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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00:52

촛불시위의 첫걸음 쟁점2016.12.19 00:52

아래 글은 10월 20일 올린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을 다시 고쳐쓴 글이다. 페이스북에 처음 올린 글로부터 따지면 세 번째 글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충하는 데 중점을 뒀다. 논점도 살짝 달라졌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바꾼 부분이 이 달라진 논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대중적 운동의 첫걸음에 좌파들이 불만을 갖는 일은 흔하다.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좌파의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경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패배적 평가가 대표적이다. 좌파의 다수는 기존 체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한계를 지적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전인권의 '애국가' 공연과 시위대의 집회 후 청소, 경찰버스에 붙인 스티커의 제거 행동에 대한 평가에서 극대화됐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도 내 실망감을 정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실망감은 내가 공부해온 '역사'에 반추해봤을 때 정당한 게 아니었다. 그 실망감은 내가 그토록 멀리해온 '국개론'(대중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 만을 갖는다며, 현재 상황을 대중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중이 운동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의식을 깨우친다는 것, 무엇보다 좌파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빼놓은 평론가적 태도였을 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전망'이 아니다. 나를 비롯해 좌파 일부가 놓치고 있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글일 뿐이다.

아래 글은 '사회주의자'에 기고한 글
(링크)의 원문이다.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글솜씨 때문에 내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사족을 또 달게 된다. '사회주의자'에 실린 글의 제목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회에서 고른 것이다.


11월 19일 '박근혜 정권 퇴진 4차 범국민 행동'에서 행진에 나선 사람들. [사진 自由魂]

촛불시위의 첫걸음

10월 24일이었다.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의 태블릿PC 속 국정 개입 증거를 폭로했다. 언론 보도를 접한 대중이 분노를 표시하기도 전 박근혜는 서둘러 1차 대국민 담화를 연다. 녹화 방송에 기자의 질문도 받지 않은 무성의한 담화였다. 아마 대중보다 지배계급이 더 빨리 이 보도의 위력을, 혹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가 이뤄졌을 때의 파급력을 깨달았을 것이다. 폭로로 가득했던 한 주가 지나고 29일 토요일 첫 대중적 촛불집회가 열린다. 3만~5만명으로 추산되는 참가자들은 분노로 가득했고 이들은 경찰과의 몸싸움도 꺼리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충돌은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이후 주말마다(당연히 평일에도 촛불은 계속 밝혀졌다) 계속된 촛불집회는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시위의 양상은 더 '평화'적이 됐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시위의 평화적 성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혹은 '명예혁명'이라며 촛불집회를 한껏 추켜세웠다.

좌파 일부에서 불만이 튀어나온 것은 이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한 촛불집회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 촛불에 불씨를 지핀 건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이었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만 한다. 시작은 언론재벌의 종합편성채널 JTBC의 보도였다. 같은 그룹의 중앙SUNDAY는 첫 촛불집회 다음날 (10월 30일자) 1면에서 '노력하면 성공하는 나라, 그 믿음이 깨졌다'는 제목으로 시위를 보도했다. 훌륭한 선동이다. 기껏 3만~5만명 나온 시위를 보도하며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하나로 잇는 분노의 동아줄을 잡아당겼다(작은 숫자는 아니다. '기껏'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 언론의 보도 태도를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토요일이 지난 첫 월요일 (10월 31일자) 사설에서 '심상찮은 시위'라며 정부와 정치권에 조속한 해결책을 내세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태도는 1905년 1월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킨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경찰의 첩자였던 가퐁 신부는 대중의 불만을 '평화'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워 페테르부르크 동궁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이끈다. 그러나 이 행진이 궁전을 수비하던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하자 가퐁은 "이제 우리에게 차르는 없습니다"고 선언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담화(11월 4일) 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다음날 더 많은 대중이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들자 조선일보는 점잖게 이렇게 말한다. "朴 대통령 국회 추천 총리에 內治 일임 선언하길."(11월 7일자 사설)

지배계급의 한 세력이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바로 그러했다.

"귀족 계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부르주아지에게 호소하는 방법도 주저하지 않았다. 법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족 계급에게 지지의 손을 뻗쳤으며, 또한 법원 서기와 고등 법원이나 귀족 가문의 출입 상인은 시위를 하라는 선동을 받았다. 베아른이나 도피네에서는 정기 소작인과 절반 소작인들까지도 동원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군대에도 귀족 계급의 선전이 침투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귀족 계급의 혁명적 선례를 잊지 않을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 54쪽, 을유문화사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특권계급은 자신을 기본권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1788년 프랑스 고등법원은 '왕국의 기본법 선언'을 공포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이 일부 포함됐지만 "당연하게도 조세의 평등과 특권의 폐지에 관한 언급이 없는 이 선언은 어떠한 혁명적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2쪽, 두레) 그럼에도 그들의 투쟁은 인민을 교육시켰고 훈련시켰다. 그 교육이 비록 지배계급 일부의 견해에 관한 것일지라도 이는 혁명을 향한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기본적으로 1788년 봄에 있어서 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바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의 결합이었다.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특권계급은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6쪽, 두레

특권계급의 교육 결과는 훌륭했다. 결국 1년여 후 프랑스 인민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에 나서 앙시앵 레짐을 끝장낼 혁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 ('독일 이데올록', 마르크스ㆍ엥겔스, 김대웅 옮김, 92쪽, 두레) 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실천 초기의 대중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체제에 대한 저항 자체도 바로 그 체제가 제공하고 가르친 표현ㆍ사상에 기반해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촛불집회 초기 문재인이 '명예로운 퇴진'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민주주의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대중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 ②항을 행동지침 삼아 왜곡된 '민주공화국'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게 된다.

조선일보의 가이드라인이 대중에게 통할까

안타깝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심지어 수십만 명의 저항이 이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대중이 배워온 이 표현과 사상이 실제 세계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1905년 1월 차르를 찬양하던 러시아 인민의 평화적 행진은 결국 피의 일요일 이후 파업과 시위로 가득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지배계급의 반란에서 시작한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 절대주의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되며 결국 그 권위를 잃었다. 끝내 그는 국가원수임에도 가족과 함께 도주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인민에게 입증해보인 후 1793년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렸다.

조선일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폭로 직후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희망을 내비쳤다. '내치를 넘기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대안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촛불집회의 급진화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두 번째 주말 촛불집회 후 조선일보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대신 협력"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일주일 전 집회 때 연행자는 물론 밤 늦게까지 충돌도 있었음은 모른 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태도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같은 야당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거리로 나온 대중이 '박근혜 퇴진' '하야' '탄핵'을 외쳤던 것과 달리 '질서있는 퇴진' 운운하며 '탄핵'에 주저했다.

