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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클라이먼의 데이비드 하비 비판 3편을 아래 옮깁니다. 주석과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며 대괄호[ ] 안은 옮긴이가 덧붙인 내용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3편: 답변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5월 13일ㆍ링크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은 자본주의의 실제 특징을 해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법칙이 2007~2009년의 대침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둘 사이의 논쟁은 계속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을 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를 통해 자본주의 위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앤드루 클라이먼은 최근 뉴레프트프로젝트(New Left Project)를 통해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로 꼽힐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이론 비판에 대한 반론 두 편을 발표했다.
1편에서는 하비의 마르크스 해석을 비판했고 2편에선 미국 기업들의 2차 세계대전 후
장기적 이윤율 저하에 관해 마르크스의 법칙에 근거해 논했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하비는 "길게 봤을 땐 클라이먼이 옳은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면서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 이해하기 위한 내 유기적인 비유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논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두 비유를 대비시켰다.

아래는 클라이먼의 답변이다.


나는 데이비드 하비가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 자본주의 경제위기론이 기반을 둔 법칙이며, 대침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적절한 법칙이며 이론인 이 법칙을 비판(하비 2014ㆍ링크)한 데 대한 내 반론에 그가 시간을 내 답변해준 것에 감사하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답변(링크)에서 내가 쓴 것의 일부만 다뤘고 특히 내가 제시했던 문헌적(링크)이거나 경제적인(링크) 증거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내 유추를 '자본의 본성'이라는 비유로 묘사하며 오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익한 토론을 개시할 출발점으로 그의 답변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마르크스의 LTFRP가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독창적인 비난과 그에 대한 내 대답을 먼저 간단히 요약하겠다. 그런 다음 그러한 유추가 '자본의 본성'을 비유한 것이 아닌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계속해서 이 글의 나머지에선 LTFRP를 잘못 정의해놓고는 그 법칙이 옳을 가능성과 이에 대한 토론의 필요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하비의 새로운 비난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다시 증거를 검토해볼 것이다.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비난(첫 번째 버전)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과 이 법칙에 기반한 자본주의 위기론이 일원인론이라고 비난한다.[1] 이러한 비난은 이 법칙이 결정적으로 마르크스가 '엄격하게 가정한' 수치들에 기대고 있다는 하비의 주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처럼 의심받는 가정들 때문에 LTFRP는 노동 절약형 기술 변화를 제외한 수익성을 하락시키는 잠재적 원인 모두와 이윤율이 하락하지 않도록 하는 기술 변화에 의한 상쇄요인 모두를 배제하는 것으로 비친다.

물론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본론' 3권 3편은 금융제도와 같은 부가적인 위기 원인들에 더해 몇몇 상쇄요인들을 논한다. 대신 이 법칙이 일원인론이라는 그의 비난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의 구조,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설명에 다양한 요인들이 등장하는 순서에 초점을 맞춘다. 마르크스는 LTFRP에 대해 설명할 때 우선 '법칙 그 자체(das Gesetz als solches)'를 제시하고, 바로 그 후에 상쇄요인들을 배치하며 그 다음에야 위기의 부가적인 원인들을 끼어 넣는다.

서술을 구조화 하는 이런 방식은 매우 흔한 나무랄 데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비는 LTFRP를 '법칙 그 자체'로 축소시켜 일원인론적 서술처럼 묘사한다. 상쇄요인과 부가적인 원인들은 '법칙 그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비에게는) 그러한 요인들은 LTFRP에 포함되지 않으며 만약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면 법칙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 또 (하비에게는) 상쇄요인과 부가적 원인들의 존재를 마르크스가 인지하고 그의 설명에 그것들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LTFRP에서] 일원인론이라는 혐의를 벗겨주진 않는다. 이는 단지 LTFRP의 타당함에 대한 마르크스의 '동요와 양면성'을 보여준 것이며 그는 그 이상으로 법칙을 논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법칙에서 유래한 가정이 제거됐을 때 벌어질 일"을 논한다.

이에 대해 나는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설명했다. 나는 "그 글을 이런식으로 읽어선 안된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런 부당한 독서는 적절한 해석 방법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런 후 나는 내가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유추"라고 부른 것을 설명했다.

일원인론이라는 딱지붙이기가 왜 잘못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정교한 방법론적 논의를 펼칠 필요는 없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보편적 중력법칙을, 바람과 같이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 또는 공기 저항 같은 상쇄요인을 언급하지 않은 채 내가 제안한다고 해서 이 다른 요인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그것들을을 배제한, 그 대신 적용 가능성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제한적인 일원인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중력법칙으로부터 뉴튼의 운동에 관한 제2법칙을 이끌어내 설명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방정식에서 다른 요인들의 삽입을 삼간다고 해도 그런 [일원인론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다음 내가 공기 저항과 바람[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내가 내 양면성과 동요를 드러낸 것도 또는 보편적인 중력법칙이 오직 진공에서만 작용하고 실제 현실에선 작용하지 않는다고 시인한것도 아니다.(강조는 원문)

'자본의 본성'이라는 비유?

이 토론에서 하비(2014)의 처음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위기론 내 LTFRP의 지위에 대해, 그리고 이것의 대침체와 침체의 지속되는 여파와의 연관성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론에서 그의 여러 비판들 각각을 다뤘다. 그에 대한 하비의 대답은 오직 내 반론의 두 문장-앞에 인용한 구절의 셋째와 넷째 문장-을 논하는 데 전념하고 있고 그것 조차 이 두 문장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하비에 의하면 저 문장은 앤드루 클라이먼이 "이윤율 하락에 대한 그의 관점이 왜 일원인론이 아닌지 설명하는", 특히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개념화 하고 구조화 하는" 데 이용한 비유다. "내
[하비] 생각에 앤드루와 나의 큰 차이점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각각의 비유 형태에 있다".

앞 부분에 세 가지 중요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먼저 내 유추는 '자본의 본성'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구체적 현상, 즉 이윤율의 경향에 관한 것이다. 둘째 그 유추는 이윤율의 저하에 대한 내 관점 또는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과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 관한 것이다.
[2] 셋째 그 유추는 '자본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존재론적인 (존재에 관한) 게 아닌 인식론적인 (앎에 관한) 것이다.

나는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를 개념화 하거나 구조화하기 위해 그 구절과 다른 어떤 곳에서도 비유를 제시하지 않았고, 그와 같이 제시할 만한 비유를 갖고 있지도 않다. 자본에 대한 내 이해를 개념화 하기 위한 비유는 내게 필요 없다. 특히 '자본'은 그 스스로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이미 사실의 개념화이기 때문이다. 본래의 개념화(이리하여 가치는 이제 과정 중의 가치 value in process, 과정 중의 화폐로 되며, 이러한 것으로서 가치는 자본이 된다ㆍ'자본론' 1권, 2015년 개역판 202쪽)를 다른 비유로 어떻게 대체해야 내 이론적ㆍ경험적 연구를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 난 모르겠다.

나는 '자본의 본성'이라는 구절이 의심스럽다. 난 자본주의의 '본성'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왜 작동하고 또는 고장나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특히 자본과 자본주의에 자연계와 같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혹은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에 중력의 힘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나의 것으로 돌리며 '자본의 본성'이라는 그 구절을 하비가 사용할 때 더 그렇다. 이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하비의 대답의 넷째, 다섯째 구절이 암시하는 것과 반대로 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정치는 비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이에 따라 클라이먼의 결론은'이라는 부분). 그것은 증거와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나는 내 정치를 방어할 것이며 그렇게 할수 있을 것이다. 비유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증거와 이론에 도전하는, 정말로 논쟁에 기반한 몇몇 논의를 따져본 후에 말이다. 어떤 한 비유의 개인적 선호나 이런 취향에 기반한 (내가 자본을 어떻게 보고 경험했는가와 같은) 주관적 경험은 토론 거리가 못된다.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선택하고 겪은 바에 따른 경험한다. 이걸로 끝이다. 비유와 주관적 경험에 따라 조직된 정치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실제 사실에 비췄을 때 다른 문제다. 그와 같은 정당성을 제공할 임무로 논쟁이 내게 주워지면 나는 기꺼이 그것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는 내 비유는 '자본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닌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지나치게 깔끔한 구분처럼 보인다. 제안된 한 종류의 설명은 특정한 현상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견고하게 연관돼 있지 않는가? 따라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유추는 LTFRP와 중력의 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아니, 전혀 아니다. 현상의 '본질'과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 사이에 필연적 연관은 없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만취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3]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의 유추는 자본주의를 물리적 현실과 비교하는 게 아니다. 그 유추는 대상이 무엇이든 다원인론적 설명이 일반적 법칙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또는 '경향적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묘사한 것이다.

만약 내가

●바람처럼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이나 공기 저항처럼 그에 대한 상쇄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기 위해 중력의 일반법칙을 언급하거나
●교수와 잠자리를 같는 것과 같은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나 멍청함 같은 다른 상쇄요인에 대한 설명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더 높은 점수를 밭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식 향상을 위해 공부한다는 법칙을 주장하거나
●목이 짧은 기린을 멸종시킬 수 있는 자연재해와 같은 요인이나 상대적으로 목이 짧은 새끼를 낳게 하는 돌연변이와 같은 상쇄요인을 말하지 않고 기린이 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선택 이론을 말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과 일할 사람을 찾는 사람이 지리적으로 어긋나는 것과 같은 실업률을 증가시킬 수 있는 요인이나 차별시정 정책과 같은 상쇄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불균형적인 잦은 실업에 의한 고통을 그들이 노동시장에서 직면한 차별의 법칙으로 설명하거나
●임금의 상승과 같이 이윤율을 떨어뜨릴 수 있는 요인이나 생산수단의 가격 하락 같은 상쇄요인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주장한다고 해서

부가적인 원인과 상쇄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그것들을 배제한, 따라서 적용 가능성이 엄격히 제한된 일원인론적 모델을 구축하겠는가. 그러한 설명 후 내가 부가적 원인과 상쇄요인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 양면성이나 동요, 혹은 내가 제안한 일반적인 설명 법칙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앞의 중요 항목 네 가지를 먼저 점검해보자. 그것들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를 구조화 하기 위해 이용한 비유인가? 떨어지는 사과, 좋은 성적, 목이 긴 기린, 불균형한 실업 빈도와 떨어지는 이윤율 모두에 공통적인 어떤 중요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중력의 일반법칙, 학습-지식의 연관성, 자연선택, 노동시장의 차별과 LTFRP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어떤 중요한 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각각의 현상이 지니는 '본성'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각각 그것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법칙은 매우 다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다섯 설명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를 지닌다. 그리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중요한 것은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일원인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비난(새로운 버전)

그럼에도 하비는 계속해서 이러한 결론에 대해 '투덜' 거린다.

우리는 여기서 일원인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만약 중력의 일반법칙이 없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사과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어떤 공기저항도 무관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또는 반대되는 힘)은 오직 일반법칙과의 연관 하에서만 적절하다.

