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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매거진은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1917년 혁명의 여러 쟁점을 다양한 활동가ㆍ연구자들의 기고를 받아 연재하고 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혁명은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아래 글은 자코뱅매거진에 실린 에릭 블랑의 '핀란드 혁명'[링크]에 대한 반박 글이다. 블랑의 글을 직접 옮기며 쌓인 여러 의문을 아래 글은 일부 해소해주고 있다. 참세상에 게재된 블랑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가진 의문을 이 글이 일부 해소해주길 바라며 여기에 옮긴다.


+ + +

핀란드의 교훈: 에릭 블랑에 대한 이견
던컨 하트ㆍ2017년 7월 11일(링크)

에릭 블랑의 글 '1917년 핀란드 혁명의 교훈'은 핀란드의 경험이 주로 카우츠키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을 정당화하는 혁명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오늘날 좌파에게 매우 해로운 정치적 논쟁거리들을 제기하고 있다. 블랑의 글을 처음 게재했던 자코뱅매거진은 안타깝게도 내 반론의 게재를 거부했다. 소수의 동지들이라도 이 글을 읽길 바라며 이곳(johnriddell.wordpress.comㆍ링크)에 글을 싣는다.


1917년에서 1918년의 핀란드혁명은 좌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이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핀란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교적 발전한 사회였고 러시아를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보다 노동계급의 사회혁명이 틀림없이 가장 진전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블랑의 최근 글이 혁명의 경험이 던져준 정치적 질문들의 해결을 위한 보다 깊이있는 논의의 시작이 되길 바란다.

앞서 밝혔듯, 핀란드혁명에 대해 블랑이 내린 정치적 결론에 이견이 있음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블랑의 가장 큰 잘못은 혁명이 "카우츠키가 옹호한 혁명에 관한 전통적 관점, 즉 지난한 계급의식의 조직화와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서 다수의 지위를 점하고 국가기구를 사멸시킬 권한을 획득해 사회주의자가 이끄는 혁명을 촉발시킨다는 생각을 승인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블랑은 그의 글을 핀란드사회민주당(SDP)이 대표하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의 일부 '한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끝내지만 전반적 논조는 "볼셰비키 만이 제국에서 노동자권력을 이끌 수 있었던 건 아니다"라는 것이다.

혁명은 SDP의 전략이 옳다고 입증해주지 못했다. 이어진 끔찍한 학살과 정치적 억압은 사회민주주의가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에 대한 혹독한 고발장이다. 핀란드의 비극은 오히려 볼셰비키의 개입주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옳았음을 반증한다.

나는 오토 빌레 쿠시넨이 1918년 8월에 쓴 작은 책 '핀란드혁명: 자기 비판'을 깊이 참조해 이 글을 써나갈 것이다. SDP의 지도적인 이론가였던 쿠시넨은 1911~1917년 당의장이었고 혁명 정부에선 교육인민위원으로 활동했었다. 그는 다른 사민주의 지도자들 다수와 함께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으로 망명해있는 동안 핀란드 공산당을 조직했다. 그의 책 PDF 파일은 여기(링크)서 볼 수 있다.

●SDP 안의 '좌파'와 우파

블랑은 글을 쓰며 내내 사민당이 혁명가들과 온건파로 나뉘어있었던 것처럼 묘사한다. 실제로 당은 지도부의 다수를 점했던 '중앙파'와 의원단을 주도했던 공개적인 수정주의 우파로 분열돼 있었다. 쿠시넨은 중앙파가 "혁명을 믿지 않았다"며 "우리[중앙파]는 그것을 믿지 않았을뿐더러 언급하지도 않았다"고 묘사했다. 이들 정치적 경향의 특징은 이렇다.

1) 혁명적 계급전쟁보다는 지속적인 평화, 이와 함께
2) 부르주아지와 동맹하지 않는 독립적 계급전쟁

이는 "가능한 평화적 수단을 통해, 필요하다면 폭력적 수단을"이라는 비타협적 태도가 아니었다. 제임스 캐논[미국의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이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따르면 그들은 계급투쟁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수동적이고 운명적 태도를 채택했을 뿐이다. 쿠시넨은 이렇게 말했다.

사민당과 혁명의 일관된 관계는 관용적 역사가들이 과거의 혁명가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보였던 것과 꼭 같은 수동성이었다. 사민당이 가장 좋아한 표현은 "혁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였다.

