전체는 '그밖에 모든 것'에서의 변화에 기인한다

. 따라서 일단 ①과 ②를 제외한 다음 수학적으로 계산하자면 '그밖에 모든 것'은 바로 투자한 고정자산에 대한 노동시간으로 측정된
[노동력] 고용 비율이다.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의 거의 전부는 이 비율의 하락에 기인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고용이 자본축적보다 항상 더 늦은 속도로 증가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경향을 마르크스의 법칙이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식으로 그 법칙은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하락의 거의 전부를 설명한다.

고용에 대한 이윤의 비율은 이윤율에 약간의 영향만 미친다. 이윤율은 그 비율에 따라 아주 약간만 변동할 뿐이다. (전후 초기에만 아주 약간 그렇게 보일 뿐 1970년대부터 대침체 때까지는 상승이나 하락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비율이 오랜 기간 안정적이었다는 게 CEO들이나 기업의 고위 경영진들
[의 소득]을 이윤이 아니라 고용 부문으로 미국 정부가 분류한 것에 따른 통계적 착시는 아니라는 걸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고위 경영진에게 지급된 것을 이윤으로 재분류한 내 최근 추정(클라이먼 2014b를 보라)에서도 아주 약간의 차이만 보인다. 물론 최근 수 십 년간 그들의 보수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그렇지만 통계에 영향을 미치기엔 고위 경영진의 수는 너무 적다. 내 계산에 따르면 1979년에서 2005년 사이 0.1% 또는 1%(소득 분배에서 상위 0.1% 또는 1% 부분)라고 불리는 경영진이 받은 생산 몫의 증가는 기업의 다른 부문인 고용 몫(employees' share)에 단지 0.4%포인트 또는 0.6%포인트의 하락을 불러왔을 뿐이다.

하비는 또 이윤율이 저하한다는 증거에 대해 "이윤(가치ㆍ원문 그대로)이 생산되는 곳과 그것이 실현되는 곳 사이엔 차이가 있다. … 자본과 수익이 흘러가는 … 양식은 … 뒤얽혀 있고 시스템의 한 부분에서 선택된 데이터가 그것의 전체 운동을 정확하게 대표하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반론을 편다. 그의 지적은 다시 한 번 옳다. 앞서 논의한 국내 자본 투자의 수익률과 관련한 데이터 만으로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이 전반적으로, 국내 투자에 대한 것 만큼 해외 투자에 대한 이윤율 또한 하락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내 결론은 그 대신 해외와 국내 계정 모두를 고려해 내려진 것이다. 미국 기업의 해외 투자와 해외 투자로부터의 수익에 관한 정부 데이터는 1983년부터 이용할 수 있다. 이 데이터는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해외 투자에 대한 이윤율이 데이터의 시작점으로부터 대침체 때까지 대체로 하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림 2)
[4]. 국내와 해외 이윤율을 측정하기 위한 분모는 약간 다르기 때문에 두 데이터 모음을 적절히 연결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 기업들 전체의 이윤율 하락 규모를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해외와 국내 이윤율 모두 하락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전체 이윤율 또한 하락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림 2 미국 다국적 기업의 해외 이윤율
(해외 직접투자 누적액에 대한 해외 직접투자로부터의 세후 수입 비율)

또 하비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한 나라에서 생산된 이윤을 세금이 없거나 낮은 다른 나라의 자회사 계정으로 옮기는 '이전가격 조작'을 사용한다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국적 기업의 해외 수익과 투자 데이터가 그들의 자회사가 자리한 나라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생산이 이뤄지는 나라와 그 생산품이 판매되는 나라는 자주 다르기도 하다. 그 결과 다국적 기업의 이윤율이 어떤 특정한 나라에서 정확히 어찌 되는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렵다. 그러나 이는 전체적인 그림을 살펴볼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전가격 조작의 술수는 기업이 투자의 소유권과 이윤을 이리저리 옮길 수 있도록 하지만 이윤 또는 투자의 총량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하비는 이전가격 조작이 '숨겨진' 이윤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증거도 내놓진 않는다. 내가 알기론 그런 증거는 없다. 조세 당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이윤을 보호하는 것은 숨겨진 이윤과 같은 게 아니다.

앞서 논의한 증거는 오직 미국 기업들과만 관련된 것이다. 하비는 "그러한 데이터가 세계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일의 증거가 될 순 없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그 데이터들이 증거가 될 순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이 맥락에서 반대를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그의 논문 주제는 경제 위기의 잠재적 원인으로서 이윤율의 하락이다. 그리고 그는 최근의 위기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감염을 통해" 세계로 확산되기 전 미국에서 시작됐음을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위기가 시작돼 그 다음 다른 곳으로 확산됐다는 것은 금융적으로 간단히 설명된다. 따라서 세계가 아니라 미국에서 이윤율 하락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또 그것이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작용한 것인지에 우리는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비는 최근 몇 년간 수익성이 상당히 회복됐다고 주장한다. 물론 침체 후 추세는 이전의 이윤율 하락이 대침체의 원인인지 아닌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의 지적은 이윤율 측정 방법이 침체 후 반등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의문을 갖게 됐고 이전에 수익성 하락을 알려준 그 방법을 믿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이윤에 관한 거의 모든 정의를 이용해) 계산한 모든 이윤율은 침체 후 반등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것들 모두는 대침체 기간 동안 하락했다(바닥을 쳤을 땐
[호황의] 절정기였던 2006년 값보다 24%에서 38%까지 낮았다). 그러다 그 값들 모두는 반등해 2013년쯤엔 2006년 수준에 근접하거나 넘어섰다. 기업이 노동력을 늘리지 않고 생산하는 데 따른, 침체 이후 생산에서 노동자 몫의 급격한 감소가 수익성 회복의 주요 원인이다. 이는 '임금 억제' 때문이 아니다. 인플레이션 효과를 보정한 후에도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상승했다.

이전엔 옳았던 하비(마르크스의 '과소소비론'에 대해)

'충돌하는 힘들'과 '다양한 모순과 위기 경향들'이 있다는 것을 하비는 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일원인론인 LTFRP의 허수아비로 묘사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들을 함께 다룰 때 이 둘이 암시하는 바를 주목해야 한다. 이는 법칙이 위기의 다른 원인들과 상쇄 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만 옳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법칙을 일단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1편에서 지적한 대로 다중원인론에 대한 주장들은 위기에 관한 하비의 부재원인론에 대한 갈망을 가리는 가면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그는 분명 '자본론' 3권에 나와 설명되고 완료된 위기에 관한 명확한 다중원인론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본론' 3권에는 LTFRP 이론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금융 시스템과 같은 다른 결정 요인들이 이와 연결돼 그것이 드러나는 방법을 매개한다.

특히 하비는 과소소비 위기론, 즉 '유효수요' 부족을 LTFRP 그리고 기업의 투자 결정과 금융 동요와 같은 중간매개들이 작동한 간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연관되지 않은 대중의 제한된 소비가 만들어낸 현상으로 보는 이론을 마르크스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곧 그는 "만약 임금이 너무 낮다면 유효수요의 부족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관념을 마르크스의 것으로 돌린다. 증거로 그는 '자본론' 3권(그리고 2권의 비슷한 주석)에서 한 문장,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자본론 3권, 597쪽)는 마르크스의 설명을 인용한다.

하비는 곳곳에서 이 문장을 등장하는 맥락을 제거하고 전통적인 과소소비론의 방식으로 다룬다. 맥락을 따져보면 그 문장은 저임금이 부족한 수요로 이어지는 시기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대중의 제한된 소비를 위기의 '원인', 현대적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용인'이라고 말한) '원인'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의 '원인'으로 보는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위기가 가능한 조건(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형상인')일 뿐이고 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5]

바로 몇 해 전, 하비는 언급된 그 문장과 구절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그 맥락에 따라 조심스레 분석했다. 잉여가치가 생산돼 화폐로 실현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추가 수요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물은 후 하비는 "마르크스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냉혹하게 솔직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으로 구성된 폐쇄된 사회에서 추가 수요는 오직 하나의 원천, 즉 자본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고 따라서 착취받는 노동자는 그것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하비 2012, p.25)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추가적인 생산수단을 위한 자본가들의 기업 수요-투자수요-와 판매될 잉여가치를 포함하는 생산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자본가 가정의 소비재 수요다. 그에 따라 하비는 경제 위기를 특징지우는 수요의 부족이 위기 때든 위기가 아니든 언제나 소비를 제한받아온 '대중' 또는 '착취받는 노동자'의 제한된 소비 탓이 아님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하고 많은 부분을 질문하는 식으로 요약한다. 따라서 위기를 대중의 제한된 소비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행기 사고를 (사고가 났을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언제나 존재하는) 중력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대신 수요의 부족은 '자본으로부터' 나와야 할 추가 수요의 발생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현실이 원인이다. 핵심 문제는 하비가 '지속적인 자본축적'(하비 2012, p.26)이라고 부른 것, 즉 생산을 위한 추가적인 투자를 자본주의가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추가적인 생산적 투자의 규모가 필요한 것보다 적어졌을 때, 바로 그 때문에 수요 부족은 발생한다.

