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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9일,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의 겨울궁전 앞 학살과 이후 전국을 뒤흔든 1년여간의 사건을 빼놓고 1917년의 혁명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당장 아래 소개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지구연합위원회의 1월 22일 시위 호소문만 해도 그렇다. 1917년 1월 러시아 노동자들은 3년째 계속되고 있는 세계대전의 핏빛 행진에 지쳐있었고 하루하루 더해가는 슬픔에 분노의 도화선은 짧아져만 가고 있었다. 1917년의 노동계급 활동가들은 현재의 비극을 1905년의 비극과 겹쳐 회상한다. 전쟁에서의 잇따른 패배와 노동계급의 희생, 이와 대비되는 지배계급의 호의호식과 귀족ㆍ관료집단의 무능은 1905년에도 마찬가지였다. 1904년 2월 시작된 러일전쟁은 러시아 지배계급이 허우대만 멀쩡한 종이 호랑이임을 세계의 여러 경쟁국과 국경 안의 신민들에게 알려줬다.

●1905년 1월, 노동계급 반란을 조직한 경찰의 첩자

12년 전의 반란이 전쟁의 비극 만을 기억나게 한 것은 아니었다. 1905년 혁명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힘과 정치적 독립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당시까지,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주의의 '정통 교의'는 이랬다.

"사회주의 혁명은 강력한 프롤레타리아만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서만 강력해질 수 있다. 러시아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의 승리에 의해서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
-'볼셰비키 혁명사', E. H. 카, 이지원 옮김, 도서출판 禾多, 67쪽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부진한 발전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모두에게 천형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전의 운명은 러시아도 비켜갈 수 없었다. 그에 따른 노동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성장도 그랬다. 1903년 오데사에서는 러시아 최초의 노동계급 총파업이 벌어진다. 이 파업은 러시아 남부를 휩쓸고 코카서스에까지 확산된다. 제정 러시아의 관료, 특히 저항운동을 최일선에서 마주하던 경찰은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1886년부터 비밀경찰(오크라나)의 첩자로 활동하던 주바토프는 이 운동을 관리할 필요성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그는 1901년 '모스크바 기계공업 노동자 상조회'를 건설해 노동운동 내에서 급진파를 배제하고 합법적인 틀 내에서 운동을 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의 성장이 경찰의 계획과도 일치할 수는 없었다.

레닌은 "장기적으로 노동계급 운동의 합법화는 우리들의 이익이 될 뿐 주바토프 무리의 이익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대부분의 사회민주당원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2차 당대회의 마짐가 회의에서 그들은 가능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비록 '경찰 노동조합'에 따른 노동조합에라도 가입해서 노동자들을 깨우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던 것이다.
-'러시아혁명사', 김학준, 389쪽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1903년 총파업은 주바토프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주바토프 본인과 그의 하수인들은 정부에서 질책을 받고 고향으로 쫓겨나는 처지가 된다. 주바토프는 1903년 8월 해임된다.

그러나 결정적 그림은 1905년 1월 9일 그려진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가퐁 신부였다. 주바토프에게 스스로 찾아가 첩자로서 주바토프 운동을 펼치겠다고 제안한 그는 1904년 '러시아 공장 노동자들의 조합'을 세운다. 이 모임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꾀나 인기를 끌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조합원 1만1000명을 모았고 후보 조합원도 8000명이나 됐다. 그러나 이 단체도 주바토프주의 운동의 운명을 벗어날 순 없었다. 푸틸로프 기계공장 노동자들의 불만을 들은 그는 몇 가지 온건한 요구안을 기업주에게 제출하게 한다. 기업주는 이를 주도한 노동자 네 명을 해고하는 것으로 답했다. 곧 상황은 가퐁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1만2000명 규모의 푸틸로프 기계공장 노동자들은 해고된 네 명의 동료를 지켜내기 위해 1월 3일부터 파업에 들어간다. 이 파업은 1월 7일 페테르스부르크 전역으로 확산돼 8만2000명이 참여한다. 다음날인 1월 8일에는 10만~15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노동자들은 가퐁에게 그들을 차르의 겨울궁전 앞으로 이끌어줄 것을 요구한다. '존경하는 아버지 차르'에게 데려가 그들의 '온건한' 요구를 청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1월 9일 오전, 20만명이 겨울궁전을 향해 행진을 시작한다. 가퐁은 급진파의 개입을 막기 위해 대열을 수색해 강경파를 솎아내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의 개입을 막을 순 없었다. 이날 차르에게 요구할 청원은 사회주의자(주로 멘셰비키)의 개입으로 △8시간 노동 △노동자 집회의 자유 △농민에게 토지 분배 △언론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러일전쟁의 종식 △제헌의회 소집이 포함돼 있었다. 사회주의자의 개입보다 사건을 더 키운 건 차르의 대응이었다. 노동자들의 '겸손한 청원'을 받아달라는 가퐁 신부의 전날 편지에도 차르는 노동자 행진을 피해 황실 휴양지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겨울궁전을 지키던 제정 러시아의 경찰기구는 이 행진을 총탄으로 진압해 행진은 결국 혁명으로 진화한다.

●혁명의 교훈과 1917년의 사회주의자

1905년 혁명은 헌법과 두마(제정 러시아의 의회)를 만들어냈지만 이 성과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E. H. 카는 이 성과가 부르주아적인 것이었지만 "부르주아는 혁명을 일으킬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일으킨 혁명의 성과를 지킬 능력조차 없었기 때문에 1905년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1908년경에는 그 성과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고 그 결과를 설명한다.['볼셰비키 혁명사' 66쪽]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1905년의 운동을 통해 혁명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게 된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가졌던 '교의'를 현실에 맞게 수정해 러시아에 적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물론 이 교훈을 모두가 똑같이 받은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구분하는 멘셰비키의 '교의'는 이 혁명에도 영향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들 '교의'의 핵심은 "사회주의 혁명을 직접 준비하는 정책을 모두 배제시키고 이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단지 부르주아의 보조적인 동맹군으로서만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사' 67쪽]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사이 홀로 남아있던 트로츠키는 달랐다. 그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허약함 때문에 부르주아가 혁명적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았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혁명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경우, 권력은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넘어갈 것"이며 "일단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는 끝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1905년 혁명에서 교훈을 이끌어낸다.
['연속혁명, 평가와 전망' 104쪽, 118쪽]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부르주아 혁명에서조차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의 이상을 향해 독립적으로 행동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보통 알려진 것과 다르게 레닌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은 교훈을 이끌어낸다. 레닌은 1905년 9월에 쓴 글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해 혁명에서 승리한 후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쓴다.

"지배계급으로 올라선 프롤레타리아트와 [토지를 분배받음으로써] 부르주아가 된 농민 사이의 계급적 대결은 피할 수 없다. 이 투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며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혁명을 통해 지주에게 압수한] 땅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우리는 소위 '사회주의적'으로 평등한 분배를 약속해서도, 이 질문에 어물쩍 넘어가서도 안된다. 이 질문은 결국 우리가 후에 싸워야 할, 그리고 다시 새로운 전장에서 동맹[농민]과 다툴 내용이다. 지배계급이 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 노동계급과 함께 우리는 부르주아 농민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이는 -거대한 부가 농노제와 봉건제의 노예상태에 기반해있고 큰 규모의 사회적 생산을 위한 물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땅이 쁘띠 부르주아계급 농민의 소유가 됐을 때 실제로 벌어질 것이다. 이는 곧 국유화 또는 막대한 자본주의적 부가 노동자들의 연합의 소유를 이뤄냈을 때, 즉 우리의 힘과 계급의식적이고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민주주의 혁명이 완벽히 승리했을 때, 이 승리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개시해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연속된 혁명의 길에 설 것이다. 우리는 중간에 멈춰서지 않을 것이다."
-'Lenin Collected Works', 9권 pp.236~237ㆍ링크(강조는 옮긴이)

망명해있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구분이 명확치 않던 페테르스부르크의 노동자 호소문에서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볼 수 있다. '민주주의 혁명'을 바라지만 부르주아 혁명의 틀에 갇히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계급의 피를 이용한 것을 폭로하고, 이 부르주아들과 협력을 결코 숨기지 않는 '민주주의 옹호자'들에 대해 비판한다.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강조한 이 호소문이 배포된 날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 15만 명이 파업에 12년 전 '피의 일요일'을 기억하려 파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50여일 후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시 혁명으로 발전한다.

※아래 글은 존 리델이 편집해 그의 블로그(링크)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 Workerㆍ링크)’에 연재하는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시리즈 2편이다.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전쟁 당시 '페테르스부르크'로 불렸다.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로, 1924년 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불리다 소련 해체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라 부르게 된다. 본문의 대괄호 안의 내용과 글 아래 붙인 주석은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추가한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지구연합위원회 1917년 1월ㆍ링크

노동자 동지들이여! 부르주아지와 귀족들의 정부가 이 끔찍한 전쟁을 시작한 후로 슬픔으로 가득찬 날인 1월 9일이 벌써 세 번째를 맞고 있다. 전쟁은 3년째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수 백만 명의 노동인민을 전선으로 보냈다. 노동인민은 머나먼 전장의 참혹한 참호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고 있다. 그들은 자신만큼 아무 잘못이 없는 노동 형제들과의 핏빛 교전에서 배고품과 추위에 시달리다 죽어가고 있다.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이 끝없는 전투속에 잔혹하게 살육당하고, 폭파되고, 다른 이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건 왜인가. 유럽 남성의 절반이 상처입고, 불구가 되고, 말살당한
[이 전쟁의] 목표는 무엇인가. 부르주아지의 하수인인 언론이 우리에게 마구잡이로 떠들기로는 전쟁은 법과 정의, 모든 인민의 평등과 형제애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 목표를 위해 수 백만 인민이 다른 이들을 살육하고 고문했으며 죄없는 인간의 피가 흘러넘친 것이다.

동지들이여! 그들은 진실을 거짓으로 덮으려 하고 있다. 거짓말, 법과는 다른 말들, 도덕과 정의가 곳곳에서 수 백만 명의 살인을 감추는 데 동원되고 있다느 건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다. 우리의 '주군'과 귀족들, 은행가들과 기업가들은 더러운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거짓말에 의존해왔다. 그들의 힘은 속임수에 기대고 있다. 지배 계급은 인민의 무지와 분열 위에 그들의 힘과 부를 쌓고 있다.

바로 그 무지함 때문에, 1905년 1월 9일 겨울궁전 앞에서 군복을 입고 군율에 주눅든 우리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킨 프롤레타리아트를 향해 발포해 그들의 힘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로 그 불운한 광장을 채운 것이다. 정부는 총검과 채찍, 총탄으로 1905년과 1906년의 첫 번째 러시아혁명을 진압했다. "탄약을 아끼지 말라"고 트레포프
[1]는 명령했다. 그렇다면 누가 총검과 총탄으로 우리의 동지들을 상처입히고 살해할 것인가. 그것은 의식을 깨치지 못한 노동자와 빈농의 총검과 총탄이다.

+ + +

1905년의 위대한 혁명에서 정부와 부르주아지는 작은 대가만 치르고 승리할 수 있었다. 단 몇 천 명의 노동자가 비명에 생을 마쳤고 몇 백 명의 군인이 살해당했을 뿐이다. 이 군인들 또한 노동자였고 빈농이었다. 동지들, 모든 전제정부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노동계급의 조직화를 가로막는 것을 통해 권력을 지킬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12년간 경험을 쌓아왔다. 부르주아지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기만할 수 없다! 부르주아 언론이 광적으로 떠들어대는 대로 법과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 산업의 부흥'을 위해 전선에서 죽어간 우리의 가까운 친척과 소중한 친구들과 후방에서 슬픔에 잠겨 우는 어머니와 아내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병사 동지들! 부르주아지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당신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들은 살육의 축제를 더 확산시키기 위해 당신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러시아는 너무 좁다. 콘스탄티노플ㆍ보스포루스ㆍ다르다넬스를 그들에게 주라. 모든 교전국의 부르주아지는 이처럼 아귀 같은 탐욕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방위주의자는 없다. 그들은 이제 모두 침략자일 뿐이다.

각 나라의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의 저항을 약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애국자가 돼 조국을 방어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정말로 조국을 방어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쟁을 일으킨 도적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려 한다. 이들 살인자 패거리는 애국주의를 호소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반역의 대열을 분쇄하려 한다. 부르주아지와 그 하수인 언론들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 + +

전쟁산업위원회[2]의 노동자 그룹 회원 중 우리의 계급적 자의식을 잊은 배신자들은 부르주아지와의 단결을 주장한다. 그들은 서서히, 하지만 결정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신념을 잃고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뒤를 따라 이익을 얻기 위한 모든 일을 고분고분하게 반복한다. 그들을 위해 고언한다. "이제 손 떼!"

전쟁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시민의 평화에 대해 말했었다.

전쟁산업위원회 중앙위의 노동자 대표들은 지금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왜곡하고 있다. 그들은 정부와의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도와 '대규모 정치적 행동'을 수행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리보프 대공
[3]과 밀류코프[4]가 이끄는 부르주아지는 정치 체제 전반에 맞서는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콘스탄티노플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얻어내야 할 정복전쟁을 [정부가] 승리로 이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이들 노동자 대표들은 잊고 있다. 이 대표들은 또한 밀류코프가 혁명에 맞서 파산 직전인 피의 군주 부활시키기려 하는 구치코프[5]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잊지 말라 동지여. 우리와 그들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 부르주아지가 정부와 다툰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준다면 이는 혁명을 연기시켜 우리 상황을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지게 할 그들의 정복 야심의 실현을 더 쉽게 할 것이다.

노동자와 빈농, 전쟁으로 오랜 기간 고통받아온 병사들, 바로 우리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우리는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동지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길을 따라 용기있게 나가자.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는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자. 1905년 1월 9일의 현수막에 쓰여진 요구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과제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핏줄처럼 가까운 세계 곳곳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강력한 연합으로 모두의 새로운 삶과 사회주의를 향해 투쟁할 것이다.