그러나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5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12월 3일엔 전국 곳곳의 거리에서 232만 명의 인파가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 변화의 다가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거의 언제나 '폭력집회' 주도 세력 취급받던 농민의 트랙터 행진은 환영받았고, 이를 막아선 경찰은 비난받았다. 농민의 트랙터 행렬은 경찰의 방해에도 끝내 12월 9일 국회의사당 앞 탄핵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호 속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집회의 연설도 다양해지고 급진화하고 있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한 연사는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을 계속해온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의 눈물은 광장에 모인 100만명의 분노로 승화하고 있다. 한 학생은 "제 어머니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고,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가난합니다"며 불공정한 사회를 비판했다. 다른 학생은 "저는 공부를 못하지만 정유라 같은 이들이 너무 쉽게 학력을 따는 데는 열받는다"고 분노를 토했다. 많은 학생들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며 함께 행진하기도 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만이 이 투쟁의 배경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투쟁엔 이미 많은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고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움직일 준비가 돼있다.

집회 문화도 꼭 '애국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헌재 심판이 남아있긴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됐다. 평화로운 외양과 달리 대중의 굳은 의지가 정치권에게 탄핵을 강요했고 새누리당을 해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중앙일보가 "국민이 탄핵했다"며 "정치가 응답하라"
(12월 10일자 1면) 고 쓴 것은 이제 촛불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앙SUNDAY가 "촛불은 구체제 끝내라는 명령이다" (12월 11일자 1면) 고 말한게 내심은 아닐지언정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작가 샤토브리앙(1768~1848)은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그것을 성취하였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13쪽, 을유문화사) 고 평가했다. 2016년 겨울을 달군 촛불집회가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했던 것일지라도 그 끝은 오직 대중에 의해서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12월 10일에도 다시 100만여 명의 인파가 광화문광장에 모여 박근혜의 '즉각 퇴진'과 '구속' '처벌'을 외쳤다.

대중은 40여일의 행동을 통해 작지 않은 성과를 얻어냈다. 이는 스스로의 힘을 깨닫는 훌륭한 산교육이다. 게다가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헌법에 기반한 행동이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어냈지만 대중은 아직 만족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더 이상 이정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16.11.20 23:53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 쟁점2016.11.20 23:53


11월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밝혀진 촛불의 하나. 시민들은 스스럼 없이 노동조합이 준비한 촛불시위 용품을 자신의 의사표현에 사용했다.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이 준비한 촛불을 든 시민. 
[사진 自由魂]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 가퐁 신부가 차르의 초상을 앞세우고 차르를 찬양하며 행진했던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로부터 12년 후에야 러시아에서 혁명으로 차르를 쫓아냈음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1788년 루이16세는 명사회 소집과 연이어 삼부회 소집을 허용하면서 그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반란을 일으켜온 특권계급의 공격 아래 '절대왕정'의 권위는 이미 그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1792년 그가 기요틴 아래 목이 잘리기까지는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와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됐다. 결정적으로는 그 스스로 국가원수의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힌 루이16세와 가족의 '도주'라는 사건이 있어야만 했다.

어쩌면 부르주아 시민사회에서 우리는 더 복잡한 길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문재인이 '명예'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았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희망은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경찰버스에 붙은 스티커를 제거해줌으로써 시위대의 선함을 강조하려는 참여자와 함께, 거리낌 없이 경찰버스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시민도 있었다. 11월 19일 세종로 정부청사 앞 경찰버스에 어떤 시민들은 스티커를 붙이고 또 다른 시민들은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곤 했다.
[사진 自由魂]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세계에 균열이 가지 않는 이상 이데올로기는 허상이 아닌 현실로 굳건히 작동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1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도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2008년과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연사들은 세월호 사건에서 정부의 무능과 기만ㆍ배신을 비난했고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덧붙이는 말]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05ㆍ1917년 러시아 혁명뿐 아니라 한국의 1919년 3ㆍ1운동 때도, 1945~1948년 해방정국, 1960년 4ㆍ19혁명, 1987년 6월항쟁 때 모두 반란에 나선 인민의 움직임은 혁명적 지식인의 예측을 쉽게 벗어나곤 했다. 이 지식인들의 계획에 비추자면 인민은 때론 게으르고, 때론 너무 순하며, 때론 너무 성급하다. 1919년 봄의 평화적인 만세 운동은 일제 통치기구에 대한 전면적인 물리적 공격으로 이어졌고, 1945년 여름 해방의 기쁨은 봉건지주와 미국 점령군에 대한 무장투쟁으로, 다시 1960년 학생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 또한 노동조합의 건설과 정부기구에 대한 습격으로 이어지곤 했다. 1987년의 뜨겁던 여름은 창원ㆍ울산 등 전국에서 노동자투쟁의 뜨거운 가을로 바통을 넘겨줬다. 그러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최선"이라 함은, 대중을 좌파의 뜻대로 움직이게 될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이 품은 힘을 급격히 발산하게 될 그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현재의 투쟁에서 배워야 한다. 대중의 관념과 행동양식을 어떻게 급진적 변화의 힘에 맞닿게 할지 바로 지금 대중에게서 훈련받아야 한다.


10월 29일 첫 촛불시위는 3주 후의 시위에 비하면 많은 수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대통령의 첫 번째 사과로 갈피를 못잡던 경찰은 손쉽게 이순신장군상 앞 저지선을 뚫리고 세종대왕상 앞까지 밀렸다. 좌파는 길을 열어가고 있고 마침 더 큰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사진 自由魂]

생각의나무에서 의욕적으로 펴내고 있는 問라이브러리의 세 번째 책은 최장집 교수의 '한국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입니다. 은퇴를 전후해서도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며 한국 민주주의에 있어 협애한 이념적 기반의 정당체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최 교수는 올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촛불시위를 경험하면서 한층 더 깊어지 통찰력을 이 책에서 보여줍니다. 급하게 준비된 느낌이 역력한 이 책은 문장과 논지의 전개에 있어서 최 교수의 이전 책들보다 덜 다듬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87년 6월 항쟁과 비견될만한 촛불시위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지를 짧지만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10월 11일, 6월과 7월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사람이지만 수천 명의 무장한 전투경찰의 위협과 보수 언론들의 데마고기를 고려한다면 매우 의미있는 수의 사람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을 다시 밝혔습니다. 촛불 시즌2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최장집|생각의나무|問라이브러리 003