하비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적어도 그랬었다) 왜 갑자기 '제한된 소비' 문장을 맥락에서 떼내어 과소소비론적 '임금 억제' 위기 이론을 마르크스가 실제로
[의미했던] 수요 문제에 관한 '냉혹하게 솔직한' 설명과 연관짓는 데 이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냉혹하게 솔직한' 설명이 우리를 이윤율의 저하로 곧장 되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우리가 수요 부족이 거의 항상 투자수요 부족의 문제임을 이해하게 되면 뒤를 이어 투자는 왜 부족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의문은 더 나가서 두 가지 질문으로 연결된다. 투자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만큼 넉넉한 양의 이윤(잉여가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오늘날 새로운 투자의 이윤율이 미래에 적절한 규모의 투자로 이어질 만큼 충분히 높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불충분한 수익성은 미국에서 생산적 고정자산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수요가 장기적으로 둔화해 온 주요 원인이다. 1948년에서 2007년 사이 기업들의 고정자산 축적률은 41%까지 떨어졌다. 축적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유일한 요인은 이윤 중 생산에 재투자된 부분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주 약간(3%) 올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생산적 자본 축적률의 대체적인 감소는 이윤율 하락의 결과다(더 진전된 논의는 클라이먼ㆍ윌리엄스 2014를 보라).

생산적 투자의 미래 수익성이 불충분할 것이라는 예상은 오랫동안 중요한 문제로 간주됐고 여기에 대침체 후 회복이 그토록 약하고 오래 걸린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미약한 회복을 설명하기 위해 폴 크루그먼, 마틴 울프와 미국의 전 재무장관인 로렌스 서머스와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과 경제지 필자들은 미국 경제가 침체 이전, (즉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실질 단기 수익률이 -2% 또는 -3% 수준으로 터무니 없이 낮아서 충분한 수요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시기인 1980년대 중반쯤부터 꽤 오랫동안 '구조적 장기 침체(secular stagnation)'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계산했을 때 대출자들이 빌린 것보다 더 적게 갚는다는 걸 의미한다. 기업이 충분한 투자에 착수하도록 유도할 유일한 방법이 그들에게 되갚지 않아도 될 돈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투자의 예상되는 수익률은 정말로 지독하게 낮을 것이다!(더 진전된 논의는 클라이먼 2014a를 볼 것)

나는 하비가 말하 듯 "그것 모두가 어떤 숨어있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결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틀린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중간매개의 모든 방식이 복합적 요인들과 작동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대침체는 기업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약화시켰다.) 둘째로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은 '숨겨진' 게 아니다. 헤겔이 말했 듯이 본질은 현상으로 나타나고야 마는 것이다
[국역 '철학강요' 160쪽]. 나는 그렇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앤드루 클라이먼은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마르크스 '자본론'의 복권: 모순이라는 신화에 대한 반박 Reclaiming Marx's 'Capital': A Refutation of the Myth of Inconsistency'(Lexington Books 2007)의 저자다. 페이스 대학(뉴욕)의 경제학 명예교수이며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이니셔티브(the Marxist-Humanist Initiative)' 함께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2012. History versus Theory: A Commentary on Marx’s Method in Capital, Historical Materialism 20:2, 3-38.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Kliman, Andrew.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_______. 2014a. Clarifying “Secular Stagnation” and the Great Recession, New Left Project. March 3.
_______. 2014b. Were Top Corporate Executives Really Hogging Workers’ Wages?, Truthdig. Sept. 18.
Kliman, Andrew and Shannon D. Williams. 2014. Why “Financialisation” Hasn’t Depressed US Productive Investment,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Print version forthcoming.
Marx, Karl. 1991a.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Ⅲ.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8)

주석
[1] '그림 1'의 데이터는 미국경제분석국(BEA)의 분석을 이용했다. 국민소득과 생산 계정 표 1.14의 1ㆍ4ㆍ 7ㆍ9ㆍ10ㆍ12행. 고정자산 표 6.3의 2행. 고정자산 표 6.6의 2행. 순영업 잉여와 세후 순익은 이익에서 계산했다. 두 비율의 분모는 감가상각을 고려한 고정자산에 축적된 투자다. 감가상각은 역사적 비용으로 평가된다.
[2] 나는 이를 내 자신의 분석을 논의하는 데만 그칠 것이다. 다른 이들의 주장에 대해선 그 만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 하비의 주장에 따르면 - 마르크스가 명목상의 것보다 더 적게 참조한 - 자본의 '실질적인' 가치구성조차 순수한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의 지표가 아니다. 이점에 있어 그것은 '기술적' 그리고 '유기적' 구성과 다르다. 그러나 내 추정은 미국 기업의 실질적 가치구성이 기술적ㆍ유기적 구성에 매우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7년부터 2007년까지 실질적 가치구성은 약 160%까지 증가했다. 심지어 이 기간의 거의 대부분 동안 다른 자본구성들 사이의 연관은 이 수치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했다. 성장률에서의 차이는 대부분 예외적으로 빠르게 늘어나 실질적 가치구성을 일시적으로 압박했던 임금 때문이다.
[4] '그림 2'는 미국경제분석국(BEA)의 '국제수지와 직접투자대조표'에서 가져왔다. 이윤율의 분자는 '시가 보정 전 직접투자수입'이고 분모는 '역사적 비용에 기초한 미국의 해외직접투자'다. 데이터는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했다.
[5] 이 구절에 대한 더 진전된 분석은 클라이먼 2012 의 253~255쪽(국역본)을 보라. 과소소비 위기론의 약점에 대한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논의는 이 책의 8장을 보면 된다.

하비는 올해 출간될 '2008년의 대붕괴'의 초안으로 2014년 발표한 글[링크]에서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비판적으로 논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앤드루 클라이먼이 반박에 나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아래는 앤드루 클라이먼의 첫 번째 하비 비판이다.

※ 'crisis'는 '위기'로 통일했습니다. 1847년과 1858년 공황과 관련해 마르크스의 용어를 검토하는 부분에서만 '공황'이라고 썼습니다. 인용 중 국역본이 있는 것은 이를 활용했습니다. 대괄호[ ]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추가한 것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 6월 14일 수정. 김공회 선생의 꼼꼼한 충고를 반영해 수정했습니다. 단, 잘못 옮긴 것의 책임은 전적으로 제게 있습니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1편: 마르크스를 오해하기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3월 10일ㆍ링크
칼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은 대침체(the Great Recession)를 설명하고 미래의 중대한 경제위기들에 어떻게 대비할지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로 잘 알려진 데이비드 하비는 최근 발표한 논문(하비 2014ㆍ링크)에서 칼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LTFRP)의 ▲마르크스 자본주의 경제위기 이론 내 지위와 ▲대침체 그리고 지속되는 침체 여파와의 관련성을 격렬히 비판했다. 법칙은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 절약형 기술 진보로 인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기술 혁신은 생산비용을 떨어뜨리면서 생산물 가격 상승을 저지하는 경향을 띠며, 이는 기업이 자신의 생산물 생산에 투자한 자본의 크기 만큼 이윤을 빠르게 증가시키는 걸 어렵게 한다.

이 과정이 대침체의 근본원인 중 하나인지 아닌지는 매우 큰 정치적 중요성을 지닌 문제다. 쟁점은 자본주의 작동방식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정책들-국가가 통제하는 자본주의로 신자유주의를 대체하고, 금융을 규제하고, 불평등을 줄이고 금융보다 생산에 더 친화적인 정책들 등-이 미래의 중대한 경제위기들을 막는 데 성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LTFRP에 뿌리를 둔 위기 이론은 그와 같은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암시한다. 왜냐면 그 정책들은 이윤 극대화를 위한 충동, 기술 진보와 수익성 하락 사이의 관계와 같은 자본주의의 모든 형태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거의 그대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하비의 주된 불만은 LTFRP와 위기 이론이 일원인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상쇄 요인들에 더해 위기의 다른 원인들을 무시하고, 이 이론의 현 지지자들에 의해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배제'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주장은 단지 허수아비 때리기일 뿐이라고 논할 것이다.