+ + +

이제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강력한 당을 만드는 것이다. [러시아]사회민주당의 우리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하나의 사회민주당을 건설할 것을 동지들에게 호소한다. 이를 통해 강력해진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군대를 일으켜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귀족과 관료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병사들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면 썩어빠진 정치 체제 전반을 뒤집어 엎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폐허 위에서 민주공화국은 건설될 수 있다. 동지들이여 분노의 날이 가까워졌다. 이날은 인민 대중에게 폭력을 저질러온 정부를 심판대에 세워 처벌할 날이자 복수의 날이 될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1월 9일, 1905년 배반당해 숨을 거둬야 했던 동지들을 잃은 기억에 슬픔과 비탄으로 가득찬 이날, 우리 계급은 더 단호해져야 한다. 우리는 동지애적 연대의 사슬로 스스로를 더 강하게 묶어낼 것이다. 동지들, 우리는 함께, 강력하게 외칠 것이다. 왕좌 위의 적에게 복수를! 인민의 피와 땀으로 가득찬 노동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차르의 앞잡이와 도살자들에게 파멸을! 인민이 고통에 신음하는 시대에 그들은 잔치를 벌여왔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편과 아들이 죽어가는 동안 아내와 어머니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동지들, 1905년 쓰러져간 이들을 1월 9일 하루 파업으로 기억하자. 전진하라 동지들이여! 전쟁에 맞선 저항 모임과 집회를 열자. 정치탄압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불법상태에 놓인 언론을 위해 모금에 동참하자. 이날,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이 평가받을 것이다. 바로 이날, 우리는 다시 한 번 힘차게, 모두의 뜻을 모아 외칠 것이다.

전제정은 물러가라! 혁명 만세! 임시혁명정부 만세! 전쟁을 끝장내자! 민주공화정 만세!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 만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단결 만세!

주석
[1] 페오도로비치 트레포프ㆍDmitri Feodorovich Trepov는 1916년 11월에서 1917년 1월까지 제정 러시아 정부의 총리를 맡았다. 1905년 1월 12일(구력) 페테르스부르크의 총독으로 임명됐다. 그는 알렉산드르 불리긴의 내각에서 차관에 임명됐다. 1905년 9월 잠시 유화책을 펼쳐 페테르스부르크 대학 내의 학생 모임과 집회를 허락하고 대학 구내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후인 10월 14일(구력) "가장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고… 군대의 활동에 직접 지원을 멈추지 말라… 탄창을 아끼지지 말고 맘껏 사용하라"고 페테르스부르크 경찰에 명령해 학생 반란과 철도 노동자의 파업 진압에 나섰다.
[2] 전쟁산업위원회ㆍthe war industry committees는 제정 러시아가 1915년 4월 폴란드 남부 갈리시아 전선에서 큰 패배를 당한 후 전쟁물자의 보급을 위해 차르가 조직한 위원회.
[3] 게오르기 리보프ㆍGeorgii L'vov 대공은 부유한 지주 출신으로 젬스트보에서 활약했다. 젬스토보는 1864년 설치된 지방자치기관. 전쟁 기간 전국의 젬스트보 연합체인 젬고르 의장이었다. 니콜라이 2세 퇴위 후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각료회의 의장 겸 내무장관에 오른다.
[4] 파벨 밀류코프ㆍ Pavel Milyukov는 러시아 입헌민주당ㆍ카데트의 지도자다. 임시정부에서 외무장관을 맡는다.
[5] 알렉산드르 구치코프ㆍAlexander Guchkov는 기업가 출신의 두마 의원이다. 10월당의 지도자로 전쟁에서의 패배가 분명해지면서 니콜라이 2세 강제로 퇴위시켜 러시아 제정을 지켜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16년 8월 그는 총사령관 알렉세예프에게 편지를 보내 쿠데타를 호소한다. 이 음모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알렉세예프는 3개월 뒤 다시 리보프공과 쿠데타를 모의한다. 구치코프는 임시정부에서 전쟁장관이 된다.

Posted by 때때로

"영국으로 말하면 런던 금융가의 자본가들은 현 체제의 수혜자들임이 분명한 반면 그 주변부의 산업자본가들은 스스로 피해자로 느끼고 있다. 이들이 현 국제체제를 타파하고자 이 국제체제에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 중·하층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 '브렉시트와 그 해법' 김승호ㆍ링크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표가 다수인 것으로 드러나자 많은 지식인들이 충격을 받은 듯하다. 보통은 멍청한 인종주의자들의 불장난이라며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 좀 더 점잖은 쪽도 위 글처럼 인종주의자 혹은 자본가의 한 분파에 '동원'됐다는 식이다. 전자든 후자든 교정 불가능한 엘리트주의로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이번 영국 국민투표는 바로 이 오만한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다.

인민이 그 스스로 정답을 알고 있다는 식의 NL과 같은 대중추수주의에 동의하진 않는다. 하지만 인민의 정서라는 현실에 기반해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1920~30년대 독일에선 바로 여기서 좌파가 실패했다. 사민당도, 공산당도 말이다. 그리고 그 자리 나치가 성장했다. 그러니까 우린 지금 영국에서 파시스트의 현실화 된 힘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21세기 첫 10여 년간 반자본주의 운동이 반세계화 운동으로 시작돼 성장할 때 극우파는 운동 곳곳에서 개입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좌파는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운동 자체의 성패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극우파의 국수주의적 정서는 운동을 지배하지 못했다.

이것을 패배가 아니라 기회로 만들려면 현실에 대한 보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그러한 판단은 좌파보다는 우파에게서 더 많이 보이곤 한다. 아래는 영국의 시사 주간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스펙테이터의 정치는 보수에 가까울 것이다. 필자가 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가난한 이들, 노동계급을 계속 그들(they)로 표현할 정도다. 이들의 계급의식과 계급적 본능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 상당히 많은 오역이 포함돼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지적해주시면 즉각 반영하겠습니다.
따라서 인용하시려면 아래 링크로 직접 찾아가 원문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브렉시트 지지자가 멍청이거나 인종주의자인 건 아니다, 단지 가난할 뿐
그들은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함으로써 자신들을 경멸하던 엘리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Brendan O'Neill, 스펙테이터, 2016년 7월 2일ㆍ링크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일을 저질렀다. 공공주택에 살며 '선'을 읽는, GCSE[영국의 중등교육자격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 (이 시험은 주로 계급지표를 보여줄 뿐 어리석음을 말해주진 않는다) 이들 말이다. 이들이 들고 일어나 투표소를 짓밟으며 유럽연합 반대를 외쳤다.

이번 국민투표 결과는 쇠스랑만 안들었다 뿐이지 현대에 재현된 농민반란과 같다. 투표결과는 인상적이다. 잘 사는 이들은 잔류를, 곤궁한 이들은 탈퇴를 지지했다. 브렉시트 지지자와 잔류 지지자들
[The Brexiteer/Remainer]은 거의 완벽하게, 정말 기막히게 계급 구분선을 따라 나뉘었다. 생산직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86%라는 엄청난 수가 탈퇴에 표를 던졌다. 생산직이 적은 영국의 다른 소수 지역에서는 42%가 그랬을 뿐이다. 주택가격이 평균 28만2000파운드가 안 되는 지역에서는 79%가 탈퇴를 지지했다. 주택가격이 그 이상인 지역에서는 단지 28% 만 그랬다. 교육수준이 낮은 (예를 들면 GCSE에서 성인 4분의 1 만이 'five A'에서 'Cs'까지의 등급을 획득한) 240개 지역에서는 83%가 탈퇴에 투표했다. 소득수준 기초조사 순위로도 마찬가지다. 다수가 적은 임금(2만3000파운드 이하)을 받는 지역의 77%가 탈퇴에 표를 던진데 비해 급여가 괜찮은 지역에선 35%가 그랬을 따름이다.

이 얼마나 극명한 차이인가. 당신이 육체노동을 하며 보통의 집에 살고 있고, 대학문이라곤 한 번도 넘어본 적 없다면 당신은 유럽연합에 '쥐어짜내지고 있다'고 말하는 걸 이웃한 여러 도시의 부유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보다 더 선호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스코틀랜드의 16개 지역은 생산직이 다수지만 탈퇴보다 잔류에 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계급은 투표에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는 정말 내게 놀라운 일이다. 사회등급이 D 또는 E(반숙련 또는 미숙련 노동자와 실업자)인 사람이 다수인 영국의 50개 지역 중 오직 세 지역 만이 잔류에 투표했다. 세 곳이다. 이는 기득권층이 그들에게 '예스'에 표를 던져야 한다고 고집했음에도 매우 가난한 47개 지역이 일제히 '노'를 외친 것이다.

이제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영국의 가난하고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유럽연합과 영국의 그 지지자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줬다. 또 그들은 영국이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의 오래된 이데올리기적 분열을 떨쳐내고 우리 모두가 사회의 '주주'로 간주되는제3의 길 또는 탈계급 사회에 들어섰다는 것과 같은 블레어주의 신화를 완전히 깨버렸다. 국민투표 후 우리는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여전히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것은 소유냐 소유하지 않았냐의 문제 만은 아니다. 이는 관점의 전쟁이다. 사회의 부유한 부류는
[국내] 정치가 외부의 국제기구들과 연관되는 것을 선호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그렇지 않다. 유복한 이들 중 소수 만이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몫을 주장할 뿐 (무엇보다도 '주주 사회'라는 터무니 없는 말을 앞장서 홍보하는) 여론 주도층은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 농민 반란이 엘리트에게 준 충격으로 인류학자와 같은 이들이 이러한 미지의 집단을 조사하게 됐고 그들은 현재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정신 없이 연구하고 있다. 그들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았다. 하나는 분노고 더 나쁜 다른 하나는 연민이다. 분노한 이들은 서민들이 탈퇴표를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전적으로 인종주이적이진 않지만 나이젤 파라지
[영국독립당의 창립자이자 대표, 7월 4일 대표직을 사임했다]와 같은 이들의 악질적인 외국인 혐오 선동에 속아넘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악질 선동가들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는 이런 생각은 1840년대 차티스트 운동이 들었던 것과 같은 알맹이 없는 설명이다. 가난한 이들은 "성숙한 지혜'를 지니지 못해 다른 어떤 계급보다도 더 잔혹한 극단주의자들로 바뀌기 쉽다"는 오만한 비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국제적 대도시의 시민들은 약자들을 다시 한 번 바로 그 자리에 세워 고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사에 따르면 반유럽연합 진영의 사람들이 외국인 혐오에 휘둘리고 있다는 주장은 일축된다. 투표 후 ComRes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브렉시트를 지지한 이 중 단 34% 만이 그들이 표를 던진 주요 이유로 이민자를 언급(이민자 언급이 꼭 인종주의와 연관된 것은 아니기도 하다)하고 있다. 절반이 넘는 53%의 사람들은 영국이 스스로의 법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유럽연합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어리석게도 포그롬[집단 학살, 러시아에서의 유대인 학살에서 유래]의 편을 들어준 것이라며 모욕당한, 전국을 휩쓴 [반란자들의] 발자국은 실제론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다.

이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평에 대해 말해보자. 그들의 진단은 치료법의 하나다. 유복한 사람들 중 소수 만이 분노 충동에 시달린다. 무시당한다고 느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당연한 건 아니지만 채찍을 휘두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겉보기에 배려 넘치는 대중에 대한 오프라
[아마도 오프라 윈프리를 말하는 듯]식의 접근법에 넘어가선 안된다. 이 또한 그들의 민주적 선택을 정치적 선언보다는 본능적 비명 취급함으로써 비하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선 기득권층의 입장에 대한 의식적 반란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 들어달라는 감상적 애원이 된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탈퇴표를 던진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본 결과 그들은 정치계급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에 반대한 것이다. 그들은 엘리트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많이 간섭하는 걸 더 문제 삼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비난받는 데 신물 나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들을 낮잡아 보는 국가기구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 혹은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을 도덕적ㆍ사회적으로 교정될 필요가 크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내가 자랐던, 노동계급이 극소수인 런던 북서부 교외의 번트오크에서 탈퇴 투표자를 찾긴 어렵다. 바넷구 전체를 살펴도 그렇다. 이 곳에선 6만1000~10만 명의 사람들이 잔류에 표를 던졌다. 이들은 모두 비슷하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를 무릎 꿇렸다." 나와 대화했던 모두는
[탈퇴표에 투표한] 그들이 영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해서 바로 인종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 중 다수가 집시(번트오크에는 다수의 집시가 살고 있다)와 함께 일하며 어울려 산다는 것은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그들의 책임이 아님을 보여준다.

[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가난한] 그들은 아랫사람 취급 받으며 모욕당하고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시당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계급 문화와 태도가 멸시받는다고 느낀다. 관료집단은 이들을 건강하지 못하며, 정치적으로 공정치 않고, 축구에 지나치게 몰입하며, 자식 낳는 데 너무 집착하고, 술독에 빠져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잉글랜드라는 사고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반란은 인종주나 유치한 분노의 발작이 원인이 아니다. 이를 숙고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경멸하던 엘리트의 콧대를 꺾을 기회를 알아채 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발휘했고 그 과정에서, 맙소사. 세계를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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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의 구제금융 조건에 반대하는 그리스 국민투표가 반대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박빙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반대표는 61%로 찬성표를 크게 앞질렀다.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다수로 나오게 되면 유로존을 나가게 되고 이로 인해 더 큰 경제적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그리스 우파 언론들과 유럽 지배자들의 협박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큰 승리다.

