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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00:52

촛불시위의 첫걸음 쟁점2016.12.19 00:52

아래 글은 10월 20일 올린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을 다시 고쳐쓴 글이다. 페이스북에 처음 올린 글로부터 따지면 세 번째 글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충하는 데 중점을 뒀다. 논점도 살짝 달라졌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바꾼 부분이 이 달라진 논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대중적 운동의 첫걸음에 좌파들이 불만을 갖는 일은 흔하다.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좌파의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경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패배적 평가가 대표적이다. 좌파의 다수는 기존 체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한계를 지적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전인권의 '애국가' 공연과 시위대의 집회 후 청소, 경찰버스에 붙인 스티커의 제거 행동에 대한 평가에서 극대화됐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도 내 실망감을 정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실망감은 내가 공부해온 '역사'에 반추해봤을 때 정당한 게 아니었다. 그 실망감은 내가 그토록 멀리해온 '국개론'(대중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 만을 갖는다며, 현재 상황을 대중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중이 운동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의식을 깨우친다는 것, 무엇보다 좌파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빼놓은 평론가적 태도였을 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전망'이 아니다. 나를 비롯해 좌파 일부가 놓치고 있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글일 뿐이다.

아래 글은 '사회주의자'에 기고한 글
(링크)의 원문이다.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글솜씨 때문에 내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사족을 또 달게 된다. '사회주의자'에 실린 글의 제목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회에서 고른 것이다.


11월 19일 '박근혜 정권 퇴진 4차 범국민 행동'에서 행진에 나선 사람들. [사진 自由魂]

촛불시위의 첫걸음

10월 24일이었다.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의 태블릿PC 속 국정 개입 증거를 폭로했다. 언론 보도를 접한 대중이 분노를 표시하기도 전 박근혜는 서둘러 1차 대국민 담화를 연다. 녹화 방송에 기자의 질문도 받지 않은 무성의한 담화였다. 아마 대중보다 지배계급이 더 빨리 이 보도의 위력을, 혹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가 이뤄졌을 때의 파급력을 깨달았을 것이다. 폭로로 가득했던 한 주가 지나고 29일 토요일 첫 대중적 촛불집회가 열린다. 3만~5만명으로 추산되는 참가자들은 분노로 가득했고 이들은 경찰과의 몸싸움도 꺼리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충돌은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이후 주말마다(당연히 평일에도 촛불은 계속 밝혀졌다) 계속된 촛불집회는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시위의 양상은 더 '평화'적이 됐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시위의 평화적 성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혹은 '명예혁명'이라며 촛불집회를 한껏 추켜세웠다.

좌파 일부에서 불만이 튀어나온 것은 이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한 촛불집회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 촛불에 불씨를 지핀 건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이었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만 한다. 시작은 언론재벌의 종합편성채널 JTBC의 보도였다. 같은 그룹의 중앙SUNDAY는 첫 촛불집회 다음날 (10월 30일자) 1면에서 '노력하면 성공하는 나라, 그 믿음이 깨졌다'는 제목으로 시위를 보도했다. 훌륭한 선동이다. 기껏 3만~5만명 나온 시위를 보도하며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하나로 잇는 분노의 동아줄을 잡아당겼다(작은 숫자는 아니다. '기껏'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 언론의 보도 태도를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토요일이 지난 첫 월요일 (10월 31일자) 사설에서 '심상찮은 시위'라며 정부와 정치권에 조속한 해결책을 내세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태도는 1905년 1월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킨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경찰의 첩자였던 가퐁 신부는 대중의 불만을 '평화'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워 페테르부르크 동궁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이끈다. 그러나 이 행진이 궁전을 수비하던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하자 가퐁은 "이제 우리에게 차르는 없습니다"고 선언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담화(11월 4일) 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다음날 더 많은 대중이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들자 조선일보는 점잖게 이렇게 말한다. "朴 대통령 국회 추천 총리에 內治 일임 선언하길."(11월 7일자 사설)

지배계급의 한 세력이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바로 그러했다.

"귀족 계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부르주아지에게 호소하는 방법도 주저하지 않았다. 법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족 계급에게 지지의 손을 뻗쳤으며, 또한 법원 서기와 고등 법원이나 귀족 가문의 출입 상인은 시위를 하라는 선동을 받았다. 베아른이나 도피네에서는 정기 소작인과 절반 소작인들까지도 동원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군대에도 귀족 계급의 선전이 침투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귀족 계급의 혁명적 선례를 잊지 않을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 54쪽, 을유문화사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특권계급은 자신을 기본권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1788년 프랑스 고등법원은 '왕국의 기본법 선언'을 공포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이 일부 포함됐지만 "당연하게도 조세의 평등과 특권의 폐지에 관한 언급이 없는 이 선언은 어떠한 혁명적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2쪽, 두레) 그럼에도 그들의 투쟁은 인민을 교육시켰고 훈련시켰다. 그 교육이 비록 지배계급 일부의 견해에 관한 것일지라도 이는 혁명을 향한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기본적으로 1788년 봄에 있어서 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바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의 결합이었다.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특권계급은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6쪽, 두레

특권계급의 교육 결과는 훌륭했다. 결국 1년여 후 프랑스 인민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에 나서 앙시앵 레짐을 끝장낼 혁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 ('독일 이데올록', 마르크스ㆍ엥겔스, 김대웅 옮김, 92쪽, 두레) 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실천 초기의 대중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체제에 대한 저항 자체도 바로 그 체제가 제공하고 가르친 표현ㆍ사상에 기반해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촛불집회 초기 문재인이 '명예로운 퇴진'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민주주의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대중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 ②항을 행동지침 삼아 왜곡된 '민주공화국'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게 된다.

조선일보의 가이드라인이 대중에게 통할까

안타깝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심지어 수십만 명의 저항이 이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대중이 배워온 이 표현과 사상이 실제 세계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1905년 1월 차르를 찬양하던 러시아 인민의 평화적 행진은 결국 피의 일요일 이후 파업과 시위로 가득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지배계급의 반란에서 시작한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 절대주의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되며 결국 그 권위를 잃었다. 끝내 그는 국가원수임에도 가족과 함께 도주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인민에게 입증해보인 후 1793년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렸다.

조선일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폭로 직후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희망을 내비쳤다. '내치를 넘기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대안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촛불집회의 급진화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두 번째 주말 촛불집회 후 조선일보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대신 협력"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일주일 전 집회 때 연행자는 물론 밤 늦게까지 충돌도 있었음은 모른 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태도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같은 야당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거리로 나온 대중이 '박근혜 퇴진' '하야' '탄핵'을 외쳤던 것과 달리 '질서있는 퇴진' 운운하며 '탄핵'에 주저했다.

그러나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5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12월 3일엔 전국 곳곳의 거리에서 232만 명의 인파가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 변화의 다가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거의 언제나 '폭력집회' 주도 세력 취급받던 농민의 트랙터 행진은 환영받았고, 이를 막아선 경찰은 비난받았다. 농민의 트랙터 행렬은 경찰의 방해에도 끝내 12월 9일 국회의사당 앞 탄핵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호 속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집회의 연설도 다양해지고 급진화하고 있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한 연사는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을 계속해온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의 눈물은 광장에 모인 100만명의 분노로 승화하고 있다. 한 학생은 "제 어머니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고,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가난합니다"며 불공정한 사회를 비판했다. 다른 학생은 "저는 공부를 못하지만 정유라 같은 이들이 너무 쉽게 학력을 따는 데는 열받는다"고 분노를 토했다. 많은 학생들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며 함께 행진하기도 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만이 이 투쟁의 배경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투쟁엔 이미 많은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고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움직일 준비가 돼있다.

