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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왕성'.

※아래 글에는 영화 '명왕성' '더 테러 라이브' '설국열차'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우승열패(優勝劣敗)'는 우리 시대 유일한 도덕률이다. 그렇다고 말해진다. 보다 나은 능력과 자원을 지닌 자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사회가 나뉘어지는 것은 당연하게 치부된다. 승자독식은 우승열패 사회의 당연한 결과다. 믿을 것은 자신의 몸뚱이 뿐인 노동자는 "겁에 질려 주춤주춤" 자본가의 작업장으로 걸어들어간다. 탈출구는 교육이다. 물론 자신은 탈출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식만이라도 다른 삶을 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교육은 상층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이 되어 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회의 동아줄은 많지 않았고 그럴 수록 동아줄을 잡기 위한 노동계급 자녀들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민주화 이전 사교육이 금지됐다. 하지만 이는 법의 단속을 피할 수 있고 금지로 인해 높아진 비용을 감당할 여지가 있는 상층 계급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화 이후 치열한 대입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대학 입학정원을 크게 늘렸으나 이는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 이제 대학은 모두가 당연히 가야할 곳 취급 받았다. 국내의 명문대를 넘어 해외의 유명 대학ㆍ대학원으로 쌓아야할 스펙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치뤄야 할 경쟁의 폭은 더 넓어졌다.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현실, 그리고 상층 계급으로의 이동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교육에서 경쟁을 제거하기 어렵게 만든다.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잡아먹어야만 했던 '설국열차'의 꼬리칸은 동료를 토끼사냥하는 영화 '명왕성'의 교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최근 잇따라 개봉한 '명왕성' '더 테러 라이브' '설국열차'는 각자 다른 방향에서 이 '꼬리칸'의 문제를 다룬다. 물론 그 태도는 영화마다 다르다. 특정한 주제의식보다는 상황의 긴박함에서 오는 긴장감을 목적으로 소재가 다뤄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될 수 없다. 단지 영화들에서 떠올릴 수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풀어 재구성해볼 뿐이다. 아래는 이 세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명왕성의 김준

영화 '명왕성'은 이러한 교육이 만들어내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서울 강북의 한 학교에서 꽤나 그럴듯한 성적을 올리던 한 학생은 명문고로 전학을 간다. 자신의 자그마한 세계에서 승자였을 그 학생, 김준은 자신이 원했던 더 높은 자리에서 자신의 위치가 이전과 다름을 알게 된다. 이미 한 번 더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데 성공한 그에게 계급 상승의 욕망은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비밀에 쌓여있는 '오답노트'를 얻기 위한 욕망은 자신의 동료를 배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뛰어넘기 힘든 계급의 장벽이 존재함을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는 1%의 학생들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일회용 도구에 불과했다. 교육을 통한 계급 이동은 기만이었다. 상층 계급의 동료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과 그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한다. 청소년 자살률이 계속해서 높아져왔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이기도 하다(2010년 기준 10~24세 인구 10만명 당 자살자 수는 9.4명으로 OECD 평균 6.5명을 큰 폭으로 상회한다). 영화 '명왕성'에서 이다윗이 열연한 김준의 이야기다.

김준이 만약 자폭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했다면 그의 세계는 아버지의 세계와 달라졌을까. 우리는 아주 높은 확률로 그가 경험할 사회가 학교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거대하게 가로막은 계급 장벽은 우리의 삶을 끊임 없이 좌절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김준이 자폭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수 있다. 이다윗이라는 배우가 두 영화 모두에서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역할로 나온 것은 우연하게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더 테러 라이브의 박노신