민중과 시민-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두 개의 다른 방법

그러나 이러한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화된 정치환경에서 민주화라는 하나의 단일목표를 통한 최대연대는 자동적으로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그 행동원리는 급진적으로 달라진다. 여기서는 평화적 선거를 통한 다수표 획득을 위한 경쟁이 기본원리가 된다. 어떻게 최대다수연합을 유지할 것인가? 이제 문제는 민주화투쟁을 주도했던 민중동맹이 민주화된 이후에는 그 단일성과 일체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민주화최대동맹은 ㅁ니주화된 이후까지 단일동맹을 유지한다는 암묵적 연대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는 완전히 열려있는 문제이다. 최대동맹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사회경제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 계층적 이익에 따라, 북한문제를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문화적 가치에 따라, 출신지역과 지방의 배경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에 따라, 수많은 요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실제 대중들의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계층적 지위와 역할에 따른 이해관계의 차이라는 요인이 작용한 결과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갈등이라고 말하며, 민주주의는 간단히 정의해서 갈등과 그 타협에 기초한 정치체제이다. 갈등을 어떻게 조직하고, 어떤 정당과 정당체제를 통해 이를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이들이 어떻게 선거경쟁의 대립 내지 경쟁축을 형성하는가 하는 문제가 민주주의 정치의 성격과 그 방향을 결정짓는 데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26~27pp.

[운동권의 반정당적 태도의] 두 번째 요인은 민주화가 혁명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의 권력구조와 정당을 제도화하는 데 있어 대체로 구체제의 내용을 승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정당과 정당체제뿐만 아니라 주요 정치인들까지 구권위주의체제와 뚜렷한 연속성을 보였으며, 차이는 이들이 참여하는 게임의 규칙이 민주적으로 변했다는 점에 국한되었다. 기존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정치공간을 선점하였기에 변화를 주도한 중심세력의 제도권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이는 새로운 정치적 가치와 개혁목표를 가진 운동권세대들이 주도적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극히 제한적이고 개별적이고 부분적이었으며, 그들이 대면했던 정치체제, 정당체제, 선거제도는 구체제로부터 지속된 것이기에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부분이 많았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정치제도와 정치질서는 개혁의 중심대상으로 부상했고, 그 개혁의 가치와 기준에는 이들 새로이 유입된 운동권적인 요소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내용은 그들의 도덕주의적 정치관을 토대로 정치에 있어 투명성, 효율성, 그리고 전문성의 가치를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38~39pp.

한국의 노동ㆍ복지 개념은 여전히 전자(물질적 급부)의 경우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근본가치로서의 시민권 개념이 아니라, 한국의 조선조로부터 권위주의 시기에 이르는, 그리고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또는 영국의 14~17세기 초 구빈법의 정신이 되는 빈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구제의 가치관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양극화를 말하고 사회복지를 말하고 약자에 대한 보호를 말할 때, 말하는 자는 언제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를 온정을 베푸는 자혜로운 엘리트로 생각한다. 민주적 시민이 문제를 보는 방식은, 보편적 가치를 향유해야 할 사람들 스스로가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관점에 바탕을 둔다.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이들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시민적 민주주의관이 저절로 획득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이 필요하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은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하고 이를 학습하는 교육과 실천의 기회를 넓히는 일이며 이를 위한 제도개혁이라고 하겠다.
54~55pp.


정치적 민주화-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에서 민주화는 해방 이후 오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구축해놓은 기존 질서의 조건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민주주의 제도와 규칙을 민주화 이전의 구체제에 부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제도권 밖에 위치했던 민주화운동 세력과 그들의 대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정치에 참여함은 물론 그 요구들이 민주주의체제 내로 일정하게 수용되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구체제에서 성장한 기득이익 세력과 이에 비판적인 민주화운동 세력을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제도적 틀 속에 함께 위치시키는 것으로, 두 세력들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제도화된 정치의 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혁명의 형태가 아닌 그 어떤 민주화도 이러한 경로를 피할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의 내용적 발전이든 진보든 이 틀 안에서 경쟁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여러 갈등과 균열이 정치적으로 대표되고, 조직될 수 있는, 즉 이들 다양한 갈등과 이익을 정치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정당/정당체제의 제도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주주의제도 가운데서 정당을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심적인 집단적 행위자라 말하는 이유는, 정당이야말로 정치의 틀 안에서 사회의 주요 갈등과 균열을 대변하고 조직하는 가장 중요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60~61pp.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특히 국제금융위기의 효과와 더불어 가속화되는 상황과 민주화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동안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사회화 및 교육되고, 경제정책 뿐만 아니라 문화교육정책을 비롯한 주요 영역에서의 정책의 기조로 수용되고 추진됐다.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의 긍정적, 부정적 효과를 포함하여 이를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수준에서 민주주의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 문제에 관련하여 정치학자 필립 쉬미터-테리 칼의 말을 들어본다. 신자유주의의 이념형적 극대화는 자율적 시장을 중심으로 한 사익의 극대화라 하겠고, 그 다른 반대의 극에는 사적 재산권과 시장의 기능이 국가의 개입에 의해 극도로 축소된 공적 영역 중심의 사회주의적 체제가 있는 것으로 상정해볼 수 있다. 그러할 때 사익의 극대화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한 극단의 조건에서는, 공익을 실현할 수 있는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 최소화되고 시장자유화의 실현이 극대화된다. 다른 한편의 극에서는 공익이 극대화되는 어떤 조건, 여기에서는 국가의 역할과 아울러 공적 영역이 극대화되고, 사적 시장영역의 최소화와 더불어 재산권을 포함하는 사적 이익의 추구도 어려워진다. 전자를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이 완벽하게 실현된 상황, 그러므로 집합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정당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해체하는 상황이라 할 때, 후자는 사회주의적 상황으로서 개인적 선호를 만족시키고 정당치 못한 정부행위를 제한할 기초를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초점은, 그 어느 쪽이든 양극에 가까이 갈수록 민주주의의 존립기반이 약화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이 양극의 중간지점 어딘가에서 적절한 기반을 가질 때만이 존립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주화 이후 한국의 상황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해게모니에 있어서나 정부정책의 이념적 기반에 있어서나 신자유주의적 극을 향하여 내달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가치는 약화되고, 그 사회적 기반이 크게 위축된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75~76pp.


이명박 정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나?

[대선 투표 결과를 국민들의 우경화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 이러한 해석이 간과하는 것은 투표자의 관점에서 선택의 구조가 되는 정당체제와 경쟁을 구성하는 후보들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특정의 구조를 상정한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난 결과에 불과하거나 투표의 집합적 결과만을 두고 편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투표자들은 자신들의 선호에 맞게 자유롭게 정당과 후보를 선택지에 포함시켜 투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틀(Format)을 형성하는 주어진 정당들과 그 후보들 사이에서만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유권자는 주어진 것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같은 상대적 선택마저도 어려운 경웅 그들은 선택을 거부하고 기권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기권에는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에서 비롯된 소극적인 것도 있겠지만, 주어진 선택의 구조로서의 정당체제를 거부하는 적극적 기권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비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유례없이 낮은 투표율[2007년 대선에서 63%, 37%가 기권]은 후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100p.