집회 문화도 꼭 '애국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헌재 심판이 남아있긴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됐다. 평화로운 외양과 달리 대중의 굳은 의지가 정치권에게 탄핵을 강요했고 새누리당을 해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중앙일보가 "국민이 탄핵했다"며 "정치가 응답하라"
(12월 10일자 1면) 고 쓴 것은 이제 촛불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앙SUNDAY가 "촛불은 구체제 끝내라는 명령이다" (12월 11일자 1면) 고 말한게 내심은 아닐지언정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작가 샤토브리앙(1768~1848)은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그것을 성취하였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13쪽, 을유문화사) 고 평가했다. 2016년 겨울을 달군 촛불집회가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했던 것일지라도 그 끝은 오직 대중에 의해서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12월 10일에도 다시 100만여 명의 인파가 광화문광장에 모여 박근혜의 '즉각 퇴진'과 '구속' '처벌'을 외쳤다.

대중은 40여일의 행동을 통해 작지 않은 성과를 얻어냈다. 이는 스스로의 힘을 깨닫는 훌륭한 산교육이다. 게다가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헌법에 기반한 행동이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어냈지만 대중은 아직 만족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더 이상 이정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16.11.20 23:53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 쟁점2016.11.20 23:53


11월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밝혀진 촛불의 하나. 시민들은 스스럼 없이 노동조합이 준비한 촛불시위 용품을 자신의 의사표현에 사용했다.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이 준비한 촛불을 든 시민. 
[사진 自由魂]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 가퐁 신부가 차르의 초상을 앞세우고 차르를 찬양하며 행진했던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로부터 12년 후에야 러시아에서 혁명으로 차르를 쫓아냈음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1788년 루이16세는 명사회 소집과 연이어 삼부회 소집을 허용하면서 그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반란을 일으켜온 특권계급의 공격 아래 '절대왕정'의 권위는 이미 그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1792년 그가 기요틴 아래 목이 잘리기까지는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와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됐다. 결정적으로는 그 스스로 국가원수의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힌 루이16세와 가족의 '도주'라는 사건이 있어야만 했다.

어쩌면 부르주아 시민사회에서 우리는 더 복잡한 길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문재인이 '명예'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았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희망은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경찰버스에 붙은 스티커를 제거해줌으로써 시위대의 선함을 강조하려는 참여자와 함께, 거리낌 없이 경찰버스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시민도 있었다. 11월 19일 세종로 정부청사 앞 경찰버스에 어떤 시민들은 스티커를 붙이고 또 다른 시민들은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곤 했다.
[사진 自由魂]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세계에 균열이 가지 않는 이상 이데올로기는 허상이 아닌 현실로 굳건히 작동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1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도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2008년과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연사들은 세월호 사건에서 정부의 무능과 기만ㆍ배신을 비난했고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덧붙이는 말]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05ㆍ1917년 러시아 혁명뿐 아니라 한국의 1919년 3ㆍ1운동 때도, 1945~1948년 해방정국, 1960년 4ㆍ19혁명, 1987년 6월항쟁 때 모두 반란에 나선 인민의 움직임은 혁명적 지식인의 예측을 쉽게 벗어나곤 했다. 이 지식인들의 계획에 비추자면 인민은 때론 게으르고, 때론 너무 순하며, 때론 너무 성급하다. 1919년 봄의 평화적인 만세 운동은 일제 통치기구에 대한 전면적인 물리적 공격으로 이어졌고, 1945년 여름 해방의 기쁨은 봉건지주와 미국 점령군에 대한 무장투쟁으로, 다시 1960년 학생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 또한 노동조합의 건설과 정부기구에 대한 습격으로 이어지곤 했다. 1987년의 뜨겁던 여름은 창원ㆍ울산 등 전국에서 노동자투쟁의 뜨거운 가을로 바통을 넘겨줬다. 그러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최선"이라 함은, 대중을 좌파의 뜻대로 움직이게 될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이 품은 힘을 급격히 발산하게 될 그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현재의 투쟁에서 배워야 한다. 대중의 관념과 행동양식을 어떻게 급진적 변화의 힘에 맞닿게 할지 바로 지금 대중에게서 훈련받아야 한다.


10월 29일 첫 촛불시위는 3주 후의 시위에 비하면 많은 수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대통령의 첫 번째 사과로 갈피를 못잡던 경찰은 손쉽게 이순신장군상 앞 저지선을 뚫리고 세종대왕상 앞까지 밀렸다. 좌파는 길을 열어가고 있고 마침 더 큰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사진 自由魂]

2016.11.14 23:24

조선일보의 꼭두각시, 한국의 야당 쟁점2016.11.14 23:24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 광장 인근의 서울시내는 100만 촛불로 완전히 마비됐다. 사람들은 퇴진을 외치며 거침없이 청와대를 향했다. 청와대로 통하는 종로구 새문안로 작은 골목에도 분노의 목소리는 넘쳐났다. [사진 自由魂]

프랑스에서 1830년 7월 혁명의 결과 들어선 오를레앙 왕조는, 금융 대자본의 왕조였다. 이들은 국가 재산에 대한 거리낌 없는 투기를 통해 부를 쌓아 갔다. 이들의 전횡은 당시 성장하던 산업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침범하기 일쑤였다. 철도 건설을 둘러싼 추문은 권력을 공유하지 못한 부르주아지 일부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급격히 고조시켰다.

'레미제라블'이 그려낸 1832년 봉기를 포함한 몇 번의 폭동을 통해 산업 부르주아지는, 당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을 힘들지 않고 진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만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우월한 자신감이 더 굳건해지는 만큼 그들의 정부에 대한 반란은 더 공식적이 돼갔고, 거침 없어졌다.

이들은 자신의 반란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끼어드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때론 부추기기도 했다. 1848년 2월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봉기로서 부르주아지의 반란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들 부르주아지는 거리에 널부러진 전사들의 시신의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전리품을 나누는 데만 골몰할 뿐이었다.

이들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지들은 갑자기 공정한 심판자인척 하며 파리의 투사들이 아니라 프랑스 인민 전체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며 공화국의 선포를 미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 만이 이들 부르주아지에게 공화국을 선포하게끔 했다.

[1848년] 2월 25일 정오까지 공화정은 아직 선포되지 않았는데 각료직은 이미 임시 정부의 부르조아 분자들과 '국민'지의 장군들, 은행가와 법률가들 사이에서 분배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번에는 1830년 7월처럼 어떠한 속임수도 허용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새롭게 투쟁을 개시하여, 무력으로 공화국을 쟁취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메시지를 가지고 라스빠일은 시청으로 갔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그는 임시 정부에 공화정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인민들의 명령이 두 시간 내에 집행되지 않는다면, 그는 20만 명의 선봉에 서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전사자들의 몸이 아직 채 식지도 않았고 바리케이드는 아직 그대로 있었으며, 노동자들은 아직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국민방위군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임시 정부의 정략적 고려도 법률적 양심의 망설임도 갑자기 사라졌다. 두 시간의 시한이 종료되기 전에 빠리시의 모든 벽에는 그 유명한 역사적 문구가 눈부시게 나붙었다.
프랑스 공화국!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칼 마르크스, 임지현ㆍ이종훈 옮김, 소나무, 46~47쪽

한국의 야당 정치인들은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보다 우유부단하며 반란을 일으킨 부르주아지보다 소심하기 그지 없다. 이들은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승리를 얻은냥,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우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반란을 선동한 대자본의 언론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하다. 이들은 서울에서만 100만 명이 외친 '퇴진' 목소리보다는 질서있는 퇴각을 지시하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가이드에만 충실하다.

추미애의 독단적 영수회담 제안은 그의 개인적 성품에서 영향받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야당의 소심함과 착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100만 촛불의 열기가 아직 거리에 가득했기에 이 제안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프닝은 다시 또 반복될 것이다. 저들의 우유부단함, 이러한 품성에 동전의 뒷편처럼 따라붙는 독단은 애초 저들이 대자본의 이해관계에서 독립적이지 못한 것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1848년 2월 프랑스에 공화국을 선포케 한 라스파일과 같은 담대함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에 좌절한 것은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 페미니스트들 만은 아니다. 사실 우파들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얌체공 같은 인물을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절망과 공포는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긴 하다. 샌더스가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한 후 한국 언론은 트럼프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인물인지 전하는 데만 힘을 써왔다. 뉴욕타임즈와 CNN의 받아쓰기가 한국 언론 외신보도의 전부임을 고려하면 이는 미국 언론의 대선 보도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에 대해 전하긴 하지만 시종일관 그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책임 있는 대통령에 어울리는 사람으로만 그려졌지 그와 그의 민주당이 해온 일에 대해선 시종 침묵했다. 샌더스가 물러난 뒤로는 계속해서 말이다.