일원인론의 일반적 의미는 "하나의 원인을 갖는다는 것"인 데 하비(2014)는 "많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위기가 만들어지는 한 가지 인과관계 이론을 주장하려 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강조는 클라이먼). 그렇지만 내 비유에서 사과가 운동하는 원인에는 단지 중력 만이 아니라 바람과 공기저항도 있다. 여기에는 하나가 아니라 세 가지 원인이 있다. 따라서 그 비유는 마르크스의 LTFRP와 위기이론이 '하나의 인과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하비의 비난에 들어맞는 전형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그는 여기서 일원인론이라는 단어를 흔치 않은 의미로 사용한다. 일원인론적 설명에 대한 은연중 드러나는 그의 새로운 정의는 "다른 그 어떤 원인과도 관련이 없는 원인을 지닌 설명"이라는 것이다. 내 반론의 2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다중원인론에 대한 주장들은 위기에 관한 하비의 (LTFRP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부재원인론에 대한 갈망을 가리는 가면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그는 분명 '자본론' 3권에 나와 설명되고 완료된 위기에 관한 명확한 다중원인론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본론' 3권에는 LTFRP 이론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금융 시스템과 같은 다른 결정 요인들이 이와 연결돼 그것이 드러나는 방법을 매개한다.(강조는 원문)

하비는 일원인론이란 단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분명하기에 난 그의 재정의에 이의를 재기할 필요를 못느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관념에 따라 사회적ㆍ경제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일원인론이라고 매도한다면 그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탄소가 없었다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인간의 활동도, 그 어떤 사회적 또는 경제적 현상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현상은 '오직' 탄소와 '연관해서만 유의미하다'. 그것들은 바로 탄소가 지구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그는 LTFRP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위기에 관한 부재원인론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하비는 "자본에 의해 구성된 유기적 총체는, 앤드루가 지지하고 있으며 그의 주장과 달리 나 또한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이윤율 하락을 향하는 구조에 의해 약화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가 수익성을 하락시키고 이러한 수익성 하락이 위기로 이어지는 경우와 같은 몇몇 예외적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그가 부인했다고 말하진 않았다. 이미 말했던 바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그는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갖는 이유를 성공적으로 설명한 일반법칙으로써 진정한 법칙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또한 이 법칙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위기 이론이 "태양이 궁극적으로 수명을 다할"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4] 그의 답변의 결론은 이러한 가능성들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유기체 비유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적절하다."(강조는 필자)

허수아비 LTFRP

떨어지는 사과 유추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비유라는 하비의 주장은 내 글을 잘못 이해한 것이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자본의 본성'을 아래의 말처럼 한정짓는다는 그의 주장은 같은 식으로 다룰 수 없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은 결국 경쟁이라는 추동력에 따라 상대적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며 사라지는 것으로, 뉴턴 세계의 시계와 같은 기계적 확실성은 끝을 맺는다. 자본의 노동 고용비율은 자본의 이익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이윤율은 떨어지게 된다. 유기적 전체로서 자본의 진화를 보고 경험해온 내게 이러한 기계적 모델은 지나치게 결정론적이고 너무나 일방적이며 결국엔 목적론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위기론은 금융화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앤드루 클라이먼은 가장 단호하게 주장해 왔다"는 그의 처음 주장처럼 그 어떤 근거와 인용도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틀렸다. 정말 명확히 말하자면 이 문제에 대한 내 입장은 내 것이라고 치부되는 주장의 반대편이다.

위기를 통한 자본가치 파괴는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런 파괴가 초래하는 수익성 회복도 역시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이윤율은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 걸쳐 확고한 장기 지속적 추세를 갖지 않았고, 그런 추세를 연역하거나 예측하는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다(클라이먼 2012, 53쪽).

뉴턴 물리학으로부터 가져와 결정론적 전망을 표현한 기계적 은유의 예로는 아래의 글이 문장이 더 적절할 것이다.

유체역학의 법칙들이 세계의 어느 강에서든 한결같이 적용되듯, 자본순환의 법칙들 또한 어느 수퍼마켓에서든, 어느 노동시장에서든, 어느 상품생산 체계에서든, 어느 나라에서든, 그리고 어느 가구에서든 한결같이 관철된다.

그런데 이 결정론적 비유는 내 것이 아니다.[5] 이 문장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하비 1990, 국역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ㆍ한울) 394~395쪽에 나온다.

하비는 그의 허수아비 LTFRP와 이에 기반한 위기이론의 혐의를 풀어주는 데 매우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윤율 하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기계론적 이해를 나의 것으로 돌리면서도 그는 다시 또 LTFRP와 이에 연관된 위기이론에 일반적인 '환원론'과 같은 의미로 일원인론의 책임을 묻는다. "(이윤율 하락의 구조)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죽는 원인으로 오직 심장마비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강조는 필자) 아니, 이건 그것과 다르다. '주로''오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위기의 원인으로 이윤율 하락에 주로 초점을 맞추진 않는다(대침체에 대한 내 책에서 다룬 2007~2008년 금융위기의 12가지 원인과 내 반론 1부에 정리한 목록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적게 이에 대해 말한다.

특정한 변수가 실제로 주요한 첫 번째 원인이 될지, 아니면 두 번째 원인이 될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런 역할도 못할지는 미리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경험적 증거를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하비가 토론의 방향을 그의 비유 대 나의 비유로 바꾸기 전 우리가 했던 게 바로 이것이다).

자료를 분석하기 전에, 나는 현실의 이윤율이 1980년대 초반 이후 반등하지 못했다는 어떠한 사전적인 믿음도 갖지 않았고 … 내가 미국 법인들의 수익성의 지속적인 하락이 이번 대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이고,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사실에 매우 잘 부합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내가 많은 자료들을 고속으로 처리하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에는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클라이먼 2012, 28쪽).

탐구의 길을 막아선 안 된다

심장마비에 대한 하비의 비유엔 문제가 있다. 왜냐면 찰스 샌더스 퍼스[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가 제시한 '사고의 첫 번째 규칙'을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탐구의 길을 막아선 안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접할 그 어떤 이론적 시도도 원칙적인 논리적 잘못은 없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시작된 연구는 방해없이, 그리고 낙담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를 향한 전진의 길목에 방어벽을 친 철학을 세우는 것은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강조는 원문)

심장마비의 비유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 경향이 위기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조차 막으려는 선험적 금지명령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증거를 살피고 평가하기에 앞서 이런 가능성이 선험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어쨌든 "다른 것들과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로 구성된 이른바 '유기적 전체'라는 비유는 "내가 자본에 대해 경험하고 본 방식에 딱 들어맞는" 그저 "내게 강한 인상을 준 비유"이기 때문에 말이다.[6]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가능성을 그들이 추가적으로 밝힐 때 비유는 탐구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험적으로 가능성을 배제하곤 했고, 탐구의 길을 가로막았으며, 연구를 방해하고 의욕을 꺾어 "진리를 향한 전진의 길목에 방어벽을 친다".

하비의 심장마비 비유는 "영리하고 기만적"이다. 이는 우선 심장마비가 인간을 죽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일 가능성을 -귀납적으로- 거부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우리가 이미 확보했다는 것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가 사회적 통념과 달리 '주요'란 단어를 '유일한'으로 대체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요란 단어를 복원해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흡연이 폐암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 화석연료의 사용이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 재정적 문제가 미국 대학생들이 학교를 졸업 못하는 주요 원인일 가능성도 증거에 앞서 배제하도록 명령할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고 답한다면 자본주의 위기의 실제 주요 원인을 제기한 것일 수 있는 이론은 증거를 살펴보기도 전에 왜 배제하라고 명령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한 원인이 주요한 것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을 만큼 호기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경험한 사건과 현상의 원인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큰 호기심을 가지지 않기도 한다고 이해한다. 나는 그들의 취향을 굳이 바꾸고 싶진 않다.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갖고 탐구하려는 길을 그들의 취향이 방해만 않는다면 말이다.

증거로 돌아가기?

그런데 또 짜증나는 것은 내가 자본주의의 위기가 한 가지 주요 원인에서 비롯한다고, 심지어 '현재 이곳'의 위기-대침체와 그 여파-가 한 가지 주요 원인 때문이라고도 제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주장한 것, 즉 미국 기업들의 수익성 하락은 대침체의 중요한 근본원인이며 이윤율 하락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이 경우 매우 잘 들어맞는다는 주장은 그리 대담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 증거를 살피기도 전에 이 가설을 배제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도 문제다. 이미 난 증거를 제시했다. 내가 예전에 제시한 이윤율 하락의 증거에 대한 하비의 몇몇 반론을 다루며 나는 예상한 증거에 대한 해석과 내 분석을 보여줬다. 그는 이에 대해 마땅한 반증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제시한 노동력 성장 통계는 이윤율이 상승하거나 LTFRP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더 중요한 건, (정당한) 증거들을 무시하는 것이, 또 이 증거로부터 이끌어낸 내 추론을 비유적으로 옳지 않은 '비유 형태'(그런게 있지도 않은데)라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는 무관한 어떤 것으로 묵살하는 게 적절하냐는 점이다. 하비를 부당하게 비난하지 않게끔, '독자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비유 형태를 단순히 비교하거나 대비시킨 것이었다고 이해되지 않게끔 내가 여기서 다시 반복하해보자면 ①나에 대한 그의 대답은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유기적 비유는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잘들어맞는다"는 단정적인 주장으로 결론을 맺으며 ②이 결론은 경험적 증거에 대한 고려없이 이뤄진다. 그는 내가 제시한 증거에 도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험적인 그 어떤 종류의 합당한 반증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더 잘 들어맞는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 자신에게 '인상적'이었던 것과 자신이 "자본을 어떻게 보고 겪었는지"에 대해 늘어놓을 뿐이다.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승인하기 위한 목적이나, 결론의 정당성을 사후 승인하기 위한, 실제론 정치적 편의를 위한 목적을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이런 식의 방법이 명백한 증거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이런 방법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단점을 지닌다. 벌어진 일을 사람들이 '보고 겪는' 방식의 이해는 실제 일어난 일과 다르기 십상이며, 이런 방식은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부적절하기 일쑤다.
[7] '보고 겪은' 일의 정확성과 타당성을 받아들이기 전 주의깊게 명확한 증거를 숙고하고 추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경험은 사건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곤 한다. 하비는 고용의 성장이 그 자체로 이윤율을 향상과 LTFRP가 작동하지 않는 중요한 증거라고 주장한다(하비 2014). 그는 상품의 가격이 가치와 일치할 때만 마르크스의 법칙은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여러 반론들이 이미 예측된 것일뿐 아니라 충분히 해명됐음을 들어보지 못한 듯 이윤율 하락 증거의 현실적 적합성에 의문을 표한다. 그와 같은 오해에 기반한 주관적 경험에 의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위기에 관한 이론이 '지금 여기'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내 생각에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독단주의에 맞서 싸워 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은 무척 중요하다.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완강히 고집하는 것은 독단주의의 한 형태다. 하비에겐 분명 이런 잘못은 없다. 그는 "그럼에도 앤드루와 나의 비유 형태 모두가 옳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부당하게도 내가 제시하지도 않았고 지지하지도 않은 비유를 탓하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최소한 독단적이진 않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독단주의도 있다. 명백한 증거와 논리적 추론을 두고도 믿음을 완강히 고집하려는 태도다. "당신은 당신의 의견을 지녔고 나는 나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거나 "당신과 나의 경험은 다르다"는 말은 열린 태도나 상호 존중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가 증거와 논리를 묵살하기 위한 것일 때 이는 자신이 잘못됐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걸 거부하는 독단주의에 다름 아니다.
[8]

하비가 두 번째 형태의 독단주의에 빠져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하비는 경험적 증거를 두고 그의 생각을 다시 숙고해보길 거부하진 않는다. 단지 그는 증거와 겨뤄보질 않았을 뿐이다. 그에겐 여전히 그럴 기회가 있고 나는 그가 그렇게 했으면 한다. 이는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게 아니다. 우리 지식인들에겐 이와 다른 책임도 있다. 그 책임 중 하나는 알곡에서 쭉정이를 골라내듯
[9] 경험적으로 옳은 것,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분하는 일이다. 이는 중요한 책임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독자들은, 그들 스스로 증거와 주장을 적절하게 평가할 지식, 그리고 이 지식을 충분히 쌓는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의 임무다.