그렇다면 한국에서 투표율이 왜 그토록 낮은가의 해답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한국의 정당체제가 전체적으로 보수화함으로써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당대안들이 모두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수화한 것은 투표자들의 이념정향이 아니라, 경쟁의 틀이고 선택의 구조인 정당체제인 것이다.
101p.

민족문제는 한국정치에서 과도하게 정치화되어 이데올로기의 정치, 또는 정치의 이데올로기화를 불러왔다면, 그와는 다르게 노동문제는 과도한 정치화는커녕 거의 정치화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문제에서 탈정치화가 발생하게 된 것은, 민족문제가 불러온 정치의 이데올리기화가 노동문제 영역으로까지 확산된 효과 때문이다. … 냉전이념은 권위주의 시기 현실정치의 변화를 요구하고 이를 시도한 비판세력들을 제압하는 데 사용된 한국 보수파들의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자 자원이었다. 한국의 보수파들이 냉전반공주의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로 유지하면서, 그에 의존하려는 정향 내지 태도는 민주화 이후 상황에서도 권위주의 시기의 그것과 별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 그러나 민족문제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정치가 순전히 보수파들만의 책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 이후 진보파들 역시 보수파의 냉전반공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도덕적인 자원으로서 급진적 민족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105~107pp.

[국가적 차원의 중대한 프로젝트의 추진 과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방식을 띤다. 제일 먼저 문제의 시작으로서 하나의 권력이 수립된다. 그리고 최고결정자는 무엇이 국가이익이며 전체사회를 위한 공익인가를 정의한다. 다음으로 최고결정자는 그를 둘러싼 극소수의 테크노크라트와 함꼐 이를 정책화, 프로그램화하는 결정을 내린다. 여기에서 공익의 내용은 경제발전, 경제성장과 이를 성취하는 속도를 핵심요소로 포함한다. 그 정책의 내용과 결정의 동기는 실제로 국가이익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통치자의 권력확대나 사적인 개인이익의 추구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결정은 어느 날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정부정책의 이름으로 사회에 공표되며, 국가 내지 정부의 모든 기구들은 '국익'의 실현을 위해 동원되고, 그것은 또한 과격하고 급속하게 추진되다. 이를 뒷받침하는 데 있어 그 정책의 정당성을 공중의 여론으로 만드는 주류언론들의 역할 또한 지대하다. 이 과정에서 반대여론이 세력화되고 운동으로 표출될 때, 그것은 국익에 반하는 '정치논리' 또는 사회전체 이익에 반하여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로 비판되며, 자주 이데올로기적 언사를 통해 규탄된다. 이러한 과정은 분명 권위주의하에서 실천되는 전형적인 정책결정 방식이다. 그러나 이 결정방식은 지난 정부의 한미 FTA 협상정책이나 현 정부의 쇠고기수입협상에서 나타난 특징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그것은 권위주의에서는 권력이 어떤 초법적 힘의 사용에 의해 수립되는 반면, 민주주의에서는 선거에 의해 통치자가 선출된다는 것 뿐이다.
114~115pp.


촛불집회가 제기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우리는 민주화 이후 깊숙이 변화된 사회를 한편으로 하고, 보수적 리더십이 갖는 민주주의에 대한 협애한 이해와 구시대적 통치방식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사이에는 위태로울 만큼 커다란 간극을 보게 된다.
139p.

[강력한 대통령이 허약한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도하는 구조적 특성] 그것은 정당-의회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집행부에 아무런 견제력을 갖지 못하고, 정책결정의 이니셔티브를 포함하여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즉 국가기구 내지는 정부구조 내에서 이른바 삼권분립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정부 밖에 존재하며 사회경제적 균열과 갈등으로부터 발생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익과 가치, 요구와 의사들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이익집단을 포함하는 자율적 결사체들의 발전수준 역시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142p.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점에서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143p.

오늘의 촛불집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 평화적 제도로서의 종이돌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촛불집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147p.

이번 촛불집회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되는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요한 전환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들은 그것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그 이념적 호칭과는 별개로, 시민들의 실생활문제와 직결되고 그에 기초한 대안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갖지 못했다. 참여의 기반을 확대한다는 것은 그동안 참여로부터 소외된 사회세력의 대표성을 넓히고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의 폭의 변화는 정책의 내용과 결과를 바꾸는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참여의 폭을 넓히고 이를 통해 제도의 변화를 가져왓어야 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앞선 6월항쟁이 남긴 유산은 그렇게 성공적인 것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고해야 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여의 폭을 확대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21년 전 6월 항쟁이 남긴 긍정적 유산의 목록에 더해질 것이다.
148~149pp.

8월 15일 100회를 맞은 촛불이 숨고르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일이 넘는 촛불은 참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줬습니다. 경쟁 지상주의 교육의 폐해와 먹거리의 안전성 문제, 경찰의 폭력, 의료를 포함한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 비정규직 ….

이 모든 걸 하나의 범주로 아우르긴 쉽지 않을 겁니다. 편의를 위해서 일정한 개념을 제시하자면 그건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총체적 문제제기일 듯 싶네요. 촛불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무래도 방점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부분이겠죠.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대의에 의한 위임권력의 근본적 한계와 한국적 현실을 맨살 그대로 드러냅니다. 물론 순수한 의미에서 대중이 지배자이면서 피지배자인 직접민주주의는 이상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이 과제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와 직접 민주주의적 이상의 실현'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천함에 있어서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기준점으로서 삼아야겠지만 지금 당장 우리가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있어선 '근본적 한계'냐 '한국적 한계'냐는 두 물음 사이에서 길을 잃게 할수도 있습니다.

황해문화 통권 60호(2008년 가을호)는 마침 터져나온 '건국절' 논란을 기회로 이 문제를 우회,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검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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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2008년 가을호 통권 60호


촛불시위가 한참 진행 중이던 올해 6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 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언급은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 대응으로 선회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는데, 막상 논란이 된 것은 과거 냉전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정부의 대응이 아니라 대통령이 언급한 '국가정체성'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였다.
-'상처받은 건국이념 : 공공성' 박태균, '황해문화' 60호 32p.


한홍구는 1948년 정부수립 당시의 헌법이 가졌던 공화국의 이데올로기적 기구로서의 긍정성이 반공주의와 군사주의, 산업화 속에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서 어떻게 변형해 왔는지를 간략하게 역사적으로 살펴봅니다.