국민투표는 그리스 노동계급 운동의 압력보다는 유럽 지배계급의 강경한 태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메르켈과 유럽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1월 시리자의 집권 후 이 정당과 그 지도자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실각을 위해 움직여 왔다. 유럽 지배자들의 압력 하에서 치프라스와 시리자는 양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연금 수당 삭감을 약속하고 생필품에 대한 부가가치세 인상을 제안했다. 이런 와중에도 부유한 선주들을 위해 섬에서의 부가가치세 면제는 지속됐다. 그러나 메르켈이 더 강경했다. 치프라스에게도 끝없는 양보는 전임자인 파판드레우와 사회민주당(PASOK)와 다르지 않은 운명을 그들 앞에 열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즉 국민투표 외에는 유럽 지배계급의 압력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게다가 그리스에는 여전히 강력한 노동계급 운동이 버티고 있었다. 치프라스는 국민투표에 판돈을 걸었고 그는 승리했다.

승리가 치프라스와 시리자의 것 만은 아니다. 2005년 프랑스에서 유럽연합 헌법이 부결된 후 일부 자신감을 잃었던 자본주의적 유럽에 반대하는 운동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국민투표가 발표된 후 유럽의 좌파와 노동계급은 그리스 인민을 지지하는 대중행동을 이어갔다. 메르켈의 독일에서도, 융커(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의 브뤼셀에서도 말이다. 그리스 좌파들 다수(공산당을 제외한)는 반대표를 던질 것을 호소하며 노동계급 인민을 조직해냈다. 진짜 민주주의는 브뤼셀의 유럽연합 사무실에 있지 않았다. 그리스와 유럽의 거리와 작업장에 진짜 민주주의가 있었고 그리스 인민은 훌륭하게 자신들의 뜻을 지배자들에게 보였다.

기껏해야 자유주의 좌파인 조셉 스티글리츠도 유로존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 가능하다. 가디언지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미셸 뢰비는 이를 프랑스 대혁명 당시 전제정과의 투쟁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번 국민투표가 보여줬 듯이 진정한 대안, 유럽 좌파가 원하는 '다른 유럽'은 브뤼셀의 협상장이 아니라 그리스와 유럽의 거리와 작업장에 있다는 것을 우선 강조하고자 한다. 전 세계 노동자들은 그리스 인민의 선택으로부터 다시 한 번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나가는 것은 노동계급 자신이다.

아래 그리스 국민투표 전 발표된 여러 글들을 모았다. 때를 놓친 글이지만 국민투표 이전을 되돌아볼 때 다시 찾아볼 만한 글일 것이다. 국민투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후 다른 글에서 더 소개하겠다.

시리자, 트로이카, 역설들ㆍ마이클 로버츠ㆍ링크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어디에 표를 던질 것인가ㆍ조셉 스티글리츠ㆍ링크
국민투표에 대한 그리스 좌파의 입장ㆍ인터내셔널 뷰포인트ㆍ링크
국민투표, 그리스 국민과 무자비한 유럽 자본주의의 투쟁ㆍ가디언ㆍ링크

※ 잘못 옮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제게 있습니다. 대괄호 [ ]로 표시한 부분은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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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중대한 국민투표에 대한 그리스 좌파의 두 입장을 아래 소개한다. 이 둘 모두 반대에 표를 던질 것을 호소하고 있지만 시리자의 지도자들에 대한 방침에 있어서 다른 의견을 보여준다. 앞의 것은 제4인터내셔널의 그리스 지부인 OKDE-Spartakos의 것이고 뒤는 시리자 내의 좌익 분파인 the Red Network의 것이다.

International Viewpointㆍ2015년 7월 3일링크


협정에 반대하자, 협상을 끝내자

그리스 정부는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EU, IMF와 같은 기구들 혹은 유럽을 지배하는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신뢰와 호의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부채를 '완전하고 늦지 않게' 갚고 자본주의적 정상상태에 반하는 그 어떤 수단도 단독 행동과 함께 포기하겠다는 충성 서약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시리자는 (사유화, 퇴직 연령의 상향, 임금과 연금의 실질적인 삭감, 대중적 소비 제품에 대한 부가세 인상 등을 담은) 각서에 완전히 일치하는 정책과 개혁을 도입하기조차 했다. 그럼에도 유럽연합과 IMF는 그들의 그리스 국내 협력자들과 함께 그 가혹한 정책들뿐 아니라 선거에서 각서의 폐기를 내세워 선출된 정부에 비춰진 모든 희망(환상)의 파괴를 원했다. 물론 그 구호는 당선된 다음 날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이렇게 해서 시리자는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됐다. 그들은 스스로 정치적 죽음을 선언하는 서약에 서명할 수 없었다. 이 협정에 동의하는 것은 그들을 게오르그 파판드레우가 이끌던 사회민주주의 정당 PASOK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노동자운동이 요구하는 압력 하에 국민투표를 선언했다. 우리는 자본의 이해와 자본주의적 기관에 맞서는 시리자의 능력 혹은 이러한
[국민투표의] 의도에 대해 그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트로이카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은 적절한 상황에서는 우리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체제의 새로운 정치적 위기의 장을 열 것이다.

그 후 수도의 전통적인 자본주의 정당들인 ND
[신민당:1970년대 군부독재의 붕괴 후 사회당ㆍPASOK와 함께 그리스 정치를 독점해온 정당. 중도 우파 정당이다]와 PASOK는 극단적 신자유주의 정당인 POTAMI와 함께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자본주의적 기구들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일어날 참사들을 제기하며 열광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는 기업의 이윤은 물론 큰 소득, 심지어 낮은 임금에 대한 세금조차 맹렬하게 반발했었다. 그들은 유로존에서의 탈퇴가 가져올 참사를 마구 제기하며 직설적으로 협박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이미 진정한 참사를 겪고 있는 중이다. 긴축과 자본주의적 공격으로부터 말이다. 노동계급은 공포에 떨 수도,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이들은 자본의 통제 혹은 유로존에 일반화된 위기에 의해 잃을 실질적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를 착취하는 체제인 자본주의가 동요하면서 우리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유럽연합ㆍIMF와의 파국은 절망과 두려움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자신감을 줄 것이다.

단지 투표를 통해 이 파국이 올 수는 없다. 선거도 국민투표도 긴축을 끝장내는 마법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어지는 며칠간 "우리는 유럽에 남을 것이다"와 같은 구호 하에 모인 친 자본주의적 반동에 맞서 거리로 나설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 국민투표가 시리자의 지도자들과 치프라스의 협상을 위한 술책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또한 어떤 환상도 갖지 않을 것이다. 최근, 그리고 주로 이전의 몇 년간 나섰던 대중이 그렇게 나서지 않는다면 그 기구들과 각서는 방해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트로이카의 제안에 대한 우리의 반대가 시리자와 그리스 독립당 연립정부를 신뢰함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47쪽에 이른 제안과 이후 만들어질 수정안 또한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긴축과 사유화를 담은 아주 약간 완화된 새 각서일 뿐이다. 정부의 제안은 어떤 면에서 저 기구들의 것보다 더 반동적이기조차 하다. 국방비 프로그램, 배 소유주들에 대한 세금 면제의 유지처럼 말이다. 우리는 투쟁으로 이 제안들 또한 반대할 것이다.

7월 5일 일요일, 우리는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

반대한다:
[트로이카와의] 균열을 강화해 새로운 협상의 시작을 막기 위해
반대한다: 투표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반대한다: 이번 협정 뿐 아니라 모든 타협을
반대한다: 유로존과 유럽연합, IMF와 그들의 제안에 대해
반대한다: 트로이카와 이들 뿐 아니라 동일한 체제의 다른 관리자들에 대해

OKDE-Spartakos 중앙위원회
2015년 6월 28일
OKDE



협박에 반대표로 맞서자

7월 5일 국민투표가 극단적 긴축정책 혹은 유럽 지배자들의 협박을 받아들일 것인지 많은 눈들이 그리스를 지켜보고 있다.

은행을 폐쇄하며 그리스 정부는 투표까지 최소한 한 주 동안 자본에 대한 부분적 통제를 도입했다. 이는 유럽의 대출자들과 그들의 정치적 대변자들에 의해 국가의 금융이 교살당할 것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는 그리스 국민들에게 식료품과 그 밖에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그들이 그것들을 살 현금을 긁어모아야 한다는 긴장감을 자아냈다. 이는 또한 대출자들의 강탈 전략에 맞서 저항하는, 분노에 보낸 신호이기도 하다. 6월 29일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 모여든 거대한 '반대 투표' 시위대처럼 말이다.

유럽의 정치적 지도자들과 '기구들'-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IMF-의 대변자들이 그리스 금융 시스템에 대한 구제금융 연장을 대가로 더 가혹한 긴축과 사유화의 더 빠른 이행, 노동인민에 대한 더 높은 세금을 포함한 최후 통첩을 전해온 후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긴급 국민투표를 발표했다. 시리자가 1월 25일 전국 투표에서 승리해 새로운 정부를 형성한 이후 치프라스는 긴축을 역전시키겠다는 급진 좌파정당의 약속이 아니라 채권자들이 원한 조건부 항복으로서 통 큰 양보안을 제안했다.

치프라스와 정부에 대한 다른 압력은 시라자 내 영향력 있는 좌익으로부터 비롯했다. 이들은 더 이상의 후퇴를 중단하고
[당의] 방침을 바꿔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을 사용해 공약의 실현을 시작하길 요구했다. 아래는 시리자 내부의 레프트 플랫폼(the Party’s Left Platform)에 참여하고 있는 혁명적 조직들의 연합인 the Red Network가 발표한 성명이다.

정부는 채권자들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극단적인 긴축정책을 담은 새로운 각서에 서명하길 거절한 후 7월 5일 국민투표를 통해 그리스 정부가 나가야할 바에 대해 인민의 의지를 표현해주길 호소했다.

이러한 결정은 사회적 투쟁으로 비롯해 1월 25일 이후 지속된 도전이 국내와 국외의 신자유주의 지자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어지고 강화됐음을 입증한다. 이는 또한 2월 20일 채권자들과의 협상 결과로 교착상태에 놓인 그 동안 계속돼 온 협상의 막다른 길로부터 시리자와 인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자유롭게 했다.

이는 또한 시리자 내 가장 비판적인 분파인 우리가 선거 이후 몇 달간 강력히 주장해온 것이 옳음을 입증한다. 시리자는 긴축을 옹호하는 정당으로 쉽사리 바뀔 수 없다는 주장 말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국민투표를 선언한 순간 이후 가장 중요한 전투가 진행 중이다.

그 '기구들'과 유럽 정부들의 지도자들은 좌파 정부에게뿐 아니라 노동자와 그리스 인민 대중에 대해 직설적으로 경제적 교살을 위협하고 있다.

NDㆍPASOKㆍPOTAMI의 '국내 트로이카'를 포함한 저들의 국내 협력자들은 - 요 몇 년간 은행과 산업, 선주들을 지지하며 도입된 극단적 긴축 체제인 - 각서의 국제적 수호자들이 그들의 영향력을 잃을까봐 두려움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모든 신호들은 다가올 날에 양 측 사이에 전면적인 맹렬한 전투를 보게 될 것임 보여준다. 노동계급과 인민 대중은 명확한 승리를 위해 이 전투에 온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 반대를 위해서. 각서와 긴축, 부채 채권자들의 협박에 대한 반대 말이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1월 선거에서 시리자에 대한 노동계급과 인민의 투표에서 역동적으로 표현됐던 것처럼 좌파 부활시킬 것이다. 이는 그리스에서 정치ㆍ사회적 세력균형의 변화를 다시 한 번 보여줄 것이다.

7월 5일 승리가 상황을 채권자들이 야비한 최후통첩을 통해 협상을 붕괴시킨 때로 되돌리진 않을 것이다. 승리는 시리자가 선거 전 테살로니키 프로그램에서 약속했던 긴급하고 일방적인 최소한의 반 긴축 정책들에 뒤따르는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입증할 것이다. 이는 부채의 상당 부분 삭감을 목표로 한 부채 상환의 중단을 포함한다.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의 삶의 개선을 위한 정책, 그리고 기업과 부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재정 정책과 공기업의 광범위한 재국유화, 은행의 사회적 통제를 위한 정책 말이다.

정치ㆍ외교ㆍ금융에 필요한 모든 정책들은 반드시 실현돼야만 한다. 채권자들의 협박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긴축에 맞선 투쟁은 유로 체제의 영향 혹은 유럽 지배자들의 동의에 의해 통제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충돌할 것이다. 한 쪽 편은 각서의 잔혹함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이들-국내 지배자들, 그리고 그들의 국제적 수호자와 협력자들-의 세계다. 그들은 은행을 포함해 자본의 해외로의 유출, 혼란스러운 위기에 대한 협박에 기대고 있다.

다른 한 쪽은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의 세계다. 실제로 사회에서 거대한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이들에게 기대지 않고선 어떤 이득도 얻을 수 없는 이들의 세계다.

이 두 세계 중 어느 하나의 승리는 다른 하나의 패배를 뜻할 것이다. 따라서 좌파의 어떤 개인과 조직도 순간 망설여서는 안된다. 지금 즉시 반대표를 조직할, 그렇게 해 노동계급과 인민 대중의 승리를 얻어낼 동맹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1월 이후의 실수와 상관 없이, 그리고 이 순간 우리가 직면한 전례 없는 난관에 대해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면 현재는 학술적 토론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지금은 투쟁할 때다. 지금은 기존 국가의 문제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그리스 노동 인민의 위대한 승리를 얻어야 할 때다.

Red Network(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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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박근혜의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다. 13일엔 정부 각 부처의 새해 업무보고가 이어졌다. 이 자리들에선 새롭진 않지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정책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시 강력하게 천명됐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기업을 위해선 모든 걸 다 내주겠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인민의 삶을 희생해서 말이다. 몇 가지만 간단히 정리해본다.


1. 기업형 임대주택 뉴 스테이(New Stay)

조선일보는 이렇게 요약한다.