독자들은 주로 시간과 지식이 부족한 이유로 그들 일부가 스스로 평가할 수 없는 증거와 주장들 대신 더 '유용한' 비유의 비교를 찾는다. 어떤 독자는 그 비유가 맘에 드는지 안드는지에 기댐으로써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더 잘 적용되는' 것을 대신 결정해주는 '유용한' 의견에 마음이 쏠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다른 자본의 화신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벌어진 일에 책임이 있는, 자본의 여러 화신들 중 하나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변혁시키길 바란다면,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또 망가지는지에 대한 진정한 지식-증거와 이 지식에 기반한 주장을 갖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유용한' 제안은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클리포드(William Kingdon Cliffordㆍ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가, 1845~1879)가 '믿음의 윤리학'에서 설득력있게 주장한 데 따르면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모든 믿음은 항상,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쟁점을 판단하기에 능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은 "믿음을 굳힐 시간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1990.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s of Cultural Change. Cambridge, MA and Oxford: Blackwell Publishers.('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구동회ㆍ박영민 옮김, 한울 2013)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Kliman, Andrew.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Marx, Karl. 1971. Theories of Surplus-Value, Part III. Moscow: Progress Publishers.
_______. 1989b.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_______. 1990.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I.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 개역판)
_______. 1991.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III.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 개역판)
Quine, W. V. O. 1960. Word and Object, Cambridge, MA and London: MIT Press.

주석
[1] 이 반론의 1편에서 내가 썼듯이 마르크스의 법칙은 자본주의 하에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노동절약형 기술의 발전 때문에 일어난다. 생산비용의 절감에 따라 기술 혁신은 생산가격의 상승을 저지시키는 경향을 띠며 이는 기업이 생산을 위해 투자하는 자본량이 늘어나는 만큼 빠르게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을 어렵게 한다.
[2] 하비와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충돌은 여기에 있다. 내가 언급했 듯이 그는 처음 글(하비 2014)에서 자주, 그리고 매우 길게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하비의 답변에선 마르크스가 거의 사라졌다. 그는 LTFRP와 이에 기반한 위기이론을 다루면서 단 몇 번만 [마르크스를] 언급하며, 거의 대부분을 비유와 연관해 그와 마르크스의 대립을 자신과 나와의 대립으로 그려낸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왜인가? 하비는 왜 갑자기 증거에 대한 토론에서 비유에 대한 토론으로 방향을 바꿨는가? 클라이먼이 제안한 '비유 형식'이 옳을 것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봐도 되는가. 그렇다면 대침체(the Great Recession)의 발생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옳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왜 이리 다른가?
[3]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만취상태를 분석한다"는 문장은 타데즈 보이-젤렌스키(Tadeusz Boy-Zelenskiㆍ폴란드 시인, 1874~1941)가 마이클 드 몬테인(Michael de Montaigneㆍ프랑스의 르네상스 철학자, 1533~1592)의 '만취에 관하여'라는 수필을 묘사하며 처음 쓴 표현이다.
[4] 하비는 아마 이 표현을 "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자본주의의 붕괴는 태양이 꺼질 때까지처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로부터 빌어왔을 것이다.['자본의 축적', 황선길 번역, 826쪽(Ⅱ책) 128번 각주]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이윤율 하락 때문에 반드시 혹은 그렇게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와 달리 그는 "상쇄요인들이 작용하여 그 일반법칙(이윤율의 경항적 저하의 법칙)의 효과를 억제하고 취소"['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289쪽]하기에 LTFRP는 "공황에 의하여 끊임없이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것"['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 322쪽]인데 "항구적인 공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잉여가치학설사' 이성과 현실, 589쪽 *표 각주]고 주장한다.
[5] 현대 유체역학의 나비에-스토크스방정식이 유체의 흐름은 '혼돈 상태'일 것이라는 가설에 기반해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여기서 혼돈 상태는 기술적인 정의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 다르다. 실제 예측이 불가능함에도 혼돈 상태의 동적 체계에서 변수의 작용은 완벽히 결정돼있는 것과 같다.
[6] 이 묘사에 딱 맞는 유일한 유기적 총체로는, 콰인(1960, p.52)의 '가바가이(gavagai)'가 있다. 이는 우리 중 나머지가 토끼 전체에 자극받을 때 가상의 '원초적' 자극으로서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이란 구절은 그의 '위기이론과 이윤율 저하'(하비, 2014)와 최근 답변에서 반복된다. 그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학설사[3부 20장 3절]'*에서 이 말을 인용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분리돼 있고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요인들의 폭력적인 융합으로서 경제위기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 하비가 이 구절을 위기의 원인들은 서로 분리돼 있고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며 인용한 것과 달리 말이다.

※하비가 인용했던 '잉여가치학설사' 3부 20장 3절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링크)
The capitalist directly produces exchange-value in order to increase his profit, and not for the sake of consumption. It is assumed that he produces directly for the sake of consumption and only for it. [If it is] assumed that the contradictions existing in bourgeois production?which, in fact, are reconciled by a process of adjustment which, at the same time, however, manifests itself as crises, violent fusion of disconnected factors operating independently of one another and yet correlated?if it is assumed that the contradictions existing in bourgeois production do not exist, then these contradictions obviously cannot come into play.
자본가는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바로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그가 직접소비하기 위해서, 오직 이를 위해서만 생산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부르주아적 생산에 존재하는 모순-실제에서 이 모순들은 존재함과 동시에 교정의 과정을 거쳐 조화를 이룬다. 물론 위기로서 그 자체는 서로에게 독립적일뿐 아니라 연관해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의 폭력적 융합이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순들이 작동하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할 것이다.

[7]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 1037쪽) 그 둘은 일치하지 않기에 '과학'이 필요하다.
[8] 난 관찰의 이론의존성과 같은 것들과 [이를] 비교할 수 없음을 잘 안다. 이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 지점에서 내가 논하는 것에 적절치 않다. 증거와 이유가 대립을 종식시키기에 불충분한 경우도 있고 증거와 이유가 충분하지만 대립의 한 편이 그 결론을 받아들이길 독단적으로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9]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 분명히 하자면 이는 '자본의 본성'을 농업생산에 비교하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2권이 최근 출판됐다. 출판사는 책을 소개하면서 옮긴이가 "『자본』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비의 계산 오류를 바로잡기도 했으며, 적재적소에 주석을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1권을 읽으며 도움을 많이 받은 나로서도 역서가 얼른 나오길 바라왔다. 그렇게 펼쳐 든 책의 앞 부분에서 두 가지 오류를 발견해 여기에 적어놓는다. 우선 간단한 오역이다.

"한때 화폐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던 상인은 이제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덕분에, 그들에게 제공되는 잉여가치 부분만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하비 2권 강신준 옮김 56쪽

자본주의에서 상인이 얻는 수익의 근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상인이 '화폐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는 걸로 수익을 얻었던가. 화폐를 이용해 돈을 버는 건 상인이 아니라 금융자본 아니었던가. 원문을 확인해봤다.

"Merchants, who once made their money buying cheap (or by robbery and stealing) and selling dear, can appropriate only that share of the surplus-value that accrues to them by virtue of the services they render to surplus-value production and realization."
- 영문판 30~31쪽

'made their money …' 부분이다. 내가 보기엔 "한때 저렴하게 사들여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돈을 (혹은 강도행위와 도둑질로) 벌던 상인은 …"이라고 옮기는 게 맞는 것 같다. 괄호 안 'or by robbery and stealing'을 옮기지 않은 것도 아쉽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 하에서 '수탈'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상업자본이 정직한 부지런함과 상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민한 대처 만으로 돈을 벌어온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하비의 기존 주장들을 고려했을 때 괄호 안의 문구를 삭제한 것은 그의 주장을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옮긴이 주에서의 실수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 '참된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 오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던 생산물이 내일은 다른 비슷한 상품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M1: 122. 뒷 문장은 출처를 알 수 없음. 하비는 펭귄판 202~03면에 있다고 표시해두었지만 해당 부분에는 그런 구절이 없음-옮긴이)
- 하비 2권 강신준 옮김 58쪽

강신준 교수는 해당 부분을 찾지 못해 '그런 구절이 없음'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펭귄판 '자본론'에 분명히 있다. 물론 여기엔 하비의 잘못과 실수도 있다. 잘못은 앞뒤를 바꿔 조합해 인용했다는 것이고 실수는 펭귄판 202~203쪽이 아니라 201~202쪽에 해당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We see then that commodities are in love with money, but that 'the course of true love never did run smooth')"는 펭귄판 202쪽에 있고 "오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던 생산물이 내일은 다른 비슷한 상품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Today the product satisfies a social need. Tomorrow it may perhaps be expelled partly or completely from its place by a similar product)"는 201쪽에 있다. 강신준 교수가 MEW에서 직접 옮긴 길판에선 앞 문장이 176쪽, 뒷 문장은 175쪽에 나온다.

"알다시피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176쪽

"오늘 생산물은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그러나 내일은 그 생산물 가운데 전부 또는 일부가 다른 유사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그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
-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175쪽

지난해 작고한 김수행 교수의 2015년 개정판에는 다음과 같이 옮겨져 있다.

"이와 같이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140쪽

"오늘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생산물이, 내일에는 어떤 비슷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139쪽

하비가 앞뒤를 바꿔 인용하고 출처 표기를 실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런 구절이 없음'이라고 단정적으로 옮긴이 주를 단 것은 강신준 교수의 명백한 잘못이다. 그 앞뒤로 조금만 더 살폈어도 충분히 찾아내 하비의 실수를 교정할 수 있었다. 자본론의 번역자이고 연구자인 강신준 교수의 이런 실수는 너무 아쉽다.

오역의 문제는 1권에도 있었다. 떠오르는 게 하나 있어 찾아보니 1권 55쪽의 문장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 하비 1권 강신준 옮김 55쪽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가치의 변증법적 관계를 말하는 부분이다. 원문을 찾아보지 않아도 앞 문장과 뒤 문장이 똑같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원문은 이렇다.

"Can you talk about exchange-value without talking about use-value? No, you can't. Can you talk about value without talking about use-value? No."
- 영문판 24쪽

즉 뒷 부분의 '교환가치'는 '가치'가 맞다. 최근 판매되는 책에서 고쳐졌는지는 확인 못했다.

연구자와 번역자들의 노고는 내 독서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강신준 교수의 번역 작업에도 항상 고마움을 느껴왔다. 하지만 이런 실수들로 인해 그의 작업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곤 한다. 강신준 교수와 출판사는 서둘러 이런 오류들을 찾아 수정해줬으면 좋겠다.

Posted by 때때로

※앤드루 클라이먼의 데이비드 하비 비판 2편을 아래 옮깁니다. 주석과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며 대괄호[ ] 안은 옮긴이가 덧붙인 내용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2편: 수익성에 대한 오해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3월 12일ㆍ링크
증거는 명확하다.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대침체 때까지 미국 기업들 전반의 이윤율은 떨어졌고 이러한 하락은 거의 전적으로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 따라 설명된다.

이 논문 1편[링크]에선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와 함께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마르크스가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학 법칙"으로 인정한 법칙(LTFRP)에 대한 하비의 해석(하비 2014ㆍ링크)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하지만] LTFRP가 1980년대부터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하비의 믿음은 다루지 않았다.

LTFRP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하비의 유일한 '증거'는 노동인구 데이터에 관한 논의였다. 그는 이윤율(즉 투하자본의 규모에 대한 이윤량의 비율)에 관한 그 어떤 직접적인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며 이윤율이 하락했음을 보여주는 나와 다른 이들이 내놓은 증거에 도전했다(그림 1을 보라).
[1]


그림 1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하비는 이 증거들에 관해 "몇몇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점에서 매우 옳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도 던진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의문을 들어보지도 고려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논지를 전개하는 게 문제다. 그 의문들은 실제로 오래된 상투적인 질문이다. 그러한 질문을 받아온 이들 중 한 명으로서 나는 데이터를 모으고 해석해오면서 그것들 모두를 다뤄왔다. 그러므로 그 질문들에 [모두] 답할 필요는 없다. 데이터에 대한 내 분석과 해석은 이미 그 의문들을 예상하며 다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 의문들이 어떻게 설명되는지 확인해주기만 하면 된다.[2]

그가 "대부분의 이윤율 저하 논문"에서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의문"이라며 제기한 "어떤 이유에서든 이윤율이 저하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그가 비판하는 핵심은 불분명하다. - 그러므로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마르크스가 보여주려 한 (노동절약형 기술변화의) 특별한 동학의 존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정말 옳다. 그래서 내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대침체 때까지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궤적을 고려하며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인 하락이 분명하게 사실과 일치한다"(클라이먼 2012, 213쪽)고 결론 내린 이 결론이 단순히 기업들의 이윤율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이는 여러 잠재적 하락 원인을 (분해해) 구분하는 '분해분석법(decomposition analysis)'과 각각의 요인들이 이윤율에 대해 갖는 효과의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원인을 연구하는 데 사용한 이윤율을 분석하는 표준적인 방식이 특별히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하비가 강조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다시] 분석해보겠다.