박태균은 지금까지 잊혀져왔던 제헌헌법에서의 공공성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좌파는 물론이고 중도세력까지도 제외됐던 제헌의회였지만 당시의 계급투쟁 상황에서 좌파적 요구를 나몰라라 할 수 없었던 우파들은 지금의 뉴라이트가 봤을 땐 '빨갱이'나 주장했음직이 분명한 내용을 제헌헌법에 담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이익균점권'이 헌법에 담기고 15조의 재산권 보장은 '공공복리에 적합'한 한도 내에서만 인정됐었습니다. 물론 이후 여러번의 헌법 개정을 통해 이 부분들은 삭제됐죠.

신용옥은 '대한민국 헌법의 경제사상'에서 제헌헌법의 공공성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과 비교하며 그 의의와 한계를 보다 자세히 검토합니다. 특히 49년 이후 한국전쟁과 반공주의의 득세, 대자본 중심의 산업화가 어떻게 제헌헌법 경제조항의 '사회국가적 지향'을 좌절시켜왔는지를 밝힙니다.

신용옥의 글 앞에 있는 이완범의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은 '대한'이라는 국호가 어디서 연유했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히 이승만이 '대한'이란 국호를 헌법 제정 당시 이후에 더 많은 논의를 통해 다시 결정하자고 했음에도 하위법에 의해 국호에 대한 논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남북한의 통일을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한반도의 과제로 놓을 때 국호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근대 국가는 국민과의 관계에서 아래로부터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동의의 과정 또한 중요합니다. 봉건적 국가에서 하층민들에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국가에 대한 일체감, 민족정신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서의 국민적 동원, 또는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같은 전쟁과 같은 수준의 국민적 동원을 위해선 그만큼 국민적 '동의'가 절실히 필요하기도 합니다. 김영미는 이러한 국가와 국민의 관계 맺기에 주목합니다. 국민의 국가정체성의 내면화와 동의에는 그만큼의 통제와 강제 또한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 수립 당시 지배자들에게 일제시대 주민에 대한 통제장치는 매우 유용한 자산임에 틀림 없었죠. '대한민국의 수립과 국민의 재구성'에선 일제 시대 주민의 동원과 관리를 위한 '호적제'와 '기류제'가 해방 후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의 재구성'에 이용됐는지를 밝힙니다.

특집을 마무리하는 이광일의 '제왕적 대통령의 기원'은 애초의 우회를 돌아 보다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의 한국적 한계를 들여다봅니다. 아주 짧은 대한민국 정치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이광일의 글을 통해 지금까지의 대통령들이 어떻게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들조차도 시시때때로 해체하거나 무력화시키며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왔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반공주의'와 '산업화'를 이념으로 강력한 (군대를 포함한) 경찰기구를 통해 유지되어 온 제왕적 대통령제는 민주화시대를 맞아 신자유주의적 이념과 결합되며 그 새로운 장을 열게되면서 우리에게 그에 걸맞는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을 얘기하며 이 특집은 마무리를 짓습니다.

황해문화는 이 외에도 '새로운 주체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두개의 글을 통해 이번 촛불시위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검토를 시도합니다. 전효관의 글은 촛불세대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차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미 10년도 더 전, 90년대 초반의 '신세대론'에 비해서 그 어떤 발전된 논지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에 반해 김진석의 글은 제목에서처럼 '조금 삐딱하'게 촛불시위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번 촛불시위의 주체성이 어떻든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훌륭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 외에도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을 되돌아보며 '문학의 종언'에 대해 고민하는 짧은 글이 눈에 띕니다. 서평에서는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의 저자 박세길의 신작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에 대한 김정한의 비판적 읽기가 도움이 됐습니다.

촛불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어지러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시즌2를 기대하며 더 흥겹게 촛불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자 한다면 이번 황해문화 통권 60호가 작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 창작과 비평 가을호(141호)에서도 촛불이 특집으로 다뤄졌습니다. '촛불항쟁'이란 표현을 쓰는 데서 보이 듯 창비의 입장은 황해문화 가을호의 전효관의 글과 비슷한 위치에 서서 촛불을 바라봅니다. 세상을 바꿔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의 낙관주의와 이성의 비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행동하는 데 있어서 낙관주의는 과하면 과할 수록 좋다는게 제 생각입니다만 행동하기 전, 또는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우리의 비판적 이성은 가능한 비관적으로 상황을 검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효관과 창작과 비평류의 촛불에 대한 무비판적 찬가는 무분별한 '반지성주의'를 확산시킬 뿐이라고 봅니다.

2008.08.20 10:29

촛불 그 65일의 기록|경향닷컴 촛불팀 2008.08.20 10:29

경향신문에서 5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65일간의 촛불시위의 기록을 담은 책을 내놨습니다.

촛불 그 65일의 기록  경향닷컴 촛불팀|경향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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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촛불시위는 그 후 8월 15일까지 100일 간 타올랐죠. 16일에도 여전히 촛불을 드신 분들도 계시고 강남에서는 어제도 여전히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이 책의 첫 번째 한계는 7월 5일 이후의 상황을 담지 못했다는 겁니다. 물론 책의 제작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기도 했을 겁니다. 촛불이 다 꺼지길 기다려야 한다면 2MB가 물러날 때까지 미뤄야 했을지도 모르죠.

두 번째 한계는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들로만 책을 만들었다는 점이죠. 물론 아고라의 몇몇 글들도 인용되긴 했지만 큰 분량은 아닙니다. 즉 이 책은 촛불이 타오르는 와중에 신문 지면을 벗어나서 진행된 다양한 토론과 논쟁을 온전히 담지 못했다는 거죠. 아고라 뿐만 아니라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토론과 논쟁을 이끌었던 MBC 100분 토론을 비롯해서 의제의 확장을 둘러싼 이견, 가두 진출을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들이 그 외관만 어렴풋이 비춰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개인이 땀흘려가며 가위로 오리고, 검색을 통해 펌질 해야만 했던 기사들을 한 번에 모아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당장에 100여일 간의 촛불시위에 대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평가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그 생생한 기록, 목소리들일 것입니다. '촛불 그 65일의 기록'이 현재의 역사를 기록하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 무엇보다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촛불에 대한 책이 몇 권 나왔지만 '기록'이란 측면에선 이 책이 첫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목소리들이 공식적 기록으로 출간되길 바랍니다.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정보가 쌓이는 인터넷에서 기록은 쉽게 잊혀지기도 합니다. 지금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이 잊혀질 정보들을 모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곧 뜨겁게 타오를 촛불을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일은 우리가 어떻게 촛불을 밝히고 넓혀왔는지, 저들의 대응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사실'의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숨 고르는 국면. 육체적 휴식과 함께 얇은 이 책으로 우리의 걸음걸음을 다시 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경향신문 기사 보러가기(클릭!)