"대기업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양도소득세ㆍ법인세 등 각종 세금을 최대 75%까지 깎아주고 택지도 시세보다 20~30% 싸게 제공할 방침이다."
-조선일보 14일자 3면

그동안 LH에서 85㎡ 이하로만 공급하던 임대주택 시장을 민간 건설기업에게까지 열겠다는 것이다. 부동산시장 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건설사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것이다. 굳이 어렵게 분양하려 하지 말고 임대해서 따박따박 월급에서 빼내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심 공공 택지를 최대한 싸게 많이 공급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제 혜택도 대폭 확대한다. 85㎡ 이하 임대주택에 대해선 취득세 감면 비율을 현 25%에서 50%로 확대하고,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비율은 현 20%에서 75%로 확대한다. 돈이 없으면 싼 값에 빌려주기도 한다. 국민주택기금 대출 금리를 현행보다 내리고 임대 기간이 8년을 넘을 경우 매해 0.1%씩 추가로 인하하겠다고 한다. 이 모든 혜택이 임대주택 사업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택 문제로 고통받는 노동계급 인민이 아닌 기업에게 말이다.


2.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예외) 제도

박근혜 정부는 기업의 수익률 제고를 위해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해고를 더 쉽게 만들고 비정규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임금은 깎겠다는 것이다. 기업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겠다는 것.

대표적인 것이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 제도 도입이다. 사무ㆍ연구ㆍ개발직 노동자들에 대해선 근로시간 규제를 없애겠다고 한다. 즉 이들 '화이트칼라'는 정해진 근무시간 이상을 일해도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것. 이들은 이를 '고액 연봉' 화이트칼라에게 적용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중앙일보는 이 정책의 내심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해마다 자동으로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 대신 직무ㆍ성과급 임금체계로 바꾸는 실험을 고액 연봉 화이트칼라부터 해보자는 취지다."
-중앙일보 14일자 5면

공무원 연금 '개혁'이 공무원 연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공공부문 노동자를 대상으로는 기존 2급 이상을 대상으로만 시행되던 성과연봉제를 7년 이상 근속 근무자에게까지 확대하겠다고 한다. 즉 대부분의 공공부문 노동자를 대상으로 성과연봉제를 도입하겠다는 것. 이 뿐 아니라 그동안 줄기차게 추진해왔던 임금피크제 또한 활성화하겠다고 한다.


3. 해외 돈으로 내수 키우기

노동계급 임금을 올려줄 생각이 단 한 톨도 없는 박근혜 정부와 기업들은 경제의 기초체력인 내수를 키우기 위해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겠다고 한다. 조선일보의 표현이니 정부와 기업주들의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올해 정부 정책의 키워드인 공공ㆍ노동ㆍ금융ㆍ교육 등 4대 부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기초 체력인 '내수'가 튼튼해야 하는데, 내수 진작을 위해서는 외국 자금과 손님을 끌어들여야 하는 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과다한 부채로 국내 가계 소비 여력이 제한되고, 기업들의 국내 투자도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국내인과 국내 기업만의 수요로 내수를 키우기는 어렵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조선일보 14일자 4면

그렇다면 해외의 돈은 어떻게 끌어들이겠다는 것인가. 결국은 각종 규제 완화가 그들의 답일 수밖에 없다. 면세점 늘리는 거야 애교다. 이들은 크루즈 운항을 늘리기 위해 마리나를 확대하고 수산자원보호구역 3230㎢를 해제하겠다고 한다. 호텔을 늘리기 위해 부동산투자신탁도 확대하겠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해외 환자 32만 명 유치 목표다. 조선일보는 이를 위해선 현재 경제자유구역에만 설치 가능한 '투자 개방형 의료법인'을 더 확대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뿐 아니라 민간 보험사의 환자 유치 활동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정부는 이런 내용을 포함한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을 국회에 제출해놓은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이 단지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 정책들은 의료 민영화를 확대해 공적 의료를 파괴하고 자연 환경을 해치는 방향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다.


4. "대한민국이 난리 났네 할 정도로 하라"

박근혜는 이 정책들을 강력하게 몰아부칠 계획이다. 실제로 그리할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겠지만 신년 기자회견과 업무보고에서 그의 의중은 충분히 드러냈다.

"오늘 나온 얘기를 그냥 일시에 '대한민국에 난리 났네'라고 할 정도로 해버려야 성장 기반이 마련된다"
-조선일보 14일자 3면

그와 그의 기업인 친구들이 그리 할 수 있을지는 아마 우리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지난 2년여 간 결정적 순간마다 머뭇거리게 만든 건 바로 노동계급 투쟁이었다. 2013년 말 박근혜를 위기 직전까지 몰고갔던 철도노동자 파업이 대표적이었다. 공무원 연금 개혁도 공무원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잠시 멈춰야만 했다(원래 지난해 내에 하겠다고 했었다. 지금 다시 강력하게 추진하려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도 그리 만만치 만은 않다. 현대중공업에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과 민주노총 첫 직선제 위원장으로 가장 투쟁적인 공약을 내세운 한상균씨가 뽑힌 것이 그 예일 것이다.

우리도 박근혜처럼 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난리 났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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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루에서의 점심
|찰스 에버트가 1932년 촬영한 사진. 당시 건축 중인 뉴욕 록펠러 센터 69층(지상 260m)에서 철골 구조에 앉아 위태롭게 점심시간을 보내는 노동자들.

아래는 조슈아 B. 프리먼의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 서문이다. 뉴욕주립대학교 퀸스 칼리지 역사학 교수로 '수송 중: 뉴욕 운송 노동조합 1933-1966'을 썼고 '미국을 만든 건 누구인가? 노동 인민과 국민경제, 정치, 문화 그리고 사회' '파렴치한 민주주의: 노동, 지식, 그리고 미국 사회의 재구성'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 의역이 많고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주석은 후주로, 옮긴이가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은 본문 대괄호 안에 담았습니다. 저자가 이탤릭으로 표기한 것은 굵은 글씨로 강조했습니다.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 2차 세계대전 후 뉴욕의 삶과 노동
조슈아 B. 프리먼

서문: 무엇이 뉴욕을 위대하게 만들었나

20세기 중반 뉴욕의 거리를 거니는 방문자는 노동계급이 그곳의 사회적 중추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산한 항구와 도시 심장부의 공업지대, 브루클린ㆍ브롱크스ㆍ맨하탄의 무질서하게 뻗어나간 주거지역, 주기적으로 지역을 마비시키던 파업들, 많은 지지자를 거느린 미국 노동당과 진보당, 국제적 명성을 얻은 뮤지컬과 코메디 스타일, 지역사회 주민들 내에서 통용되는 은어 등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뉴욕 노동계급은 정치 집단, 지역 주민들의 조합, 친목 또는 민족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을 통해 도시의 사회ㆍ경제ㆍ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곳곳에서 기여했다. 지식인ㆍ예술가ㆍ엔터테이너ㆍ상인들이 전유하고 전파한 그들의 문화ㆍ스타일ㆍ세계관 등의 요소는 도시와 국가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조직 양식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뉴욕 노동 대중의 세계시민주의ㆍ열정ㆍ교양은 2차 세계대전 후 권력ㆍ혁신ㆍ현대성의 세계적 중심이 되고자 한 뉴욕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노동자와 그들의 단체들은 자신을 소외시킨 일련의 사건 전개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됐다. 스스로 힘들게 일해온 다수가 뒷전으로 물러나는 사이 1990년대 뉴욕의 행로와 궤적은 시장과 유행의 선구자라는 세계적 도시로서의 위치에 점점 더 이끌렸다.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는 승리와 고립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의 주민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했었지만 미래에는 더 이상 중심적 열할을 하지 못할 단체들이 권력을 얻고 영향력을 잃는 대하소설이기도 하다. 또 이것은 대중과 산업, 권리와 평등을 위한 끈질긴 투쟁, 계속되는 차별과 불평등의 거대한 변동에 관한 이야기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뉴욕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주목할 만한 역사가 그곳에 살았던 이들 계급 외에는 거의 모두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것이다. 전후 뉴욕을 기념하는 방대한 문학작품들-E. B. 화이트, V. S. 프리쳇, 쟌 모리스, 트루먼 카포티, 윌리 모리스 등등-은 전성기에 인구ㆍ경제ㆍ정치ㆍ사회 모든 면에서 뉴욕이 노동계급 도시로 보통 묘사되던 동안 놀라울 정도의 맹목적인 태도로 바로 그 노동자의 존재를 대개 무시한다. 노동자가 이야기에 등장할 때면 이 작가들은 대개 범죄의 온상,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다채로운 배경으로서만 그려진다.
[1] 뉴욕의 기록가들은 너무 자주 그곳에 살고 있는 수백 만명의 노동자, 그 남편과 아내, 아이들, 즉 뉴욕을 경제ㆍ정치ㆍ문화적으로 중요하게 만들고 그곳의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무시한 채 자신과 같은 작가ㆍ예술가ㆍ기업가ㆍ정치인들을 도시와 그 정신의 창조주(the creator)로 간주한다. 그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뉴욕의 노동계급 역사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적게 써왔다.[2]

노동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뉴욕의 과거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도시의 정치ㆍ사회ㆍ경제, 심지어 물질적 발전에서조차 전국적 표준에서 그토록 벗어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뉴욕을 살펴보는 것은 미국 노동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뉴욕 노동계급과 단체는 보통 대량생산 산업과 산업별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ㆍCIO)와 연결돼 있던 남성 중심적 산업노조를 강조한 2차 세계대전 후 노동의 역사에 기초한 묘사에 들어맞지 않는다.
[3] 뉴욕에선 작은 회사와 공방 또는 복합기업[다각기업ㆍ하나의 기업이 여러 종류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의 재벌과 비슷한 형태]에 많은 수의 여성 조합원을 거느린 노조들-흔히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ㆍAFL)과 연결된-이 지배적이었다. 거기에 또 뉴욕에서 노동조합주의는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 회복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2차 세계대전부터 1980년대 사이 나라 전체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이 급격히 떨어졌지만 뉴욕에선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그래서 1990대 뉴욕의 노동조합가입률은 전국의 두 배 이상이었다).[4] 그뿐 아니라 보통 조직된 노동자가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던 것으로 묘사되는 데 반해 뉴욕 노동운동의 힘은 1950년대 초와 1970년대 중반 사이 최고조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노동이 약해지는 동안 뉴욕이 노동조합 중심지로 남은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 노동운동의 특징과 그것의 정치경제적 지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의도적으로 학술적ㆍ정치적 유행을 거스른 것이다. 현대적 담론에서 바로 그 '노동계급'이란 단어는 불쾌한 느낌을 준다. 한 세기 동안 이 단어는 흔히 공업에 관한 어휘에 속했다. 보통 단순하게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총괄해 가리켰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용어를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 그들의 직계가족을 포함해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계급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 요즘 미국인들은 보통 그것을 사람들이 일하는 형태가 아닌 사람들의 소득이나 재산 수준에 따라 정의한다. 때때로 나 역시 중산층 또는 빈곤층이라는 단어와 같은 그러한 범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의 중심 논지는 뉴욕의 노동자들이 많은 경우와 상황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경제에서 그들의 구조적 위치로부터 제약받는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도시에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5]

다른 언급이 없다면 나는 뉴욕을
[펜실베니아주 북부와 온타리오호 사이에 있는 주가 아닌] 엄밀한 의미로 뉴욕시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 전후 뉴욕에 관한 많은 연구는 도시의 어느 부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체로서 대도시권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6] 이 연구는 도시 주민들 매일의 일상을 빚어내는 도시의 단체들과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과 거의 모든 내 성년의 삶을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 동안 뉴욕에서 보냈다.
[이 책이] 어떤 식으로든 회고록인 건 아니지만 나는 종종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삽화처럼 끌어내곤 했다. 대부분의 뉴요커처럼 나는 도시에 대해 큰 긴장감을 느껴 왔다. 그러한 어려움과 무자비함에 끝없이 좌절하면서도 다른 곳에서의 삶은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뉴욕을 지키는 것은 박물관이나 콘서트홀의 고급 문화 때문도, 비할 데 없는 일자리ㆍ식사 기회 또는 뉴요커들이 흥청대며 보내곤 하는 곳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명백하게 너그럽고, 개방적이지만 회의적이고, 이상적이지만 가식 따윈 없는, 폭발적인 열정과 활동에서의 헌신과 같은 노동계급 감수성 때문이다. 이것은 힘든 하루일을 마친 후 저녁 시간과 주말을 노동조합 모임, 친구들 사이의 일, 강연 또는 놀이공원에서 보내온 내 조부모들의 감수성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을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봉양하고, 지방을 전전하며, 그리고 대단친 않지만 자부심을 갖고 정의와 평등의 이름으로 사회 변혁을 모색했다. 지하철과 거리, 공립학교에서 나는 이러한 감수성을 여전히 느끼곤 한다.

노동계급이 영향력을 잃으면서 뉴욕에서 문화는 후퇴했고 공동체는 소원해졌다. 나 또한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때로 돌아갈 가능성을 원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50년 전 다저스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의 원래 연고지는 브루클린이었다. 1958년 현재의 LA로 옮긴다]는 브루클린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겠지만, 뉴요커 대부분에게 50년 전의 삶은 힘든 노동, 불안한 치안, 더 큰 적대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도시와 나라를 만드는 데 오늘날보다 더 위대한 역할을 맡을 가능성에 이 책이 빛을 비추길 바란다. 그들의 노동, 투쟁, 농담, 노래가 뉴욕을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다. 이를 잊는 것은 우리 모두를 약하게 만들 것이다.