사민당 중앙파와 우파 모두 의회를 통한 점진적이고 민주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에 묶여 있었다.

혁명적 좌파가 혁명 동안 구성돼있지 않았다거나, 지도부 없는 약한 조직이었다거나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11월 총파업과 유산된 혁명 기간 동안 적위대와 헬싱키노동자위원회의 지도부 사이에 혁명적 감수성이 팽배했었다는 건 분명하다. 이 두 기구는 모두 노동자들의 급진화에 대한 응답으로 새로 설립된 혁명기구였다. SDP 지도부가 파업을 철회하자 헬싱키노동자위원회는 (연합정부의 사회주의자 총리였던) 오스카리 토코이
[1873년 5월 생으로 SDP 지도자로 활동했다. 단명한 혁명정부에서 각료로 활동했다. 혁명의 패배 후 러시아로 망명했다가 이후 미국에서 삶을 마감한다]를 소환해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에 맞서 더 강하게 파업해야 합니다. 정부기구를 통제해야 합니다. 산업, 토지와 그 산출물들을 공공의 소유로 전환해야 합니다. … 이제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 열정과 권력이 필요합니다. …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철도노동자들은 쿨레보 마네르 SDP 대표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파업 철회에 대해 거세게 항변했다. 이와 같은 항의들은 [노동]계급 중 혁명에 앞장서던 부분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헬싱키노동자위원회는 SDP가 공식적으로 파업을 종료한 뒤에도 이틀간 파업을 유지해 나갔다. 이 사태의 비극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도부를 SDP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독립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혁명적 지도부로 인해 [파업의] 동력은 지속될 수 없었다.

SDP 외부에서 혁명적 분파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집단은 사실 아돌프 타이미와 라자 형제처럼 볼셰비키에 가입해 있던 소수의 핀란드인이었다. 이들 볼셰비키들은 헬싱키 적위대의 지도자로 선출돼
[조직을] 급진적 좌익으로 만들어 SDP 지도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11월 총파업이 끝난 뒤부터 1월 반란 전까지 적위대는 혁명을 소리높여 호소했고 SDP 지도부가 소심하게만 있는다면 그들이 혁명을 이끌겠다고 위협했다.

●권력 획득을 거부한 SDP, 파멸한 혁명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반란에 앞서 레닌은 그의 볼셰비키 지도부 동지들에게 어떤 시기엔 정치적 지도자들이 주도권을 잡는데 대해 의심을 하는지 의지를 북돋우는지에 따라 혁명의 성패가 나뉜다고 경고했다.

중앙위의 대화들이 지금 권력을 잡는 것을 삼가고 '기다리자'는 말로 채워지고 있는데, … 이는 혁명을 패배라는 파멸적 결과로 이끌 것이다.

사회민주당이 1917년 11월 총파업의 혁명적 잠재력을 밀어붙이지 못하면서 1918년 혁명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1918년 3월 공격에 나섰던 독일군의 압도적 군사력을 고려할 때 11월[의 봉기가] 승리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린다"고 블랑은 정확히 설명한다. 그렇지만 11월 상황에 대해 틀리지 않게 설명하려면 당시 노동계급이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해야 한다. 쿠시넨은 1917년 11월 노동자 권력 수립을 거부한 것은 단지 내전을 미룬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부르주아지가 좀 더 준비될 때까지 그 시기를 미룬 것 뿐이었다. …

블랑이 언급했 듯이 볼셰비키 봉기를 지지하며 핀란드 노동자들에 공감하고 있던 러시아 병사들 다수는 1월에 여전히 핀란드에 남아있었다. 게오르기 불라첼[1]과 미하일 스페치니코프 같은 많은 러시아 병사들과 혁명적 장교들이 혁명의 편에서 싸웠고 이들 혁명적 병사들은 11월 핀란드 백군에 맞선 강력한 보호자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지가 전반적으로 수세에 몰려있었다는 것인데, 이와 달리 1918년 1월 그들은 만네르하임 남작[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남작은 1867년 아스카이넨의 독일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차르가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에서 육군에 입대해 중장까지 진급했다. 러시아혁명 발발 뒤 핀란드 내전이 일어나자 백위대의 군사부문 사령관으로 임명돼 내전을 부르주아지의 승리로 이끌었다. 2차세계대전 말 핀란드 대통령으로서 소련ㆍ영국과의 평화협상을 주대했다. 1951년 삶을 마감한다]의 지도하에 핀란드 북부에 백위대 훈련소를 세워 적위대에 맞선 내전을 준비했다.