전투경찰과 대치 상황에서 시위대는 흔히 그들도 우리의 아들이고 형제고 친구라며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폭력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하곤 한다. 전경과 시위대로 다시 만난 친구와 연인의 사연들은 알게모르게 신화와 같이 이어지고 있고 만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마도 그만큼, 흔치 않은 건 사실이겠지만, 현실 가능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내 선배들 중에도 전투경찰로 근무한 경우가 몇몇 있다. 물론 그 선배와 내가 만난 적은 없지만.

어제(28일) 밤, 경찰들의 폭력이 폭우 속에서 자행되던 그 시간, 전경들이 말 그대로 자신들이 인간의 자식이 아닌 야수들임을 증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위 링크의 경향신문 기사를 읽어보면 된다. 그 부분만 인용해보면 이렇다.

김경숙씨(47.여)의 경우는 너무 허탈하다. 아들이 걱정돼 집회 현장에 나왔다. 김씨의 아들은 전경(상경)이다. 집회 현장에서 떨어진 인도에 서 있었는데, 진압 경찰이 느닷없이 달려오더니 군홧발로 가슴을 차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후 경찰은 김씨의 머리를 방패로 찍고 온몸을 밟았다고 김씨는 전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폭행을 한 전경들이 그 어머니가 같은 동료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때리고 위협하는 시위대가 바로 그들의 어머니고 가족이고 친구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건이다.

그들을 여전히 우리의 친구로, 가족으로 인정해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은 이미 이명박 정권과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길들여진 야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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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밤 종로1가 광화문우체국 앞 거리에서 경찰의 강경 진압에 맞서 팔짱을 끼고 있는 시민들. [연합뉴스]

어청수(라 쓰고 개색희라고 읽는)가 '80년대식 진압' 운운하더니 최루탄만 안나왔지 정말 그만큼 하는군요. 시청쪽 상황을 들어보니... 아예 작정하고 뒷 골목(조선일보 편집국 건물이 있는)쪽으로 진압 경찰을 투입했더군요. 제가 있던 교보 앞쪽은 9시부터인가 계속 쉬지 않고 물을 뿌려대더군요. 멀리서도 살수 소리가 들릴정도로 강한 압력으로 뿌려댔습니다. 계속 의료진을 부르는 소리가 이어지고...

아마도 그들은 이 상황에서 양보를 하면 앞으로 남은 4년 몇 개월을 식물 대통령으로 보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두려워 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과 약간 거리를 두던 우파 세력들도 이명박이 무너지면 그들이 그토록 바랐던 10년만의 보수우파의 '화려한 귀환' 자체가 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재결집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지지율의 부분적 상승은 이 때문이겠죠.

우리도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촛불시위가 패배로 끝날 경우,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그들만의 정책에 대한 대중의 저항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대처할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민주노총이 더 빨리 이 상황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선언' 이상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깃발을 들고 참여한 노조의 숫자는 늘었지만 여전히 촛불시위의 다수는 평범한 시민들일 뿐입니다. 스스로 좌파고 진보진영이라고 칭하던 이들이 지금의 상황에 굼뜨게 행동한다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음으로 지금 스스로를 조직하고 있는 네티즌들도 우리의 목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대책위는 170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실만한 분은 다 아시겠지만, 대부분은 이름만 걸어놓은 상태고 실질적 책임은 몇몇 소수 단체에게만 가 있습니다.(전 이 단체들을 탓 하려는 건 아닙니다.) 많은 수의 시민을 실질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하고 있는 네티즌들, 디피를 비롯해서 엠엘비파크, 소울드레서, 마이클럽, 82쿡, 화장빨, 쌍코, 아고라, 안티이명박카페 등은 지금의 촛불시위의 구체적인 진행에 개입하질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참여하고 있는 시위의 행동과 방향에 대해서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부조리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 때문에 촛불시위 초기보다는 상당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대책위에 대한 합리적인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방향을 우리 스스로가 참여해서 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입니다. 가능하면 여러 인터넷 카페ㆍ모임들과 함께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대책위에 요구 할 수 있다면 좋겠죠. 지난 국민대토론회에서 아고라의 '권태로운 창'(나명수)님이 이미 제안했던 바이기도 합니다.(정확하게는 새로운 대책위를 만들자고 제안했죠)

마지막으로 점점 강도를 높여가는 경찰의 폭력 앞에 저 스스로의 감정도 격앙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가장 큰 무기는 우리 스스로의 참여 바로 그 자체입니다. 90년대 후반 운동의 궤적을 살펴봤을 때 정부의 폭력에 대한 군사적 대응은 우리의 승리에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그것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일본과 독일의 적군파,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의 역사죠. 전 '비폭력'을 도전할 수 없는 원칙적 가치로 생각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동이 '군사적 폭력'의 형태를 띄어야만 할 때라도 그것은 대중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베트남에서 베트콩과 호치민의 북베트남 군대가 그랬듯이요.

경찰의 발작적인 폭력은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2008.06.28 10:51

[민중가요] 흔들리지 않게 노래2008.06.28 10:51

최근 촛불시위에서 '흔들리지 않게'가 심심찮게 불려지더군요. 제가 운동에 참여한 90년대 중반 이후엔 많이 불려지진 않았어요.

'흔들리지 않게'라는 자기 다짐은 한편 자신의 흔들림을 전제로 한 것이겠죠. 그래서 사실 이 노래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어요. 누구나가 강철과 같은 투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그럴 필요도 없고요. 자신과 가족의 건강권을 위해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느끼는 불안감, 없을 수 없겠죠. 이명박의 경비견 어청수는 연일 강경진압을 얘기하면서 심지어 '80년대 처럼' 해보고 싶다고도 말할 정도니까요. 그래서 그럴까요. 90년대 이후 잘 불려지지 않던 노래가 다시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널리 불려지는 것은.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아마도 안치환이 부른 버전일 겁니다. 항상 그렇듯 그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는 약간 부담스럽기도 해요. 이 노래 '흔들리지 않게'의 정서는 그런 건 아니라고 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흔들리지 않게'는 영화 '별빛 속으로'에서 김민선이 부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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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으로  황규덕 감독|정경호ㆍ차수연ㆍ김민선|2007

안타깝게도 '별빛 속으로'의 OST는 나오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DVD에서라도 음원을 추출할 수 있으면 좋겠는 데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라 다음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어제(27일) 촛불시위에선 대교어린이TV 합창단의 어린이들이 부른 노래를 틀어주더군요. 아이들의 목소리가 김민선의 목소리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DVD를 다시 보니 그렇진 않더라고요. 제가 느낄 때 가장 비슷한 정서를 보여준 건 민중문화운동연합의 '해방의 노래' 앨범에 실려 있는 것이더군요.