'더 테러 라이브'에서 박노규는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 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 야근수당 2만5000원을 더 받기 위해 마포대교 난간에 메달렸던 그는 한강의 어두운 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세계의 지배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위해 강행된 공사였다. 그러나 박노규의 죽음은 세계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세계는 여전히 성공을 위한 아귀다툼으로 가득할 뿐. 그렇게 잊혀져 간다. 경제개발 시절 스러져간 무수히 많은 노동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지만 지금 60~70대일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비루한 삶 뿐이다. 아파트 경비 자리를 얻기 위해, 거리에서 폐휴지를 줍기 위해 자신의 또래들과 경쟁은 계속된다. 하지만 박노신의 아버지 박노규의 이야기는 또한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11년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2114명으로 하루 6명 꼴이다. 박노신이 아버지 박노규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산업 현장에서 스러져가는 노동자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산업재해의 문제는 이 체제가 노동자를 다루는 더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상층 계급으로의 이동을 미끼로 경쟁을 옹호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기계 부속품 이상이 되지 못한다. '명왕성'의 김준이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그의 삶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일부분 이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보여주지 않는 테러범 박노신의 삶이 아마 그러햇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폭탄을 만들 정도로 뛰어났을지라도, 대학 진학 후 더 높은 수준의 폭탄과 격발장치를 제작하고 경찰의 전화추적을 따돌릴 정도로 뛰어난 해킹 실력을 지니게 됐다고 할지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승-전-치킨집이라는 IT노동자와 엔지니어들의 자괴감 가득한 농담을 떠올려보라.

성공한 샐러리맨 윤영화

박노규의 아들 박노신과 성공한 샐러리맨의 상징 윤영화 앵커의 만남은 이러한 계급 장벽이 사회 곳곳을 치밀하게 둘러싸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정우가 연기한 윤영화는 성공의 사다리에서 아주 잠깐 삐끗한 것처럼 보인다. 몇몇 불운이 있었지만 박노신의 테러는 다시 성공 사다리에 올라탈 기회로 보였다. 그는 차대은 국장에게 9시 뉴스 메인 앵커 자리를, 박정민 테러대응팀장에게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은 마치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황을 주도한다는 윤영화의 생각이 잘못됐음은 바로 드러난다. 방송국과 차대은 국장은 오직 시청률에만 관심있었고 청와대와 경찰청은 테러범의 체포와 면책, 즉 정부의 유지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체제에서 그의 명예와 생명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윤영화가 박노신과 공명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다. 이러한 공감은 윤영화가 박노신에게 이어받은 폭탄 스위치를 누르게 만든다. 테러는 모두 끝났다는 정부의 뻔뻔한 발표에 엿먹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기묘하게 이어지는 이 두 영화에서 주인공 모두는 경쟁사회에서 계급 상승을 위한 사다리에 메달리고자 노력했다. 현실의 우리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배 계급의 일회용 도구에 불과했다. 역시 우리 대부분이 그런것처럼. '명왕성'에서 김준은 스터디그룹 '토끼사냥'의 오답노트가 자신을 1%의 승리자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라디오로 밀려난 윤영화는 차대은 국장과 함께 다시 성공의 길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거짓된 희망마져 사라졌을 때 그들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기

이에 반해 영화 '설국열차'는 꽤나 희망찬 이야기를 전해준다. 체제-열차는 살아남은 인류를 관리해야 하는 기계의 일부분으로 다룬다.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이 열차-체제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지 오래고 그 현실은 더 노골적이다. 인간의 존재가 기계의 안녕을 위협할 땐 주저없이 제거된다. 하지만 체제-열차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 인간이었다. 무한정한 시간 동안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영구기관은 없었다. 그것이 폭로된 순간 체제-열차는 폭파되고 땅을 밟아본 적 없는 새 인류가 대지를 밟는다.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서 거대한 폭발에도 불구하고 체제가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설국열차'의 희망에 가득찬 태도는 더 명확해진다. 아직 현실은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 더 가깝다. 안타깝게도 '설국열차'는 판타지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 희망이 체제-열차의 안이 아닌 밖에 있음은 분명하다. 열차에서 내리려면 우리는 우선 이 기관차를 멈춰 세워야만 한다.