그런데 한국 교육부 고위 관료가 생각하듯 인민은 개ㆍ돼지가 아니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듯 미국의 인민 다수가 팝콘을 씹으며 수퍼보울에만 열광하는 얼간이들도 아니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후 그들은 자신의 일자리가 사라져가는 걸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고, 자신의 자식들이 맥도날드와 월마트에서 저임금 노동에 종사해야만 한다는 걸 발견하게 됐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만든 첨단 무기들이 동유럽과 중동의 인민을 학살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가난한 동네의 공립학교가 축소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봐야 했다.

남편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에서, 아들 부시의 공화당 정부에서도, 다시 오바마 정부에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2011년 미국의 청년과 노동자들이 월스트리트 권력에 맞서 오큐파이 운동을 벌였을 때 클린턴은 월스트리트의 권력자들과 손을 잡고 있었다. 그해 말과 다음해 초, 오바마 정부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직접 지휘해 전국적인 오큐파이 운동을 진압해 말살했다. 2012년 시카고 교사 노동자들의 파업은, '오바마의 남자'라고 불리던 람 이매뉴얼 시장의 시장주의 '교육개혁'에 맞서 일어난 것이다. 흑인 오바마 정부 하에서도 경찰의 흑인 살해는 끝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는 감동적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함께 부르긴 했지만 연방정부의 권력을 이용해 주 경찰들의 전횡을 막진 않았다. 오큐파이 운동 진압 때와는 달리 말이다.

클린턴은 여성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정치 시스템의 정통 후계자로 여겨진 것이다. 실제 투표 결과를 봐도 올해 트럼프가 받은 표는 2012년 공화당 후보 롬니가 받은 표보다 적다. 문제는 클린턴이 받은 표가 2012년의 오바마가 받은 표보다 크게 준 것이다
(그래프 ①). 출구조사를 보면 특히 연 소득 5만 달러 이하에서 지지가 급격히 줄었다. 그럼에도 이 연 소득 5만 달러 이하의 가난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민주당 후보에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난다(그래프 ②). 결국 트럼프 승리의 의미는 더 많은 수의 가난한 백인 노동계급이 백인 남성에게 표를 던진 게 아니라, 지난 8년간 클린턴도 중요한 일원으로 참여해온 오바마 정부에 실망한 가난한 인민이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거뒀다는 것이다.

그래프 ① 미국 대통령 선거 득표수 변화


그래프 ② 소득별 지지율 변화(출구조사)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국 우파들의 미 대선 결과에 대한 우려를 살펴봐야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트럼프가 한ㆍ미FTA를 무효화 시킬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미국 정부가 남한을 군사적 보호에서 제외할 것을 염려한다. 그들은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이 전환할 것에 골치아파 하고 있다. 왜냐면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지지하며 중동과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대결정책을 강경하게 밀고나가는 매파인, 미국 정치 시스템의 적자로서 클린턴이 대통령이 됐다면, 아무런 걱정 없이 '이대로'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라고 해서 지금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는 무엇보다도 미국 기업 시스템의 적자이다. 그의 기회주의적 과거를 되돌아보면 레토릭과 달리 신자유주의적 경제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미국의 군사주의적 도전은 변치 않을 것이다. 부시도 해외 개입의 축소, 고립주의를 외치며 당선됐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해온 일의 부메랑에 맞은 뒤 군사주의적 개입을 더 적극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편 자신의 가족과 국내외 친구들의 기업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클린턴이냐 트럼프냐가 아니다. 트럼프 같은 쓰레기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다. 무릇 정치는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얼마 전까지 샌더스 열풍을 목도했다. 올해 시카고 교사 노동자들은 다시 파업에 나섰으며 버라이존과 월마트 같은 새로운 부문의 노동자운동 성장도 계속되고 있다. 희망은 워싱톤이 아니라 도시의 거리에서, 사무실ㆍ학교, 공장에서 자라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다. 모든 악의 근원이 최순실로, 그리고 박근혜로 모아지고 있다. 대기업들도 공범이라는 목소리가 크지만 민주당이나 야당도 공범이라는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에서 계속해서 시장의 권력은 커져갔으며 노동자의 삶의 조건은 악화돼 갔음을. 이명박과 박근혜는 그것을 가속화시켰을 따름이다. 우리는 눈 앞의 적에 집중해야 하지만 12일 거리로 나오겠다는 민주당과 국민의당도 결코 우리 편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우리는 다시 박근혜와 같은, 미국의 트럼프보다 더 한 인물이 한국의 권력을 잡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015.11.15 22:22

11월 14일 민중 총궐기 기록/기억2015.11.15 22:22

2015년 11월 14일. 오전 중 그치리라던 비는 하루종일 흩뿌렸다. 그래도 비옷을 챙겨입은 사람들은 서울시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짧은 집회를 끝낸 이들은 청와대로 향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평로의 청와대 방향은 이미 이중 삼중의 경찰 차벽과 차단선으로 막혀있었다. 종각으로, 신문로로, 대열은 흩어져 청와대로 향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노동자대회를 마친 노동자들이 경찰청 방향으로 우회해 신문로로 향하고 있다. [사진 自由魂]

그러나 길은 없었다. 사람들은 목소리로, 스프레이 글씨로, 스티커로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가 차벽을 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길을 막은 노동자들이 박근혜 퇴진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요구하는 스티커를 경찰 차벽에 부치고 있다. 몇몇은 스프레이 도료를 이용해 비에 젖은 도로에 '박근혜 퇴진' '국정화 반대'라는 글씨를 썼다. [사진 自由魂]

대답은 물대포와 무장한 경찰력의 공격으로 되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비보다는 물대포의 최루액에 젖었다. 매케한 냄새는 종로 거리까지 장악했다. 동행한 이가 고통스러워 해 잠시 피해봤지만 종각 넘어 종로 2가에서도 매케한 냄새는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경찰은 태평로 방향 3대, 종각 방향 3대, 신문로 방향 2대의 물대포 차를 동원해 노동자ㆍ농민 대열을 공격했다. 70대의 한 농민은 경찰이 머리를 겨눠 쏜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놓였다. [사진 自由魂]

그런 한 편 텅 빈 거리는, 모든 경찰이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된 그 시간 텅 빈 종로 거리는 차 없는 거리 행사라도 열린 듯 시민들로 채워졌다. 경찰도 차도 없는 거리에 무슨 사정인지 알지 못한 시민들은 거리에서 자유를 누렸다.


경찰이 청와대를 방어하기 위해 모두 동원된 시간 시민들은 텅 빈 종로 거리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경찰력이 미치지 않은 곳 자유로운 즐거움만 가득했다. [사진 自由魂]

12일 박근혜의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다. 13일엔 정부 각 부처의 새해 업무보고가 이어졌다. 이 자리들에선 새롭진 않지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정책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시 강력하게 천명됐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기업을 위해선 모든 걸 다 내주겠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인민의 삶을 희생해서 말이다. 몇 가지만 간단히 정리해본다.


1. 기업형 임대주택 뉴 스테이(New Stay)

조선일보는 이렇게 요약한다.

