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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지 못한…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란? 세계 곳곳의 반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고전적인 바리케이트와 무장한 시위대-경찰의 충돌이다. 사진은 6월 26일 칠레 산티아고의 시위 모습. [사진 europeans against the political system 페이스북]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의 반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2011년 튀니지ㆍ이집트 혁명부터 올해 터키ㆍ브라질 반란까지 모두 '중산층 혁명'이라고 주장한다[월스트리트저널 6월 28일ㆍ링크]. 후쿠야마의 기고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후 우리 언론에서도 '중산층 혁명'에 대한 기사가 잇따랐다. 특히 경향신문은 7월 3일자 1면과 8면 두 개 면을 사용해 가장 크게 '중산층의 반란'을..
6월 30일 이집트 제2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봉기한 인민들.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전국적 봉기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이 위기에 처했다. 장관들의 사임이 잇따르고 군부도 나섰다. 군부는 "정치 세력은 48시간 이내로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라"며 "국민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부는 마치 봉기한 인민의 편인 것처럼 나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2011년을 기억해야 한다. 2011년 11월 군부는 '신(新)헌법 기본원칙'을 발표했었다. 이 기본원칙에는 군부가 정부 및 국회의 관리ㆍ감독을 피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선거법을 매우 복잡하게 꼬아놓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 또한 가로막았다. 인민에 의한 정부로의 권력 이양도 ..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의 2011년과 2013년. 아랍의 봄으로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쫓아낸 지 2년 만에 다시 광장으로 돌아온 이집트 인민들. 다시 출발한 이들이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의 주요 도시 거리에 수 백만 명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은 이미 2011년 독재자 무바라크를 쫓아낸 경험이 있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떠난 자리에 오른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종교의 탈을 쓴 또 다른 독재자였을 뿐이다. 이집트의 동지들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물론 일시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다시 일어섰다. 이 점이 중요하다. 애초 2011년 이후 미국의 점령하라 운동, 스페인의 분노하라 운동, 2012년 터키와 브라질 ..
'파라오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무르시 대통령의 새 헌법에 반대해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여든 이집트 인민. [사진=RoarMag.org]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후 휴전을 성공적으로 중재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미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쓸모를 인정받은 무르시는 국내 정책에도 과감한 전환을 시작했다. '파라오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새 헌법은 무슬림형제단이 장악하고 있는 제헌의회와 상원(슈라위원회), 무르시 대통령에게 견제받지 않는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2011년의 혁명적 열정이 충분히 식었다고 판단한 데서 비롯한 반혁명 시도일 것이다.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 타흐리르 광장에서 보여준 이집트 인민..
무바라크 '상징적 장례식' |이집트 반정부 시위대들이 6일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아랍어로 '나가라' '애도하지 않는다' 등을 적은 천을 들고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한 상징적 장례식을 벌이고 있다. 카이로=AP연합뉴스 술레이만과 무슬림형제단의 타협(이집트 정부ㆍ야권 '개헌委 구성' 합의 링크)으로 이집트 혁명이 한 고비를 넘는 듯 합니다. 이 타협이 가능할지, 타협이 성사된다고 해서 분노한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진행되는 상황은 한국의 1987년과 비슷해보입니다. 그렇지만 이집트 내 정치적 대안세력의 현 상황은 지금의 타협을 어렵게 할 가능성이 크죠. 월러스틴("제2차 아랍 봉기 최대 피해자는 미국" 링크)의 지적 처럼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세속적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