[1] E. B. 화이트 『Here Is New York』(뉴욕, 1949, 국역 『여기 뉴욕』), V. S. 프리쳇 『New York Proclaimed』(뉴욕, 1965), 쟌 모리스 『Manhattan'45』(뉴욕, 1987), 안드레아 와이어트 섹스톤과 앨리스 레세스 파워스가 편집한 『The Brooklyn Reader: Thirty Writers Celebrate America's Favorite Borough』(뉴욕, 1994)에 실린 트루먼 카포티의 「A House on the heights」, 윌리 모리스 『New York Days』(보스톤, 1993).

[2] 최근 나온 데브라 베르나르와 레이첼 번스타인의 『Ordinary People, Extraordinary Lives』(뉴욕, 2000)은 예외다.

[3] 예를 들면 데이비드 브로디의 『Workers in Industrial America: Essays on the 20th Century Struggle』(뉴욕, 1980) 5장과 6장, 스티브 프레이저와 게리 게슬이 편집한 『The Rise and Fall of the New Deal Order, 1930-1980』(프린스턴, 1989)에 실린 넬슨 리히텐시타인의 「From Corporatism to Collective Bargaining: Organized Labor and the Eclipse of Social Democracy in the Postwar Era」, 킴 무디의 『An Inujury to All: The Decline of American Unionism』(런던, 1988)을 보라.

[4] 뉴욕과 전국의 노동조합 조합원 수에 관해선 3장과 17장에서 다룬다.

[5] R. 에메트 머레이 『The Lexicon of Labors』(뉴욕 1998) 187쪽. 계급에 관한 문학은 막대하다. 이라 카츠넬슨과 아리스티드 R. 졸버그가 편집한 『Working-Class Formation: Nineteenth-Century Patterns in We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프린스턴, 1986)에 실린 이라 카츠넬슨의 「Working-Class Formation: Constructing Cases and Comparisons」는 이에 관한 유용한 안내를 제공한다.

[6] 특히 이러한 관심은 1950년대 동안 지역개발연합[the Regional Plan AssociationㆍRPAㆍ1922년 설립된 비영리 기구로 뉴욕ㆍ뉴저지ㆍ코네티컷 3개 주 31개 카운티의 경제적 경쟁력과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했다]의 후원을 받은 일련의 연구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요약된 것은 에드가 M. 후버와 레이몬드 버논이 쓴 『Anatomy of a Metropolis』(케임브리지, 1959)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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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드림디퍼드] 내전으로 향하는 우크라이나: 반동적인 전투에서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링크)
②[좌익반대파] 오직 노동자 운동 만이 우크라이나에 이는 전쟁의 불꽃을 멈출 수 있다(링크)
③[자율노동조합] 키예프 정권과 동부 군사정권 모두 반대한다!

※의역이 많고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번역에 대한 지적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대괄호 안은 이해를 위해 추가한 것입니다.


키예프 정권과 동부 군사정권 모두 반대한다!
동부의 충돌에 대한 키예프 자율노동조합 성명서
키예프 자율노동조합(AWU)|2014년 5월 14일ㆍ링크

노동 인민 일부분을 다른 부분에 맞서 적대감을 갖게끔 속임수를 쓰고 있는 [우크라이나] 지역과 러시아의 지배계급 집단들 간의 대립이 계속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내전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마리우폴 사건은 이러한 대립의 전형[적 결과]이다. 전투원과 시민, 징집된 병사와 장교, 뿐만 아니라 자원한 군인들까지 대립하는 양편의 많은 사람이 '반테러 작전'의 결과로 고통받아 왔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위기다. 정부는 모든 시위를 반(反)마이단 운동 취급하고 있다. 군인들은 자신이 누구를 쏘는지 알지 못하고 총에 맞는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죽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대립하고 있는 양편은 자신의 '보병'들에 특유의 냉소주의를 조장하고 있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맞는 공통의 어떤 것도 지니지 않은 이념을 위해 싸우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대와 다른 무장 단체들은 조국애와 '국가의 통일'이라는 무의미한 이념을 위해 싸우고, 분리주의자들은 국가의 건설 또는 러시아와의 통합을 위해 싸운다. 이 모두는 관료ㆍ경찰ㆍ판사ㆍ교도소ㆍ자본가와 가난한 이들이 함께 존재하는 부르주아 민족국가를 목적으로 할 뿐이다.

이 두 반동적 운동의 충돌 결과로 지금 이미 수십 명이 희생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군사적 무능, 다른 한편으로는 전투원들의 부패가 피해를 크게 가중시키고 있다.

반마이단 운동의 고위 관계자들은 보통 퇴역 군인들과 이에 더해 전 정권에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는 고위 경찰간부들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독재적인 법집행과 강제력에 의한, 진정 군사정권의 방식이 우크라이나 동부 '인민공화국'을 이끈다.

이 운동 내 파시스트 단체와 범죄자의 존재는 매우 반동적이고 동부 지역 노동 인민의 계급적 이해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군사정권의 전반적 특징을 주조한다.

친러시아 선동에서는 분리주의 전투원들이 반파시즘 저항 투사로 묘사된다. 이러한 선동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개시한 '반테러 작전'은 '라이트 섹터
[프라비 섹토르ㆍPravy Sektor]'의 우크라이나 파시스트가 한 공격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공격과 다른 많은 사건들에서 이들의 역할은 불안을 가중시키게끔 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다.

'라이트 섹터'는 몇몇 극우파 단체의 형편없는 동맹이다. 그것의 사회적 구성은 극우 청년들과 범죄자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민공화국' 전투원의 사회적 구성도 주로 10대ㆍ깡패 등 하층계급의 일부로 비슷하게 이뤄져 있다. 현재 운동에서 '라이트 섹터'의 대중적 매력은 매우 낮다(완전히 신뢰를 잃은 우크라이나공산당ㆍCommunist Party of Ukraine보다도 낮다). 게다가 '라이트 섹터'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비공식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태다.

국제 사회에서 계속되는 거짓 반파시스트 선전 때문에 '라이트 섹터'는 강력하게 조직돼 우크라이나 정부의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전혀 사실이 아닌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얻었다. 물론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파시스트 운동의 문제를 과소평가하길 바라지 않는다. 극우파의 폭력, 특히 좌파를 표적으로 삼는 폭력은 야누코비치 정권 시절인 2012년 이미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AWU
[자율노동조합]는 반복해서 강조했다. AWU 활동가 역시 공격받았었다. 우리 동지 중 한 명은 네오나치에 의해 칼로 공격받아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갔었다. 또한 올해 노동절 행진 장소도 극우파와의 충돌 위협 때문에 변경됐었다.

우크라이에서 파시스트 운동에 맞서는 것은 오랫동안 아나키스트 운동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 서구에서 '반파시스트'를 자처하는 많은 스탈린주의 후예들과 달리 우리는 이 문제를 인터넷이 아닌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와 우리 동지들은 노동절 아나키스트 행진을 사회주의ㆍ반자본주의ㆍ반민족주의를 주제로 키예프와 카리프, 지토미르에서 조직해냈다.

아나키스트는 나치와 우익 자유주의 정부에 양보할 의도가 없다.
[5월 12일 현재] 여당인 '바티키프쉬나[조국당]'에 맞서 급진 좌파적 저항 캠페인을 조직한 것도 바로 AWU다.

우리는 정부와 자본, 그리고 이들을 옹호하는 극우파에 맞선 싸움을 계속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정부ㆍ교회ㆍ경찰 구조와 파시스트 운동이 하나의 세력으로 단결했을 때 100배는 더 어렵다. 돈바스의 상황이 바로 그렇다.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군대'를 이끄는 것은 러시아 정부의 첩자이자 과거 차르 백위군의 열렬한 지지자인 이고르 스트렐코프다. '돈바스 정교회(Orthodox donbass)' 운동의 제안자로 국민투표를 제안한 이는 소비에트 해체 후 네오나치 운동을 이끈 것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바르카쇼프와 협력하고 있다. 반마이단 운동의 활동가들은 유럽 파시스트의 또다른 상징인 알렉산드르 두긴을 존경하며 그와 연대를 표하고 있다.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정부'의 부의장인 데니스 푸실린은 공개적으로 1917년 혁명을 '유혈 참사'로 부르며 차르를 끝장낸 것에 대해 유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선언과 문서들은 사회주의적 구호와 맞지 않는다. 그 문서들엔 계급 간 평화와 '소기업'의 이익에 관한 문장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동부의 범죄자들과 파시스트 군사정권은 현재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납치와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인 적이다. 이는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노동계급을 물리적으로 제압하려는 지배계급을 양편의 파시스트들이 돕고 있다는 데서 입증됐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파괴를 겪어야만 할 것이냐다.

우리는 키예프 정부가 지금 즉시 도시에서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동부 군사정부는 평화적인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전선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것, 어떤 역경에도 혁명적 노동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우리는 영토를 지키거나 독립하기 위한 무의미한 싸움이 아니라 평화와 연대를 통해 계급의 공통된 이해를 중심으로 전선을 구축할 것을 우리 우크라이나 노동 인민 동지들에게 호소한다. 계급투쟁은 권력의 재분배를 위한 싸움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정부와 분리주의자의 대립에서 누가 승리하든 그것은 우리의 패배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무엇보다
[양편 모두를] 거부하는 이유다. 정부의 결정을 무시하고 군사적 대결을 포기하는 것. 혁명적 노동운동과 파업을 조직하는 것. 바로 이것들이 우리를 이용하는 전쟁에 맞서 싸울 무기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급진 좌파 조직과의 국제적 연대에만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일어서지 않는다면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상품도, 주인도, 국가도, 국경도 모두 반대한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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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드림디퍼드] 내전으로 향하는 우크라이나: 반동적인 전투에서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링크)
②[좌익반대파] 오직 노동자 운동 만이 우크라이나에 이는 전쟁의 불꽃을 멈출 수 있다
③[자율노동조합] 키예프 정권과 동부 군사정권 모두 반대한다!(링크)

※의역이 많고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번역에 대한 지적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대괄호 안은 이해를 위해 추가한 것입니다.


오직 노동자 운동 만이 우크라이나에 이는 전쟁의 불꽃을 멈출 수 있다
좌익반대파|자카르 포포비치|2014년 5월 12일ㆍ링크

※자카르 포포비치(Zakhar Popovych)는 우크라이나 정치단체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의 지도적 회원이자 경제학자다. 좌익반대파 홈페이지는 gaslo.info.

2014년 5월 오데사에서 참혹한 충돌과 '노동조합 본부'의 화재로 4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폭력 행위는 대립하는 양편 모두에서 비롯했고 여기에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 사태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선 매우 신중한 조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단지 처음 받은 느낌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건은 소위 친러시아 활동가들이 '우크라이나의 단결'을 위한 행진을 방해하면서 폭력이 유발된 것처럼 보인다. 5월 2일 전 오데사에서는 양편 모두 시위를 하기 위해 반대자들을 훼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행진 방해는 분명히 공격적인 행보다. 전에는 친러시아 시위가 방해받는 일이 절대 없었다. 두 시위대가 서로를 향해 날릴 단단한 돌멩이와 포석에 각각 다가갔을 때였다.

그 순간 '친러시아' 진영에서 먼저 총격이 있었다고 증언한 목격자를 우리는 확보했다. 오데사 친러시아 운동의 일부인 '보로트바(Borotba)'조차도 총격을 먼저 시작한 것이 그들 편은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는다. 대부분 자동소총이었지만 게중에는 산탄총도 있었다.

당시 오데사 시내 소보르나야 광장의 '우크라이나의 단결' 시위대가 자신들 행진이 '친러시아' 진영에 의해 가로막혀있는 동안 총을 쐈다는 확실한 목격자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관총이 발포됐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 첫 사망자와 심각한 부상자가 기관총 사격에 의한 것이다. 목격자는 '친러시아' 진영에서의 총격이 경찰의 뒷편에서 그들의 비호 아래 이뤄졌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목격자가 충돌에 참여했었고 사태를 매우 감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 이 사태에 대한 공정하고 편견 없는 조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편 총격 이후 '친러시아' 진영은 '친우크라이나' 시위대에 의해 잔인하게 구타당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심각하게 부상당했고 몇몇은 어쩌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친우크라이나' 시위대는 오데사 주요 역 가까이의 쿨리코포 폴 광장의 '친러시아' 농성장을 야만스럽게 습격해 때려 부쉈다. 수분 만에 천막이 불타버렸다. 우리는 당시 '친우크라이나' 시위대 또한 총을 사용했다는 확실한 첫 목격자 또한 확보했다. 그 다음 '친러시아' 시위대는 '노동조합 본부'로 몸을 피했다. 밖에서 던져진 '화염병' 때문에 건물에 불이 붙었다(불이 건물 안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이론은 매우 의심스러운 주장이다). 물론 우리는 경찰 첩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의 가능성을 제외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불길 속에서 숨이 막혀 죽거나 불에 타 목숨을 잃었다. 어떤 사람은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목숨을 잃었다. 어떤 이는 화재 대비 사다리와 줄을 사용해 탈출했다. 제정신을 차리고 불길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나선 '친우크라이나' 시위대가 있었다는 목격자도 있다. 그들은 사다리를 몇몇 창문에 대고 몇몇 창문 앞에는 땅과 충돌 시 충격을 줄이기 위한 타이어를 가져다 놓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사다리를 이용해 불길에서 탈출한 사람들과 이 사다리를 설치한 이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증거 또한 있다. 불길로부터 벗어난 '친러시아' 시위대는 항복하길 원치 않았고 탈출을 위한 싸움을 시도했다. 몇몇 목격자는 저항하지 않은 몇몇 '친러시아' 시위대가 구타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증거들이 모순되기에 사건에 대한 편견 없는 조사 없이 무엇이 일어났는지 확신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년여 전 공동행동에 참여했던 급진 좌파 활동가들이 지금은 서로의 목숨을 앗아간 양편의 행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27세 프로그래머이고 '보로트바'의 회원인 안드레이 브랴이프스키는 '노동조합 본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친러시아 준군사조직인 '오데스카야 드루지나 (Odesskaya druzhina)'에 소속돼 있었다. '반파시스트' 축구 팬 운동에 참여했던 또다른 청년은 소보르나야 광장에서 총격을 당했다.