"대기업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양도소득세ㆍ법인세 등 각종 세금을 최대 75%까지 깎아주고 택지도 시세보다 20~30% 싸게 제공할 방침이다."
-조선일보 14일자 3면

그동안 LH에서 85㎡ 이하로만 공급하던 임대주택 시장을 민간 건설기업에게까지 열겠다는 것이다. 부동산시장 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건설사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것이다. 굳이 어렵게 분양하려 하지 말고 임대해서 따박따박 월급에서 빼내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심 공공 택지를 최대한 싸게 많이 공급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제 혜택도 대폭 확대한다. 85㎡ 이하 임대주택에 대해선 취득세 감면 비율을 현 25%에서 50%로 확대하고,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비율은 현 20%에서 75%로 확대한다. 돈이 없으면 싼 값에 빌려주기도 한다. 국민주택기금 대출 금리를 현행보다 내리고 임대 기간이 8년을 넘을 경우 매해 0.1%씩 추가로 인하하겠다고 한다. 이 모든 혜택이 임대주택 사업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택 문제로 고통받는 노동계급 인민이 아닌 기업에게 말이다.


2.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예외) 제도

박근혜 정부는 기업의 수익률 제고를 위해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해고를 더 쉽게 만들고 비정규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임금은 깎겠다는 것이다. 기업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겠다는 것.

대표적인 것이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 제도 도입이다. 사무ㆍ연구ㆍ개발직 노동자들에 대해선 근로시간 규제를 없애겠다고 한다. 즉 이들 '화이트칼라'는 정해진 근무시간 이상을 일해도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것. 이들은 이를 '고액 연봉' 화이트칼라에게 적용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중앙일보는 이 정책의 내심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해마다 자동으로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 대신 직무ㆍ성과급 임금체계로 바꾸는 실험을 고액 연봉 화이트칼라부터 해보자는 취지다."
-중앙일보 14일자 5면

공무원 연금 '개혁'이 공무원 연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공공부문 노동자를 대상으로는 기존 2급 이상을 대상으로만 시행되던 성과연봉제를 7년 이상 근속 근무자에게까지 확대하겠다고 한다. 즉 대부분의 공공부문 노동자를 대상으로 성과연봉제를 도입하겠다는 것. 이 뿐 아니라 그동안 줄기차게 추진해왔던 임금피크제 또한 활성화하겠다고 한다.


3. 해외 돈으로 내수 키우기

노동계급 임금을 올려줄 생각이 단 한 톨도 없는 박근혜 정부와 기업들은 경제의 기초체력인 내수를 키우기 위해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겠다고 한다. 조선일보의 표현이니 정부와 기업주들의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올해 정부 정책의 키워드인 공공ㆍ노동ㆍ금융ㆍ교육 등 4대 부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기초 체력인 '내수'가 튼튼해야 하는데, 내수 진작을 위해서는 외국 자금과 손님을 끌어들여야 하는 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과다한 부채로 국내 가계 소비 여력이 제한되고, 기업들의 국내 투자도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국내인과 국내 기업만의 수요로 내수를 키우기는 어렵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조선일보 14일자 4면

그렇다면 해외의 돈은 어떻게 끌어들이겠다는 것인가. 결국은 각종 규제 완화가 그들의 답일 수밖에 없다. 면세점 늘리는 거야 애교다. 이들은 크루즈 운항을 늘리기 위해 마리나를 확대하고 수산자원보호구역 3230㎢를 해제하겠다고 한다. 호텔을 늘리기 위해 부동산투자신탁도 확대하겠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해외 환자 32만 명 유치 목표다. 조선일보는 이를 위해선 현재 경제자유구역에만 설치 가능한 '투자 개방형 의료법인'을 더 확대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뿐 아니라 민간 보험사의 환자 유치 활동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정부는 이런 내용을 포함한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을 국회에 제출해놓은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이 단지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 정책들은 의료 민영화를 확대해 공적 의료를 파괴하고 자연 환경을 해치는 방향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다.


4. "대한민국이 난리 났네 할 정도로 하라"

박근혜는 이 정책들을 강력하게 몰아부칠 계획이다. 실제로 그리할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겠지만 신년 기자회견과 업무보고에서 그의 의중은 충분히 드러냈다.

"오늘 나온 얘기를 그냥 일시에 '대한민국에 난리 났네'라고 할 정도로 해버려야 성장 기반이 마련된다"
-조선일보 14일자 3면

그와 그의 기업인 친구들이 그리 할 수 있을지는 아마 우리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지난 2년여 간 결정적 순간마다 머뭇거리게 만든 건 바로 노동계급 투쟁이었다. 2013년 말 박근혜를 위기 직전까지 몰고갔던 철도노동자 파업이 대표적이었다. 공무원 연금 개혁도 공무원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잠시 멈춰야만 했다(원래 지난해 내에 하겠다고 했었다. 지금 다시 강력하게 추진하려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도 그리 만만치 만은 않다. 현대중공업에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과 민주노총 첫 직선제 위원장으로 가장 투쟁적인 공약을 내세운 한상균씨가 뽑힌 것이 그 예일 것이다.

우리도 박근혜처럼 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난리 났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말이다.

2014년 11월 5일

"어쨌든 개혁이 필요한 것 아닌가"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박근혜는 공무원노동자를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생각을 좌파의 일부도 공유한다. JTBC에 나가 "어쨌든 공무원 연금은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 유시민과 이런 좌파들의 생각은 얼마나 다른가.

그런 얘기를 하려면 우선 공무원 연금의 재정 부족에 정부의 불법, 탈법적 행위도 큰 책임이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세상에 연금공단 운영 비용을 연금에서 충당하고, 명예퇴직자들을 위한 퇴직금을 연금으로 주는 게 어딨나.

몇 번이나 했던 얘길 또 하자면, 공무원은 퇴직금이 없다. 퇴직수당이라는 게 있는데 이는 일반 노동자의 퇴직금에 턱없이 모자르는 금액이다. 다시 예를 들자면 내가 4년 근무하고 퇴직금 1000만원 좀 넘게 받았는데 나와 비슷한 기본급을 받는 교사 노동자는 10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퇴직수당이 1000만원정도다.

국민연금과 비교해도 공무원은 훨씬 많은 금액을 스스로 부담하고 있다. 일반 노동자가 급여의 4.5%를 연금으로 내지만 공무원은 7%다. 도대체 "적게 내고 많이 받는다"는 생각은 어디서 비롯한 것인가.

공무원 연금 개혁이 문제가 아니라 용돈밖에 안되는 국민연금 개혁이 필요하다. 하향 평준화가 아니라 상향 평준화가 개혁의 방향이 돼야 한다. 일반 노동자들의 고용, 소득 불안정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공무원이 '안정적'이란 '질시'의 감정이 커지고 있다. 좌파가 이런 '질시'의 감정에 타협하면서 '상향 평준화'를 이뤄낼 수 있는가. 이런 얘기 않고 "어쨌든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추가
"어쨌든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위험성 중 하나. 노무현에 친밀감을 느끼는 이들이 다수인 30~50대 남성 사무직 노동자 중심의 한 커뮤니티는 JTBC 유시민 발언 전까지만 해도 정부의 공무원 연금 개혁보다 국민 연금 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더 많았고 목소리도 높았다. 지지도 많았다. 그런데 유시민 발언 이후 이런 입장은 위축되고 후퇴했다. 비록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이는 저 주장을 좌파가 받아들일 때 이 싸움에서 박근혜에 맞서 우리가 이길 수 없음을 미리 알려주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2014년 11월 5일

11월 1일 여의도에서 열린 공무원연금 개악 반대 집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구는 '2007, 2009 참회 반성'이었다. 이 문구는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전공노보다 온건한 노조)의 몸벽보다. 2007년 국민연금 개악과 2009년 공무원연금 개악을 강건너 불보듯 방기했던 걸 반성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9월 집회에서 "지난 2007년 국민연금 개정으로 국민연금이 용돈 수준으로 전락했을 때 강 건너 불구경했으며, 공무원연금법 개정을 논의할 때 후배들을 방패막이로 삼아 선배들의 연금을 지켰다는 비난과 비판을 인정한다"며 삭발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날 집회에는 공무원연금과 연관된 거의 모든 공무원 단체가 다 참여했다. 이들은 이날을 계기로 '공적연금 강화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해 공적연금 전반에 대해 함께 다루기로 결의했다('공적연금'이란 공무원연금을 뜻하는 게 아니라 국민연금 등 공적 성격을 지닌 모든 연금을 말한다).