독일 제국주의는 러시아와 약탈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키 조약을 맺음으로써 1918년 3월엔 핀란드에 자유롭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조약은 3월 맺어졌다). 11월에 독일은 여전히 러시아와의 평화협상에 매달려 있었고 핀란드 개입은 어려웠을 것이다.

1918년 3월 독일의 개입이 혁명에 치명타임을 인정하게 되면 모든 징후는 1917년 11월 혁명의 성공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능성은 SDP 지도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꺾이게 된다.

●볼셰비키와 사회민주당의 반란에 대한 태도

쿠시넨이 회상하듯 (그리고 당시 모든 SDP 지도부들이 공개적으로 말했듯이) SDP가 혁명에 적대적이었다면 1월 26일 그들이 봉기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SDP 지도부는 대개 정치적으로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덜 성장한 혁명적 노동자들의 압력하에 단지 최후의 수단으로 무장을 채택했다. SDP가 국가 기구에 참여하지 못하고 총파업 이후 부르주아지가 '안정'에 몰두하면서 SDP는 '혁명적'으로 됐다. 부르주아지의 계획은 적위대를 무장해제하고 노동자들의 열망을 억누르는 것이었으며 이는 SDP가 설립한 기관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1918년 1월 부르주아 정부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진압하길 거부한 SDP가 주도하는 군대를 대신해 새로운 '보안군'을 창설하는 결정을 했다. 실제로 이는 이미 존재하던 '시민군'(노동자들은 이들을 '도살자 군단'이라고 불렀다)을 국가가 승인해준 것이다. 이 시민군은 지주와 부르주아지가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병으로 구성한 조직이었다. 도살자 군단은 1월 26일 공식적인 군대로 승인됐고 이는 적위대와 노동 대중에 대한 선전포고와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순전히 '민주주의의 방어'를 위해서라도 토코이ㆍ위크 같은 SDP 내 우파조차도 반란에 동참하게끔 된다. 쿠시넨은 이렇게 설명한다.

따라서 혁명의 표준이 현실에 맞춰 제기됐고 이로써 혁명을 피할 수 있게 됐다.

새로운 SDP 정부가 제안한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2] 헌법이 제정되면서 이는 분명해졌다. 그들은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진전을 위한 최선의 장으로서 민주주의의 증진에 대해서만 말했다. 내전 때조차 SDP는 단지 '정상 상태'로의 복귀만 얘기했을 뿐이다.

혁명의 필요성을 자기 보호에서 찾는 것은 볼셰비키의 접근법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레닌이 1917년 9월 말부터 반란으로 나가야한다고 긴급히 주장한 것은 노동대중의 승리를 위해 소비에트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외적 사건에 흔들리기보다 노동자들이 주도성을 발휘하는 것의 중요성을, 결정적 국면에서 행동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는 지도력에 대한 행동주의적 접근이었다.

핀란드의 총파업 때조차도 볼셰비키는 SDP에 그들의 수동성을 벗어나 상황을 장악하라고 충고해야만 했다. 레닌은 "봉기, 지금 즉시 봉기해 조직 노동자들의 손에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SDP 지도부에 전보를 쳤다. 헬싱키에 주둔중이던 발틱함대의
[수병위원회] 의장이던 다이벤코 또한 반란을 충고했고, 볼셰비키는 핀란드 노동자신문에 자신들의 모범을 따라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기고했다.

총파업이 끝난 후에도 볼셰비키는 SDP에 계속 호소했다. 민족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은 11월 27일 SDP 전국회의 연설에서 그들에게 혁명에 대한 의심은 잊으라고 충고하며 "담대하라, 담대하고 또 담대하라! 바로 당통의 전술"을 채택하라고 애원했다. SDP 지도부가 봉기 계획에 따라 필요했던,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부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기차로 보내주기로 했던 1만5000정의 소총과 200만 개의 탄창 수령을 봉기 당일에조차 거부했던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핀란드 혁명이 남긴 교훈