전통적으로 이윤율은 잉여가치율(또는 고용에 대비한 이윤의 비율)과 자본의 가치구성(또는 투하된 자본 중 고정자본과 가변자본의 가치 비율)의 함수로 분석된다. 어떤 맥락에서 이는 괜찮은 방법이지만 연구자들이 구성한 표준적인 가치구성은 마르크스가 가리킨 가치구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생산수단의 획득과 노동자의 고용에 투하된 상대적 가치량 뿐 아니라 상품의 실제 가치에 비해 오르는 상품의 가격 비율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두 개의 다른 요인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표준적 가치구성의 운동은 명백한, 모호하지 않은 경향을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에서 표준적인 가치구성이 변화하지 않았을 때 생산수단 획득과 노동자 고용에 투하된
[자본의] 상대적 가치량 또한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가 결론내릴 순 없다. 생산수단 획득에 더 많은 가치가 사용돼 가치구성이 상승하는 경향을 띠었지만 이 효과는 인플레이션에 의해 상쇄됐다고 가정할 수 있다.[3] 하비가 옳게 강조했듯이 이는 '중요한 문제'다.

나의 대안적 분석은 이 문제를 구별되는 두 요인으로 다룬다. 나는 이윤율의 전체 운동을 아래와 같이 분석한다.

① 상품의 실제 가격에 비해 오른 상품 가격 비율의 변화에 기인한 운동
② 고용된 노동에 대한 이윤율의 변화에 기인한 운동
③ '그밖에 모든 것'에 기인한 운동

나는 앞의 두 원인이 어느정도 짧은 기간에는 중요할 수 있지만 그 둘 모두 장기적으로 - 우리가 전후 기간 전체를 고려할 때 - 이윤율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전체는 '그밖에 모든 것'에서의 변화에 기인한다

. 따라서 일단 ①과 ②를 제외한 다음 수학적으로 계산하자면 '그밖에 모든 것'은 바로 투자한 고정자산에 대한 노동시간으로 측정된
[노동력] 고용 비율이다.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의 거의 전부는 이 비율의 하락에 기인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고용이 자본축적보다 항상 더 늦은 속도로 증가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경향을 마르크스의 법칙이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식으로 그 법칙은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 하락의 거의 전부를 설명한다.

고용에 대한 이윤의 비율은 이윤율에 약간의 영향만 미친다. 이윤율은 그 비율에 따라 아주 약간만 변동할 뿐이다. (전후 초기에만 아주 약간 그렇게 보일 뿐 1970년대부터 대침체 때까지는 상승이나 하락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비율이 오랜 기간 안정적이었다는 게 CEO들이나 기업의 고위 경영진들
[의 소득]을 이윤이 아니라 고용 부문으로 미국 정부가 분류한 것에 따른 통계적 착시는 아니라는 걸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고위 경영진에게 지급된 것을 이윤으로 재분류한 내 최근 추정(클라이먼 2014b를 보라)에서도 아주 약간의 차이만 보인다. 물론 최근 수 십 년간 그들의 보수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그렇지만 통계에 영향을 미치기엔 고위 경영진의 수는 너무 적다. 내 계산에 따르면 1979년에서 2005년 사이 0.1% 또는 1%(소득 분배에서 상위 0.1% 또는 1% 부분)라고 불리는 경영진이 받은 생산 몫의 증가는 기업의 다른 부문인 고용 몫(employees' share)에 단지 0.4%포인트 또는 0.6%포인트의 하락을 불러왔을 뿐이다.

하비는 또 이윤율이 저하한다는 증거에 대해 "이윤(가치ㆍ원문 그대로)이 생산되는 곳과 그것이 실현되는 곳 사이엔 차이가 있다. … 자본과 수익이 흘러가는 … 양식은 … 뒤얽혀 있고 시스템의 한 부분에서 선택된 데이터가 그것의 전체 운동을 정확하게 대표하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반론을 편다. 그의 지적은 다시 한 번 옳다. 앞서 논의한 국내 자본 투자의 수익률과 관련한 데이터 만으로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이 전반적으로, 국내 투자에 대한 것 만큼 해외 투자에 대한 이윤율 또한 하락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내 결론은 그 대신 해외와 국내 계정 모두를 고려해 내려진 것이다. 미국 기업의 해외 투자와 해외 투자로부터의 수익에 관한 정부 데이터는 1983년부터 이용할 수 있다. 이 데이터는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해외 투자에 대한 이윤율이 데이터의 시작점으로부터 대침체 때까지 대체로 하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림 2)
[4]. 국내와 해외 이윤율을 측정하기 위한 분모는 약간 다르기 때문에 두 데이터 모음을 적절히 연결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 기업들 전체의 이윤율 하락 규모를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해외와 국내 이윤율 모두 하락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전체 이윤율 또한 하락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림 2 미국 다국적 기업의 해외 이윤율
(해외 직접투자 누적액에 대한 해외 직접투자로부터의 세후 수입 비율)

또 하비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한 나라에서 생산된 이윤을 세금이 없거나 낮은 다른 나라의 자회사 계정으로 옮기는 '이전가격 조작'을 사용한다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국적 기업의 해외 수익과 투자 데이터가 그들의 자회사가 자리한 나라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생산이 이뤄지는 나라와 그 생산품이 판매되는 나라는 자주 다르기도 하다. 그 결과 다국적 기업의 이윤율이 어떤 특정한 나라에서 정확히 어찌 되는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렵다. 그러나 이는 전체적인 그림을 살펴볼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전가격 조작의 술수는 기업이 투자의 소유권과 이윤을 이리저리 옮길 수 있도록 하지만 이윤 또는 투자의 총량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하비는 이전가격 조작이 '숨겨진' 이윤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증거도 내놓진 않는다. 내가 알기론 그런 증거는 없다. 조세 당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이윤을 보호하는 것은 숨겨진 이윤과 같은 게 아니다.

앞서 논의한 증거는 오직 미국 기업들과만 관련된 것이다. 하비는 "그러한 데이터가 세계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일의 증거가 될 순 없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그 데이터들이 증거가 될 순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이 맥락에서 반대를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그의 논문 주제는 경제 위기의 잠재적 원인으로서 이윤율의 하락이다. 그리고 그는 최근의 위기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감염을 통해" 세계로 확산되기 전 미국에서 시작됐음을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위기가 시작돼 그 다음 다른 곳으로 확산됐다는 것은 금융적으로 간단히 설명된다. 따라서 세계가 아니라 미국에서 이윤율 하락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또 그것이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작용한 것인지에 우리는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비는 최근 몇 년간 수익성이 상당히 회복됐다고 주장한다. 물론 침체 후 추세는 이전의 이윤율 하락이 대침체의 원인인지 아닌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의 지적은 이윤율 측정 방법이 침체 후 반등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의문을 갖게 됐고 이전에 수익성 하락을 알려준 그 방법을 믿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이윤에 관한 거의 모든 정의를 이용해) 계산한 모든 이윤율은 침체 후 반등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것들 모두는 대침체 기간 동안 하락했다(바닥을 쳤을 땐
[호황의] 절정기였던 2006년 값보다 24%에서 38%까지 낮았다). 그러다 그 값들 모두는 반등해 2013년쯤엔 2006년 수준에 근접하거나 넘어섰다. 기업이 노동력을 늘리지 않고 생산하는 데 따른, 침체 이후 생산에서 노동자 몫의 급격한 감소가 수익성 회복의 주요 원인이다. 이는 '임금 억제' 때문이 아니다. 인플레이션 효과를 보정한 후에도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상승했다.

이전엔 옳았던 하비(마르크스의 '과소소비론'에 대해)

'충돌하는 힘들'과 '다양한 모순과 위기 경향들'이 있다는 것을 하비는 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일원인론인 LTFRP의 허수아비로 묘사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들을 함께 다룰 때 이 둘이 암시하는 바를 주목해야 한다. 이는 법칙이 위기의 다른 원인들과 상쇄 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만 옳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법칙을 일단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1편에서 지적한 대로 다중원인론에 대한 주장들은 위기에 관한 하비의 부재원인론에 대한 갈망을 가리는 가면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그는 분명 '자본론' 3권에 나와 설명되고 완료된 위기에 관한 명확한 다중원인론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본론' 3권에는 LTFRP 이론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금융 시스템과 같은 다른 결정 요인들이 이와 연결돼 그것이 드러나는 방법을 매개한다.

특히 하비는 과소소비 위기론, 즉 '유효수요' 부족을 LTFRP 그리고 기업의 투자 결정과 금융 동요와 같은 중간매개들이 작동한 간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연관되지 않은 대중의 제한된 소비가 만들어낸 현상으로 보는 이론을 마르크스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곧 그는 "만약 임금이 너무 낮다면 유효수요의 부족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관념을 마르크스의 것으로 돌린다. 증거로 그는 '자본론' 3권(그리고 2권의 비슷한 주석)에서 한 문장,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자본론 3권, 597쪽)는 마르크스의 설명을 인용한다.

하비는 곳곳에서 이 문장을 등장하는 맥락을 제거하고 전통적인 과소소비론의 방식으로 다룬다. 맥락을 따져보면 그 문장은 저임금이 부족한 수요로 이어지는 시기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대중의 제한된 소비를 위기의 '원인', 현대적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용인'이라고 말한) '원인'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의 '원인'으로 보는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위기가 가능한 조건(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형상인')일 뿐이고 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5]

바로 몇 해 전, 하비는 언급된 그 문장과 구절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그 맥락에 따라 조심스레 분석했다. 잉여가치가 생산돼 화폐로 실현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추가 수요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물은 후 하비는 "마르크스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냉혹하게 솔직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으로 구성된 폐쇄된 사회에서 추가 수요는 오직 하나의 원천, 즉 자본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고 따라서 착취받는 노동자는 그것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하비 2012, p.25)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추가적인 생산수단을 위한 자본가들의 기업 수요-투자수요-와 판매될 잉여가치를 포함하는 생산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자본가 가정의 소비재 수요다. 그에 따라 하비는 경제 위기를 특징지우는 수요의 부족이 위기 때든 위기가 아니든 언제나 소비를 제한받아온 '대중' 또는 '착취받는 노동자'의 제한된 소비 탓이 아님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하고 많은 부분을 질문하는 식으로 요약한다. 따라서 위기를 대중의 제한된 소비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행기 사고를 (사고가 났을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언제나 존재하는) 중력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대신 수요의 부족은 '자본으로부터' 나와야 할 추가 수요의 발생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현실이 원인이다. 핵심 문제는 하비가 '지속적인 자본축적'(하비 2012, p.26)이라고 부른 것, 즉 생산을 위한 추가적인 투자를 자본주의가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추가적인 생산적 투자의 규모가 필요한 것보다 적어졌을 때, 바로 그 때문에 수요 부족은 발생한다.