모든 민족과 인종에서 우크라이나 노동계급 이해와 관련 없는 것이 명백한 전쟁에 좌파 활동가들이 총알받이 보병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좌파는 마이단 동안의 키예프 전투에서 경찰에 맞서다 목숨을 잃었었다(33세의 아나키스트 세르게이 켄스키가 2월 20일 인스티투츠카 거리에서 살해됐다는 것을 기억하라). 지금 반마이단 편에서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좌파들 또한 살해당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 적대적 운동 중 어느 것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고 그 때문에 두 운동은 계속해서 사회적ㆍ계급투쟁적 의제로부터 민족문화적인, 민족적인, 마침내 애국주의적인 것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양편에는 사회보장과 노동자 권리에 관한 모든 쟁점보다 우크라이나 국가의 존재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이 더 중요하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참여하는 곳에서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동부 또는 서부에 상관없이 우크라이나 모든 지역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산업도시 크리프이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의 반마이단 세력이 마이단 활동가를 공격하고 구타하기 위해 용병을 사용하려 했을 때 광부들의 자기방어 조직은 선동가들을 진압하는 방법을 손쉽게 발견했고 그 누구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크라스노돈(루간스크 주)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 봉기 기간 도시를 자신의 통제하에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을 때 어떤 사망자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반마이단 또는 친마이단 세력 중 그 누구도 자신을 이용하게끔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친러시아'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티모센코 또는 다른 어떤 부르주아 후보 지지에 자신들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크리프이리와 크라스노돈에는 노동자가 있지만 오데사ㆍ도네츠크ㆍ루간스크 또는 슬라뱐스크나 크라마토르스크의 거리엔 조직된 노동자가 없다. 대체적으로 노동자는 그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중부에서는 독립 노동조합과 연관된 몇몇 징조를 찾았지만 동부의 운동에 노동조합이 연관을 맺고 있다는 신호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우크라이나에 불타오르는 내전의 비극에서 핵심이다.

우크라이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균질하다. 우크라이나 전국 각지에 많은 러시아 민족과 우크라이나 민족이
[섞여] 있다. 그리고 그들을 싸우게 만드는 것은 전국 각지에서 민족적 대립이 벌어짐을 뜻할 것이다. 마이단과 반마이단 또는 소위 '친우크라이나'와 '친러시아' 운동의 사회적 구성을 추측해봤자 아무런 소용없다. 그것은 거의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물론 룸펜과 푸티부르주아적 요소까지 양편 모두에 존재한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마이단과 반마이단 양편에 참여한다.

여기엔 또한 많은 우파와 매우 약한 노동자 운동이 공존한다. 소련의 스탈린주의는 우리 나라에서 노동자의 자기-조직화 전통을 파괴했고 독립적인 노동운동은 현재 겨우 시작하는 수준이다. 그러함에도 이 단계는 중요하며, 총파업이 시위의 의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보여줬다.

그리고 이 전쟁을 중단시킬 유일한 힘은 권력으로부터 올리가르히 몰아내는 것과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연대한 노동자들의 운동에 있다. 우크라이나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경찰이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누구도 보호할 수 없음이 오데사에서 입증되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파업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자기방어 조직을 구성할 것(루간스크에서처럼)과 크리프이리의 '광부' 수백 명처럼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만들 것을 호소한다.

마이단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차이

우리는 이 정부를 절대 지지하지 않아 왔다.

우리는 정부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결코 지지하진 않는다. 여기서 이 정부를 군사 정부로 간주해선 안되는가라는 또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아직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키예프는 군사정권은 아니지만 슬라뱐스크는 군사정권이 맞다. 키예프에서 당신은 분명히 적기를 들고 어떤 종류든 선전전단을 나눠주며 시위를 벌일 수 있다. 노동절 시위는 이를 명백히 보여줬다. 키예프에선 모든 민주적 자유가 보장되지만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에선 아니다. 아마 당신은 언론인과 평범한 사람들의 잦은 납치사건에 관해 들었을 것이다. 부활절에 나는 키예프로 표시된 등록증 때문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사람들로부터 알몸 수색을 당했다. 나는 보석금을 내준 지역 주민에 의해 무사할 수 있었다. 내 어떤 친구는 슬라뱐스크의 SBU(the Security Service of Ukraineㆍ우크라이나 보안국) 건물 지하 어딘가에 아직도 갇혀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을 위한 감옥으로 만들기 위해 행정관서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키예프 중앙정부를 살펴보자면 이 정부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기도 하지만 서부와 중부에서도 사실 많은 신뢰를 받고 있진 않다. 마이단은 정의, 우선순위의 첫째로 사회정의라는 사상에 고취돼 일어난 대중운동이었다. 우리가 1월과 2월 마이단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할 때 사람들은 이제 곧 야누코비치가 물러나 부패를 끝장내고 사회적 기준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사람들은 새 정부가 바로 야누코비치처럼 긴축정책과 복지의 삭감을 시행할 수 있다는 발상에 분노했다. 누구도 이를 믿지 않았지만 정부가 IMF 지원을 받기 위해 현재 하려고 하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정부는 지금 그 관심을 국가안보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히스테리는 마이단과는 그 어떤 관계도 없다.

이 정부는 한때 마이단에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정부는 분명 마이단이 받아들일 수 잇는 최악의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더 이상 친마이단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2013년과 2014년 사이 겨울에 있었던 우리가 알고있는 마이단 운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는 이제 마이단의 사회정의 의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정부를 마이단의 진정한 정수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새로운 마이단, 노동자들의 마이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프라비 섹토르'가 군대를 통제하거나 거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몇몇 우파 정당 회원이 개인적으로 군대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그 속에서 작은 소수파일 뿐이다. '프라비 섹토르'는 거의 러시아 TV에만 존재하는 매우 작은 정당이다. 그러나 "러시아 침략으로부터 우크라이나 민족을 방어하자"는 민족주의적 의제로의 전환이 급진 우파를 더욱 더 중요하게, 그리고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만들 것이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동부의 운동

동부의 운동이 키예프 마이단보다 더 적은 규모이며 덜 야단스럽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그들은 지난달 도네츠크에서 강경파 1500명 이상이 참여한 한 대중적 가두행진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그 행진에는 매우 적은 전단과 신문만 배포됐고 사실상 어떤 토론도 없었다. 한달 전 슬라뱐스크와 크라마토르스크의 대중 시위에서조차 공개적인 토론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현재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군대의 통제하에서 그와 같은 장소는 분명히 없다. 그들은 토론 대신 위성으로 중계되는 러시아 TV를 보는 공공장소를 만들고 있다.

러시아 시민이, 심지어 무장 단체까지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들은 물론 지역 주민이다. 예를 들면 크라마토르스크에서는 두 개의 주요 지역 범죄단체가 '자기방어' 의용군의 지도적 역할을 맡고 있다. 슬라뱐스크 '그린맨' 부대에서 다수는 러시아 시민이고 몇몇은 러시아 보안군에서 퇴역한 군인 출신이다. 실제로 러시아 관계자 누군가가 개입하고 있을까? 물론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러시아 당국의 개입은 확실해 보인다.

다른 한편 운동이 시작될 때 조직화에 나선 주요 세력이 러시아 정부가 아니라 지역 올리가르히인 것은 분명하다. 야누코비치ㆍ모길레프ㆍ프숀카 등이 얼마만한 규모로 개입했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크라이나의 주요 올리가르히이고 사람들이 '돈바스의 주인'이라고 부르는 아흐메토프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동의에 의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물론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특히 슬라뱐스크 군사 쿠데타를 지도한 것은 우파 배타적 애국주의자들이다.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군대 사령관은 의식적인 군주제 지지자이고 데니킨
[러시아 혁명 당시 백군의 지도자]의 열렬한 팬인 스트렐코프(전직 FSBㆍ러시아연방보안국 요원인 지르킨)다. 이 사람들 모두는 우크라이나 독립이 되돌려야 할 역사적 실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이해한 대로 이것은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에게, 심지어 돈바스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운동을 조금도 반파시스트 운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 운동은 마이단 운동보다 덜 파시즘적이지 않다. 내게는 지금 이들이 행동하는 방식에서 더 파시스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주일 전 도네츠크에서 이 '반파시스트' 시위대가 '친우크라이나'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공격했던 것을 떠올려보라. 금속봉으로 잘 무장한 300명의 사람들이 800여 명의 더 강고한, 하지만 조금의 무장도 하지 않은 친마이단 시위를 공격했었다. 친마이단 편에서 모두 12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어 여전히 병원에 있고 150명 이상이 구타를 당했다. 이 '반파시스트'들은 이른바 그들이 부르기로 '마이둔스(maiduns)'를 해산하고 구타를 끝낸 후 바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원문에는 DNR이라고 쓰여있는 데 DPR의 오기인 듯싶다] 본부로 돌아갔다. 자신들을 숨기려는 어떤 노력도 없이 말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좌파는 이들의 배타적 애국주의 의제를 부추기고 있으며 이 운동을 어떠한 국제주의로도 끌어오는 데는 실패했다. 지금 이들은 러시아 제국주의가 미국보다는 덜 나쁘기에 "우리는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지할 것"이라며 자신을 옹호하고 있다.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좌파와 마이단' 콘퍼런스 결산

우크라이나에서 소위 '유로마이단' 운동은 복합적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한층 더 복잡하다. 우리는 마이단에 대한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4월 12일 키예프에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1]. 물론 우리는 모든 점에서 마지막 결론에 도달하진 못했다. 그러나 나는 주요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해 보겠다.

▶ '마이단'은 분명 좌파적이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좌파적 개념인 사회정의와 사회 변혁이라는 발상에 매우 예민했다. 마이단의 많은 사람은 매우 급진적인 좌파 구호인 올리가르히에 대한 누진세 적용, 공개적인 회계, 직접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노동자 통제와 심지어 부르주아지의 선거권 제한(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부자들의 선출과 정부 요직 임명 금지를 제안했다)까지도 지지했다.

▶ 좌파의 주요 문제는 자신의 사상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력인 것으로 보인다. 좌파들은 흩어져 있다. 몇몇은 대중운동과 그 자신을 철저히 떨어뜨려 놓고 있고 다른 대부분은 그
[대중운동] 속에 녹아 사라졌다.

주요 실패는 협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보로트바 활동가 데니스 레빈이 마이단에서 네오나치에게 공격받던 시간에 그곳에선 두 개의 다른 좌파 행사가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300m 떨어진 마이단의 중심부에선 '직접행동' 동맹에서 온 학생 30명이 학생의 자기조직화에 관한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500m 떨어진 곳에선 다른 좌파와 반파시스트 200명이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사실상 혼자 자신의 노동조합 전단을 나눠주던 데니스 레빈을 네오나치가 공격한 것은 놀랍지 않다. 그가 속한 보로트바는 그를 돕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와 함께하기 위해 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2014년 5월 8일, 키예프에서

[1] "국가적인 배타적 애국주의와 성차별주의, 동성애 혐오증, 인종차별을 규탄하고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개입과, 좌파와 노동조합 활동가 또는 비무장한 시위대를 향한 모든 폭력에 항의하기 위한 좌파의 조직화와 계획"을 위한 이 콘퍼런스에는 크리프이리와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온 자유노동조합연맹(the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 소속의 광부 몇 명을 포함해 다른 조직의 활동가 80명이 참여했다. 인터내셔널뷰포인트(International Viewpoint) 협력자 캐서린 사마리(Catherine Samary) 또한 발표했다.

Posted by 때때로

5월 25일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율리아 티모센코가 아닌 페트로 포로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우크라이나 최대 올리가르히 중 하나인 포로셴코는 유명한 초콜릿 회사 로셴의 회장이다. 지역당과 조국당(바티키프쉬나)의 두 날개를 이용해 우크라이나를 공고히 지배해온 올리가르히가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야누코비치 실각 전 EU와 러시아 사이에서의 좌충우돌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올리가르히다. 야누코비치가 러시아에 맞서려 할 때 푸틴은 포로셴코의 로셴 수입을 전면 금지했었다. 2009년 러시아와의 수상쩍은 가스 협정에서 보인 티모센코와 바티키프쉬나의 우유부단함과 갈팡질팡은 포로셴코가 전면에 나서게끔 했을 것이다. 그 사건으로 감옥에 갖힌 티모센코는 (주로 EU와 서방 정치인들에 의해) 야누코비치 독재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지만 다른 한 편 그녀 또한 부패한 정치인의 일부라는 증거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티모센코의 '의외'의 추락은 이미 '예상'됐던 것 중 하나다.

포로셴코의 당선으로 러시아와의 충돌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 배치한 군대 4만여명의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등 동부의 반란 세력이 러시아와의 연관성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는 것과 달리 러시아는 그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5월 30일 있었던 EUㆍ우크라이나ㆍ러시아 3자 에너지 협상에서는 가스 공급을 둘러싼 갈등에 어느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다.