즉 '어쨌든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이들이 상상하는 것과 다르게 이미 공무원 노동자들은 이 투쟁을 공적연금 전반의 개혁 문제로 이끌어가려 하고 있다.

물론 좌우파를 총망라한 대오를 분열시키기 위한 떡고물을 정부가 던져줄 수 있고 이는 투쟁에 큰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것에 앞서 공무원노동자들 스스로 '사회적 연대'를 조직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좌파라면 이러한 움직임을 고무하고 더 급진적으로 발전하게끔 함께해야 할 것이다.

제발 공무원 연금의 현실이 어떤지, 지금 공무원 노동자들이 무엇을 주장하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나 보고 말했으면 좋겠다.


2014년 11월 7일

1. 공무원 노동자인 지인과 오랜만에 통화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데 그가 속한 지부(구청)에서만 500명 넘게 1일 집회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파업과 같은 더 급진적 행동에 대해서도 긍정적 분위기가 많다고 한다. 오히려 기존 활동가들이 더 자신없어할 정도로 말이다. 교사 노동자인 지인의 이야기도 그리 다르지 않다. 딱히 열성 조합원도 아닌 분이 '파업' 얘기를 하더란다. 그래서일까 공무원 '집단 행동'을 자제해달라는 정홍원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는 상당히 수세적으로 들린다. 그것이 수세적이든 공격적이든 총리의 자제 발언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노동자들은 오늘 광주에서 열린 정부의 '공무원 연금개혁 국민포럼' 개최를 흔들림 없이 저지했다.

2. 이는 매우 중요하다. 이제 곧 집권 3년차에 들어갈 박근혜는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각종 세금을 올리는 것을 비롯해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악화시키려는 시도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정부의 이런 시도를 저지해 공적연금 전반의 '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무원연금의 '개악'을 막아낼 수만 있더라도 이는 노동계급 대중 전반에 크나큰 자신감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 이후 전국적 쟁점에서 집권 우파의 공격을 막아낸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입버릇처럼 쏟아지는 "떠날 수 있다면 이민 가겠다"는 말은 그런 자신감 없음의 반증이다. 따라서 개악을 저지하고 현상황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승리일 수 있다.

3. 떠올려보면 노동계급의 투쟁은 일부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생존 조건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특히 1950년대와 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 이후는 더 그렇다. 한국에서도 1987년부터 91년까지 사이의 시기를 제외하곤 거의 그랬던 듯싶다. 이걸 노동계급 투쟁의 본질적 특징이라고까지 말할자신은 없지만 최소한 경제 후퇴기 노동계급 투쟁의 일반적 특징이 아닐까 싶다. 즉 지금은 '지키는 것 자체'가 쟁점이고 우리의 요구가 될 수 있으며 승리다. 그리고 노동계급은 이런 투쟁을 통해서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며 새로운 전망에 눈을 뜨곤 한다.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의 '참회 반성'이라는 구호가 이를 잘 보여준다.

4. 우파 공무원 노동조합이 2007년 국민연금 개악을 도외시 했던데 대해 '참회 반성'을 말한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부가 공무원연금의 기금고갈과 재정적자를 문제시 삼는데 이는 사실 동일하게 국민연금을 공격하는 논리기도 하다. 고령화 사회 진입 운운하며 기금 고갈을 얘기하며 국민연금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거부한 게 최근이다. 이러한 개악을 공무원 노동자들에게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게 과연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길일까. 더 나은 '사례'가 있을 때 보다 더 나은 대안을 구축하기 위한 투쟁도 힘을 받는법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맘에 안들지라도 공무원 연금은 그러한 '더 나은 사례' 중 하나로 남아있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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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던 2012년 8월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를 찾았다. '과거와의 화해'를 위해 전태일 동상 앞에 헌화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김정우 지부장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와 김 지부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뉴시스]

5월 9일 KBS 길환영 사장이 사과하고 김시곤 보도국장이 사임함으로써 세월호 피해자가족들의 청와대 앞 20여 시간 농성이 마무리 됐다. 또 하나의 요구였던 대통령 면담을 청와대가 완강히 거부했음에도 말이다.

박근혜는 왜 그리 강경하게 유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일까. 국정을 돌보느라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바로 그 시간 청와대 안에서 박근혜는 세월호 사건 때문에 위축된 소비심리를 살려내야 한다며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청와대와 박근혜에게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다면 민생대책회의가 아닌 유족들과의 면담을 우선했어야 할 것이다. 사고 후 수습과 구조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과 무관심에 사람들은 경악하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고민하게 됐기 때문이다. 소비심리의 회복과 경제생활의 정상화는 바로 이러한 불신과 불만을 어루만지는 데서 시작했어야 한다. 그렇지만 박근혜는 유가족이 청와대 앞에서 경찰 수천 명에 고립돼 있는 동안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한국여행업협회장, 대한숙박업중앙회장, 한국관광협회중앙회 부회장, 현대ㆍLG경제연구원장을 만났다. 결국 그가 어루만지려는 국민, 그가 소통하려는 국민은 이 나라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우리 편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했다.

박근혜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국민 다수와 사이에 투명한 벽을 쌓고 있다. 팽목항을 처음 찾았을 때 경호원에 둘러싸인 박근혜는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오열하는 유가족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만 움직인다. 4월 29일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았을 때 그는 가짜 유가족을 앞세워 우아한 워킹으로 사진과 영상을 위한 촬영에만 최선을 다했다. 경호원에 의해 박근혜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로막힌 '순수' 유가족이 거센 목소리로 정부의 무능력에 항의하는 중에 말이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던 시절인 2012년 8월 28일,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한다며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려 했을 때 쌍용차 김정우 지부장이 거센 항의를 눈앞에 두고도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박근혜, 전태일 유족 반발에 발길 돌려ㆍ뉴시스ㆍ링크).

세월호 사고 초기부터, 아니 취임 전부터 일관되게 보여왔던 박근혜의 어떤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개인적 기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아마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희진은 경향신문 칼럼
(위로하는 몸ㆍ4월 23일자 13면ㆍ링크)에서 이렇게 적었다.

"박 대통령의 경직된 얼굴은 국민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 판단력 부재, 평소의 나르시시즘(독재성)이 합쳐진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은 미개한 민초'들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자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불쾌감으로 대응했다. 굳은 얼굴, 위로하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화가 난 것이다. 뻔뻔스러움조차 넘어선 '마리 앙투아네트'의 몸이다."

이 구절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가 떠올린 인물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닌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짜르 니콜라이 2세였지만 말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 4장 '짜르와 황후'에서 지배계급 개인의 특성이 역사의 운동과 어떻게 연관을 맺는지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물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나는 개인의 특성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러한 개인들을 매개로 움직인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주장대로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시작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에게 관심을 쏟는 것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는 지금 분노의 초점이고 정국의 핵심이다. KBS 본관 앞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꿈쩍 않던 사장과 보도국장이었다. 청와대는 공개적으로는 KBS의 사과와 보도국장 사임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지만 유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과와 사임을 한 것이다. 이는 국영방송국을 움직이는 핵심 권력이 청와대에 집중돼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고 박근혜의 권력을 강력한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지난해 12월 철도노노조의 총파업은 박근혜 정부를 위기로 몰아갔다. 나는 지난해 12월 이 블로그에서 노동자들의 단호한 집단행동이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의 분열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몰아부쳤고 중도층을 박근혜정부로부터 분리해내기 시작했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민주노총이 물러섬으로써 그 기회를 놓쳤지만 말이다
(민주노총, 흔들리는 정부ㆍ새누리당 앞에서 후퇴하다ㆍ링크). 이와 비슷한 일이 KBS를 둘러싸고 다시 벌어졌다. 조금 작은 규모지만. 김시곤 국장은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다며 사장도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규모 있는 집단적 행동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SNS로 표출되는 대중의 불만과 분노 만으로도 지배계급은 균열을 드러냈고 청와대도 둔하지만 조금씩 움직였다.