하비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적어도 그랬었다) 왜 갑자기 '제한된 소비' 문장을 맥락에서 떼내어 과소소비론적 '임금 억제' 위기 이론을 마르크스가 실제로
[의미했던] 수요 문제에 관한 '냉혹하게 솔직한' 설명과 연관짓는 데 이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냉혹하게 솔직한' 설명이 우리를 이윤율의 저하로 곧장 되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우리가 수요 부족이 거의 항상 투자수요 부족의 문제임을 이해하게 되면 뒤를 이어 투자는 왜 부족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의문은 더 나가서 두 가지 질문으로 연결된다. 투자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만큼 넉넉한 양의 이윤(잉여가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오늘날 새로운 투자의 이윤율이 미래에 적절한 규모의 투자로 이어질 만큼 충분히 높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불충분한 수익성은 미국에서 생산적 고정자산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수요가 장기적으로 둔화해 온 주요 원인이다. 1948년에서 2007년 사이 기업들의 고정자산 축적률은 41%까지 떨어졌다. 축적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유일한 요인은 이윤 중 생산에 재투자된 부분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주 약간(3%) 올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생산적 자본 축적률의 대체적인 감소는 이윤율 하락의 결과다(더 진전된 논의는 클라이먼ㆍ윌리엄스 2014를 보라).

생산적 투자의 미래 수익성이 불충분할 것이라는 예상은 오랫동안 중요한 문제로 간주됐고 여기에 대침체 후 회복이 그토록 약하고 오래 걸린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미약한 회복을 설명하기 위해 폴 크루그먼, 마틴 울프와 미국의 전 재무장관인 로렌스 서머스와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과 경제지 필자들은 미국 경제가 침체 이전, (즉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실질 단기 수익률이 -2% 또는 -3% 수준으로 터무니 없이 낮아서 충분한 수요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시기인 1980년대 중반쯤부터 꽤 오랫동안 '구조적 장기 침체(secular stagnation)'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계산했을 때 대출자들이 빌린 것보다 더 적게 갚는다는 걸 의미한다. 기업이 충분한 투자에 착수하도록 유도할 유일한 방법이 그들에게 되갚지 않아도 될 돈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투자의 예상되는 수익률은 정말로 지독하게 낮을 것이다!(더 진전된 논의는 클라이먼 2014a를 볼 것)

나는 하비가 말하 듯 "그것 모두가 어떤 숨어있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결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틀린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중간매개의 모든 방식이 복합적 요인들과 작동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대침체는 기업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약화시켰다.) 둘째로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은 '숨겨진' 게 아니다. 헤겔이 말했 듯이 본질은 현상으로 나타나고야 마는 것이다
[국역 '철학강요' 160쪽]. 나는 그렇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앤드루 클라이먼은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마르크스 '자본론'의 복권: 모순이라는 신화에 대한 반박 Reclaiming Marx's 'Capital': A Refutation of the Myth of Inconsistency'(Lexington Books 2007)의 저자다. 페이스 대학(뉴욕)의 경제학 명예교수이며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이니셔티브(the Marxist-Humanist Initiative)' 함께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2012. History versus Theory: A Commentary on Marx’s Method in Capital, Historical Materialism 20:2, 3-38.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Kliman, Andrew.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_______. 2014a. Clarifying “Secular Stagnation” and the Great Recession, New Left Project. March 3.
_______. 2014b. Were Top Corporate Executives Really Hogging Workers’ Wages?, Truthdig. Sept. 18.
Kliman, Andrew and Shannon D. Williams. 2014. Why “Financialisation” Hasn’t Depressed US Productive Investment,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Print version forthcoming.
Marx, Karl. 1991a.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Ⅲ.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8)

주석
[1] '그림 1'의 데이터는 미국경제분석국(BEA)의 분석을 이용했다. 국민소득과 생산 계정 표 1.14의 1ㆍ4ㆍ 7ㆍ9ㆍ10ㆍ12행. 고정자산 표 6.3의 2행. 고정자산 표 6.6의 2행. 순영업 잉여와 세후 순익은 이익에서 계산했다. 두 비율의 분모는 감가상각을 고려한 고정자산에 축적된 투자다. 감가상각은 역사적 비용으로 평가된다.
[2] 나는 이를 내 자신의 분석을 논의하는 데만 그칠 것이다. 다른 이들의 주장에 대해선 그 만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 하비의 주장에 따르면 - 마르크스가 명목상의 것보다 더 적게 참조한 - 자본의 '실질적인' 가치구성조차 순수한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의 지표가 아니다. 이점에 있어 그것은 '기술적' 그리고 '유기적' 구성과 다르다. 그러나 내 추정은 미국 기업의 실질적 가치구성이 기술적ㆍ유기적 구성에 매우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7년부터 2007년까지 실질적 가치구성은 약 160%까지 증가했다. 심지어 이 기간의 거의 대부분 동안 다른 자본구성들 사이의 연관은 이 수치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했다. 성장률에서의 차이는 대부분 예외적으로 빠르게 늘어나 실질적 가치구성을 일시적으로 압박했던 임금 때문이다.
[4] '그림 2'는 미국경제분석국(BEA)의 '국제수지와 직접투자대조표'에서 가져왔다. 이윤율의 분자는 '시가 보정 전 직접투자수입'이고 분모는 '역사적 비용에 기초한 미국의 해외직접투자'다. 데이터는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했다.
[5] 이 구절에 대한 더 진전된 분석은 클라이먼 2012 의 253~255쪽(국역본)을 보라. 과소소비 위기론의 약점에 대한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논의는 이 책의 8장을 보면 된다.

이미 좀 지난 일이지만 8월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둘러싼 작은 논쟁이 있었다. 지난해 경향신문에 연재되면서 나를 포함한 몇몇에게 비판을 받았던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그 중심이다. 사실 논쟁이라고 하기도 부끄럽다. 강신준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기존 단어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사용하며 시종일관 말돌리기와 도덕적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이건 예견된 일이다. 내 비판에서도 촛점은 강신준 교수의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지식에 대한 왜곡과 날조였다. 정치적 이념 혹은 학문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강신준 교수는 논쟁에 정당하게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마르크스의 적자로 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부활한 사민당은 점차 우경화 하다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그 핵심인 계급투쟁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영국 노동당이 국유화 강령을 포기한 것보다 30여 년 앞선 것이다.

더 심한 왜곡은, 아니 왜곡이라기보다 뻔뻔한 사기라고 해야 마땅한 데, 마르크스를 개혁의 기수로 내세우고자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 이런 경향은 꽤 오래전부터, 사실상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존 당시부터 있어왔다. 엥겔스가 '반뒤링'을 쓴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뒤링이 마르크스주의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없으니 그 시작은 베른슈타인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강신준 교수에 비해선 매우 솔직하다. 그의 후예들도 대부분 강 교수보다는 정직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혁주의적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왜곡하기보다는 마르크스를 '수정'하는 것을 택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것도 한 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훨씬 정직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정도의 정직함을 지니지 못한 강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변혁'과 '개혁'을 제멋대로 사용하며 마르크스를 자본주의 개혁 정치의 선구자로 그리고자 시도한다.

애초에 학문적 논쟁이 될 수준도 못됐을 뿐더러 저열한 사기 공작에 불과한 강신준 교수의 시도에 일일이 대응하는 게 문제였을 수 있다. 게다가 기초적인 역사적 지식에서 잘못된 부분도 너무나 많아 비판 이전에 교정하는 데만도 너무 많은 수고가 들었다. 초기에 열정적으로 비판을 준비하다가 그만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 지나가 잊혀진 논쟁을 내가 다시 끄집어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잠언 26장 4~5절은 우리에게 여전한 딜레마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지 마라. 너도 그와 비슷해진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지혜로운줄 안다.

아래는 미디어오늘에 연재된 김성구-강신준 교수 논쟁의 링크다.

김성구 1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강신준 1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김성구 2 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강신준 2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김성구 3 쟁점은 수정주의·교조주의가 아니라 ‘자본’ 곡해 여부다
강신준 3 김성구 교수와의 논쟁을 끝내면서
김성구 4 자본론 논쟁의 결말

Posted by 때때로

우리는 앞에서 생산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은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동일한 노동과정의 한 단계로 취급될 수 있음을 살펴봤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보존되어 생산물로 이전한다. 면화는 방적노동에 의해 소멸되어 면사의 형성요소가 된다.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의 원래의 형태는 소멸되지만, 그것은 오직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위해 소멸될 뿐이다"(265쪽).

"노동자가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즉, 그것을 생산물의 가치성분으로 생산물로 이전하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일반(勞動一般)을 첨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첨가되는 노동의 특수한 유용성(有用性), 그것의 특수한 생산적 형태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265쪽)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수단에 가치를 첨가하는 것은 오직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으로서만 그렇게 한다.

"노동의 단순한 양적(量的)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質)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노동의 이중성(二重性)으로부터 생기는 이러한 이중의 효과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명백히 나타난다."(266쪽)

생산조건의 변화로 방적노동이 동일한 시간에 여섯 배의 면화를 면사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자. 동일한 시간의 노동에 생산물로 이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여섯 배가 된다. 그러나 여섯 배의 생산수단에 첨가된 노동량은 이전과 같다. 즉 1파운드의 면화는 이전의 1/6의 노동만이 첨가된다. 생산성이 변하지 않고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있다.

생산적 노동은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와 가치를 소멸시키고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는 한에서만 새로운 노동을 첨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첨가하는 노동은 반드시 특정의 유용한 형태이어야 하며, 생산물들을 새로운 생산물의 생산수단으로 사용해 그들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유용한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273쪽).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중의 노동력[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경기가 좋은 동안에는 자본가는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노동의 이 무상(無償)의 선물을 보지 못하지만, 노동과정의 강제적인 중단, 즉 공황(恐慌)은 자본가로 하여금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273~274쪽)

정리하면 생산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은 생산수단의 사용가치다. 가치는 소비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再現)"된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다른 요소, 활동하는 노동력의 경우는 다르다. 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으로서 생산수단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는동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앞의 7장의 예에서 방적공이 6시간의 노동을 하고 일을 마친다고 하자. 그는 12원의 생산수단에 3원의 가치를 덧붙인다. 이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전된 가치(12원)를 넘는 가치다.

"이 가치는 이 생산과정 내부에서 발생한 유일한 본원적 가치(本源的 價値)이며, 생산물의 가치 중 이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된 유일한 부분이다."(275쪽)

물론 우리의 자본가는 자신이 노동력 구매를 위해 지출한 화폐(3원)를 들먹일 것이다. 지출된 화폐에서 보자면 3원이라는 새로운 가치는 재생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재생산된 것이고, 생산수단의 가치처럼 외관상으로만 재생산된 것【가치가 이전된 것】은 아니다. 한 가치의 다른 가치에 의한 대체는 이 경우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276쪽)

당연히 우리의 자본가는 6시간을 넘겨 노동과정을 지속시킨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再生産)할 뿐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超過價値)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差異)이다"(276쪽).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한다. 그는 생산수단과 노동력 구입에 들어간 자본 중 생산수단에 투입된 것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른다. 이는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시장에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조건 등의 변화로 끊임없이 변동한다).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은 그 가치를 보전하고 이전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력 구입에 들어간 자본을 가변자본이라고 부른다. 노동력은 그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그 이상의 초과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제1절 노동과정 【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으스대며 앞서 걸어가고 노동자는 풀이 죽어 뒤따라간다. 그들은 공장ㆍ농장ㆍ광산ㆍ공사장ㆍ상가ㆍ사무실로 들어간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소비하기 위해서 구매했다. "노동력(勞動力)의 사용이 바로 노동(勞動)이다"(235쪽).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우선 사용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은 사회형태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7장 1절에서 사용가치 생산의 일반적 성질, 즉 노동과정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검토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다. 인간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사용해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자신도 변화시킨다. 자연과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는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노동이 동물과 다른 것은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236쪽)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目的)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organs)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236쪽)

노동과정에서 인간의 의지ㆍ정신은 자연과 자기 자신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타인 혹은 스스로에 의한 규제와 통제를 요구한다. "노동의 내용과 수행방식이" 노동자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236쪽)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노동 일반은 인간 생존의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예찬 받아야 할 어떤 이상적 상태는 아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을 '육체노동'으로만 한정짓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신체의 활용은 '머리', 즉 정신 또는 관념의 사용도 포함된다. '합목적적 의지'는 타인에 의해서 주어지든, 자기 자신에 의해 강제되든 인간 노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노동과정에는 노동 그 자체(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와 노동대상, 노동수단이 요소로 필요하다. 노동대상은 인간의 노동이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다. 노동수단은 노동대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와 노동대상을 연결해주는(중개하는) '전도체(conductor)'다. 노동과정 수행에 필요한 다른 모든 개체적 조건들도 노동수단에 포함된다. 벌목꾼에게 숲의 나무는 노동대상이다. 나무를 베기 위한 톱과 도끼는 노동수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재는 목수에게 노동대상이다. 목수는 망치와 대패 등의 노동수단을 이용해 노동대상인 목재를 책상과 의자로 만든다. 목수가 책상과 의자를 만드는 작업장(땅과 기둥ㆍ천장 등)도 노동수단이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인간을 '도구(道具)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遺物)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238쪽)

선사시대를 석기시대ㆍ청동기시대ㆍ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여기서 '석기ㆍ청동기ㆍ철기'는 그 시기 인간이 사용한 주요 도구(노동수단)다. '자연과학적 연구'로 취급되긴 하지만 인간의 물질적 생산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측면에서 올바르다.