 

왼쪽부터 계몽주의 개혁가 요한 스트루엔시, 덴마크 절대왕정의 군주 크리스티앙 7세, 영국에서 온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


경향신문은 '레 미제라블'의 흥행돌풍을 다룬 특집 기사에서 '비슷한 영화'로 로얄 어페어'를 소개한다.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로얄 어페어'를 추천한다. 정치는 그 시대 민중의 수준이라는 결론이 쉽게 와닿는다." - 경향신문 1월 14일자 8면(링크)

경향신문의 이런 주장은 박근혜가 당선됐으니 경상도 사람들은 민영화에 피해를 입어도 싸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 정책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가난한 사람들이 왜 그녀에게 투표했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멍청해서"라는 답변이 달린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 '로얄 어페어'는 당대의 '멍청한' 대중을 탓하는 영화일까? 이 영화의 이야기를 찬찬히 재구성해 보자(이 글에는 영화 '로얄 어페어'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 스트루엔시는 계몽사상에 심취한 의사다. 볼테르와 루소의 책을 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익명으로 직접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왕의 주치의가 되는 것을 꺼려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계몽사상가일지라도 호사스런 가발과 복장으로 차려입은 주치의 후보들 사이에서 약간은 위축되기도 한다.

그가 진료를 담당하게 된 크리스티앙 7세는 미친 왕이다. 영화를 다 보고난 지금에는 정말 '미친 왕'이었는지 의문이다.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있는 이 왕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가면이었다. 의회와 내각은 그에게 서명만을 강요한다. 그는 법령을 읽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제안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왕이 저 귀족들과 교감을 시도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오직 연극을 통해서만 세계를 본다.

스트루엔시가 크리스티앙 7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왕은 오직 연극의 세계에만 속해 있었다. 이 계몽사상가는 당황했지만 그 왕과 함께 기꺼이 연극의 세계에 들어간다. 크리스티앙 7세는 기꺼이 자신의 세계에 동참해준 이 의사의 동료가 된다.

동료가 된 왕과 의사는 내각을 자신들의 연극-세계로 다시 만든다. 어차피 귀족과 성직자의 가면에 불과했던 왕이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의 가면이 되는 것을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이들 동료는 고문을 없애고 언론ㆍ출판에 대한 검열을 중단한다. 천연두 예방접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귀족ㆍ성직자는 내각과 의회에서 쫓겨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이란 걸 고려하면 볼테르가 크리스티앙 7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북방의 빛'이라고 찬양한 것이 십분 이해된다.

이 빛나던 개혁의 시절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왕비 캐롤라인도 그들의 즐거운 동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국 왕실 출신의 왕비는 미친 왕의 완전한 동료가 되지 못한다. 그녀는 오직 스트루엔시를 통해서만 이들의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이 둘의 관계를 눈치챈 크리스티앙 7세의 질투가 왕비를 탐한 스트루엔시에 대한 것인지 자신의 동료인 스트루엔시를 차지한 왕비에 대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둘의 관계가 이 개혁의 동료들을 위기로 몰아넣어지만 왕과 의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아니다. 스트루엔시가 스스로 왕의 위치에 올랐을 때, 모든 법령에 대해 왕을 대신해 서명하려 했을 때 이 동료는 결정적으로 불화를 맞는다.

프로이센의 왕. 덴마크의 왕을 대신한 또 한 명의 왕이 섰을 때 더 이상 개혁은 지탱될 수 없었다. 봉건영지에 묶여있는 농민과 도시의 날품팔이ㆍ직인들은 스스로를 개혁의 주역으로 내세울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성직자와 귀족에게서만 자신의 정치적 표현을 찾을 수 있었다. 개혁군주의 가면은 처음부터 가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난 군중이 왕실에 몰려와 왕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크리스티앙 7세는 그 앞에 설 수 없었다. 거기에는 오직 또다른 왕, 프로이센의 왕이 있었을 뿐이다.

실각한 스트루엔시가 단두대에 오르기 전 인민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편이오"라고 외친 게 공허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인민을 위한 개혁은 오직 인민 스스로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 영화 '로얄 어페어'는 그 인민의 얼굴을 왕의 가면으로 보여준다.

스트루엔시가 왕을 대신하려 했을 때, 그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 인민을 대신하려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끊임없이 상승의 길을 걸었다. 성난 인민들은 오랫동안 쌓여왔던 분노를 자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발전 수준은 그들의 요구를 성취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산악당은 자신들의 가장 든든한 동료였던 상퀼로트, 그리고 그들의 조직이었던 에베르파와 코르들리에 클럽을 억압하고 숙청해야만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모든 인민을 대신해 조국의 혁명을 방어하려 했을 때 더 이상 그를 지켜줄 인민은 남아있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소개ㆍ링크).