'고통에 대한 무감각, 판단력 부재, 평소의 나르시시즘'에 가득찬 박근혜와 청와대는 둔하게만 움직일 수 있다. 트로츠키가 그린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역사의 파도에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媒質)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박근혜의 무감각으로부터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짜르와 역사 사이의 침투할 수 없는 '매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매질이 만들어낸 박근혜의 무감각이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다.

이 '매질'은 역사의 파도로부터 짜르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박근혜의 경우 이 '매질'이 분노를 자아내고 대중을 움직이고 있다. 5월 10일 안산에는 2만여 명이 모였다. '엄마들의 노란손수건' 대표 김경래씨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조작하고 은폐하는 정부,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정부는 필요없다"며 국민과 사이에 투명한 매질로 벽을 쌓는 박근혜정부를 비난했다. "우리가 나라를 바꾸겠다"는 주장에 크게 동감하는 것이 나 만은 아닐 것 같다
("잊지 않겠습니다" 안산 거리 가득 메운 촛불ㆍ경향신문ㆍ링크). 우린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역사가 움직이진 않을지라도 말이다.

트로츠키가 쓴 러시아 혁명사 4장 '짜르와 황후' 일부를 아래 발췌해 옮겨놓는다. 최규진이 옮기고 풀무질에서 발행한 책이다.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 짜르 왕정도 이 역사의 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동력은 개인들을 통해 작용한다. 그리고 왕정의 작동원리는 개인과 분리될 수 없다. 역사발전 과정 중에서 짜르는 혁명과 마주쳤다. 따라서 역사발전의 한 고리인 짜르의 개인적 특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 더욱이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짜르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시작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니콜라이 2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거대한 제국은 물론이고 혁명마저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는 제국은 고사하고 지방의 주(州)나 군(郡)을 통치할 자질도 물려받지 못했다. 궁전 대문 앞으로 갈수록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저 역사의 파도를 이 마지막 로마노프는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媒質)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러시아군이 … 러일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 10년 후 러시아군이 갈리치아 전선에서 후퇴했을 때, 그리고 다시 2년 후 권좌에서 쫓겨나기 직전 측근들 모두가 침울, 경악, 충격을 느꼈을 때였다. 그러나 짜르 혼자만 평정을 유지했다. … 이것의 핵심은 기질적 무관심, 정신력의 빈곤, 의지력의 허약함이었다. ……

두 번의 전쟁과 두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도 짜르의 시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의식과 사건들 사이에는 항상 무관심이라는 매질이 버티고 있었다. ……

이 둔하고 평온하고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은 잔인했다. 그러나 그의 잔인성은 역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반 뇌제나 표트르 대제가 보였던 적극적 잔인성이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가 이들처럼 역사적 목표라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늦게 태어나 자기 운명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비겁한 잔인성에 지나지 않았다. … 검은 양처럼 마음이 악한 이 왕은 온 정성을 다해 인간쓰레기의 대명사인 흑백인조 깡패들을 가까이 했다. 국가예산에서 이들에게 돈을 듬뿍 집어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무용담을 즐겨들었다. 이들 중 누가 야당의원 살해에 우연히 연루되었을 경우에는 사면조치를 내렸다. ……

니콜라이 2세는 야만적인 중세의 미신마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한편, 지난 몇 십년간 나라는 계속 변화하여 문제들은 더 복잡해졌으며, 문화수준은 더 높아졌다. 그런 까닭에 짜르 주위로 모여든 인간들의 문화수준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처져 있었다.

짜르 왕정은 외부의 강제 때문에 새로운 사회세력들에게 양보조치들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전혀 현대화되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자기 안으로 계속 움츠러들 뿐이었다. 적대감과 두려움이 더욱 커짐에 따라 조정의 중세적 미신은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구역질나는 악몽이 연출되었다. ……

구 체제의 신봉자인 참의원 의원 타간체프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말에는 타간체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진실이 담겨있다. 사회 밑바닥을 구성하는 반(反)사회적 기생집단의 극단적인 행동을 깡패짓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라스푸틴의 행패는 사회 최정상에서 왕을 끼고 한 깡패짓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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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10만 명의 조직ㆍ미조직 노동자, 시민, 학생이 서울광장에 모였다. "박근혜 정권 퇴진" 구호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거친 겨울바람에 휘날리던 노동조합 깃발들은 미조직 노동자, 시민,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시위를 마친 대열은 삼성본관 앞과 동화면세점 앞 두 곳에서 거리 시위를 이어갔다. [사진 自由魂]

파업 복귀 절차, 경찰 수사와 징계 등이 남아있지만 철도파업이 오늘, 30일 사실상 끝났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과 민주당 박기춘 의원,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은 국토위 내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 설치와 철도파업 철회를 합의했다. 합의사항 전문은 아래와 같다(연합뉴스).

여야는 철도 산업발전 등 현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여야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산하에 철도산업발전 등 현안을 다룰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를 설치한다. 소위원회 구성은 여야 동수로 하며 소위원장은 새누리당이 맡는다.
2. 동 소위원회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여·야 국토교통부, 철도공사, 철도노조, 민간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정책자문협의체를 구성한다.
3. 철도노조는 국회에서 철도발전소위원회를 구성하는 즉시 파업을 철회하고 현업에 복귀한다.

2013년 12월 30일
새누리당 국토위원 김무성 민주당 국토위원 박기춘
전국철도노동조합 위원장 김명환

이 합의사항은 애초 요구안에 비할 것도 없고 26일 실무교섭 요구안보다도 후퇴한 것이다. ▲수서발KTX 운영법인 설립 결정 철회 ▲수서발KTX 면허 발급 중단 ▲국회 국토위 산하 철도발전 소위 구성 중 첫 번째 요구안은 26일 실무교섭에서 이미 철회됐고 이번 합의에서는 두 번째 요구안도 철회돼 결국 세 번째 요구안만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 이는 수서발KTX의 분할이 결국 민영화 수순이라며 반대하던 철도노조 입장과 비교하면 완전한 후퇴에 가깝다.

게다가 박근혜정부는 대놓고 국회를 무시해 왔다. WTO 정부조달협정은 국회에 보고조차 않고 개정했다. 27일 국회 중재도 무시했었다. 이번 국회 내 여야와 철도노조의 합의가 지켜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더구나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2003년 4ㆍ20 노정합의는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무시됐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 시절을 잇는 투쟁 동안 이러한 후퇴가 조금씩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는 걸 고려하면 민영화 반대 투쟁을 다시 시작할 때 우리가 출발할 곳은 지금보다 더 불리한 장소가 될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조합원들이 파업에 단호하게 참여했던 것과 달리 강경한 정부 앞에 끊임없이 머뭇거리고 주저했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결국 여기까지 후퇴한 것이다. 특히 28일 총파업 집회로 절정에 다다랐던 투쟁과 연대의 열기를 고려하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의 단호한 투쟁, 학생과 시민, 미조직 노동자의 확산되는 연대가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 지배집단 내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아쉬움은 더한다.

균열의 조짐을 보인 박근혜정부ㆍ새누리당

27일 금요일 밤, 국토부의 수서발KTX 운송 면허 발급을 즈음한 한 풍경을 살펴보자. 이날 JTBC 뉴스9은 마침 환노위 새누리당 간사 김성태 의원과 전화 인터뷰 중이었다.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의 노사간 실무협상은 결렬로 끝났다(노조는 한사코 '결렬'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날 낮 국회 환노위의 중재도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 정부는 수서발KTX 운송 면허 발급을 예고해놓은 상황이었다. 바로 그 인터뷰가 진행되던 상황에서 수서발KTX 면허 발급 속보가 떴다. 당황한 새누리당 의원은 망연자실 했다. 이 장면은 박근혜정부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는지, 즉 청와대가 지배집단 내에서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강권력 만으로 통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조금 길지만 이 장면의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자
(JTBC 홈페이지에 있는 기사는 그 기묘한 대화의 순간을 적절히 담아내지 못해 직접 옮겼다).