지금까지를 요약하면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變化)를 일으킨다"(239쪽).

노동과정의 결과물인 생산물 입장에서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노동은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 생산물은 또 다른 노동과정에 투입돼 생산수단으로 되기도 한다. 따라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結果)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條件)이기도 하다"(240쪽). 생산의 결과인 사용가치가 다음 과정의 생산에 어떠한 역할을 할지는 가변적이다. 면화는 그 자체로 솜옷과 이불에 사용된다. 때론 실을 뽑아내기 위한 원료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치가 변하는 데 따라 그 사용가치의 규정도 변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 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242쪽). 결함이 없는 생산물에는 과거의 노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소비'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생산적 소비(productive consu mption)'라고 부른다. 개인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는 소비자 자신을 만들어 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 자신과 구별되는 생산물을 만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勞動過程)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밀죽의 맛을 보고 누가 그 밀을 경작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노동과정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 하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다. 즉, 노예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밑에서인지 또는 자본가의 주의깊은 눈초리 밑에서인지, 또는 킨킨나투스【Cincinnatus: 고대 로마의 장군, 은퇴 한 뒤 농사를 지었다.】가 자기의 작은 토지의 경작으로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돌로 야수를 쳐죽이는 미개인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244쪽)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특수하고 역사적인 사회형태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한 자본가의 공장에서도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동일하다(마르크스는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산방식 그 자체가 변화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의 생산방식에서의 혁신에 대한 찬사(?)로 유명하다).

마르크스는 다음 절(가치증식과정)로 넘어가기 전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 노동과정의 특징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所有)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所有物)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245쪽).


제2절 가치증식과정(valorization process)

노동과정의 결과물 그 자체를 위해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교환가치를 지닌 사용가치, 즉 판매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의 총액은 그 자신이 생산을 위해 투하한 화폐의 총액(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는 데 든 총액)보다 커야 한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價値)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려고 한다."(247쪽)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노동과정은 상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價値形成過程)의 통일이어야 한다"(247쪽). 이번 절에서는 바로 이 가치형성과정을 고찰한다.

마르크스는 면사의 생산과정을 예로 들어 가치형성과정을 살핀다. 10파운드의 면사 생산에 10파운드의 면화와 1개의 방추가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면화 10파운드의 가격은 10원, 방추 1개의 가격은 2원이라고 하면 면사 10파운드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은 12원이다. 12원의 금량을 생산하는 데 2노동일(24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생산수단 12원에는 2노동일의 사회적 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것이다.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가 된다. "여러가지 특수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는] 노동과정들은 동일한 하나의 노동과정의 순차적인 각각의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249쪽).

이를 위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우선 면화와 방추가 실제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 둘째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이후 면사의 생산에도) 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선 안 된다. 금으로 만든 방추를 사용한다고 해서 면사가 더 많은 가치를 얻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살피는 것은 "방적공의 노동이 면화에 첨가하는 가치부분"이다.

노동과정으로서 면사의 생산을 살필 경우 방적공의 노동은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특수한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다. 그러나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한 그 노동은 대포를 만드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면화재배ㆍ방추제조ㆍ방적이 면사의 가치라는 하나의 총가치(總價値)의 단순히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부분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250쪽), 즉 동일한 노동과정의 각각의 단계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자의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량의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변화시킨다. 즉 면화에 일정량의 노동이 첨가된다. 여기서도 다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일정한 [경험적으로 확정된] 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따름이다."(251쪽)

이제 면사 10파운드에 들어있는 총가치를 검토하자. 우선 면사 10파운드 생산에는 면화 10파운드와 방추 1개가 필요하다. 이는 12원이고 모두 2노동일이 대상화돼 있다. 방적 노동자는 1시간에 1과2/3파운드의 면화를 1과2/3파운드의 면사로 변화시킨다고 가정하자. 10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6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방적 노동자의 하루 노동력 가치는 3원이다. 따라서 면사 10파운드에는 모두 2와1/2노동일의 노동이 응고되어 있고, 그 가격은 15원이다. 면사 10파운드를 생산하는 데 투하한 가치 15원은 여전히 15원이다. 이래서는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생산에 나설 이유가 없다.

"투하된 가치는 증식(增殖)되지 않았고,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資本)으로 전환되지 않았다."(252~253쪽)



그러나 노동력 재생산에 6시간(3원, 1/2노동일)이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의 자본가가 노동자를 6시간만 일을 시킬 이유는 없다.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즉,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즉, 하루의 노동]은 그에게 속한다. 노동력은 하루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하루동안 유지하는 데는 1/2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257쪽)

이제 자본가는 노동력을 12시간동안 사용하려 한다. 작업장에 들어간 노동자는 12시간의 노동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발견한다. 노동자는 20파운드의 면화(20원, 3과1/3노동일), 2개의 방추(4원, 2/3노동일)을 발견한다. 24원의 생산수단과 3원의 노동력이 생산에 투입된다. 3원의 노동력은 추가된 6시간동안 3원의 가치(6시간, 1/2노동일)를 더한다. 이제 생산물의 총가치는 30원이 된다. "그리하여 27원은 30원으로 되었으며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낳았다.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258쪽).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칙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방추·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원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원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원이나 더 많이 유통으로부터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 과정은 유통영역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258쪽)

가치증식과정은 가치창조과정이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로 보상되는 점을 넘어 계속되는 과정이다.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나 가치형성과정은 오직 양적 측면에서만 다뤄진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繼續時間)뿐이다"(259쪽).

가치형성과정의 고찰에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259쪽). 즉 사회의 주어진 생산조건 하에서 평균적인 조건하에서 노동력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뮬 자동 방적기가 지배적인 생산수단인 사회에서 물레로 방적을 해서는 안 된다. 물레를 이용해 면사를 생산할 때 더 들어가는 초과시간은 가치를 형성하지 못한다.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 것인가 아닌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다"(260쪽). 하지만 현실에서 자본가들은 화폐를 아끼기 위해 정상보다 뒤쳐진 생산수단을 투입하면서도 노동력에게는 정상 이상의 활동을 요구하기도 한다(이는 한편 이윤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생산수단을 아껴야 하는 내적 동인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한편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260쪽). 자본가는 시장에서 평균적인 능률 이상의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노력한다(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고급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사회적 평균보다 낮은 가치를 지닌 노동력-이주노동자-을 구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생산과정에서 능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잠시라도 노동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일정한 기간 구매했으므로,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260쪽). 낭비된 원료와 생산수단도 생산물의 가치에 들어가지 않기에 자본가는 원료와 노동수단의 절약을 위해 노력한다.

마르크스는 1장에서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다(261쪽). 이 차이는 생산과정의 두 측면으로 나타난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261쪽)

가치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우선 화폐 그 자체로는 가치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구매수단과 지불수단으로서 화폐는 상품의 가격을 실현할 뿐이다. 화폐를 유통에서 빼내어 쌓아놓는 것(퇴장)이 가치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도 자명하다.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을 다시 살펴보자. 구매한 상품을 다시 판매하는 과정(C-M)에서도 가치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상품을 현물형태로부터 화폐형태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치변화는 구매(M-C)한 상품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 상품의 가치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구매 또한 오직 그 가치대로 지불되는 등가물끼리의 교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消費)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그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노동의 대상화, 따라서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勞動力: labour-power)이다."(218~219쪽)

화폐소유자가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것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노예와 농노는 노예주와 봉건영주의 의지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 또한 노동력 소유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오직 한정된 시간 동안만 판매해야 한다. 자신의 전 생애를 모두 판매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한 노예 혹은 농노와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노예적 강제 노동을 오직 일탈로서만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개별 자본가의 이해와 달리 보통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는 노예적 강제 노동을 강력히 단속하려 한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두 번째 조건은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 자신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는 방법 이외에 자신의 생활수단과 상품을 생산할 수단(생산수단)을 지니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 유지 혹은 시장에 내놓을 상품의 생산을 위한 수단을 지닌 노동자는 그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free)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自由人: free individual)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物件)을 가지고 있지 않다(free of)는 의미다."(221쪽)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소유자를 만나게 되는 사연은 뒤의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에서 다룰 것이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221쪽).

분명히 어느 정도 발전한 사회적 분업을 기초로 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勞動者)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222쪽). 따라서 이 조건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새로운 세계사를 형성한다.

우리의 관심을 다시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돌려보자. 이 상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지니고 그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223쪽). 노동력은 노동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상품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은 결국 노동자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로 계산된다.

노동자가 정상적인 건강상태를 유지해 다음날 다시 노동과정에 투입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은 육체의 물리적인 한계에 의해서만 규정되진 않는다.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이 어떤 조건 하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및 도덕적 【정신적】 요소(historical and moral element)가 포함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의 일정한 나라에는 노동자들의 필요생활수단의 평균적 범위는 주어져 있다."(224쪽)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량에는 또한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재생산하기 위한 생활수단들도 포함된다. 즉 출산과 육아를 위한 생활수단이 포함됨으로써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노동력 판매자를 세대를 넘어 영원히 만날 수 있게 된다. 한편 작업의 숙련을 위한 교육 비용도 노동력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에 포함된다.

실제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최저생계비(빈곤선)를 결정하는 데는 육체적 지속을 위한 상품들의 가격과 함께 출산과 육아ㆍ교육, 문명의 발전 정도가 반영된다. 한국의 경우 과거에 포함돼 있지 않던 통신비가 최근에는 필수적 항목으로 포함된다. 나라에 따라서는 적당한 문화생활(영화, 공연, 스포츠)을 위한 비용을 포함하기도 한다.

역사적 도덕적 조건과 함께 상품가치 변동은 노동력의 가치를 변화시킨다. 임금수준을 결정하기 위한 갈등에서 물가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미국 노동자의 임금 1970년대 중반 이후 오르지 않았음에도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중국산의 싸구려 상품 덕이다. 대형 마트의 저가 상품은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노동력 상품은 구매와 동시에 사용가치가 실현되지 않는다. 노동력의 사용가치, 즉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걸쳐서 실현된다. 보통은 노동계약 후 일정한 기간 노동력을 발휘한 다음에 후불로 임금을 지불받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의 구매와 판매에 대해 살펴봤다. 노동력 사용가치의 실현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노동력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유통의 밖에서 이뤄진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바로 그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및 노동력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분야를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230쪽)

우리가 이 비밀을 파헤치기 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상품교환과 유통분야의 모습은 천부인권이 지켜지는 참다운 낙원처럼 비춰진다. 노동력의 구매자도 판매자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들은 동등한 상품소유자로서 평등하게 등가물끼리 교환한다. 이 상품소유자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처분권을 지닌다. 따라서 각자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지닌 이 모든 행동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설파하듯이 신의 섭리처럼 서로간의 이익,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이 된다. 오직 상품의 유통과 교환의 영역에만 관심을 지닌 주류 경제학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정된 조화를 이뤄낼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한 (따라서 위기와 파괴에 관심이 없거나 그것을 정상에서의 일탈로만 치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음 장부터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생산영역에 따라 들어감으로써 가치와 잉여가치 생산의 비밀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화폐소유자와 노동자가 앞서 가고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231쪽)

강신준 교수는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오늘 '자본'을 읽다' 9월 22일자 연재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강의를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환가치와 가치를 구별하는 데 애를 먹는 것을 자주 봅니다."(강신준 9월 22일)

지금까지 강 교수가 연재한 글 중 바로 위 문장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애를 먹는' 사람에는 강 교수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교환가치와 가치만이 아니죠.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 전체를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를 갖기로 하고 오늘은 자본론 1장에 집중해 강 교수의 연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자본론의 모든 인용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판으로 대체했습니다. 강신준 교수로부터의 인용은 모두 연보라색 굵은 글자로 표시했습니다.