진정한 쟁점은 누군가가 일원인론을 옹호해왔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부재원인론
[앤드루 클라이먼은 'apousa-casual theory'라고 적고 있다. 'apousa'는 그리스어 'απουσα'의 알파벳 표기로 'absent'를 뜻한다. 하비가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확인 못했다]이라고 불러야 할, LTFRP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이론을 하비가 적극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어떤 의견을 배제하려 하는 사람 중 하나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된 힘들의 소용돌이'와 '복합적인 모순과 위기 경향'에 대한 그의 강조에 비추어 보면 그가 그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은 위기의 모든 잠재적 원인을 우리가 고려해야 한다고 충고하려는 것이라고 예상될 것이다. 그러나 하비는 위기의 다른 잠재적 원인을 LTFRP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다. 그는 그 이론과 이에 기반한 위기 이론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으려 단단히 결심한 것 같다. 그는 LTFRP가 진정한 법칙인지, 마르크스가 마침내 그 이론에 정말로 동의했는지, 이윤율이 하락한다는 타당한 증거가 있는지, 하락하는 경향을 언급하는 이 법칙 때문에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인지 의문을 던지는 데 논문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에도 대답할 것이다.

하비 논문의 두 가지 다른 측면 또한 논할 것이다.

1. 하비는 1980년대 시작된 노동인구의 세계적 성장은 LTFRP가 작동되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이 법칙에 대한 초보적인 오해에 기반해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2. 마르크스가 "만약 임금이 너무 낮으면 유효수요의 부족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논했다고 하비는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의 글에 대한 그의 최근 해석(하비 2012)과 모순됨을 보여주고 그의 앞선 입장이 옳음을 논할 것이다.

LTFRP에 대한 그의 태도는 나를 놀라게 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의 법칙에 기반한 위기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자들 내에서 헛된 우상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고 썼고 사실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다. 정치 영역에서 만큼 학계에서도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좌파들은 소위 이론에서의 교조조의와 그 지지자들을 자주 격렬히 비난해 왔다. 그들은 또한 연구에서 그 이론을 배제하려 해왔다. 예를 들면 M. C. 하워드와 J. E. 킹 교수는 자신들의 책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역사(A History of Marxian Economics, 1992, ⅹⅲ)'에 LTFRP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학문적 신뢰도에 큰 상처를 줘 왔다"고 적고 있고 크샤마 사완트의 조직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a Workers' InternationalㆍCWIㆍ영국에 시작된 트로츠키주의 조직. 영국 노동당 내 밀리턴트 경향에서 발원했으며 현재 세계 45개 나라에 조직을 두고 있다]'는 최근 '교조주의자' 두 명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연구에서 가능한 설명을 배제하려는 노력이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로 표현되고 이런 편견이 그토록 자주 받아들여지는 게 특히 불쾌하다.

노동인구에 관한 데이터

하비는 고용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세계 노동인구는 1980년에서 2005년 사이 11억 명이 증가했다-를 끌어들여 이를 세계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고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증거로 사용하려 한다. 그는 이 주제에 천 단어 이상을 사용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현 자본주의가 겪는 곤경들을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의 결과로 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노동 참여의 증거로 인해 심각한 오류에 빠졌다는 판정받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잉여가치 생산과 추출이 압박받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데이터는 확실히 잉여가치 또는 이윤이 - 절대적으로 - 크게 증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 쟁점은 이윤, 투자된 자본량에 대한 잉여가치 또는 이윤의 비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이다. 비율[분수]에서 분자의 증가는 비율 전체가 증가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이윤율에서 분모, 투자된 자본의 비율 증가가 분자의 비율 증가보다 훨씬 크다면 이윤율은 떨어진다. 분모가 더 큰 비율로 증가하지 않았음을 하비가 보여주지도 암시하지도 못한, 그가 끌어모은 통계는 이윤율이 증가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럼에도 하비는 - 투자된 자본의 그 어떤 증가도 무시한 채 - 고용의 증가는 그 자체로 마르크스의 LTFRP가 1980년대 초부터는 작동하지 않아 왔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일반 이론이 옳다면 노동 절약형 기술 변화의 확산은 … 자본에 고용된 임금노동자 수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기꺼이 인정했던 바이기도 하다."

이게 바로 틀렸다. LTFRP가 고용 감소를 의미한다고 마르크스가 "기꺼이 인정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비가 끌어온 구절은 실제로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생산성 향상')가 "주어진 자본에 의해 고용되는 노동력의 양을 감소시키는 경향을 가진다"고 말한다(자본론 3권, 280쪽, 강조는 글쓴이). 예를 들어 만약 투자된 자본이 원래 100만 달러이고 노동자 10명을 고용했고 이후엔 400만 달러를 투자해 노동자 20명을 고용했다면 '주어진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 수는, 이를테면 100만 달러 당 10명에서 5명으로 감소했다. 즉 이는 하비가 설명하듯 고용 규모의 절대적 감소를 뜻하는 게 아니다. 절대적인 고용 규모는 10명에서 20명으로 두 배가 됐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LTFRP를 제시하는 앞 부분의 확장된 논의에서 그는 하비가 말한 "기꺼이 인정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윤율의 점진적 저하의 법칙은 … 사회적 자본에 의해 운동되고 착취되는 노동의 절대량, 그리고 또 사회적 자본에 의해 취득되는 잉여노동의 절대량이 증가하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으며 …

이윤율의 저하는 총자본 중 가변적 구성분의 절대적 감소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감소, 즉 불변적 구성부분에 대한 가변적 구성부분의 상대적 감소로부터 발생한다.

이윤의 절대량(그것의 총량)은, 이것과 총투하자본 사이의 비율의 비상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50%나 증가한 것이다. 자본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 즉 자본이 운동시키는 노동의 절대량, 그리고 또 자본이 흡수하는 잉여노동의 절대량, 즉 자본이 생산하는 잉여가치의 양, 이리하여 자본이 생산하는 이윤의 절대량은, 이윤율의 점진적인 저하에도 불구하고 증가할 수 있으며 그리고 점진적으로 증가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바탕 위에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변동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자본론 3권, 259~261쪽, 강조는 원문

요점을 좀 더 강조해 명확히 다시 말하자면 고용의 증가는 LTFRP에 반대되는 증거가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의 '분명한 동요와 양면성'

하비는 "그 법칙의 보편적 타당성에 관한" 자신의 "오랜 회의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자신의 발견을 법칙, 경향의 법칙 혹은 가끔 단지 경향이라고까지 부른다는 데서 그의 언어가 갈수록 동요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고 썼다. 하비가 '경향'과 '법칙' 사이의 동요로 이해한 것은 사실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그것을 설명하는 것 사이의 불가피한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 하락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법칙을 제안한다. [여기에] 동요는 어디에 있는가?[1]

마르크스는 LTFRP를 '법칙'으로 부르거나 '경향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서 동요한 것도 아니다. 그는 모든 경제적 법칙을 경향의 법칙으로 여겼다. 예를 들면 그는 '자본론' 3권 10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 잉여가치율을 모든 경제법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경향으로서 … 가정하고 있다."(자본론 3권, 207쪽)고 적었다. 핵심은 충분히 간단하다. 이윤율 같은 경제적 변수에서 모든 변동을 담아낼 법칙은 발견할 순 없다. 이러한 변동들이 순수하게 법칙을 따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든 종류의 우연적 사건과 방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우연적 사건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드러나는 변수들의 경향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하비는 마르크스가 LTFRP에 대해 양면적이었다는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추가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첫째는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 같은 그의 정치적 저작에서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내전'에서는 잉여노동이나 잉여가치와 같은 현상들도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비는 이러한 부재를 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의 존재에 대해 마르크스가 의심해왔다는 타당한 증거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들의 일반적인 타당성에 대한 오래된 회의론"의 근거로 간주해야하는 것 아닐까?

더 나가 마르크스가 LTFRP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는 증거로 하비는 1848년과 1857년 공황들을 '상업과 금융 공황들(commercial and financial crises)'로 묘사하며 이윤율 하락에 관해서는 단지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하는 마르크스의 분석을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미하엘 크래티케는 비슷한 주장을 해왔다. 이는 경기후퇴와 불황을 위기(crises)라고 부르는 현재 통용되는 마르크스주의 학술용어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중요한 증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용어의 사용법은 마르크스 시대 이후 크게 변해왔다. 그가 말한 경제위기들(economic crises)은 상업과 금융공황을 의미했다. 그는 경기변동의 연이은 국면들을 "중간 정도의 활황, 번영, 과잉생산, 공황, 불황" 또는 "평균수준의 호황ㆍ활황ㆍ공황ㆍ침체"(자본론 1권, 607쪽, 863쪽)로 묘사하며 이러한 위기들을 그것들이 초래한 경기하강과 구분한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업 또는 금융위기들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윤율의 감소는 간접적으로, 그리고 약간의 지체를 겪은 후 위기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이 경향은 과잉생산을 촉진한다(이를테면 생산적 투자수요의 침체를 통해). 또한 금융 투기와 사기도 조장한다. "이윤율이 저하하면 … 어떤 종류의 특별이윤이라도 얻기 위하여 새로운 생산방법, 새로운 투자 및 새로운 모험 등을 앞뒤 가리지 않고 시도하기 때문에 투기와 투기의 일반적 촉진이 나타난다." 오직 부채를 최종적으로 갚지 못할 때 위기-이 경우 금융위기-가 폭발하고 이 위기는 침체로 이어진다. "특정한 지불일이 붙어있는 지불의무의 연쇄는 여러 곳에서 끊어지는데, 이것은 자본과 함께 발전하여 온 신용제도의 동시적 붕괴에 의해 더욱 격화된다. 이 모든 것들이 격렬하고 첨예한 공황, 갑작스럽고 강력한 가치감소, 재생산과정의 현실적 정체와 교란, 따라서 또 재생산의 현실적 축소를 일으킨다."(자본론 3권, 289~291쪽, 310~311쪽, 305쪽)

마르크스가 상업과 금융 관계의 파국을 '위기'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그가 이윤율의 하락과 위기의 폭발 사이에 많은 중간매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면 그가 때론 이윤율의 하락 경향을 추상적으로만 다루며 위기들을 논한다는 게 놀랍거나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한 번에 모든 것을 다루려 하다가 혼란스러운 잡동사니를 만들어내기보다 한 번에 하나의 것을 다루기를 선호하는 오직 엄격하고 변증법적인 인물이었을 뿐이다.