손석희: 저희가 아직 확인은 못했는 데요. 아까 말씀하실 때 11시에 수서발KTX 자회사 설립을 위한 면허가 발급될 것이다 하는 것은 다른 언론에서 확인하신 겁니까? 아니면 다른 경로를 통해 들으셨습니까?
김성태: 새누리당 환노위 책임자로서 앞으로도 오늘 비록 환노위에서 철도 노사 중재가 불발에 끝났지만은 노사간의 중재의 노력은 계속돼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국토교통부의 면허 발급, 야밤에 한다는 것은 중단되어졌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손석희: 지금 저희가 뉴스속보 자막을 내고 있는데요. 수서발KTX 운송 면허 발급. 발급이 된겁니까 지금?
김성태: 아 …, 이건 정말 저희도 지금 확인이 안되는 건데.
손석희: 잠깐만요, 제가 저희 뉴스부조정실에 확인해보겠습니다. 발급이 돼서 이 속보를 넣은 겁니까? 네 발급이 됐다고 하네요.
김성태: 아 ….
손석희: 애초에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저는 오늘 밤 중이라고 말씀드렸고, 김성태 의원께서는 11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지금 시간은 9시14분 지나고 있고요. 이 시간에 이미 수서발KTX 운송 면허는 발급이 된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뭐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국회로서는 그런 상황인 것 같고, 이건 뭐 노정간에 강하게 부딛칠 것 같은 그런 상황입니다. 또 12시까지 업무 복귀라고 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도 노조로서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될 수도 있겠고 ….
김성태: 정말 극단적인 파국만은 좀 막아보자는 그런 일념으로 민주당이든 새누리당이든 이제 정치적 입장을 완전 배제하고 국회가 중재하자는 입장인데 이제 여지가 없어지는 거죠.
- JTBC 뉴스9 12월 27일

새누리당 국회의원 김성태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지는가? 오늘은 또 '원조 친박'이라고 불리우는 유승민이 "수서발 자회사 설립은 정책부터 잘못됐다"고 밝혔다는 뉴스가 나왔다. 철도노조의 단호한 투쟁, 국민적 지지의 확산이 지배집단 내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유승민은 "타이밍이 지났다고 본다. 이미 (정부와 노조가) 서로 각을 세우고 있는 마당에 지금 이야기를 하면 총부리를 거꾸로 겨누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덧붙여 지금의 상황에서 지배집단 내 분열이 가진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을, 즉 현재의 위기가 분열을 강제하는 상황까지는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경향신문). 그러나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우리가 후퇴하거나 분열하지 않았다면.

의미심장한 조짐은 또 있었다. 오늘 한겨레는 1면에 '박근혜 정부 10개월, 중도층 이탈 두드러져'라는 기사를 실었다.

"12월 셋째 주 마지막 조사에서는 '잘못한다' 49%, '잘한다' 33%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이 이뤄진 때다."
- 한겨레 12월 30일 1면

박근혜정부의 강경 대응은 지배집단이 강하다는 증거도 아니었다. 강경책은 오히려 중도층까지 정부로부터 이반시키고 있었다. 이 경향이 계속되면 지배집단 내 균열이 가시화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런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우리 운동이 "박근혜 정권 퇴진"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됐을 때, "대선 불복이냐?"는 새누리당과 정부의 되치기에 물러나기 여념 없었던 민주당에 우리 운명을 맡겨버린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의 합의다.

박근혜정부보다 우리의 약점이 더 컸다

끝끝내 정부가 "민영화는 아니다"고 내심과 다른 말을 해야 했던 것, 정부조달협정 개정에서 보이듯 대놓고 정부에게 무시당하던 국회가 나서야만 했던 것에서 우리는 그나마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안녕들하십니까'라고 서로의 안위를 물었던 대학생들이 손쉽게 도서관 의자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오프라인에서의 활동을 계획하고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한 네티즌들이 다시 온라인 잉여질에만 몰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투쟁은 여러모로 우리 운동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합의사항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당은 민영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저들은 지금의 '파국'을 중단시키는 데만 관심있을 뿐, 민영화가 가져올 파국에 진지하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민영화를 시작한 김대중-노무현 정부라는 원죄가 있기 때문 만은 아니다. 상층 부르주아지 일부와 중간계급을 기반으로 한 민주당은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공공부문의 '비효율성'을 문제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권에서의 공사화와 상ㆍ하 분리, 이후 KTX 여승무원 외주화 등 철도산업 전반을 지배하게 된 사기업의 이윤원리에 민주당은 반대하지 않는다.

노동계급 내 최상의 투사들이 민주노총을 건설했고, 그들 중 다수가 정치적 좌파였음에도 국가에 대한 정면 도전은 이들의 투쟁 수첩에 적혀있지 않았다
(특정 정파 출신임을 문제삼는 게 아니다). 파업 초기부터 정부는 타협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체포영장만으로 민주노총을 침탈했고 새누리당까지 포함된 국회의 중재안도 무시했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은 연대투쟁을 건설하지 않았다. 지지와 연대는 오직 우연에만 맡겨졌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그 대자보에 묻어가려고만 했다. 22일 경찰의 민주노총 침탈 후 "저들의 합법은 우리의 불법"이라며 '불법투쟁'도 감수하겠다던 강경한 연설과 달리 28일 총파업 집회에서 민주노총은 공개적인 거리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다. 아마 사전에 조율된 것이겠지만 산하 조직들의 개별 행동이 거리 투쟁을 이끌었다. 공식 무대에서 "거리로 나가자, 청와대로 가자"는 호소는 없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왕좌왕 했다. 특히 다수의 미조직 노동자, 시민들은 어떤 공개적 지침도 없이 개별적 판단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단 한 번의 거리 시위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진 않지만 위력적인 거리 시위는 이후의 투쟁을 위한 훌륭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경찰이 관광버스까지 동원해 전국의 경찰을 서울광장에 집중시켜 거리 시위를 막으려고 한 이유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 기회를 사실상 대중의 자발성에만 맡겨뒀다.

지난 몇 년 간의 흐름과 다르지 않게 투쟁의 결정적 국면은 법적 공방으로, 사법부에 맡겨졌다. 수서발KTX 설립을 결정한 이사회의 적법성, 민주노총 침탈에 대한 민형사상 소송, 국토부 면허 발급 무효 소송 …. 법률과 사법부가 우리 편이 아님은 업무방해와 손배가압류와 같은 것들에서 이미 지겹도록 봐온 것이다. 최근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사법부는 자신들의 계급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 지도부는 법적 공방에만 매달리고 있다. 사법부의 판단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나온다면 다행이겠지만 그 반대인 경우 투쟁대열의 자신감은 급속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의 이러한 우유부단함이 노동조합 탓만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대안을 건설할 세력의 부재가 컸다. 통합진보당ㆍ진보정의당ㆍ노동당은 이번 국회 합의에서 완전히 무시됐다. 통진당과 정의당은 국회의원이 있는 원내 정당임에도 말이다. 노동당은 박근혜정권 퇴진 투쟁을 공언했지만 현실적 힘은 지니지 못했다. 최소한 민주노총 내 의미있는 움직임을 이끌어낼 능력도 없었다. 소규모 좌파 그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회에서 무언가를 할 협소한 의미의 정치세력이 아니다. 거리와 의회의 정치를 잇고, 사무실과 공장의 연대를 만들어낼 정치세력이 필요하다.