'로얄 어페어'의 개혁가 스트루엔시가 크리스티앙 7세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가 왕을 대신하려 하면서부터 진짜 왕은 그를 보호해줄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흔하디 흔한 왕실 치정극으로 보이는 이 '로얄 어페어'는 혁명가와 계급의 관계에 (또는 일반적으로 정치인과 대중의 관계) 대한 훌륭한 우화를 제시한다. "정치는 그 시대 민중의 수준이라는 결론이 쉽게 와닿는다"는 경향신문의 지적은 이 영화에 대한 너무 쉬운 이야기일 뿐이다. '로얄 어페어'가 제시하는 정치는 그보다 더 급진적이다.

Posted by 때때로

영화 '방가? 방가!'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적한 농촌과 산골의 간이역은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간이역이 많이 사라졌죠. 기차가 멈추지 않은 건 오래됐고요. 그 간이역은 금의환향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꿈이 첫걸음을 떼던 곳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꿈은 결코 이뤄지지 않았죠.

작은 가게라도 하나 마련해보겠다고, 사장님 소리 한 번 들어보겠다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도 아득바득 돈을 모아보지만 쉽지 않습니다. 간신히 가게 하나 차려봤자 하루에 하나씩, 골목길을 꺾을 때마다 새로 생기는 노래방, 치킨집, 대여점, 세탁소, 구멍가게들. 가난한 이들 사이의 피튀기는 경쟁에 마을의 정겨운 '이웃사촌'은 옛말이 되가는거죠.

그래서 더이상 우리는 '금의환향'의 꿈을 꾸지 않습니다. 작지만 큰 꿈을 품고 고향을 떠났던 우리의 부모님, 삼촌, 이모들은 그 꿈을 잃은채 어떻게든 서울에 메달려보려고 애씁니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제 금의환향의 꿈은 한국인의 것이 아닙니다. 베트남, 필리핀, 중국 등 이름의 나라서부터 어디 붙어있는지 모를 무슨무슨스탄이라는 이름의 나라까지. 다양한 나라에서 '코리안 드림'에 자신 가족의 삶을 걸고 도전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불과 얼마전까지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실업과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에 고통받는 젊은이들. 이들의 고통은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 '방가? 방가!'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같은 사람들 아니냐는 거죠. 영화는 욕심이 많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려고 하고 그것을 다시 이주노동자와 연결시키려 합니다. 앙상블을 꿈꾸지만 불협화음을 들려주는 이 영화의 패착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 실 이 영화 주인공의 고향은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 부분이 더 신경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략 30대 전후반으로 그려지는 듯한 주인공과 그 친구는 끊임없이 금의환향의 꿈에 대해 말합니다. 공장에서, 노래방에서 함께 어울렸던 이주노동자들과 파국을 맞게 되는 계기도 사실은 그 꿈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꿈은 이미 지난 과거의 버려진 꿈입니다.

그 렇기에 김인권이 열심히 연기한 주인공 방가에 대해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구체적인 장소(금산이라는 고향, 안산이라는 도시, 그곳에 위치한 거성실업이라는 공장)와 시간을 배경으로 함에도 그의 정체는 모호합니다. 이른바 지잡대로 불리는 지방대학을 나와 취업전선에서 패배한 20대 청년인지, 가난한 농촌 생활을 벗어나고자 무작정 상경했던 과거 우리의 부모님의 모습인지.

오 히려 이 영화의 가장 장점은 조연인 이주노동자들의 묘사에 있습니다. 단속에 대한 공포, 공장에서의 비인간적인 대우는 기본이겠죠. 얼굴도 못본채 한국에서 국제전화를 통해 결혼한 노동자, 메카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종교에 게으르지 않은 무슬림, 한국에서 나았지만 한국인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그 자식들. 게다가 메인 소재인 외국인 노래자랑.