그러나 동부에서의 군사적 갈등은 5월 2일 오데사에서의 충돌 이후 더 강화되고 있다. 애초 대중의 운동이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형식상 대중운동 사이의 충돌이 현재는 군사적 충돌로 비화하고 있다. 이 끔찍한 충돌의 한 편인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을 반파시스트 운동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박노자 교수는 동부의 운동을 "반미 반파쇼 투쟁"이라고까지 말한다. 따라서 이 운동은 "나름의 진보적 함의와 가능성"을 지녔고 박 교수에게 러시아 좌파의 임무는 "그들을 도와주고 양쪽 계급동맹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첫째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을 비롯한 동부의 운동을 '반미 반파쇼 투쟁'의 일부로 부를 수 있다면 푸틴 또한 '반파쇼 투쟁'의 일부로 봐야 할 것이다. 크렘린궁의 공식적 부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퇴역군인 내지 정보국 요원들의 개입 증거가 제시되고 있다. 러시아 파시스트 운동의 대부 알렉산드르 데긴과 동부 민병대들의 연관성도 폭로되고 있다. 동부 운동을 '반미 반파쇼 투쟁'으로 고려하는 건 말도 안되는 것이다. 둘째 러시아 좌파가 도와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동부의 '독립 운동'을 돕는 것을 뜻한다면 매우 위험한 얘기다. 이는 우크라이나 노동계급의 단결을 파괴하고 친러시아 민족주의와 친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충돌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셋째 "양쪽 계급동맹의 구축"은 매우 모호하다. 왜냐면 동부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으로서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개인으로서, 파시스트적 애국주의에 매몰된 개인으로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즉 이러한 계급동맹은 현실에서 친러시아 애국주의 세력과의 동맹으로만 가능하다. 실제로 러시아 파시스트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파쇼 투쟁'에 연관을 맺고 있다.

5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의 충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글 세 편을 옮긴다.

이 세글에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가장 큰 차이는 우크라이나 외부의 좌파인 드림디퍼드의 첫 글과 다른 두 우크라이나 내 좌파의 글 사이에 있다. 드림디퍼드(www.dreamdeferred.org.ukㆍ링크)는 키예프 정권(포로셴코 집권 전)을 파시스트 군사정권 취급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내 좌파인 좌익반대파(gaslo.infoㆍ링크)와 자율노동조합(avtonomia.netㆍ링크)은 서부와 중부의 파시스트 위협은 과장됐거나 진정한 사정을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본다. 좌익반대파 활동가는 서부보다 동부가 더 파시스트에 가깝고 거의 확실한 군사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자율노동조합은 파시스트가 야누코비치 시절인 2012년경부터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글 세편은 모두 "늑대는 문 밖, 우크라이나 외부에 있"고 외부의 "이 제국주의 경쟁 체제에서 좋은 제국주의란 없다"는 점에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드림디퍼드는 우크라이나가 분할된다면 "노동계급 인민이 큰 값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율노동조합은 이 둘로부터 독립적인 "혁명적 노동운동과 파업을 조직하는 것, 바로 이것들이 우리를 이용하는 전쟁에 맞서 싸울 무기"라고 힘주어 말한다. 좌익반대파는 좌파에 "협조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며 노동계급 운동 건설을 위해선 좌파의 공동행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우리가 사태의 전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열쇠다.

포로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된 상황에서 추가적인 사건의 추적과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①[드림디퍼드] 내전으로 향하는 우크라이나: 반동적인 전투에서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
②[좌익반대파] 오직 노동자 운동 만이 우크라이나에 이는 전쟁의 불꽃을 멈출 수 있다(링크)
③[자율노동조합] 키예프 정권과 동부 군사정권 모두 반대한다!(링크)

※의역이 많고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번역에 대한 지적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대괄호 안은 이해를 위해 추가한 것입니다.


내전으로 향하는 우크라이나: 반동적인 전투에서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
드림디퍼드|타시 시프린|2014년 5월 5일ㆍ링크


친우크라이나 시위대가 오데사의 노동조합 건물에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건물 안의 반마이단 시위대 수십 명이 불에 타 숨졌다. [Reauters]

5월 2일 친러시아 '반마이단' 시위대와 친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활동가 사이에 광범위한 충돌이 벌어진 이후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의 사망자 수가 46명에 다다랐다.

친우크라이나 시위대가 반마이단 활동가들이 점거한 건물에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르면서 끔찍한 결과에 직면한 것이다.

이후 반마이단 시위대가 장악한 동부 슬라뱐스크에서 우크라이나군이 통제권을 되찾으려 하면서 최소 수십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충돌의 무시무시한 확대는 우크라이나를 갈래갈래 찢어놓을 것처럼 보인다. 거울로 마주본 것 같은 반동적 전투는 경쟁적인 두 반동적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양편에 이를
[우크라이나의 분할] 강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내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

러시아가 몇 주 동안 4만 명의 병력을 국경에 배치해놓고 있으면서 전면적인 침략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미국도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국제적 긴장을 증가시키는 개입을 확대하고 있다.

입증

지난 2월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실각과 뒤이은 키예프의 새 정부 구성 이후 우리가 드림디퍼드에서 제시한 분석이 최근의 암울한 사건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 분석에서 우리는 내전 위험을 경고했다. 실제로 우리는 2월의 그 글로 되돌아가 우크라이나 위기의 이번 단계가 시작된 지점과 당시 이미 내전 가능성을 걷잡을 수 없이 키우던 사태 전개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2014년 2월 야누코비치 퇴진 직후의 분석
야누코비치 실각에 슬퍼하지도, 새 정부와 파시스트를 응원하지도 말라(링크)


우리는 러시아에 뿌리를 둔 키예프의 새 친EU 정권에 반대하는 '반마이단' 운동의 시작을 보고했다. 그리고 유로마이단이 준군사조직 결성으로 타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의 반마이단 시위가 이미 그들 자신의 준군사조직을 어떻게 조직하고 있는지 전했다.

유로마이단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반마이단 운동은 러시아 국기와 지역 또는 옛 소련의 깃발을 들었다.

이 두 개의 추한 민족주의는 상처받은 우크라이나 노동계급에게 오직 더 큰 분열만 내놓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양편 모두에서 조직된 파시스트와 낡아빠진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반동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를 잃을 가능성과 나라가 피투성이로 해체될 위험성을 우리는 2월에 지적했었다.

현재 사망자 수가 증가하면서 키예프 정부는 남부와 동부 친러시아 준군사조직과의 전투를 위해 징집병을 복귀시키고 있다. 핵심에 파시스트를 포함한 유로마이단 준군사조직, 소위 '자기방어' 조직인 사무보로나(Samooborona)의 일부는 새로운 방위군, 실질적으로 특정 정파와 당파의 권력인 군의 일부로 통합됐다.

프라비 섹토르(Pravy Sektorㆍ극우파 연합)의 독립적인 파시스트 대원들 또한 우크라이나 '민족 혁명'을 위한 전투에 열정적으로 그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

분열과 파괴

그러나 우크라이나 보통 사람들에게 오직 분열과 파괴만을 가져올 유혈 충돌의 양편을 후원하는 것에 그 누구도 끌리진 않을 것이다.

유로마이단을 진보 또는 반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이에 대한 지지를 주장했던 몇몇 좌파가 있다. 시위대 다수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진심으로 바랐고 경제위기에 진정 분노했음에도 운동으로서 유로마이단은 진보적이지 않다고 우리는 드림디퍼드에서 주장했다.

대개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서부와 중부 지역으로부터 주로 지지를 받아온 친EU 유로마이단 운동은 남부와 동부 노동자와 손잡을 수 있는 노동계급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운동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외피를 썼고 이 운동에서 파시스트의 역할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유로마이단 시위의 확대, 특히 준군사조직의 발전에서 파시스트가 해온 중요한 역할을 드러냈다. 우리는 주류 언론보다 앞서 키예프 정부에 파시스트가 장관으로 입각했음을 폭로했다.

현재 또 다른 좌파는 광범위한 친러시아 그룹 또는 '분리주의자' 시위대와 그들의 경쟁자인 유로마이단을 모방한 준군사조직이 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검문소를 세우면서 이들에게서 어떤 구원을 찾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키예프 정부와 군사적 대결을 시작했다.

양편 모두 아니다

나는 이 암울한 전투에서 양편 어디든 지지하는 것에 맞서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키예프 정부의 합법성을 믿지 않으며 프라비 섹토르와 다른 유로마이단 준군사조직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그 지지자들 다수의 진정한 두려움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동부의 운동은 자신의 거울 이미지인 유로마이단보다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다.

유로마이단과 마찬가지로 반마이단 시위는
[지역간] 분열을 넘어 지지받을 수 있는 종류의 정치적 노동계급 요구를 명확히 표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반마이단에는 종종 스탈린주의의 그늘 아래 있는 러시아 민족주의가 만연하다. 러시아ㆍ소련 깃발이 눈에 많이 띄고, 검은색과 주황색 줄무늬로 된,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수여했던 훈장에 사용된 성조지의 리본
[Ribon of St. Georgeㆍ현대 러시아에서 군사적 용기를 상징하는 것.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념하며 수여된 훈장의 리본으로 사용됐다]이 운동에서 단결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는 우크라이나를 편입시켰던 위대한 러시아 제국의 나날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반마이단을 주도하는 친러시아 또는 러시아 민족주의 정치는 파시스트 단체에 최적의 조건이다. 반마이단 운동의 보다 혼란스러운 조건에서, 유로마이단에 존재했었던 것과 같이 세력을 규합한 파시스트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파시스트 단체 스보보다와 프라비 섹토르를 구성한 단체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파시즘과 반동

더 작은 규모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 나치인 러시아민족통일당(Russian National Unity Party)과 연관된'슬라브족의 단결(Slavic Unity)'과 같은 러시아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파시스트 단체가 있다. 러시아에 뿌리를 둔 이들 파시스트 단체 몇몇은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그 직후 유로마이단 시위가 폭발했다.

지금 그 단체들이 반마이단에 집중하고 있을 수 있다. 왕정 지지자들의 검정과 황금ㆍ백색 깃발이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를 통합한 '새로운 러시아' 또는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를 장악한 '대러시아'라는 구호와 함께 극단적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반 유대주의 흐름이 또다른 인종주의ㆍ동성애혐오주의 요소와 함께 반마이단 운동 구호를 오염시키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반마이단 운동은 스스로를 '반파시스트'라고 칭하길 선호한다. 그러나 이는 반동적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반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 만큼 매우 허황된 소리일 것이다.

진정한 반파시스트 운동은 그 경쟁자인 민족주의자 또는 배타적 애국주의자 이념을 촉진하는 것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일일이 셀 수 없이 많은 무장 준군사조직을 구성한 청년들의 작은 단체들에 의해서도 아니다. 이는 오직 스보보다와 프라비 섹토르 세력의 거울 이미지만 만들어낼 뿐이다.

특히 가짜 '반파시스트' 수사와 진짜 반유대주의의 일그러진 조합은 프라비 섹토르의 나치가 유대인 또는 유대인이 조정하는 조직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만들어낸다.

반마이단 운동에서는 유로마이단의 지도자들과 같은 잘 알려진 정치적 인물이 부족하다. 몇몇 도시에서 반마이단 시위가 매우 크게 벌어졌지만 통일된 요구안 또는 키예프 독립광장('마이단'의 원본)과 같은 저항의 중심은 불분명하다.

적ㆍ청ㆍ흑 깃발을 든 '도네츠크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Donetsk)'이라고 알려진 것을 포함해 돈바스 인민의용군(the Donbass People's Militia), 동부 전선(the Eastern Front), 남동부 군대(the South-Eastern Army) 등 일련의 단체와 민병대가 동부와 남부의 주들에 등장했다.

이들은 이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을 지도자로 내놓았다. 투표로 뽑은 것도 분명 아니다. 그들은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패거리다. 과거에 피라미드 사기꾼이었지만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의 '의장'에 앉은 데니스 푸실린도 거기에 포함된다.


돈바스 인민의용군(the Donbass People's Militia) 지도자 파벨 구바레프(Pavel Gubarev)가 과거 파시스트 준군사조직 러시아 민족단결단(Russian National Unity)과 함께하고 있다. 앞줄 왼쪽에서 셋째다(뒷쪽 문의 문양은 러시아 파시스트의 상징으로 쓰인다). [Pauluskp]

돈바스 인민의용군은 파벨 구바레프(Pavel Gubarev)가 이끈다. 그는 파시스트 준군사조직 러시아 민족단결단(Russian National Unity)과 우크라이나 진보사회주의자당(the Progressive Socialist Party of Ukraine)의 전 회원이었다. 우크라이나 진보사회주의자당은 이름과 달리 러시아 파시스트 알렉산드르 두긴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유라시안 청년동맹(the Eurasian Youth Union)과 동맹을 맺었다.

슬라뱐스크 '시장' 비야체스라프 포노마리오프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군인이고 비누공장의 전 경영진이다. 그는 자신의 민병대 지지자들을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특히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어떤 무명의 무장 강도는 4월 포노마리오프의 명령으로 로마인
[집시] 가족의 집을 공격해 도둑질 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친우크라이나 활동가들이 프라비 섹토르 전투원들과 함께 5월 2일 오데사의 참혹한 충돌에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수가 축구 훌리건 집단 '울트라'인 이들은 전투를 계획하기 위한 예행 연습으로 축구경기를 이용했다
[4월 27일 하리코프에서 드니프로와 메탈리스트의 경기에 모인 훌리건 5000여 명은 프라비 섹토르 활동가와 함께 키예프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대 300여 명의 평화로운 행진을 공격했다ㆍ링크]. 파시스트 단체들은 자신의 회원 중 한 명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그리고 오데사 반마이단 단체 '남부 전선(Southern Front)'은 5월 2일 '걱정스러운 거주자들'이 '오데사 방어에 함께' 참여해줄 것을 재촉하는, 러시아 파시스트들이 사용하는 검정과 황금ㆍ백색 깃발과 마스크를 쓴 전투원을 그린 이미지를 배포했다.


5월 2일 반마이단 활동가들을 동원하기 위해 사용한 이미지. 러시아 파시스트 집단이 선호하는 검정과 황금ㆍ백색으로 된 깃발이 담겨있다.

진정한 분노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반마이단 운동을 지지하거나 심지어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 모두 혹은 대다수가 파시스트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당연히 다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5월 2일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반마이단 활동가 가운데는 스스로 반마이단 운동에 참여한 주요 정당 지역당(Party of Regions) 소속 오데사 지방의회 의원과 조그만 주변부 좌파 단체인 보로트바(Borotba) 활동가도 있다.