또한 하비는 1868년 이후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 이론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았다"며 "마르크스가 일찌기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the Grundrises)'에서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그의 마지막 10여 년 간 연구에서 무시하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던 것은 이상야릇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LTFRP를 '무시'했다는 추정에는 근거가 뒤따르지 않는다. 나는 이론적이거나 실증적인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했을 때 더 이상 집요하게 그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문제로] 관심을 옮긴다. 이는 내가 도달한 결론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다. 주어진 대답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르크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증거가 내겐 있다. 하비는 어떤 식으로 작업하는가?

따라서 진정한 질문은 다른 문제로 나가기 전 마르크스가 이윤율이 하락하는 원인에 대한 자신의 해명에 만족했느냐는 것이다. 증거들엔 의심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다. 미하엘 하인리히(그는 최근 하비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에 대한 대답에서 나와 공저자는 "1865년부터 1877년 사이 마르크스의 편지들에서 그가 자신의 이론적 결론에 만족했으며 그가 출간한 첫째 권 뿐 아니라 출간하지 못한 채 남겨뒀던 다른 권들을 포함한 자본론을 이론적인 면에서 최종적인 결과물로 간주했다는 많은 증거"(클라이먼ㆍ프리먼ㆍ포츠ㆍ구세프ㆍ코니 2013)를 보여줬다. 하인리히는 이 증거에 답하지 않았고 하비는 이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피했다.

LTFRP가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는 마르크스의 관점은 초기에만 한 번 언급된 것도 아니고 이후 '무시'되지도 않았다. 그는 이를 1857~58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뿐 아니라 1861~63년 원고에서도 단언했다.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인 이 법칙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따라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MECW Vol.33, 104쪽. 강조는 원문) 후에 마르크스는 3권을 쓸 때 LTFRP가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는 주장을 넘어선다. 그는 애덤 스미스 이후 모든 정치경제학은 이 법칙을 찾기 위해 움직여 왔을 만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법칙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하여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애덤 스미스 이래의 정치경제학 전체는 이 수수께끼의 해결을 둘러싸고 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자본론 3권, 255~256쪽)

신화적인 일원인론

또한 LTFRP 및 그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위기이론은 일원인론이라는 그의 비난은 마르크스의 글에 대한 그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한다. 마르크스의 법칙은 약간은 '엄격한' 가정에 기초한 '고도로 단순화된 모델'에서 유래했다고 하비는 주장한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모든 가정이 꼭 들어맞을 때만 법칙은 유효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 때문에 법칙은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 외에 수익성 하락의 모든 잠재적 원인들과 기술변화의 상쇄 효과로 인해 이윤율 하락을 저지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배제한다. 따라서 법칙은, 그리고 외부적 요인을 취사선택해 결합시키는 것 없이 그것을 채용한 어떤 위기 이론도 일원인론인 것이다.

물론 하비는 그 엄격한 가정을 마르크스의 글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그의 가정을 꼼꼼하게 펼쳐내면서도 (3권의) 이윤율 하락 이론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마르크스가 펼친 그 엄격한 가정을 어떻게 아는가?

그는 최소한 한 번은 명백히 틀렸다. 하비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법칙은 모든 상품("노동력은 제외하고")이 구매되고 그 실제 가치, 이 가치와는 다른 가격이 아닌 가치 그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한다.
[2] 바로 이 경우가 틀렸다. 3권 3편의 주제가 그 법칙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2편에서 이미 상품의 가치와 그것이 실제로 팔릴 때의 가격 사이에 큰 차이가 있겠지만 경제에서 산출물의 총 가격은 전체적으로 이 산출물의 총 가치와 같다(그리고 그에 따라 그 한계가 된다)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따라서 하나의 기업 또는 산업이 생산물의 가치를 넘어선 가격을 받을 때 이 이득은 순전히 다른 자본가들의 손실을 상쇄하는 대가가 된다. [손실을 입은] 이들의 생산물 가격은 그 가치보다 적다. 그리고 이로부터 첫째 총 이윤은 만들어진 총 잉여가치와 같다(그리고 그 한계가 된다)는 것, 둘째 가격과 가치 사이의 차이는 LTFRP와 관련해 경제 전반의 이윤율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이 이어진다.[3]

모든 상품이 그 가치대로 팔린다는 가정이 아니라 앞선 것과 같은 결론이 마르크스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이끌어낸 기초적 조건이다(MECW Vol.33, 104쪽. 강조는 원문).

우리는 개별 자본의 이윤율이 투하자본 총량 대비 잉여가치의 비율과 다름을 살펴봤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의 총 자본을 고려하면 평균적 이윤율은 이 총 자본에 계산되고 관련된 총 잉여가치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도 … 보여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로부터 다시 한 번 다수 자본의 경쟁을 고려하지 않고도 자본이 [충분히] 발달된 것인 한 그 일반적 특성에서 직접적으로 일반적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견고한 기초를 갖게 된다.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인 이 법칙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전개되면서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대개 하비는 마르크스의 법칙을 가능한 제한적인 해석에 따른 여러 한정적 추정들에 기댄 모델로 치부한다. 그는 3권 3편 전체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법칙의 현상으로서 소위 "법칙 그 자체(das Gesetz als solches)"라고 부른 것을 다룬 부분들만 고려한다. 이는 그 법칙을 일원인론적이고 마르크스가 3편 뒷부분에서 논한 다른 현상ㆍ제도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법칙은 (내가 앞에서 논했 듯) 여러 상쇄 요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금융제도의 매개를 통해 작동하는 게 아니라 실제 세상의 그처럼 많은 요인들을 배제하고 무시한 상상속 조건에서만 오직 소환될 수 있는 딴 세상의 관념처럼 보인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그처럼 많은 "여러 제한적 (법칙의) 적용 가능성"을 "배제"했다고 말한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다른 현상과 제도들을 잇따라 분석에 도입했음을 알고 있지만, "법칙 그 자체"를 저지선 바깥으로 쳐냄으로써 그는 이런 사실을 LTFRP의 다원론적 성격의 증거로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
[그에겐] 추가적인 현상과 제도들의 도입은, 법칙이 자신을 드러내는 구체적 형태들 속에서 그 법칙을 묘사하는, 법칙의 변증법적 풍부화로 나타나기보다는, 법칙이 작동할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시인으로 나타난다. 법칙은 온전히 남지 못한 것으로 비친다. [이제] 마르크스는 전과는 별개의 논의에, 즉 “법칙을 도출해낸 가정들이 제거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와 관련된 논의에 천착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는 법칙의 지위에 의문을 나타내며 그의 "동요와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에겐 전혀 다른 틀을 갖는 위기 이론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 어떤 내적 연관도 갖지 않는, 서로 너무 달라서 "어떤 일원인론으로 쑤셔넣는 것"이 불가능한 다수의 잠재적 설명 요인과 현상으로 가득찬 체계화되지 않은 하나의 공간이다.

그 글을 이런식으로 읽어선 안된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런 부당한 독서는 적절한 해석 방법이 아니다.