사 실 이 메인 소재는 좀 부끄럽기까지 한 거죠. 며칠전 추석 연휴 외국인들을 초대한 토크쇼에서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한국의 명절에 TV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그 답은 외국인 장기자랑(노래자랑?)입니다. 전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한복을 입고 나와서 한국의 가요를 부르는 외국인을 보며 즐기는 한국인들이라니. 그래놓고 다문화 사회를 얘기합니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 시작됩니다. 노래자랑을 준비하며 처음 연습한 곡은 '장미'입니다. 실제로 외국인 노래자랑에 많이 불려지는 노래죠. 그 다음 바뀐 노래는 '찬찬찬'입니다. 하지만 결국 노래자랑에서 부른 곡은 알리의 고향, 방글라데시의 노래(엔딩 크레딧에서는 이 영화를 위해 한국인 작곡가가 만든 것으로 나옵니다. 다시 확인해보고 싶네요)입니다. 정말 다문화 사회라면 한국의 문화를 저들에게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한 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 한국 노래만 불러야 하는 법도 없는데 한국 노래만 불리우는 외국인 노래자랑, 읽고 쓰기 어렵다고 투덜거리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어려운 한국인의 이름(역경룡?)... 이 영화는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다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으로 곳곳에서 빛납니다. 그렇기에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금의환향의 꿈이 불가능해진 지금, 바로 여기서 우리의 고향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8.10.20 11:20

왕따의 살아남기 : 미쓰 홍당무 영화2008.10.20 11:20

사회성이 좋다라는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근사근하고 눈치가 빠른 데다가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배려심이 깊으니 자연히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죠. 이런 이들은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하고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우선시 하죠. 그와 반대로 사회성이 전혀 없다고 핀잔 듣기 일수인 사람들은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서 차별을 두고, 눈치가 없으며, 남보다는 자신을 우선시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처우를 받죠. '왕따'.

왕따의 문제는 따돌림을 받는 당사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도 왕따가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자신이 왕따가 돼지 않기 위해 타인을 왕따로 만드는 현실로 나타납니다. 어울려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왕따가 되죠.

미쓰 홍당무 이경미 감독|공효진ㆍ서우ㆍ이종혁ㆍ황우슬혜ㆍ방은진 출연

이경미 감독 데뷔작인 '미쓰 홍당무'는 양미숙(공효진)과 같은 왕따들이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영화입니다.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소통'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왕따들은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양미숙에게 동료 러시아어 교사 이유리(황우슬혜)는 직장 내에서의 경쟁자이자 한 남자를 좋아하는 연적일 뿐입니다. 이유리의 집에 들어가 같이 산 목적 자체가 경쟁자이자 연적에 대한 감시와 견제였죠. 동거인으로서의 이해와 연민은 단 한푼도 보여주질 않죠. 그녀가 피부과 의사 '박찬욱'에게 진료과목과 상관 없는 개인적 사정들을 늘어놓는 것은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상대방에 대한 그 어떤 고려도 없이 자신만의 얘기를 늘어놓을 뿐이죠. 그녀의 '파트너'인 '찐따' 서종희도 자기애(愛)가 강한 사춘기 중학생이죠. 어찌보면 사춘기 학생에겐 당연한 고민일 수 있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고민, 우스꽝스런 축제 행사에 대한 거부가 극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들 왕따들의 문제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타인을 쉽사리 오해한다는 것이죠. 사제지간에서 이젠 동료가 된 서종철(이종혁)에 대한 양미숙의 오해가 그런 것이죠.

왕따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도 이 영화는 그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저 공감할 뿐입니다. 이 영화가 무엇보다도 '여성'의 영화일 수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겠죠. '오해'로 시작된 종희와 미숙의 연대는 보통의 이야기에선 진실을 알게 된 후에는 당연히 깨져야겠지만 이 영화에선 오히려 그 공감의 폭이 확대됩니다. 미숙은 영화의 시작에서 피부과를 홀로 찾지만 마지막엔 종희와 함께 피부과를 찾아가죠.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하는 어학실 재판(?) 장면이 헤드폰을 쓰고 서로가 서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작하는 것은 이 오해와 소통 불능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서로의 이야기는 목적지를 잃은 채 중구난방으로 흐르죠. 결국 모두 헤드폰을 벗어버려야만 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남자의 영화로서 어떠한 해결책, 복수와 응징을 결론으로 이끌었다면 이경미 감독의 어학실 장면은 어떠한 뚜렷한 해결책도 없이 그저 수다로서만 이 장면이 끝납니다. 영화의 끝까지 서종희와 양미숙이 찐따와 찐따의 애인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죠. 우여곡절 끝에 선 축제 무대,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도 결코 어떤 대안이 되진 못한 채 다수의 비난과 야유 속에 끝날 뿐이죠.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 할 이 끝없는 수다는 불완전하지만 어떤 공감을 얻어냅니다. 성은교(방은진)와 종철은 전신 깁스라는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된 듯 보이는 상황에서 만나 종희를 가졌 듯 더이상의 소통이 불가능해 보여 결국 이혼이란 방법을 택하기 직전, 모든 가능성이 단절된 듯 보이는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서로를 이해합니다. 미숙과 종희는 축제 무대에 올라 함께 비난과 야유를 듣습니다. 미숙의 안면 홍조증 상담을 위해 함께 피부과를 찾기도 하죠. 그들은 비를 피하는 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길을 갑니다.