1. 상품의 이중성 … 사용가치ㆍ가치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1권 77쪽)

마르크스는 상품의 이중적 측면을 위와 같은 말로 정의합니다. 1장 1절의 제목도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입니다.

설명은 사용가치부터 시작합니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합니다. 여기서 유용성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연적 필연성에 한정하면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으로서 상품은 최소한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용가치로서 상품은 그것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질적ㆍ양적으로 구별됩니다.

상품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됩니다. 일정한 비율로 말이죠. 여기서 상품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 또는 관계가 교환가치입니다. 상품이 교환가치라는 것은 서로 다른 상품들 속에 공통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로 다른 상품이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품의 자연적 속성은 공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상품의 유용성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용가치와 연관된 것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교환에 있어서 사용가치는 서로 다른 것이기만 하다면 문제가 안됩니다. 결국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거기에 남는 유일한 것은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 뿐입니다.

"이들 노동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생산물들은 유령 같은 형상[즉, 동질적인 인간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형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노동생산물들은 인간노동력이 그 지출형태와는 관계없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노동이 그들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로서 가치, 상품가치이다."(1권 47쪽)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품은 우선 유용한 물건으로서 사용가치입니다. 이 상품은 서로 일정한 비율로 교환됩니다. 즉 교환가치입니다. 이 교환가치는 상품이 공통된 무엇인가를 지니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 못합니다. 그 공통된 것은 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이고, 이것이 지출되어 응고된 것이 바로 가치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 강의'에서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이를 도식화 합니다.


하비 53쪽

강신준 교수는 이와 달리 교환가치를 사용가치의 '발전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용가치가 첫 번째 계단이고 교환가치가 두 번째 계단인 셈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의 설명과 완전히 다른 것이죠. 상품이 교환가치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용가치여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유용하지 않은 물건(또는 서비스)을 교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용가치가 발전해 교환가치가 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교환을 위해서도 상품의 사용가치적 측면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가 '두 요소'라는 제목으로 상품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한 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죠. 이 설명이 불분명하다면 아래의 데이비드 하비의 설명을 읽어보시죠. 재밌게도 이 책은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것입니다.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여기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면 사용가치가……? 그러나 맑스의 분석은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그것도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바꿔 말해 우리는 다른 개념을 말하지 않고는 이들 개념 가운데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이 개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 있고 어떤 하나의 전체(totality) 속에 내재하는 관계들인 것이다."(하비, 55쪽; 오역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하비는 강 교수와 같은 설명을 '인과론'적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마르크스가 사용가치ㆍ가치ㆍ교환가치를 설명하는 자본론 1권 1장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인과론'적인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변증법에 대해선 차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래의 그림을 앞의 하비의 도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강신준 9월 15일

따라서 강 교수의 아래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교환가치를 비교해주는 양적 단위는 바로 가치이고 그것은 인간의 노동입니다"(강신준9월 15일)

가치가 강 교수의 설명처럼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그것의 질적 측면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강 교수의 생각은 사실 주류 경제학에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죠. 애시당초 그것이 '양적 단위'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환되는 비율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강 교수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교환가치'를 매우 강조하죠. 주류 경제학에서 이러한 상품들 사이의 교환비율(교환가치)의 강조는 그들의 선배,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세웠던 노동가치론을 버리고 한계효용 혁명으로 나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강 교수가 어딘가 인터뷰에서 칭찬했던 책인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폴 스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양적 가치이론은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상대적인 비율을 규율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과만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주류의 이론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주류의 이론에서는 그것이 교환가치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에게 교환가치란 가치를 배후에 숨기고 있는 '현상적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단지 교환가치의 결정에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양적 가치의 문제란 무엇인가? 위에서 서술한 분석이 한 가지 답변을 해준다. 상품이 가치라는 사실은 상품은 물질화된 추상적 노동이라는 의미이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품은 사회의 총 부창출활동 가운데 일부를 흡수한다는 의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노동은 시간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교환가치와 구분되는 양적 범주로서의 가치가 어떤 의미인지가 분명해진다."(스위지 58쪽)


2. 노동의 이중성 …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

상품의 이중성은 노동의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사용가치로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유용노동이 필요합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목재를 만들고, 목재를 재단하고, 재단된 목재를 짜맞춰야 하는 것 같은 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이 꼭 육체노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가치로서 상품을 만드는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 과정이 사장된 말 그대로의 인간노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루카치의 "자본주의의 본질을 반영하는 추상"이라는 주장을 인용한 폴 스위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의 그 어떤 사회형태에서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이동성보다 훨씬 더 높은 이동성을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며 마르크스의 추상노동 개념의 현실성을 설명합니다
(스위지 55쪽).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방향이 변함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부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의 형태로 또는 직포의 형태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노동형태의 이와 같은 변화가 마찰 없이 일어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1권 55쪽)

기업이 창의적 노동에 대한 무수한 찬양을 늘어놓으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노동과정의 표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이러한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죠. 추상적 인간노동은 구체적 유용노동과 구분되는 현실성을 지니며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노동의 이중성을 구성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이 중 어느 하나의 측면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용가치를 만든 노동은 시장의 교환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으로 바뀝니다. … 배추라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에는 항상 농민의 힘든 노동이 들어갑니다. … 내가 생산한 배추의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다른 농민들이 생산한 배추와 비교되는 것은 물론 배추를 구매할 소비자의 사정도 고려되어야만 비로소 결정됩니다. 요컨대 나 혼자만의 사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우리가 마르크스를 잊은 채 읽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강 교수가 좋아하는 '개미와 베짱이' 비유로 들어가면서 완전한 파탄을 드러냅니다.

"개미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일 뿐,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은 아닌 것이지요."(강신준 9월 22일)

굳이 이중성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동시에 갖는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개미(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구체적 유용노동일 뿐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추상적 인간노동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노동자가 교환가치, 정확하게는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베짱이)는 어떻게 잉여가치를 획득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여기에선 강 교수의 연재가 기대되기도 하네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아래의 마르크스 설명과 비교하면 강 교수의 설명이 얼마나 마르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권 58쪽)


3.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강신준 교수는 이 부분에서 자본론 1권 1장 3절 부분을 거의 통째로 건너뜁니다. 물론 여전한 헛소리로 분량을 채우고 있긴 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가치형태를 설명하는 것은 화폐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이어지는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기원'절과 함께 일반적 가치형태, 즉 화폐형태가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은폐하는 지 그 기원을 폭로해줍니다. 가치의 현상형태인 교환가치가 취하는 여러 형태를 사려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면의 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 절의 핵심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바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규제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화폐형태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또한 화폐형태의 등장은 가치가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킬 중심원리로서 응결되기 시작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항상 기억해두어야 할 점이기도 하지만 가치는 물적 존재가 아니면서도 객관적 대상이다."(하비 76쪽)

강 교수는 여기서 뜬금없이 화폐가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발전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강신준 9월 29일)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건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르크스나 그의 해설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인 것이죠. 하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 화폐형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고 대신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런식의 왜곡은 프루동과 크메르 루즈를 언급하며 화폐형태를 "역사의 필연적인 자연법칙"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프루동과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면 강신준 교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우선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프루동은 처음에 정의ㆍ영원한 정의라는 자기의 이상을 상품생산에 대응하는 법적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품생산이 정의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형태라는 것을 증명하여 모든 선량한 소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현실의 상품생산이나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법을 이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고 한다."(1권 109쪽 각주2)

프루동에 대한 비판만 놓고 보면 강 교수의 주장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정의로부터 비롯한 이상을 따르는 운동은 참혹한 결말을 맞곤 했죠. 하지만 오웬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약간 다르게 들립니다. "상품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며 노동화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힌 마르크스는 오웬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이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오웬의 '노동화폐'가 '화폐'가 아닌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 화폐가 아닌 것과 같다는 점"이라며 그 이유로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고 밝힙니다(1권 121쪽 각주1).

마르크스는 상품생산을 전제로 한, 즉 자본주의의 핵심적 원리를 그대로 둔채 그 현상형태인 화폐형태만 고치자는 주장에는 가차없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근본적인 변혁을 전제로 한 주장에는 호의적인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보면 강 교수의 입장이 마르크스와 같다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강 교수는 프루동에서 더 나가 화폐형태 자체가 "필연적인 자연법칙"이라며 자본주의의 성숙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고 있죠. 이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 몽상일 뿐이며 이러한 몽상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법칙을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주장으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4. 결론을 대신하며 … 중요하지만 빼먹은 것들

아직 연재가 계속되고 있으니 강신준 교수에 대한 비판의 결론을 여기서 내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본론 1권 1장을 마치고 7회차까지 연재를 보면 강 교수의 자본론 해설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강 교수의 오해는 계속해서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른 분량 중 가장 거슬렸던 것은 15일자 연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얘기처럼 내 이익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현실 자본가들의 노력은 경쟁을 빚고 경쟁의 결과가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거든요.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치가 빚어내는 변증법의 요술이지요."(강신준 9월 15일)

가치량을 결정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1권 49쪽)이 이런식으로 왜곡되는 걸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간단히만 지적하자면 우선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경쟁의 강제법칙으로부터 연역해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데, 이는 마르크스가 1권에서 '경쟁'을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 즉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강 교수의 '사회적 평균'은 마치 보다 평등한 사회의 형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전체에 걸쳐서 자본가의 잉여가치 획득과 더 가난해지는 노동자의 현실이 자본주의적 법칙의 현실적 결과임을 설명하는 것과 반대되는 주장이죠. 또 강 교수는 '사회적 평균'을 형성하는 '경쟁' 운운하는 데, 마르크스는 경쟁의 강제법칙을 자본가가 개인이 아닌 자본의 인격화한 범주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핵심 원리로 설명합니다. 즉 '자본가들의 노력'이 '경쟁을 빚'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법칙이 자본가의 자본으로서의 노력을 강제하는 것이고 이는 노동자들에게 더 비참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강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꿨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결과조차도 자신의 희망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9월 22일자 연재에서 "모든 사용가치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집니다"는 단언도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동은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사용가치[즉,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1권 54쪽)

이 설명은 이후 자연과의 신진대사라는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죠. 강 교수의 단언은 마르크스가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후예들이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이론과 실천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번 주에도 어김 없이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연재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힘 닿는대로 비판적 검토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는 강 교수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만들어나가기 위함입니다. 격동을 앞둔 지금 마르크스의 유산을 제대로 살피는 일은 더 중요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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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 동아대 교수가 경향신문에 '자본(자본론)' 해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본'을 읽다'는 제목으로 8월 25일 시작했습니다. 연재 기사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실립니다. 9월 1일에는 두 번째 연재로 '혁명에 사로잡힌 물음 - '자본'의 출생과 변증법'이란 기사가 23면에 실렸습니다.

●[경향신문] 9월 1일 23면|'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링크)

최근 마르크스의 생애, 그의 사상, 자본론(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출판도 늘고 있습니다. 신문에까지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실린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신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지만 책보다는 읽는 사람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까지 읽고 나니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더 커집니다. 마르크스 스스로 말년에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고 한 만큼 마르크스주의는 논란에서 자유로운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강신준 교수의 두 번째 연재기사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중을 위한 신문에서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학문적 방법을 사상한 게 문제가 아닌 것이죠. 문제는 일반적인 사실의 왜곡에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명색이 '자본 강독'이라고 시작한 연재라면 자신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글)을 구분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가 모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경향신문 연재기사를 보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할 분들에겐 상당히 큰 오해를 심어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전공자도 아니지만 간단히 제가 아는 한도에서 9월 1일 두 번째 연재기사에서 문제가 될 듯한 부분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글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주저 말고 지적해주세요. 아래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강신준 교수의 글입니다.