일원인론이라는 딱지붙이기가 왜 잘못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정교한 방법론적 논의를 펼칠 필요는 없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보편적 중력법칙을, 바람과 같이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 또는 공기 저항 같은 상쇄 요인을 언급하지 않은 채 내가 제안한다고 해서 이 다른 요인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그것들을을 배제한, 그 대신 적용 가능성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제한적인 일원인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중력법칙으로부터 뉴튼의 운동에 관한 제2법칙을 이끌어내 설명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방정식에서 다른 요인들의 삽입을 삼간다고 해도 그런
[일원인론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다음 내가 공기 저항과 바람[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내가 내 양면성과 동요를 드러낸 것도 또는 보편적인 중력법칙이 오직 진공에서만 작용하고 실제 현실에선 작용하지 않는다고 시인한것도 아니다.[4]

마르크스의 법칙이 자본주의 동학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지적한 점에서 하비는 옳다. 다시 말해 그것은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윤율 궤적의 모든 일시적 변화를 해명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는 그 법칙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단지'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이, 그의 자본축적 이론과 결합하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당시 경제학자들을 괴롭히던]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비는 글의 대부분에서 오늘날 그가 비판하는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매우 모호하다. 예를 들어 그는 LTFRP에 뿌리를 둔 위기 이론은 그 현대적인 지지자들 사이에서 "다른 가능성의 고려를 배제하는 식으로" "전형적으로 제시되"며, "많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원인이 하나인 위기 이론"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고 단언한다. 이름을 언급하는 걸 삼갔다는 것 때문에 그의 비난에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부분에서 그는 법칙의 "어떤 지지자들"이 "금융화는 2007~8년의 붕괴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고 했을 뿐 아니라 "앤드루 클라이먼이 가장 단호하게 위기와 금융화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단호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내 선배들에 대해 존중을 표하기는 했어도 스스로 그것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아니] 나는 정반대로 주장했다. "물론 금융위기가 불황을 촉발했고, 금융 부문의 특유한 현상들(과도한 레버리지, 위험한 모기지 대출 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클라이먼 2012, 24~25쪽)

내가 인용한 이 문장은 대침체의 근본적 원인으로 내 책의 첫 장에 나오는 것이다.
[5] 그 다음 장에선 "이윤율 저하를 최근의 경제위기와 침체에 연결하는 두 가지 중간매개 고리-낮은 수익성과 신용제도-에 집중한다".(클라이먼 2012, 40~41쪽) 그리고 3장은 2007~8년의 금융위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의에 할애했다. ▲1990년대 닷컴 버블이 터진 이후 연방준비제도의 지나친 금융완화 정책 ▲모기지 대출의 자산 유동화 ▲서브프라임 대출 ▲주택 순자산 신용한도 대출 ▲증가하는 모기지론 주택담보대출비율 ▲대출자 레버리지 비율의 상승과 자금 수요의 감소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증가하는 가계대출 ▲닷컴과 주택가격 거품 부상의 심리학 ▲신용평가기관들의 비참할정도로 부정확한 전망 모델 ▲의회의 [금융위기] 초기 TARP(Troubled Assets Relief Programㆍ부실 자산 구제 프로그램) 거부 ▲미국으로 향한 해외로부터의 저축 유입. 이것이 금융화가 2007~8년 금융위기의 원인임을 부정[6]하는 혹은 일원인론적으로 접근하는 최선의 사례라면 나는 그의 다른 사례들을 [굳이]] 더 살펴보진 않을 것이다.

앤드루 클라이먼은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마르크스 '자본론'의 복권: 모순이라는 신화에 대한 반박 Reclaiming Marx's 'Capital': A Refutation of the Myth of Inconsistency'(Lexington Books 2007)의 저자다. 페이스 대학(뉴욕)의 경제학 명예교수이며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이니셔티브(the Marxist-Humanist Initiative)' 함께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2012. History versus Theory: A Commentary on Marx's Method in Capital, Historical Materialism 20:2, 3-38.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Howard, M. C. and J. E. King. 1992. A History of Marxian Economics: Volume II, 1929-1990. Princeton, NJ: Princeton Univ. Press.
Kliman, Andrew. 2007. Reclaiming Marx's 'Capital': A Refutation of the Myth of Inconsistency. Lanham, MD: Lexington Books.
_______.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Kliman, Andrew, Alan Freeman, Nick Potts, Alexey Gusev, and Brendan Cooney. 2013. The Unmaking of Marx's Capital: Heinrichs Attempt to Eliminate Marxs Crisis Theory’.
Kliman, Andrew and Shannon D. Williams. 2014. Why 'Financialisation' Hasn't Depressed US Productive Investment,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Print version forthcoming.
Marx, Karl. 1990.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Ⅰ.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4)
_______. 1991a.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Ⅲ.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8)
_______. 1991b.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33.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주석
[1] 법칙의 함수에 대한 논의와, 이와 관련한 '법칙'의 의미에 대해서는 클라이먼ㆍ프리먼ㆍ포츠ㆍ구세프ㆍ코니(2013)을 보라.
[2] 그는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상품은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자본론 1권과 2권 곳곳에서 중시한 가정이 3권에서도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의 그 가정은 노동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노동력 역시 그것의 모든 가치대로 구매된다는 가정에 따라 마르크스는 시장이 아니라 생산에서 이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상품교환이야 말로 "자유ㆍ평등ㆍ소유ㆍ벤담이 지배하는 … 천부인권의 참다운 낙원"(자본론 1권, 230쪽)이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채 설명할 수 있었다.
[3] 마르크스가 이런 결과를 이끌어낸 과정의 내적 모순이 입증됐다는 주장을 들은 바 있는 데 이는 단지 악의에 찬 신화일 뿐이다. 클라이먼(2007) 8장을 보라
[4] 이는 마르크스가 하나하나 엄격하게 절차를 밟아나가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력 법칙은 LTFRP와 비슷하다. 운동 제2법칙은 노동시간에 따른 가치 결정 법칙(가치법칙)과 유사하다.
[5] 하비는 그의 논문 어떤 곳에서 내 책을 끌어들이지만 내가 주장했다고 그가 말하는 어떤 증거 또는 인용도 제시하지 않는다.
[6] 샤넌 윌리엄스와 나는 금융화가 대침체가 진행된 10년간 미국에서 기업의 자본축적률 하락의 원인이 아님을 보여줬다.(클라이먼ㆍ윌리엄스 2014) 당연히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Posted by 때때로

미국 중앙은행은 12월 18일 양적완화 축소를 발표했다. "현재 월 850억 달러인 자산매입 규모를 내년 1월부터 750억 달러로 100억 달러 축소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5년 동안 3조 달러 이상의 돈을 시장에 풀었다. 중앙일보는 "세계경제, 링거는 뽑았다"며 경기 회복의 신호탄으로 풀이했지만 상황이 간단치는 않다. 사실상 제로인 금리는 2015년이냐 돼야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점쳐졌다. 실업률은 여전히 7%대다(중앙일보 12월 20일 6면).

이 양적완화 축소를 두고 11월 한 차례 논쟁이 있었다. 11월 8일 워싱턴에서 열린 IMF 위기 대응 포럼에서 래리 서머스와 버냉키가 맞붙었다. 서머스는 미 중앙은행의 제로금리ㆍ양적완화 정책에도 "2009년 이후 4년 동안 미국인의 삶이 개선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국경제 11월 11일 15면). 그는 양적완화와 제로금리 정책이 "어떤 효과도 없었다"며 "이후로 우리는 명목 이자율이 0인 상황이 경제활동을 만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억제하는, 우리 경제가 잠재성장률 아래에 머무는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상황을 감당해내기 위해 인플레이션에 겁먹지 말고 양적완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적완화 축소를 앞장서 주장해왔던 이였기에 충격은 컸다. 정태인은 이를 두고 '개과천선'이라고까지 주장했다(프레시안). 정태인의 소개에 의하면 폴 크루그먼도 서머스의 '개과천선'을 반기며 격찬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여전히 피상적이거나 외생적이다. 마이클 로버츠는 이 논쟁에 마르크스주의적으로 개입하며 크루그먼이 '인구 성장률' 저하라는 경제 외적 자연법칙에서 위기의 뿌리를 찾는 것을 비판한다. 사실 이는 혜성의 주기에서 경제법칙을 추정했던 신비주의적 경제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즈의 '명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도 비판한다. 울프에게 "위기는 '과잉 소비'에서 비롯했고 현재 불황은 '과잉 저축'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에 결국 "자본주의는 단지 하나의 상황
[과잉 소비]에서 다른 하나[과잉 저축]로 반복"하는 진자운동으로만 파악한다고 비판한다. 정부의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 이러한 케인즈적 전통은 자본의 이윤율에 생긴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것이 그의 비판의 핵심이기도 하다. 1930년대 대공황, 그리고 그 이전의 공황들 모두는 자본의 대규모 파괴를 통해서만 이윤율을 회복하고 경제성장의 정상적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민간 부문을 '자극'하거나 (일시적으로) 대체하기 위해 계획된 더 많은 정부지출은 묘책이 되지 못한다"며 이러한 방책으로는 현재의 '장기 침체가 끝나기 전에 "또 다른 침체를 예상"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이클 로버츠는 이윤율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축적 법칙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진 않는다. 하지만 최근의 양적완화와 위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떤 입장에 서있는지를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래 그의 글을 옮겨놓는다.


케인즈적 불황인가 마르크스적 불황인가?
2013년 11월 20일 마이클 로버츠 블로그

이 블로그를 읽어왔던 독자라면 세계경제가 현재 자본주의 선진국가들이 이끄는 장기간의 불황 상태에 있다는 것이 내가 주로 이야기해온 것 중 하나라는 걸 알 것이다.