극단적 경쟁 사회에서 연대보다는 적대가 사람들 관계를 지배하죠. '사회성 좋은' 사람이란 것, 그건 어쩌면 현실에는 없는 모두에게 꿈만 같은 이상적 존재일 겁니다. 우리 모두가 배려심 넘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일 수 있는 사회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이럴 때 우리에겐 어떤 구체적 대안보다는 우선 서로의 처지를 공감하는 게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 서우의 발견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출연자 모두의 연기가 만족스러웠지만 그 중 서종희 역을 한 서우가 가장 놀라웠습니다. 압도적 카리스마의 방은진, 리얼리티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효진의 연기 사이에서 서우는 전혀 기죽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맘껏 발산했죠.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외모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이 정도 연기라면 이후에도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서종희 역의 서우만 보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는 아깝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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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농촌 인구가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구의 50%를 넘던 농촌 인구는 현재 한국의 경우 20%를 밑돌고 있습니다. 농업에 있어서 산업적 생산의 발전과 국제적 농산물 무역으로 농업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수는 앞으로 더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농업이 아닐지라도 시골에서 자연에 기대 삶을 살아오던 생활 양식의 변화는 길게 봐도 400여 년이고 한국과 같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엔 몇 십년에 불과하죠. 그래서 그럴까요. 40대 이하의 대부분이 도시에서 낳아 자랐음에도 시골 생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죠. 그건 아마도 도시 생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한 '판타지'일 듯도 싶습니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이런 도시민의 '판타지'에 기대고 있는 영화입니다. 초등 1학년부터 중학생까지 같이 다니는 작은 시골마을 학교의 미키타 소요에게는 도시에서 전학온 학생과의 관계만이 관심사입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도 고민거리는 도시에서 돌아온 옛 사랑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농촌의 황폐화와 수입산 농산물과의 버거운 경쟁, 젊은 세대의 이촌 현상은 관심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렇게 몹쓸 영화인 건 아닙니다. 뿌리가 없는 도시인들에게 영화는 고향의 판타지를 제공해줍니다. 두 시간여의 휴식을 안겨줍니다. 그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요와 히로미의 예쁜 사랑이 더이상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이상을 잃지 않는 삶은 아예 꿈 꾸지 못하는 삶보다 더 살아볼만 하지 않을까 합니다.

2008년은 이스라엘이 건국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수 천년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평화롭게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산지 60년이 되는 해죠.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는 두 가지 신화가 있죠.

첫 번째는 홀로코스트입니다. 물론 많은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에 의해서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어야만 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고통 속에 독일의 패망을 기다려야만 했죠. 분명 그들의 희생을 우린 기억해야만 하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고 해서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되는 것이 용서받을 순 없습니다. 더구나 아랍인들이 유태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주역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진실. 지금의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온주의자들은 그 기원서부터 유태인 차별에 앞장서 왔던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협력해왔을 뿐더러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일정정도 협력하기까지 했죠.

자신들의 고향, 시온 동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이미 수 천년동안 유럽 곳곳에서 뿌리내려 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고싶어할리가 만무했죠. 그래서 시온주의자들은 유럽에서의 유태인 억압이 유태인들의 '귀향'을 도울 것이라는 생각에 유럽 지배자들의 차별 정책에 협조하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까지 이어집니다. 더구나 새로운 나라를 일궈야할 의무에 가득차있던 시온주의자들은 고국 건설에 필요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할 뿐 늙고 힘이 없는, 무능력한 유태인은 필요없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기까지 했었죠.