아쉽지만 민중문화운동연합의 '흔들리지 않게'를 올려봅니다.


흔들리지 않게

1.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2.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

3.
민주 올 때까지 민주 외쳐라
민주 올 때까지 민주 외쳐라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

4.
해방 올 때까지 해방 외쳐라
해방 올 때까지 해방 외쳐라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

5.
통일 올 때까지 통일 외쳐라
통일 올 때까지 통일 외쳐라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후렴)

Posted by 때때로
2008.06.25 10:32

대중이라는 핑계 쟁점2008.06.25 10:32

어제(24일) 광우병국민대책위에서 주최한 두 번째 국민대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어제의 토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시민단체와 좌파들보다 '네티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급진적이라는 사실이에요.

나명수씨와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한 남성 분은 어차피 쇠고기고시 강행 할 것 이참에 빨리 해버리고 우린 정권 퇴진 투쟁에 나서자... 이런 식으로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나요.

역시나 토론회장에서 청중들은 나명수씨와 고려대 김지윤 학생이 적극적으로 정권퇴진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가장 호응이 컸던 것 같아요. 그에 반해 박진섭 생태지평 부소장은 정권퇴진은 불가능하다, 이제 불매운동 등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야유를 받곤 했죠. 그러자 박 소장은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대중의 대다수는 정권 퇴진을 바라지 않는다"고 주장했죠.

흠...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토론에서 근거를 '대중'에게 돌리는 것은 참 비겁한 짓이라고 봐요.

이런 류의 주장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보수우파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말하는 '침묵하는 다수'라는 것이죠. 사실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친기업적이고 친미적인 정책을 동의할 수도 있죠. 하지만 이들 보수우파에게 중요한 것은 그 다수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다수의 침묵' 자체죠. 현재의 상태, 즉 자신들이 정치ㆍ경제적으로 강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거나 그들에게 더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목표라고 할 때 우파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행동일지라도 대중의 적극성보다 수동성이 그들에게 더 매력적이죠.(파시스트의 적극적인 대중 동원은 다른 기회에 얘기하죠.)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와 투표, 각종 설문조사와 같은 통계적 방법에 의해 대중의 뜻을 읽어내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죠.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좌파와 자유주의적 좌파 모두는 이런 여러 시도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곤 해요. 하지만 대중 전체의 뜻을 대표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봐요. 솔직히 말해서 촛불시위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100만 명의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 반대해서 거리로 나설 것이라는 것을 그 어떤 설문조사에서 발견할 수 있었나요? 4월 총선 뒤 한겨레21은 아파트에 굴복한 386이라는 기사를 특집으로 다뤘었죠.

물론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전 다중의 집단지성에 조건없는 찬양만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바로 그 다중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한나라당을 여당으로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어제 토론에서 패널로 나선 사람들은 나름 대중의 다양한 의지를 각자 대표해서 나선 사람들이겠죠. 그렇다면 대중 전체의 뜻이 이러이러하다는 식으로 자신을 '전체의 대표'로 꾸미기 보다는 자신이 대표하는 의견을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토론의 자세라고 봅니다. 자신의 의견을 대중의 뜻으로 돌리는 건 비겁한 핑계를 대는 것일 뿐이죠.

2008.06.24 23:30

[스크랩]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2008.06.24 23:30

촛불시위는 매우 온건하게 시작됐습니다. 그저 청계광장에 앉아서 촛불을 밝혔을 뿐이었죠. 얼마나 엉성했냐 하면 혹시라도 이명박의 심기가 상할까봐 종로 경찰서장이 집시법에도 없는 내용을 갖고 초기 촛불시위 주최자들을 협박했었고 그게 먹혀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여차저차해서 촛불시위는 계속됐고 결정적 고비 때마다 조금씩 행동의 수위를 높여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된 구호 중 하나는 '비폭력'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디까지를 비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매우 난감한 문제입니다. 사실 초창기만 하더라도 경찰 버스를 끌어내는 일, 그 위에 올라가는 일 자체를 '폭력'이라고 했었죠. 지금에 와서 많은 시민들은 그것은 퍼포먼스고 '평화적인 한도' 내에서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는 '비폭력 저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폭력과 비폭력을 도덕적 잣대-단 한번도 합리적 의심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점에서-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시위에서 우리의 비폭력적 저항에 대해 많은 것을 되돌아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책이 있습니다. 이미 지난해에 출간됐지만 지금 읽기에 딱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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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김은주 옮김|산눈

조금 길지만 아래 이 책의 머리말을 옮겨놨습니다.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물론 당연하게도 책 전체를 다 읽으면 더 좋겠죠.


그런데,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억압의 토대가 되는 규칙을 만들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게임에 가까이 가지 말라.
그들의 규칙으로 게임을 하지 말라!
이것은 새로운 게임이며 우리가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은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무엇인가가 변하고 있음을.
-맬컴 엑스