경제성장이 이전 성장률 수준보다 지속적으로 낮아지며 실업률은 대공황 이전 수준 이상이 되고 디스인플레이션(속도가 느려진 인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는 것(물가 하락)이 내가 말하는 '장기 불황'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생산 자본에 대한 투자가 회복의 기미 없이 이전의 평균적 수준보다 낮은 경제적 환경을 말한다. 게다가 이 불황은 현재 소위 '신흥
[시장] 경제'라고 불리는, 막대한 규모의 값싼 노동력과 신기술을 갖춘 나라에까지 도달하면서 [이들 나라에서] 실질GDP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세계경제 성장률

['장기 불황'이라는] 이러한 호칭은 지금까지는 어떤 이론적 경향의 경제학자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영구 불황'이라는 이야기가 '위대하고 훌륭한' 주류 경제학에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골드만삭스의 전 경영진이자 미국 재무부 장관, 하바드 대학 총장이었고 [최근]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후보를 사임한 래리 서머스는 최근 위기의 원인에 대한 IMF 콘퍼런스에서 아주 낮거나 제로인 금리를 통해, 또는 정부에서 '돈을 찍어내' 정부와 사적 부문의 채권을 사들이는 양적완화의 방식으로 경제를 회생시키려는 중앙은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정상적 성장'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거대한 거품조차도 총수요를 진작시키는 데에는 충분치 못했다…… 수요를 자극하기 위한 인공적인 조치, 이 모든 재정상의 경솔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어떤 효과도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후로 우리는 명목 이자율이 0인 상황이 경제활동을 만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억제하는, 우리 경제가 잠재성장률 아래에 머무는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명백히도 '전통적이지 않은' 통화 정책들은 새로운 거품(통화 팽창을 일으키지 않는)인 주가 상승을 제외하고는 경제를 위한 묘책이 되지 못한다. 폴 크루그먼, 전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이자 파이낸셜타임즈 블로거인 가빈 데이비스, 파이낸셜타임즈 칼럼니스트이자 그들 모두의 친구인 마틴 울프와 같은 케인즈 후예들의 장황한 설명이
[지난] 여름 내내 울려퍼졌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균형 성장'으로 복귀하는 방향으로 '자동적'으로 작동할 수 없으며 디플레이션 압력은 새로운 지배적 힘이 된 것으로 파악한다.

크루그먼은 블로그에서 '영구 침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지난 5년 동안 겪어온 삶이 새로운 정상이라면 어떻게 될까? 불경기 비슷한 상황이 또다른 한 해 또는 두 해 만이 아니라 10년 간 계속 제 궤도를 유지할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경우'는 '장기정체
[미국의 케인스주의 경제학자 알빈 한센이 주장한 것.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면 경제성장률이 점차 감소되며 파국에 이르게 될 위험이 있다는 이론]' 아닐까? 완전 고용이라는 것을 극히 드문 오래전의 일회적 사건으로 만드는, 불경기가 계속되는 이 상황이 정상이 아닐까?" 크루그먼은 계속해서 "[지난] 여름 우리는 단지 완전 고용에 가까운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 아마도 거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거품의 부재로 경제는 마이너스 금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갖게 됐다. 그리고 이것은 2008년 금융 위기 때부터만 진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심각함이 증대돼 왔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그래서 결국 주요 자본주의 경제는 더 이상 마이너스 실질 금리에서도 완전 고용에 도달할 수 있는 성장은 불가능한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이제 위대한 경제 스승이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상태에 대해 내게 동의한다는 것을 뜻할까? 글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여름께부터의 불황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러브인
[히피들이 갖던 사랑의 집회]'의 크루그먼과 울프가 나와 (그리고 내가 마르크스의 설명이라고 고려하는 것들과) 왜 다른지 설명해보겠다. 우선 케인즈주의자에게 불황은 '유효수요' 부족으로 이어지는 자본가에 의한 화폐 퇴장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크루그먼류의 주장은 이러한 퇴장이 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마이너스 실질 금리에도 불구하고 왜 끝나지 않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의 설명을 따르면] 우리는 실물경제에서 지속되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금융 부문과 중앙은행의 조치들 외에 다른 것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이윤율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뜻한다.

크루그먼은 이제 전쟁 직후에 완만한 성장 둔화를 의도해 케인즈의 이론에 외삽된 신 케인즈 학파 경제학자인 알빈 한센의 주장 또는 보다 최근의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혁신성과 생산성의 붕괴에 관한 로버트 고든의 사상이에 대해서는 을 되풀이하며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장기 침체'에 관해 말한다.

현재 크루그먼은 점진적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된다는 것을 케인즈 이론에 외삽한 신케인즈 학파 경제학자인 알빈 한센의 주장, 또는 보다 최근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혁신성과 생산성의 붕괴에 관한 로버트 고든의 사상을 되풀이하며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장기 침체'에 관해 말한다.

크루그먼은 이러한 장기 침체는 아마 유효수요를 낮게 만드는 '인구 성장률 저하' 또는 '오르내리긴 했지만 결코 사라지진 않은' 1980년대부터 부각된 '만성적 무역 적자'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설명은 어떤
[경제]외적 자연 법칙으로 자본 축적 운동의 외부를 살피며, 두 번째는 세계 경제로써 자본주의보다는 자본주의 경제들 사이의 불균형에서 원인을 찾는다. 두 설명 모두 현대 자본주의 작동의 기초에 존재하는 어떤 결함을 부정한다. 그리고 둘 모두 설득력이 떨어진다.

마틴 울프 또한 '스태그네이션'이라는 주제를 파이낸셜타임즈에 있는 그의 블로그 최근 글에서 계속 이어가며 왜 미래는 불안하게 보이는가라고 묻는다. 울프에게 이 새로운 불황의 원인은 '세계적 저축 과잉' 또는 투자를 꺼리는 자본가들의 저축에 따른 '과도한 퇴장'에서 비롯한 '투자 결핍'이다. "세계 경제는 매우 낮은 금리에서조차 사업에 사용될 것보다 더 많은 저축을 만들어내 왔다. 이것은 미국에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중요한 고소득 경제에서 사실이다." 그렇기에 장기 불황의 문제는 낮은 이윤율이 아니라 이윤의 과잉에 있다.

이것은 현 연방준비제도 의장인 벤 버냉키가 2000년대 초반 미국과 영국의 '만성적 무역 적자'의 원인이 아시아와 OPEC 국가들의 '흑자'로 인한 '너무 많은 저축'에 있다고 주장한 것에 뿌리를 둔 진부하고 오래된 생각이다. 그렇기에 과도한 신용 확장과 뒤이은 신용 붕괴는 진실로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나라들이 미국의 상품을 충분히 구입하지 않은 잘못이었다! 지금 그것은 충분히 소비하지 않은 모두의 잘못이 됐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의문은 왜 모두는 충분히 소비하지 않는가이다. 보통의 가구들이 소득과 고용의 감소로 심각하게 훼손됐을 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왜 미국과 영국, 유럽의 자본주의적 기업들은 더 투자하지 않는가? 울프는 거대한 경기후퇴 전 신용 확장 기간에 구축된 '과도한 빚'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기는 '과잉 소비'에서 비롯했고 현재 불황은 '과잉 저축' 때문에 생겨났다. 자본주의는 단지 하나의 상황
[과잉 소비]에서 다른 하나[과잉 저축]로 반복해서 움직일 뿐이다!

또 울프는 투자 부족은 더 이상 생산 자본에의 투자를 원하지 않고 대신 주식시장에서의 활동과 금융자산의 구입을 더 선호하는 자본주의적 기업 문화의 변화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위대한 자본주의 체제는 '금리생활자' 경제가 된 것이다. 나는 전에 이 블로그에서 이러한 주장들과 상대해 왔고 이후 이 주제로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일단 다시 말하자면 크루그먼과 울프의 설명에는 결국 이윤 생산을 위한 투자로 정의되는 영리경제에서 자본의 이윤율이라는 생각이 전적으로 결여돼 있다.

케인즈주의 불로거인 노아 스미스는 최근 어떻게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검토했다. "저성장과 (비자발적) 실업 증가의 해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결국 누군가는 유휴 자산을 다 써버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민간 부문이 독립적으로 야생적 충동에 의해 침체를 벗어나거나 정부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다." 오, 그렇지 '야생적 충동'이 되돌아올 것이다. 아니면 그들이? 스미스는 "경제가 그래왔던 것처럼 부채 상환 압력에서 기인한 매우 낮은 금리, 저조한 기대감과 자신감 등을 지닌 채 불황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해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바로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불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많은 부채가 여전히 상환되고 있고 (이윤에 대한?) '기대는 낮고' (무엇에 대한?) '자신감은 저조하다'. 여기에서도 이윤율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스미스는 "비이성적으로 꼬인 불황 상태에 있는 시장이 유휴 자원을 바로 써버리기에 적절치 않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리인은 정부다. 정부는 (유휴 노동을 사용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유휴 자본을 이용한) 돈을 빌릴 수 있고 금리를 올리고 실업률을 낮출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누구에게도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순히 시장경제와 정부가 유휴 자원이 사용되지 않고 있을 때 이것을 이용할 것만 요구한다. …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내가 대개 시장 경제를 선호하며 주목하는 것들이다. 정부의 개입은 최소한의 필요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 투자는 민간 투자가 충분치 못할 때 최소한을 유지시킴으로써 곤경을 면하게 할 수 있다.