이미 이번 기차는 떠나버렸다. 많은 것을 남겨두고 말이다. 다음 기차가 연착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의 예상보다는 빨리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 거리 시위에 관해
민주노총 지도부가 공개적으로 거리 시위를 호소하지 않은 것은 아마 법률적 책임 문제 때문일 것이다. 불법으로 규정돼 이후 이어질 법정공방은 노동조합 지도부로서 매우 불편하고 귀찮은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꽤 오래전부터 실상 민주노총이 주도할 때조차 공식적으로 지도부는 법을 넘어선 거리 시위를 호소하지 않었다. 이러한 편의주의적 태도는 지도부가 받게될 법적 제재 이상으로 우리 대열을 혼란에 빠뜨리기 일쑤다. 28일에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미조직 노동자, 학생, 시민들은 이미 노동조합 대열의 상당수가 빠져나가 휑해진 광장에서 우왕좌왕 했다. 트위터에선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 앞으로 모여달라는 이야기가 퍼져 민주노총 대변인이 긴급하게 정정 소식을 알려야만 했다. 이 모든 게 조직을 지키기 위한 것이란 이유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1987년 대투쟁 이후 역사에서 노동조합ㆍ좌파 조직은 투쟁 속에서 성장했지 안정적인 일상 사업 속에서 성장한 게 아니다. 조직을 지키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도 지도부는 가장 앞장서 투쟁을 지휘해야 한다.


※ 아래는 이번 합의에 관한 한 철도노조 조합원의 글. 페이스북 권영숙 선생 페이지에서 퍼왔다.
"이대로 접을 수는 없다, 과연 투쟁의 전망은 없는가? 더 싸우면서 전면파업을 결정하자!"

합의안 얘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수서발 KTX 주식회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말도 없는 합의안입니다. 합의안의 수준이 높고 낮음을 떠나 실체가 없는 뜬구름입니다. 새누리당이 위원장을 맡을 철도발전소위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예전에는 탄압의 주역들이었고 지금은 투쟁에 들러리 서다가 떡고물이라도 챙겨볼까 하는 민주당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습니까? 징계 문제는 합의소식이 발표되자 정부와 공사는 파업이 끝나도 법과 원칙대로 징계하겠다고 했습니다.

지도부는 투쟁의 전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추가 복귀자가 계속 생겨날 것 같다는 보고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중추 대오가 살아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운전분야 복귀율은 5%가 넘지 않습니다. 지금 지도부는 밀리는 흐름을 최대한 저지하고 다시 힘을 모을 생각은 전혀 안하고 아주 조급하게 아무런 알맹이 없는 합의(?)를 하고 복귀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과연 투쟁의 전망이 없습니까? 정부와 공사의 총공격 앞에 일부 대오가 복귀하고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귀율이 40%가 넘었습니까? 과반이 넘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 밀리면 상상할 수 없는 징계와 보복이 뒤따를 것입니다. 정부의 공격을 맞받아치면서 강력한 퇴각의 저지선을 치지 못하고 여야 정당들에 의해 이끌려 합의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힘이 부족해 밀릴 수도 있고 부족한 합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도노동자 전체가 최선을 다해보고, 할 만큼을 다해보고, 검토할 것은 다 검토하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노총 1월 9일 총파업이 있습니다. 그 총파업에 기대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력을 다해 총파업을 추동해내고 그것으로도 정부가 물러서지 않으면 전면파업이라는 승부수를 던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최대한 밀어보고 전체적인 상황을 판단하면서 더 전진인지, 퇴각인지 결정하면 됩니다. 필공조합원들이 전면파업에 나섰을 때 받을 수 있는 처벌, 징계, 부담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공조합원들은 나설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결의하는 조합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오의 일부만이라도 결합하면 지금보다 몇십 배 더한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와 시민들의 연대는 줄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 합의 발표 이전에 전면을 결의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동료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이 해고를 당할 상황입니다. 필공조합원들은 분노하고 있고 안타까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전체 철도노동자의 자존심을 짓밟고 우롱하고 철도노동자 죽이기 민영화를 밀어붙이는 정부의 막가파식 태도를 그 누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필공 조합원들을 다 아끼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동료애는 당장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싸우면서 함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투쟁할 수 있습니다. 조합원들이 결정합시다. 지부별 총회를 열고 판단합시다. 전면파업하면 전체가 싸울 수 있다는 결의를 하는 지부들도 있습니다. 조합원들이 지도부의 고민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도부 결정이 항상 옳을 수는 없으며 올바르지 않은 결정은 조합원들이 바꾸어야 합니다.

지도부 마음대로 파업철회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파업은 서로 대결의 수준이 가장 높습니다. 저들은 철도노동자들 앞에서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수많은 노동자 민중의 연대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싸움일수록 당장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야 하고 철도노동자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진심과 열의를 받아안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조합원 동지들, 얘기합시다. 지금의 상황과 투쟁의 전망을. 조합원들의 판단과 결정없이 내려지는 일방적인 복귀명령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토론과 총회, 전체 조합원들의 판단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힘들다고 여기서 이대로 끝낸다면, 정치인들의 말만 믿고 접는다면 민영화와 수서발 ktx설립은 굳어집니다. 지금 합의는 아예 합의를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국회발전소위원회는 우리의 의지가 담길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의 족쇄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그래도 힘이 부족하다면 깨끗이 졌다 인정합시다. 그리고 미래를 기약합시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조직해가고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전면파업이라는 승부수로 단 며칠이라도 우리의 힘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그런 기세와 결연함만이 우리의 조직력을 보존할 수 있으며, 투쟁한만큼의 성과도 쟁취해 낼 수 있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수십 년이 후퇴하는 절체절명의 파업. 아직 우리는 더 싸울 힘이 남아 있고 더 싸워야 합니다. 조합원 동지들의 생각과 의견을 말합시다. 흔들림없이 싸워왔던 우리 조합원들은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12월 28일 서울광장에 모인 10만 명의 노동자는 단호하게 철도파업 지지를 선언했다. [사진 自由魂]

탑골공원에서 오후 2시에 열린 전교조의 사전집회부터 참여했다. 1000여 명의 조합원이 매우 좁은 장소에서 힘있게 사전집회를 진행. 참여한 전교조 조합원들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사전집회 열기와 달리 서울광장까지 이동은 행진이 아닌 인도를 이용한 개별적 이동. 그러나 참여한 사람의 수가 있다보니 행진 아닌 행진. 산업은행 앞에서 대학생들의 '안녕들하십니까' 대열을 스쳐 지나가고 영풍문고 즈음부터는 건설노조의 연대파업 대열과 합쳐지면서 자연스럽게 거리행진으로 이어졌다.

30여분 쯤 지나 도착한 서울광장은 이미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로 꽉차있었다. 족히 10만 명은 됐을 듯. 서울광장에서 서울시내로 향하는 도로마다 경찰의 차벽이 높게 서있었다. 경찰은 경찰버스가 모잘랐던지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위축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대열은 건설노조.

집회가 중반쯤 지나면서부터 여러 노조가 이동을 시도했다. 사전에 중앙에서 계획된 것인지 각자의 의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방향으로 서울광장을 빠져나가 광화문을 향했다. 내가 향한 삼성 본관 앞 시위대에선 건설노조가 맨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날 밤 정부는 이날 시위의 김을 빼기 위해 수서발KTX 법인 설립 면허를 발급했지만 시위대는 아랑곳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 동안 여러번 정권 퇴진 구호가 나왔지만 이날처럼 자연스러웠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정부가 강경한 상황에서 조직을 추슬리기 위해 일단 후퇴하자는 이야기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그리고 전날 철도노조와 민주노총의 태도에서 그러한 머뭇거림이 보였지만 조직된 노동자들의 태도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있던 곳에서 경찰은 해산 명령을 '4차'까지 발했다. 보통은 '3차 경고' 이후 강경진압을 해왔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개인적으로 '4차 해산 명령'은 처음 들어봤다.

결국 이 투쟁의 해답은 여기 있다. 조직 노동자를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 학생과 미조직 노동자들은 이미 충분히 그들의 의지를 보였다. 이제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조직 노동자들의 의지에 따라 이 투쟁은 더 확산될 수도, 가라앉을 수도 있다. 사실 가장 앞장서야할 것은 좌파 정치세력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우선 민주노총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 내 좌파의 건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