폭력의 철학이라는 제목을 내걸며 이런 말로 시작해도 될까 싶지만 폭력과 비폭력을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언뜻 이 기준이 매우 명쾌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선악의 가치를 명백히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런 명확한 이분법이야말로 우리의 감수성을 편협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 비폭력이라는 범주는 너무나도 다양한 힘으로 충만해 있는 이 세계를 해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한 단어가 아닐까? 예를 들어 일본에서 말하는 '게바(ゲバ)'-최근에는 거의 쓰이지도 않지만-의 어원은 독일어의 게발트(Gerwalt)이다. 발터 벤야민(Qalter Benjamin)이 쓴 『폭력비판론』의 원제도 'Kritik der Gewalt'이다. 과거 일본 학생운동에서는 국가에 의한 물리적 힘의 행사와 자신들의 대항적 힘의 행사를 구별하기 위해서 전자를 폭력, 후자를 게발트로 표현한 적도 있었다. 여기엔 힘의 행사를 질적으로 구분하고자 하는 비판적 의도가 있다. 게발트는 영어의 violence, 한자로 暴力이라는 의미와 단순히 등치한다고는 볼 수 없다. 게발트는 일테면 영어의 violence와 force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violence나 게발트 모두 라틴어 vir 혹은 vis를 어원으로 한다. 전자는 남자, 남편, 용사, 병사 후자는 힘, 무력 폭력 등을 뜻하는데 게발트는 violence와 달리 어떤 모순까지 내포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지배하다. 관리, 감독하다'의 뜻을 지닌 walten이란 동사에서 파생한 게발트는 지배 혹은 통치의 유지, 정당한 강제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독일어에서는 국가권력, 권력분립이라고 할 때의 '권력'에 Gewalt를 쓰며, 'gesetzgebende Gewalt'를 번역하면 '입법권'이 된다. 한편 영어의 violence는 외부로부터의 침해나 파괴라는 느낌이 강하다. 라틴어의 violentia에는 '난폭'이라는 의미가 있다. 지배의 유지나 정당한 강제력이라는 표현에는 오히려 force가 적당할 것이다.
게발트라는 말에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힘의 행사가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명백히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와 비폭력이라고 말하는 상태 사이에 아주 광범위한 회색지대가 존재하며 또한 거기에는 좋은가 나쁜가, 혹은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는 가치부여와 관련된 해석상의 게임이 난무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 영역에서는 어떤 행동과 어떤 사건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늘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몇 년 전 맥도날드의 '해체'로 유명해진 프랑스 농민들의 행동은 '비폭력 직접행동'의 일환으로서의 치밀하게 계획된 힘의 행사였으나 당시 행정당국이나 비판적 미디어로부터 적어도 초기에는 '습격'이라는 폭력적 활동으로서 취급되고 유포되었다.
이처럼 폭력과 게발트 식의 구분은 국가가 '부정한' 물리적 힘의 행사를 합법성이나 정당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자신에게 향하는 국가의 폭력을 다시 국가로 되돌리는 대항적 폭력 행사를 게발트로 부름으로써 힘을 둘러싼 국가의 '폭력의 정의(定義)에 대한 독점'에 대항하며 그와는 다른 게임의 장을 열고자 하는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moral)은 누구라도 말할 수 있으며 실제로 여기저기 흘러넘치는 구호다. 부시 미 대통령도, 핵무장을 주장하는 일본의 보수 정치가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오히려 '폭력은 안 된다'고 외치면서 더 큰 폭력의 배치 및 대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이런 사람들이다. 사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말이 폭력에 대해 사람들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높이기 위해서만 쓰여 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 말은 처음부터 역설을 잉태하고 있다. 폭력은 안 된다, 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이러한 논리를 '폭력은 안 된다'라는 구호가 결코 배제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종종(특히 오늘날)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폭력을 행사할 지도 모르는 자'로까지 확대되어 현실적으로는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곳에 폭력이 발생할 것 같다는 이유로 폭력이 행사되는 기묘한 사태마저 생겨나고 있다. 그곳에서는 실제로 '폭력은 안 된다'는 구호를 부르짖는 자들이 행사하는 폭력만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이 같은 도덕적 구호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폭력을 물리칠 수 있는 요소를 결코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잔인한 폭력적 요소를 농후하게 잉태하고 있는 경우조차 있다. 오늘날 널리 유통되고 있는 이런 설교적인 구호가 노리는 것은 이 세계에 충만해 있는 다양한 힘을 감시하고 해체하는 능력을 짓밟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감각을 마모 당하고 있다.
폭력으로 불리는 행위는 이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번번이 비난받고 있는 폭력, 이를테면 점령지에 탱크를 몰고 들어가 느닷없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살해하는 강대한 이스라엘군의 폭력과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거나 수류탄을 몸에 칭칭 감고 경찰 앞에서 자폭하는 팔레스타인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의 폭력이 과연 똑같은 힘일까? 미군의 데이지 커터(Daisy Cutter, 베트남 전쟁에 처음 사용된 제초기라는 뜻의 거대폭탄-옮긴이)에 의한 파괴와 아메리카의 게토(Ghetto, 주로 흑인이나 빈곤층이 거주하는 지역-옮긴이)에서 자동소총을 휘두르는 흑인 폭력단의 폭력이 똑같은 힘일까?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서 비밀경찰을 고용해 노동조합 활동가를 살해하는 폭력과 마치 사기꾼 같은 기업 행태에 항의하며 자폭하는 한 노동자의 폭력 역시 똑같은 힘일까? 이제 폭력은 민족분쟁 중의 강간, 선진국에서의 유아학대,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 집단 따돌림 그리고 엄청난 수의 자살과 사형 등 다양한 형태로 다양하게 행사되며 이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것들을 모조리 폭력이니까 똑같은 것으로 취급해버리거나 혹은 국가에 의해 정당화된 폭력과 단지 범죄일 뿐인 폭력으로 간단히 재단해 버리기에는 적어도 뭔가 망설임이 생기지는 않는가?
이런 폭력 중 어떤 것이 '올바른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깨끗한 원폭'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조금 믿기 어렵지만 과거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소련은 평화세력이니까 그들의 원폭은 올바르다는 식의 발상은 폭력을 해체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힘에 대한 비판과 해체는 교조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시도되고 있는 비판은 폭력을 비폭력주의의 관점에서 단죄하는 것이 아닌 이른바 칸트적인 비판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비판'은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가 아니다. 독일어의 Kritik는 어원적으로 krinein, 즉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폭력을 비판한다는 말은-폭력의 근절이라는 이념에 입각하면서도-폭력 자체의 내부에 어떤 구분 선을 긋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군사력을 살펴봐도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는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는 폭력수단의 독점과 압도적인 힘의 비대칭 속에 놓여있다. 아메리카와 그와 유사한 폭력수단을 보유한 국가들 사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잇으며 나아가 그러한 폭력수단을-정도야 어떻든-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행위자와 이른바 '민중' 사이의 힘과 압도적 불균형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맹렬한 기세로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이 유포되고 있는 중이다. 테러리스트의 비애를 노래하던 시인도 '총을 들라!'고 외치던 가수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이라는 사태에 직면해도 이를 규탄하는 격렬한 선동은 거리에서 사라지고 있다. 분노와 힘을 과시하는 시위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폭력적'인 것에는 이제 진절머리 난다고 말한다. 그런 한편으로 모든 범죄에 대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사형제를 반대하는 의견이 점점 더 소수파로 전락하고 있으며 '평화주의'라는 이상을 내던지고 핵무장을 노리며 군대를 증강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커지고 있다. 동시에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긍정하는 의견까지 점점 활개 치며 명백히 폭력을 긍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이율배반적 사태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이야말로 도리어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압도적인 비대칭성 속에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비대화시키는 하나의 동력이다. 예를 들어서 2001년 9월 11일, 이른바 동시다발 테러와 이후의 미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대해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누가 봐도 '올바른' 구호가 등장했다. 분명하게 '테러'는 찬성, '전쟁'은 반대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테러'는 반대, '전쟁'에는 찬성이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다. 테러도 전쟁도 폭력은 모두 다 싫다는 이 구호는 뭔가 석연치 않다. 이 책은 그런 폭력과 비폭력 또는 전쟁과 평화로 딲 잘라 구분되는 범주 앞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며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쓴 글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