"실업률 저하와 유휴 자본의 사용으로 (가급적이면 공공 사회기반시설과 과학기술 프로젝트, 신 사업에 대한 대출을 섞어) 더 많은 사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정부가 구제자 역할을 하면 우리는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곧 아니면 조금 후에 민간 부문은 되살아나 자원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는 정상 상태가 "매우 매우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위해 조절된, 변화가 계속됨으로써 조절이 계속되는 생산 체계를 원한다면 막대한 양의 자원을 유휴 상태로 놓아두는 것은 그것을 위해 나쁜 행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설정된 재정정책"이 필요하다. 구제를 위한 정부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왜 자본이 사용되지 않은 채 놓여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수익성이 충분히 없어서일까?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축적된 비생산적 자본의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남아있는 가치의) 이윤율을 상승시키고 축적 과정의 재개를 가능케 하는 침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실물자본과 가공자본 모두가 엄청나게 축적된 후 자본주의는 대공황의 시기에 들어섰다. 1930년대 대공황은 죽은 자본의 대량 파괴 없이 이 침체를 벗어날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그것을 해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도 계속된 성장을 재개하기 전에 중요한 침체를 겪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단지 민간 부문을 '자극'하거나 (일시적으로) 대체하기 위해 계획된 더 많은 정부지출은 묘책이 되지 못한다. 자본 축적을 대체한 정부가 계획한 투자는 단지 생산을 이끄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장기' 침체가 끝나기 전 겪어야 할 또 다른 침체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위기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위기가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폭발하고 있죠. 이탈리아는 4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이탈리아 통계청이 7일 발표한 2012년 2분기 경제 성장률은 -0.7%입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의 구제금융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유로존 내 세 번째 크기의 경제규모를 가진 이탈리아의 위기는 그리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의 파국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페인은 10년짜리 국채 금리가 7.6%까지 치솟았습니다. 미국의 2분기 성장률도 1.5%로 내려앉았습니다. 중국도 위기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경제성장률이 6분기 연속 떨어졌습니다. 2분기에는 3년 만에 8% 아래로 내려갔죠.

● [연합뉴스] 기준금리 동결 배경은 '7월 인하 효과 지켜본다'(링크)
● [한겨레] "중국에 국가위기 없는 건 민중에 부채를 떠넘기기 때문"(링크)

2008년 금융위기로부터 비롯한 이번 위기의 여파가 참으로 깊고도 끈질깁니다. 금융권에 대한 막대한 구제금융은 정부의 재정위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돈을 찍어낼 수 있는 미국 정부야 버티지만 그러한 힘이 없을 뿐 아니라 통화정책도 펼칠 수 없는 유로존 국가들은 그야말로 함정에 빠진 격입니다. 금융권으로 유입된 돈은 곡물에 대한 투기로 이어져 세계 곡물가의 급격한 상승을 불러왔고 이는 2011년 '아랍의 봄'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2008년 위기가 발생하자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금융산업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죠. 폰지사기와 같은 관행이 만연하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버나드 메이도프가 대표적이죠. 지나친 규제 완화와 금융화로 금융상품을 만들어 팔고 사는 이들조차 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도 폭로됐습니다.

1997년 위기 때 부정ㆍ부패가 만연한 '정실 자본주의'가 위기의 근원으로 지목됐던 것처럼, 이번에는 혼란을 키운 활극의 주인공으로 금융산업에 비판의 촛점이 맞춰졌습니다. 당연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융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국가간 금융거래의 장벽도 높여야 하고 말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는 다른 분석과 대안을 내놓고 있습니다(물론 마르크스주의 내에도 다양한 경향이 경합하고 있죠). 오늘 살펴볼 책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책갈피, 이하 '21세기 대공황')는 마르크스주의 내에서도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Tendency of the Rate of Profit to Fall: 이하 TRPF)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입장을 담고 있습니다(저자 중 짐 킨케이드는 비판적 입장에서 저자 중 한 명인 크리스 하먼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이하에서 그의 주장은 제외합니다).

TRPF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원재료ㆍ원료ㆍ생산시설 등에 대한 투자가 노동력에 대한 투자보다 더 빠르게 증가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전자를 불변자본이라 부르고 후자를 가변자본이라고 부르죠. 마르크스에 의하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노동입니다. 따라서 자본가에게 중요한 이윤이 되는 잉여가치도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죠. 결국 완성된 상품에 기존의 가치를 이전만 시키는 불변자본이 급격히 증가하면 이윤율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는 다양한 상쇄경향이 있어서 항상 저하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21세기 대공황'의 저자들은 마르크스의 바로 이 TRPF가 현재 경제위기의 가장 큰 배경이라고 주장합니다. 1960년대 최고 수준에 다다렀던 이윤율은 1970년대 위기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있다고 합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잠시 성장하지만 결코 1960년대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죠.

"최근의 금융위기는 1970년대부터 세계 자본주의를 괴롭혀 왔던 바로 그 질병, 즉 이윤율 하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착취율 증가 덕분에 이윤율 하락세가 잠시 멈췄고 심지어 약간 회복되기도 했지만, 거듭되는 침체를 막기에 충분할 정도의 기업 투자를 독려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신용경색부터 세계 경제위기의 공포까지', 크리스 하먼, '21세기 대공황' 139쪽(이하 모두 같은 책).

"이번 위기는 직접적으로 1990년대 이후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가 양산한 호황에서 비롯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장기적 측면에서 이번 위기는 1970년대 이후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을 반영한 자본주의의 장기 불황 국면에서 발생했다."
-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세계 경제의 위기', 장시복 250쪽.

"이번 위기의 배경은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 체제 전반에 걸쳐 시작된 이윤율의 장기 저하와 그 결과인 장기 불황이다."
- '21세기 세계 대공황', 정성진 257쪽.

이러한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는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가 근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구체적 수치는 조금씩 다르지만 1970년대 급락한 이윤율은 1980년대 이후 조금씩 회복되지만 결코 과거의 수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거의 정체하고 있다는 것이죠. 신경제라 불리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경제위기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찬양받던 1990년대 중반부터 2001년까지의 미국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2001년 위기에서 회복된 후 2007년 다시 붕괴하기까지의 성장도 그렇습니다.

"모슬리의 수치들은 장기 호황기(1947~1968년)에 이윤율이 18~22퍼센트를 맴돌았음을 보여준다. 그 후 이윤율은 1970년대 내내 11~22퍼센트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1980년대 말에는 약 14~15퍼센트까지 올라갔고, 1990년대 중반에는 16~18퍼센트를 기록했다. 다시 2000년대 초에 14~15퍼센트까지 떨어졌다가, 2004년에 19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다시 말해, 지난 25년 동안 단지 한 해(2004년)에만 장기 호황기 당시의 최저 수치에 근접했던 것이다. 미국 주요 기업들이 발표한 대차대조표도 2005~2006년에 이윤율이 하락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 '이윤율은 장기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크리스 하먼 168~169쪽.

이렇게 장기적으로 저하한 이윤율이 경제위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것을 살피기 위해 저자들은 우선 1970년대의 추락으로부터 나온 지배계급의 대응, 신자유주의를 언급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부흥: 착취율의 증가와 금융화

실질임금의 하락, 노동시간의 증가로 나타나는 착취율의 상승이 1980년대 이윤율 회복을 위한 주요 신자유주의적 전략으로 등장합니다. 미국의 실질임금은 "1970년보다 1995년에 더 낮았"고 연간 노동시간은 "1980년 1883시간에서 1997년 1966시간으로 늘었"습니다(크리스 하먼 40쪽, 73쪽). 장시복은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이윤율 상승에서도 착취율 증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시기 "상층 노동계급의 실질임금도 정체하고 하층 노동계급의 실질임금은 가장 낮은 수준에 다다랐"습니다. "노동생산성은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정체됨으로써 이윤율이 상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장시복 219~220쪽).

신자유주의 전략의 다른 한 축, 금융화는 1970년대의 위기를 지연시키고 연이은 두 거품(1990년대 IT 거품, 2000년대 부동산시장 거품과 소비 붐)으로 일시적 호황이 가능케 한 힘입니다.