1917~18년 핀란드에서의 갈등이 러시아보다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습을 대표한다는 블랑의 주장은 옳다. 핀란드의 정치는 자신이 그 일부였던 러시아제국보다 당대의 서구 사회와 훨씬 더 공통점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핀란드는 매우 소중한 사례다. 그렇지만 블랑이 SDP를 카우츠키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를 실험해본 사례로 논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동료들과 달리 독특한 상황에 처해있던 SDP는 혁명적 행동으로 향해 나갔다. 차르 치하에서 그 어떤 권력도 지니지 않았기에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책임도 질 일이 없었던 핀란드 의회에서 SDP는 다수로 성장할 기회를 잡았다. 차르의 강력한 억압기구들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핀란드에서 노동자 전투성의 고양과 러시아에서 노동자혁명으로 인해 부르주아지는 SDP를 자신들의 이익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부르주아지가 도전장을 던졌을 때 SDP는 혁명에 나설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100여 년 전 핀란드 노동자들의 참혹한 패배로부터 쿠시넨이 얻은 교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917년 11월 벌어진 것과 같은 혁명적 위기를 이용할 뿐 아니라 내전을 지도해 승리를 위한 열정적 수단을 쟁취할 혁명적 지도와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교훈이다. 핀란드 노동자들에겐 총파업을 반란으로 밀어붙이고자 하는 열망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SDP에 도전할 만한 혁명적 지도의 부족 때문에 그들의 영웅적인 시도는 좌절됐다. 쿠시넨은 패배를 겪은 뒤 혁명적 전망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결론내렸다.

계급사회에서 계급들 사이엔 두 종류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하나는 피억압 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군대, 법, 재판 등의) 폭력을 사용해 상대적으로 평화적 수단으로 제한하는 억압적 상태다. 다른 하나는 억압 계급과 피억압 계급 중 미래를 결정할 계급을 결정할 폭력적 대결이 벌어지는 공공연한 계급투쟁 상태, 즉 혁명이다.

핀란드 노동계급 수 만 명이 목숨을 잃고 혁명가들이 수십 년간 감옥에 갇힌 걸 대가로 해서 이 질문에 대한 정치적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처럼 핀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권력의 자리로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줬기에, 역설적이게도 쿠시넨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의 관행을 버리고 볼셰비키에 동의하게 됐다.


주석
[1] 블라첼 중령은 핀란드에 주둔하던 다른 수 천 명의 러시아 병사드러럼 이후 핀란드 백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의 두 아들은 1918년 4월 비푸리주에서 같은 방식으로 살해됐다. 그는 [핀란드 서남부의 도시] 탐페르를 방어하던 북부전선 사령관 후고 살멜라에게 군사적 조언을 했다.
[2]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이란 이름은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이 붙인 게 아니다. 레닌은 3월 1일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우호조약 체결 때 이 이름을 고집했다. 볼셰비키는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두 나라에서 완전한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누릴 수 있길 바랐지만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주저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러지 못했지만 핀란드 노동자들은 러시아에서 댓가 없는 정치적 권리를 가졌다.

글쓴이는
던컨 하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Socialist Alternative' 회원으로 있는 사회주의 활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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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직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자들은 흔히 알려진 대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뉘어있던 상태였다. 1917년 당시 혁명의 과제에 대한 이들의 입장 차이는 현실에서 당시 정부와 갈등을 빚던 자유주의자들, 자본가들에 대한 입장 차이로 드러났다. 아래의 두 호소문은 이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멘셰비키가 관여하고 있던 전쟁산업위원회 산하 노동위원회는 1월 24일
[구력] 차르의 전제정과 부르주아지의 갈등이 노동계급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전개할 것이라며 두마[의회]를 지지하는 행동에 나설 것을 노동자들에게 호소한다. 노동계급 대중의 지지가 없다면 아무런 힘도 없을 의회를 위해서 말이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위원회
[혁명 당시 러시아 수도의 지명은 '페트로그라드'였다. 원래 이에 맞춰 통일해 표기했으나, 볼셰비키가 원래의 지명을 고수한 것에 맞춰 '페테르스부르크 위원회'로 다시 수정한다. 멘셰비키의 성명서는 '페트로그라드'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에 맞서 부르주아지와 손잡아선 안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들은 두마에서 쫓겨난 사회주의자 의원들을 상기시키며 일일파업을 호소한다. 물론 이들의 파업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실패한다. 가장 큰 이유는 파업을 벌이자고 한 날이 공휴일이라는 것이었다.