1_ "오늘날 사회변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혁명이란 용어는 원래 프랑스혁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근대 혁명의 효시가 프랑스혁명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완전히 틀린 설명입니다. 혁명(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혁명이 급진적, 혹은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이 단어가 '사회구조의 근본적이고 돌연한 변화'를 뜻하는 정치적 의미로 쓰인 것은 1688년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윌리엄 3세가 즉위한 사건을 '명예혁명(The Glorius Revolution)'으로 부르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대해선 위키피디아 'revolution' 항목을 참조하시면 됩니다(링크).


2_ "1848년 혁명도 바로 이 [1789년] 프랑스혁명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의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혁명의 다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인민의 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호명하고 싶어하는 혁명가, 변혁가의 꿈은 과거와 현재 모두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의 점령자들은 자신을 99%라고 표현하며 결코 소수가 아닌 다수임을 강조했죠. 원래 '다수파'라는 뜻을 지닌 볼셰비키, 하지만 레닌의 볼셰비키는 그 분열 초기에는 멘셰비키보다 소수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시이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도 어찌보면 현재의 '우리는 99%다'라는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이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후에 스스로 "모든 것이다"고 답하죠. 그러므로 "제3신분은 국민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고 "제3신분이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국민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사', 알베르 소불, 두레, 29쪽).

마르크스주의자 또한 과거의 혁명들을 '노동자 혁명'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강할 것입니다. 열망은 현실과 다르죠.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를 따르는 혁명가들은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그는 나폴레옹의 조카가 일으킨 쿠데타를 다루는 책(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그들 앞에 전개되어 있는 원대한 전망에 대한 상상에 젖어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 몰두해 있었던 반면, 사회의 구세력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회합을 개최했으며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쁘띠부르주아에게서 예상치 않던 지지를 발견했다."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 21쪽.

마르크스는 분명하게도 1848년 혁명 당시 농민이 다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당시 프랑스에서 소수였고 그나마 파리에만 의미 있는 수를 형성하고 있었죠. 그렇기에 파리의 노동자들은 6월 봉기 때 "모든 계급과 정파"의 적으로 공격 대상이 됩니다. 결국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위대한 세계사적 투쟁이라는 영예를 안고 쓰러"집니다(앞의 책 23쪽). 1848년 혁명의 다수가 노동자였다는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설명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른 저자의 설명도 강신준 교수의 주장과는 다릅니다. 노명식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과 비교하며 이렇게 씁니다.

"[1830년] 7월혁명의 결정적 승자는 부르주아지였으나 2월혁명의 승자는 노동자계급과 중소 부르주아지의 연합이었다.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848년에는 부르주아지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책과함께, 343쪽.

분명히 1789년보다, 1830년보다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졌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함은 프랑스 전역의 혁명에서 파리가 지닌 역할과 비견할 만한 것이죠(서로 연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1848년 혁명 당시 노동자가 '다수'였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혁명 패배의 교훈과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3_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은 극히 제한된 형태로만 있었고 경제의 대부분은 자급자족하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것만을 소비했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경제구조에서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생산을 열심히 한 사람은 소비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고 설명할 수는 없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이전 생산양식의 귀족과 노예 소유주를 위한 생산, 즉 착취를 (자본주의적 착취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강신준 교수가 깜빡하고 잊은 듯합니다.


4_ "[1848년 혁명의 패배를 지켜본 다음] 1849년 마르크스는 독일 정부의 압력에 의해 다시 유럽대륙에서 추방당해 마지막 망명지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영국으로 가는 뱃전에서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는 그 엄청난 혁명의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혁명이 왜 실패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곧바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틀어박혀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67년 드디어 '자본[자본론]' 제1권을 출판했습니다."

이 문구만 읽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계기,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마치 1848년 혁명 때문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그 기초적 모습을 드러낸 '공산당 선언'이 1848년 2월 혁명 전야에 나왔다는 사실과 배치됩니다.

이뿐 아니죠. 마르크스는 1843년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미 경제적 탐구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악명 자자한 문장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8쪽.

마르크스가 현실의 경제적 삶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비슷한 시기 '라인신문'에서 일하면서입니다. 마르크스는 훗날 "'라이니셰 차이퉁[라인신문]' 편집장으로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야 할 때 나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미지의 영역[물질적 이해관계: 경제]에 처음 도전해본 것은 개인 소유 삼림에서 나무를 훔치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법을 길게 비판하게 되었을 때였다. … [이 문제를 다루면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계급, 개인 소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푸른숲, 69쪽.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쫓겨난 마르크스는 당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울한 학문, 경제학에 대한 탐구에 몰두합니다. 당시의 공부 결과는 현재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1844년 쓰여서 '1844년 수고', 또는 파리에서 작성됐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립니다.


5_ "한나라당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가 '잃어버린 10년'인데요. 이 말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10년 동안 이루어진 정치적 성과를 모두 없애고 10년 전의 상태로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사물의 운동법칙[변증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은 성숙해지면서 2가 되는데 이 2는 기존의 1에 1을 더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2=1+1). 만일 기존의 1을 없애버리면 새롭게 추가하는 1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보다 나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고 도로아미타불의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강신준 교수는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1+1=2'라는 공식을 내세웁니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설명이긴 합니다. 보통은 정-반-합의 과정을 설명하죠. 강신준 교수의 설명만 보면 사물의 운동은 발전만 있고 퇴보는 없는 듯합니다. 게다가 기존의 사물은 새로운 사물 내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새롭기는 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설명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사물의 변증법적 운동이 발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을 인용하며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하지만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합니다
(최형익 옮김, 비르투, 10쪽). 마르크스의 설명이 강신준 교수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고전정치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바로 그 한계 때문에 그들의 후예들이 과학적 입장에서 더 후퇴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사물의 운동법칙은 1+1=2처럼 단순히 계단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대립과 통일이라는 기존 설명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명이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왔지만,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그보다 더 큰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6_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강신준 교수의 '변증법' 해설의 더 큰 문제는 마르크스가 마치 자본주의를 '존속'시킨 채 그것의 개혁을 위한 방법을 발견한 사람처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재기사가 '강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최소한 마르크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구분할 수 있게끔 써줬어야 합니다.

19세기 후반 보통선거의 도입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민주적인 길의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합니다. 당시 아직 봉건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이던 러시아를 살피면서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 공산주의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존속'과 '개혁'을 주장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듭니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태도를 유지했죠.

"[1875년 라쌀레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회주의노동당(1890년 할레 대회에서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의 강령에 대해] 마르크스는 즉각 베를린에 있는 리프크네히트에게 격렬한 비난이 담긴 서한을 급송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엥겔스에게도 리프크네히트에게 그 정도로 강력한 서한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렀다. … 마르크스가 보기에 고타 강령에는 너무나 많은 타협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었다. 고타 강령은 사회주의와 그 최대의 적인 국가가 영원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타 강령은 특히 그러했다. 또한 고타 강령의 밑바탕에는 프루동 주의자들과 생시몽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여러 모순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든가 상속법의 폐지 같은 사소한 목적들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사회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안규남 옮김, 미다스북스, 383쪽.

게다가 강신준 교수 스스로 인용했듯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든 영원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운동 상태에 있으며 유동적이고, 따라서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파악됩니다. 강신준 교수가 인용한 부분을 좀 더 길게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ㆍ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ㆍ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19쪽.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개인의 바람에 따라 왜곡해서 살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한 때 속하기도 했던 청년헤겔파에 대한 비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들은 헤겔과 달리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바랐지만 사물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의 문제로만 파악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에서 청년헤겔파를 '무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에 비유해 조롱하기도 했죠(박재희 옮김, 청년사, 34쪽).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며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김수행 옮김, 19쪽).

아나키즘과 마르크스 이전에 유행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생시몽과 푸리에 등) 비판이라는 맥락도 살펴야 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적 상태에 대한 탐구가 아닌 이상적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변혁의 과학을 대치하려 했습니다(물론 그들의 '이상'은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현재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혁명적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변화할 지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연구로부터 끄집어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도 이러한 사정을 모를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랑스 혁명을 얘기하며 실컷 '혁명' 운운하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강신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잘못된 제목으로 나타납니다.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이라니요. 강신준 교수는 그나마 '개혁'이란 단어로 기사의 후반부에 대치시켰지만 경향신문의 편집기자는 그 차이를 이해 못하고 '혁명'이란 단어를 제목에 써버립니다. 하긴 이윤에 목매는 자본가들은 생산방식에 혁명적 방법을 도입해가며 자본주의 사회를 발전시켜왔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다만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꿈꿨던 마르크스의 생각은 아니죠. 제목 아래 크게 자리잡은 마르크스의 얼굴이 안쓰러울 뿐입니다.


p.s. 강신준 교수는 '개혁'이란 단어를 쓰기 전 '자본론'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인용하며 '혁명'이 마치 길고 긴 개혁의 과정인 것처럼 설명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죠.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21쪽.

그런데 이 문구는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자본론'을 시리즈로 분책해서 내자는 제안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책(자본론)이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읽어야만 한다는 충고죠. 강신준 교수의 해석은 과도한 것입니다. 맥락에서 떼어내 문구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문과 실천 모두에서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때때로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231쪽)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옛 물건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신문에 가끔 실리곤 합니다(링크). 기사의 출처와 물건의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죠. 의료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일부(간ㆍ신장ㆍ혈액ㆍ안구 등)를 타인에게 기증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윤리의식과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거래'도 일부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는 18세기 이전의 잔혹한 풍습을 연상시키는 비유("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를 사용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예와 다릅니다. 노예는 그의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 능력 일부를 자본가에게 판매할 뿐입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만난 노동력 판매자(노동자)와 노동력 구매자(자본가)는 법적으로 평등한 관계죠. 물론 현실에서는 근로계약서조차 제대로 안 만드는 경우가 많고, 만들어진 근로계약을 안 지키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긴 합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 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같은 책 219쪽)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사업에 대한 기대에 가득차 거만하게 앞서 걸어가는 자본가의 모습과 주춤대며 마지못해 끌려가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물론 이 자체는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법률적으로 공평하게 계약한 관계에서 구매한 노동력 상품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노동력의 소비는 곧 자본이 지휘하는 노동과정입니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된다."(같은 책 307쪽)

따라서 노동을 지휘하는 자본은 더 많은 일을 시키고자 하는 (그래서 더 많은 잉여노동을 짜내고자 하는) 강제적 힘으로 발전합니다. 효율적 업무를 위한 합리적 동선ㆍ과정을 만들어내는 것,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연장노동은 기본입니다. 자본가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잉여노동을 뽑아내기 위해 출근 시간 전과 후에 조회ㆍ회의ㆍ교육을 강제합니다. 주말에도 다종 다양한 회사 행사에 동원하기 일쑤죠.

문제는 노동자가 판매한 노동력 상품이 노동자 그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자본가는 노동력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강제를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주장합니다. 법률적으로 공평한 근로계약을 맺고 그 계약이 잘 지켜진다고 해도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임금 노예'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죠.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같은 책 416~417쪽)

결국 노동자는 장화를 만들기 위해 무두질 당하는 가죽처럼 생산과정에서 자본가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그가 판매한 상품이 동물의 가죽처럼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구사회에서 인권의 발명은 더이상 사람 가죽으로 만든 책과 같은 잔혹한 물건과 풍습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예 노동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노동력은 노동자 자신과 떨어질 수 없기에 공개적인 노예제는 은폐된 노예제로 변신하고, 사람의 가죽은 사람과 함께 무두질 당하게 됩니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