두 번째는 팔레스타인 지역, 지금의 이스라엘 땅이 비어있는, 사람이 살지 않던 땅이었다는 신화입니다. 하지만 시온주의 운동 이전에도 팔레스타인 땅에는 이미 많은 수의 유태인과 함께 팔레스타인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했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고통받았었지만 최소한 팔레스타인인과 유태인 사이의 갈등이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거죠. 시온주의자들은 무던히도 팔레스타인 땅이 버려진 황폐한 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했고 성공했죠. 하지만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올리브 나무를, 레몬 나무를 길러왔던 땅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영화 '레몬 트리'는 여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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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여인 살마(히암 압바스)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레몬농장을 아버지의 오랜 친구분과 함께 가꾸며 홀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은 미국으로 돈 벌러 갔고 남편은 일찍 사별했죠. 무척 평범한, 이곳이 이태리이거나 미국이라고 해도 이해할 만한 일상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 일상은 신임 국방장관이 농장의 이웃으로 이사오면서 하나씩 깨져나갑니다.

에란 리클리스 감독은 영화의 첫 부분에선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건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보입니다. 살마의 농장은 평화롭고 그녀의 집은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입니다. 단 하나의 힌트라고 한다면 그건 낡은 TV겠죠. 하지만 그조차도 그리 팔레스타인인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곤 볼 수 없을 겁니다.

2002년 시작된 장벽 건설에 의해 물리적으로 가로막혀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해는 이토록 조심스럽게 시작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삶을 하나하나씩 깨뜨려나갑니다. 국방장관이 이사오면서 신변상 안전의 이유로 전망대와 감시카메라가 설치되고, 살마의 농장을 가로질러 철조망이 설치됩니다. 살마는 철조망을 넘어 그의 나무들을 보살피러 농장에 들어가지만 그녀의 나무와 열매는 점점 시들어만 가죠. 농장 근처에서 일어난 테러를 이유로 그녀의 집에 난입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녀의 몇 안되는 세간살이들을 깔끔하게 부숴놓습니다. 그때서야 감독은 그의 카메라로 살마의 집 주변을 비춥니다. 소박하지만 단정했던 그녀의 집은 곳곳이 부서진 모습을 하고 있죠. 살마가 제기한 소송에 참여하기 위해 합법적인 허가를 받고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음에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통행금지' 됐다는 이유로 그녀의 예루살렘 진입을 허가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감독의 이러한 세심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차분하게 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유태인으로서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직시하기란 정말 어렵겠죠. 하지만 감독은 차분하게 자신이 접근해간 진실을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냉소하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차분히.

이 영화에선 잊을 수 없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국방장관 관저에서 열릴 파티를 준비하던 중 '레몬'을 미쳐 준비하지 못한 국방장관은 살마의 농장에서 레몬을 가져오게 시킵니다. 그때 살마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레몬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군인들에게 달려듭니다. 그곳에서 살마와 국방장관 부인 미라는 서로를 직시하고 살마는 떨리는 손으로 히잡을 쓰며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습니다. 살마를 연기한 히암 압바스의 연기는 여기서 가장 빛납니다.

두 번째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토록 원하던 콘크리트 장벽을 치고 레몬농장의 나무를 잘라버렸지만 국방장관 나본은 오히려 그 콘크리트 장벽에 갇혀있는 듯 그려집니다. 이건 한편 감독이 자신의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선 이스라엘 국가의 폭력성에 대해선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심지어 국방장관이란 사람조차 그저 '안보국' 핑계만 댈 뿐입니다. 21세기 가장 파시즘적 국가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건 그저 약간 아쉽다고 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단지 이웃간의 갈등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건 침략자와 침략받은 민족의 관계죠. 이 영화 '레몬 트리'는 레모네이드처럼 상쾌한 느낌의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약간은 씁쓸한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죠. 그렇기에 더 많은 분들이 '레몬 트리'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참고할 만한 책
잔인한 이스라엘  랄프 쇤만|이광조 옮김|미세기
팔레스타인  조 사코|함규진 옮김|글논그림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