분명 파업과 혁명 초기 멘셰비키의 역할과 활약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가진 약점은 결국 3월 이후 부르주아지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제 손으로 넘겨주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래 글은 존 리델이 편집해 그의 블로그(링크)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 Workerㆍ링크)에 연재하는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시리즈 3편과 4편을 옮긴 것이다. 본문의 대괄호 안의 내용과 글 아래 붙인 주석은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추가한 것이다.


+ + +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 대한 호소한다
전쟁산업위원회 노동위원회ㆍ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3편ㆍ링크

전제정부가 나라를 숨막히게 만들고 있다. 제정의 정책은 이미 심각하기 그지없는 전쟁의 참화를 더 악화시켜,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계급에 자신들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전쟁의 희생자들이 수없이 많은 상황에 정부의 이기적 행동은 그 희생을 더 크게 만들고 있다.

몇 번이나 식량공급 위기를 불러온 정부는 이에 아랑곳 없이 줄곧 나라를 기아와 폐허로 몰아넣고 있다. 전시상황을 핑계로 노동계급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 공장에 묶인 노동자들은 공장의 노예나 마찬가지다. 이 지배 체제는 전쟁에서 제대로된 전략을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이를 러시아의 여러 인민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더 강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인민 스스로가 아닌 현재의 전제 권력에 의해 전쟁이 끝난다면, 전쟁이 멈춘다 하더라도 지친 나라 전체가 갈구해온 평화는 인민을 재앙의 참화에서 구해낼 수 없을 것이다.

즉, 전제정은 전쟁을 끝내도 인민을 새로운 쇠사슬로 구속하려 할 것이다. 종전은 인민에게 해방 대신 새로운, 심지어 더 공포스러운 재난을 가져올 것이다. 정치적 권리 없이 손발이 묶인 인민, 특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부의] 독단과 실업ㆍ기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높은 물가와 실업은 정부의 폭정과 함께 노동계급을 빈곤과 노예상태에 빠지게 할 것이다.

노동계급과 민주 세력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하루하루가 시급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긴급히 제기되는 현재의 과제는 전제 정부를 단호히 제거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계급과 민주 세력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이 진행됨에 따라 부유한 부르주아 집단과 관료들 사이의 대립이 노동계급의 적극적 개입에 유리한 상태를 만든다는 게 분명해질 것이다. 인민의 운동은 전제정에 결정타를 날릴 날을 앞당기는데 두마(의회)와 정부의 대립을 이용할 수 있다.

우리 000의 노동자들은 결의한다. 지금 당장 우리의 힘을 하나의 조직으로 모아 단결해 공장위원회를 선출하자. 다른 작업장과 공장의 동지들과 뜻을 모으자. 곳곳의 집회에서 지금 이 순간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자. 그리고 우리의 결의를 다른 공장들에 알리자.

우리는 두마가 소집됐을 때 이를 조직된 대중적 힘이 전면적으로 이끌 수 있게끔 준비해야 한다.

두마 소집 전,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공장과 모든 지역의 노동자들이 노동계급과 민주 세력의 주요 요구를 들고 (두마가 열리는) 타우리드궁으로 행진하자.

나라 전체와 병사들이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투쟁을 통해 조직된 인민의 지지에 기댄 임시정부 만이 나라를 막다른 길과 치명적 붕괴로부터 구해내고, 정치적 자유를 강화하고, 러시아와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 +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위원회ㆍ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4편ㆍ링크

동지들! 지배계급은 유럽 인민의 목에 씌운 올가미를 더욱 옥죄고 있다. 수백 만 명이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젊은이들 중 제일 우수하고 건강한 이들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수백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포로가 돼 고통받았다. 공장이 멈춰선 자리를 빈곤이 대신 채웠다.

학살의 2년 동안 모든 교전국들에서 1500만 명이나 되는 인민이 목숨을 잃은 이 세계의 권력자들은 더 많은 이윤을 얻어왔다. 이건 정말 예전에 볼 수 없던 범죄다! 인민 중 가장 건강한 일부를 대규모의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은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피를 흘려온, 우리 노동자 전위와 탄압받는 민주세력은 위대하고 어려운 임무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범죄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무슨 일을 했는가?