자본이득에서 소득 최상위 20% 계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1989년 75.2%에서 2000년에는 82.9%로 증가했습니다. 자산을 기초로 한 부의 증가(그것이 실현됐든 미래에 실현될 것이든)는 상층 계급의 소비증가로 이어졌죠. 마찬가지로 최상위 20% 계층의 가처분소득 대비 소비는 1992년 95.1%에서 2000년 104.4%로 증가합니다
(장시복 223쪽).

비금융 기업의 이윤율 하락은 이러한 금융화를 재촉하기도 합니다. 크리스 하먼은 미국의 회계법인 PwC 최고경영자 새뮤얼 디피아자를 인용합니다. 2000년대 많은 기업들이 자산담보증권(ABS)과 주택저당증권(MBS)에 투자하는 등의 방법으로 하락한 이윤을 금융에 의존해 보충하려 했다는 겁니다. 결국 "미국 기업들의 수익성이 외견상 높아 보였던 것은 그들의 금융자산과 부동산 자산 가치가 금융 거품으로 실제 가치보다 부풀려졌기 때문"인 것이죠
(크리스 하먼138쪽).

또한 이러한 금융화는 정부가 주도해 이뤄집니다. 로버트 브레너는 정성진과의 대담에서 "미국을 비롯한 몇몇 정부들이 실물경제에서 이윤율이 떨어지는 데 대처하기 위해, 금융 부문의 규제를 완화해서 금융으로 전환하는 것을 부추"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실물경제가 계속 나빠졌기 때문에, 규제 완화로 금융 부문의 경쟁은 더 심해졌고 이윤 창출은 더 어렵게 됐으며 더 큰 투기와 위험 감수가 조장"됐습니다
(로버트 브레너-정성진 대담 286쪽).

2000년대 초중반 노무현 정부가 '동북아 금융허브'를 추진한 것도 이런 와중이었습니다. 당시 '야인'으로 있던 이명박은 직접 금융시장에 뛰어들기도 했죠. 경쟁의 격화로 이윤 창출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지금 봐서는 매우 바보스럽지만) 김경준이라는 사기꾼과 손을 잡는 것도 거리끼지 않았죠. 2008년의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의 파생금융상품 거래량은 3년째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38억1900만건이 거래됐고 이는 전 세계 거래량의 27%에 이르는 물량입니다
(조선일보ㆍ링크). 파생금융상품에 거래세를 부과하겠다는 세재개편안에 경제지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2008년의 붕괴는 2000년대의 매우 특이한 경제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자산 가격 케인스주의(asset price Keynesianism)'가 전통적 케인스주의를 대신했습니다. 지난 10여 년 이상 세계 경제는 매우 특이하게도 자본축적이 그야말로 사상 유례없는 투기 파동에 의존해서 지속되는 체제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의 주식시장 거품과 2000년대 초 주택과 신용 시장 거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 '세계 대공황의 전망과 대안', 로버트 브레너와 정성진의 대담 중 브레너 답변, 283쪽.


신자유주의의 몰락: 자본주의의 한계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전략은 무한정 계속될 수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 등의 나라에서 이미 엄청난 수준으로 증가한 착취율은 더 이상 높아질 수 없습니다. 노동시간의 증가와 저임금을 견뎌내기 위해선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수준입니다.

상대적으로 착취율이 낮은 유럽에서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정년을 연장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독일에서는 직접적으로 노동시간을 연장하려 하고 있고, 직접적 임금과 함께 사회적 임금으로서 각종 복지와 연금을 축소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협약은 바로 유럽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힘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즉 유럽 지배계급이 기존의 사회협약을 파기하고 착취율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콧대를 먼저 눌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유럽 자본가들은 과거에 '사회 평화'를 위해 노동자들에게 양보했던 것들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는 공세를 펼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유럽에서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한 거대한 규모의 계급투쟁을 촉발할 수 있다."
- '스냅사진으로 보는 자본주의의 오늘과 내일', 크리스 하먼 79쪽.

2010년 프랑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그리스와 스페인 등지에서 우리는 그러한 투쟁을 이미 목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지배계급의 공격에 맞선 투쟁이 성장하고 있죠. 2011년 위스콘신에서는 공무원 노동권에 대한 공격에 맞선 장기간의 노동자ㆍ시민의 점거투쟁이 진행됐습니다. 2008년 위기로 드러난 금융기업들의 부패에 분노한 청년들은 뉴욕 주코티 공원에 모여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고 선동하고 있죠.

착취율 증대에 의한 이윤율 회복이 불충분하기도 했지만 더이상의 착취율 증가를 노동계급이 받아들일 가능성조차 적어지고 있는 것입니다(물론 이후 노동계급이 1980년대 초 영국 광산노동자와 미국 항공관제사 노동자와 같은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2000년대 성장한 금융 부문도 2008년 위기로 드러난 사기와 협잡에 대한 대중적 혐오가 너무 커서 더 이상 성장이 지속되긴 어려워 보입니다. 결정적으로 실물부분에서의 이윤율 하락을 금융에서의 거품으로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장벽 없는 세계시장에서의 금융화는 위기의 여파를 더 빠른 속도로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외환 거래를 포함한 금융 거래세의 도입이 힘을 얻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금융 규제의 강화, 복지의 확대, 정부의 적자재정 정책과 같은 것들은 이번 위기의 대안으로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위기가 무엇보다 이윤율 하락에서 비롯한 1970년대부터의 장기적인 하강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의 위기 때 케인스주의가 실패한 이후 신자유주의적 대응이 등장합니다. 이는 약간의 성공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결국 자본주의 자체의 한계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케인스주의가 다시 각광받고 있지만 이는 이미 실패한 대안일 뿐이라는 겁니다. 2008년 위기를 막을 수 없었던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크리스 하먼은 1990년대 일본의 장기 불황 또한 이 케인즈주의적 대안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루스벨트 정부의 뉴딜 정책과 마찬가지로, 사적 자본을 대대적으로 침탈하지 않는 국가 개입은 기껏해야 완전한 붕괴만 막을 수 있을 뿐이지, 그 자체로 이윤율 저하에서 비롯한 근본적 불균형을 치유하고 경제의 활력을 소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일본의 경험은 시사하는 듯하다."
- '1930년대 대공황과 오늘날의 위기', 크리스 하먼 209쪽.

1930년대 대공황 때와 달리 정부 지출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몫이 이미 매우 큽니다. 미국의 경우 국내총생산에서 정부 지출이 차지하는 몫이 1929년 2.5%에서 2007년 약 20%로 커졌죠. 경제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정부가 지출해야 할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습니다(크리스 하먼 199~200쪽).

게다가 개별 기업의 크기도 매우 커졌습니다. 따라서 위기에 빠진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치뤄야 할 대가도 함께 늘었습니다. 결국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 위기를 해결하는 데는 매우 큰 제한이 있습니다
(크리스 하먼 201~202쪽).


자본주의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대안

현재 진행 중인 위기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총체적 위기"라는 게 저자들의 공통된 진단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는 일시적인 금융 위기나 실물 위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주며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계기를 형성할 것"입니다(장시복 251쪽).

정성진은 진보 진영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진보 진영은 이제 공황을 막기 위한 이런저런 정책 대안들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공황이라는 파괴와 낭비를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적ㆍ적대적 성격을 고발하고, 공황기에 노골화되는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비판해야 한다. 동시에, 반자본주의ㆍ탈자본주의 대안을 구체화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데 주력해야한다."
- '21세기 세계 대공황', 정성진 277~278쪽.

크리스 하먼이 지적했고 현실에서 드러났듯이 대중운동은 좌파의 개입과 독립적으로, 자본주의적 압력 그 자체에 의해 발생하고 성장합니다. 각 나라의 정치적 전통과 지형에 따라 좌파가 큰 역할을 하는 곳(스페인ㆍ그리스)도 있고 좌파의 존재가 미미한 곳(미국)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이 호소하는 좌파의 과제는 나라별로 매우 상이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랍의 봄'에서 위스콘신의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뉴욕의 청년들이 영감을 얻었듯이 세계화된 경제 만큼 저항 또한 세계화되고 있습니다. 결코 단시간에 끝나지 않을 경제 위기를 맞이한 좌파는 그 만큼 장기간의 안목으로 현재의 행동을 계획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지배자들의 양보는 노동계급의 강력한 투쟁에 의해서만 이뤄졌습니다. 브레너는 "루스벨트 정부는 거대한 대중 파업 물결이 일자 압력을 받아 그제서야 와그너법[노동조합의 권리를 정한 법]과 사회보장을 비롯한 주요 진보적 뉴딜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지적하며 "오바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로버트 브레너 290쪽).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안철수건, 문재인이건, 심상정이건 실재 세계를 쟁취할 힘은 노동계급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대중 스스로의 행동을 고무하고, 그 안에서 대안을 건설하는 것이 좌파의 행동지침이 돼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