반마이단 지지자 다수는 유로마이단 지지자 다수와 마찬가지로 경제 붕괴와 부패한 정치 제도에 대한 진정한 분노 때문에 움직였다. 덧붙여 키예프국제사회연구소(the Kiev International Institute of SociologyㆍKIIS)가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 여덟 개 주에서 4월 둘째 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새 정부가 합법적이라고 믿는 사람의 수는 기껏 세 번째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키예프 정부는 유로마이단 여파로 집권했다. 그런데 운동은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집중돼 있고 문화와 경제에 있어 러시아와 강하게 연관돼 있는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 지역에서 약간의 지지만 얻었다.

준군사조직이 핵심 건물을 점거하는 것에 대해 이 조사의 12% 만이 지지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사실 조사에서 표현된 가장 큰 걱정거리 두 개는 '약탈 확대'(43%)와 경제 붕괴(39%)였다. 내전 위협(32%)과 월급ㆍ연금의 미지급(25%)이 그 뒤를 따랐다.

이러한 두려움은 서부와 중부 인민들 역시 공유할 법한 것이다.

또한 눈에 띄는 것은 여론조사가 우크라이나의 경제와 정치인 대다수를 조정하는 소수의 올리가르히와 실질적으로 대결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24%가 올리가르히 재산의 국유화를 지지하고 또다른 41%는 올리가르히가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재산의 국유화에 찬성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러나 동부에서 유로마이단과 친러시아 운동 모두는 우크라이나 전역의 노동자를 단결시킬 수 있는 정책과 요구를 제시하지 않았다.

견고한

그들은 전통적인 정치적 분할속에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는 예전에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의 두 날개로 동맹을 맺은 정당들에 대한 투표로 표현됐다. 그중 한 편은 이익이 EU에 달렸고 다른 한 편은 러시아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현재 이 출구 없는 정치는 군사적 활동으로 대치되고 있다. 이는 그 자신의 동학을 지니고 있다. 형식적 국가구조가 어찌할 도리 없이 그 내부로부터 붕괴되는 것으로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

유로마이단 운동은 야누코비치 실각 이후 흩어졌지만 자위를 위한 준군사 조직과 프라비 섹토르 세력은 해산하지 않았다. 몇몇 도시에서 그들은 경찰이 있든 없든 '순찰'을 하고 있고 거기에 강도질을 벌이고 구타와 침입을 자행하며 인종적 공격과 정치인ㆍ정부 관료에 대한 습격을 하고 있다.

인권단체 '개인에 대한 범죄정보 그룹(the Information Group on Crimes Against the Person)'은 지역 신문에 보도된 이런 사건들에 대한 목록을 수집해 왔다. 이들은 또한 지금까지 반마이단편에 의해 자행된 폭력적 공격행위의 수가 더 적은 데 주목한다.

우크라이나 서부와 동부에서 정부 청사와 경찰서는 어느 쪽 단체에 의해서든 그들을 포위 공격한 이들에 의해 손쉽게 점령돼 왔다. 키예프 정부는 동부에서의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

늑대는 문 밖에, 우크라이나 외부에 있다. 러시아를 한편으로 하고 미국과 EU를 한편으로 하는 주요 제국주의 세력은 오랫동안 제국주의 전장으로 피흘려온 우크라이나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 인민에게 도움이 될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았다. 양편은 오직 그 자신의 자본주의 블록의 이익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비용을 치를 세계의 분할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전략적ㆍ경제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러시아는 대규모 군사적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 4만여 명의 병력을 국경에 모아 언제든 침략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으로 대규모 파괴와 참혹한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다.

미국과 EU 편은 주로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곳이 어디에 있든 자신의 제국주의 '뒷마당'이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이해관계 수준에 맞춘 미국과 EU의 지금까지 개입에서는 주요 무기로 탱크보다는 약간의 제재를 이용한 부드러운 방법이 사용됐다. 물론 이는 위기가 고조되면, 특히 러시아가 움직인다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은 미국 또는 EU가 군사적 행동으로 방향을 튼다는 신호에 맞춰 저항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공연하게 지지했었다. 우리는 스보보다의 파시스트 올레흐 티아니보크를 포함해 유로마이단 지도자들이 EU 관료, 미국 고위 대변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 캐서린 애슈턴(Catherine Ashton)이 올레흐 티아니보크, 비탈리 클리츠코, 아르세니 야체뉵과 함께 찍은 사진(링크)

▶미국 국무부 대변인 빅토리아 눌런드(Victoria Nuland)가 올레흐 티아니보크, 비탈리 클리츠코, 아르세니 야체뉵과 함께 찍은 사진(링크)

그리고 서방의 권력은 새 정부를 재빠르게 인정했다. 우크라이나 인민 대다수가 그 정부를 불법적이라고 여기고 있음에도 상관없이 말이다.

새 정부의 집권은 그 즉시 국제통화기금(IMF)의 270억 달러 차관 지원으로 축하받았다. 키예프 정부에 따르면 5월 1일부터 가스 요금 50% 인상을 포함한 긴축정책의 완료와 함께 지급될 차관이다.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이 대가를 지불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역시 군사적 행동을 포함시켰다. 존 브래넌 CIA 국장은 4월 키예프를 공공연하게 방문했다. 서방 언론에서는 부정적 언급 없이 취급했지만 말이다. 미군 공수부대가 폴란드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추측건대 미국은 우크라이나 군대에 '비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전쟁이 자신들에게 좋은 것이라고 여겼으면서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반대하는 미국과 유럽 지도자의 위선에 그 누구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개입을 핑계로 내놓은 덫에도 빠져선 안 된다. 이 제국주의 경쟁 체제에서 좋은 제국주의란 없다.

대립하는 양측이 경쟁하는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으면서 우크라이나 내 전투 사망자 수가 증가하면 선전 전쟁은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좋은 편은 없다. 반동적 준군사조직과 그들의 후원자이고 경쟁하는 제국주의인 워싱턴과 모스크바 모두는 분할 혹은 그 이상의 유혈사태라는 위협과 다른 어떤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국의 평범한 노동계급 인민은 나라가 분할된다면 큰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상연 옮김|에이도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도시다.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은 거대한 도시공간으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집중시킨다. 대규모로 형성된 노동인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투쟁의 저수지다. 사실 마오와 체게바라의 농민 게릴라 운동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실천이다.

도시는 생산 뿐 아니라 재생산 공간으로서 노동계급의 일상 전체를 조직한다. 가난의 비참은 열악한 도시환경에서 더 비극적이 된다. 오웰이 경험한 밑바닥 생활이 그랬다. 그리고 엥겔스 자신이 오랫동안 천착했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도시의 하층 노동계급 문제는 좌파에게 꽤 오랫동안 핵심적 과제였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노동운동과의 연대가 후퇴하던 자리에 빈민과의 연대를 배치했다. 철거촌에 세워진 골리앗(사실은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비계로 만들어진 앙상한 구조물)에서 학생과 빈민은 건설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조직 폭력배와 맞서 싸웠다. 꼭 90년대만은 아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태는 전쟁 후 성장을 거듭하던 서울이라는 대도시 이면에 빈곤이 축적되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조세희가 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1970년대 한국사회 하층 노동계급의 삶과 분노ㆍ좌절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비가 도시에서의 비정형적 반란에 주목하며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축적이 일어나고 조직되는 공간으로서 도시 자체에 돋보기를 들이밀은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비참과 반란을 자본의 축적과정과 반란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은 다른 좌파에게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곤 하는 '약탈에 의한 축적'은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다. 물론 이 '약탈'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정의를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약탈을 착취와 함께 자본의 두 무기로 고려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약탈'이라는 개념이 참으로 모호하게 정의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약탈'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문제들을 '다양성' 그 자체로 남게 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을 고려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약탈'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비역사적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 부분을 보라.

"도시 전역에 걸친 투쟁이 상징적이고 혁명적 지위를 얻은 1871년 파리 코뮌의 경우는 훨씬 더 복잡한 혁명운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봉기'라고 주장한다(마르크스가 처음에 이렇게 주장했고, 레닌이 한층 더 강조했다). 하지만 파리 코뮌에서는 일터에서 계급적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해방에 대한 욕망만큼이나 도시 자체를 부르주아지의 영유에서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파리 코뮌 당시 처음 발표된 두 가지 포고령이었다. 하나는 빵 공장의 야간노동 철폐이고(노동문제), 또 하나는 임대료 지불정지 명령(도시문제)이었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09쪽

1871년 파리에서의 반란과 혁명을 '노동문제'와 '도시문제'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애초 노동조합 쟁점에만 적용되는, 즉 작업장, 특히 대규모 공장 내에서만 적용되는 쟁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비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노동조합 쟁점으로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코뮌을 돌아보자. 파리코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제정 붕괴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봉기 이전 몇 년 간의 노동계급 투쟁의 상승을 고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정면으로 맞부딛친 첫 경험인 1848년 6월 봉기에서 노동자는 패배했지만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노동계급 투쟁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1860년대 들어서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1862년 나폴레옹 3세의 배려로 런던 만국박람회에 다녀온 노동자 대표단은 귀국 후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1864년 파리 인쇄공 파업은 1789년 대혁명 때 제정돼 노동계급의 단결을 금지해 온 르 샤플리에 법을 사실상 무력화 했다. 1864년 9월에는 인터내셔널이 만들어졌고 1865년 프랑스 지부가 파리에 건설됐다. 프루동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프랑스 인터내셔널 지부들은 1867년 주물공 파업 이후 더 급진화됐다. 파리코뮌 1년 전 1870년에도 노동계급 투쟁의 물결은 계속 고조됐다. 그해 4월 인터내셔널 조합원은 24만명을 넘어섰다. 즉 파리코뮌은 보불전쟁으로 인한 제정의 붕괴와 함께 노동계급 투쟁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모태가 1870년 9월 국방 임시정부 수립 후 인터내셔널이 주도해 건설된 파리 20구 감시위원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명백한 사실이다.

노동계급 투쟁의 이러한 동학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본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에서 비롯한 다양한 갈등은 수시로 불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투쟁이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의 수준에 다다르기까지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이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계급이라서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그 이전 몇년 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4년 2월 보스니아 반란은 투즐라의 다섯 개 기업 민영화에 반기를 든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됐다. 때론 노동계급 외부에서 시작된 사회적 운동이 노동계급을 자극해 투쟁을 더 결정적 국면으로 성장시키기도 한다.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 대표적 사례다 2011년 뉴욕 오큐파이 운동도 이후 시카고 교사 총파업과 월마트 등의 노동자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하비는 반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 도시에서의 지역적 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GM의 플린트 공장 점거 파업, 1984년 영국 탄광 파업 등을 예로 들지만 이는 오히려 정 반대의 사례다. 단호한 노동계급 투쟁이 지역적 차원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직 '공장' 노동자 만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물론 마르크스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여러 좌파가 '공장' 노동자 만을 특권화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파리코뮌 당시 파리 기업들은 오늘날 대규모 공장과 달랐다. 평균 다섯 명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이었을 뿐이다. '아르티클 드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공예품을 만드는 영세 작업장이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이 봉기를 '플로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으로 주장했다. 하비 스스로 예를 들었듯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80년대 후반 공장 외부의 쟁점인 '인두세 반대 투쟁'에 전력을 다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혁명이 오직 공장 안에서의 변혁을 뜻하는 것만도 아니다. 레닌은 사회주의 정치가 공장 외부에서 도입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노동조합 서기가 아닌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 혁명, 1970~1973년 칠레전투에서 노동계급 투쟁은 지역 차원에서의 치안ㆍ행정ㆍ사법ㆍ생필품 보급을 책임지는 데까지 발전했다. 반란과 봉기는 그랬을 때만이 '혁명'의 수준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비가 '도시권'을 강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 도시 노동계급에게 주거는 핵심적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이 문제를 핵심 고리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곤 한다. 1980년대 영국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핵심 고리 중 하나는 공공주택의 개인 소유로의 전환이었다. 하비가 강조하듯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노동계급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교외 주거단지의 개발을 추진했다. 한국에서 대표적 사례는 울산일 것이다. 대규모 아파트 건설, 백화점 등 근린 생활시설의 보급, 이를 통한 부르주아적 문화 헤게모니의 확립은 노동조합을 기업, 또는 지역적 한계로 가둬두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대량 소비는 노동계급을 부채의 허울에 가둬 기업의 테두리 안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매달 갚아야 하는 카드값과 전세 혹은 주택자금 대출 이자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대다수 좌파는 이러한 문제에 기권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1980년 4월 사북 탄좌 노동자들의 반란에 대한 좌파의 상대적 무관심은 이러한 문제점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이 사건은 인용될 때조차 5월 광주항쟁의 전조로만 매우 간단히 다뤄진다).

이러한 도시생활의 문제는 체제의 문제와 별개로 개인적 선택 또는 지역 활동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지곤 한다. 귀농귀촌, 마을 만들기, 사회적 기업 열풍등이 그런 것이다. 하비의 장점은 이러한 운동들과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권'의 문제를 반자본주의적 관점 안에 위치지우고자 노력한다. 소규모 대안 공동체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역적 차원의 거버넌스와 국가적ㆍ지구적 차원의 거버넌스에 적용되는 원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유재를 어떤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공유재를 결정하는 문제 자체가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도시문제를 둘러싼 문제는 노동계급 문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투쟁이 받아 안아야 할 문제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설명한 한계 때문에 그의 서술은 서로 다른 입장에 쉽게 인용될 수 있다. 한겨레 한승동의 서평 기사처럼 말이다. 하비는 서문 말미에 이렇게 쓴다.

"자본주의의 영속적 축적 시스템 자체는 물론 이와 밀접히 결부된 착취계급과 국가권력의 구조를 전복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목표로 가는 길에 있는 중간역과 같다. 설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여도 도시권에 대한 요구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2쪽

이 말은 하비 스스로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