인민을 억압하며 그 운명을 결정해온 지배계급으로부터 지난 2년 반 동안 작게라도 변명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이제 곧 두마의 러시아 노동계급 대표들이 재판에 회부된지 2주년이 된다. 전쟁이 막 시작했을 때 두마는 회기 내내 러시아 경제가 번창할 것이라고 외쳐댔다. 물론 타우리데 궁의 벽 안의 두마는 늑대처럼 탐욕스러운 신사 지주양반들과 자본주의적 공장 소유자들과 은행가들의 자비에 경제를 맡겨놓음으로써 이를 파괴하고 있었다.

우리 대표들이 두마에서 쫓겨나 재판을 받고 멀고 추운 시베리아로 유배돼자 신사 지주양반들과 자본가들은 만족스럽게 악수를 나누며 두마에서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그 후 2년간 두마에선 이들의 권리가 침해된 데 대해선 그 어떤 얘기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 대표들이 추방된지 2주년이 되는 지금도 이에 대해선 침묵만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그들이 배척했던 노동계급 사이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굽실대며 공감할, '동료'가 될 만한 이들을 유인해내려고 한다.

그리해 그들은 두마 자유주의자들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노동자들에게 전파시킬, 전쟁의 폭풍 속에서 눈이 멀어버린 국수주의적 노동자들을 찾아냈다. 2월 14일 두마 소집을 앞둔 지금 노동자들 사이에 두마의 의도에 관한 온갖 풍문이 돌고 있다. 두마가 새로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보기 쉽다. 그렇지만 들고 일어선 노동자들의 벽에 보호받는 동안 두마의 자유주의자들은
[차르 정부에]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두마를 응원해달라고, 심지어 타우리데 궁 앞에서 요구안을 내놓아 단호한 행동에 나서게끔 지지해달라는 호소가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들려온다. 이 호소는 불필요한 것일뿐 아니라 배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차르와 지배계급의 궁전으로 달려가 탄원하는 행동은 이 궁전의 주인들로부터 무언가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인민에게 결국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노동계급 정치인들은 자신이 충분한 화약을 갖고 있지 못했을 땐 기꺼이 인민의 대의명분을 위한 단호한 전사로서 이들 앞에 나선다. 그렇지만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감추게 마련이다. 동지들, 그들이 호소하는 도움은, 당신들을 결국 국가에 굴복하게, 더 나아가 군사적 약탈과 '최후까지' 끝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종사하게 만드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를 직설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진정한 희망이다.

우리의 호소

자유주의자들이 현 정부에 불만을 표할 때조차 그들의 옳아보이는 말들이 뜻하는 바는 비밀스럽게 미래 정부의 자리들을
[자기들끼리] 나누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이 단결한 인민의 지지에 기대 권력 장악이나 '임시정부'에 대해 단호하게 말할 때조차, 그들은 전쟁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직 강력한 민주적 힘 만이 인민의 고통과 시련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온 힘을 기울여 당신이 시작한 전쟁과 당신에 반대할 것이다. 군주제의 권능
[홀]은 당신의 탐욕과 뒷거래를 감춰준다. 바로 그 이유로 당신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차르의 군주제에 우리는 반대한다. 우리는 차르 정부에도 반대한다. 당신은 자신도 그에 맞서 투쟁하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정부의 패배를 두려워 한다. 오직 차르 정부 만이 당신이 인민을 희롱하는 것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민이 권력을 잡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우리는 노동자와 빈농의 임시혁명정부를 세울 것이다. 이 임시혁명정부는 보통ㆍ평등ㆍ직접ㆍ비밀투표로 선출된 제헌의회의 소집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 인민을 분열시켜 깊은 상처를 입힌 탐욕에 가득찬 자본가들의 국수주의적 범죄행위에 반대한다. 우리는 인민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전 세계 노동자들의 연대를 건설할 것이다.

2월 10일은 우리의 대표자들이 차르의 법정에서 탄핵당한 날이다. 우리의 투쟁과 구호에 강력한 힘을 심어준 그들을 우리는 경애한다. 우리의 대표자들을 즉시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우리는 이 날을 일일파업으로 기념할 것이다. 이 파업은 우리의 쫓겨난 대표자들이 공개적으로 선포한 요구를 위한 투쟁에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내걸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차르 군주제를 철폐하자! 전쟁에 맞선 전쟁을! 임시혁명정부 만세! 제헌의회 만세! 민주공화국 만세! 국제 사회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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